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범성애자이며, 왜 신체적 성별과 정신적 성별이 일치하지 않으며, 어떻게 정신질환이 있고, 어떻게 이루어져 있고……. 증명이란 행위는 생활뿐만 아니라 법정에서도 이루어진다. ‘왜 나는 피해자가 아닌가.’, ‘어떻게 그 공장이 환경을 오염시켰는가?’.
꽤 자주, 내가 내가 아닌 이유를 타인의 입에서 듣곤 한다. 너는, 남자랑 연애를 해봤기 때문에 완전한 퀴어가 아니야. 정신적 성별이라는 게 따로 존재한다는 게 말이 되니. 믿기지 않아, 그 사람은 임신한 아내도 있다고!
그렇다면 나는 무엇인가.
하나의 사람에는 다수의 시야가 있다. 그리고 세상은 수많은 사람으로 이루어져 있다. ‘나’라는 존재를 바라보는 시선의 종류는 얼마나 많을까. 어쩌면 그들이 나를 완전히 받아들이고 그저 그 존재라고 생각하길 바라는 것이 욕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폭력임을 알아야 한다.
내가 내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폭력임을 이제 우리는 알아야 한다.
이야기 속에서 곰은 자신이 곰임을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그 증거는 없다. 어떻게 증거가 있을 수 있겠는가. 곰인 증거를 찾으라니! 어처구니가 없는 말을 곰 주위의 인간들은 해댄다. 심지어 같은 곰들도 자신의 기준으로 곰을 판단한다. 차를 타서, 춤을 추지 못해서 곰은 곰이 아니게 된다.
곰은 푸른 옷을 입는다. 마치 죄수복과도 비슷한 색이다. 면도를 하고 숫자를 다섯까지 배우고, 일을 하고, 그러다 보면, 내가 곰인지 인간인지 아니면 공장의 기계 부품 중 하나인지 모르게 된다.
하지만 곰은 곰이었다.
매년 찾아오는 자연스러운 겨울잠. 자신을 잊은 곰은 그 이유를 알 수 없게 된다. 나는 왜 졸린가? 곰은 –그리고 인간은- 디스포리아를 느끼게 된다. 주변과 나는 분명히 다르다. 내 안에는 분명 다른 것이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하지만 외부의 압력은 그것을 방해한다. 곰은 다시 기계의 부품이 되었다가, 쓸모없다는 이유만으로 쫓겨난다.
우리가 미처 어떻게 할 수 없는 폭력이라는 해일이 드디어 우리를 물가에 내려놓았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낙원을 잊은 상태였고 곰도 곰임을 잊은 상태였다. 결국 곰은, 타인에 의해서 자신이 ‘곰’이라는 말을 듣고 나서야 모든 것을 깨닫게 된다.
곰은 곰이다.
동굴 앞에서 곰은 고민한다. 지금까지의 삶에서 믿어왔던 가치에서 곰은 곰이 아니었다. 묵은 때와 비슷한 가치를 벗겨내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곰은 계속 눈을 맞았다. 이러다 얼어 죽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눈을 맞다가.
모든 옷가지를 벗어 던지고 동굴로 들어간다.
인간이라는 껍질을 훌훌 벗고 곰으로 돌아간다.
그 장면엔 아무런 대사도 없다. 하지만 발자국이 있다. 어쩌면 그것은, 우리가 따라가야 할 발자국일지도 모른다.
내가 어린 시절에 이 동화를 읽었다면 어땠을까, 하고 생각해본다. 나의 정체성이 무엇인가 고민하기 이전에 이를 접했다면 나는 이 동화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어쩌면 계속 목에 걸려있는 가시처럼 남아있다가, 어느 순간 다시 펼쳐보는 때가 오지 않을까. 그것이 아니라면 내 옆의 누군가가 곰임을 깨닫기 위해 펼쳐보는 때가 오지 않을까.
많은 사람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어졌다. 메시지는 어디에나 스며들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깨닫는다. 나는 이 동화를 읽으며 조금은 울었고, 조금은 위로받았고, 조금은 화가 났다. 여전히 우리는 부정당하면서도 같은 이야기를 읽고 동질감을 느낀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외부의 시선에 의해 ‘인정’받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화가 난다.
앞으로 많은 곰을 만나게 될 것이다. 나는 곰에게 곰이라고 말해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마치 모텔 직원처럼.
요모는 자신이 어떻게 흡혈 욕구를 참았고, 또 어떻게 그것을 발산해 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너무도 오랜 시간 공복을 참은 탓이었다. 기억의 소실. 요모가 가장 경계하는 것이었지만 이번에는 어쩔 수 없었으려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자신을 우타라고 소개한 남자를 먹지 않기 위해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으니까.
요모는 자신이 먹은 사람 대신 그 남자의 이름을 외웠다. 우타. 너무나도 쉽고 간단해서 현실감이 없는 이름이었다.
우타는 식사 시간 내내 요모가 식사를 하는 걸 지켜보았다. 목덜미에 송곳니를 박아넣고, 뼈와 거죽이 닿을 정도로 피를 빨아먹고, 마침내 작은 뼈 하나하나까지 아득아득 씹어먹는 그 모습을 눈 하나 깜짝 않고 바라보았다.
