#잭리아리? 아리잭리? 염두해두고 쓴 건 잭리아리 #어떤 이유인진 몰라도 잭리마와 아리마가 만났다. #캐해석 흔들림 주의
첫 숨
Y A G I
“키쇼.”
그렇지. 당신은 나의 이름을 부르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키쇼, 하고 내 이름을 부를 때마다 당신의 눈빛은 항상 이상하게 슬퍼졌다. 나는 도무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당신과 내가 살아온 시간이 너무 달라서 그런 걸지도 몰랐다. 당신이 나의 이름을 그렇게 불러주면 나는 당신을 따라서 당신의 이름을 말했다.
“아리마.”
내 것보다 조금 두터워진 안경알이 천장의 조명을 하얗게 반사시켰다. 내게 있어서 당신은 아리마 키쇼라기 보다는 그저 아리마였다. 키쇼라는 이름은 내 것이었고, 아리마라는 성은 당신의 것이었다. 이 세계에서 아리마라는 성씨를, 저승사자라는 닉네임을 가져야 할 것은 내가 아니라 당신이었다. 뭐, 나보다는 당신이 훨씬 더 많은 숫자의 구울을 저승으로 보냈을 것이 분명하니, 나는 그 타이틀을 유감없이 당신에게 양보하기로 했다.
물론 원래부터 그 타이틀에 연연해한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우리는 생각보다 꽤 유연하게 이 상황을 대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 일어난 이유 같은 것은 우리에게 크게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제 어떻게 해야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걸 결정하는 것 역시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나는 아리마, 당신의 집에서 기거하기로 했다. 자기 자신과 함께 산다는 것은 퍽 편리한 일이었다. 사소한 생활 습관도, 생체 시계도 거의 비슷한 우리들은 처음부터 함께 살았던 것처럼 같은 시각에 일어나 나란히 거울을 보며 양치를 하고, 각자 할 일을 해나갔다. 내가 이 세계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당신이 외출한 뒤에 텅 빈 당신의 침대에 엎드려 친숙한 당신의 냄새를 맡는 것 정도밖에 없었지만.
나는 이것을 뜻밖의 휴가로 여기기로 했다. 바라지도 않았던 휴가라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지만, 별 수 있으랴. 나는 종종 당신의 집 근처를 산책했다. 조용하고 깔끔한 동네였다. 당신에게 잘 어울리는 동네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 뒤에는 나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동네라는 생각도 함께 따라왔다.
당신은 집이 있구나. 한 곳에 정착해서 살아가는구나. 매일 아침 똑같은 풍경을 보며 눈을 뜨고 똑같은 거리를 걸어 퇴근하는구나. 나는 그것이 꽤나 유감스러웠다. 나의 미래에 대해서 생각을 그렇게 많이 해본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내가 생각했던 나의 미래는 이렇지 않았다. 어쩌면, 나이가 들면 사람은 이렇게 어딘가에 정착하게 되어버리는 걸지도 몰랐다. 지쳐버리니까.
아리마, 키쇼. 우리는 그 피로감이 우리의 삶을 더욱 빨리 침식해버리는 부류의 인간들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인간은 아니지만. 어쨌든 그런 존재들이었다. 아리마 당신은 그렇게 물러져 버린 걸까. 그런 걸지도 몰랐다. 나이가 든 자신의 모습을 바라본다는 것은 생각보다 더욱 서글픈 일이었다.
“아리마.”
어느 날은 침대에 나란히 누워 당신의 이름을 나직하게 불러보았다. 예전에 잠들어버린 줄 알았던 당신이 응, 하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는 무늬도 없는 천장을 멀거니 바라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일 하는 거, 아직도 후회하지 않아?”
“…별로.”
“아리마 당신의 삶은, 나의 삶과 얼마나 비슷해?”
“십 몇 년의 세월만큼, 달라져 있어.”
“나도 변할 수 있는 존재였구나.”
“슬프게도. 살아있는 이상 그렇게 되어버려.”
내 오른쪽에 누워있던 당신이 몸을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침구가 그의 몸에 닿아 서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도 당신을 따라 몸을 돌려 당신을 바라보았다. 당신의 눈부신 하얀 머리카락이, 힘없이 당신의 이마에 늘어져 있었다. 나는 손을 뻗어 그 머리카락을 당신의 귀 뒤로 넘겨주었다. 그러자 당신은 희미하게 웃었다.
“아직도 나를 싫어해?”
“키쇼, 너는 나를 싫어해?”
“잘 모르겠는걸. 그냥 내가 아닌 것만 같아.”
“확실히, 너와 나는 다르겠지. 그나저나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몇 가지 남겨둔 것이 있는데, 그것이 키쇼 네게 기쁜 선물이 될 수 있으면 좋겠네.”
“…아리마 당신은, 역시 나와는 다르구나.”
