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봄이었다

 

1

 

그 애에게서 전화가 왔다. 전화기를 붙잡은 손에서 땀이 배어나왔다. 갑자기 왜? 그 애는 이번 주 주말에 이쪽으로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더 이상 그 애의 목소리를 담아오지 못하는 수화기를 그대로 들고 나는 텔레비전 옆의 달력으로 눈을 돌렸다. 18, 화요일이었다. 18이라는 숫자가 눈동자에 커다랗게 박혔다. 갑자기 왜? 나는 그 생각을 떨쳐낼 수가 없어 애꿎은 수화기만 계속 쥐고 있었다.

그 애는 나의 수치였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 애는 나의 수치였고 나는 그 애의 수치였다. 우리는 그런 관계였다. 우리는 서로의 수치가 됨으로써 이뤄진 관계였다. 나는 그 애를 더 보고 싶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우리는 만나기만 하면 서로의 수치를 들춰낼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 애는 나의 수치를 또 보고 싶어 하는 걸까? 나는 더 이상 내 수치를 보는 일도, 다른 사람의 수치를 보는 일도 그다지 겪고 싶지 않았다. 그 애가 내 곁에서 떠나고 난 뒤에야 비로소 체감한 것이었다. 나는 이 이전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겨울에는 해가 일찍 넘어가서 나는 자꾸 배가 고팠다. 저녁을 먹으려면 아직 한 시간이나 기다려야 했다. 위장이 비어서인지 그 애 생각이 계속 났다. 내가 그 애에게 고백했던 나의 수치들, 그 애가 내게 고백했던 그 애의 수치들. 보여주고 싶지 않은 것을 보여주고 보고 싶지 않은 것을 보았던 그때의 기억들이 머릿속을 채웠다. 체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는 저녁 시간까지 찬물로 위장을 달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는 너무 많은 것들을 떠올려버려 진짜 체할지도 몰랐다.

그 애는 여기엔 왜 오겠다고 하는 걸까? 여기가 그 애의 기억에 남을 만큼 좋은 장소라는 생각은 딱히 들지 않았다. 그 애가 이곳을 떠날 때 그 애의 등 뒤에는 미련이라고 할 만한 것들이 붙어있지 않았다. 그때 그 애는 차에 오르며 나를 한 번 쳐다보기는 했지만, 그건 정말 아무 의미도 없는 시선이었다. 그 애는 그냥 문득 뒤를 돌아본 것이고 우연히 거기에 내가 있었던 것이라는 생각 밖에 들지 않는, 아무런 생기도 없는 시선이 바람처럼 나를 그저 한 번 훑고 지나갔을 뿐이었다. 나는 너무 불안했다. 그 애의 입에서 나올 수치와 내 입에서 나오게 될 수치들이 얼마큼의 무게를 지니고 있는지 알 수가 없어서. 그 애가 이곳에 올 이유는 그것 밖에 없는 것 같아서.

그 애가 이사를 간 뒤로 그 애에게서 연락이 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나는 그냥 그 애가 어디선가 잘 살고 있겠거늘 했다. 그 애가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아예 안 하지는 않았지만 그 생각을 그렇게 오래 하지는 않았다. 그것이 그 애의 수치였으니까. 내가 살아있는 동안 그 애는 죽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 애는 그냥 그곳에서도 나를 대신할 또 다른 수치를 만들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 생각의 유통기한은 고작 삼 개월이었다. 나는 그 애를 생각할 틈이 없었다. 이제는 수치가 없는 삶을 살 필요가 있었고, 나는 그것에 집중해야만 했다.

그런데 그런 나의 삶에 그 애가 갑자기 끼어들어 버린 것이었다. 누군가 악의를 가지고 나의 삶을 다시 일 년 전으로 돌려놓으려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만약 그 누군가가 바로 그 애라면, 나는 그 애를 진심으로 미워해야 할까? 과도하게 뛰어버린 사고 과정을 따라가지 못하고 나는 잠시 멍하게 있었다. 그렇다면 나는 그 애를 미워하는 게 맞는 일일 것인데 왜 심장이 싸해지는 느낌일까. 어쩌면 그 애에게 미련이 남은 것은 나일지도 몰랐다. 내 미련이 차에 오르는 그 애의 시선을 끌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2

 

수요일엔 친구와 영화 약속이 있었다. 좋은 타이밍이었다. 부모님과는 그 애에 대한 문제를 상담하기 힘들었다. 부모님은 우리를 너무 잘 알았다. 어른의 입장에서는 그랬다. 사실 위선 한 꺼풀을 벗겨낸 우리를 알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우리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그 애와 관련된 일을 말한다면 부모님은 나와 그 애의 관계를, 우리의 수치를 눈치 챌지도 모른다. 나는 그 애보다 거짓말에 능숙하지 못했기에 내 말 어딘가에서 우리 사이의 미묘한 기류를 감지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무서운 일이었다. 대낮인데도 어두운 하늘을 피해서 우리는 영화관 안으로 들어섰다.

영화관 안은 평일인데도 붐볐다. 친구는 티켓을 손에 들고 아동용 애니메이션의 포스터를 찬찬히 구경하고 있었다. 나는 그 옆에서 언제쯤 친구에게 그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좋을지를 재고 있었다. 영화관 안의 공기는 너무 무겁고 답답했다. 영화 포스터에서 관심이 떨어진 친구는 시간을 때우자며 그녀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녀가 좋아하는 아이돌 가수의 이야기, 그녀만 다니는 학원의 이야기 같은 것들을. 그녀의 삶은 그런 이야기들의 사이에서 살아갈 수 있는 삶이었다. 내가 가까스로 발을 들이게 된 세계였다. 나는 그 세계의 완전한 주민이 되고 싶었고 그 세계 밖으로의 외출은 최대한 삼가고 싶었다. 주기적으로 부끄러워하지 않고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영화는 재미가 없었다. 내가 자꾸 그 애를 생각하고 있어서 그런 걸지도 몰랐다. 영화는 내용이 뚝뚝 끊겼고 처음부터 끝까지 희미한 느낌만 주다가 끝나버렸다. 나는 클라이맥스가 확실한 영화를 좋아했다. 미적지근한 온도의 내용을 천천히 말하는 영화는 내 취향이 아니었다. 더욱이 그 애가 계속 연상이 되었다는 게 가장 싫은 점이었다. 여자 아이. 자신을 죽여 달라고 말하는 여자 아이. 그 여자 아이는 결국 죽지 못했다. 자살 시도도 하지 못했다. 죽음을 소망하던 여자 아이는 영화의 엔딩에서 꽃을 한 아름 들고 환하게 웃었다. 그 애는 이 영화를 보고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저 여자애는 분명 수치스러워서 저렇게 웃고 있는 걸 거야. 그럼 나는 그것이 억지라고 생각하면서도 아무런 말없이 고갤 주억거리겠지.

우리는 그런 관계였다. 서로의 수치를 침범할 수 있는 권리는 아무에게도 없었다.

영화관 밖의 공기도 영화관 안의 그것과 크게 다르진 않았다. 누군가 커다란 솜이불로 내 얼굴을 덮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일부러 크게 들이쉰 숨에서 배기가스 냄새가 희미하게 났다.

추위를 많이 타는 친구는 몸을 움츠리고 걸었다. 우리는 방금 봤던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친구는 여주인공이 참 좋았다고 했다. 그 여자 아이가 죽지 않아서 참 다행이라고, 자신의 삶을 찾아 떠나는 결말이 좋았다고 했다. 짧게 자른 머리 아래로 차가운 바람이 스쳐지나갔다. 나는 이야기의 틈새를 비집어 그 애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 빨간불이 켜진 보행자용 신호등 바로 아래였다. 우리의 관계에 대한 얘기는 물론 빼고 말했다.

그럼 그 애를 안 보면 되잖아.”

그렇지만…….”

친구는 너무나도 가볍게 내 고민에 대한 결말을 내렸다. 그녀는 그 말을 하면서 어떠한 감정의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보기 싫으면 보지 않는다. 당연한 일이었다. 보행자 신호가 초록불로 바뀌었고 그녀는 나보다 먼저 횡단보도의 하얀 선 위에 발을 얹었다. 나는 두발 쯤 늦게 그녀의 뒤를 따랐다.

보고 싶지 않으면 보지 않는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문제는 거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그 애가 보고 싶은 걸까, 아님 보고 싶지 않은 걸까? 그 애를 생각하면 물론 그 애와 나눴던 우리의 수치들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하지만 우리의 관계는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그 애는, 그래도 그때 나의 가장 친한 친구였고 거의 유일한 친구였다. 수치들 다음으로 떠오르는 것은 그 애와의 추억이었다. 그 애와 함께 키웠던 햄스터, 사루비아 꽃은 꿀을 빨아먹을 수 있다는 말을 듣고 학교 화단의 사루비아 절반 정도를 따버렸던 일, 슬레이트 처마 아래에서 봄비가 떨어지는 것을 구경했던 일 같은 기억들이 나를 계속 힘들게 했다. 그 애를 미워하게 되면 그런 기억들까지 미워하는 것 같아서. 나중에 어른이 되어 그때의 기억이 아무 의미가 없어진다면 나는 그 애를 아무 거리낌 없이 피할 수 있을까.

어려운 일이네.”

친구는 그렇게 말하며 하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 하늘을 보았지만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구름만이 하늘 위에서 느릿하게 몸을 꾸물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빨간불이 켜진 신호등의 바로 옆에 섰다. 헤어질 시간이었다.

그래도 주말까지는 시간이 남아서 다행이야.”

, 그러게.”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친구는 또 다른 횡단보도를 건넜다. 그녀의 뒷모습이 작아지는 것을 보다 나는 몸을 돌렸다. 발걸음이 땅에 자꾸 붙었다. 사실 지금 바로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집에 돌아가면 그 애의 냄새가 남아있을 것만 같았다. 누군가 같이 있어줬으면 싶었다. 그래서 그 냄새를 지워줬으면. 혼자 있기는 너무 추운 날씨였다.

그 애에게 다시 전화가 온 것은 수요일에서 목요일로 넘어가기 두 시간쯤 전이었다. 이번에도 역시 집 전화가 울렸고 나는 바로 휴대용 전화기를 뽑아들어 귀에 가져다댔다. 여보세요? 그 애의 목소리가 귓구멍을 울렸다. , 나야. 목소리가 갈라질 거라 생각했는데 그러지 않아 다행이었다.

그 애는 이번에는 바다에 가고 싶다는 말을 했다. 토요일에 이쪽 터미널까지 올 테니까, 자기와 함께 바다를 보러 가달라고. 나는 전화기를 들고 방에 들어가 속삭이듯 말했다. 근데, , 하필이면 나야?

실례될 수 있는 질문이란 생각은 그 말을 뱉고 난 이후에 떠올랐다. 전화 스피커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 애의 옅은 숨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지만 음질이 좋지 않은 전화였기에 그것을 확신할 수는 없었다. 이럴 때 바로 말을 철회해야 할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입술을 놀리지 않았다.

그냥…….”

말꼬리가 길게 이어질 듯 하다가 뚝 끊겼다. 우리는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전화를 끊지도 않았다. 서로의 숨소리를 들으려는 듯 수화기를 꽉 움켜쥐고 심장 박동을 느끼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냥 갑자기 바다가 가보고 싶은데 혼자 가기는 무서워서, 생각나는 게 너 밖에 없었어.”

그래.”

우리의 통화는 거기서 끝났다. 누가 먼저 전화를 끊었는지 확실하지 않았다. 평소 성격대로 그 애가 먼저 끊었을 것도 같고, 그 적막을 견디지 못한 내가 끊어버렸을 것도 같았다. 생각나는 게 나밖에 없다니. 그 말을 서글퍼 했으면서도 나는 아직도. 그 애는 빈 수화기를 들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전화를 끊고서도 심장이 계속 뛰었다. 창밖에서 짐승의 울음 같은 바람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그것은 어떠한 신호 같았다. 언젠가 다큐멘터리에서 본 적 있는, 자신의 동료들에게 사냥을 시작한다고 알리는 신호와 매우 비슷했다. 그 애도 나와 똑같은 바람소리를 듣고 있을 것 같았다. 바람은 너와 나 중 누구를 잡아먹고 싶어서 저렇게 애탄 울음을 온 세상에 흩뿌리고 있는 걸까. 불도 켜지 않은 방엔 구석구석 짙은 어둠이 몸을 사리고 있었다.

