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코사과님과의 연성교환 #203을 시간적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영화 Gloomy Sunday의 OST와 함께 읽으시면 좋습니다.
Sundays
Y A G I
For. 초코사과님
Sunday is gloomy,
My hours are slumberless
Dear as the shadows
I live with are numberless
Little white flowers
Will never awaken you
나연은 ‘글루미 선데이’라는 영화를 본 적이 없었다. 그저 지나치듯 봤던 영화 소개 프로그램에서, 이름 모를 여배우가 부르는 노래를 들은 적이 있을 뿐이었다. 알 수 없는 나라의 언어로 불리는 노래가 왜 그렇게 나연의 가슴을 적셨던가.
나연의 손끝에서 흩어지는 바이올린 소리가 영국의 습하고 우울한 공기를 울렸다. 오늘도 영국은, 말 그대로 글루미Gloomy였다. 오늘이 일요일은 아니라는 건, 역시 아쉬운 일일까.
나연의 손가락이 섬세하게 바이올린의 얇은 현을 짚었다. 현으로부터 시작된 희미한 떨림이 나연의 몸속까지 울리는 듯했다. 나연 자신이 하나의 거대한 바이올린이 되는 느낌. 나연은 그 느낌을 좋아했다.
Not where the black culture's
Sorrow has taken you
죽음을 부르는 노래라고 했던가. 그러나 나연의 주위에는 이 노래를 듣고 죽은 사람을 단 한 명도 본 적 없었다. 혹시, 어쩌면 죽음을 마주한 사람에겐 이 노래가 다르게 들리는 것일까. 나연은 이 노래를 들으며 슬픔을 느낀 적은 있어도 죽음을 느낀 적은 없었다. 그걸보면 아직은 자신이 살아야 하는 때일지도 몰랐다.
나연은 가볍게 숨을 내쉬며 이어질 음이 울릴 현을 손끝으로 짚었다. 그때, 창문을 넘어 또 다른 바이올린 소리가 들렸다. 나연은 미간을 가볍게 찌푸리며 현을 바이올린에서 떼어냈다.
Angels have no thoughts
Of ever returning you
Wouldn't they be angry
If I thought of joining you?
확인하지 않아도 저 바이올린의 주인이 누구인지, 나연은 알 수 있었다. 셜록 홈즈. 그 눈치 더럽게 없는 새끼. 나연은 신경질적으로 창문을 당겨 닫았다. 얇은 유리를 통해 노래의 남은 부분이 흘러들어왔다. 나연은 인상을 쓰면서도 셜록의 음악을 귀에 담았다. 만약에 그에게 음악적 조예가 조금이라도 덜 있었다면. 그렇다면 나연은 그를 좀 더 싫어할 수 있지 않았을까.
Gloomy Sunday
노래의 마지막은 나연이 기억하는 원곡보다 느리고 무거웠다. 셜록은 그 영화를 본 적이 있을까. 셜록이라면 영화를 보지 않고도 그 모든 내용을 알고 있겠지. 나연은 가볍게 팔짱을 낀 채 회백색 구름이 낮게 가라앉은 하늘을 바라보다가 소파에 몸을 묻었다.
셜록 홈즈. 런던 사람들의 사랑과 관심을 한껏 받고 있는 모자를 쓴 탐정. 그리고 그 탐정이 좋아하는 사람은, 자신이었다. 인터넷에서는 셜록이 사랑 따위를 알 수 없다는 말이 나돌고 있는 것 같긴 하지만 그것은 다 모르는 소리라고, 나연은 생각했다. 물론 나연 자신도 셜록의 사랑을 받는 입장이 아니었다면 그것을 몰랐겠지만.
일층 현관의 초인종이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연은 얼른 머리를 굴렸다. 누군가 올 사람은 없었다. 셜록이 자신을 찾아왔을 리도 만무했다. 셜록은 하고 싶은 얘기가 있다면 초인종을 누르지 않고 바로 창문을 통해 나연이 상상하지도 못했던 행동을 할 인물이었다. 나연은 제 옷차림을 한 번 확인하고는 일층 계단을 내려갔다. 초인종을 누른다는 건 적어도 셜록보다는 교양이 있는 사람이란 뜻이었다.