요모는 손날에 묻은 피를 핥아먹었다. 그의 눈이 붉은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지금까지 굶은 것에 비해 인간 하나는 적은 양이었다. 하지만 요모는 그것으로 식사를 멈추었다.
먹을 수 있는 다른 인간이 없었기 때문은, 당연히 아니었다.
우타는 책상다리를 한 채, 한쪽 팔꿈치를 무릎에 대고 턱을 괸 채로 앉아있었다. 아주 흥미로운 것을 본다는 태도도 아니었고, 그 장면이 지루하다는 태도도 아니었다. 그저 관망하는 것. 그것이 바로 우타가 지금까지 해왔던 것이었다.
그런 우타에게선 아주 달콤한 냄새가 났다.
“식사, 끝난 거지?”
“응.”
“제대로 본 건 처음이라 조금 놀랐어. 아, 이런 말은 좀 실례인가?”
우타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고양이상, 붉은 눈동자에, 검은 머리카락. 온몸을 휘감은 문신과 곳곳의 피어싱.
대부분의 흡혈귀에게 있어 인간의 외형이나 목소리 따위는 크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으나, 우타의 외모는 어쩔 수 없이 사람의 시선을 잡아끄는 부분이 있었다. 길을 걷다가 한 번쯤 뒤돌아볼 외모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좋게 얘기하면 기억하기 쉬운 얘기였고 나쁘게 얘기하면 먹잇감이 되기 좋은 외모였다.
“…그다지.”
“응, 응. 그렇다면 다행이야.”
그렇게 말하며 우타는 몸을 일으켰다. 그가 탁탁 옷을 털자 공사장의 먼지가 가뿐히 내려앉았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갈게, 흡혈귀 씨.”
우타는 성큼성큼 요모의 앞으로 걸어왔고 종국에는 그와 코끝이 닿을 정도의 거리까지 다가왔다. 요모는 우타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 살아있는 자의 특권. 두 사람의 숨이 섞였다.
“나는 흡혈귀 씨의 손에 죽고 싶어.”
“이유는?”
“죽고 싶은 데에 이유가 있겠어?”
“왜 하필이면 내 손에 죽고 싶느냐, 하는 거야.”
두 사람 다 거리를 늘이지 않았다. 요모의 눈에 우타의 눈동자가 오롯이 담겼다. 어느 쪽도 시선을 피하거나 눈을 깜빡이지 않았다. 마치 기 싸움을 하는 것처럼 두 사람은 서로를 노려보았다.
“그야.”
먼저 한발 물러선 것은 우타쪽이었다. 우타는 몸을 뒤로 물리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인간이란 생물이, 자신보다 상위에 있는 존재에게 먹힐 기회란 없잖아?”
“그게 다인가?”
“응.”
요모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 걸 원하는 생명이 있단 말인가? 아니면 이건, 그저 오만일까?
“헛소리도 적당 것 해, 인간.”
“우타야. 아까 이름 말해줬잖아?”
“…우타.”
“나는 피식자의 상황에 놓여보고 싶은 거야. 그러면 좀, 뭔가가, 달라지지 않을까아, 하고.”
“제정신이 아니군.”
“흡혈귀 씨도 마찬가지잖아, 그건?”
요모는 우타를 노려보았다. 우타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우타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12층 엘리베이터 앞, 살짝 곱슬기가 도는 검은 머리를 가진 남자가 제 옆의 여자아이를 보며 말했다. 현재 시각 오전 7시. 보통 학생이라면 지금이 일어날 즈음 아닌가. 남자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벌써 10년 가까이 된 일이라 가물가물해서 확실하지는 않았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눈앞의 아이와 매일 엘리베이터 앞에서 마주친다는 점이었다.
“저 학생 아닌데요. J라구요. P, J, E.”
“그래서 J 학생, 학교는 안 가?”
사실 이름이라면 진작 알고 있었다. 교복을 입으면 왼쪽 가슴 부근에 대롱대롱 달린 노란색 명찰에 그의 이름 세 글자가 단정하게 적혀있었으니까. 그러나 남자는 항상 그를 모른척하며 아이를 학생이라고 불렀다. 뭔가, 그러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놀려먹는 게 재미있다고 해야 할지, 항상 이렇게 같은 반응을 보이는 게 즐겁다고 해야 할지, 그런 기분이 들어서 아이를 학생이라고 부르는 걸 멈출 수가 없었다.
남자는 M라는 제 이름을 떠올렸다. M과 J. 흠, 나쁘지 않은데, 하고 생각했다가 곧 생각을 떨쳐내었다. 고등학생한테 무슨 생각이람. 그것도 10살 가까이 차이나는 애한테. 이건 분명 도둑놈 취급당한다. M은 그렇게 생각했다.
“겨울 방학이에요.”
“방학인데 이렇게 일찍 일어난 거야?”
“응. 아저씨 회사 가는 거 배웅해주려구요.”