 

3

 

김지영. 그 애는 이름만큼 흔하게 있는 애였다. 그 애는 딱히 예쁘진 않았지만 딱히 못생기지도 않았고, 사람들에게 벽을 치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사람들과 힘껏 어울리는 것을 즐기지도 않았다. 교칙에 규정되어 있는 외모 규정에서 단 한 발짝도 벗어나지 않았을 뿐더러 딱히 잘 하는 것도 없어서 선생님들의 기억 속에서도 큰 지분을 차지하지 못했을 게 뻔한 애였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무릎 뼈 언저리까지 오는 감색 치마 앞으로 손을 모으는 버릇 정도일까. 그마저도 너무 작아서 그것을 눈치 챈 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니까 그 애는 시간이 지나면 제대로 기억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법한 애였다. 머리가 길었는지 짧았는지, 키가 컸는지 작았는지, 그 존재마저 쉽게 잊힐 사람이었다. 그 애는 그런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 자신을 바꾸려는 노력을 하나도 하지 않은 걸 보면 그 애는 그런 자신이 나름 만족스러워 했을지도 몰랐다. 그 애는 사람들에게 잊히는 게 익숙해보였고 가끔씩은 그것을 즐기는 것 같기도 했다.

그 애와 함께 나의 수치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나는 그 애에게 오백 원짜리 동전 세 개를 건넸다. 모종삽 가지러 가야겠지? 동전들을 주머니에 넣고 그 애가 한 말이었다.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집 뒤편의, 어느 집의 소유인지 모를 감나무 아래의 부드러운 땅을 그 애가 파냈다. 그 애의 파란 하복 치마에 짙은 색의 흙이 조금 튀었다. 내가 훔쳐온 물건을 숨기는 것은 항상 그 애의 담당이었다. 그것이 나의 수치를 공유하는 방법이었다.

그 애는 손을 뻗어 파란색 상자 뚜껑을 조심스레 들어올렸다. 곧 상자를 비워야겠어. 싸구려 큐빅이 달린 귀걸이 한 짝, 집 열쇠, 낡은 손톱깎이, 카드가 없는 카드 지갑, 몇 종류의 동전들. 소량의 검은 흙과 함께 손바닥만 한 상자에 들어차 있는 것들이었고 모두 우리 집에서 없어져버린 것들이었다. 그 애는 오백 원짜리 동전을 그것들 위에 조심스레 올려놓고는 상자의 뚜껑을 닫았다. 나는 그제야 숨을 길게 내쉬었다.

이 물건들은 너희 가족의 기억에서 벌써 잊혀졌겠지?

상자 위에 흙을 덮으면서 그 애가 했던 말이었다. 나는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다 응, 하는 대답을 흐릿하게 남겼다. 큐빅 귀걸이는 내가 훔치기 이전부터 잊힌 것이었고, 열쇠나 손톱깎이, 카드지갑은 이미 새로운 것들로 대체된 뒤였다. 동전은 사라진 줄도 모르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나는 그 질문에 담긴 뜻을 이해하지 못해 그 애의 뒤통수를 멀뚱히 바라보았다. 새까만 머리카락이 한여름의 태양빛을 하얗게 반사시키고 있었다.

조금 부럽기도 해.

잊혀지는 게?

그 애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곤 흙을 다졌다. 관자놀이부터 광대뼈, 턱까지 끈끈한 땀이 천천히 흘러내리는 게 느껴졌다. 나는 그 애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만약 모두가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면 나는 아마 엄청나게 끔찍한 기분을 느낄 것 같은데, 그게 어째서 부럽다는 걸까. 그 당시 나는 그런 말을 하는 그 애가 조금 무섭게도 느껴졌던 것 같다. 내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볼 때의 무서움. 나는 먼저 우리 집 쪽으로 발을 옮겼다.

그날 저녁 나는 결국 생리를 했다. 핏자국이 번진 속옷을 샴푸로 빨며 그 애가 했던 말을 곱씹어 보았다. 모두에게 잊히는 게 부럽다는 말을. 아랫배보다 조금 아래의, 정확히 짚을 수 없는 어떤 부분이 당겨왔다. 나는 또 뭔가를 가져가고 싶어졌다. 오늘 밤 생리를 시작했으니 이제 길어봤자 오일 정도면 도벽도 잠깐 숨을 죽이고 있을 것이었다. 그 애가 했던 말이 핏자국처럼 가슴 속에 엷게 번졌다. 그런 걸 부러워하는 건 어떤 기분일까? 나는 아빠의 일회용 면도기를 손바닥 안에 숨겼다. 내일 또 그 애를 찾아가야 했다.

 

나의 수치가 도벽이라면 그 애의 수치는 살아가는 것 그 자체였다. 우리는 우리 둘 다 다닌 적이 없는 초등학교의 낡은 그네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머리 위에서 간간이 끽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몸을 크게 움직일 때마다 발밑에서 낙엽이 바삭거렸다. 주말인데도 운동장엔 아무도 없었다. 물에 빠져 죽는 건 어떨까. 떨어지는 도중에 심장마비로 죽는다던데. 그 애가 말했고 나는 바로 고개를 크게 저었다.

싫어. 물에 불어서 흉해지잖아. 죽는 것만 생각하면 옥상에서 떨어지는 거랑 다를 게 뭐야.

그 애는 으응, 소리를 내더니 그네에서 뛰어내렸다. 우리는 빠르고 깔끔한 자살 방법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 애는 죽을 때 아픈 것이, 죽고 난 후 자신의 모습이 흉할 것이 싫어서 죽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말을 했다. 그 방법을 찾고 나면 자신은 죽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더 이상 수치스럽지 않아도 괜찮을지 모른다는 말을 했다. 이전의, 자신을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으면 좋겠다는 말도 같은 맥락의 말이었다.

그네에서 뛰어내린 그 애는 몸을 돌려 내 쪽을 바라보았다. 나는 그 애에게 죽지 말라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나는 그 말을 침과 함께 삼켜버렸다. 그건 규칙 위반이었다. 목에 걸린 그 말이 가시가 되어 목구멍 안쪽을 쿡쿡 찔러서 나는 침을 모아 한꺼번에 삼켰다. 어렵네. 그 애의 목소리가 이명처럼 울렸다.

나는 죽고 싶은데 왜 자살을 못할까? 나는 그게 너무 부끄러워. 언젠가 그 애가 했던 말이었다. 우리는 아직 춘추복을 어색하게 입고 있었다. 그 애는 봄바람이 귀 끝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처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가 본격적으로 수치를 나눈 때는 아니었다. 내게 말을 거는 걸까? 나는 아무 대답도 않고 가만히 있었다. 그 애는 내 쪽으로 얼굴을 두고 있었지만 시선이 뿌옇게 번져있어 나를 보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 날 저녁 나는 처음으로 죽음에 대한 생각을 했다. 그 애의 시선만큼이나 뿌연 생각이었다.

그네에서 뛰어내린 그 애는 운동화 뒷굽으로 딱딱하게 다져진 흙을 파고 있었다. 나는 사실 죽고 싶지 않은 걸까? 그 애는 이 말을 할 때마다 목소리를 삼키듯 말을 했다. 나는 이번에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떻게 말을 해줘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자살을 할 수 있을 거라는 말도, 자살을 포기하라는 말도 이상했다. 대신 나는 다른 말을 입에서 뱉었다. 너는 왜 자살을 하고 싶은 거야? 하고.

너는 왜 물건을 훔치고 싶은 거야?

그 애의 입에서 질문이 떨어질 줄은 몰랐다. 생리를 하는 것 처럼 아랫배가 묵직해졌다. 몰라…… 생리를 할 때면, 배란통 때도, 그럴 때면 물건을 그냥 훔치고 싶어져. 그냥, 어떤 이유가 있다고 하기보다는. 나는 그 애에게 변명을 하듯 말을 늘어놓았다. 그 애가 나의 죄를 추궁하는 것 같아서. 달려가 부모님께 모든 일을 말해버릴 것 같아서.

나도 비슷한 거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으면서도 전혀 다른 세계의 말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냥 죽고 싶다는 걸까, 아니면 죽고 싶은 이유가 명확하지 않다는 걸까? 전자도 후자도 내 가치관으로썬 이해하기 힘든 말이었다. 내게 있어서 죽음은 그렇게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그 애가 자살한다면 주위 사람들은 죽음의 원인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으나 품었던 의문을 그 애에게 내비치지는 않았다. 그 애가 죽으면 다들 그 애를 조용히 잊을 것 같아서.

 

4

 

그 다음날도 어김없이 그 애에게 전화가 왔다. 나는 내 휴대폰 번호를 알려줄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지번으로 시작되는 숫자의 나열들이 전화기의 자그마한 화면 안에서 번잡스레 움직이고 있어서 그랬다. 그 애는 토요일 아침 여덟 시에 도착하는 차표를 예매할 것이라고 했다. 나는 그 애에게 내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여덟 시까지 터미널에 가 있을까?

, 하는 그 애의 대답이 한 박자 정도 늦었다. 그 애도 나처럼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 분명했다. 우리는 서로 맞닿아 있는 지점이 꽤 있었다. 친구끼리는 닮는다고 그러던가. 그 말이 사실일지도 몰랐다. 우리는 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은 채 전화를 끊었다. 희미하게 빛나던 화면이 수화기를 내려놓음과 동시에 꺼졌다. 아까까지만 해도 벌겋던 하늘도 어느 순간엔가 빛을 잃고 숨을 죽이고 있었다.

바다. 바다엔 왜 가고 싶은 걸까? 냉장고에서 생수통을 꺼내 그대로 병 입구에 입을 대고 마시며 생각했다. 바다. 바다는 그 애에게 어떤 의미일까? 각종 영상에서 본, 제 발로 바다 속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잠깐 머릿속을 스쳤다. 그것에 마음이 조금 쓰였다.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랬다. 그 애가 바뀌었을까? 사람이 그렇게 쉽게 바뀌겠어, 하는 생각과 동시에 지금 내 모습이 겹쳤다.

그 애가 이사를 간 이후 나는 감나무 밑의 파란 상자를 그대로 버렸다. 그 애가 떠나가고 난 뒤에 일어난 일이었다. 길거리에 아무렇게나 놓여있는 누런 쓰레기봉투 위의 그 상자를 보며, 나는 깊은 숨을 내뱉었다. 이제는 더 이상 마음 졸이지 않아도 괜찮아. 자신을 달래듯 중얼거린 말이었다. 그 순간 나는 왜, 사람들에게 잊히는 게 부럽다는 그 애의 말을 떠올렸을까. 도벽은 나와 그 애를 연결하는 가장 짙고 굵은 끈이었다. 이상한 생각인 걸 알면서도 자꾸 그 애가 내 도벽을 가져간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내 기억 속에서 살아있고 싶지 않아서. 남들처럼 내가 그 애를 잊었으면 싶어서.

사실일리는 없겠지만,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 애는 완전히 성공한 것이었다. 얼마 전 그 애에게 전화가 오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그 애에 대한 생각을 전혀 하고 있지 않았으니까.

자살하려는 애가 설마 다른 사람을 부르겠어. 일 점 오 리터짜리 생수병의 뚜껑을 꽉 돌려 잠갔다. 손바닥에 남은 거칠거칠한 느낌을 바지 위에 문질러 닦았다. 바다. 나도 바다에 가보는 건 오랜만이었다. 여기는 바다를 가려면 마음을 단단히 먹고 떠나야 했다. 그런데 그 애는 왜 여기까지 오는 걸까? 내가 어디 도망이라도 갈 것 같았던 걸까. 그 애도 많이 불안했을 것이다. 내가 어떻게 변했을지, 내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내가 자신을 잊어버리진 않았을지. 그 애는 역시 죽지 못하는 사람인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잊히고 싶어 하면서도 동시에 기억되고 싶어 하는 그 아이는.

