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아주 가벼운 섹스 언급이 있음

 

 

 

Y A G I

 

우이 코오리는 지난 밤, 자신의 첫 섹스를 후회하고 있었다. 글자들이 흰 종이 위에서 정신없이 흩어지고 있었다. 전날 밤을 기억하고 싶지 않은데, 자꾸 그날의 상황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아마 그것의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의 전 섹스 상대이자 현 상사인 후루타 니무라가 자신의 앞에 앉아있기 때문이었을 터였다.

구울들의 구축 소식과 그들의 새로운 거점들에 대한 정보가 속속히 들어오고 있었다. 넓은 회의실에는 후루타와 우이 단 두 사람밖에 없었다. 후루타는 능숙하게 서류들을 정리하며, 우이 자신은 어떻게 집계되는지 알 수 없는 구울 섬멸률을 뜻 모를 리듬에 맞춰 흥얼거리고 있었다.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요?”

아니……. 아무것도.”

시선을 느낀 후루타가 우이를 바라보며 예의 눈웃음을 지었다. 우이는 후루타가 아무렇지도 않아 보여서 더욱 속이 쓰렸다. 마치 지난 밤을 기억하는 것은 오직 자신뿐인 것 같아서. 그런 것을 신경 쓴다는 것도 솔직히 말하면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지만.

오늘도 후루타는 제 몸에 꼭 맞는 검은 정장을 입고 있었다. 우이는 탁, 소리가 나도록 서류 뭉치를 회의실의 커다란 테이블에 올려두었다. 우이는 후루타의 시선이 자신에게 옮겨오는 것을 느꼈다.

여기서 담배 피워도 괜찮지?”

우이 씨. 담배를 그렇게 많이 피우면 일찍 죽어요.”

네가 언제부터 나를 걱정했다고.”

어라, 저는 항상 우이 씨를 걱정했답니다.”

걱정은. 이용해 먹을 생각밖에 없으면서.”

이런 들켰나요.”

담배를 피우면 안 된다는 말은 하지 않아서, 우이는 창문을 열지도 않고 자리에 앉아 담배에 불을 붙였다. 하필이면 담배도 이번이 마지막이었다. 우이는 반쯤은 신경질적으로 빈 담뱃갑을 구겼다. 희미한 연기 냄새가 그의 코끝을 스쳤다. 모든 호흡 기관이 담배 연기로 가득 차는 느낌. 객관적으로 봤을 때 이것이 좋은 느낌이라고 할 수는 없을지도 모른다고 우이는 생각했지만 어쨌든 우이는 이것이 없으면 삶을 견디기가 힘든 인간이었다.

우이는 하얀 연기를 뱉으며 몸을 의자에 완전히 기대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후루타가 서류를 넘기는지 종이끼리 스치며 서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가 어제 침대에서 들었던 그의 셔츠가 구겨지는 소리랑 비슷한 것만 같아 제 손끝에 걸려있는 담배를 입으로 가져가려다가 무심코 움찔, 몸을 멈추었다.

지난밤 자신은 완벽히 제정신이었다. 술에 취해 있지도, 자신을 괴롭히는 다른 감정에 취해있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는 반쯤 흘리듯 후루타에게 먼저 섹스를 권했고, 후루타는 당연하다는 듯이 그것을 거절하지 않았다.

그때는 그냥, 그러고 싶었다. 어쩌면 살아있는 것의 체온이 필요한 밤이었을지도 모른다. 하필이면 그때 자신의 옆에 있던 것이 후루타였을 뿐이었을지도. 단지 자신의 곁에서 살아있는 것 중 가장 따뜻하지 않을 것 같은 후루타가 옆에 있었을 뿐이었을지도.

두 사람은 태연하게 무인 모텔의 좁고 차가운 방 안으로 들어섰다. 하얗고 버석거리는 침구가 씌워진 퀸사이즈 침대와, 속이 반쯤 들여다보이는 욕실, 키가 작고 낡은 테이블 위에는 검은색 재떨이와 그가 알지 못하는 가게의 이름이 프린팅된 라이터가 하나 놓여있었다.

후루타는 태연하게 겉옷을 벗어 옷걸이에 걸었고, 우이에게 손을 내밀어 그의 겉옷을 받겠다는 의사를 표했다. 평소의 우이라면 그 손길을 거절했겠지만, 그날만큼은 그렇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는 어떤 언어로도 정제할 수 없는 감정이 흐르고 있어서, 둘 중 어느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 고요 사이에서 두 사람은 서로의 셔츠 단추를 풀었고, 서로의 몸에 몇 개인가의 잇자국을 남겼으며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신음을 막기 위해 서로의 입술을 찾았다.

모든 일이 끝나고 우이는 자신이 후루타의 마른 등을 껴안으며 아주 약간의 눈물을 흘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그 이유는 찾을 수가 없었다. 우이는 담배의 필터 부분을 앞니로 가볍게 깨물었다. 위로 솟구치는 담배 연기가 우이의 코를 따갑게 때렸다.

우이 씨.”

후루타의 목소리에, 우이는 젖혔던 고개를 들어 후루타를 바라보았다. 후루타는 우이를 바라보며 몇 번 눈을 깜빡였다.

어제의 일은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후루타.”

?”

오해할까 봐 말하는 건데. 나는 너를 사랑하지 않아.”

우이의 말에 후루타는 바로 답하지 않았다. 우이는 그것이 조금 불안했다. 후루타라면 바로 무언가 답을 할 줄 알았는데. 우이의 손에서 담배 연기가 쉼 없이 흐르고 있었고 우이는 쌓어 가는 담뱃재를 털 생각도 하지 못한 채 후루타를 마주 보았다.

제가 오해 같은 걸 왜 하죠?”

그 말을 하는 후루타의 표정은 의문스러움 그 자체였다. 우이는 바로 상황 판단을 하지 못해 얼떨떨한 기분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우이 씨는 혹시, 사랑 같은 건 없는 섹스를 한 게 겁이라도 나나요?”

우이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겁이 나는가. 자신은 왜 지난 섹스를 후회하는가. 어떠한 감정도 없는 섹스여서? 아니면 그 상대가 후루타여서? 우이는 그 이유조차 찾을 수 없었다. 수많은 의문들이 그의 속에서 쌓이고 있었다.

차곡차곡 쌓이다 곧 터져나갈 것 같은 의문들. 후루타는 그런 우이의 속은 별로 알고 싶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웃어 보였다.

로맨티스트군요. 우이 씨는.”

우이는 대답을 할 수 없었다. 후루타는 한 번 숨을 길게 내쉬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저 태연하고, 또 나긋한 목소리였다.

또 밤이 그리우면 찾아오세요. 부하의 실수를 눈감아 주는 것도 좋은 상사의 일 중 하나니까.”

일이나 마저 하지.”

저는 계속 일하고 있었거든요. 농땡이를 피운 것은 우이 씨 쪽이지요.”

어쩌면 후루타는 우이 자신도 모르는 우이의 모든 감정을 꿰뚫어 보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싫은 녀석. 우이는 거의 다 타버린 담배를 그냥 꺼버렸다. 마지막 담배였는데. 우이는 폐 깊숙이에 들어있던 숨을 담배 연기 대신에 내뱉었다.

우이는 자신이 후회할 걸 알면서도, 어느 날 밤 후루타를 또 찾을 것이란 걸 직감할 수 있었다. 생각해 보면 그와 자신의 관계는 항상 그러했다. 후회할 걸 알면서도, 결코 그를 손에서 놓지 못하는.

우이는 자신이 평생 금연을 할 수 없는 사람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 후루타도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자신은, 자신이 죽을 것을 알면서도 당장 눈앞의 무언가를 애써 쫓는 운명일지도. 우이는 긴 속눈썹을 깜빡였다. 자신이 쫓고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일지. 우이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읽던 서류를 마저 넘겼다.

 

 

***

 

후루우이는 맨날 썰로만 풀었지 막상 써보는 건 첨이라 잘 모르겟네요 .. .. 머 처음이 다 그렇죠 이러다 보면 익숙해지지 안으까..... 하지만 여전히 후루타의 대사를 쓰는 건 재밌다 후루타 너무 좋은 캐리터인 것 같다구 한 번 더 생각하는 날이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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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핲님과의 연성교환!! #HL 섹스 묘사가 약간 있습니다

 

 

너의 것인 내 인생

 

Y A G I

For. 하프님

 

1

 

기막히게 멋진 작은 교량들이 있다

너를 위해 뛰는 내 심장이 있다

길 위에 슬픈 여인이 한 명 있다

정원에 작고 아름다운 별장이 한 채 있다

미친 사람처럼 흥에 들뜬 병사 여섯이 있다

너의 모습을 찾는 나의 두 눈이 있다

 

 

2

 

   한동안 못 볼지도 몰라.”

왜요? 일이 바빠요?”

. 큰 작전이 있을 것 같아. 확실한 건아직 아무것도 없지만.”

말하지 않고 싶었지만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리마 키쇼는 자신을 바라보는 크고 둥근 눈동자를 피하지 않고 똑바로 바라보았다. 아리마는 사실 쥰에게 하고 싶지 않은 말들이 많았다. 일을 하던 중 어딘가 다쳤다거나, 누군가를 지키지 못했다거나, 하는 일들은 굳이 쥰에게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리마 키쇼는 그 모든 것을 쥰에게 말했다. 쥰이 그러길 원했기 때문이었다.

그럼 제가 오늘 가서 챙겨줄게요.”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오빠는 눈치도 없어.”

아리마는 의문을 알 수 없는 쥰의 말에 눈을 깜빡이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리마와 눈이 마주치자 쥰은 싱긋 웃어 보였다.

큰 작전이라면서요. 한동안 못 보는데, 그 전에 하루쯤 오빠네 집에서 자고 가면 뭐 어때요.”

그렇지, 하고 아리마는 아침 이슬 같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웃었다. 아리마에게 있어 쥰이란 그런 사람이었다. 자신도 원인을 제대로 파악하기 힘든 불안감을 순간 싹 잊게 해주는 사람. 누군가를 사랑하는데 이유는 없다지만, 굳이 그 이유를 말할 때 아리마가 첫 번째로 말할 수 있는 수백 가지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그것이었다.

 

 

3

 

언덕 위에 매혹적인 작은 숲 하나 있다

그리고 한 늙은 향토방위군이 우리가 지나갈 때 소변을 본다

예쁘장한 루를 꿈꾸는 시인이 한 명 있다

이 거대한 도시 파리에 루라고 하는 세련되고 예쁜 사람이 한 명 있다

숲 속에 포대(砲臺)가 있다

양떼를 치는 목동이 한 명 있다

 

 

4

 

오빠 속옷 같은 건 더 안 챙겨도 돼요? 거기서 빨래는 못 할 거 아니에요.”

, 나는 여행을 가는 게 아니야.”

, 하긴 그런가.”

아리마의 짐 가방을 손끝으로 헤집던 쥰이 아리마의 한 마디에 헤헤, 하고 웃으며 아리마의 품속으로 뛰어들 듯 안겼다. 아리마는 단단하게 버티고 서 그런 쥰의 어깨를 껴안았다. 작은 체구의 쥰은 아리마의 품에 안기면 거의 사라지듯 보이지 않았고, 아리마는 그런 쥰과 자신의 체구 차이를 퍽 좋아했다.

, 침대로 가시죠. 아가씨.”

아리마는 그대로 쥰을 안아 들고 침대로 향했다. 주름 하나 없이 반듯하게 펴져 있던 이불이 두 사람의 아래에서 뭉개지듯 구겨졌다. 쥰은 맑게 웃으며 아리마의 목덜미를 껴안았다. 아리마는 팔에 힘을 풀고 선선히 쥰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맞댔다.

그들 사이에는 이상한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쥰은 그것에 이름을 붙일 수 없어서 어쩐지 조금, 불안했다. 하지만 그것을 내색할 수는 없었다. 지금 이 순간 가장 신경이 예민하게 날 서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아리마 키쇼였다. 그런 그에게 자신의 불안을 추가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쥰은 대신 아리마의 입술을 핥았다. 신체 부위 중에서 가장 피부가 얇은 곳이 입술이라고 했던가. 쥰은 아리마의 폭신한 입술을 핥다가 깨물다 하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리마는 쥰의 그런 모든 행동들을 묵묵히 다 받아내고 있었다. 언제나 확신은 없었다. 아리마는 항상 입버릇처럼 구울들을 구축하겠다고 말했으면서도, 그 행동에 대한 확신은 없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게 자신의 삶이었으니까. 언제 지옥에서 올라온 손길이 자신을 끌어내릴지, 알 수 없었으니까. 그래서 어쩌면 자신은 확신도 없는 그런 말을 되뇌고 있었던 걸지도 몰랐다.

확신이 있는 말이라면, 쥰을 사랑한다는 말 정도려나. 아니면 그녀에게 하는 모든 말들. 말로써 만들어지지는 않았지만 그녀를 향하고 있는 모든 감정들. 어쩌면 쥰 그 자체.

아리마는 말없이 쥰의 입속으로 혀를 밀어 넣었다. 조금 놀란 듯 쥰의 몸이 가볍게 굳어졌다 곧 풀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아리마는 쥰의 약간의 치약 맛이 남아있는 치아를, 쥰의 말랑한 혀를 핥으며 그녀의 체온을 느꼈다. 아마도 자신과 똑같은 삼십육 쩜 오 도의 체온을.

…….”

쥰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리마는 천천히 입술을 아래로 내려 쥰의 목덜미를, 어깨를 입술로 부드럽게 깨물었다. 쥰은 그런 아리마의 아래에서 가볍게 몸을 움찔거렸다. 누군가 달뜬 숨을 뱉었다. 그것이 아리마 자신의 것인지, 아니면 쥰의 것인지 그는 알 수 없었고 알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정돈된 아리마의 침실에 두 사람의 옷가지가 엉망으로 흩어졌다. 이성적인 사고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머지않을 미래에 대한 두려움도 없었다. 아리마는 쥰의 얇고 부드러운 몸을 손바닥으로 부드럽게 훑어 내렸다. 그녀의 아랫배에 입을 맞추며 아리마는 작게 숨을 내쉬었고 그 감각에 쥰은 가볍게 몸을 뒤틀었다.

아프면 말해 줘.”

걱정 마요.”

그렇게 말하며 쥰은 아리마의 뺨을 쓰다듬었다. 아리마는 그 손을 잡아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아리마의 다른 손에 잡힌 쥰의 가느다란 발목이 그의 어깨 위에 얹혔다. 쥰은 그 작은 손으로 하얀 침구를 붙잡고 있었다. 긴장이 안 될 리는 없을 터였다.