참 성실한 아이다. 학기 중에는 나 배웅해주려고 7시부터 등교를 하기도 하고, 방학 때는 이렇게 잠옷 위에 후드만 입고 나오고. 매일 같이 이런 일을 하기는 어렵지 않지. 그 연정을 M은 알고 있었지만, M은 그를 티 내지 않았다.
J가 싫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성인과 고등학생의 교제라니. M의 기준에서 이는 그다지 옳은 일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M은 J를 매일 같이 학생이라고 부르며 일정 정도의 거리를 유지 중이었다.
“누가 보면 부부인 줄 알겠네.”
“아, 그거 좋다.”
그 말을 듣고 M은 속으로 웃었다. 하여튼, 솔직한 아이였다. 솔직해서 더 마음에 드는 그런 아이.
“좋긴 뭐가 좋아, 학생.”
“P, J, E.”
“P, J, E, 고등학생.”
12층까지 엘리베이터가 올라오는 건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두 사람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탔다가 함께 내렸다. 1층에서 문이 열리자 차가운 바람이 훅 밀려들어 왔다. M은 J를 바라보았다. 12월 말, 후드만 입고 있기엔 추운 날씨였다.
“추우니까 어서 들어가.”
“지금 저 걱정해 주는 거예요?”
“나 간다.”
M은 괜히 제 마음이 엿보인 것만 같아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빠른 걸음을 옮기던 그가 아파트 정문에서 1층 현관을 뒤돌아보았을 때, 그곳에는 여전히 J가 있었다.
요모 렌지는 눈을 떴다. 달빛이 은은하게 들어오고 있었다. 그는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켜 앉았다. 공사 중인 건물의 휑한 벽면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토지 권리문제로 싸우다가 결국엔 건설이 무기한으로 연장된 건물. 그곳이 그가 거주하는 곳이었다.
물론 지내기는 폐가 쪽이 훨씬 좋았지만, 겁 없는 인간들 덕분에 그런 곳에서 잠을 잤다간 엄한 소문이 돌기 십상이었다. 차라리 이런, 누가 봐도 괴담 같은 것은 없어 보이는 공간에서 지내는 것이 나았다.
미미한 허기가 느껴졌다. 평생을 따라다니는 허기. 요모는 멍하니 달빛을 바라보았다.
그는 밤의 지배자이자 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남은 순혈 흡혈귀였다.
인간의 피를 마시고, 그림자에 몸을 숨기고, 기이할 정도의 수명에 날카로운 송곳니. 또 뭐가 있더라. 은탄환이나 심장에 대못을 박아 넣으면 죽는, 아니, 그 이전에 그저 태양 아래에만 나가도 소실되는 덧없는 생명체.
하지만 핏줄에 내재한 두려움 때문에 그 한 걸음을 걸어나가지 못하는 겁쟁이.
그것이 요모 렌지였다.
순혈 흡혈귀의 고귀함. 그런 것들은 기억도 못 할 과거에 스러졌다. 본래 살아남기 위해 다른 생명을 앗아가는 것이 하늘의 뜻이라지만, 모두가 그렇게 해서 살아가고 있다고 하지만, 어째서 이렇게 죄의식이 드는 것일까.
요모의 어린 시절엔 자택 지하에서 인간을 키우기도 했었다. 그때는 요모가 아직 흡혈귀로서의 정체성이 제대로 정립되지 않았을 때였는데, 본디 엄했던 그의 가정에서는 곧잘 요모에게 지하에서 인간의 아이를 조달해 오기를 시켰다. 요모는 그날의 첫 기억을 아직도 잊을 수 없었다.
지하에서 눈이 멀어가는 인간들. 제 핏덩이 하나 지키겠다고 자신을 버리는 여인들.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해 덜덜 떨리는 손으로 요모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아이만은, 아이만은 제발 살려달라고 애원하던 사람들. 그때 요모는 제 품속의 작은 생명의 심장 소리를 듣고 있었다. 콩닥콩닥, 주먹만 한 심장이 바쁘게 뛰며 생명을 이어나가고 있다.
요모가 하는 일은, 요모의 일족이 하는 일은 그 생명에 송곳니를 박아넣어 그것의 모든 것을 앗아가는 것이다.
그때의 기억은 요모에게 일종의 트라우마로 남았다. 하지만 흡혈을 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몸. 요모는 때때로 아이를 먹었고, 연인 중 한쪽을 먹었고, 형제를 갈라놓았다. 빼앗는 것이 요모의 삶이었다. 그가 흡혈귀였기 때문에. 그 누구도 주지 않은 권능을 손에 쥔 일족이기 때문에.
그러나 인간은 생각보다 빠르게 진화했고 흡혈귀의 권능을 없애는 법을 알아내었다. 너무나도 오랜 시간을 살아온 흡혈귀에게 변화란 없었고 때문에, 순혈 흡혈귀들은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다.
인간과 피를 섞던가, 죽음을 맞이하던가.
대부분의 흡혈귀는 죽음을 맞이했다. 어쩌면 다들 영생이란 것에 지긋지긋해졌을지도 모르는 일이라고, 언젠가의 요모는 생각했다.
여하튼, 그리하여 남은 순혈 흡혈귀는 이제 요모 렌지 하나뿐이었다. 자신을 저주하는, 저주받은 종족.
