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언제든 삭제될 수 있음 #단문 <이름 없음>에 덧붙인 이야기
유리
Y A G I
나는 오전 두 시에 꼭 내가 이름도 제대로 모르는, 한참 전에 죽어 사라진 작곡가들의 클래식을 들었다. 그것에 별 이유는 없었다. 그저 누군가는 깊이 잠들어 있고 누군가는 아직 하루를 마무리할 준비도 끝내지 않은 시간이라서 내게는 다소 이질적인 클래식이라는 장르가 유난히 끌릴 뿐이었다. 나는 매일 알지도 못하는 다른 노래를 침대에 누워 들었다. 납작한 베개 두 개를 겹쳐서 베고, 나는 플레이어의 자그마한 바가 흘러가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곤 했다.
적막이었다. 분명히 노래는 틀어져 있는데 그 시간의 내게 온 세상은 적막이었다.
언젠가 짧은 리듬만을 기억하는 노래를 길가에서 들었을 때만 해도 그랬다. 당연히 제목은 모르는 노래였다. 그곳은 카페도, 이탈리안 식당도 아닌 평범한 옷가게였다. 다른 가게들이 이미 유행에 빠르게 녹슬어버린 노래를 틀고 있을 때 그 가게는 클래식을 틀고 있었다. 나는 그 익숙한 클래식의 리듬 때문에 홀린 듯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시멘트벽에는 차가운 회색 페인트가 발려 있었고 너무 밝은 노란빛 조명이 가게 안의 옷들을 자신의 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가게 안으로 들어오니 노랫소리가 조금 더 크게 들렸다. 가게 주인인지, 아르바이트인지 알 수 없는 남자는 계산대에 기대어 서서 유일한 손님인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어색하게 옷들을 둘러보았다. 내 발자국 발자국 마다 그의 시선이 달라붙는 것 같아 나는 내 사이즈도 아니고 내 취향도 아닌 옷을 얼른 집어 들어서 계산대로 향했다.
“만오천 원입니다.”
“카드로 계산할게요.”
“그럼 만칠천 원이에요.”
나는 별수 없이 만오천 원이었다가 만칠천 원이었다가 하는 옷을 사게 됐다. 바스락거리는 플라스틱 봉투가 내 손에 쥐어졌다. 스피커에서는 높은음의 현악기 소리가 쟁쟁 울리고 있었다.
“저기요.”
나는 직원을 불렀다. 직원의 진갈색 눈동자가 노란 조명 밑에서 미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 노래 제목이 뭐예요?”
“차이코프스키요.”
“차이코프스키의, 뭐요?”
“그건 저도 모르겠네요.”
그의 대답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그도 나와 동류일지도 몰랐다. 차이코프스키. 나는 낯설면서도 익숙한 그 이름을 되뇌었다. 그때부터 나는 매일 오전 두 시에 차이코프스키의 노래를 들었다. 나 역시 여전히 노래의 이름은 몰랐다. 그 가게에서 산 옷은 내게 너무 크고 무거웠지만 그래도 가끔 차이코프스키, 하는 이름을 나직하게 말할 수는 있는 정도였다.
차이코프스키.
오전 두 시의 미묘한 어둠 속에서 현악기가 조용히 흐느끼고 있을 때 나는 그의 이름을 불렀다. 당연하게도 그의 답은 없었다. 대신에 그저 그가 남기고 간 음악들이 이 세계를 채워나가고 있었다.
그 노래 제목을 본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내가 느끼기에 클래식의 제목들은 내가 결코 연주할 수 없는 악상 기호들로 채워진 하나의 악보처럼 보였다. 그래서 나는 ‘클래식’ 플레이리스트에 들어있는 노래들의 제목을 아예 읽어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노래의 제목을 본 것은 그곳에 알 수 없는 악상기호가 아닌, 한글로 익숙한 차이코프스키의 이름이 적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차이코프스키가 아니라 차이콥스키였다. 설마 차이코프스키와 차이콥스키가 다른 사람이지는 않겠지, 생각하면서도 나는 인터넷을 켜 차이콥스키를 검색해보았다. 차이코프스키가 아니라 차이콥스키가 맞는 표현이라는 것을 새로 알게 되었다. 그래도 나는 차이콥스키보다는 차이코프스키가 좋았다.