“내가 방해했니?”
“허드슨 아주머니!”
나연은 활짝 표정을 폈다. 그녀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한 톤은 높아져 있었다. 나연은 몸을 뒤로 몇 발짝 물리는 것으로 환영의 의사를 대신했다. 어쩐지 간만에 뵙는 얼굴인 것 같았다. 자신도 이미 부인의 손길이 간절하게 필요한 나이도 아니었을뿐더러, 옆집의 두 남자가 하도 부인을 곤란하게 만드는 일이 많기 때문이겠지.
나연은 부인이 자신에게 종종 뱉었던 하소연을 떠올렸다. 그러니까, 저 집 남자들은 냉장고에 식료와 함께 시체를 보관한단 말이지. 나연은 그 말을 들으며 왓슨 박사에게 마음속으로 위로를 보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차라도 내올까요?”
“아냐, 잠깐 들린 거란다.”
두 사람은 자그마한 티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았다. 누가 봐도 부인의 얼굴에는 의미심장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하지만 나연은 그 웃음의 이유를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셜록이라면 알 수 있었을까. 재수 없는 그 인간이라면, 아마 초인종이 눌림과 동시에 부인의 용무를 알아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나연은 ‘평범한’ 사람답게 차분히 부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셜록과는 어디까지 갔니?”
“저, 그 사람이랑 사귀는 거 아니라니까요!”
“어머, 존도 너랑 똑같은 소리를 하던데.”
“왓슨 박사님께도 홈즈 씨와 사귀냐고 물어보신 거예요?”
부인은 눈을 찡긋하며 웃어 보이더니 소곤거리듯 말을 이었다.
“그게, 왜, 다 큰 남자 둘이서 플랫메이트를 하면 그거밖에 더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
“아주머니는, 정말…….”
나연은 허탈하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주머니를 오래 알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이런 모습은 마냥 엉뚱하게만 느껴졌다. 참, 젊게 사시는 분이라고 그래야 할지. 나연은 그런 부인의 모습을 싫어하지 않았다.
인간적인 모습이랄지. 셜록 홈즈에게선 찾아보려 해도 찾아볼 수 없을 모습이었다.
*
“홈즈 씨, 사람을 이렇게 갑자기 불러내면 어떻게 합니까?”
카페 안으로 들어선 나연은 테이블에 앉아있는 셜록을 보자마자 목소리를 높였다. 카페 안에는 아직 몇 명의 사람들이 드문드문 앉아있었다. 셜록은 나연의 등장을 신경도 쓰지 않는 듯, 기도를 하듯 모은 손끝을 제 입술에 가져다 대고 있었다.
자기가 불러놓고는. 나연은 그런 셜록의 모습이 싫었다.
“나연. 큰 게임이 하나 시작될 거야.”
“게임이라니요?”
나연이 셜록의 맞은편 자리에 앉자마자 셜록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이었다. 나연은 셜록을 바라보았다. 다소 피곤해 보이는 얼굴이었지만 그의 눈빛은 평소와 다름없었다. 아니, 평소보다 더 빛나고 있다고 표현해도 무리가 없었다.
푸른색과 맑은 녹색이 미묘하게 섞여 있는 색채. 나연은 그의 눈동자를 빤히 바라보다가 눈을 돌려버렸다.
“별거 아니야.”
나연의 물음에 셜록은 손을 털 듯 모으고 있던 손을 떼어냈다. 나연은 무심코 그의 입술이 평소보다 좀 더 말라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용무가 뭡니까?”
“이 말 안 하면 후회할 것 같아서.”
“무슨 말인데요? 아, 설마.”
“맞아. 나연, 나는 나연을 진심으로… 사랑해.”
사랑해. 셜록의 목소리는 한겨울에나 볼 수 있는 하얀 입김 같았다. 너무 희미하고 덧없어서 듣는 사람의 마음을 공연히 애틋하게 만드는 목소리. 하지만 나연은 그런 셜록의 고백에도 까딱하지 않았다.