그 애와 나는 변한 것이 아무것도 없을지도 몰랐다. 많이 바뀐 것처럼 보여서, 그래서 서로가 멀리 있는 것 같아도 우리는 아직 서로의 수치를 나누고 있을 때와 전혀 바뀌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만나고 싶어 하는 게 아닐까. 나는 생수병의 뚜껑을 다시 열어서 물을 크게 한 모금 더 마셨다.

 

5

 

버스가 덜컹거렸다. 우리는 둘 다 아무 말 없이 창밖만 내다보고 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서로 간만에 만난 게 좋아서 껴안고 소리 지르고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우리 관계는 바뀐 것이 없었다. 오랜만이야. 이 짧은 한 마디를 동시에 말하곤 우리는 그저 서로의 눈만 바라보다 서로 다른 쪽으로 고개를 슥 돌렸다. 그것이 우리 인사의 끝이었다.

차 안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이렇게 큰 차를 우리 둘이서만 타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예 세상에 우리 둘 밖에 없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이파리를 죄다 털어버린 나무들이 빠른 속도로 창문을 스쳐 지나갔다. 잘 지냈어? 창가에 앉아 있던 그 애는 몸을 내 쪽으로 조금 돌렸다. 전화와는 목소리가 또 달라서, 나는 그 목소리가 조금 어색했다.

"응 나름. 너는 어때? 거기는 지낼만해?"

"심심한 동네야. 그래도 애들은 좋아. 다 잘 대해줘."

그 애는 허벅지 위에 올려놓은 손을 맞잡았다. 그 애의 왼쪽 손목에는 못 보던 팔찌가 걸려 있었다. RWANDA라는 글씨가 희게 자수로 놓여있는 연한 주황색 끈팔찌였다. , , . 팔찌의 글자를 속으로 찬찬히 읽어보았다. 팔찌를 사면 그 이익금이 가난한 나라의 어린이들에게로 보내진다는 팔찌였다. 르완다. 르완다의 어린 아이는 네게 얼마큼의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너의 손목에 그어져 있던 아주 얕고 붉은 상처들이 아직도 눈꺼풀 안쪽에 남아있었다.

잘 지낸다니 다행이야. 너 보러 간다니까 엄마가 또 이거 줬어.”

안전벨트 때문에 주머니 안을 한참이나 헤매다 홍삼 캔디를 꺼냈다. 내가 아는 사람 중 홍삼 캔디를 좋아하는 사람은 딱 그 두 사람밖에 없었다. 뻘건 봉지의 사탕을 받곤 그 애가 살짝 웃었다. 여전하시구나. 그 애는 자리에서 바로 봉지를 까서 사탕을 입에 넣었다. 일 년 전으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치아와 사탕이 부딪히는 소리가 간간히 말갛게 울렸다.

시외버스에서 내리고, 지하철을 타고, 시내버스를 두 번이나 갈아타고도 오 분 정도 걸어야 하는 곳에 바다가 있었다. 우리는 살짝 지쳐있었다. 사람들이 없을 만해. 이렇게 멀리까지 누가 오고 싶겠어. 찬바람이 텅 빈 도로를 건너왔다. 해수욕장 입구를 표시하는 간판은 칠이 벗겨져 분홍색으로 칠해져 있었다는 걸 간신히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이었다. 우리는 잠시 그 간판 앞에 서서 조금만 더 걸어가면 보일 바다를 상상했다. 갈매기는 아닌 것 같은 새 한 마리가 하늘을 날고 있었다.

바다는 왜 오고 싶다고 그랬어?”

운동화 아래에서 하얀 모래가 버석거렸으나 바다는 아직 보이지 않았다. 그 애의 옆얼굴이 살짝 미소를 띠고 있었다. 사실 나, 아직 바다에 가본 적이 없어서. 더 바빠지기 전에 바다에 한 번 가보고 싶었어. 파도 소리가 작게 들렸다. 신발을 벗어두고 바다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그 애의 모습이 씻겨 나갔다. 운동화 안으로 모래 알갱이 몇 개가 들어온 것 같았다.

해수욕 금지!’라는 붉은 글씨가 굵게 적힌 현수막이 한쪽만 걸린 채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사람이 아무도 없을 줄 알았던 바다에는 생각보다 꽤 많은 사람들이 흩어져 있었다. 바람이 세게 불었고 그만큼 파도가 높게 치솟았다가 떨어졌다. 여자들의 가느다란 비명소리와 웃음소리가 공기를 울렸다. 우리는 바닷물 때문에 짙은 색으로 물든 모래를 밟으며 걸었다. 겨울 바다는 역시 춥구나. 그 애는 얼굴을 가리는 머리를 넘겼다. 이전보다 머리가 많이 길어있었다. 주인이 없는 것 같은 개 한 마리가 모래사장을 헤집고 있었다.

하늘이 흐렸다. 나는 아직도 그 애의 입에서 언제 죽음이라는 단어가 나올지 긴장하고 있었다. 그 애가 죽기 위해 바다에 온 것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나는 그 애의 입에서 언제든지 죽음이 튀어나올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아직도 우리 관계에서 수치가 빠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것에 익숙해진 관계여서 그런 것일까. 생각이 이어질 것 같으면서도 자꾸 끊겼다.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말을 아끼고 있었다. 노을이 지기 시작했을 때 부터였던 것도 같고 우리가 걷기를 멈췄을 때부터 그랬던 것도 같았다. 아까보다는 많은 사람들이 빠져 있었다. 밤의 파도 소리에는 분위기를 가라앉게 하는 힘이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말을 아끼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잠깐 앉을래?”

우리는 옷에 모래가 묻는 것을 염려하면서도 바닥에 주저앉았다. 바닥에 앉으니 파도 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 느낌이었다. 바다 바람이 얼굴을 계속 때렸지만 우리는 크게 추운 티를 내지 않았다. 누구 한 명이 춥다는 말을 꺼내면 일어나서 따뜻한 곳으로 가버려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아직까지는 바다를 떠나고 싶지 않아서. 어디선가 폭죽이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 , 하루랑 밤이는 어떻게 됐어? 잘 크고 있어?”

하루와 밤은 우리가 석 달 정도 같이 키우던 햄스터였다. 우리는 그 두 마리가 새끼를 낳기를 바랐지만 결국 그 애가 이사를 가기 전까지 새끼를 보지는 못했다. 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나는 그들이 새끼를 낳았기를 바랐다.

하루가 새끼 낳았어. 근데 어느 순간 보니까 다 죽어 있더라.”

햄스터가 스트레스를 받으면 자기 새끼를 물어 죽일 수도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은 있지만, 하루가 그랬다니. 하루는 아주 순한 햄스터였다. 하루를 손에 올려놓고 논적도 많았었는데. 나도 모르게 눈을 바다로 돌렸다. 그래도 하루랑 밤이는 살아 있으니까, 또 새끼를 낳을 수 있지 않을까. 그 애는 그렇게 말했지만 나는 그들이 다시는 새끼를 낳지 않았으면 했다. 나는 더 이상 죽음을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죽음을 그렇게 가까이에서 보고 싶지도 않았다. 그 애도 그랬으면 했다.

더 이상 웃음소리도, 폭죽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해가 져서 바다와 하늘의 경계가 흐릿했다. 늦은 시간인데도 배 한 대가 작은 불을 밝히고 있었다. 경계가 흐려진 공간에서 그 배는 공중에 붕 떠있는 것처럼 보였다.

우리는 몸을 일으켰다. 소금기가 가득한 모래는 몸에 딱 달라붙어 잘 털리지 않았다. 시간이 느리게 흘렀다. 그래서 우리는 더 추위를 느꼈다. 이 밤은 도무지 빨리 지나갈 것 같지 않았다. 영원히 밤이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고, 그래서 우리는 영원히 추위를 느껴야만 할 것 같았다. 언젠가 해가 뜰 걸 알면서도 우리는 검은 바다를 보며 불안에 떨었다.

사람이 많이 오지 않는 해변인데도 새벽까지 커피를 팔고 있는 트럭이 있었다. 트럭에 매달려 있는 몇 개의 전구 중 하나는 수명이 거의 다되었는지 간간이 눈을 깜빡이듯 빛을 숨겼다. 모래사장에 한쪽 발을 슬며시 올려둔 흰 트럭에서는 노래 한 마디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커피를 내리는 소리가 파도소리 대신 텅 빈 겨울 공기를 채우고 있을 뿐이었다. 나이가 꽤 있어 보이는 주인아저씨는 수염이 난 턱을 벅벅 긁었다.

커피는 너무 썼다. 나는 얼굴을 찌푸리지 않도록 애를 썼다. 주인아저씨는 우리 때문에 끊겼던 담배를 다시 피우기 시작했다. 커피의 맛만큼 자극적인 담배 연기가 노란 전등을 감싸 안았다. 우리 둘 다 커피는 반도 못 마신 채 잔을 내려놓았다. 머리 위의 전등이 한 번 깜빡였다.

하품을 하던 그 애가 팔을 길게 뻗었다. 르완다가 수놓아진 팔찌가 팔을 따라 공중을 한 바퀴 빙 돌았다. 우리는 다시 한 번 더 해변을 걸었다. 해변의 끝에서부터 끝까지 걷는 것이 우리의 목표였다. 빈속에 마신 커피 때문에 속이 조금 쓰렸다. 모래사장이 발을 자꾸 잡아챘기 때문에 우리는 아주 천천히 걷고 있었다. 우리는 나누지 못했던 근황을 마저 다 나누었다. 나는 내가 새로 사귄 친구에 대한 이야기를 했고 그 애는 새로 다니기 시작한 학교에 대한 얘기를 했다. 서로에게 큰 의미도, 관심도 없는 이야기였다. 해변의 끝에 도착했을 때는 우리의 이야기도 거의 갈무리된 상태였다.

해변의 끝에서 우리는 바다를 바라보았다. 걸어온 길이 멀었다. 얼굴을 때리는 바람이 더 이상 크게 차갑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그 애는 다시 한 번 더 팔을 길게 뻗었고, 그러고 난 뒤에는 르완다 팔찌를 손목에서 풀었다. 나는 실례인 걸 알면서도 그 애의 손목 안쪽에 시선을 두었다.

깨끗하기만 했다. 부드러운 살이 매끄럽게 차올라 있었다. 귀로 파도소리가 밀려들었다. 손바닥이 간질거리는 것 같아 하얀 모래를 한 움큼 집어 바다로 던졌다.

그 애는 내가 하는 행동을 잠시 바라보다, 살짝 웃었다.

두 번째 밤

 

 

 

몇 달 만에 본 아버지는 내게 악수를 청했다. 나는 아버지의 검은 손을 잡았다. 서로의 체온이 전달되기도 전에 우리는 손을 풀었다. 아버지는 한두 번 내 머리를 쓰다듬더니 손을 거두곤 안방으로 들어가셨다. 이전에 아버지가 내 머리를 쓰다듬었던 적이 있던가. 아주 어린 시절은 기억이 안 나긴 하지만, 적어도 내가 어느 정도 나이를 먹고 난 이후로는 아마 처음 있는 일인 것 같았다. 내가 가지고 있는 아버지의 기억은 한 손으로 턱을 괴고 누워 신비한 TV 서프라이즈같은 티비 프로를 본다거나 하는 것들뿐이었다. 감기에 걸리셨는지 연신 기침을 하시던 할머니는 내가 살가운 행동을 취하지 않는다고 어머니께 전화로 투정을 부렸다. 애가 완전히 혼자 있는 거에 익숙해졌나봐. 우리 애 같지가 않어. 나는 그 말들을 모두 들으면서 소파에 누워 자는 척, 눈을 감고 있었다. 여기 우리 집 맞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친하지 않은 친척집에 놀러온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내가 몇 년을 살아왔던 우리 집이라는 느낌은 거의 들지 않았다. 모든 것이, 낯설었다.

진공 포장된 간고등어 두 마리를 저녁 반찬으로 구워먹었다. 할머니는 계속해서 손으로 고등어의 살을 발라주었다. 할머니 손 씻었다? 뼈와 살과 내장이 할머니 손에서 산산이 해체되고 있었다. 나는 내가 직접 생선살을 발라먹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하려다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아버지가 새끼손가락 한마디 보다 갈색의 작은 살 몇 개를 몇 번의 젓가락질로 들어 올려 입 안에 차곡차곡 쌓는 것을 잠시 바라보았다. 나도 다시 젓가락을 들고 아버지를 따라 고등어 조각을 입에 넣고 씹었다. 고등어의 흰 뼈와 시멘트 색 내장들은 할머니의 손에 안겨 접시에서 말끔히 사라졌다.