그러나 지금의 S는 자리에 앉아 J를 올려다보고만 있었다. 그는 J의 표정에서 많은 감정을 읽어낼 수 있었다. 슬픔. 고통. 애원. 부정. 연정.
연정.
“인사는 하지 않을게요, S.”
S는 그저 J가 건물 안쪽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 J의 삶을 저지하거나 교정할 권리 같은 건 없었다. 애초에 그는 그런 사람이 아니긴 했지만, 그 상대가 J이기 때문에 그는 더욱 J이라는 존재 그 자체를 아끼고 싶었다. 자신으로 인해 의무적으로 변화하고 성장하기를 원하지는 않았다.
성장이라면 S 본인도 하지 못한 것이기도 했지만.
S의 예민한 귀가 습관적으로 낯선 소리를 잡아내었다. 타닥타닥하고 무언가 장작 같은 것이 타오르는 소리였다. 소리는 J가 향한 안쪽 방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점점 더 커지는 소리. 무언가가 무너지는 소리도 함께 들렸다. 새카만 연기가 식기 상점의 천장을 얼룩처럼 덮어갔다. S는 매캐한 열기를 느꼈다. 그러면서도 그는 여전히 자리에 앉아있었다.
식기 상점을 다시 열었을 때가 생각난다. J는 그것을 S에게 가장 먼저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가장 반짝이는 것을, 가장 반짝일 때, 가장 반짝이는 사람에게 보여주고 싶다고, J는 말했다. S는 그날을 또렷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눈을 감으면 눈꺼풀 아래에서 따스한 햇볕과 그를 반사하는 수많은 은 식기들이 보였다. 제각각 다른 각도로 빛을 반사하는 탓에 그곳은 식기 상점이라기보다는 보석상에 더욱 가까워 보였다. 정교하게 그려진 접시의 그림들은 생명을 가지고 있어 곧 그 안에서 일렁일 것만 같았고 장식장에 나란히 정렬된 스푼과 포크, 나이프는 마치 천상의 것이기라도 한 것처럼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S는 J를 바라보았다. J는 S의 표정 변화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데에는 무뚝뚝한 사람이었지만, 그렇다고 아무 감상도 가지지 않을 사람은 아니었다. 적어도 J가 알고 있는 S라면 그러했다.
아름다움을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 J가 본 S란 사람은 그런 사람이었다. 남들 눈에야 철저하고 사건에만 관심이 있는 사람처럼 보이겠지만, J가 보기에 그는 아름다움을 갈망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J와 S가 이곳에 있는 것이었다. 이 눈부시게 아름다운 곳에.
S는 눈을 떴다. 화마는 가까이까지 와있었다. 상가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거리로 나와 불길을 바라보았다. S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식기 상점의 문을 열었다. 문 위에 달린 차임벨이 나지막한 소리를 냈다.
S 역시 마지막 인사 없이 식기 상점을 떠났다.
건물은 입구 부근을 제외하곤 완전히 불에 타 있었다. 남아있던 몇 안 되는 은 식기들은 녹아내려 제 형체와 빛깔을 유지하지 못했다. S는 겉옷 주머니에 손을 넣고 까맣게 불에 타 내려앉은 서까래를 발로 툭 건드렸다. 서까래 겉면에 묻어있던 잿더미가 작은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쏟아져 내렸다.
“완전히 까맣게 탔어. 신원을 파악하기엔 힘들 것 같은데.”
안쪽에서 L 경감이 나오며 말했다. 그는 장갑을 벗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보아하니 그 꼴이 엉망인듯했다. 소사체란 그런 법이지. S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마음 한편으로는 안쪽 방에 들어가는 것을 주저했다.
그 소사체는 J일 것이기에.
S는 사실 그의 그런 마지막은 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보아야만 했다. 그것이 J이기 때문에, 그 마지막을 자신이 보아야 했다. J라면 그러길 원했을 것이라고, S는 생각했다.
검게 눌어붙은 피부. 일부분은 흰 뼈가 보였다. 그 뻘건 불의 시작 지점에서 J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S는 잿더미에서 반짝이는 것을 발견했다.
블랙 오팔이었다.
마치 불을 품기라도 한 듯 붉은빛을 감추고 있는 까만 오팔. S는 아무도 모르게 그것을 주머니에 챙겼다.
“맞습니다. J.”
“어떻게 그걸 알지?”
“어제 저녁 식사에 초대받았거든요.”
“S!”
S는 L의 핀잔은 뒤로하고 건물 밖으로 나섰다. 어느덧 겨울이었다. 며칠 기다리면 또 함박눈이 펑펑 떨어지겠지. S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그곳엔, 아무것도 없었다.
도시 외곽까지 나서는 일은 그에게 이젠 습관과도 같은 일이었다. W는 항상 잔소리했지만 그걸 들은 S는 아니었다. W도 그걸 알면서도 잔소리를 하는 것이니, 뭐, 쌤쌤일까.
S는 마차에서 내린 후 옷을 툭툭 털어 정돈했다. 이제는 겨울 코트를 벗을 계절이 다가오는 모양이었다. 시간은 정말로, 빨랐다.