나연은 굳세게 팔짱을 끼고 셜록을 노려다 보았다. 셜록의 얼굴에선 아주 약간의 웃음기도 찾아볼 수 없었다.
“제 대답은 아시지 않습니까?”
“그럼… 벌써 열두 번이나 들었는데.”
“그걸 일일이 세고 계셨습니까? 불쾌해라.”
나연은 미간을 구겼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셜록은 몸을 일으켰다. 싸구려 나무 의자가 타일 바닥을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평소였다면 셜록은 다음을 기약하며 그대로 나연을 지나쳐 갔을 터였다.
나연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셜록을 바라보았다. 셜록과 이렇게 가까이 있던 적이 있었던가. 나연은 그의 섬세한 속눈썹이 가볍게 떨리는 것을 느꼈다. 열세 번의 고백과 열세 번의 거절이 지루해질 정도로 이어져 왔는데 어째서 그의 입술이 메말라 있었는지, 나연은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창밖에서 껌뻑이는 네온사인의 빨간 불빛이 테이블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나연은 그 순간의 모든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셜록의 희미한 숨결부터, 자신의 심장이 어떤 방식으로 뛰는지까지. 셜록에게선 아주 가벼운 남성용 스킨 냄새와 오래된 먼지 냄새와 비슷한 향이 났다.
“홈즈 씨, 이게 무슨…!”
“말했잖아, 후회할 것 같아서.”
나연이 제정신을 찾은 것은 눈을 한 번 깜빡할 시간이 지난 이후였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셜록이라면 고작 그 정도의 시간으로도 나연의 마음을 충분히 읽었을 터였다. 나연은 그것이 퍽 신경 쓰였다.
“영국신사답지 않으시네요.”
“나는 신사가 아니라, 탐정이야.”
셜록이 특유의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럼, 안녕. 셜록은 마지막 인사를 남기곤 유유히 카페에서 멀어졌다. 나연은 주먹을 꾹 말아 쥐었다. 셜록 흉내를 내려는 것은 아니었지만, 뭔가 걸리는 것이 있었다.
후회할 것 같다.
나연은 굳이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직접 TV의 전원을 껐다. 후회할 것 같다. 나연은 그 말의 진정한 저의를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셜록 홈즈. 그는 언제부터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있던 것일까.
가짜 탐정이라고, 언론에서 지껄여대는 말들은 처음부터 무시하고 있었다. 그런 사람이 가짜일 리 없었다. 나연은 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눈을 감으면 다시 그날 카페의 적막함 속으로 걸어 들어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생생한 기억인데.
셜록 홈즈의 장례식은 나연의 생각보다 조촐하게 치러졌다. 런던을 떠들썩하게 했던 탐정의 종말은 그렇게 초라했다. 나연은 셜록의 장례식에 가지 않았다. 그녀가 셜록을 싫어하기 때문은 아니었다.
나연은 셜록의 장례식에서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슬퍼해야 할까, 화를 내야 할까, 아니면 그의 키스에 어떤 식으로든 보답을 해야 할까.
그 대신에 나연은 ‘글루미 선데이’를 봤다. 그 노래를 듣고 죽어간 사람들을 떠올렸다.
Sunday is gloomy,
My hours are slumberless
Dear as the shadows
I live with are numberless
Little white flowers
Will never awaken you
Not where the black culture's
Sorrow has taken you
Angels have no thoughts
Of ever returning you
Wouldn't they be angry
If I thought of joining you?
Gloomy Sunday.
낯선 얼굴과 낯선 언어 사이에서 나연을 붙잡은 것은 가느다랗고 하얀 한두 줄의 자막이었다. 나연은 그제야 이 노래의 가사를 제대로 알 수 있었다. 나연은 셜록을 떠올리는 대신 바이올린을 들었다.
여전히 런던의 하늘은 어둡고 낮았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덮어버릴 것 같은 구름들이 하얗게 모였다가 풀어졌다가를 반복하고 있었다.
바이올린 선율은 언제나 아름답고 반짝였다. 나연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셜록을 애도했다. 그리고 아마도 태어나서 처음으로, 셜록 홈즈를 그리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