일은 좀 할만 해?

아버지는 젓가락을 양손에 들고 붉은 물이 듬성듬성 번진 배추김치를 반으로 찢으며 무심히 말을 툭 던졌다. , 그럭저럭요. 대답을 하느라 밥을 제대로 씹지 못한 나는 손을 뻗어 물 컵의 몸통을 움켜쥐었다. 살짝 미지근해진 냉수의 온도가 손바닥에서 입술로, 혀로, 목구멍으로 빠르게 옮겨갔다.

집 떠나서 혼자 사는 건 힘들지 않어?

익숙해져서 괜찮아요.

그래, 알았다.

아버지는 그 말을 끝으로 밥그릇을 들고 몸을 일으켰다. 아버지는 빈 밥그릇에 찬물을 담아서 마셨다. 아직도 저 버릇 가지고 계시는구나. 내가 낯설음을 느끼는 이 세계는 사실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나는 젓가락을 식탁위에 내려놓고 밥솥 뚜껑을 열어 몇 숟가락 남지 않은 밥을 그 안에 쏟아 부었다. 변한 게 하나도 없다고 해서 내가 불편하지 않은 것은 아니야. 지금까지 삼켰던 생선살들이 모두 가시뿐인 생선으로 변해 꿈틀거리는 위장 안에서 이리저리 헤엄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괜히 나서서 저녁 설거지를 했다. 이 정도는 해야 예의가 아닐까? 그런 생각을 도무지 떨쳐낼 수가 없었다. 딸기 모양의 보라색 수세미에 주방 세제를 두어 번 꾹꾹 눌러 짜냈다. 세제 통에서 요란한 소리가 빠져 나왔다. 설거지를 한답시고 밥그릇을 수세미로 박박 문질렀지만 밥그릇 안쪽에 말라붙어있는 밥풀 하나는 도무지 떨어질 생각을 않았다. 에이 씨. 밥그릇을 쥐고 있던 힘을 풀었다. 밥그릇과 개수대가 부딪히면서 난 요란한 소리가 티비 소리에 잠시 섞였다가 세제 거품과 함께 배수구 안으로 흘러들어갔다. 아직 풀지 않고 방에 던져두기만 한 가방이 떠올랐다. 지금이라도 당장 무슨 일이 생겼다고 서울로 올라가버릴까. 그러나 그렇게 해도 완전히 마음이 편해질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럼 난 무얼 해야 하지? 손에 묻은 물기를 털고 첫째 딸의 결혼 전 임신 소식에 난리가 난 종갓집 가족들의 소란을 들으며 소파에 가 앉았다. 얼씨구. 저 집안도 난리 났네. 이리저리 자세를 바꾸던 할머니가 툭 말 한마디를 던졌다. 난 그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한 시간이라도 더 일찍 서울로 올라갈 구실을 찾았다. 심장에 진흙 몇 덩어리가 달라붙어있는 것만 같았다. 불편해. 폐에서 짜낸 공기가 입가로 흘러나갔다. 맨들맨들한 쿠션을 힘껏 안았다. 어쩌면 할머니 말대로, 정말 혼자 있는 것에 익숙해진 걸지도 몰랐다. 아직도 혼자 있는 것을 그렇게 싫어하면서도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무거운 공기를 이기지 못하고 쿠션에 머리를 묻었다. 이러고 있는 것이 차라리 더 숨쉬기가 편할 것 같았다. 시원했던 쿠션의 온도가 빠르게 올라가는 것이 느껴졌다.

적당량의 호기심을 남기고 끝나버린 드라마의 꼬리에 여성 대출 광고가 대롱대롱 매달려 나왔다. 자세를 한 번 더 바꾼 할머니는 곧바로 리모컨을 들어 다른 채널의 드라마를 틀었다. 나는 몸을 일으켰다. 저 방에 들어갈게요. 내가 지금까지 껴안고 있던 뜨뜻한 온도의 쿠션에 짧은 인사가 착 달라붙었다. 할머니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번 드라마의 주인공들도 무슨 일이 있는지 한껏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꽉 닫은 방문 틈 사이로 웅얼대는 티비 소리가 요령 있게 슬슬 기어들어왔다. 휴대폰을 들어 가장 최근에 재생한 노래를 확인해 보았다. 아리아나 그란데가 부른 Problem. 세 시간이나 몸을 구기고 있던 버스에서 내리기 직전까지 듣고 있던 노래였다. 오 분의 이정도 진행된 노래를 처음으로 되돌렸다. 항상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짤막한 전주가 지나고 아리아나 그란데의 발랄한 목소리가 티비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했다. Hey baby even though I hate ya, I wanna love ya, I want you, you, you. 좁은 방안에 영문의 가사들이 내가 내뱉는 이산화탄소와 함께 둥둥 떠다녔다. 나는 방충망이 있는 창문을 찾아서 창문 두 짝을 두어 번 열었다가 닫았다. 그러고는 매트리스와 코드 뽑힌 전기장판, 겨울용 이불의 지층에 몸을 뉘었다. 분홍색 이불에서는 낯선 냄새가 났다. 이 냄새는 아버지의 냄새일지도 몰랐다. 겨울 동안에 거실대신 내 방에서 주무셨다는 우리 아버지의 냄새. 만약 이게 아버지의 냄새라면 나는 아버지의 냄새가 조금, 싫었다.

몇 달마다 한 번씩 집에 올 때마다 내 방에는 내 것이 아닌 물건들이 쌓여갔다. 검은색 통에 담겨 있는 남성용 탈모 샴푸와 트리트먼트가 그러했고 둘둘 말린 채 구석에 기우뚱하게 서 있는 전기장판이 그러했다. 내 방이 아니야 창고야, 창고. 저번에 왔을 때부터 두 개 중 하나가 맛이 가 있는 전등을 보면서 코로 길게 숨을 내뱉었다. I got one less problem without ya…… 아리아나 그란데는 여전히 높은 목소리로 후렴구를 뽑아내고 있었다.

 

고등학교 이 학년인 막내 동생은 야자가 열시 이십오 분에 끝난다고 그랬고 수학 학원을 하시는 어머니는 열한 시가 넘어서야 집에 돌아오신다고 그랬다. 내일 다섯 시 반에 일어나서 출근을 해야 하는 아버지는 이미 불을 끄고 거실에서 주무시고 있었고 할머니는 감기 기운이 있으시다며 이 더운 여름에도 전기장판을 켜고 일찍 자리에 누우셨다. 하루 종일 그림자도 볼 수 없었던 둘째 동생은 방학을 맞아 일본으로 여행을 갔다고 그랬다. 아무것도 할 것이 없는 나는 혼자 이불 위에 시체처럼 누워있었다. 나는 하나 남은 형광등의 희미한 불빛을 맞으며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여덟시 이십육 분. 나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 형광등의 불빛이 내뱉은 숨결에 닿아 파르르 떨리는 것 같았다.

나는 이 잠겨죽을 것 같은 지루함을 이기기 위해 농장을 운영하는 휴대폰 게임을 켰다. 나는 밀과 옥수수와 딸기, 그리고 토마토를 수확했고 그 자리에 밀과 옥수수와 딸기, 그리고 토마토를 다시 심었다. 밀을 하나 사용하면 빵을 하나 만들 수 있었다. 나는 빵을 세 개 주문했고 빵 세 개를 얻으려면 사십오 분을 기다려야했다. 나는 더 이상 할 게 없었다. 심어둔 밀과 옥수수와 딸기, 그리고 토마토를 수확하려면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지 나는 그 하나하나를 클릭해서 확인하였다. 밀은 삼십초 뒤, 옥수수는 일 분 삼십초 뒤, 딸기는 이십구 분 삼십초 뒤, 토마토는 오십구 분 삼십초 뒤에 수확할 수 있었다. 나는 또다시 무언가를 기다려야했다. 게임 화면을 이리저리 손가락으로 옮기다 휴대폰의 전원을 꾹 눌러서 꺼버렸다. 잠이나 자야겠다. 몸을 일으켜 하나 남은 형광등을 완전히 꺼버리고 휴대폰을 충전기에 꽂았다. 정상적으로 충전이 시작되었다는 의미의 진동 소리가 휴대폰에서 새어나왔다. 휴대폰 액정이 켜지기에 문득 확인한 시간은 이제 겨우 여덟시 삼십일 분이 되었을 뿐이었다.

짙은 농도의 어둠이 내 위로 무겁게 내려앉았다. 어둠에 익기 시작한 눈이 방안의 물건들을 흑백으로 그려내었다. 집에는 사박 오일쯤 있을 생각이었다. 그 중 하루는 고향을 떠나지 않은 친구의 얼굴을 간만에 마주할 생각이었다. 사실 이 약속만 아니었으면 나도 집에 내려올 생각을 하지는 않았을 텐데. 스무 살에 대학을 핑계로 집을 나오면서부터 나는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집에 오는 것을 꺼렸다. 일 년에 서 너 번 정도. 명절에도 버스가 없다는 핑계로 전화로만 인사를 때우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게 오 년을 살아왔다. 그 오 년 동안 집에 내려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정말로, 단 한 번도. 도리어 집을 떠났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홀가분했다.

몸을 뒤척여 가라앉은 공기들을 흐트러트렸다. 나는 다시 긴 숨을 내쉬었다. 사실 내가 집을 피할 이유는 아무것도 없었다. 나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우리 집은 가정 내 폭력이라고 할 만한 것도체벌은 있었지만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나는 그것이 폭력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고 살고 있다, 가난에 찌들어 살았던 기억도 없었다. 그냥 어디에나 있을 법한 평범한 집이었다. 할머니와 같이 살고 내 아래로 동생이 두 명이라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조금 특이해 보일지도 모르지만, 사실 잘 보면 이런 집도 적지는 않으니까. 그런데 나는 왜 자꾸 집에 오는 것을 피하게 되는 걸까. 암만 생각해도 정확한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스무 살에 집을 떠난 그 순간부터 집은 내게 있어 불편한 장소가 되어있었다.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면서 피하고 싶은 공간. 중고등학생 때는 집에 붙어있고 싶어 안달이었던 내가 집을 그런 식으로 생각하게 된 것은 나조차도 깨닫지 못할 만큼 한순간이었다.