그러나 시간의 경과가 곧 기억의 풍화는 아니었기에, S는 여전히 이 빵집에 다니고 있었다. J가 생전에 일했던 그 빵집. 집에서 멀리 있는 데다가 그다지 맛있는 빵을 팔지도 않고, 그렇다고 종류가 다양하지도 않지만, 언젠가 J가 일했던 바로 그 빵집. S는 오늘도 익숙하게 문을 당겨 열었다.
사사키가 토오루에게 말을 건 것은 그들이 감금된 지 약 3일가량 되었을 때였다. 물론 그것은 사사키 하이세가 식사의 주기로 판단한 정보이기 때문에, 실제로 그보다 더 오래 이곳에 갇혀 있었을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여기에 얼마나 있었는가가 아니라, 무츠키가 얼마나 버틸 수 있는가였다.
사사키에 비해 터무니없이 형편없는 식사. 무츠키는 그런 식사를 손도 쓰지 못한 채 엎드려서 힘겹게 식사를 해야 했다. 이대로 시간이 더 흐르면 무츠키의 몸이 손쓸 수 없을 정도로 나빠질지도 모른다. 그 생각에 사사키는 조금 초조했다.
생각해놓은 방안이 있기는 했지만, 그것이 과연 얼마나 통할까. 그런 생각을 하며 사사키는 입을 열었다.
“사실은, 무츠키가 좀, 신경 쓰여서.”
토오루는 무표정하게 무츠키를 바라보았다. 그는 사사키가 무츠키에 대해 얘기하는 걸 달가워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자신을 제외한 모든 것에 그런 행동을 보였다.
뭐가 신경 쓰이는데요?
착 가라앉은 목소리에 사사키의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지만, 사사키는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양 말을 이어갔다.
“더 진한 걸 하고 싶어도, 맘 편하게 못 하잖아.”
“…더 진한 거요?”
“응. 더 진한 거.”
토오루의 얼굴이 눈에 띄게 붉어졌다. 아이, 정말. 양손으로 얼굴을 가린 토오루는 부끄럽다는 듯이, 그리고 기쁘다는 듯이 사사키에게 말했다.
“정말, 하이세 오빠는, 정말.”
가볍게 사사키의 어깨를 때린 토오루는 곧 무츠키에게 향했다. 토오루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무츠키의 머리채를 붙잡아 그를 일으켰다. 무츠키는 반항은커녕 제대로 서 있는 것조차 어려워 보였다. 무츠키의 숨결은 곧 끊어질 것처럼 이어지고 있었다.
“무츠키 언니, 잠시 다른 곳에 가 있어요.”
“그냥 풀어줘. 이 집에 토오루랑 단둘이서만 있고 싶거든. 처음은, 이런 지하실보다 적어도 침대 위에서 하고 싶어.”
그 말에 토오루는 사사키를 보았다. 얼굴은 완전히 달아오른 채였다. 토오루가 생각했던 ‘더 진한 것’이 맞았다. 지금까지 하이세를 돌보고, 사랑한다 말하고, 입 맞추고, 껴안았던 것이 이렇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하이세 오빠를 이제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
그 생각만으로도 아드레날린이 솟구쳤다.
“무츠키 언니만 여기 가두면 되잖아요. 그럼 방해도 안 되고.”
“아무리 그래도 무츠키는 내 후배야. 후배에게 성적인 행위를 알게 하는 건, 아무리 내가 남자라지만…… 부끄러운 일인걸. 우리 집 방음 잘 안 되는 거, 토오루도 잘 알고 있잖아?”
거기다가 그렇게 되면 우리 둘만의 관계가 되는 게 아니잖아. 안 그래?
사사키의 말에 무츠키는 마치 그의 말 속으로 퐁당 빠져드는 것만 같았다. 토오루는 거침없이 무츠키의 결박을 끊고, 그를 문 쪽으로 밀쳤다. 무츠키는 힘없이 밀려나 바닥에 쓰러졌다.
“그래서 더 진한 게, 뭐예요 오빠?”
토오루가 사사키의 무릎에 올라타 앉으며 말했다. 사사키는 바로 대답하는 대신 그 뒤의 무츠키를 바라보았다. 아직도 쓰러져 있는 무츠키. 설마 도망갈 기운조차 없는 걸까. 토오루는 사사키의 뺨과 턱을 손끝으로 쓰다듬었다.
“눈 감아봐.”
사사키의 말에 토오루는 눈을 감았고, 두 사람은 입을 맞췄다.
농염한 밀도의 타액이 서로 섞였다. 사사키는 눈을 감고 있는 토오루를 바라보았다. 이 아이는 진심이다. 하지만 모든 진심이 옳은 것은 아니었다.
나를 희생해서 한 생명을 살릴 수 있다면. 사사키는 눈을 감았다. 무츠키가 몸을 일으킬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벌기 위해 더욱 적극적으로 토오루에게 다가섰다.
그리고 곧 토오루의 입술이 떨어졌다.
“……무츠키.”
“사사키 선배.”