그 이후 나는 언제 끝날지 모르는 글자들을 나열을 바라보았다. 호두까기 인형. 이것도 익숙하나 이름이었다. 극에 대한 내용을 완벽하게 알지는 못해도, 이름 정도는 알고 있었다. 이 노래의 이름은 눈송이들의 왈츠라고 했다. 눈송이들의 왈츠. 나는 어두운 밤에 하늘하늘 떨어지는 눈송이들을 떠올렸다. 각각의 이름이 주어지지 않은 눈송이들.
아니, 어쩌면 내가 그저 그들의 이름을 모르고 있을 뿐일지도 몰랐다. 나는 문득 이 세상에서 자신의 이름을 모르는 것은 나 하나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나는 머리를 흔들어 그런 생각들을 털어내었다. 그러자 남은 것은 차이코프스키, 라는 말을 뱉은 남자의 옅은 색조의 입술이었다.
나는 생각보다 그 옷가게에 자주 들러서 내 취향이 아닌 옷을 샀다. 내가 갈 때마다 머리를 짧게 자른 남자는 어서 오세요, 하고 카운터에 기대어 내게 인사를 했다. 나는 사실 옷보다 가게에서 나오는 클래식에 관심이 있어서, 몇 번 얼굴을 들이밀고 난 이후에는 노래를 듣기 위해 가게를 몇 바퀴나 돌기도 했다. 남자는 내가 그러든 말든 별로 신경이 쓰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오늘은 무슨 노래에요?”
“리스트요.”
“리스트라는 사람도 있어요?”
“그렇대요.”
“이름이 이상하네요.”
“저도 이름이 이상한데.”
남자가 요령껏 옷을 포장하면서 말했다. 예상치 못한 말에 나는 남자를 멀뚱히 바라보았다. 남자는 태연하게 매장의 로고가 박힌 희고 두터운 비닐봉지에 내가 입지 않을 옷을 담았다.
“저는 유리에요.”
“유리요?”
“정확히는 유, 리에요. 성은 유, 이름은 리.”
유리. 나는 나도 모르게 남자의 이름을 입속말로 되뇌었다. 유리.
“어렸을 때부터 놀림 많이 받았어요. 이름이 유리가 뭐냐고.”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그런가요. 자, 여기요.”
남자가 카드와 함께 비닐봉지를 건넸다. 나는 한 손으로 그것을 받았다. 유리. 남자의 이름을 알아버린 이상 나도 무언가를 말해야만 할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노래요.”
“어떤 노래요?”
“제가 처음 왔을 때 틀어져 있던 노래요. 눈송이들의 왈츠래요. 차이코프스키의, 눈송이들의 왈츠.”
나는 내 이름 대신 그 노래의 이름을 말했다. 남자가 눈을 깜빡이며 나를 바라보았다. 고마워요. 잠시간의 침묵 뒤에 남자가 뱉은 말이었다. 나는 하면 안 될 말을 한 것 같아 서둘러 그 가게를 빠져나왔다.
이제는 이름을 알게 된 그 노래를 들으며 나는 이름이 유리인 남자를 떠올렸다. 그의 얼굴이 완벽하게 그려지지는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와 나는 점원과 손님, 딱 그 정도의 사이였으니까. 아마 그도 내 얼굴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고 어쩌면 어둠이 내려앉은 이 오전 두 시에 자신의 이름을 내게 말한 것을 후회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내가 그에게 그 노래의 이름을 알려준 것처럼.
