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헤이 하이루 # :re 5권, 로제 전 # 리퀘박스
검과 방패의 끝
Y A G I
전장의 냄새.
그런 게 과연 존재하긴 하는 걸까? 이헤이 하이루는 아리마 키쇼가 읽는 소설 속에서 간혹 등장하는 그 단어를 보고 종종 의구심을 가졌다. 질펀한 피비린내가 그들에겐 전장의 냄새로 느껴지는 것일까. 하지만 피비린내 따위는 굳이 싸움터가 아니라 병원 같은 곳에서도 맡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던가.
이헤이 하이루는 작가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과 구울 수사관이라는 직업을 가진 자신은 역시 무언가 차이점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아니라면, 그런 표현을 쓰는 작가들은 전쟁 따위를 겪어본 적이 없던가.
그녀는 유령의 그림자 같은 거대한 건물 앞에서 마지막으로 길게 숨을 뱉었다. 한숨보다는 경탄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녀는 지키는 자 하나 없는 건물의 출입구로 발을 옮겼다. 몇 개의 그림자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림자. 곧 유령이 될 그림자. 아직까지 뻔뻔하게 살아있는 유령들.
죽어 마땅한 존재들을 없애는 마법의 주문은 단 두 마디면 충분했다.
“섬멸 개시.”
건물 내의 구울을 모두 구축하세요. 모든 것의 시작은 항상 조용하고 낮은 것이었고 소란스러운 죽음과 삶을 향한 뜨거운 열망은 그 뒤를 따르는 것이었다. 하이루는 가볍게 몸을 움직였다. 벤다. 자른다. 찌른다. 죽인다. 죽여 없앤다. 그것 외에 다른 사념 같은 것은 필요하지 않았다.
팽팽한 흥분이 쿠인케를 쥔 그녀의 팔을 찌르르 타고 흘렀다. 몸을 경제적으로 이용할 필요가 있었다. 아직은 갈 길이 멀었다. 하이루는 이름조차 궁금하지 않은 구울의 목을 가로로 베었다가 빠르게 몸을 숙여 달려오던 다른 구울의 내장을 갈랐다.
피 냄새 같은 게 났던가. 전장의 냄새가, 또는 죽음의 냄새가 이곳에는 존재하는가.
하이루는 언제 튀었는지 모를 진득한 피를 손등으로 문질러 닦았다. 그에 대한 그녀의 대답은 ‘없다’였다. 이헤이 하이루의 세계에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존재하는 것은 그녀의 손으로 직접 불러온 죽음 그 자체. 그것뿐이었다.
그녀에게 저승사자가 되고 싶은 마음 같은 건 없었다. CCG의 저승사자는 단 한 사람이면 충분했다. 하이루의 목표는 단 한 가지였다. 그 저승사자에게 인정받는 것, 칭찬받는 것. 영원히 그 저승사자의 곁을 지키는 것.
그것을 위해서 그녀는 쿠인케를 휘둘렀고, 존재 가치가 없다고 판단되는 하나의 생명을 이 고루한 싸움터에서 끌어냈다.
츠키야마. 츠키야마. 그는 과연 어디에 있는가. 하이루는 그의 그림자조차 아직 발견하지 못했지만, 그것이 두렵지는 않았다. 어쨌든 이 건물의 모든 구울을 구축하면 그중에 자신이 원하는 구울이 시체가 되어 누워있는 것은 필연적인 것이 아니었던가.
평소보다 몸이 훨씬 가벼운 것 같았다. 날 선 검의 끝은 곧 정교하게 다듬은 그녀의 손톱이었다. 수많은 계단이 그녀의 발아래에 밟혔다. 곧 츠키야마 가도 그렇게 될 것이다. 그녀의 발에, CCG의 발에 밟혀 허망한 끝을 맞이하게 될 것이었다.
영원한 것은 없다. 모든 것은 덧없는 것이었고 그렇기에 그 끝이 볼품없는 것이었다.
마츠마에. 그 여자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이헤이 하이루의 앞을 가로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반갑다면 반가운 얼굴이었다. 하이루는 그녀의 얼굴을 보기 전부터 그녀의 등장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하이루는 순식간에 뒤바뀐 주위의 공기를 느끼며 앞을 정면을 바라보았다.
츠키야마 가의 기사. 누군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네가 츠키야마 가의 기사라면, 나는 저승사자의 검이야. 이헤이 하이루는 희미하게 웃었다.
“안녕, 오랜만이네.”
“오랜만이라고 할까, 잘 가.”
한 번 놓친 먹잇감은 다시 놓치지 않는다. 몇 번의 합이 묵직하게 맞았다. 의욕 만땅. 원래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무는 법이었다. 그렇다고 그것이 그 고양이가 쥐에게 백기를 흔든다는 뜻은 아니었다. 애초에 쥐 따위에게 물려 고통스러워할 이헤이 하이루가 아니었다.
“멋진 카구네네요. …내 손에 곧 들어오겠지만.”