그곳에는 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는 무츠키가 있었다. 무츠키의 손에는 망치가 들려있었다. 무츠키는 힘없이 팔을 늘어뜨렸고, 망치가 시멘트 바닥에 부딪히며 커다란 소리를 냈다. 그럼에도 쓰러진 토오루는 일어나지 않았다.
사사키는 무츠키의 손을 잡아 그를 부축하려 했다. 그러나 무츠키는 그 손을 밀어내고 다시 망치를 잡았다.
둔탁한 소리가 몇 차례나 이어졌다. 사사키는 충분하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모든 것을 잃은 무츠키에게 충분한 것이란 없을 터였으니.
“괜찮아?”
사사키는 아직도 떨리고 있는 무츠키의 어깨를 조심스레 안았다. 경찰이 곧 두 사람에게서 진술을 들을 예정이라고 했다. 그때까지 무츠키가 괜찮아지길 바라며, 사사키는 자신의 체온을 나누어주었다.
“……선배는 너무 착해서 탈이라니까요.”
“무츠키야말로.”
무츠키의 떨림이 점점 더 엷어지고 있었다. 무츠키는 사사키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두 사람의 악몽은 이걸로 끝인듯했다.
16
“토오루!”
“아, 선배!”
무츠키는 약간 목소리를 높여 사사키의 부름에 응했다. 그 사건 이후, 무츠키가 이사를 하였기 때문에 두 사람은 제법 간만에 얼굴을 보는 것이었다. 워낙에 큰 사건이라 어딜 가나 무츠키를 알아보는 사람은 있었지만, 그래도 그 끔찍한 기억이 있는 마을에서 벗어나는 것만으로도, 무츠키에겐 큰 도움이었다.
“미안해, 기다리게 했네.”
“아녜요. 제가 일찍 나온 건데요.”
일찍 나올 수밖에 없었다. 간만에 사사키를 만나는 날이었으니까. 무츠키는 그날 이후로 사사키에게 묘한 연정을 품고 있었다. 사지를 헤쳐나온 동지애와는 어딘가 다른 감정이었다. 그 감정은 K군을 짝사랑했을 때 느꼈던 감정과는 또 달랐다.
무츠키는 이런 것이 정말로 사랑인가,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물론 사사키가 무츠키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모를 일이었지만, 서로 성이 아닌 이름으로 부르기로 약속했고, 또 그 약속을 철저히 지키는 것으로 보면 사사키도 무츠키에게 아주 감정이 없는 것은 아닌 듯 보였다.
“토오루는 요즘 어때? 괜찮아? 나보다 더 힘든 일을 많이 겪었잖아.”
“가끔 악몽 꾸는 것 빼고는 괜찮아요. 선배가 곁에 있어 주니까요.”
“믿음직스럽게 여겨줘서 고맙네.”
사사키의 말에 무츠키는 싱긋 웃었다. 두 사람은 거리를 걸었다. 벌써 졸업식 시즌이었다. 사사키는 대학에 진학한다고 했고 그 대학은 마침, 무츠키가 이사를 간 지역과 아주 가까이 있었다.
“그나저나 머리는…….”
“아. 스트레스 때문이라는 것 같아요.”
무츠키는 곤란한 듯 말했다. 어느 순간부터 백발이 자라기 시작했다. 마치, ‘그’ 무츠키 토오루처럼. 지금은 원래의 머리카락 색보다 흰 머리가 훨씬 더 많았다. 사건의 후유증이 이런 것이라니, 얄궂은 일이었다.
“신경 쓰이죠, 아무래도? 염색할까요?”
“아냐, 괜찮아. 토오루가 괜찮다면, 나도 괜찮아.”
“선배는 역시 좋은 사람이에요.”
그렇게 말하며 무츠키 토오루는 부드럽게 웃었다. 사사키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사랑으로 가득 차 있었다. 사사키는 자연스럽게 무츠키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무츠키 토오루는 그 온기가 너무나도 기뻤다. 이 온기가 오직 내 것이라니. 무츠키 토오루의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지금까지의 일이 모두 녹아버리는 따스함.
“어, 하이세 오빠 맞죠!”
그때 누군가 사사키를 불렀다.
사사키는 몸을 돌려 목소리의 주인을 보았다. 하이세 ‘오빠’라니. 무츠키의 관심 역시 사사키의 시선을 따랐다. 그곳에는 낯선 여성이 있었다. 사사키는 반갑게 웃으며 그에게 인사를 했다.
“아, 오랜만이야.”
“오빠, 잘 지냈어요?”
“응. 그럭저럭. 아, 이쪽은 무츠키 토오루. 학교 후배야.”
여자는 무츠키를 빤히 바라보았다. 무츠키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곧이어 다시 사사키에게로 시선을 돌린 여자가 장난스레 웃으며 말했다.
“여자친구가 아니라요?”
“아니야, 그런 거.”
어째서 그 사실이 이렇게 서글플까. 무츠키는 계속해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들었다.
“나, 오빠 좋아했던 거 알죠? 저 아직도 좋아한다구요.”
“그런 말은 됐어.”
“진심인데. 각오하라고요, 오빠! 제가 대학만 가면 아주 그냥.”