아리마는 그런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하는 대신 천천히 허리를 움직였다. 무척 부드럽고 따뜻한 살을 가르는 느낌. 쥰은 한 손으로 자신의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아리마는 몸을 기울여 그런 쥰의 손목을 잡았다. 쥰의 올망올망한 눈동자가 아리마에게 향했다.

긴장하지 말고. 힘 빼야 안 아파.”

하지만…….”

천천히 움직일게.”

쥰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기에, 아리마는 쥰의 얼굴을 바라보며 허리를 움직였다. 쥰이 느끼고 있는 건, 쾌감인가 아픔인가. 아리마는 고개를 뒤로 젖힌 채 억눌린 신음과 함께 뜨거운 숨을 뱉고 있는 쥰의 몸을 껴안고는 그녀를 달래듯 그 어깨에 입을 맞췄다.

   오지 않았으면 하는 아침이 다가오고 있었고 그럴수록 아리마는 더욱 깊이 허리를 움직였다. 쥰의 팔이 아리마의 어깨에 감겼다. 쥰은 애타게 아리마의 입술을 찾았다. 살짝 말라있는 두 사람의 입술이 서로 겹쳐졌고 복잡하게 얽힌 호흡이 그들의 머릿속을 아득하게 만들고 있었다.

   사랑해요.

   쥰은 수도 없이 아리마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속삭였다. 말하면 말할수록 부족한 느낌이었다. 그 부족함을 채운 것은 아리마가 나지막하게 쥰을 따라 말한 사랑해, 하는 말이었다.

 

   이것은 아리마 키쇼가 과거 언젠가에 그토록 바라왔으며, 어느 순간부터는 그토록 도망가고 싶었던 죽음을 드디어 맞이하기 하루 전날의 일이었다.

 

 

5

 

너의 것인 내 인생이 있다

물 흐르듯 흐르는 나의 만년필이 있다

우아하고 우아하게 드리워진 포플러나무 커튼이 있다

영영 지나가버린 지난 내 모든 삶이 있다

우리가 서로 사랑을 나눴던 망통의 좁은 골목길들이 있다

 

 

6

 

쥰은 다른 사람들보다 한발 늦게, 불안할 정도로 텅 비어있는 아리마 키쇼의 집안에서 홀로 그의 부고를 접했다.

그녀에게 그 소식을 전한 사람은 쥰이 모르는 사람이었고, 그는 유감입니다, 하는 말로 전화를 끊었다. 쥰은 울지 않았다. 대신에 이 세상의 모든 소리가 없어져 버린 것만 같았다. 그렇지. 없어진 것은 소리뿐만이 아니지.

쥰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리마의 흔적이 있었다. 그의 손이 닿은 물건들. 그가 알게 모르게 소중히 다루었던 것들. 언젠가 쥰이 자그마한 액자에 담아 선물했던, 그와 쥰이 처음으로 찍은 사진.

쥰은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그의 것에 비하면 너무나도 작은 자신의 손바닥이 흘러넘치는 감정을 담을 수 없었다. 그래서 쥰은 그저 그 감정들이 자신을 빠져나가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자신이 비어버린다면.

쥰은 눈을 깜빡였다. 고개를 들어 아무것도 없는 자신의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오빠는 죽으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오빠에게 자신이란 어떤 사람이었을까.

쥰은 언젠가 다시 아리마를 만났을 때 떳떳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 모든 감정들이 자신을 빠져나가지 않고 자신 안으로 스며들었으면 했다. 기억할 수 있었으면 했다.

이제 쥰에게 남은 것은 그런 것들밖에 없었으니까.

 

 

7

 

동료들을 매질하는 소스펠 출신 소녀가 한 명 있다

내 귀리자루 안에 말몰이용 채찍이 있다

선로 위에 벨기에 열차가 있다

 

 

8

 

쥰은 그 누구도 미워하고 싶지 않았다. 아리마가 죽은 것이 누구 때문이고, 누가 그를 배신했고, 그런 것 따위를 알고 싶지도,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아리마의 장례식 때 그녀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꼿꼿이 허리를 펴고 서서 그의 생물로서의 마지막을 지켜볼 따름이었다. 누군가는 그런 쥰을 보고 독하다고 얘기를 했고, 다른 누군가는 그런 쥰을 보고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얘기를 했다.

쥰은 그 모든 소리를 들을 수 있으면서도, 들을 수 없었다. 쥰의 세계의 모든 소리는 아리마 키쇼의 죽음과 함께 사라졌다. 그의 눈이 더 이상 어떤 빛을 잡아낼 수 없었던 것처럼, 치카세 쥰의 귀도 어떠한 소리도 담아낼 수 없었다.

아니. 쥰이 들을 수 있는 단 하나의 소리가 있었다. 그것은 쥰의 심장 소리였다. 쥰은 아리마 키쇼가 이 세상에 남기고 간 흔적들을 정리할 때, 귓가에 생생하게 울리는 자신의 심장 박동을 들을 수 있었다. 아리마의 책상에는 읽다 만 책이 반듯하게 놓여있었다. 쥰은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집어 들었다.

쥰이 알지 못하는 외국 시인의 시집이었다. 쥰은 첫 페이지부터 그것을 읽어보려다, 페이지를 휙휙 넘겨 얇고 반투명한 포스트잇으로 표시가 되어 있는 곳을 눈으로 읽었다. <있다>라는 제목의 시였다.

그때서야 쥰은 아리마 키쇼가 죽고 처음으로 눈물을 흘렸다. 쥰은 자신의 눈물이 멈추지 않아 자신이 익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고, 사실 그래도 상관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쥰이 발견한 것은 아리마 키쇼의, 유서였다.

그는 유서를 남기는 사람은 아니었다. 수많은 고민을 하다가 한 글자도 적지 않은 깨끗하고 하얀 종이를 반듯하게 접어 그 겉에 유서, 아리마 키쇼, 하는 글씨를 적어 넣는다고 그랬다. 언젠가 쥰은 그에게 왜 유서를 쓰지 않느냐고 물었고,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말이 없어서 그랬다고 답을 했다.

그러면 앞으로는 저에게 편지를 남겨 주세요.

그건 싫어.

왜요?

진짜로죽어 버릴 것 같아서.

그래서 이번에도 그가 CCG에 남긴 유서는 백지였다. 그런 큰 작전이었는데, 아무도 아리마에게 어떤 글씨라도 남겨보라고 권하지 않았다. 이유는 단순했다. 그래도 그는 아리마 키쇼였고 누구도 그의 죽음을 예상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그는 결국 죽었고, 남은 것은 쥰의 품에 안겨 준의 눈물에 젖어가고 있는 작은 시집 한 권이었다.

 

 

9

 

나의 사랑이 있다

삶 전체가 있다

 

 

10

 

나는 너를 사모한다

 

 

11

 

쥰은 아리마의 유서를 읽을 수 없었다. 그러면 그가 정말로, 완전히 이 세상에서 사라져 버릴 것 같아서. 다만 그녀는 아리마가 포스트잇으로 표시를 해둔 부분은 몇 번을 반복해서 읽었다. 포스트잇은 책의 삼 분의 이 지점을 넘어선 이후부터는 단 하나도 붙어있지 않았다. 그래서 쥰은 마지막 시집의 마지막 장을 펼쳐 마지막 구절을 읽었다.

 

나는 사랑의 곡조를 연주한다 아픔을 어루만지는 빗줄기 하늘이 우리에게 부드러이 뿌려 주는 이 감미로운 빗줄기의 영롱한 현을 퉁기며

 

   쥰은 이 아름다운 문장을, 아리마가 미처 읽지 못하고 떠나버린 것이 안타까웠다. 그래서 쥰은 그 문장을 외웠다. 아리마가 아마도 자신을 떠올리며 표시를 했을 그 수많은 시들도 모두 외웠다.

   그리고 쥰은 생각했다. 언젠가 아리마를 만나면 그 시집은 이렇게 끝났다며, 그 마지막 구절을 읊어 주리라. 그리고 아리마에게, 당신의 남긴 흔적들을 모두 훑었지만, 당신이 남긴 그 한 권의 책만큼은 읽지 못했다고 말하리라.

   그러면 그는 부드럽고 맑은 웃음을 지으며 쥰에게 그렇게 말할 것이었다. 괜찮다고. 자신의 유서는 그 책이 아니라, , 당신이었다고.

   쥰은 자신의 심장 소리를 들었다.

 

***

 

시집은 기욤 아폴리네르의 <내 사랑의 그림자>를 인용했습니다. 사실 별로 좋아하는 시집은 아닌데 저희 집에 인용할만한 시집이 이것밖에 없엇어요 (하프님 : ?)

흠 처음 시놉시스 짤 때는 섹스 씬을 중심으로 쓰려고 햇는데 사실... ... 그냥.. ... 하프님의 눈물을 빼보자! 가 중점이 되어버린 글이네요 어떠셧나요 하프님? 하프님 눈물은 어떻게 되었나요? (?) 히히 어쨌든... 핲님이 만족해주셨으면 하는 바람으로 야기는..... 사라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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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구울 전력 60분_ 따뜻한 곳  #도나토+아몬+우타  #도나토 우타 부자설에 기반하고 있음

 

Home. My sweet home.

 

Y A G I

 

 

유난히 깜빡이는 가로등 불빛이 있었다. 고장이 난 것도 아닌데, 공연히 혼자서 어딘가 잘못된 것처럼 깜빡이는 불빛. 그러나 아무도 그것을 고치지 않는 그런 것.

도나토는 그 불빛 아래에 서 있었다. 검고 단정한 사제복이 그의 몸을 감싸고 있었다. 아몬은 눈을 깜빡여 도나토를 바라보았다. 가로등은 곧 꺼질 것처럼 쉴 새 없이 깜빡이고 있었지만 수 분이 지난 후에도 그 불빛이 꺼지는 일은 없었다. 그래서 아몬은 주먹을 꽉 쥐었다.

커피라도 한잔하자고 말하려 했는데, 그럼 네가 싫어하겠지.”

아몬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것 참, 하고 도나토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힘없이 숨을 뱉었다. 도나토는 몇 걸음 발을 앞으로 내디뎌 가로등 빛이 닿지 않는 어둠 속으로, 아몬의 앞으로 다가갔다. 아몬은 그런 그를 피하지 않고 도나토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제 자신은 그때의 무력한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아몬은 줄곧 도나토의 시선을 피하지 않으려고 했다. 자신의 비정상적인 심박을 뻔히 꿰뚫어 보고 있는 것 같은 그의 시선에 마음이 더욱 복잡해지긴 했지만, 어쨌든 그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것은 아몬이 도나토에게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반항이었을지도 몰랐다.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별일은 없어. 그냥 어떻게 지내나 싶어서 와봤다. 아버지로서 말이지.”

아버지 노릇 같은 건, 하지 마십시오.”

이런, 내가 자식 농사를 잘못했군. 내 아들들은 어째 하나같이 다 이런다니까.”

그렇게 말하면서도 도나토는 마냥 웃는 낯이었다. 그 미소는, 아몬이 싫어하는 도나토의 수많은 요소 중 하나였다. 세상 모든 것을 알고 있고 때문에 초연해질 수 있는 자의 미소. 도나토는 그런 아몬의 속을 알고 있으면서도 낯을 바꾸지 않고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아들이 구울이 되었다길래 어떤가 싶어서 와 봤다. 나라도 좀 궁금해지더구나.”

그래서, 본 감상이 어떠십니까?”

그건 내가 물어야지. 구울이 된 느낌이 어떠냐? 네가 혐오하던 나처럼, 인간을 먹은 느낌은?”

제게 그 질문에 답할 의무는 없습니다.”

그 말을 하며 아몬은 도나토를 지나쳐 가려 했다. 인간도 구울도 아닌, 이 몸이 되고 나서 느꼈던 감정을 그에게 소상히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마 그는 그 모든 것을 알면서도 내게 묻는 것이겠지. 아몬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더욱 그것을 말하고 싶지 않았다. 기만당하는 것 같아서. 어렸을 때처럼 그의 손바닥 위에서, 자신이 알지 못하는 요소들로 인해 농락당하는 느낌이 들어서.

, 그러고 보니 더 이상 십자가를 하고 있지는 않구나. 구울이 된 결과가 그런 것인가?”

지난 일을 잊지는 않았습니다. 그날의, 그리고 당신에 대한 분노도 마찬가지입니다.”

코타로, 너는 어릴 때부터 그랬지.”

그렇게 부르지 마십시오.”

코타로가 아니라면, 너는 플로피 쪽이 좋은가?”

그 말에 아몬은 우뚝 멈춰 서 도나토를 노려다 보았다. 도나토는 마냥 태연한 얼굴이었다.

그래도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아 다행이구나. 아들아.”

그 말만큼은 진심이었다. 눈을 가늘게 떠 도나토를 바라보던 아몬이 몸을 돌려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도나토는 아주 오랫동안 지켜보고 있었다. 꺼질 것 같은 가로등은 여전히 꺼지지 않고 도나토 위에 요란하나 깨끗한 불빛을 쏟아내고 있었다.

어쨌든, 그들의 관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도나토는 폐 깊은 곳에서부터 끌어낸 숨을 뱉었다. 그의 입술 끝에서부터 사라지기 시작하는 입김이 차가워지는 공기를 데웠다. 도나토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우타가 CCG의 국장실로 들어왔을 때, 도나토는 창밖을 바라보며 익숙한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즐거운 나의 집인가. 우타는 익숙하게 테이블 위에 앉으며 도나토에게 인사를 대신한 말을 건넸다.

   “크라운, 좋은 일이라도 있었나 봐요?”

   “보고 싶은 사람을 잠깐 만나고 왔거든.”

   “그렇구나.”

   우타는 그것이 누구였는지 대답하지 않았다. 아주 궁금하지 않았던 것도 있지만, 도나토가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면 그것이 누구일지 뻔했다. 그를 이복형제라고 불러도 되는 것인가. 핏줄로도, 가문으로도 이어지지 않은, 이제야 겨우 구울이라는 이 미묘한 종의 굴레로 묶인 부자 관계.

 

An exile from home splendor dazzles in vain

Oh! give me my lowly, that cottage again

 

The birds singing gaily, that came at call

Give me them with the peace of mind, dear er than all!

 

한 바퀴를 돌아도 끝이 나지 않는 도나토의 흥얼거림에, 우타는 나긋한 목소리로 가사를 붙였다. 즐거운 나의 집이란 게, 그들에게 있을 리는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들은 한동안 그 서정적인 노래로 국장실을 채웠다.

어느 누구도 방해할 수 없는 시간이, 도나토의 기억이 있었다. 보육원의 아주 낡고 조율조차 제대로 되지 않은 피아노에서 울리는 단조로운 리듬이. 수많은 어린아이들의 맑고 높은 목소리가 십자가의 아래에서 울렸다.