그때 나는 어째서 내 이름을 말하지 못한 걸까. 나는 몸을 돌려 휴대전화의 스피커를 등졌다. 그래도 좁은 방에서는 노랫소리가 쟁쟁하게 울렸다. 오늘의 노래는 오직 눈송이들의 왈츠의 반복이었다. 나는 그 노래를 들으며 유리를 생각하고 있었다. 낯선 사람에게 자신의 이름을 말할 수 있는 유리와 자신의 차이를 생각했다.
참, 유리가 아니라 리, 라고 했지. 유는 성이고, 이름은 리. 하지만 나는 그를 리라고 부르는 것보다 유리라고 부르는 것이 훨씬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생각뿐이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부를 일은 앞으로 영영 없을 것이기 때문에.
나는 눈을 감았다. 노래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뜬금없이 내일은 병원에 가봐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언젠가 내원한 적이 있는 신경정신과였다. 처음으로 그곳에 내원했을 때 내게 그 이유를 설명할만한 뚜렷함은 없었다. 지금처럼 어느 날 문득 병원에 가봐야겠다고 생각했고 그 길로 병원에 내원했을 뿐이었다. 내원 이유를 묻는 의사에게 나는 오전 두 시에 클래식을 듣는다고 말했다. 의사는 내게 수면 유도제를 처방했지만 나는 지금까지 그 약을 먹을 적이 한 번도 없을뿐더러 그 이후로 그 병원에 내원한 적도 없었다.
이런 내가 갑자기 다시 병원에 가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순전히 이름 때문이었다. 차이코프스키니, 유리니 하는 그들의 이름이 머릿속에서 도무지 떠나지 않았다. 오전 두 시에 음악을 듣는 것은 문제가 되는 일이 아니지만 그것들에 집착하는 것은 문제이지 않을까. 나는 몇 주 전에 받았던 약을 꺼내 처음으로 수면 유도제를 먹고 잠이 들었다. 그때까지 차이코프스키가 작곡한 노래는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었다.
고작 몇 주 내원하지 않았을 뿐인데 병원의 풍경은 많이 바뀌어 있었다. 의자의 재질이 바뀌어 있었고, 한 잔에 백 원이던 커피도 이백 원으로 가격이 올라 있었다. 그러나 가장 큰 변화는 병원 귀퉁이에 금붕어 몇 마리를 키우는, 내 키의 반만 한 수조가 생겼다는 점이었다.
나는 대기자 목록에 내 이름과 생년월일을 적고는 그 수조 앞에 서서 금붕어들을 바라보았다. 치매기가 있는 노인이 누군가에게 자꾸 성을 내며 가위바위보를 하자고 말했다. 가위바위보를 해서 어떻게 하자는, 그러니까 이겼을 때의 혜택이나 졌을 때의 페널티 따위는 없었다. 그냥 가위바위보를 해야만 한다고 노인은 소리 지르고 있었다. 그런 시끌벅적함 속에서도 금붕어들은 적막 속에서 유유히 헤엄치고 있었다. 나는 그 금붕어가 마음에 들었다. 어쩐지 편안함과 안정을 주는 것만 같다고 그러면 좋을까. 내 시선은 살랑거리는 금붕어의 지느러미에 향해있었다.
간호사가 내 이름을 몇 번이고 불렀지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종종 그런 경우가 있는 모양인지, 간호사는 지체하지 않고 다음 환자의 이름을 불렀다. 내가 알지 못한 문제를 가진 그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나 유유히 진료실로 들어갔다. 마치 금붕어의 지느러미가 움직이는 것과 비슷한 움직임이었다. 나는 멋대로 저 사람도 금붕어를 키우고 있겠거늘 생각했고 나 역시 금붕어를 키워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어제 삼킨 수면 유도제보다 그것이 훨씬 내게 적당한 처방일 것 같았다.
손바닥보다 작은 금붕어 한 마리를 키우는 데는 생각보다 많은 돈과 공이 필요했다. 나는 수조 바닥에 돌을 하나하나 깔았다. 빨리 작은 봉투에 담긴 금붕어를 수조로 옮겨주고 싶었다. 오전 두 시가 거의 다 된 시간이었고 나는 습관처럼 클래식을 틀었다. 오늘은 기분이 괜찮았다. 도리어 이제 익숙해진 그 리듬을 콧노래로 따라 부를 수 있을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분명히 금붕어 때문이리라.