마지막으로 집을 떠나기 싫다는 생각을 한 것은 아마 고등학교 삼학년, 수능을 얼마 앞두지 않았던 때였을 것이다. 어머니는 나보다 키가 십 센티미터 쯤 작았다. 내 키는 중학교를 졸업한 이후부터 자라지 않았으니 어머니와 내 키의 차이를 나는 적어도 삼 년간은 알고 있을 터였다. 삼 년이면 눈에 닳고 닳아서 더 이상 그것에 아무런 감상도 가지지 않을 시기일 텐데도 그랬다. 어머니의 등이 너무 작다는 생각을 태어나서 처음으로 했다. 내 기억속의 어머니는 제법 히스테릭한 편이었고, 나는 그런 어머니가 무서웠다. 파리채, 진공청소기의 철로 된 관 부분, 뱀을 연상시키던 초록색 비닐호스. 무언가 잡고 휘두를 수 있는 것들이 어린 나의 종아리에 붉은 흔적들을 남긴 기억이 그 공포에 크게 작용했다. 해리 포터 소설책 두 권과 삼 년 동안 썼던 검은색 노트북 등등이 어머니 손에 잡혀 박살이 나버린 기억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항상 소리를 지르셨다. 나는 입술을 꼭 깨물고 울음을 집어 삼켜야만 했다. 내가 울음을 참는답시고 히끅거리는 소리를 내는 것조차 어머니는 싫어했다. 그러나 어머니를 똑바로 바라보는 것도 힘들어하던 나는 문득 나는 열아홉의 끝자락에 갑자기 어머니의 등을 똑바로 바라보게 되었다. 나는 어머니께 심하게 혼나던 어릴 적의 그 날처럼 눈물을 꾹꾹 눌러야만 했다. 그 날과 다른 점이라면 나는 더 이상 히끅거리는 소리를 참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주무시러 들어가신 어머니 대신 나는 거실의 형광등을 껐고 씻으러 들어간 화장실 세면대의 물을 틀어놓고 터져 나오려는 감정을 다스렸다. 사실은 어머니가 저렇게 작았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십구 년이라는 시간이 흘러서야 그 사실을 깨달았다. 생각해 보면 내가 어머니의 키를 따라잡았을 때부터 어머니는 더 이상 화를 내지 않았다. 엄마는 딸의 친구라고 그랬던가, 그런 말이 실감되는 순간이었다. 나는 어느새 어머니보다 한참이나 커져있었다. 어머니가 작은 것을 깨달은 것보다 내가 그 사실을 이제야 알아차렸다는 것이 더욱 내 심장과 폐를 꽉꽉 쥐어짰다. 이제야 겨우 어머니를 편하게 대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나는 몇 달 후에는 이 집을 떠나게 되겠구나. 그 때까지만 해도 집을 떠나기 싫다는 생각을 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이 주 전쯤 이모에게서 전화가 왔었다. 나는 그 때 노트북으로 다운 받은 영화를 보고 있었다. 그 전화를 받을까 말까 잠시 고민했었다. 나는 스페이스 바를 눌러 영화를 일시 정지 시켰다. 화면에 박힌 안소니 홉킨스의 커다란 동공이 스탈링의 얼굴 대신 내 얼굴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이모는 어머니가 매주 부산의 병원에 다닌다고 그랬다. 어머니의 오른쪽 눈이 거의 실명 상태라고 그랬다. 눈을 쉬게 해줘야 하는데, 선생님이라는 직업 때문에 도무지 그럴 수가 없다고도 했다. 그러니까 너거 엄마한테 신경도 좀 써 줘라. 이모의 그 말에 나는 아무런 감상도 들지 않았다. 그렇구나. 그게 끝이었다. 나는 그 뒤로도 이어지는 이모의 말에 그저 예, , 소리만 했다. 오 분 십육 초 쯤. 어머니의 눈 얘기를 포함한 몇 달만의 통화는 고작 오 분여 만에 막을 내렸다. 나는 다시 스페이스 바를 눌러 영화를 틀었다. You still wake up sometimes, don't you? Wake up in the dark, with the lambs screaming? 한니발 렉터의 목소리가 저물어 가는 노을빛을 흔들었다. Yes……. 몇 번이나 본 스탈링의 표정이 노트북의 모니터에 스쳐지나갔다. 나는 그 날 잠에 들기 직전까지 그 영화를 몇 번이고 돌려보았다. 스탈링은 몇 번이나 Yes, 라는 대답을 입에 담아야만했다. 나는 몇 번이나 No, 라는 대답을 혼자 뇌까려야만 했다. 나는 악몽을 꾸는 일도, 양들의 울음소리를 듣는 일도, 어머니의 눈에 대해 신경 쓰는 일도 없었다. 나는 그저 죽어가는 나방의 날갯짓과 비슷한 목소리로 ‘No’를 차곡차곡 쌓아나갈 뿐이었다.

길게 숨을 뱉어내며 과거의 기억들을 공중에 흩뿌렸다. 이런 걸 뭐한다고 생각하고 있담. 마지막으로 시계를 확인하려 휴대폰으로 뻗었던 손을 거두었다. 어차피 늦어봤자 아홉시 십 분이나 십오 분 쯤 되었을 터였다. 대신에 나는 그냥 눈을 감았다. 나는 잠이 온다. 나는 잠이 온다. 나는 잠이 온다. 고속버스를 세 시간이나 탔음에도 눈치 없이 찾아올 생각을 하지 않는 잠을 부르며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참매미의 울음소리가 늦은 오후의 공기를 갈기갈기 찢어놓고 있었다. 집이 먼 친구는 약속 시간에 조금 늦는다고 그랬다. 나는 줄무늬 티셔츠의 앞섶을 잡아 펄럭거렸다. 며칠 만에 화장한 것 같은데 이러다가 화장 다 번지겠네. 고작 선크림에 비비 크림 하나 바른 피부를 손가락으로 몇 번 툭툭 쳤다. 비비 크림색의 끈적끈적한 땀이 손가락에 묻어나는 것만 같았다. 나는 따끈따끈하게 데워진 로터리의 벤치에 앉아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도 아니면서 사람들은 이곳을 시내라고 불렀다. 걸어서 이십 분 거리면 둘러볼 수 있는 그 조그마한 거리를 사람들은 시내라고 불렀다. 수시로 간판이 바뀌는 옷가게 몇 개,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싸구려 화장품 가게 두 개, ‘그럭저럭 먹을 만하다는 평가 이상을 받기 힘든 음식점이 몇 개. 이쪽에서 가장 큰 상권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곳의 규모는 고작 이 정도였다. 나는 작게 한숨을 흘렸다. 태양열에 녹은 뜨거운 납덩어리가 폐 속으로 쪼르륵쪼르륵 흘러드는 것 같았다. 어제 버스에서 내릴 때부터 쌓여가던 납덩어리들. 그것들의 무게를 느끼며, 슬슬 한여름의 뜨거운 공기를 제대로 소화시키기가 힘들어지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나는 콧방울을 타고 흐르는 땀방울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려 닦아내었다.

간만에 만난 친구는 머리를 기르고 있었다.

아침마다 머리 말리는 게 귀찮아서 자기는 절대 머리 못 기르겠다던 친구는 도대체 어딜 갔을까. 못 본 새에 가슴을 완전히 덮을 만큼 머리를 기른 친구는 앞으로 흘러내려 자꾸만 시야를 가리는 머리를 연신 귀 뒤로 넘겼다.

오후 세 시가 가까워진 시간이었다. 우리는 항상 그렇듯이 치킨을 먹었다. 친구는 치킨을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다면서 나를 만날 때는 꼭 치킨을 먹었다. 순살 양념 치킨을 주문하면서 우리는 입을 모아서 말했다. 맵게 해주세요. 많이, 맵게. 가게 점원이 우리 테이블에서 등을 돌리자 친구는 옆 테이블의 휴지와 우리 테이블의 휴지를 바꿔치기했다. 부족하면 더 달라고 하면 되잖아. 친구는 미간을 찡긋거리며 웃으면서, 그래도, 라고 했다. 나는 두 테이블의 휴지를 잠깐 바라보았다. 사실 그렇게 크게 차이날 것 같지도 않은데. 침과 함께 그 말을 삼키며 휴지에서 눈을 떼어냈다.

머리 기르면 농삿일하기 걸거친다며.

, 근데 남자친구가 머리 긴 게 예쁘다 그래서 그냥 기를라구. 일할 때는 묶으면 되니까.

남자친구 생겼어?

너 이제 알았냐?

나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답다, 너다워. 친구는 한숨처럼 말을 뱉어내곤 그 자리를 얼음물로 채웠다. 치킨이 나올 때까지 우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휴지를 몇 장 뽑아 친구에게 건네고는 다시 휴지를 몇 장 뽑아 내 앞에 두었다. 친구는 포크 두 개가 얹혀있는 노란색 테두리의 하얀 접시를 내게 건넸다. 나는 포크가 떨어지지 않게 양손으로 조심조심 접시를 잡았다. 식기가 부딪혀 달그락대는 소리가 짧게 울렸다. 우리는 커다란 조각을 하나씩 포크로 찔러 입에 밀어 넣었다. 친구나 나나 포크 두 개를 써서 닭고기를 작은 조각으로 찢어서 먹는 타입은 아니었다. , 맵다. 맵다. 친구는 닭고기 한 점마다 맵다는 말을 한 번씩 더했다. 그러면서도 친구는 끈적거리는 양념을 포크로 떠서 고기 위에 올리면서 닭고기를 계속 입으로 집어넣었다. 포크를 들지 않은 손에는 항상 휴지가 대기하고 있었다. 얇은 치킨 집 휴지는 인중과 이마, 관자놀이의 땀을 닦아내며 제 몸을 적셔갔다.

니 얼굴 보기 왜 이리 힘드냐.

친구가 다시 입을 열기 시작한 것은 엄지 손톱만한 튀김 부스러기와 작은 고기 조각 몇 개만 남게 되었을 때였다. 나는 그 빨간 입가를 바라보다 휴지를 한 번 더 뽑아주기만 했을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도무지 어떻게 말해야할지 모르겠단 말이야. 나도 잘 모르는 일인 걸. 나는 혀로 매운맛이 감도는 입술을 두 번 핥았고 친구는 몇 분 전에 리필 받은 얼음물을 완전히 끝장내고 있었다. 얼음 두어 개가 하얀 치아 뒤로 넘어가는 것이 얼핏 보였다.

일이 바빠서 그래.

너 프리랜서라며. 그럼 집에서도 일 할 수 있잖아. 가끔은 좀 내려오고 그래라, .

집에서 일하면 집중 안 되는 걸.

치아로 요란하게 얼음을 깨는 소리가 치킨 집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이름 모를 노래와 섞였다. 친구의 입에서 박살난 얼음 조각이 내 머릿속에 하나 둘 박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친구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음에도 그랬다. 자격지심. 이런 게 아마 자격지심이 아닐까. 나는 지금 크나큰 불효를 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이 처음은 아닌 생각이었다. 너 그러다 할머니나 부모님 돌아가시면 얼마나 후회하려고 그래. 같은 작업실에서 일하는 애는 수시로 이런 잔소리를 해댔다. 그 말에 나도 몇 번이나 집에 전화라도 자주 하려 노력해보았지만, 휴대폰 주소록의 어머니아버지’, 또는 할머니라고 저장된 번호를 누른 후 초록색 통화 버튼을 누르는 것이 내게는 아직도 껄끄러운 일이었다. 부끄러움이나 수줍음 같은 감정은 절대 아니었다. 싫어하는 사람에게 어쩔 수 없이 연락을 취해야 할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오늘 말고 내일, 내일 말고 모레로 미루고 싶은 일. 나는 이제 우리 가족 중 누군가 죽더라도 눈물 몇 방울 흘리고 끝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하고 있었다. 너무한 생각인 걸 알면서도 그런 생각이 문득 집요하게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Head in the clouds, got no weight on my shoulders. 생각을 딴 데 둬야 할까 봐, 내 어깨에 있는 짐도 덜고. 어제 방에 혼자 앉아 귀를 틀어막는 용도로 들었던 Problem의 후렴구가 대뇌의 분홍빛 주름을 따라 천천히 감겨들었다. 친구가 포크를 내려놓는 소리가 귓바퀴에 잠시 앉았다가 엄지손톱만한 새가 되어 가게 내부에 깔려있는 노래 소리에 섞여 사라졌다.

 

가방에서 무거운 검은색 노트북과 같은 색의 타블렛을 꺼내 나란히 포개두었다. 책상위에 당당하게 올라가 있던 감색 담요를 바닥으로 끌어내리곤 그 자리에 노트북과 타블렛을 올려두었다. 고향에 내려오면 내 밥을 찾아먹는 것 빼고는 나는 아무것도 할 게 없었다. 노른자를 터트린 계란 프라이 두 개에 고추장으로 비빈 밥을 쌀알 하나하나를 반 토막 낸다는 느낌으로 꼭꼭 씹어 먹어도 내게는 수많은 시간이 있었다. 혹시나 해서 들고 온 노트북이었는데, 아무래도 들고 오길 잘 한 것 같네. 파일들이 점점이 박힌 검은색 바탕화면이 켜지는 것을 나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바라보았다.