도나토는 그 노래를 좋아했다. 즐거운 나의 집. 내가 돌아가야 할 장소. 자신에게 없는 것이라 더욱 그 노래를 좋아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그 따뜻한 곳에는, 어린아이들 특유의 향내와 자신을 바라보는 아몬 코타로의 맑고 둥근 눈동자가 있었다.

나는 그 노래를 싫어했는데.”

아들들이란…….”

그제야 도나토는 흥얼거림을 멈추고 우타를 바라보았다. 우타는 어깨를 으쓱해 보일 따름이었다. 아버지로서 다 자란 아이들을 보는 것은, 어째 쓸쓸하구나. 도나토의 말이 공기 중에 흩어지듯 사라졌다. 우타는 그저 그 말에 빙긋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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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타요모우타  #가벼운 섹스 묘사 있음  #진단메이커

 

구도자

 

Y A G I

 

 

너에게선 항상 한 단어로 표현할 수 없는 묘한 향기가 났다. 나는 네 목덜미를 앞니로 가볍게 깨물었다. 그러면 너의 묘한 향기를 조금 더 진하게 느낄 수 있었다. 너에게서 나는 향기는 매번 조금씩 달랐다. 하루는 안료 냄새가, 다른 날은 가죽의 냄새가, 또 다른 날은 먼지 비슷한 냄새가 났다.

그러나 그 냄새들을 한 꺼풀 벗기고 나면 그 아래에는 항상 혈흔이 있었다. 피의 흔적, 아니면 구울의 흔적. 하지만 그런 것들은 나에게도 날 수 있는 냄새였다. 너와 나의 냄새에서 다른 점을 찾으려면 그보다 더 깊숙한 곳으로 파고들어야 했다. 이렇게 너의 목덜미를 깨물어야만 네 본연의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

그것은 내가 아는 어떤 것과도 닮아있지 않은 냄새였다. 나는 종종 그것이 인간들이 말하는 달콤함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구울의 달콤함이 아닌 인간의 달콤함. 내가 평생 느낄 수 없는 향기가 너에게는 있었다.

렌지, 하고 네가 아래에서 내 이름을 애타게 불렀다. 나는 응, 하고 대답하며 천천히 허리를 움직였다. 억눌린 너의 신음이 간헐적으로 새어 나왔고 단정하게 정돈된 너의 손톱이 내 등을 파고들었다. 그러면 나는 또 너의 입술을 찾았다. 서로가 내뱉는 숨이 섞여 호흡이 곤란했지만 그럴수록 우리는 서로를 더욱 끌어안았다.

나는 손을 더듬어 너의 얇은 허리를 찾았다. 눈을 감고도 그려낼 수 있는 너의 문신들을 손끝으로 훑으며 땀과 쾌락이 섞인 너의 목소리를 들었다. 너는 항상 나보다 조금 먼저 지쳤고, 오늘은 나는 그런 그를 더 보채지 않았다.

그냥 그런 기분이었다.

렌지도 오늘은 피곤해?”

조금.”

웬일이람. , 나야 이 정도도 좋지만.”

너는 팔을 뻗어 내 목덜미를 껴안았다. 나는 네 옆자리를 찾아 누웠다. 차가워지기 시작한 바람이 컨테이너의 몸체를 휘감고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이런 날이면 미미한 바람이 건물이라고 하기도 힘든 이 공간 안을 파고들었다. 그러면 너는 몸을 옮겨 너의 몸과 나의 몸을 완전히 밀착시켰다. 나는 네 차가운 어깨를 손바닥으로 쓸었다.

잘 자, 렌지.”

우타도. 잘 자.”

너의 입술은 조금 말라 있었다. 그래도 우리의 키스는 여태껏 건조한 적이 없었고, 이번에도 그랬다. 딱 두 사람분의 체온이 밤공기를 채웠다. 나는 네 향기를 마지막으로 맡았다. 내 팔을 베고 누운 너에게선, 맑은 땀 냄새와 함께 미미한 너의 체취가 묻어나왔다.

 

   잠에서 깨었을 때 바로 보인 것은 내 손이었다. 아직까지 머리가 흐렸다. 나는 손을 천천히 쥐었다가 폈다. 그러니까, 네가 없었다. 나는 다시 눈을 감고 나직하게 너의 이름을 불렀다. 푹 잠겨 있어 내 것 같지 않은 목소리가 들렸다.

   “우타.”

   “일어났어?”

   응. 나는 한껏 몸을 웅크렸다. 조금 더 자고 싶기도 했고, 지금 바로 침대에서 벗어나고 싶기도 했다. 어쨌든 우타를 불러버렸으니, 일어나는 게 좋은가. 나는 몸을 일으켰다. 나는 그제야 커피 냄새를 맡았고, 너는 익숙한 머그 두 개를 들고 침대로 왔다. 옷을 제대로 챙겨 입는 것도 귀찮았는지, 너는 바지에다가 카디건만 걸친 채였다. 네가 입고 있는 어두운 갈색의, 보풀이 일어나기 시작한 카디건은 내 것이어서, 그것은 너의 왼쪽 어깨에서 거의 흘러내리기 직전이었다.

   나는 손을 뻗어 그것을 끌어 올려주곤 네가 건넨 커피를 받았다.

   “렌지 커피가 더 맛있는데.”

   “다음에 내려줄게.”

   “. 오늘은 렌지 늦잠 잤으니까.”

   나는 네가 내린 커피의 향을 맡았다. 너는 불만스럽게 말하는 것 치고 제법 커피를 잘 내리는 축이었다. 손이 예민한 탓이겠지. 너는 침대에 걸터앉아 나를 바라보았다. 우리의 아침 인사는 혀를 섞지 않은 입맞춤이었다.

   “맛있어.”

   “다행이다. 렌은, 카페 하는 것 치고 웬만한 커피는 다 잘 마시지만.”

   “생활력이 좋은 거야.”

   “그렇지.”

커피는 따뜻했다. 나는 머리가 서서히 깨어나는 것을 느꼈다. 밤새도록 불던 바람은 어느덧 잦아든 모양인지, 바깥은 그저 조용하기만 했다. 나는 혀로 입술에 묻은 커피를 핥으며 어제 밤새도록 맡은 너의 냄새를 떠올렸다.

너와 나의 차이는 아주 근본적인 것이었다. 우리의 체취가 전혀 다른 것처럼. 나는 종종 그것이 부러울 때도 있었다. 무심코 그런 말을 할 때면 너는 내게 항상, 내가 업고 있는 것들을 내려놓으라는 이야기를 했다. 그에 대한 나의 대답은 당연히 부정이었고, 그러면 너는 그래서 내가 좋다는 말을 했다. 너의 커피를 마시며, 나는 문득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너는 내를 사랑한다고 했다. 나라면 너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을 것 같아서. 그래서 나를 사랑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나는 너를 어째서 사랑하는가.

우타.”

, 렌지.”

우타는 내 어디가 좋아?”

섹스를 잘 하는 거.”

할 말이 없었다. 너는 내 표정을 보고 웃었다. 아무튼, 우리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이런 모습까지.

렌은 내 어디가 좋아?”

글쎄.”

바로 답 못 해주는 거야?”

섹스를 잘 하는 거, 하고 너의 대답을 돌려줄 수 있다면 좋았겠지만 그런 붙임성은 내게 없었다. 나는 그 말을 생각만 하다가, 별생각 없이 떠오른 말을 툭 뱉었다.

너는 내 구원이라서.”

우와, 진지하네…….”

농담이야.”

렌지 농담 같은 거 안 하잖아.”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왜 갑자기 그런 말이 튀어나왔담. 어쩌면 아직 잠이 덜 깼을 리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것도 아니라면 간만에 네가 내려 준 커피를 마셨기 때문이었을지도. 우타는 소리 없이 웃더니, 커피를 들고 이불 속으로 들어왔다. 반쯤 사라진 너의 커피가 네가 몸을 움직일 때마다 흔들거렸다.

구원이라니, 무거운걸.”

신경 쓰지 마. 잠이 덜 깨서 그런 거니까.”

너는 흐응, 하는 소리를 냈다. 내 말을 믿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굳이 말을 덧대고 싶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우리는 잠시간 아무 말 없이 커피만을 마셨다. 그러는 동안 나는 그 구원이라는 말을 잠시 생각했다.

살아있는 것은 곧 다른 생명을 죽인다는 것이었다. 삶은 곧 죄악이었고 때문에 내 존재는 죄악이었다. 그 죄의 무게를 나는 알아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 죄의 무게를 알아야만, 내게 소중한 것들을 지킬 수 있는 힘이 주어진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나의 방식이었다.

너의 방식은 나와는 달랐다. 우리의 삶은 죄악 투성이었지만 너는 마치 네게는 그런 것이 없는 것처럼 살았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너는 정말로 그런 것 같았다. 내게는 죄악인 것들이 네게는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었다.

그래서 나는 종종 네가 부러웠고, 그래서 너는 종종 나의 유일한 구원이 되기도 했다. 나는 네게 몸을 기대었다. 너는 팔을 뻗어 내 어깨를 껴안았다.

   “렌지한텐 유감이지만.”

   그 말을 하고 너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생각해 봤는데, 나는 구원은 아닌 것 같아.”

   “신경 쓰지 말라니까.”

   “대신에 나는 렌지의 메피스토는 될 수 있어.”

   메피스토펠레스. 파우스트를 읽은 적은 없었다. 그렇다고 그 내용을, 그 악마를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메피스토펠레스라.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르지. 어쨌든 너는 나의 욕망이기도 했고 쾌락이기도 했으니.

   동시에 너는 나의 사랑이기도 했지만. 이번에는 내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러면 됐어.”

   “어쨌든, 렌이랑 하는 섹스는 좋으니까.”

   “그렇게 되는 거야?”

   “말 나온 김에 한 번 더 할래?”

  너는 네 몫의 커피를 침대 옆 탁자에 두곤 나를 돌아보며 맑게 웃었다.

   “아침인데?”

   “무슨 상관이야. 이번엔 내가 위야.”

   “좋을 대로.”

   구울에게도, 내게도 영혼이 있다면. 나는 순순히 네게 내 머그를 넘겨주었다. 너는 그것을 네 머그 옆에 나란히 두고는 내 위에 자연스럽게 올라탔다. 나는 네가 내 구원이 아니라 악마라 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그 입술은 달콤했고 나는 그것이면 충분했다.

 

***

 

왜 프사가 안 뜨지... 암튼 이 진단이었구요 문장은 쪼금 바꿨습니다

제목은 고민을 좀 했는데....... 구도자가 적절하진 않은 것 같은데 그것 말고는 당장 생각이 안 나서 구도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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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타요모  #인어 우타X10대 요모 

 

 

갈증

 

Y A G I

 

 

  요모 렌지는 인간이 상식 외의 사건을 만나면 일순 몸이 굳기도 한다는 것쯤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인어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거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은 없었다. 요모는 눈을 껌뻑여 정면을 바라보았다.

  해안가의 좁은 동굴에선 항상 희미하게 물이 흐르는 소리와 함께 바닷물의 냄새가 났다. 근원을 알 수 없는 햇빛 몇 줄기가 물 위를 비추고 있었고, 푸른 이끼들은 그것을 피해 제 몸을 축축하게 적셔가고 있었다. 요모는 아무것도 아닌 그런 풍경들을 좋아했다. 이곳을 아는 사람이 자신밖에 없다는 것도 그가 종종 이 동굴에 들르는 이유 중 하나였다. 그런데 이런 곳에, 인어가.

  “어린애?”

  “어린애 아니야.”

  “아니. 딱 봐도 어린애인데.”

  “그럼 너는, 뭔데?”

  “딱 봐도 인어잖아? 눈썰미가 없는 건지.”

  아니 그건 알겠는데. 요모는 그 말을 삼켰다. 알겠는데, 진짜 맞나? 요모는 다시 그를 바라보았다. 요란한 문신이 그의 얇은 목덜미나 팔뚝을 곧 삼켜버릴 것처럼 휘감고 있었다. 처음보다 긴장이 많이 풀렸는지 그는 허리를 가볍게 숙이며 양손으로 물가를 짚었다. 가짜라고 하기엔 너무 실감이 강하게 드는 진보랏빛 비늘들이 촘촘하게 그의 허리 아래를 감싸고 있었다.

  요모는 자신과 눈이 마주치자 가볍게 웃어 보이는 그를 보며 무심코 아, 눈 밑이 부어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요모는 차가운 벽을 손으로 짚었다. 깊은 곳에서 물이 흐르는 소리가 또 들려왔다.

  “울고 있었어?”

  “이래서 어린애들이란.”

  그는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건 모른 척 해주는 거야. 요모는 그의 말에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모른 척 해줘야 한다는 걸 요모도 알고 있었지만, 요모는 그것을 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냥, 괜히 신경 쓰였으니까. 어쩌면 그 이상이니까. 요모는 쭈뼛거리며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고, 그는 선선히 자신의 옆자리를 손으로 툭툭 두드려 앉으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에게서는 미끈한 물비린내가 났다.

  “이름이 뭐야? 나는 우타.”

  “렌지.”

  “오렌지?”

  “렌지!”

  “장난이야, 장난. 제대로 들었으니까, 렌지. 맞지?”

  요모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타라니, 이름 이상해.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요모는 우타, 하고 몇 번이나 그 이름을 입속말로 되뇌었다. 그래도 우타의 목소리는 처음보다 꽤 상쾌해져 있었다. 요모는 그것이 마음에 들었다.

  “춥지 않아? 겨울인데.”

  “이 정도는 괜찮아. 그것보다, 인어가 옷을 입는 것도 좀 이상하지 않아?”

  “하긴. 그런가.”

  “렌지는 인어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나는 인어가 진짜로 있는지도 방금 알았거든.”

  요모의 말에 우타가 웃었다. 모를 법도. 말라가는 우타의 검은 머리 위로 가느다란 햇살이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여기 나 혼자만 알고 있어서 좋아했는데.”

나도 그랬는데. 지금까지는 서로 타이밍이 안 맞았나 봐.”

, 인어는 상관없으려나.”

, 인간은 상관없으려나.”

우타는 요모의 말을 따라 하며 슬쩍 요모를 건너보았다. 성을 낼 줄 알았는데 의외로 그의 표정을 말짱했다. 그렇게 어린애는 아니란 건가. 우타는 요모를 따라 자신이 올라온 물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아마 평생 떠날 수 없을 물이 그의 아래에서 찰랑거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별것도 아닌 이야기를 나눴다. 좁은 동굴이 그들의 목소리를 잔잔하게 울렸다. 가끔씩 거칠게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두 사람의 머리카락이 가볍게 헝클어졌다. 겨울의 해는 항상 그렇듯 일찍 바다로 떨어졌고, 요모는 바다가 그 노을로 벌겋게 물들어갈 때쯤에야 웅크리고 있던 몸을 곧게 펴서 일으켰다.