금붕어의 이름은 유리였다. 유리. 떠오르는 이름이 그것밖에 없었다. 유리야. 나는 수조 앞에 아빠 다리를 하고 앉아 유리를 불렀다. 유리는 내 말에 그다지 반응을 보이지 않았지만 나는 그것이 그렇게 싫지는 않았다. 유리는 도리어 아무 반응도 없었기에 나를 더욱 편하게 만들고 있었다.
유리야. 나는 금붕어를 부르며 옷가게의 그 남자를 떠올렸다. 그 남자는 어떻게 자신의 이름을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말할 수 있는 걸까. 나는 내 이름을 말하려 입을 몇 번 뻐끔거렸지만 물속에 있는 것처럼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내게는 이름이 없었다. 물론 부모가 지어준 이름은 있었다. 하지만 아주 어렸을 때부터 나는 그것이 내 이름이 아닌 것만 같았다. 그러니까, 유리라는 남자가 일하고 있는 옷가게에서 산 옷을 입을 때처럼 나에게 어딘가 무겁고 사이즈가 큰 옷처럼 느껴졌다. 나는 내 이름을 말하는 것을 싫어했다.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는 것도 사실 별로 좋아하진 않았지만,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포기한 지 오래였다.
어쩌면 이 금붕어의 이름은 유리가 아니라 내 이름을 지어주는 게 더 적당할지도 몰랐다. 자기 이름도 말하지 못하고 뻐끔거리는 모습이 꼭 그랬다.
“금붕어를 샀어요.”
“그래요?”
나는 이번에는 일부러 가게를 뱅뱅 돌지 않고 바로 카운터로 향했다. 남자도 어차피 내가 옷을 사러 온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는지, 별 신경도 쓰지 않았다. 남자는 왼손으로 턱을 괴고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의 눈동자를 피하지 않고 바라보았다.
“이름이 뭐예요?”
“유리요.”
“금붕어 이름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턱을 괴고 있는 남자의 머리가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어떤 습관인 모양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남자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오늘도 클래식이 울리고 있었다. 이 노래는 제목을 알았다. 중고등학교에 다닐 동안 줄창 들었던 비발디의 사계였다. 분명히 이 노래에도 더욱 정확한 정보를 알려줄 이름이 덕지덕지 붙어있겠지만, 내게는 비발디의 사계 정도면 충분했다.
오랜 시간이 흘러 남자가 입술을 움직였다.
“나, 좋아해요?”
“아뇨.”
“근데 왜 내 이름을 지어줬어요?”
“그냥 생각나는 이름이 그것밖에 없었어요.”
남자는 눈을 깜빡여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의 오른쪽 눈꺼풀에 자그마한 점이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이름이 뭐예요?”
“유리요.”
“금붕어 말고, 그쪽 이름이요.”
“지영이요.”
“무슨 지영?”
“이.”
흔한 이름이었다. 그래서 나는 내 이름이 싫었다. 이지영. 이 나라에는 수백 명, 어쩌면 천명 단위로 이지영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있을지도 몰랐다. 유리와는 다르게, 지영이라는 이름은 오롯이 내 것이 아닌 것만 같았다. 이, 지, 영. 이 세 문자로는 나를 도무지 정의할 수가 없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유리. 유, 리. 라는 이 두 글자는 저 남자를 얼마나 잘 묘사하고 있는가.
나는 유리라는 이름을 가진 그가 아주 조금 부러웠다.
“저도 금붕어나 길러봐야겠어요. 이름을 지영으로 지어두게.”
나는 남자의 의중을 알 수 없어 잠시 남자를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남자가 빙긋 웃었다. 나는 남자가 웃는 이유도 알 수 없었지만, 그에게 말을 걸었다.
“매일 일해요?”
“아뇨. 일요일은 쉬어요.”