여자는 여전히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고, 사사키는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치고 있었다. 무츠키는 이 상황이 퍽 싫었다. 질투가 났다. 그런 말 같은 걸, 다른 사람이 하게 두는 사사키가 미웠다.
무츠키는 모자를 깊이 눌러썼다. 누군가 자신을 알아보지는 않을까,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그의 시선은 불안에 가득 차 있었다. 벌써 여름의 끝자락이었다. 무츠키는 힘을 주어 제 옷의 끝단을 움켜쥐었다.
무츠키는 지금, 사사키 하이세의 집 근처에 몸을 숨겼다. 이미 교복을 입은 학생 몇 명이 무츠키를 지나쳐갔다. 무츠키는 집중하여 녹색 교복을 입은 사람들을 주시했다. 사사키를 찾는 것은 예상대로 너무도 쉬운 일이었다. 사사키 하이세 특유의 그 분위기를 흉내 낼 수 있는 사람은, 적어도 이 학교 안에는 없을 터였으니.
무츠키는 용기를 내 사사키의 앞에 섰다. 그는 모자를 쓴 무츠키를 잠시 내려다보더니, 무언가 말을 하려 했다. 무츠키는 그가 대화를 시작하기 전에 소매를 잡아끌어 인적 드문 골목으로 들어섰다. 사사키는 선선히 무츠키의 뒤를 따랐다.
“너는…… 무츠키. 무츠키 토오루지.”
사사키의 말에 무츠키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츠키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토오루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뉴스에서는 실종 상태라고 했는데, 괜찮은 거야?”
“선배, 저랑 잠시 어디 좀 가주실 수 있을까요?”
무츠키는 사사키를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흔들림 없는 눈빛 뒤쪽은 두려움이 군데군데 묻어있었다. 사사키는 그 두려움을 읽을 수 있었고, 그렇기에 말없이 무츠키의 뒤를 따라 걸었다.
무츠키는 인적 드문 골목만을 골라 걸었다. 사사키는 그런 무츠키에게 무언가 사정이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째서 자신에게 무츠키가 찾아왔는지는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었다. 그때 빌린 두 권의 책을 돌려주려고 이러는 것은 아닐 것이고. 사사키는 무츠키의 드러난 팔과 다리를 살폈지만 상처는 없었다. 그렇다는 건, 아주 악질적인 자에게 위협을 당하고 있거나 간간이 들려오는 소문처럼 그가 범인이거나 둘 중 하나라는 것일까.
하지만 사사키는 무츠키가 범인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비록 그를 오래 알지는 않았지만, 무츠키를 보았을 때 느껴지는 느낌이라는 게 그랬다.
어느 순간, 사사키는 무츠키가 향하는 곳이 학교 근처라는 걸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둘의 발소리만이 정적을 채웠다. 길은 점점 비포장으로 바뀌었고 결국에는 산처럼 보이는 곳을 오르기 시작했다. 사사키는 직감적으로 이곳이 학교 근처 공원 뒤의 언덕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여기는…….”
“제 전 남자친구가 묻힌 곳이에요.”
K의 실종이라면, 사사키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 애초에 K와는 어느 정도 친분이 있었기도 했었고. 그나저나 묻힌 곳이라니? K는 실종된 것이 아니었던가? 물론 그의 사망이 거론되기도 했지만, 초동수사에서는 실종이나 가출에 더욱 무게를 두지 않았던가.
아니, 무츠키가 이곳에 K가 묻혀있다는 걸 안다는 건, 무츠키가 그 사건에 연루되어 있다는 뜻이었다. 문제는 어떤 식으로 연루되어 있는가인데.
“선배, 도와주세요.”
“무츠키…….”
아무래도, 나쁜 쪽으로 연루된 모양이었다.
“이러다가 저도 선배도 죽을지도 몰라요.”
“무츠키 언니.”
무츠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낯선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사사키는 흠칫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자신들이 걸어온 그 길을, 흰 머리의 소녀가 걸어오고 있었다. 그의 등장에 무츠키는 마치 죽은 사람을 보기라도 한 양 눈에 띄게 두려워했다. 사사키는 그런 무츠키의 앞을 막아섰다.
저 아이라면, 사사키도 알고 있었다.
사사키 하이세가 자신 주위를 맴도는 소녀를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다만 중학교 교복을 입은 아이기에, 더는 아무 말 않고 넘어갔을 뿐이었다.
“여기서 뭐해요? 무슨 말 하고 있었어요?”
무츠키는 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소녀의 모습이 점점 드러남에 따라, 사사키는 그의 손에 무언가가 들려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망치.
이미 토오루의 시야에 들어온 이상, 도망칠 시간은 턱없이 부족했다.
무츠키는 자신을 껴안아 보호하는 사사키의 얼굴을, 그 모습을 보고 화가 난듯해 보이는 토오루의 얼굴을 보았다. 사사키가 망치를 맞고 쓰러진 이후에 바닥에 그저 주저앉은 무츠키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14
“정말, 두 사람을 옮기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아요? 무츠키 언니. 이러면 곤란해요, 정말”
“사……살….”