일러스트 프로그램이 켜지기 위해서는 한참의 시간이 필요했다. 나는 이어폰을 끼고 노래를 듣고 있었다. 내 노트북에는 제목도 가수도 모르는 의문의 노래들이 많았다. 지금 듣고 있는 노래도 그런 노래였다. 어쿠스틱 기타와 하모니카 위에 나른한 남성의 목소리가 가늘게 얹혔다. 저 숲에서 나오니 숲이 보이네, 푸르고 푸르던 숲, 내 어린 날의 눈물 고인……. 이 노래는 어떻게 해서 내 노트북에 들어오게 된 걸까. 제목이 궁금하지도 않은 노래의 출처를 잠시 생각해보았다. 물론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캔버스 불러오기를 눌러 러프만 그려둔 파일을 화면 위에 띄웠다. 보라색 바탕에 파란색 선이 난잡하게 얽혀있었다. 나는 초록색 선으로 배경에 들어갈 키 작은 나무들을 스케치하기 시작했다. 동그라미 몇 개에 선 몇 개, 그 아래에 타원형 잎에 숨어있는 꽃 몇 송이. 지인들과 함께 만드는 디자인 노트에 들어갈 그림이었다. 급한 일도 아니었고 수시로 들어오는 외주들만큼 부담스러운 일도 아니었다. 그냥 내가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리면 되는 일이었다. 나는 팔레트에서 붉은색과 주홍색 사이의 미묘한 지점을 찾기 위해 잠시 눈을 찌푸렸다.

습관적으로 어금니로 혀를 가볍게 씹었다. 미지근한 통증이 둔탁하게 신경을 울려댔다. 노트북 화면 뒤로 흐리게 보이는, 불투명한 유리 너머의 하늘은 다른 색깔이 하나도 섞이지 않은 순수한 검정색이었다. 나는 더듬더듬 펜을 움직였다. 나는 주황색과 분홍색, 보라색이 흐릿한 경계의 층을 쌓고 있는 하늘을 그렸고 꽃잎이 얇고 하늘하늘한 꽃을 그렸다. 수십 개의 비슷비슷한 색들을 손바닥보다 작은 꽃들이 끌어안고 있었다. 어느새 노래가 바뀌어 메탈의 요란한 전자기타 소리가 귓구멍을 마구 찔러대고 있었다.

컨트롤, 제트. 나는 평소보다 왼손을 더 바삐 놀렸다. 작업 환경이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 건지 아까부터 손이 둔했다. 우리 집이 익숙하지 않다니, 그것도 참 웃긴 일이야. 이 집에 처음 들어올 때부터 했던 생각을 다시 한 번 더 반복했다. 대학교 들어가기 전까지 어떻게 여기서 살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 때는 이 방 여기저기에 내 체취가 잔뜩 묻어나서 그렇게 오래 붙어있을 수 있던 걸까. 나는 코로 숨을 크게 들이쉬었고 낯설은 먼지 조각이 코의 점막에 달라붙어 코를 간질였다. 나는 무심결에 찌푸렸던 미간을 갑자기 열린 문 때문에 다시 쭉 펴야만 했다. 어머니는 항상 노크도 없이 내 방에 들어왔고 그 때 나는 콧속으로 기어들어온 침입자 때문에 한껏 코를 훌쩍이고 있었다.

저녁은 먹었나?

아까 먹었어요.

감기 걸렸나?

아뇨, 재채기가 갑자기 나서.

나는 코를 계속 훌쩍거리면서 대답을 했고 어머니는 그렀냐며 고개를 끄덕였다. 간만에 사람 하나 만큼의 무게를 제 위에 올린 의자는 조용히 삐걱거리는 소리를 공중에 흩뿌렸다. 나는 방문의 바닥쪽 모서리를 계속해서 바라보았다. 조그마한 갈색 점을 업고 있는 어머니의 하얀 새끼발까락이 살짝 움찔거렸다.

재현이가 통닭 시킨다 카던데 넌 안 먹을 거가?

아까 먹어서 괜찮아요.

그래, 알았다.

어머니 새끼발가락의, 갈색 아이라이너로 콕 찍은 것 같은 점 하나가 서서히 멀어져갔다. 나무 무늬 시트지가 붙여진 문은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나는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날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잡화가, 아무도 쓰지 않는 그 물건들이 내 위로 차곡차곡 떨어져 내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나는 다시 타블렛 펜을 들었고 붉은 빛깔의 꽃을 하나 더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펜을 쥐고 있는 힘을 살짝 풀어 꽃잎의 끝을 배경이 비칠 정도로 연하게 칠했다. 베이스의 낮은 둥둥거림이 아까 빼어낸 이어폰에서 새어나와 책상 위에 가라앉았다. 나는 펜을 잠시 놓고 이어폰을 다시 귀에 꽂았다. I don't care, go on and tear me apart, I don't care if you do. 'cause in a sky, 'cause in a sky full of stars. 귓속을 채우는 노래 소리에 나는 숨을 길게 쉬었다. 나는 이제야 숨을 제대로 쉴 수 있었다. 심장이 뛰는 소리가 베이스와 함께 쿵쿵 울렸다.

저 급한 일이 생겨서 내일 아침에 가 봐야할 것 같아요.

나는 그 곡 이후로도 노래를 세 곡 더 들었고 치킨 배달이 오기 직전에 거실에 나가 부모님께 하룻밤과 두 번의 낮 동안 계속해서 생각해 왔던 것을 내뱉었다. 아버지의 반응은 덤덤했다. 바둑 프로그램이 틀어져있는 티비에서는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말들이 발소리를 죽이며 느긋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언제 또 올 수 있는데?

, 모르겠어요. 안 바쁘면 또 올게요.

그래, 알았다. 들어가서 쉬어라.

어머니는 화장대 거울로 다시 얼굴을 돌리셨다. 무취의 스킨이 화장 솜을 찬찬히 적셨고 어머니는 그것을 얼굴 위에 얇게 펴 발랐다. 재현이는 무얼 하고 있는지 방 안에서 나올 생각을 않았다. 내 방과 똑같은 시트지가 발린 문이 눈앞에 있었고 나는 별들이 가득한 우주를 떠다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아름다우면서도 무언가 심장을 꽉 죄이고 있는, 그런 복잡한 기분이었다. 노란색 장판 위에 혼자 덩그러니 서 있던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는 숨을 참았다. 발바닥이 장판에서 쩍, 하는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내 방에 들어가 문을 꽉 닫을 때까지 나는 계속 숨을 참고 있었다.

노트북은 이미 덮개가 덮여있는 상태였다. 나는 타블렛 선을 노트북에서 빼었다. 약간의 저항감 이후에 작은 반동이 손목을 울렸다. 치킨이 도착했는지 초인종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 재현이는 그제야 방에서 나왔고 어머니는 재현이에게 돈을 건넸다. 니가 가서 계산해라. 문틈으로 어머니의 목소리가 새어들었다. 나는 가방에 노트북을 넣었다. 내일 아침에는 안방에 가서 널어놓은 속옷도 챙겨 와야 했다. 나는 그것을 잊지 않기 위해 휴대폰 바탕 화면의 메모장에 단문의 메모를 남겼다.

누나 치킨 안 먹을 거가?

재현이는 으레 그렇듯이 내 의사를 한 번 더 확인했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젓고는 타블렛 선을 타블렛 몸체에 빙빙 둘러 감았다. 재현이의 어깨에 올라타 있던 누런 기름 냄새가 바닥으로 폴짝 뛰어내렸다. 재현이는 방문을 닫았고 나는 타블렛을 가방에 밀어 넣었다. 고개를 들었을 때 본 창밖의 하늘은 여전히 어두웠다.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전등 스위치를 눌러 불을 껐다.

개운한 마음보다는 불편한 마음이 컸다. 이건 서울로 가는 고속버스 안까지 나를 뒤따라 올 것이며 작업실에 도착해 오늘 하던 작업을 마저 행하고 있을 때도 내 주위를 얼쩡거릴 것이 분명했다.

그래도 나는 이 공간을 피하고 싶어. 아직도 내 냄새가 배지 않은 이불을 끌어안고 몸을 웅크렸다. 빨리 태양이 떠서 이 방을 가득 채우고 있는 밤을 밀어내 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 끈적끈적한 어둠 같은 불편함도 한낮의 밝은 태양이 하얗게 표백시켜 주었으면. 해가 지고 다시 무거운 심장을 끌어안아야만 한다고 해도 좋으니까 제발 잠시라도 내가 이 공간을 불편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나는 한 번 더 길게 숨을 내쉬고는 눈을 감았다. 창밖의 것과 비슷한 농도의 어둠이 눈꺼풀 위를 가만히 덮고 있었다.

두 남자의 방

 

 

 

밖에 춥냐.”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라면 끓이던 손을 멈추지 않고 현성에게 인사를 대신한 말 한마디를 건넸다. 후우. 현성은 문을 닫자마자 습관처럼 숨을 뱉었고 응, 하는 건조한 대답을 한숨처럼 흘렸다. 한창 끓고 있는 라면에서 올라오는 김이 오른손을 뜨근하게 적셨다. 부엌에서 몇 발만 걸어가면 되는 현관까지 현성을 마중 나가지 않은 건 라면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냥 우리 관계가 그랬다. 서로에게 큰 관심 가지지 않는 관계. 이제는 이런 관계도 제법 편해졌다.

오늘 저녁 뭔데.”

라면.”

? 방의 안쪽에서 겨울옷을 벗어내던 현성이 살짝 갈라진 목소리로 불만을 표했다. 너는 요리를 배워라, . 바닥으로 툭툭 떨어지는 옷들의 소리와 뒤엉킨 현성의 목소리를 가볍게 무시하곤 인덕션의 전원을 껐다. 저런 잔소리가 하루 이틀도 아니고 김현성 저 새끼는 잔소리 하는 거 질리지도 않나, 어휴.

그래서. 먹을 거야, 안 먹을 거야.”

먹긴 먹어야지. 알바하고 왔더니 배고파 뒤지겠다.”

온갖 음식의 국물 자국이 묻어있는 싸구려 반팔 티셔츠를 입은 현성이 냉장고 옆에 웅크리고 있던 앉은뱅이책상의 다리를 펼쳤다. 나는 들고 있던 냄비를 책상 중앙의 유난히 꺼멓게 변한 부분에 올려놓았다. 나중에 이거 막 가운데에 구멍 뚫리는 거 아냐? 예전에 현성이 했던 말이 문득 생각났다. 나는 그 질문에 어떻게 대답했더라? 잘 기억나지 않는 부분이었다.

현성이 수저와 밥그릇을 가져오는 동안 밥솥을 열어 빈 밥그릇에 밥을 담았다. 반공기가 조금 넘을 정도로만. 현성과 같이 먹을 거라면 부족한 양이겠지만 어차피 라면 국물에 밥을 말아먹는 것은 나 혼자니 이 정도만 담아도 충분했다.

잘 먹겠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누구에게 하는지 모를 말을 현성을 따라 웅얼거리곤 라면에 젓가락을 집어넣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라면 하나는 기가 막히게 끓인다니까. 속으로 품은 말을 라면과 함께 씹어 삼켰다. 입 안부터 식도, 그리고 위장까지 따끈한 기운이 번져나가는 것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먹을 만하냐?”

그럭저럭.”

그 말을 하면서 현성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그럼 됐다. 우리는 다시 아무 말도 않고 라면을 먹는데 집중했다. 내가 입안으로 라면을 빨아들이는 소리가 요란하게 좁은 방 안을 울렸다. 현성은 왼손으로 밥그릇을 들고 라면의 면발을 앞니로 뚝뚝 끊어 먹었다. 라면은 후루룩 소리 내면서 먹어야 제 맛인데. 맞은편에서 깨작깨작 라면을 먹고 있는 현성을 흘깃 바라보다 냄비에 젓가락을 넣어 크게 한 젓가락 들어올렸다.

밥그릇에 담기지 못한 국물들이 책상 위에서 말라가고 있었다. 세 봉지 분량의 라면이 우리 둘의 위장으로 넘어간 것은 순식간이었다. 현성은 밥그릇에 입술을 대고 그 안에 남은 국물을 모조리 마셨다. 밥 말아 먹을 거지? 그럼 나 국물 좀 가져간다. 입안에 남아있는 것들을 아직 다 씹지 못한 나는 소리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나의 면발 씹는 소리와 현성의 국물 넘기는 소리가 귓바퀴에서 한데 섞여 맴돌고 있었다.

그렇게 먹으면 안 짜냐.”

별로. 밥 말아먹으면 국물 안 끈적끈적해지냐?”

별로.”

입에 남아있던 음식물을 대충 목구멍으로 밀어 넣곤 냄비로 손을 뻗었다. 자알도 먹는다. 냄비 째 밥을 마는 내 모습에 현성이 힘없이 웃었다. 이미 오래 전에 익숙해진 반응이라 어떠한 감정도 들지 않았다. 그냥 그러나보다, 생각할 뿐. 현성은 다시 국물을 마시기 시작했다. 까칠하게 돋아난 그의 수염 사이로 주홍빛 라면 국물이 주륵, 흘러내렸다.