“그럼 그때 만나요.”
“데이트 신청이에요?”
“네.”
“저 안 좋아한다면서요.”
남자의 말에 나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좋아해야만 데이트 신청을 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이상한 사람이네요.”
“싫은가요?”
“아뇨.”
남자의 말투는 단호했다. 이런 걸 데이트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유리가 데이트라고 말하면 데이트가 맞을 터였다. 그래서 우리는 좋아하는 사이도 아니면서 오는 일요일에 데이트 약속을 잡았다. 유리가 자신이 좋아하는 카페에서 만나자는 얘기를 했다. 그곳은 클래식도, 철 지난 팝송도 틀어주지 않는 아주 고요한 카페라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십 분이나 일찍 도착했는데 남자는 나보다 먼저 도착해 있었다. 언제부터 앉아있던 걸까. 나는 남자의 앞쪽에 있는 의자를 끌어 앉았다. 남자는 또 턱을 괴고 있었다. 나쁜 습관인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그를 말리지 않았다. 굳이 그러고 싶지 않았다.
“지영 씨.”
“그렇게 안 부르면 안 돼요?”
“그럼 어떻게 불러요?”
“그냥, 그쪽이나.”
“지영 씨는 저를 어떻게 부를 건데요.”
“유리.”
“그럼 저도 지영이라고 부를래요. 그래야 쌤쌤이잖아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의지를 꺾기엔 내 의지가 너무 무력해 보였다. 나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음료를 주문하기 위해 매장 안쪽의 카운터로 향했다. 나는 흘긋 남자를 바라보았고 남자는 내가 알 수 없는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그것이 안도인지 실망인지는 아직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항상 깔끔하고 금방 나왔다. 나는 매장에서 마시고 간다고 말했음에도 일회용 플라스틱 컵에 나온 아메리카노의 빨대를 앞니로 살짝 씹었다. 남자는 그런 내 모습을 보더니 문득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말을 꺼냈다.
“그 노래 들어봤어요.”
“무슨 노래요?”
“차이코프스키요.”
나는 차이코프스키가 아니라 차이콥스키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왜냐면 우리 둘 다 차이콥스키보다 차이코프스키를 더욱 좋아하는 것 같았으니까. 차이코프스키는 내게 있어서 첫 번째로 주어진 이름이었고 나는 그다지 그것을 남들이 말하기에 더 옳은 것으로 말하고 싶지 않았다.
“이름을 알고 나니까 더 좋더라구요.”
“그랬던가요.”
나는 살짝 접힌 빨대로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정말로 아무 노래도 들리지 않는 카페였기에 남자와 나의 대화는 어째서인지 이 좁은 테이블을 벗어나지 못할 정도로 작고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 가게에 왜 그렇게 많이 왔어요? 옷도 안 어울리는 것만 사가더만.”
“그냥, 클래식이 들려서요.”
“클래식 좋아해요?”
“좋아하는 건… 아닌 것 같아요.”
“그러면요?”
또, 남자가 고개를 기울였다. 여기는 아메리카노도 별맛이 안 났다. 무거운 쓴맛도, 가벼운 신맛도 없는 마치 노래도 이름도 없던 과거의 나를 떠올리게 하는 맛이었다. 나는 한동안 입술을 빨대에서 떼어내지 않았다. 남자는 그동안 그 자세 그대로 나를 바라보았다.
썩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잘 모르겠어요.”
“자기감정인데 잘 모르겠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턱을 괴던 것을 그만두고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웃을 때면 남자는 안 그래도 앳된 얼굴이 더 어려 보였다. 자기 딴에는 그런 이미지를 피하려고 짓는 웃음인 것 같았지만.
남자는 뜨거운 음료를 시켰는지 종이컵을 양손으로 붙잡고는 자신의 음료를 한 모금 마셨다. 그 안에 든 것이 무엇인지 내가 알 길은 없었다. 나는 또다시 빨대를 씹다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럼 그런 거에다가 유리라는 이름을 붙여 봐요. 금붕어에게 유리라는 이름을 지어준 것처럼.”