모든 일은 순식간에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기사의 검과 저승사자의 검이 서로를 긁고, 베고, 찌르며, 막았다. 한 번의 합과 그다음의 합의 시간적 거리는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날카로운 떨림이 하이루의 가느다란 팔뚝을 타고 흘렀다.
이헤이 하이루는 그 상황의 모든 것을 볼 수 있었다. 마츠마에의 검이 어떻게 찌르고 들어오는지를. 아주 약간의 틈을 만들기 위해 얕게 찔러 넣었던 검이 어떻게 막히는지를. 마츠마에의 눈빛이 어떻게 빛나고 있는지를.
이헤이 하이루는 마츠마에의 눈동자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아, 하고 바닥에 떨어져 핏덩이에 뒹굴었던 탄식은 이헤이 하이루 자신의 것이었던가, 아니면 마츠마에의 것이었던가. 어쩌면 그것은 이헤이 하이루, 그 자신이었을지도 몰랐다.
하이루는 반사적으로 다리에 힘을 주어 몸의 균형이 무너지는 것을 막았다. 겨우 일 초도 되지 않는 짧은 순간이었지만, 상대에게 틈은 그것이면 충분했다. 하이루가 가장 먼저 느낀 것은 아픔보다는 자신의 손에서 쿠인케가 떨어져 나갔다는 사실이었다.
“…구멍이, 움푹…….”
있을 리 없는 안개가 서서히 하이루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마츠마에, 나와 방금까지 마주하고 있던 너는 언제 그렇게 멀리 가버린 거지? 나 자신의 빈 육체를 채우고 있는 것은 무엇이지? 하이루는 순간 이 세상의 모든 소음들이 자신의 귓바퀴에 감겨 흘러나가는 것 같은 감각을 느꼈다.
눈앞의 안개가 이상하게 움직였다. 죽은 유령들의 그림자. 그래, 이건 안개가 아니라 그들의 손아귀였다. 그녀가 선사한 지옥에서 이를 갈고 기다리고 있던 수 없이 많은 유령들.
“오카히라, 쿠인케….”
소리를 지르는 목소리가 꼭 자신의 것이 아닌 것만 같았다. 나의 영혼은 이미 지옥에. 그런 건가. 유령들, 유령들. 이제는 나와 한 몸이 될 이름 없는 유령들.
죽어버려.
통증 같은 건 원래 없었다. 그저 전에 겪어본 적 없는 거대한 공허가 느껴졌을 뿐이었다. 그래서 하이루는 쿠인케를 쥐었다. 이 공허를 채울 수 있는 건 단 하나밖에 없었다. 그것이 너의 죽음은 아니었지만, 너의 죽음으로 인해 그것은 내게로 올 거야.
몸속에서부터 울컥 터져 나오는 것은 삼키지 않고 뱉었다. 이제야 끔찍하게 비린 피 냄새가 났다. 하이루는 어디선가 살아있는 인간에서 흘러내리는 피 냄새와 죽어가는 인간에서 흘러내리는 피 냄새는 다르다는 표현을 읽은 적이 있었다. 이게 왜 지금 이 순간에 떠오르는가. 무거운 적막이 자신을 찍어 누를 때 왜 그 검은 한 문장이 눈앞에 흔들거리는가.
아, 아리마 씨. 하이루는 금방 이유를 깨달았다. 그것은 그가 읽던 책에 있던 문장이었다. 이것이 사실이냐는 하이루의 물음에 아리마는 그저 짧게, 글쎄, 하는 답을 남길 뿐이었다. 나도 모르겠는걸. 그리고 이제 하이루는 그것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리마 씨한테 말해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하이루의 눈앞이 크게 흔들렸다.
이 사실을 아리마 씨에게 말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러나 하이루가 본 것은 아리마 키쇼의 얼굴이 아니라 검게 변색된 안개였다. 마냥 고요하고 어둡기만 한 안개. 마치 그곳에 아무것도 존재할 수 없을 것 같은 어둠이었다.
그 어둠을 헤치고 나온 것은, 지금보다 훨씬 작고 여린 아리마 키쇼였다. 이름 모를 꽃들이 두 사람의 사이에서 하얗게 날리고 있었다. 아리마 키쇼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제 커다란 손을 뻗어 하이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면 하이루는 그를 따라 웃으며 살포시 눈을 감았다.
그러면 그 손길이 더욱, 따뜻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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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 쓴다고 리 5권을 달달 읽었는데.... 생각하면 할수록 하이루 너무 안타깝게 죽어버려서 슬픈 저네요ㅠㅡㅠ
하이루.. .. 사실 하이루가 등장하는 글을 처음인데, 쓰다보니 뭔가 또 몽글몽글 생각나서 여건이 된다면 한 번 써 볼 예정입니다 (메모해 둬야지) ! 근데 좀 까먹은 것 같아요 .. .. . 사실 이틀 전에 생각해 둔 거라서. ... .. .. 미리 메모해둘 걸.. .. .. .... . 소재는 생각나는데 디테일한 게.. ... .. 떠오르지 안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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