이제 가게?”

내일도 올 거야.”

원래 매일 와?”

아니. 근데 매일 와보려고. 우타도 이제 집에 가?”

, 하고 우타는 대답하며 요모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내일 봐, 하고 말하면서도 우타는 요모의 매일 찾아오겠다던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요모는 일부러 어제와 같은 시간에 동굴을 찾았다. 일찍부터 가고 싶은 것을 얼마나 참았는가. 약속 시간을 정하지 않는 걸 뒤늦게 깨닫고서야 얼마나 후회했던가. 그러나 동굴에 우타는 없었다. 그 행동이 별 의미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요모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뭐야, 왜 없어?”

혼자 왔어?”

요모가 중얼거리듯 말을 뱉자 그제야 우타는 퐁, 소리를 내며 물속에서 머리를 불쑥 내밀었다.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우타의 검은 머리카락이 그의 목덜미나 어깨에 착 달라붙어 있었다. 우타는 목을 쭉 빼어 요모의 뒤를 바라보았지만 그의 뒤를 따르는 사람은 없었다.

렌지라면 그럴 거라고 생각했으면서도.

당연한 거 아니야?”

, 그런가.”

우타는 물가에 양팔을 겹쳐 올려두곤 그 위에 제 얼굴을 얹었다. 예쁘다, 하고 요모는 무심코 우타를 처음 봤을 때부터 품고 있던 생각을 입 밖으로 뱉었다. 자신이 그 말을 뱉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우타가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아주 작은 소리를 내며 웃고 난 이후였다.

그게!”

괜찮아, 나도 알아.”

?”

내가 이쁜 거. 아니야?”

요모는 어정쩡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서 아니, 하고 부정을 할 수는 없었다. 우타는 요모를 밤새도록 괴롭혔던 생각이었고, 요모는 그것에 대해 나름의 해답을 내리고 왔다고 생각했음에도 막상 우타의 얼굴을 직접 보니 또 마음이 일렁이는 것만 같았다.

이 흔들림의 원인도, 결과도 다 우타에게 향해있다는 것을 어린 요모는 알고 있었음에도 그것을 부정하고 싶었다. 요모는 자신의 그런 생각을 우타에게 읽히고 있는 것만 같아 어쩐지 조금 부끄러워졌다.

요모는 우타의 곁에 다가가 무릎을 모으고 앉았다. 벌써 우타와 자신의 이런 가까운 거리감이 익숙해진 것 같았다.

나랑 약속 하나 해줘.”

뭔데?”

나는 매일 혼자 올 테니까. 우타도 숨어있지 말고 나 기다려주는 거.”

왜 그런 약속을 해야 하는데?”

불안하니까. 우타가 없어질까 봐.”

우타는 자기도 모르게 제 문신 아래의 상처들을 빤히 바라보았다. . 알았어. 우타는 이 약속으로 인해 자신이 얼마나 손해를 볼지 알 수 없었다. 우타의 대답에 요모가 말갛게 웃었다. 우타는 뭐, 저 정도 웃음이라면 자신이 볼 어떤 손해도 상회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두 사람은 매일 같은 동굴에서 만났다. 우타는 바다에서 사는 인어라고 했고, 때문에 자신은 여태껏 이 바다를 떠나본 적이 없다고 했다. 우타를 만날 때마다 요모는 해안가 주변에서는 볼 수 없는 꽃이나 갈대 따위를 한 줌 꺾어 우타에게 가져다주었고 우타는 깊은 바닷속에서 고요히 삭아가고 있던 조개껍데기나 산호 따위를 요모에게 가져다주었다.

두 사람의 기념품은 동굴 안의, 평평하고 햇볕이 잘 드는 하얀 돌 위에 차곡차곡 쌓여갔다. 우타는 요모가 집에 돌아가고 난 후 혼자 멍하니 그것들을 지켜보곤 했다. 기념품들이, 대화들이 늘어 가면 늘어갈수록 우타의 기분은 점점 더 미묘해졌다.

인간은 피해야 하는 거라고 알고 있었는데. 어린 인간이라고 마음을 열어서는 안 된다고 알고 있었는데. 우타는 눈을 질끈 감았다. 머리로는 충분히 알고 있었지만. 그럴 때면 우타는 아주 깊은 물 속으로 들어가 숨을 참았다. 마치 자신이 익사를 당하기 직전의 인간이라도 된 것처럼 최대한 숨을 참았다.

하지만 자기 스스로 숨을 참아서 죽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우타는 차가운 바닷물을 들이마시며, 검푸른 물의 흐름을 한없이 바라보곤 했다.

, 우타를 좋아하는 것 같아.”

우타가 그렇게 자신을 다스리는 동안, 요모는 얼굴을 발갛게 붉히며 우타에게 자신의 오래된 마음을 털어놓았다. 이래서 애들이란. 우타는 속으로 작게 웃었다.

?”

, 라니. 좋아하는데 이유라도 있어?”

나는 어린애랑은 안 만나는데.”

그럼 내가 어른이 되면, 나를 좋아할 수 있어?”

. 그럴 수 있을 것 같아, 렌지.”

자신이 하는 말은 어디까지 거짓말이고 어디까지 진심일까? 우타는 어른이 되면 요모가 자신 같은 것은 잊어버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정확히는 그래 주기를 바랐다. 인간의 기억 속에서 오래 남아봤자 얻는 것은 없앨 수 없는 흉터밖에 없었다.

  “빨리 어른이 되면 좋겠다.”

  “렌지가 어른이 되려면 아직 한참 남았을 거야.”

  “분하네, 뭔가.”

  우타의 마음도 모르고 요모가 볼멘소리를 했다. 그래도 기다릴 거야. 그때까지. 요모의 목소리에 묘한 확신이 있어서, 우타는 소리를 내어 웃었다.

  “나 앞으로는 매일 우타한테 좋아한다고 말할 거야.”

  “그래도 소용없어.”

  “알아. 그냥내가 잊고 싶지 않아서 하는 말이니까.”

  요모의 말에 우타는 손을 뻗어 요모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우타의 손이 푹 젖어있어서, 요모의 머리에도 바닷물이 잘게 맺혔다. 우타는 이번에는 요모의 말을 믿었다.

 

아무리 그래도 인사로 좋아한다는 말을 하는 건. 우타는 요모가 좋아해, 따위의 말을 하며 동굴로 들어올 때마다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기분이 나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인사로는 조금, 그렇지 않을까…….

우타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웃었다. 요모의 표정이 진지해서 우타는 더 웃음이 났다. 그래서 더욱 해야 할 말이 있었다. 평소처럼 요모가 자신의 곁에 앉았을 때, 우타는 잠시 눈을 깜빡여 맑은 물 아래를 바라보았다.

렌지, 인어가 언제 죽는지 알아?”

나이가 들면?”

나 몇 살 살았게.”

30?”

렌지는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몇 살 정도 더 올려서 나이를 말했다. 설마 40대는 아니겠지. 아니, 전혀 그렇게 보이지는 않는데. 요모는 우타가 왜 갑자기 인어들의 죽음에 대해 말하는지 알 수 없었음에도 꽤 진지하게 그의 질문에 답을 했다.

렌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랑 나이가 같을걸.”

거짓말. 요모의 말에 우타는 고개를 저었다. 요모의 눈동자가 희미하게 떨리는 것을 보고 우타는 슬며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렌지, 인어는 자신이 사랑하던 사람이 죽어버리면 물거품으로 변해서 죽어. 렌지는, 내가 죽어버리면 좋겠어?”

요모는 긍정의 대답도, 부정의 대답도 하지 않았다. 요모는 이제야 우타가 왜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이것은 전적으로, 자신의 잘못이었다. 요모는 주먹을 꼭 쥐었다가 폈다.

인어의 지느러미를 먹으면평생 살 수 있다던데.”

그런 건 어떻게 알고 있담. 다른 건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으면서.”

우타.”

우타는 오른손을 뻗어 요모의 입술을 막았다. 요모는 먹먹한 기분으로 우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우타의 시선이 요모의 시선과 맞닿았다. 우타의 손에는 바다의 짭잘한 냄새가 아주 옅게 묻어있었다.

렌지, 평생을 산다는 것은 렌지의 생각보다 더욱 고통스러운 과정이야. 지금까지 살아온, 그리고 앞으로도 죽지 않을 내가 장담할 수 있어.”

그래도 괜찮아.”

렌지, 렌지 곁에 있던 사람들이 죽어 없어지는 거야.”

대신에 내 곁에는 우타, 네가 있잖아.”

우타는 뭐라고 말을 하려 했지만, 이번에는 요모가 우타의 입술을 막았다. 충동적인 첫 키스였다.

그리고 어차피 내 곁에는 아무도 없어. 우타 빼고.”

우타는 눈을 깜빡여 요모를 바라보았다. 우타는 자신이 언젠가 이렇게 될 것을 알고 있었다. 영겁의 세월을 혼자 살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목숨을 바쳐 사랑할 사람이 이 어린 인간이라니.

우타는 손을 뻗어 요모의 입술을 한 번 더 찾았다.

이걸 먹으면 렌지는 이제 어른이 되는 거야.”

우타는 힘을 주어 뜯어낸 자신의 지느러미를 요모에게 건넸다. 벌건 핏자국이 바닷물에 섞여 흩어졌다. 요모는 양손으로 우타의 지느러미를 받았다. 인어의 지느러미는 생각보다 저 작고 여렸다.

아프지 않아?”

아파.”

우타의 표정은 지금껏 요모가 봐왔던 어떤 표정보다 가장 아프고 슬퍼 보였다.

 

요모가 한 치의 고민도 없이 우타의 지느러미를 삼켰던 그 날 밤, 요모는 꿈에서 우타를 봤다. 그것이 자신이 우타와 입을 맞췄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의 지느러미를 먹었기 때문인지 요모는 알 수 없었지만 요모는 꿈속에서 반갑게 우타를 맞이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요모는 아직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이런 것이 어른이라면, 요모는 남들보다 조금 일찍, 그리고 평생 어른으로 살아도 나쁘지 않으리라는 생각을 했다.

 

  “먹었어?”

  “.”

  평소처럼 요모가 인사 대신 좋아해, 하고 말하기 전에 우타가 먼저 요모에게 꺼낸 말이었다. 요모는 작지만 확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어. 그리고, 축하해. 인간이 아니게 된걸.”

  “그것 말고 다른 걸 축하해 줘.”

  “어떤 거?”

  “이제 우타 네가, 나를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는 거.”

  우타는 요모의 말에 기분 좋게 웃었다. 그렇지, 내가 어른이 된다고 그랬구나. 요모는 여전히 희미하게 얼굴을 붉히는 아이였다.

  “그것도 축하해.”

  “다른 말로.”

  “이래서 어린애들은 싫다니까. 사랑해, 렌지.”

  렌지, 나 사랑한다는 말 처음 해봐. 우타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요모가 나도, 하고 대답했다.

 

**

 

제목을 짓는데 함께 힘을 써주신 으흐님과 하프님께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제목 넘 뜬금없이 갈증으로 정해졋고 이건 저의...게으름이 맞습니다.. (머리 박기)

인어>물가>성인식>세이렌>키르케>스틱스(강의 맹세)>Morendo>목말라 죽다>스틱스 강을 마시기> 걍 갈증으로 하자.. (힘들다)....

지난한 과정이엇습니다..... 근데 그런 것치곤 글이 아주 맘에 들게 나오지는 않아서 (눈물 흘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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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타요모  #꽃집 주인 우타X연극 배우 요모

 

 

 

연애담

 

Y A G I

 

 

 

요모는 그를 처음 봤을 때 그가 참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몇 개의 술잔이 깨질 듯 서로 부딪혔다. 요모는 아직 가라앉지 않은 탄산을 목 뒤로 넘기며 가볍게 인상을 썼다. 입안에 남은 달착지근함 때문에 요모는 가볍게 입맛을 다셨다. 누군가 요모 씨는 왜 술을 하지 않냐고 물었고, 요모의 바로 옆에 앉은 남자가 요모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얘한텐 술 먹이면 안 돼, 하는 소리를 했다.

왜요?”

얘 지금 입 꾹 다물고 있잖아. 근데 술만 들어가면 존나 주절댄다.”

, 맞아. 나 한 시간 동안 쟤 이야기 듣느라고 죽을 뻔한 적도 있어.”

나는 세 시간까지 버텨봤는데. 그 상태에서 술 더 먹여봤는데 체력이 좋아서 뻗지도 않아요.”

누군가 와, 하는 소리를 내며 웃었고 이야기는 빠르게 다음 주제로 넘어갔다.

극단 사람들과의 술자리는 항상 소란스러웠다. 요모는 어색하게 웃으며 자신을 등의 팡팡 두드리는 남자의 손을 밀어냈다. 요모는 이런 자리를 그렇게 즐기는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서 이런 자리가 싫으냐고 묻는다면 딱히 그렇지는 않다고 답할 수 있었다.

다만 오늘은 다른 날보다 조금 생각이 많아서 주변의 소란이 영 불편할 뿐이었다. 요모 렌지는 잔에 술 대신 사이다를 따라 마시며 아까 객석에서 보였던 그 남자를 떠올리고 있었다.

그것은 분명히, 극이 끝나고 객석을 포함한 극장의 조명이 모두 하얗게 켜졌을 때였다. 주연을 맡았던 요모의 인사는 가장 마지막이었고 남자는 객석의 가장 앞줄에 앉아있었다. 관객들에게 인사를 하려 허리를 숙였을 때, 그 남자와 눈이 마주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소극장은 항상 객석과 무대가 너무 가깝다고, 그의 눈을 빤히 바라보며 요모 렌지는 생각했다. 남자는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을 가진 손으로 가볍게 손뼉을 치고 있었다. 요모와 눈이 마주치자 남자는 고개를 가볍게 까딱하며 웃어 보였다. 그 미소 때문이었을까. 요모가 그를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것은.

요모는 그 극의 주연을 맡았던 것을 처음으로 후회했다. 조연이었다면 그 얼굴을 조금 더 오래 볼 수 있었을 텐데. 요모 렌지는 술잔을 가볍게 앞니로 깨물었다. 희미한 단내가 그의 코끝을 훅 적셨다.

 

솔직히 요모는 그를 더는 객석에서 볼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유는 딱히 없었고 그냥, 그런 느낌이 들었다. 원래 소극장에서 행해지는 연극이란 게 보통 그렇지 않은가. 한 번 보고 넘기면 그만인 것들.