“무슨 의미예요?”
“이름을 붙이면 조금 더 나아질 수 있잖아요. 방금 그 감정은, ‘유리’한 감정인 거예요.”
“유리도 이상한 사람이군요.”
“그래서 지영을 좋아하는 거예요.”
“유리는 저를 좋아하나요?”
그의 고백에 설렜다거나 불쾌했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별다른 느낌도 들지 않았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었다. 다만 나는 왜 그가 나를 좋아하는지 궁금했을 뿐이었다.
“그냥, 정이 들었나 봐요. ‘유리’한 감정이랄까.”
내 질문에 남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유리’한 감정을 말했다. 나는 가볍게 인상을 찌푸리며 남자를 바라보았다. 태어나서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다. 남자는 자신의 이름을 그렇게 좋아했던가. 자신의 이름을 처음으로 말했던 그때, 남자는 제 이름을 그렇게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는데.
어쩌면 남자는 그저 내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걸 좋아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나를 좋아한다고 말했으니까. 아니, 그렇게 영악한 사람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그는 그냥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었다. 정의할 수 없는 감정에 ‘유리’라는 이름을 주면 마음이 편해질 거라고 믿고 있는 것이었다. 하필이면 그것이 그의 이름인 것은 내가 나의 금붕어에게 유리라는 이름을 지어준 것과 같은 이유 때문이겠지.
“유리도 역시 이상한 사람이에요.”
내 말에도 남자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그런 모습이 더 이상한 남자였다. 나는 더는 그 옷가게를 찾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유리’한 감정 때문이었다. 더는 그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고, 더는 차이코프스키의 노래를 들을 자신이 없었다.
세상의 모든 것이 이름을 잃어버리고 유리가 되고 있었다. 유리. 왜 하필이면 그의 이름은 유리인가. 너무나도 깨지기 쉽고, 깨져버리면 아플 것 같은 그런 이름을 가져서 왜 이 세상의 모든 것에 그 이름을 주어버려서, 내가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만들어버렸나.
왜 나 자신까지 유리가 되게 만들어버렸나.
나는 내가 조금 더 싫어졌다. 자신의 이름을 잃어버리고 유리가 되어버린 내가 싫어졌다. 나는 씹다 남긴 빨대를 두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남자는 나를 붙잡지 않았다. 그것이 그의 ‘유리’함이었다.
카페의 커다란 창문 밖에서 그를 바라보았을 때, 그는 내가 떠난 자리를 한참 동안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너무 심하게 대한 것이 아닌가, 생각하면서도 그의 앞자리에 다시 앉지는 않았다.
“유리.”
내가 남자를 찾은 것은 그로부터 며칠의 시간이 지난 뒤였다. 전화 연결음이 길게 이어졌다. 그가 카페 영수증 뒷면에 자신의 휴대전화 번호를 적어서 내게 준 기억이 내 안에서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연락하고 싶을 때 연락해요. 나는 그것을 조심스럽게 접어 지갑 안에 넣었다. 그러곤 그 뒤로 한동안 한 번도 펼쳐보지 않았다가 오늘에서야 그 영수증을 급히 펼쳐 유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전 두 시가 지난 시간이었다.
“왜요?”
남자의 목소리는 조금 잠겨 있었다. 어쩌면 남자는 자고 일어났을지도, 아니면 나처럼 눈물로 오전 두 시를 보내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그것도 아니라면 차이코프스키겠지.
“유리가 죽었어요.”
남자는 잠시 말이 없었다. 죽은 유리가 자신이 아니라 내가 키우던 금붕어라는 것을 깨닫는 데까지 아주 조금의 시간이 걸린 모양이었다.
“왜요?”
“모르겠어요. 유리는 제가 싫었나 봐요. 그래서 아예 가버렸나 봐요.”