“살려달라고요? 이렇게 일을 망치는 사람을 살려둘 필요는 없잖아요.”
두 사람의 대화에 사사키는 어렴풋이 눈을 떴다. 머리는 끝없이 지끈거렸고, 어딘지 모를 몸의 부위는 계속해서 불편함을 토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사키는 고개를 일으켰고, 의자에 손과 발이 결박되어있는 걸 깨달았다. 그 모든 행위는 무츠키를 위한 것이었다.
살려달라고 비는 무츠키에게 다가가기 위해 몸을 일으키려다 깨달은 것들.
“너는…….”
“하이세 오빠. 저, 알아요?”
토오루의 관심이 순식간에 사사키에게로 옮겨졌다. 사사키는 토해내듯 숨을 뱉었다. 작은 조명 하나에 의지한 방은 너무나도 어두워 빛이 닿는 곳보다 그렇지 않은 곳이 더 많았다. 사사키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소녀를 바라보았다. 아직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한 의식 속에서 건져 올릴 수 있는 이름은 하나뿐이었다.
“……무츠키 토오루.”
“어머!”
토오루는 눈에 띄게 기뻐했다. 순수한 행복이 느껴지는 웃음에, 사사키는 오히려 소름이 끼쳤다. 그러며 사사키는 곧 눈앞의 사람이, 여태껏 자신을 따라다니던 그 소녀라는 것을 깨달았다.
“…무츠키가 아니군.”
“맞아요. 무츠키 토오루.”
“진짜 무츠키는…!”
“저도 진짜 무츠키에요. 무츠키 언니의 이복동생. 무츠키 토오루.”
토오루는 무츠키의 옆에 가서 섰다. 무츠키 역시 손발이 의자에 결박된 상태였다. 토오루가 다가가자 무츠키는 눈을 질끈 감으며 눈물을 떨구었다. 그것만으로도, 사사키는 무츠키에게 토오루란 어떤 존재인지를 알 수 있었다.
“저희도 쌍둥이라고 할 만큼 닮았죠? 미츠키 언니가 없어서 참 아쉬워요, 이럴 때는.”
“그 애는 놓아줘. 네가 원하는 건 나잖아.”
“지금 무츠키 언니를 걱정하는 거예요? 정말, 하이세 오빠는 마음씨도 곱다니까.”
토오루가 이런 짓을 벌인 이유를 사사키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사사키는 지난 시간 동안 무츠키에게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K의 실종과 화재로 인한 가족의 상실. 그 모든 것에 저 아이가 속해있을 것이 분명했고, 그 이유는 아마도, 자신의 육체일 터였다. 가족도 재산도 없는 사사키에게 바랄 수 있는 것은 오직 그 육체밖에 없었다.
“하지만 있잖아요, 무츠키 언니의 역할은 이제 끝났어요. 더는 쓸모가 없다구요.”
“무츠키 토오루!”
사사키의 말에 토오루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토오루의 기억 속에서, 사사키가 언성을 높이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 새로운 매력이란. 토오루는 지그시 사사키를 바라보았다. 피가 엉겨 붙은 희고 검은 머리카락과 어떻게든 이 상황을 헤쳐나가려고 애쓰는 눈동자. 모든 것이 사랑스러웠다. 모든 것이 영광이었다.
“그 애가 조금이라도 다치면, 난 너를 용서하지 않을 거야.”
“……역시 오빠는, 멋있어요, 정말. 백마 탄 왕자님 같잖아.”
“무츠키 토오루. 나에게 사랑받고 싶다면, 그 아이를 가만히 둬.”
그 말에 토오루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식사를 준비해 오겠다며 어둠 속에 잠긴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사사키는 그 문 너머에 위로 향하는 계단이 있는 것을 얼핏 보았다. 그렇다면 이곳은 지하일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아마도, 사사키 하이세의 짐작이 맞다면, 이곳은 자신의 집 지하였다.
익숙한 잡동사니들과 분위기. 무츠키 토오루는 사사키가 가족이 없다는 것도, 심지어 사사키의 집 구조도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악질적인 스토킹이라고밖에 할 수 없었다.
“선배.”
“미안해 무츠키, 나 때문에…….”
“아니에요…….”
무츠키는 고개를 푹 숙였다. 무츠키는 자기를 탓하고 있었다. 만약에 내가 사사키 선배를 찾지 않았더라면. 그날 밤 밖으로 나오지 않았더라면. 애초에 K라는 존재를 신경 쓰지 않았더라면. 그의 안에서 그의 모든 행동은 잘못으로 변질되었고 모든 악행의 원인은 그에게 있었다. 무츠키는 소리 없이 눈물을 떨구었다. 그런 무츠키에게, 사사키가 말했다.
“많이, 힘들었지.”
무츠키는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미츠키의 죽음 이후 그에게 그런 말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저 말 한마디가 뭐라고 무츠키의 심장을 이렇게 울린단 말인가. 무츠키는 크게 소리를 내지도 못하고 울었다.
무엇이 저 아이를 저렇게 만들었을까. 사사키는 서재에서 무츠키와 나누었던 얘기들을 떠올렸다. 그때는 그렇게, 순수하고 여려 보였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