그러나 남자는 몇 번이고 같은 극을 보기 위해 그 소극장을 찾았다. 요모는 항상 두꺼운 벨벳 재질의 커튼 뒤에서 그의 모습을 찾았다. 남자의 자리는 항상 변동이 많았지만 워낙 눈에 띄는 인상이라 그를 찾는 일은 아주 어렵지는 않았다.

희미한 조명을 받고 있는, 등받이조차 없는 길쭉한 나무 의자에서 남자는 항상 그 길다란 다리를 한쪽으로 꼬고 그 무릎 위에 예의 섬세한 손을 올려두고 극을 기다리고 있었다. 요모는 복잡한 문양이 그려진 타투를 한 번 더 눈에 담고 무대 뒤로 돌아 들어가곤 했다.

그 날은 그 극이 마지막으로 무대에 올라가는 날이었다. 요모는 마른세수를 했다. 마지막 무대는 뭐랄까, 항상 그의 속을 복잡하게 만들곤 했다. 시원섭섭한 감각이라고 하면 좋을까. 요모는 거의 모든 것에 쉽게 마침표를 찍지 못하는 유형의 사람이었다. 그의 속에는 지금까지 그가 스쳐 지나온 수많은 미련 따위가 남아있었고 아마 이 연극도 그 미련의 일종이 되어 그의 기억으로, 그의 몸으로 바뀌게 될 터였다.

다만 그 이번에 남는 미련은 하나가 아닌 둘이란 점이 요모를 더욱 괴롭게 했다.

그래도 무대엔 올라야 했다. 마지막이기 때문에, 미련이 될 무대이기 때문에 더욱더 무대에 올라야만 했다.

사랑이란 것은 요모가 참여한 모든 이야기의 뿌리가 되는 감정이었지만 요모는 그 감정을 아주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말이 정확했다. 어떻게 그 수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을 깨닫고, 자신과 전혀 다른 사람에게 그 마음을 고백하고 그와 함께할 수 있단 말인가.

지금까지 수없이 많이 사랑이란 단어를 발음해 온 요모였지만 요모는 그 사랑을 얘기할 때마다 뭔가 마음속에 턱, 하고 걸리는 것만 같은 느낌을 받곤 했다. 하지만 마지막 무대에서 말한 사랑은 다른 날의 사랑과는 뭔가 달랐다.

?

작은 의문 하나가 요모의 머릿속에 박혔다. 왜 자신은 사랑한다는 대사를 말하면서 객석에 앉아있는 그 남자를 찾았을까. 그것을 의식하는 순간 요모는 떨어지지 않는 시선을 자신 앞의 배우에게로 잡아끌어야만 했다. 입에 완전히 붙어버린 노래 가사처럼, 요모의 입에서는 막힘없이 다음 대사가 흘러나왔다. 좁은 무대 위에서 두 사람은 손을 잡았다.

요모는 그제야 자신의 손이 아주 조금 식어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은 왜 그 순간에 남자를 바라봤으며, 남자는 어째서 그때 자신에게 웃어 보였나. 왜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그의 귓가를 울렸으며, 어째서 사랑한다는 말을 하는 자신의 아랫입술이 전에 없이 바싹 말라 있었는가.

무대 인사를 하며 요모는 평소처럼 그가 있는 곳을 바라보았지만 그가 있던 자리는 텅 비어있었다. 대신에 그곳에는 아주 작고 하얀 꽃이 피어있는, 요모가 알지 못하는 어떤 나무의 얇은 가지가 크라프트지에 싸여 남자의 빈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

 

렌지 씨.”

요모는 저도 모르게 몸을 멈췄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낯선 목소리였는데, 요모의 심장은 어째선지 아주 바쁘게 뛰고 있었다. 그가 이름조차 모르는 수많은 꽃들이 요모를 둘러싸고 진하거나 옅은 향기를 풍기고 있었다. 요모는 장미 다발에서 고개를 돌려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보았다. 녹색 앞치마를 두른 채 커다란 꽃의 묶음을 양팔로 감싸 안고 있던 남자가 요모를 바라보고 고개를 가볍게 까딱였다.

꽃집을 했군요.”

요모는 자신의 말이 첫인사로서 너무 바보 같은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꽃집 안은 너무 더워서, 요모는 아주 엷은 땀을 흘리고 있었다. 남자는 꽃들을 조심스레 작업대 위에 올려놓곤 앞치마에 붙은 마른 잎들을 털어냈다.

, 사러 오셨나 봐요.”

…….”

천천히 보고 가세요.”

남자의 목소리는 요모의 생각보다 훨씬 톤이 높고 가벼웠다. 요모는 가볍게 떨리는 눈동자로 주변의 꽃들을 바라보았다. 남자가 두꺼운 가위로 꽃들의 줄기를 톡, 톡 끊어내는 소리가 들렸다. 날씨가 너무 덥고, 꽃의 향기는 너무 독했다. 요모는 머리가 조금 어지러운 것도 같았다.

저기, 그때 꽃은 잘 받았습니다.”

, 발견해주실 거라고 생각했어요.”

아직도 몰라서요. 이름을.”

우타에요.”

? 요모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슬며시 웃어 보였다.

농담입니다. 꽃사과에요. 이름.”

우타. 요모는 속으로 그 이름을 되뇌었다. 알기 쉬운 이름이어서 다행이었다. 꽃사과, 가 아니라 우타. 우타, 가 아니라 꽃사과. 요모는 그 하얗고 작은 꽃을 떠올렸다. 관객들이 모두 빠져나간 객석에 홀로 우두커니 자리를 지키고 있던 꽃다발.

요모는 꽃을 말리는데 재능은 없었다. 유감이었다. 대신에 요모는 노랗게 말라버린 꽃잎과 이파리를 떼어내곤 얇은 가지를 아주 조심스럽게 찬물에 씻었다. 꽃사과. 요모는 이제 자신의 침대맡에 놓인 그 가지의 이름을 알 수 있었다.

, 추천해주실 수 있나요?”

누구한테 선물하실 건데요?”

그냥예쁜 것으로, 아무거나 추천해주세요.”

요모의 말에 우타는 흠, 소리를 내며 고개를 가볍게 갸웃거렸다. 뭔가를 고민하는 그의 입매는 가볍게 힘이 들어가 그의 볼에 아주 얇은 보조개가 패었다. 잠시만요, 하고 요모를 두고 가게를 한 바퀴 돌고 돌아온 우타의 손에는 작은 꽃다발 하나가 안겨 있었다.

이번에는 보라색의 작은 꽃들이 진녹색 줄기의 끝에 모여 피어있는 꽃이었다. 요모는 그것을 받아들며 마치 잘못 손대면 우수수 떨어져 버릴 것 같은 꽃들이라고 생각했다. 바삭거리는 포장지를 만지는 요모의 손길이 마냥 조심스러웠다.

그럼. 이걸로.”

이름이 뭔가요, 우타 씨?”

스타티스. 꽃말은, 직접 찾아보세요.”

거기서 요모가 할 수 있는 것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밖에는 없었다.

스타티스. 이번에도 역시 기억하기 쉬운 이름이었다. 요모는 그 꽃을 원래 선물하려던 사람에게 선물하지 않았다. 꽃도 없이 축하 인사를 요모에게 남은 것은 상대의 가벼운 질책이 아니라, 그의 집 테이블에 곱게 올려져 있는 스타티스였다.

 

요모는 그 뒤로도 몇 번 우타의 가게에 들렀다. 그럴 때마다 우타는 항상 렌지 씨, 하고 요모를 나지막하게 불러 그의 시선을 끌었고 때문에 요모는 우타가 제 등 뒤에 서 있는 걸 알면서도 일부러 돌아보지 않기도 했다.

요모의 침대 옆에는 목이 긴 화병이 놓이게 되었고 우타가 추천하는 꽃들이 늘어감에 따라 두 사람의 관계는 점차 가까워졌다. 하지만 요모는 여전히 자신과 우타의 사이에 깊이를 알 수 없는 틈 하나가 존재한다고 느꼈다.

단 한 발만 용기를 내서 디디면 그쪽으로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깊이를 알 수 없어 발을 헛디뎠을 때 도대체 어디까지 추락할지 알 수 없는 틈이었다. 요모는 아무리 수많은 죽은 꽃들을 그사이에 던져버려도 그 틈을 채울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요모는 종종 슬플 때가 있었다.

하지만 수만 갈래의 미련이 생겨도 시간은 흐르는 법이었다. 요모는 그것을 체감하고 있었고 그러는 와중에 그의 다음 작품이 결정되었다. 그와 가까운 몇 명의 사람들이 그에게 축하를 담은 꽃을 보내왔다. 왜 그 꽃들이 하나같이 새빨간 장미인지. 요모는 제대로 관리되지 않아 끝이 노랗게 말린 꽃잎을 바라보며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렌지.”

우타.”

얇은 가디건을 걸친 우타의 손에서 두어 개의 열쇠가 절걱거렸다. 아주 천천히 가라앉던 노을이 이제는 완전히 그 모습을 숨겼고 어둠 속에 남아 있는 것은 곧 땅으로 떨어질 금성과, 그 뒤를 따라 떠오른 몇 개의 흐린 별들뿐이었다.

요모는 우타에게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갔다. 투명한 꽃집의 유리문 안에서 수많은 화분들이 숨을 죽이고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 시간에 꽃 사러 온 건 아닐 거고.”

. 그냥. 문 닫을 시간 된 것 같아서.”

그럼, 마중?”

그런 거지.”

우타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싫어하는 느낌은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요모는 생각했다. 열쇠가 돌아가며 잠금장치가 무겁게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요모는 공연히 자신의 옷자락을 만지작거렸다.

이만 갈까.”

. 우타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요모는 갑자기 자신만 혼자 알 수 없는 무대 위에 오른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는 그것을 내색하지 않으려 최대한 노력했고 다른 사람의 감정을 빌려오는 것은 그가 가장 잘하는 일 중 하나였다.

좁은 골목을 따라 두 사람의 발걸음 소리가 흐리게 울렸다. 드문드문 떠올라 있는 하얀 가로등 불빛의 아래에서, 요모는 다음 작품이 정해졌다는 소식을 그에게 전했다. 잘됐네, 하는 그의 반응은 퍽 단순했다.

꽃이나 보내줄까?”

됐어. 사러 올게.”

하긴 나 주소도 몰라.”

알려줘?”

. 이따 적어줘.”

우타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한동안 별 이야기 없이 나란히 걸었다. 사람도 그다지 없는 좁은 길이었다. 어딘가의 낡은 빌라에서 깜빡이며 켜진 형광등이 두 사람의 신발코를 비췄다.

갑자기 생각난 게 있는데.”

문득 통통 튀듯 요모보다 두세 걸음 앞서간 우타가 뒤를 돌아 요모를 바라보며 얘기했다. 요모는 별말 없이 눈썹을 밀어 올리는 것으로 말을 대신했다.

다음 작품 하는 기념으로, 연기력 테스트나 한 번 해볼까.”

갑자기?”

그냥 헤어지기 아쉽잖아.”

그 말에 요모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 근처에 그의 집이 있는 것일까. 물론 주위를 둘러본다고 해서 그의 집을 찾을 수 있을 리는 없었다. 요모는 그저 불이 꺼져 있거나 켜져 있는 수많은 창 중에 그의 것이 있겠거늘, 하고 짧은 상상을 해 볼 뿐이었다.

그런 요모의 생각들을 아는지 모르는지, 우타는 그저 유쾌하게 양팔을 벌려 보이며 고요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 렌지. 나를 연기해 봐.”

요모는 그 말에 긴 숨을 내쉬었다. 그때 요모를 스치고 지나간 것은 그의 손에서 시들어간 수많은 꽃들이었다. 대신에 이제는 하나하나의 이름을 외우고 있는 그 꽃들. 요모는 무심코 손끝으로 자신의 아랫입술을 훑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자신은 무대 위의 배우였고, 우타는 그 관객이었다. 마치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처럼. 두 사람의 관계 속에서 바뀌지 않은 것이 있다면, 그 정도였다.

사랑해, .”

요모는 밤공기가 자신의 달아오른 뺨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요모는 눈을 한 번 질끈 감았다가 떴다. 괜히 우타를 바라보기가 힘들었지만 평생 그를 안 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물아물 시선을 옮겨 바라본 우타는, 소리 없이 웃고 있었다.

렌지는 의외로 나를 잘 모르는구나.”

무슨 의미야?”

나는 고백할 때 얼굴 안 붉혀. 사랑해, .”

요모는 그렇게 말하는 우타의 얼굴도 평소보다 상기되어 있다고 느꼈지만, 그에 대해 별말 하지 않기로 생각했다. 그저 밤의 가로등 불빛이 흔들려서, 그래서 그런 거라고 생각하고 넘어가면 되는 일이었다.

이 상황에서 그렇게 중요한 일도 아니었고. 우타는 다시 몸을 빙글 돌려서 바로 옆에 있던 건물의 현관 앞에 섰다. 우타의 가벼운 발소리가 건물의 깊숙한 곳까지 울려 퍼졌다.

여기 우리 집. 렌지, 나 이만 들어가 볼게. 주소는, , 다음에 직접 놀러 갈게.”

그 말을 남기고 팔랑거리듯 건물 안으로 들어가던 우타가 갑자기 고개를 돌려 요모를 바라보았다. ? 요모의 말에 우타는 고개를 가볍게 왼쪽으로 기울이며 말을 꺼냈다.

, 꽃말은 찾아봤어? 스타티스.”

요모는 물론, 하고 그의 물음에 답했다.

 

 

 

***

풋풋한 이야기는 되게 간만에 써보는 것 같네요,, ,, ,, 그래서 사실 어케 써야할지 잘 모르겟엇음,,,,, 쩜쩜,, 그렇네요.

꽃사과와 스타티스의 꽃말은 직접 검색해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아 일부러 꽃말을 첨부하지 않습니다.

저는 이제 또 다른 원고를 하러 갑니다... 원고 지옥에 빠진 야기님을 구할 수 있는 건 우타요모밖에 업네..... (우타요모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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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나토  #우타  #도나토와 우타가 부자 관계라는 가설 기반

#우타의 본명이 타우-십자가라는 가설을 트친님을 통해 듣고 새벽에 시름시름 앓던 저는 이런 개날조 소설을 쓰게 된다.

 

 

 

가나안

 

Y A G I

 

 

 

1

 

  그 애의 울음소리는 아주 희미했다. 겨울, 러시아의 사나운 바람소리 안에서 그 애의 울음소리를 구분해내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덩어리 같은 눈이 펑펑 쏟아지는 날이었고 그 애는 고요한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성당의 차가운 문 앞에서, 그 애는 그렇게 얼어붙고 있었다.