“나이를 먹으면서 인간성이란 걸 조금 배워봤지.”
나는 당신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던 손을 그대로 아래로 내려 당신의 뺨을 쓰다듬었다. 자신의 체온이 느껴졌다. 나는 나보다 조금 더 늙어있는 심장 박동과 조금 더 어두워져 있는 당신의 눈동자를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내가 이렇게 변했다는 것이 다시금 슬퍼지기 시작했다. 나는 바뀌고 싶지 않았는데. 무언가를 잃지 않으려면 무언가를 갖지 않는 수밖에는 없었다. 내 삶이란 건 처음부터 그랬다. 내 목숨조차 내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이왕 아무것도 갖지 못하고 시작한 삶이었으니, 끝까지 미련조차 남기지 않자고 결심했건만.
미래의 나는 무언가를 남기려하고 있었다. 인간이란 건, 생존해 있다는 건 그런 거려나. 빼앗기만 하는 내 삶은 내가 끔찍하게 경멸하는 것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무언가를 남기고 싶다는 말은 아니었다.
나는 당신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당신이 마른 숨을 내쉬는 것이 느껴졌다.
“아리마. 나는 역시 당신이 싫어.”
“그럴 것 같았어.”
당신은 그저 태연했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그런 건가 싶었다. 나는 그저 끝내고 싶었다. 모든 것을 끝내고 싶었어. 나는 먼 미래에 내가 갖게 될, 사랑하게 될 이름 모를 것들을 두려워하며 그날 밤을 지새웠다.
“저기, 같이 씻을래?”
“웬일로.”
당신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몸을 틀어 공간을 만들었다. 나는 고개를 살짝 숙여 당신의 팔 밑으로 들어갔다. 아직까지는 말라있는 욕실 바닥이 내 발을 차갑게 식히고 있었다. 나는 옷을 벗기 전에 먼저 욕조에 뜨거운 물을 받았다. 욕실에 훈기가 돌기 시작해서야 우리는 거의 동시에 옷을 벗기 시작했다.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러는 거야?”
“그냥, 궁금해서. 내가 어떻게 자랐는지. 사실은 생각보다 크게 자라서… 조금 놀랐달까.”
“마음에는 들어?”
“글쎄. 싫다고는 안 할게.”
남자 두 명이 들어가도 넉넉한 크기의 욕조였다. 우리는 서로를 마주보고 앉았고, 때문에 당신의 발목과 내 발목이 서로 맞닿았다. 나는 당신 몸의 크고 작은 흉터들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눈에 익숙한 것이 훨씬 많았다. 당신 역시 내 몸의 흉터들을 눈으로 훑고 있었다. 그러곤 당신은 또 예의 슬픈 눈빛을 지었다.
당신은 뜬금없이 입을 열어 뜻밖의 주제를 꺼냈다.
“나를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어.”
“설마 결혼한 거야?”
“아니. 그냥… 형식상의 아버지. 사실은 너보다 나이가 많은데.”
“그거 정말 안 궁금한 사실인 걸…….”
당신은 그 형식상의 ‘아들’을 떠올리고 있는지 아주 엷고 부서지기 쉬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당신은 물에 젖어 당신의 관자놀이에 착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나도 당신을 따라 내 머리카락을 무심코 매만졌다.
나는 당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 시답잖은 가족 놀이를 하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물이 찰방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몸을 일으켜 당신의 다리 사이로 움직였다. 의외로 당신은 나를 거부하지 않았다. 그저 무언가 애틋한 것을 바라보듯 나를 지켜볼 뿐이었다.
“아리마, 나는 당신을 잘… 모르겠어. 나 자신인데 말이야.”
“언젠가 이해하는 날이 올 거야, 키쇼.”
당신의 커다란 손이 내 목덜미에 닿았다. 나는 당신의 흉터들을 손으로 짚었다. 당신의 맨살은 내 생각보다 훨씬 더 연약했다. 손톱을 박아 넣으면 아파 보이는 상처가 생길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것은 당신의 살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내 살이기도 했다.
부정하고 싶을 정도로, 당신의 입술은 제법 따뜻하고 푹신했다.
‥ ‥ ‥
나는 아리마, 당신의 뒤를 따라 많은 것을 남기게 될 것이 분명했다. 내가 유약한 인간이기 때문에, 살아있는 생물이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이 나의 운명이기 때문은 더더욱 아니었다. 이유가 있다면, 내가 키쇼이기 때문에. 아리마 키쇼이기 때문에, 그럴 수 있는 것이었다.
기타 케이스의 단단한 끈을 엄지로 매만졌다. 불현 듯 당신이 나를 찾아왔던 것처럼, 당신은 그렇게 떠나갔다. 지금껏 아무것도 남겨오지 않은 나의 삶에서 내가 가장 먼저 남긴 것은, 당신의 입술 감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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