 

맥주.”

?”

뭐 마실 거냐고.”

라면 국물이 얼룩덜룩 묻은 냄비와 밥그릇에 물을 채워 넣고 있던 현성이 몸을 돌려 이쪽을 바라보았다. 조그마한 냉장고에서 나오는 서늘한 기운이 발끝을 간질였다. 아무거나. 현성은 미간을 살짝 좁히며 대답하더니 다시 개수대 쪽으로 몸을 돌려 수도꼭지를 잠갔다. 나는 가장 가까이에 있던 카스 라이트와 아사히를 꺼냈다.

우리는 생활은 제법 단순했다. 각자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자취방으로 돌아오면 먼저 들어온 사람이 요리해 둔 저녁을 같이 먹었다. 그러고 크게 재미도 없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보며 취향에 맞는 맥주나는 항상 아사히만 마셨고 현성은 카스 라이트나 하이네켄, 아니면 기린 맥주를 마셨다를 한 캔씩 마셨다. 맥주를 마실 때도 우리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낮에도, 밤에도, 같이 살을 부비고 있을 때도 우리 사이에는 고요의 해구가 깊이 자리하고 있었다.

맥주의 차가운 온도가 식도를 타고 흘렀다. 우리 관계는 과연 연인이라는 단어로 정의할 수 있는 관계일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연인인 것 같기도 하고 연인이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영화나 인터넷에서 본 연애란 것들을 머릿속에 그려보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들은 우리와 상관없는 이야기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 사람들처럼 현성에게 하루에 몇 번씩이나 보고 싶다고 난리 브루스를 추는 문자를 보낸다고 상상해보았다. 현성아 지금 뭐 해? 난 지금 너 생각하는 중이야. 현성이 네가 너무 보고 싶어……. . 지랄 옘병. 심장까지 소름이 오소소 돋는 느낌이 들었다. 저딴 걸 한다고? 현성에게 그런 문자를 보낸다면 받을 답장은 뻔하디 뻔했다. 너 약했냐?

아빠다리를 하고 앉은 현성이 리모컨을 들고 채널을 이리저리 돌렸다. 예능, 예능, 다큐, 예능……. 현성은 채널을 뒤로 다시 돌려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틀었다. 진흙으로 만들어진 집 사이에서 피부가 검은 아이들이 너덜너덜한 공을 차며 놀고 있었다. 언젠가 현성이 자기는 사실 TV를 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던 것이 기억났다. 그런데 왜 현성은 맥주를 마실 때마다 항상 TV를 켜는 걸까? 그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했지만 그것을 눈앞에 두어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다. 떨어져 앉은 현성과 나 사이에 다큐멘터리의 내레이션이 차곡차곡 쌓였다.

어쩌면 남자 대 남자의 관계라서 이런 느낌이 드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남자끼리의 사랑이란 것이 일반적인사랑과 그렇게 다를 것 같지는 않았다. 그것도 형태가 조금 다르다 뿐이지 어차피 같은 사랑일 테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역시, 사랑보다는 쾌락에 기반을 둔 관계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심장의 판막에 아까 먹었던 라면의 찌꺼기가 말라붙어있는 느낌이 들었다. 반쯤 남은 맥주 캔을 두어 번 흔들었다가 한꺼번에 마셔버렸다. 입 안에 살짝 미지근해진 맥주의 쓴 맛이 퍼졌다.

이제 잘까.”

.”

현성이 남은 맥주를 삼키고 리모컨으로 TV를 끄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빠른 속도로 흘러가던 구름이 TV의 깜깜한 화면 속에 갇혔다. 우리는 텅 빈 맥주 캔을 구석에 대충 밀어두고 천천히 옷을 벗었다. 겨울의 싸늘한 공기가 맨살에 다닥다닥 달라붙었다. 보일러를 틀어도 추워, 이 집은. 현성이 티셔츠를 바닥에 떨어트리며 말했다. 후우, 습관적으로 내뱉는 그의 호흡에 차가운 공기가 잠시 갈라졌다가 붙었다. 나는 팔을 뻗어 전등 스위치를 꾹 눌렀다.

 

노란색 장판 위에 깔아 놓은 매트리스 한 장 위에서 나는 항상 현성의 목을 끌어안았다. 현성에게 따로 마음이 있어서 그런 행동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냥 그렇게 하면 쾌감이 극대화 된다고 해야 하나, 그런 느낌이 들어서 그랬다. 짜릿한 전기 신호가 두뇌를 관통하며 펑, 터지는 것만 같은 느낌. 현성의 목을 끌어안을 때면 항상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 느낌은 항상 달큰한 땀 냄새를 풍기며 나를 유혹했다. 한 번 맛본 쾌감을 포기하기는, 정말 쉽지 않았다.

가끔씩은 오늘처럼, 관계가 끝으로 치달아갈 때 현성도 내 머리를 끌어안았다. 성인 남성 한 명 분량의 압박감과 함께 현성의 체온이 피부 안쪽까지 스멀스멀 손을 뻗어 나갔다. 그럴 때면 나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어 가며 꾹꾹 참아오던 감정들을 터트렸다. 그러고 나면 현성은 주저 없이 몸을 떼어냈다. 현성의 끈끈한 땀 냄새가 코끝을 툭툭 치고 지나갔다. 현성은 또, 습관적으로 숨을 길게 내뱉었다. 나는 손바닥으로 어둠 속을 뒤적거리다 티슈 몇 장을 뽑아왔다.

관계는 하루에 한 번. 그것이 우리의 암묵적인 약속이었다. 사실 우리 둘 다 몇 번이고 더 관계를 가져도 큰 상관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러지 않는 것은 굳이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은 아닐까. 현성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자기 전에 현성과 붙어있는 것은 일종의 의식에 가까운 행동이었다. 밤에 잠을 잘 자기 위한 의식. 누구는 베개를 안고 자야지 잠을 잘 자고, 누구는 자기 전에 30분 쯤 노래를 들어야만 잘 잘 수 있는 것과 같은 것. 나에게는 그것이 현성과 관계를 갖는 것이었다. 실제로 현성과 같이 살게 된 이후 나는 꿈을 꾸거나 잠을 자다가 깨는 일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이전에는 하루에 꿈을 두 어 개씩은 꼭 꾸곤 했는데. 좁은 매트리스에서 현성과 달라붙어 자면 그런 것 없이 몸은 조금 불편할지 몰라도 잠 하나는 푹 잔다는 사실이 조금 신기하긴 했다.

자세 안 불편하냐?”

팔에 쥐날 것 같어. 머리 쫌만 더 위로 올려주라.”

이렇게?”

이제 됐다.”

나는 현성의 오른쪽 어깨 바로 아래쪽에 머리를 대고 있는 것을 좋아했다. 다른 곳보다 살짝 안으로 들어간 그 부분에 머리를 대고 있으면 유난히 기분이 편했다. 퍼즐 조각이 딱딱 맞춰지는 것처럼, 그 움푹한 부분에 내 머리를 밀어 넣으면 딱 맞을 것 같은 느낌. 그런 느낌이 좋아 어느 순간부터 나는 잠을 잘 때면 꼭 그곳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다.

쿵쿵, 현성의 심장 박동이 귓가에 울렸다. 아르바이트 안 나가고 집에서 놀아서 그런가? 오늘따라 평소보다 더 잠이 오지 않는 날이었다. 현성은 자고 있을까? 현성의 가지런한 숨소리가 머리 위에서 울리긴 했지만 현성이 잠에 들었는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잘 자고 있을 것 같긴 한데. 현성은 원래 잠을 설친다는 걸 모르고 사는 사람이기도 하니까.

가만히 누워 심장 소리를 듣고 있자니 현성과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그 때가 언제지. 이 년 전? 이 년 밖에 안 됐다니. 못해도 오 년은 된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이 년 전의 현성은 지금과 큰 차이가 없는 사람이었다. 지금이랑 다른 점이라면 조금 더 시골 사람 같은 느낌이 나는 정도. 어색한 억양의 서울말 사이사이에 섞여있던 경상도 사투리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났다. 예전에는 그걸로 많이 놀려먹고 그랬던 것 같은데. 그러니까, 우리가 이런 관계로 지내기 전에.

건배, 하는 말과 함께 유리잔이 깨지는 것과 비슷한 소리가 여기저기서 울려 퍼졌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술잔이 내게는 꽤 버거웠다. 취할 만큼 마시고 싶진 않은데. 이제 그만 마신다고 말했을 때 주위 사람들이 보일 반응이 무서워 나는 숨을 꾹 참고 술을 입 안으로 털어 넣었다. 소주의 알코올향이 두개골 안쪽을 쿡쿡 찌르는 느낌이 들었다. 이젠 그만하고 싶은데. 끝없이 차오르는 술잔은 도무지 마를 생각을 않았다. 오리엔테이션만 아니었어도 이렇게 술을 마실 일은 없을 텐데. 술맛만큼 쓴 생각을 억지로 삼켰다. 그러곤 젓가락을 들어 맛도 없는 싸구려 안주를 입에 집어넣었다. 양념의 매운맛에 술의 쓴맛이 녹아내릴 때 쯤 누군가가 팔을 툭툭 치는 것이 느껴졌다.

잠깐 밖에 나갔다 올래요? 귀 완전 빨개졌는데.

아직 얼굴에 앳된 티가 남아있는 남자였다. 신입생인가? 선배인가? 아까 각자의 학번과 이름을 주고받았던 것을 기억해 보려고 했지만 술에 잠겨있는 두뇌는 정상적인 활동을 하는 것을 거부할 따름이었다. 남자는 물끄러미, 나를 계속 쳐다보기만 했다.

안 나갈 거예요?

, 아뇨. 나갈 거예요.

저희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남자는 먼저 몸을 일으켰고 나는 주위 사람들의 눈치를 보다 남자를 따라 몸을 일으켰다. 다들 우리가 화장실을 다녀오던 다른 곳을 다녀오던 크게 신경 쓰지 않을 것 같은 눈치였다. 테이블에 등을 돌리며 남자는 한숨 같은 긴 숨을 한 번 내뱉었다. 등 뒤에서 유리잔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가 다시 한 번 더 울렸다.

2월의 밤공기는 이러다 봄이 오긴 하는 걸까, 싶을 정도로 차가웠다. 가로등 불빛이 희미하게 낡아가는 건물의 외벽을 비추고 있었다.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남자의 밤갈색 머리가 가로등 불빛에 하얗게 빛났다.

저기, 신입생 맞으시죠?

, 맞아요.

스무 살?

, 스무 살.

남자가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선지 옆에 있는 사람이 동기에 같은 나이라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한결 편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게 그런 건, , 소속감 같은 거. 대학 와서 처음으로 동기랑 얘기해 보는구나. 이 사람과 앞으로 잘 지내면 좋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피어났다.

혹시 휴대폰 번호…….

가로등 불빛만큼 희미하게 말꼬리를 흐리며 남자가 휴대 전화를 내밀었다. 휴대 전화 모서리 중 두 개의 액정이 박살나 있는 상태였다. 떨어트린 건가. 그래도 쓰는데 불편함은 없네.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았다. 남자의 휴대폰에 내 번호를 저장하곤 내 휴대 전화로 전화를 걸었다. 주머니에서 웅웅 울리던 휴대 전화의 액정에 낯선 번호가 떠올라있었다.

, 이름이 뭐였죠?

남자의 번호를 저장하기 위해 켠 주소록의 성, 이름 부분을 멀뚱히 바라보다 남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렇게 번호 교환할 줄 알았으면 아까 잘 들어둘 걸.

김현성이요.

김현승이요?

김현, 성이요.

현성이 자에 악센트를 넣어 발음했다. 김현. 새로 산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은 조금 낯선 휴대 전화의 키패드로 현성의 이름을 또박또박 입력해 나갔다. 현성의 전화번호가 내 휴대 전화에 처음 입력되었던 때였다.