  남자가 아이를 안아들자 그 애는 조금 더 큰 소리로 울었다. 마치 인간의 본능적인 동정심을 자극해 살아남고자 애쓰는 것 같았다. 검은 수단을 입은 남자는 믿지 않는 신을 속으로 떠올리며 하늘 높이 솟아있는 십자가를 바라보았다. 이 아이를 이곳에 버려두고 간 구울은 과연 누구일까. 하필이면 성당 앞이라니, 신을 믿기라도 하는 구울이 있단 말인가.

  무책임한 부모로구만. 인간의 아이도 아닌, 구울의 아이를 신이 굽어 살필 리가 없지 않은가.

  물론 남자가 다니는 성당에도 몇 명의 구울이 존재하긴 했었다. 하지만 그들이 진정으로 신을 믿는지 남자는 알 수 없었다. 신부인 본인조차 신을 믿지 않았다. 남자는 구울을 굽어 살피는 건 구울 밖에 없다고 믿었다. 지금 그 애에게 남자밖에 없는 것처럼.

  남자는 아이의 손을 잡았다. 아주 작고 여린 아이의 손이 남자의 손을 맞잡았다. 미약한 온기가 느껴졌다. 그 애의 울음소리는 조금씩 잦아들고 있었다. 어쩌면 죽어가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남자는 생각했지만, 그 애에게서는 아직 죽음의 냄새까지는 나지 않았다. 남자는 그것이 다행인지 불행인지 알 수 없었다.

  집으로 돌아온 남자는 아주 오랫동안 작디작은 그 애를 내려다보았다. 인간의 피를 목 뒤로 가뿐히 넘긴 그 애는 이제 새근거리는 소리까지 내며 잠들어 있었다. 그 애의 하얀 얼굴이 벽난로의 발간 불빛에 따끈하게 데워지고 있었다.

  남자는 그 애의 이름을 타우라고 지었다.

 

 

2

 

  나는 타우를 신의 이름 아래에서 길렀다. 수많은 계절이 흩어져 지나갔고, 타우는 나의 생각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나는 그것이 퍽 놀라웠다. 어쩌면 그것은 그의 이름을 타우라고 지어준 내 잘못일지도 몰랐다. 나는 종종 타우의 작은 몸집에 비해 그가 지고 가야 할 이름의 무게가 너무 무거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타우가 지고 있는 것은 비단 신의 이름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도나토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한 불신의 이름이었다. 나와, 신과, 이 세계와, 타우에 대한 불신이었다.

그래도 타우는 맑은 아이였다. 냉소적인 이름과는 다르게, 그는 제법 따스한 아이로 자랐다. 나는 내가 길러낸 것이 이런 모습을 띌 수 있다는 것이 영 이상하게 느껴졌다.

  “타우야.”

  내가 나지막하게 타우의 이름을 부르면 타우는 빨갛고 뜨거운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것이, 사랑인지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내게는 없는 감정이 타우에게는 있었다. 나는 부러 그것을 사랑 따위가 아니라 그저 어린 아이의 순진함 따위로 생각했다.

  “타우야, 성가대에 들어가 보지 않으련?”

  “타우가 들어가도 될까요?”

  타우가 짧은 발음을 최대한 정확하게 발음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보였다. 타우는 또래보다 말을 일찍 뗀 아이였다. 머리가 비상한 걸까. 나는 아주 조심스럽게 타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타우의 눈꼬리가 부드럽게 휘어지며 앳된 볼살이 둥그렇게 차올랐다.

  나는 그 맛을 알고 있었다.

  “물론. 타우는 잘 할 거야. 아버지랑 한 번 같이 해보자.”

  나의 작고 낡은 집에 피아노가 있을 리 없어서, 우리는 항상 성당까지 손을 맞잡고 걸었다. 오래됐지만 항상 완벽하게 조율이 되어있는 피아노의 울림 속에 타우의 높은 목소리가 섞여들었다. 그럴 때마다 성당의 창을 장식하고 있던 스테인드글라스가 아주 아름답게 반짝이곤 했다.

 

 

3

 

  그 애의 생일은 122일이었다. 남자와 그 애가 처음 만난 날이었다. 남자는 그 애에게 거짓말을 하지는 않았다. 그 애의 머리가 어느 정도 커졌을 때부터 남자는 자신과 그 애가 혈연 사이가 아니라는 점을 숱하게 말했다. 그래서인지 그 애는 절대 제 어미를 찾아 칭얼대는 일이 없었다.

  그저 단 한 번, 인간은 죽으면 하느님에게 간다고 하는데 그럼 구울은 죽으면 어디로 가는지 물어봤을 뿐이었다.

  “인간과 똑같단다.”

  “아버지, 신은 진짜로 존재하나요?”

  “물론이지. 하느님은 우리를 항상 굽어 살피고 있단다.”

  남자는 웃음 띤 얼굴로 그 애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나 그 애는 남자의 눈이 웃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아버렸다. 처음에 그 애는 남자가 혹시 자신의 말 때문에 화가 난 것이 아닌지를 생각했지만.

  그 애는 시선을 바닥으로 내리깔았다. 원래 까만색이었는지, 아니면 까맣게 변색되었는지 모를 나무 바닥의 틈이 그 애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 애는 자신 안의 신을 그 틈으로 우겨넣었다. 신은 부서졌고, 그 애의 몸을 지탱하고 있던 바닥도 아래로 꺼졌다.

  신을 믿지 않는 자에게는 지옥밖에 없었다. 그 애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 애는, 자신의 손으로 직접 그 신을 죽였다.

  지독한 눈이 내리는 날이었다. 러시아의 겨울은 항상 끔찍할 정도로 추웠다. 그래도 그 애의 생일마다 남자와 그 애는 항상 차가운 눈을 맞으며 함께 눈사람을 만들곤 했다. 마치 크리스마스에 트리를 장식하는 것처럼, 그들에게는 눈사람을 만드는 것이 일종의 의식과 같은 것이었다.

  그 애는 눈사람의 이름을 우타라고 지었다.

  남자는 우타라는 그 이름을 그 애의 입에서 처음 듣자마자 다소 미묘한 표정을 지었지만 너무 어렸던 그 애가 그것을 알아챌 일은 없었다. 그 애는 그저 코를 가볍게 훌쩍이며, 우타는 겨울마다 자신을 찾아오는 친구라고 얘기를 했다.

  그 우타가 하얗게 얼어붙은 창 밖에서 죽음과도 같은 추위를 견디는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날 이후 그 애는 더는 성당에 다니지 않았다. 남자도 굳이 그것을 강요하지는 않았다. 봄은 아주 천천히 찾아왔다. 밤이 다시 낮보다 짧아지기 시작하는 날에, 남자는 평소처럼 세수를 하며 문득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보았다.

  남자는 그날 이후 그 애가 자신의 이름을 제 입으로 부르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때서야 알아챘다. 남자는 그래서 타우, 하고 그 애 대신 그 애의 이름을 몰래 불러 뜨거운 수돗물에 흘려보냈다.

  그런 일이 있었음에도 두 사람은 여전히 서로의 등을 맞대고 잠을 잤다. 두꺼운 이불 속에서 두 사람의 꿈이 엉망으로 뒤섞였다. 남자가 미처 눈치 채지 못한 사이에 그 애는 부쩍 자라있었다.

 

  그것은 어쩌면 일종의 직감이나 계시 같은 것일지도 몰랐다.

  남자는 어느 날 창밖을 바라보며 자신과 그 애가 만든 눈사람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창문이 창틀과 함께 얼어있어서 열리지 않는 탓에, 남자는 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아야 했다. 그날은 간만에 눈이 내리지 않는 날이었다.

  그 애는 눈사람을 두 사람이 함께 만든 눈사람을 부쉈다. 남자는 그 애의 머리를 비상하다 생각한 것을 철회했다. 미련하긴. 어차피 봄이 오면 녹을 것이었는데.

  그 애는 그렇게 남자의 곁을 떠났다.

 

 

4

 

 

  우리는 낯선 나라에서 서로의 존재를 아주 잠깐은 모른 척하면서 지냈다. 우리는 서로를 모른 척하면서도 서로를 지켜보았다. 타우는 이제 없었다. 그의 이름은 우타, 라고 했다. 그 이름을 처음 듣고 나는 도저히 웃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확실히 타우보다는 훨씬 너다운 이름이었다.

  우타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분명 자신의 어깨에 짊어지고 있는 것이 달라진 탓이리라. 어쨌든 우타는 내가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더 괜찮아보였다. 그래도 우리는 마치 신경전이라도 부리듯이 서로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기만 했다.

  이런 상황에서 굽히고 들어가는 것은 으레 그렇듯 부모 쪽이었다.

  “당신은, 여전히 신을 믿나요?”

  “예전에도 말했잖느냐. 하느님은 우리를 항상 굽어보고 계신다고.”

  우타는 내가 세운 십자가를 올려다보면서 소리 없이 웃었다.

  “태양을 향해 너무 가까이 다가간 인간은 날개의 밀랍이 녹아서 떨어졌다고 하죠.”

  “, 이카로스의 얘기라면 나도 안다. 그리고 나는 인간이 아니라, 구울이지.”

  “당신은, 여전히 신을 믿나요?”

  우타의 눈동자는 여전히 붉었다. 나는 그 눈동자를 보면서 그저 웃었다. 그의 두 번째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린 시절 우리가 죽였던 신이 우리의 발밑에서 희미한 신음소리를 뱉었다. 그것은 마치, 고향이 아닌 땅에서 밟는 쌓인 눈의 소리와 비슷했다.

  우리는 그 이후로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다. 어느 누구의 의지 때문은 아니었다. 내가 길러낸 또 다른 아이 때문이었는데, 이후 그 아이는 종종 내게 왜 자신을 죽이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습관인가.

  어쩌면 나는 그 아이에게서 죽은 타우를 찾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쨌든 그 애도 굉장히 눈빛이 따뜻하고, 맑았던 아이였으니까. 어쨌든 그 아이에게 대답해 줄 수 있을 만한 것은 유감스럽게도 내게도 없었다.

  어쨌든 그 아이를 마주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아몬이, 타우가 나를 더 이상 아버지로 불러주지 않는다는 것은 내게 그렇게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너희는 나를 이제 당신이라고 불렀고, 나는 사실 아버지보다 그 호칭이 훨씬 더 마음에 들었다.

  우리는 그 형태가 어떠하든 함께하고 있었다. 살아가고 있었다. 고요한 독방에서 나는 짙은 숨을 내뱉었다.

 

 

 

 

  타우야.

  타우야. 내가 너를 믿지 않는 것처럼, 언젠가 너도 나를 믿지 않게 될 것이다. 그래도 네 이름이 타우(십자가)인 것은 내가 너를 끝까지 업고 갈 생각이기 때문이다. 타우야. 나는 너의 이름을 타우라고 지으며 네 어깨에 억지로 무거운 짐을 얹어두었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봤더니 그 짐을 지고 가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이었다. 이 나이가 되어서도 새로운 것을 깨닫곤 하는구나.

  나는 내가 오르는 길이 비록 골고다 언덕일지라도 나는 너와 함께 갈 생각이다. 타우야, 그러니까 너는 내 수레바퀴였고, 운명이었다. 나는 어쩔 수 없는 네 아버지인 모양이다. 사랑한다는 말은 하지 않겠다. 우리 사이에 그런 것이란 존재하지 않았지. 네가 아는 것처럼 나는 그렇게 감상적인 사람은 아니다.

  그저 나는 네가 나의 십자가였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었다. 타우야.

  너는 이 사실을 알고 있을까.

 

  몰라도 상관은 없다. 타우 네가 이 편지를 찾지 못해도 좋다. 나는 이 편지를 너와 내가 항상 눈사람을 만들던, 그 땅 아래에 묻어둘 것이다. 이 편지는 아무도 더럽히지 못할 것이야. 나는 이렇게 약속의 땅을 만드는구나.

  내게 또 약속이란 게 있다면.

  그것은 타우, 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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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구울 전력 60분_ 우연의 일치 #아몬우타? 우타아몬? 

#도나토와 우타가 부자 관계라는 가설이 맞다면, 아몬과 우타는 어린 시절에 만나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 기반 (그러니까 날조)

 

 

Bittersweet

 

Y A G I

 

 

1

 

 

  필연은 우연을 가장한 옷을 입고 온다.

  우연이라고 취급된 것은 우연이 아닌 필연이다.

 

 

2

 

 

  내겐 어린 시절 아버지의 서재에 있던 책의 구절을 읽으며 이게 무슨 개소리야, 하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있었다. 아버지의 책들은 항상 알 수 없는 말들이 적혀있었고 나는 간간이 그것들을 펼쳐 공연히 욕설을 지껄이곤 하였다. 신을 믿지 앉는 자의 삶이란 그랬다. 모두들 함께 손을 모으고 신에게 봉사하는 것을 기도하고 있을 때, 나는 홀로 제대로 기억도 나지 않는 유치한 욕설을 내뱉곤 했다.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유난히 옛 생각이 많이 나는 날이었다. 이 모든 게 다 그 애 때문이었다. 다 그 애가 나를 잡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왜일까. 왜 그 애는 날 그대로 가게 두었던 것일까.

 

  나의 아버지는 나를 거의 유기한 것과 다름없는 사람이었다. 내 주위에는 항상 어디선가 흘러들어온 아주 어린 아이들이 있었고 아버지는 그들을 선선히 받아들였다. 그들이 내게 어떤 질투심을 느끼지 않도록 하기 위해, 아버지는 내가 아주 어린 나이였을 때부터 내게 자신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말라는 말을 했다.

  내게 있어 아버지는 아버지라기보다는 신부님이었던 존재였고, 그래서 나는 아버지를 미워했다. 아버지는 구울보다는 신에게 더 가까이 있는 존재였던 것 같아서, 나는 조금 외롭기도 했다.

  그 애는 나와 비슷한 처지의 아이였다. 그 애도 부모가 없는 인간이었고 그 애가 처음 들어왔을 때 나는 그 애와 다른 여자애를 두고 누가 먼저 고아원에서 나가게 될지를 재고 있었다. 물론 그 고아원에서 나간다는 것은 다른 어른들에게 입양된다는 말이기도 했고, 그게 아니라면 아버지와 나의 뱃속으로 들어오게 된다는 말이기도 했다. 재미있게도, 대부분은 후자였다.

  구울과 인간의 관계라는 게 그런 게 아닌가? 필연이라면 이런 것이 필연이었다. 구울과 인간이 있으면, 인간이 먹힌다. 인간은 구울에게 먹히기 위해 있는 존재는 아니었지만, 구울은 인간을 먹기 위한 존재였다. 그러니까 구울의 입장에서 인간이 있으면 먹게 되는 건 당연한 일인걸.