나는 울지 않으려고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문득 유리는 갑자기 흰 배를 보이며 죽어있었다.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무얼 잘못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유리는 갑자기 내 곁을 떠났고, 나는 평소처럼 이름을 찾아가며 클래식을 듣다가 그것을 발견했을 뿐이었다.
유리의 투명한 지느러미가 마치 그 부분만이 살아있는 듯 물살을 따라 살랑이고 있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눈물방울을 뚝뚝 떨어트렸다. 그것은 수많은 ‘유리’들이었다.
“있잖아요, 유리. 나, 이제 알 것 같아요. ‘유리’하다는 게 뭔지 알 것 같아요.”
내 목소리가 너무 축축해서 내 것 같지가 않았다. 유리. 남자의 얼굴과 금붕어의 지느러미가 내 머릿속을 반복해서 지나갔다. 남자는 내 흐느낌을 들으며 내 입에서 나올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나는 슬프고 괴로웠다. 유리가 죽어서이기도 했지만 내가 느낀 이 ‘유리’라는 감정이 잘못된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 때문도 있었다. 두려움. 그 두려움을 한 꺼풀 벗겨내고 나면 보이는 그 감정이 바로 ‘유리’였다. 내가 보고 싶지 않았던 유리의 얼굴과 유리의 눈동자. 물과 같은 두 개의 유리.
유리가 들어있던 수조가 터져 내 발을 축축하게 적셨다. 내 눈물과도 비슷한 ‘유리’. 방바닥에 내팽개쳐진 유리의 지느러미는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완전한 죽음이었다. 나는 깊은숨을 내쉬었다. 괜찮아요. 스피커에서 들리는 남자의 목소리는 바로 옆에서 내 어깨를 감싸 안으면서 하는 말 같았다. 나는 나도 모르게 이제야 이름 붙여진 나의 ‘유리’에 대해 털어놓았다. 남자의 목소리엔 그런 힘이 있었다.
“외로워요. 나는 계속 외로웠어요. 그걸 이제야 알아버렸어요.”
“괜찮아요. 외로워도 돼요.”
남자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나를 달랬다. 나는 내 모습이 남자에게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고개를 저었다. 흘러 내린 줄만 알았던 죽은 유리는 자세히 보니 여전히 수조 속에 둥둥 떠 있었다. 나는 유리를 어딘가에 버리거나 묻어줄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나를 감싸 안은 이 외로움처럼.
“더 이상 ‘유리’하다는 말은 안 쓸래요.”
“왜요?”
“그러면 유리가 외로워지는 거니까.”
“지영은 아직도 나를 좋아하지 않나요?”
“그건… 그건 모르겠어요.”
“이제 그게 그러면 ‘유리’한 감정이네요.”
남자의 말에 나는 눈을 끔뻑였다. 멎지 않은 눈물이 속눈썹에 맺혀 둥글게 떨어져 내렸다. 또 다른 유리가 생겨나고 있었다.
“저는 그 ‘유리’가 좋아한다는 이름을 갖게 되면 좋겠어요.”
“유리는 왜 그렇게 저를 좋아하는 거죠?”
“‘유리’하기 때문이에요.”
그 말을 하고 남자는 작게 소리를 내어 웃었다.
“그냥, 좋아졌어요. 자주 얼굴을 보다 보니까 그런가. 그러니까 저에게 ‘유리’하다는 ‘좋아’하다네요.”
나는 결코 떠올리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던 남자의 얼굴을 또렷하게 떠올렸다. 그렇지. 그의 눈꺼풀 어딘가에는 아주 작은 점이 있었지. 그리고 유리라는 자신의 이름을 말할 때 부드럽게 움직이는 입술이 있었지.
“기다릴게요. 저는 지영을 떠나지 않아요. 유리는 아직 있어요.”
나는 유리의 말에 어떻게 답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어째서 유리는 그렇게까지 나를 기다리는지, 그리고 어째서 나는 유리가 그렇게까지 기다려주기를 바라는지. 그러나 지금 내 기분은 너무나, ‘유리’했다. 나는 그래서 조금 더 눈물을 흘렸다.
(200*6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