  그러나 그 애와 내가 만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그 애는 나의 생각보다 오랫동안 그 고아원에 남아있었고, 조금 쓸쓸해보였다. 그래서 나는 그 애에게 관심이 갔다. 우리는 둘 다 부모를 잃은 존재들이었고, 그 애가 나보다 나이가 조금 더 많아 보였지만 어쨌든 비슷한 나이대의 소년들이었으니까.

  “뭐해? 기도하는 거 재밌어?”

  “재밌어서 하는 게 아니라……. 그러니까 너는, 이름이.”

  “우타야.”

  “우타. 나는, 아몬 코타로야.”

  그 애의 이름은 아몬 코타로였다. 아몬드? 아몬드는 내가 먹지 못하는 것이었고 나는 그래서 그 이름이 조금 별나다고 생각했다.

  이름이 별난 그 애와 나는 점점 가까워졌다. 그 애의 까맣고 둥근 눈동자를 볼때마다 나는 미묘한 감정에 휩싸이곤 했다. 말로서 표현하기 힘든, 아주 여러 색이 섞여있는 감정이었다. 그래도 굳이 정의 내리자면 그것은 아픔이었다. 아픔. 그 애를 보면서 왜 그런 감정을 느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 애를 보면 심장 한 켠이 저릿하게 아파왔다.

  그 애는 내게 우리가 친구라고 말했고, 나는 내가 구울이란 것을 말할 수 없었다.

  “아버지. 코타로는 안 돼.”

  “?”

  “친구래, 우리가.”

  아버지는 한참동안 나를 내려다보았다. 흐음, 하고 아버지는 바람의 울음소리와 비슷한 소리를 내며 자신의 턱을 긁었다. 나는 아버지가, 내가 그 애를 먹어버릴까봐 두려웠다. 그러면 지금까지 내가 느껴왔던 아픔이 나를 완전히 잡아먹어버릴 것만 같은 직감이 그때의 내게는 있었다.

  “그래. 알았다.”

  아버지의 안에서 무언가의 스위치가 딸깍, 하고 내려간 모양이었다. 나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아버지가 아니라, 신부님이지, 아가. 아버지의 그 말에도 나는 웬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아버지를 떠난 건 무슨 이유였더라. 잘 기억도 나지 않는 사소한 이유였다. 그저 오랫동안 청소하지 않은 다락에 수년간 쌓여 와 닦아내도 닦아내도 사라지지 않는 먼지처럼 그 이유들이 쌓여왔을 뿐이었다.

  우리는 어차피 남남이었고, 나는 아버지를 떠났다.

  마지막 밤에 나는 그 애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 애의 단정한 입매를, 정직한 한 마디 한 마디를 내뱉을 때마다 그에게서 나던 희미하고 달콤한 향기를. 나는 결국 그 애를 먹어버리지 못했으나 그것이 후회가 되지는 않았다.

  사춘기란 게 으레 그렇듯, 어린 내게 소중했던 것들은 더 이상 과거와 같은 빛을 띠지 못했고 그래서 나는 그 애를 녹이 슨 십자가 아래에 두고 떠날 수 있었다.

 

 

3

 

 

  그랬던 그 애를 다시 만났다. 이것 역시, 필연이라기보다는 우연이었다. 나는 아버지가 진즉에 그를 죽여버렸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아버지는 내 생각보다 나를 미워하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아버지가 미워하는 것 따위는 없었을지도 모르지. 어쨌든, 그는 신부였으니까.

  그 애는 나를 보고 아주 동그랗게 눈을 떴다. 어렸을 때보다 많이 늙어있는 그 애의 얼굴에 나는 그 모르게 웃음을 지었다. 그 애는 여전히 내가 구울일 것이라는 생각을 아주 조금도 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너는많이 변했는데, 어째 그대로 같달까…….”

  “그러는 코타로 군이야 말로, 그대로구나. 어렸을 때랑 아주 똑같아.”

  “잘 지냈어?”

  “그럭저럭.”

  너무 흔해서 따분한 재회였고, 나는 그 애가 여전히 그다지 재미없는 유형의 인간이라는 것에 감사했다. 그 애는 여전히 그 고아원에 있던 모든 아이들이 다 피해자라고 생각하겠지. 우타라는 단 하나의 어린 구울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꿈에도 모른 채.

  나는 그것이 조금 짜증이 났다. 이유는 몰랐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아버지 얘기를 했다. 그 애가 아는 우리의 공통사라고는 그것밖에 없었다. 그 애는 주저하다가, 말하기 조심스럽지만 그래도 나도 알아야할 사실이 있다며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구울이었대.”

  “아버지가?”

  “생각보다 별로 안 놀라네. 하긴 너는 어렸을 때부터…….”

  “당연하지. 아버지니까.”

  조금 과한 심술을 부려버렸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나는 그 애의 입매가 단단히 굳어가는 것을 보았다. 내가 말하는 아버지가 자신이 말하는 아버지와는 다른 의미라는 것을, 눈치가 빠른 그 애는 금방 알아채주었다.

  “이만 가볼게. 즐거웠어.”

  나는 그 애에게서 등을 돌렸고, 이제는 구울 수사관이 되었다고 자신을 소개했던 그는 나를 잡지 않았다. 이것은 내 안에서 아주 오랫동안 해결되지도 않고 그저 아프기만 한 수수께끼로 남았다.

 

 

4

 

 

  그 애와 내가 다시 마주한 것은 그 애가 우리의 몸이 되고 난 이후였다. 달도 죽어버린 까만 밤에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했다. 건물의 갈비뼈 쯤 될 철골이 하얗게 빛나는 폐건물이었다.

  4구에 알 수 없는 구울이 흘러 들어왔대서 인사차 행한 걸음이었는데, 바로 그 구울이 그 애였을 줄이야. 어렸을 때 읽었던, 이해할 수도 없었고 공감되지도 않았던 문장이 문득 내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건 정말, 우연인가?

  그 질문에 답을 내리지 못한 채, 우리는 무너져가는 건물에 앉아 빛나는 도쿄의 야경을 함께 바라보았다.

  “구울이 되어보니까 어때?”

  “복잡한 심경이야.”

  “인간은 먹어봤어?”

  “.”

  대답을 주저하는 그 애는 그런 몸이 되고 나서도 변함없이 강직해보였고, 그래서 연약해 보이기도 했다. 코타로, 나는 그런 너를 싫어하진 않았어. 나는 그때 왜 나를 놔주었는지 네게 묻고 싶었지만, 그것 말고 다른 질문을 했다.

  “있잖아, 코타로. 우리는 아직도 친구야?”

  “글쎄. 있잖아, 우타. 너는 그때 같이 살던 친구들을 먹었나?”

  “당연하잖아. 그래서 내가 싫어졌어?”

  “……글쎄.”

  “그때 같이 입양가자고 약속했는데, 같이 구울이 되어버렸네.”

  그 애는 그 말엔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그 애의 올곧은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그 애도, 많이 아파 보였다. 많이 아파왔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 아픔의 원인이란 무엇일까. 나는 머릿속이 복잡해져서 먼지를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애의 시선이 내게 붙었다.

  “이만 가볼게. 즐거웠어, 코타로.”

  “우타.”

  그 애는 그제야 나를 잡았고, 나는 그 애에게 잡힐 만큼의 믿음이 없어서 그 애를 그대로 떠나려 했다. 아픔은 아픔으로 남기고, 과거의 기억은 먼지가 쌓이지 않도록 아주 공을 들인 상자 안에 넣어 평생토록 보관할 생각이었다.

  그러려고 했는데.

  이 모든 것은 필연이었나.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만약에 이것이 필연이라면, 이 희극의 끔찍한 개연성은 도대체 어느 웃기는 작자의 손에서 태어났단 말인가. 나는 그것이 아버지가 말했던 신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

  그것이 신이라면, 나는 그 신을 저주하리라. 지금껏 그래왔던 것보다 더욱 그를 미워하리라.

  내가 이렇다면 너는 어떨까, 코타로.

 

 

5

 

 

  나는 너의 아랫입술을 가볍게 깨물었다.

 

 

6

 

  이제 그곳에 단맛은 없었다.

 

 

 

 

 

***

주제가 우연의 일치인데 그냥 우연만 가지고 써버린 것 같기두 하구 그렇네요... (머쓱) 낮에 풀었던 썰을 기반으로 한 글입니다. 여러분, 아몬우타하시구 겸사겸사 우타요모도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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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타요모  # 10대 우타요모~  #진단메이커

 

 

思春期

; 사춘기

 

Y A G I

 

 

요모가 4구를 찾아왔다는 소식은 요모의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우타에게 전해졌다. 우타는 눈을 돌려 달력을 바라보았다. 간만이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댔나. 안 그래도 요즘 부쩍 연락이 줄어든 요모에게 퍽 섭섭함을 느끼고 있던 차였다.

렌지는 항상 먼저 신경을 써줘야 한다니까. 손이 많이 가는 아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우타는 으쌰, 소리까지 내며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검은 뿌리가 내려오기 시작하는 우타의 머리카락이 그의 어깨 위에 차분하게 얹혔다.

요모가 4구를 찾아왔다면 어차피 갈 곳은 단 한 군데 밖에 없었다. 4구에서 요모를 봤다는 소식이 들리면 우타는 마치 사전에 약속이라도 한 양 그곳을 찾았다. 우타는 요모가 왜 요모와 아리마가 마지막으로 얼굴을 맞댄 그곳으로 가는지 알지 못했다. 그에게 그곳은 결코 기쁜 장소가 아닐 터인데.

우타 씨, 갈 거예요?”

안 오면 내가 가야지. 어쩌겠어. 바쁘신 몸인데.”

이번에는 저도 같이 가도 돼요?”

다음에, 다음에.”

우타 씨는 맨날 다음이래.”

우타는 맞은편 소파에 늘어져 있던 남자의 말을 적당히 넘기며 문을 나섰다. 남자는 과장되게 입술을 내밀어 보이다가도 우타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아직 요모를 기억하고 간간이 떠올리는 구울들이 있기는 있었다. 주로 잔정이 많은 녀석들이었다. 굳이 기억할 필요도 없는 것들을 기억하며 괴로워하는 녀석들.

어느덧 많이 차가워진 밤바람을 맞으며 우타는 자신도 그런 부류와 아주 동떨어져 있는 것은 아니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저 흘러가는 생각이었다. 한두 발자국 더 걸어가면 사라져버릴 생각들. 우타는 많은 것을 굳이 기억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기억에 남아버리는 것들이 있기 마련이었다.

 

-.”

우타는 무너져가는 벽 위에 걸터앉아있는 요모를 부르며 손을 크게 흔들어 보였다. 요모는 그저 우타, 하고 들릴 듯 말 듯 한 소리로 그의 이름을 읊조릴 따름이었다. 우타는 가뿐히 벽을 타고 올라 요모의 곁에 앉았다.

달빛 아래에 이렇게 나란히 앉아있는 것도 간만이어서, 우타는 묘하게 기분이 들떴다.

렌지는 볼 때마다 자라는 것 같네.”

그럴 나이니까.”

그렇지. 쑥쑥 자라라, 우리 렌지.”

우타는 장난스럽게 요모의 머리를 툭툭 두드렸다. 요모는 발끈한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그뿐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한 소리를 덧붙였을 텐데 말이지. 우타는 괜히 자신을 두고 요모 혼자 훌쩍 자라버린 것만 같았다.

이런 거라면 자라지 않았으면 좋았을걸. 우타는 자신과 요모의 거리가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것보다 더욱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이대로 계속 가다 보면 요모가 사라져버릴 것만 같았다.

사라져버려도, 상관은 없었지만. 구울의 세계에서 누군가 사라지는 것이 그렇게 특별한 일도 아니었고. 우타는 잠시 자신의 발끝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여긴 어쩐 일이야?”

그냥옛날 생각이 나서 들렀어.”

렌지에게 나는, 옛날인가?”

요모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그에게 곤란한 질문을 한 모양이었다. 우타는 그런 그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도 즐겁기는 했다. 우타는 구부리고 있던 몸을 길게 폈다. 요모는 그저 팔다리를 쭉 뻗고 상쾌한 표정을 짓고 있는 우타를 가만히 바라볼 따름이었다.

요시무라 씨는, 렌지한테 잘해줘?”

. 배우는 것도 많고.”

뭘 배우는데? 나도 알려주라.”

그냥. 이것저것.”

비싸게 구는 거야? 치사해, 렌지. 옛날 친구한테.”

평소와 다름없는 시답잖은 얘기였다. 요모는 워낙 말이 없는 편이어서, 이번에도 대화의 주도권은 우타에게 있었다. 우타는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풀어내기 시작했다. 주로 요모를 기억하는 4구 구울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이제 두 사람 사이에 공통된 주제라고는 그것밖에 없었다. 벗어나지 못한 과거의 미진한 기억들. 우타는 4구를 떠난 요모가 과연 이런 주제에 관심을 가질까 싶어 태연하게 눈동자만 넘겨 그를 바라보았지만, 입을 꾹 다물고 흐릿한 초점으로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는 요모의 표정을 읽기는 힘들었다.

결국 두 사람 사이를 어두운 침묵이 파고들었다. 두 사람이 함께 지낼 때만 해도 그들의 침묵은 이토록 어둡진 않았다. 마침 달빛도 어두워서, 우타는 속이 쓰렸다. 왜 자신의 속이 이토록 쓰린 걸까. 우타는 자꾸 요모의 그림자만을 붙잡고 늘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요즘 들어이런저런 생각이 많이 들어.”

고민 상담은 언제든 환영이야.”

침묵을 깬 것은 의외로 요모 쪽이었다. 고민이 있다는 말에 우타의 목소리가 한 톤 높아졌다. 친구의 고민을 이렇게 기뻐하는 것도 이상했지만, 어쨌든 우타는 요모와 이야기를 이어갈 수 있었다.

우타, 너한테 만큼은 말 못 하겠는데.”

다른 사람한텐 할 수 있다는 거야? 그거 섭섭한걸.”

자신에게 말하지 못할 고민이라. 우타는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우타는 문득 요모가 자신을 더 이상 찾아주지 않을까 봐 두려웠다. 요모가 자신을 만나는데 더 이상 즐거움을 느끼지 못할까 봐 두려웠다. 자신의 눈앞에 있는 요모 렌지가, 우타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요모가 아니게 될까 봐 두려웠다.

우타는 조용히 주먹을 쥐었다. 짧게 자른 손톱이 손바닥 아래를 거칠게 긁었다. 그에 따른 통증도, 압박감 같은 것도 없었다. 그의 손바닥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 것만 같았다. 그래서 우타는 무심코 요모의 어깨에 제 머리를 기댔다.

렌지 몸은, 생각보다 딱딱하진 않네. 우타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우타는 요모가 손끝으로 시멘트의 우둘투둘한 겉면을 훑는 것을 느꼈다. 요모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로부터 한참 뒤의 일이었다.

우타. 우린아직도 친구지?”

아니, 이제 친구 아니야.”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우타 자신도 왜 그랬는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우타는 멱살을 잡듯 요모의 옷깃을 끌어당겼다. 그의 얇은 피부를 통해 가느다란 손등뼈가 달빛 아래에서 하얗게 드러났다. 그럼에도 우타의 목 위에는 마냥 다정함과 부드러움만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요모도 마찬가지였다.

서로의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렸다. 요모는 팔을 뻗어 우타의 어깨를 껴안았다. 우타의 손에서 천천히 힘이 빠져나가서, 두 사람은 서로에게 더욱 가까이 붙을 수 있었다.

 

달아오른 뺨 때문에 공기가 차가웠다. 별 꼴이구만. 자조적인 생각이었다. 싫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다시 처음의 거리를 되찾은 두 사람의 시선은 서로에게서 멀리 떨어진 어딘가를 배회하고 있었다.

그렇지. 사실은 나도, 우타랑 더 이상 친구로 남고 싶지는 않았어.”

오늘따라 유난히 요모가 말이 많은 날이었다. 우타는 눈동자만 돌려 요모를 바라보았다. 아래쪽 어딘가를 내려다보는 그의 표정이 제법 편안해 보였다. 하여간 렌지, 어깨에 잔뜩 들어가 있던 힘이 빠졌다니까.

혹시 고민거리가 이거였어?”

.”

이런 거라면 말 못 할 만 해.”

우타의 말에 요모가 작은 소리를 내며 웃었다. 요시무라 씨가 렌지에게 준 것은 무엇일까. 그게 뭔지는 몰라도, 우타는 그것이 자신이 평생 누릴 수 없는 무언가일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요시무라 씨에게 느끼고 있던 건, 질투였나.

그런 사람에게 질투를 느끼는 자기도 웃긴 사람이지만.

물러졌네, 렌지.”

그래서, 싫어?”

싫다는 말은 아니야. 절대.”

우타는 뒤로 손을 짚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물러진 사람은 요모 렌지, 그뿐만이 아니었다. 애초에 단단해지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없기는 했지만. 사무라이도 아니고, 말이야. 우타는 요모를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리고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제멋대로라니까, 렌지는.

있잖아. , 그거 알아? 렌지는 내가 만나 본 사람 중에 제일 재밌는 사람이야.”

그래서 날 좋아하는 건가?”

좋아한다니……. 바보 요모답게, 직설적으로 말하는구나. 우타는 태연하게 농담이나 할까 하다가 마음을 고쳐먹었다. 요모가 이렇게 나와 주는 지금이 아니라면, 도대체 언제 이런 말을 해보겠는가.

우타는 후회하지 않고 싶었다. 저물어가는 초승달을 가만히 바라보던 우타가 고개를 돌려 요모를 바라보았다.

아니. 그냥 렌지 옆에 더 있고 싶어서. 렌지는 어때?”

비슷해.”

확실하게 말해줘.”

우타 너한테특별한 사람이 될 수 있을지 궁금했어.”

이제 됐네, 특별한 사람. 그러면 고민 해결?”

, 고민 해결.”

만약에 자신도 요모가 받은 것을 가질 수 있다면. 그것은 요모 렌지에게서 내게로 오는 건가.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우타는 희미하게 웃었다. 렌지에게라면, 그런 것을 받아봐도 좋을 것 같았다.

 

 

**

 

 

생각보다 쓰는데 시간이 더 걸렸다. 쓰고 보니 사춘기네요~ 진단메이커 + 푸딩머리 우타가 보고싶어서 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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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구울 전력 60분_ 교차로  #아리마/하이루, 그들이 죽고 난 이후의 이야기

 

 

쉬어가기

 

Y A G I

 

 

  아리마 키쇼는 이곳이 사후세계란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아리마가 있는 곳은 그저 하얀 공간이었다. 아리마는 손으로 차갑고 깨끗한 바닥을 쓸어보다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위의 공기가 흐물거리며 느리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건, 안개인가. 짧은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몸을 훑어보던 아리마는 문득 쓰게 웃었다. 죽고 나서도 하얀 코트라니. 설마 수의를 이걸로 입힌 건 아니겠지. 미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무심코 매만진 목덜미가 깨끗한 것만은 다행일지도 몰랐다.

  죽고 나면 개운한 기분이 들 줄 알았는데 딱히 그런 것도 아니었다. 아리마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쿠인케가 있어야만 할 것 같은 손은 웬일로 텅 비어있었다. 죽고 나서도 그 일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아리마는 그것 역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할 일도 없었고 해야 할 일도 없어서 아리마는 일단 앞으로 걸었다. 어차피 죽었는데 뭐가 무서울 게 있을까 싶어서, 아리마는 그 하얀 어둠 속을 거침없이 걸었다. 자신의 발소리가 투명하게 울리고 있었다.

  아리마는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은 살면서 그다지 남겨 놓은 것이 없어서 지금 이 길도 이렇게 비어있는 모양이었다. 아래 세상에 버리고 온 원망들은 자신을 쫓아 여기까지 따라오진 않은 모양이었다.

  아니면, 이곳은 그들이 만들어 낸 지옥일지도. 아리마는 아주 잠깐 그런 생각을 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을 아리마는 그저 걸었다. 자신이 들이쉬고 내쉬는 숨이, 죽은 뒤에도 숨은 쉬어야 한다는 사실이 아리마는 퍽 낯설었다. 죽은 뒤에는 아무 것도 없었으면 했는데. 아리마를 진득하게 잡고 있는 생각이었다.

 

  시간 감각이 죽어버려 아리마는 자신이 얼마나 이 길을 걸어왔는지 알 수 없었다. 아리마는 문득 뒤를 돌아 자신이 걸어온 길을 바라보았다. 걸어갈 길과 다를 바 없는 풍경에 아리마는 순간적으로 방향 감각을 잃을 뻔 했다. 어디로 가던 다를 건 없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아리마는 앞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정돈되지 못한 숨이 턱 아래까지 차올랐다.

  힘을 주어 땅을 딛을 때마다 아리마의 머릿속을 잡고 있던 생각들이 빠져나갔다. 자신이 지금까지 빼앗은 수많은 삶에 대한 생각과 남겨 놓고 온 것들의 생각들이 뒤죽박죽 엉켜 아리마의 귓바퀴를 타고 흘러내렸다. 아리마는 머리를 흔들었다.

  이곳에 존재하는 건 그저 아리마 키쇼, 나 혼자 뿐이야. 아리마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아리마 주위를 감싸고 있는 풍경은 그저 하얗기만 한 공간이 아니었다. 그는 짧은 숨을 들이마셨다. 익숙한 길이었다. CCG에서 그렇게 멀리 떨어지지 않은 대로변이었다.

  항상 사람이 많은 곳이었는데 지금은 아무도 찾아볼 수 없었다. 길옆의 모든 가게들은 까맣게 불이 꺼져 있었다. 아리마는 자연스럽게 CCG를 향해 걸었다. 이 길이 제 앞에 나온 이유가 있다면, CCG를 찾아 가라는 뜻이 분명했다.

  죽어서까지.

  아리마가 저주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운명 밖에 없었다. 아리마의 거침없는 발걸음을 잡은 것은 멀리서 누군가의 작고 가벼운 발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아리마는 교차로에서 발을 멈췄다. 이대로 쭉 앞으로 나가면 CCG 건물이 보이기 시작할 터였다. 하지만 발소리는 그의 오른쪽에서 들렸다.

  아리마는 교차로의 중앙에서 자신의 정면과 오른쪽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아리마의 고민은 그렇게 오래 가지 않았다. 아리마가 마음을 정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오른편에서 아리마를 향해 다가오는 흐릿한 실루엣은 아리마의 눈에 퍽 익숙했다.

  “하이루.”

  “아리마 씨는 행동력이 너무 좋아서 탈이라니까. 한참 찾았잖아요.”

  아리마는 하늘하늘한 걸음걸이로 걸어온 그녀의 모습을 보며 의외라고 생각했다. 끔찍한 얼굴을 한 죽음이 아니었다니. 아리마는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하이루, 그녀는 가볍게 뒷짐을 지고는 아리마를 향해 웃어보였다. 한결같이. 아리마는 마음이 편해져 그녀를 따라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죽고 나니 이런 경험도 하는군. 그의 짧은 감상이었다.

  “계속 기다렸어요. 누구 하나쯤은 마중 나오는 것도 좋을 것 같아서.”

  그 말을 하며 하이루는 아주 천천히 아리마를 향해 다가갔다. 아리마는 그 자리에 멈춰 서 하이루가 가까이 다가오기만을 기다렸다.

  “내가 언제 죽을 줄 알고.”

  “평생 살지는 못할 거니까요. , 아리마 씨. 이건 선물.”

  하이루가 뒷짐을 지고 있던 팔을 풀어 아리마의 머리에 무언가를 씌웠다. 옛날부터 어울릴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녀의 목소리가 얇은 날개를 가진 나비처럼 아리마의 귓가에 내려앉았다. 아리마는 제 머리 위에 얹혀 있는 것을 손끝으로 만졌다. 아주 조금 뻣뻣하면서도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화환이었다.

  “이런 곳에서 꽃은 어떻게 구해서.”

  “어라. 여기, 사방이 꽃인걸요.”

  그녀의 말에 아리마는 퍼뜩 주위를 둘러보았다. 과연, 그녀의 말대로였다. 하얀 꽃잎이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에 날려 공기 중에 흐트러졌다. 익숙한 냄새가 났다. 백일정. 하이루는 이곳을 그리워하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갈 곳을 잃은 자신과는 다르게.

  “계속 여기서 기다린 거야?”

  “여기 있으면 아리마 씨가 찾아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 결국 제가 찾으러 나갔지만.”

  “그거, 미안하게 됐네.”

  아리마의 사과에 하이루는 그저 맑게 웃어 보일 뿐이었다. 이럴 때는 미안하다고 하는 것보다 고맙다고 하는 게 훨씬 더 좋아요. 하이루의 말이었다. 하이루 네가 나보다 사회성이 조금 더 떨어진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리마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하이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고마워. 잘 했어.”

  “, 방금 칭찬해 준 거예요?”

  하이루의 커다란 눈동자가 동그랗게 열렸다. 아리마는 멀뚱히 그녀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 아리마 씨한테 칭찬 받는 게 소원이었는데.”

  “IXA를 갖는 게 소원인 줄 알았는데.”

  “둘 다 소원이에요. 생전 칭찬 한 번 안 해주던 사람이 무슨 일이람. 역시 사람이 죽으면 성격이 갑자기 바뀐다더니, 그 말이 맞나 봐요.”

  “성격이 갑자기 바뀌면 죽는다는 말이 맞는 거야.”

  “그거나 그거나, 네요. 그나저나 아리마 씨. 화환 만들 줄 알아요? 모르면 제가 알려 줄까요?”

  응, 하고 웃어 보이며 아리마는 하이루의 머리를 꾹 눌렀다. 이런 걸 할 여유도 지금까지는 없었으니까.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며 웃던 하이루가 아리마의 손을 잡아 당겼다.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아리마 씨를 기다리면서 연습 많이 했어요. 화환 만드는 거.”

  꼭 예전으로 돌아간 것 같다고, 아리마 키쇼는 생각했다.

 

  “, 이제 갈 시간이 됐나 봐요.”

  멀리서부터 어떤 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무거운 것이 덜컹거리면서 움직이는 소리였다. 그 소리르 들은 하이루가 가뿐하게 몸을 일으키는 것을, 아리마는 그저 바라만 볼 따름이었다. 아리마의 손끝에서 파랗게 짓이겨진 꽃대가 힘을 잃고 고개를 꺾었다. 아리마는 하이루를 따라 자신의 등 뒤를 바라보았다.

  아리마의 뒤에 있는 것은 벌건 녹이 드문드문 슬어 있는 낡은 기차였다. 요즘도 이런 기차가 다니긴 하는 걸까, 하는 정도로 낡아 보이는 기차. 선로도 없이 달리는 기차 아래에서 키가 작은 꽃들이 뭉개졌다. 아리마는 그것이 묘하게 마음이 쓰였다.

  “어딜 또, 가야하는 거야?”

  “계속 여기에 있고 싶어요?”

  하이루는 아리마에게 손을 내밀었다. 일어나라는 표시였다. 아리마는 그녀의 뜻을 읽었음에도 그녀의 손을 잡는 것을 주저했다. 여기는 평화로운데, 계속 여기 있으면 안 되는 걸까? 하이루처럼 다른 사람들을 기다리면서 줄곧 여기 있는 건.

  하지만 하이루는 아리마를 더 이상 기다리지 않을 모양이었다. 그녀는 아리마의 손을 잡아 끌곤 그의 몸을 일으켰다. 만들다 만 화환이 그의 손에서 떨어졌다. 기다렸다는 듯 기차의 문이 힘겹게 열렸다.

  “아리마 씨랑 기차 여행도 해보네요.”

  “이건어디로 가는 기차지?”

  “그건 저도 몰라요. 저도 처음 타는 거라.”

  하이루가 먼저 기차 안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아리마도 어쩔 수 없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 모든 객석이 아직 텅 비어있는 기차는 의외로 깨끗했다. 아리마는 문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고, 하이루는 통로를 건너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옆자리에 앉지, 왜 거기에?”

  “아리마 씨 얼굴 마주보면서 가고 싶어서요.”

  저런 녀석이었지. 그녀의 말에 아리마는 작게 웃었다. 그 사이에 기차의 문이 닫히고 기차는 몸을 움직일 준비를 끝내고 있었다. 하이루는 마냥 신이 난 모양이었다. 아리마는 앞뒤로 천천히 발을 흔드는 그녀의 모습을 잠깐 바라보았다.

  “언제는 우리가 알고 갔던가요.”

  “뭐가?”

  하이루는 잠시 창밖을 돌아보고 있었다. 그 탓에 그녀의 목소리가 조금 희미하게 들리는 것도 같았다.

  “이 기차요.”

  “. 그렇네.”

  그래도 좋은 곳으로 가면 좋겠어요. 하이루는 다시 아리마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나긋한 목소리가 그의 발끝에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

<검과 방패의 끝>을 쓰면서 생각 했던 이야기를 이렇게 써보네요. 하이루가 꼭 아리마에게 칭찬을 받았으면 했습니다 ㅜㅡㅜ 행복하세요... 두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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