 

일주일에 한 번, 내가 아르바이트를 쉬는 날을 제외하면 저녁 담당은 항상 현성이었다. 오늘 저녁은 뭘까. 현관에 달려 있는 도어락의 비밀번호를 기분 좋게 눌렀다. 잘 할 수 있는 음식이 라면 뿐인 나와는 달리 현성은 꽤 많은 요리를 할 수 있는 편이었다. 패딩 점퍼의 바느질 선 사이사이에 묻은 돼지고기 냄새가 집안에서 흘러나오는 불빛과 섞여 현관에 떨어져 내렸다.

오늘 저녁은 카레?”

.”

어제 내가 그랬던 것처럼 현성도 나를 현관까지 마중 나오는 일은 없었다. 왼손을 골반 위에 얹은 채 오른손에 든 국자로 카레를 휘휘 젓고 있는 현성의 뒷모습을 잠시 눈에 담았다. 아직 되려면 쪼금 남았어. 현성의 목소리가 뒤통수에 달라붙었다. 나는 조용히 집 밖의 냄새를 내 몸에서 벗겨냈다.

카레가 되기를 기다리며 밥그릇에 밥을 눌러 담았다. 앉은뱅이책상에 두 개의 밥그릇과 수저를 올려놓고 그 앞에 앉아 턱을 괴고 현성을 올려다보았다. 현성이 입고 있는 티셔츠에 카레 얼룩도 묻어있지 않을까? 현성의 옷에서 샛노란 카레의 흔적을 찾아보려 한껏 눈을 굴려보았지만 역시 이 자리에서 그것을 확인하기는 어려웠다.

어미 새가 밥 갖다 주길 기다리는 참새 새끼 같다, .”

이렇게 큰 참새 새끼가 어딨.”

그럼 짐승 새끼는 어떠냐?”

미간을 좁히며 입술 끝만 살짝 올려 웃던 현성이 냄비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밥그릇. 현성이 내민 손에 밥그릇을 올려주었다. 부족하면 더 퍼다 먹어. 현성의 손바닥 위에서 따끈한 카레가 채워진 밥그릇을 건네받았다. 숟가락과 밥그릇이 서로 닿으며 내는 소리가 한동안 방 안에 울렸다.

현성과 함께 카레를 먹을 때는 좋은 점이 많았다. 제일 큰 장점은 현성의 카레가 맛있다는 것. 그리고 그 다음으로는 우리 둘의 카레 취향이 전혀 다르다는 것이었다. 나는 국물보다는 건더기가 많은 것이 좋았고 현성은 카레를 잔뜩 부어 거의 카레 죽처럼 만들어 먹는 것을 좋아했다. 이런 쪽의 궁합은 잘 맞는다고 해야 하. 현성과 내가 같이 살기에 나쁜 궁합이 아닌 것은 확실했다.

 

오늘도 현성은 다큐멘터리를 보고 있었다. 어제 보던 게 나름 재밌었나. 아빠다리를 하고 허리를 살짝 구부린 현성은 TV에 눈을 고정하고 발치에 놓인 기린 맥주를 손끝으로 톡톡 치고 있었다. 오늘따라 맥주가 입에 안 맞나. 평소라면 홀짝홀짝 맥주를 마셔댈 녀석이 오늘따라 캔을 입에 가져다 대지 않았다. 어쩌면 단순히 다큐멘터리에 집중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지만. 무슨 내용이기에 저렇게 보고 있담. 궁금증에 흘긋 본 TV에서는 다이버가 시퍼런 바다 속에서 산호 같은 것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다.

바다. 현성과 처음 관계를 가졌을 때, 우리는 바다를 보러 갔었다. 처음 바다에 놀러가자고 제안한 사람이 누구였더라. 현성인 것 같기도 하고 나였던 것 같기도 했다. 사람들 몰리기 전에 바다 한 번 다녀오는 게 어떠냐. 그 말을 들은, 현성인지 나인지 모를 사람은 남자 둘이서 칙칙하게 무슨 바다냐는 핀잔을 장난스레 던졌던 것 같았다. 그런 말을 하면서도 우리는 여행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바다는 동해가 좋다느니, 서해가 좋다느니 하면서. 사실 동해와 서해의 차이도 잘 몰랐을 텐데도 그랬다.

가까운 서해나 가자. 동해는 산 넘어야 하잖어. 빨리 폰으로 어디 해수욕장이 좋은지나 검색해봐라.

아직 사투리를 완전히 벗지 못한 현성이 턱짓으로 내 휴대 전화를 가리키며 말했다. 서해 해수욕장 순위. 내 맞은편에 앉아있던 현성이 내 쪽으로 몸을 쭉 뻗었다. 어디 괜찮은 곳 있냐? 나는 계속해서 엄지손가락을 움직이며 대답했다. 성격도 급하네. 방금 검색했는데 뭐 벌써 물어보냐.

바다를 간다는 것 이외에는 그다지 별 내용도 없는 여행 일정을 안고 우리는 서해로 향했다. 차를 렌트할 돈도 없어 대중교통을 타고 이동하는, 이동 시간으로만 몇 시간을 소모하는 12일 여행이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충분히 들떠있었다. 고속버스의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이런 여행도 나쁘지는 않은 것 같다는 얘기를 현성과 주고받았던 것 같았다.

바다에도 한 번 빠져보고 인터넷에서 맛집이라는 곳을 갔다가 실망도 해보는, 별로 특별할 것도 없는 여행이었다. 펜션으로 돌아와 같이 술잔을 기울일 때까지만 해도 그랬다. 우리 둘 다 술을 싫어하면서도 우리는 어쩌다보니같이 술을 마셨고, ‘어쩌다보니같이 잠자리에 들었다. 그것이 우리 관계의 시작이었다.

아침보다는 점심에 가까운 시간에 눈을 떴다. 옷을 제대로 갖춰 입은 현성은 침대 옆에 놓인 조그마한 TV앞에 앉아 있었다. 이름을 알지 못하는 연예인 한 무리가 촬영장 여기저기를 뛰어다니는 것이 보였다.

나 사실 남자 좋아해.

여전히 TV에 시선을 주고 있던 현성이 오른손으로 왼손 검지를 만졌다. 지난밤의 일을 생각하면 그렇게 놀랍지도 않은 고백이었다. 나는 어째서 지금까지 그걸 깨닫지 못했던 걸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현성이 그 사실을 꽁꽁 숨기려 애쓴 것도 있겠지만 그래도 약간의 낌새라도 발견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미안해. 현성의 조그마한 목소리가 TV속 방청객들의 억지스런 웃음에 섞였다. 나는 현성에게 화를 내지도, 괜찮다는 말을 건네지도 않았다. 그냥 머릿속으로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지금 현성은, 내가 어제 밤에 술에 거의 취해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인지 아닌지를.

두 번째 관계를 갖게 된 것도, 우리가 이렇게 같이 살게 된 것도 모두 내가 원인을 제공하였다는 사실을 지금의 현성은 알고 있을까.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냐.”

현성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다큐멘터리가 끝난 TV에서는 이름 모를 여자 연예인이 나와 한 손에 비타민 음료를 들고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 그냥 너랑 처음, 만났을 때 생각.”

계집애도 아니고, 무슨 그런 생각을 그렇게 넋이 나가도록 하고 있냐.”

너랑 처음 했을 때 생각, 이라고 말을 하려다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어 말을 바꿨다. 그냥 갑자기 생각이 나서. 탄산이 빠진 맥주를 입에 가져다 대었다. 현성은 아무 말 없이 자기 허벅지 위에 올려두었던 리모컨을 들어 TV를 껐다. 중독성 강한 CM송이 중간에 뚝 끊겨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이제 잘까.”

.”

평소처럼 짧은 대답을 끝맺은 현성은 맥주 캔을 쓰레기통에 버렸고 나는 꽤 남은 맥주를 개수대에 흘려보냈다. 옷을 벗기 시작하는 현성을 잠시 바라보다가 따라서 옷을 벗었다. 팔뚝에 좁쌀만 한 소름이 질서 없이 올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날씨는 언제쯤 풀리려나. 빨리 날이 따뜻해져야지 지내기 좀 편할 텐데. 자신이 방금 벗은 속옷을 손에 쥐고 현성이 따뜻한 숨을 내뱉었다. 나는 팔을 뻗어 전등 스위치를 꾹 눌렀다.

 

나의 체험 속에서 신성한 장소

 

 

 

  마침 비가 오는 날이다. 그곳에 대해 이야기하기 좋은 날씨다. 그곳을 떠올리면 항상 슬레이트 지붕 아래의 현관에서 그와 함께 빗소리를 듣던 때가 먼저 떠오른다. 현관이 너무 좁아 우리는 자주 서로의 팔꿈치가 맞닿았고, 팔꿈치인지 심장인지가 간질간질하면서도 우리는 붙어있는 팔을 떼지 않았다. 가끔 비가 날려 들어와 우리의 얼굴을 차갑게 적셨지만 팔꿈치만은 따뜻했다.

  그 집은 몇 년이나 된 집일까. 언젠가 할머니께 여쭈어보았던 것도 같지만 잘 기억나지 않는다. 삼십 년 쯤 되었던 것도 같고 고작 십몇 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던 것도 같다. 붉은 벽돌에 기와를 얹은 집이었다. 집의 전면엔 시멘트로 바닥을 덮은 마당이 있었고 그렇게 작지는 않은 화단이 두 개나 있었다. 키가 작은 홍단풍이 첫 번째 화단의 한쪽 귀퉁이를 장식하고 있었고 그 주위에는 봄이면 내가 심어놓은 민들레꽃이 노랗게 피었다. 파나 상추 등 주로 야채들을 키웠던 첫 번째 화단과는 달리 두 번째 화단에는 자그마한 장독 몇 개와 허리가 조금 굽은 대추나무 한 그루만이 서 있을 뿐이었다. 아주 어릴 때 할머니가 해주셨던 괴담에 나오는 나무와 닮아 그 나무를 조금 무서워했던 게 기억에 남는다. 밤이면 주황색 가로등빛을 받아 마당으로 길게 그림자를 늘어뜨리던 대추나무는 사실 살아있는지 죽어있는지 의심스러운 것이었다. 가을에 대추를 따서 그것을 입에 넣어보고서야 살아있긴 했구나, 하는 생각을 할 정도였다.

  마당의 왼쪽에는 지금은 쓰지 않는 화장실과 그에 바로 붙어있는 창고 하나가 있었다. 스테인리스로 만든 선반에 차곡차곡 쌓여있는 잡다한 물건들과 그 위를 덮고 있는 먼지들, 어딘가 박혀있을 게 분명한 바퀴벌레들이 떠오른다. 창고의 천장과 지붕 사이의 조그만 공간에 동네 길고양이가 제 새끼들을 데려왔던 일도 떠오른다. 마당에서 말리고 있던 고등어를 어미 고양이가 훔쳐간 것도, 그걸 또 뺏어온 우리 할머니도.

  우리 집의 오른편에는 보일러실로 들어갈 수 있는 좁은 공간과 함께 그의 집이 있었다. 그는 우리 집에 세 들어 살고 있었다. 처음 그가 이사를 왔을 때 나는 사실 그를 조금 미워했다. 내 놀이터로 쓰던 공간인데, 그 공간을 그가 차지하고 말아서. 그가 이사를 오는 바람에 내 많은 물건들이 버려지고 말았다. 그러니 당연히 그를 좋아할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의도적으로 그를 피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두 가정은 거의 붙어 살다시피 하고 있었고, 그는 나와 같은 초등학교를 다녔으며, 내 속을 모르는 부모님들은 우리가 함께 등교를 하게 했다. 그래서 나는 그를 피하는 것을 포기했다. 미워하는 것 역시 비슷한 시기에 포기했던 것 같다. 그의 집 부엌의 장판은 파란색이었는데, 그 파란 장판 위에 배를 깔고 누워 지내기 시작했던 것 역시 그맘때였다.

  우리는 줄곧 보일러실에 들어가서 놀았다. 보일러실에 들어가는 길은 너무 좁아 우리는 일렬로 서서 그곳을 기웃거려야 했다. 녹슨 철문 앞의 전등 스위치를 누르면, 철문에 달린 올록볼록한 무늬가 있는 유리가 희미하게 주홍색 빛을 흘려보냈다. 철문을 열 때는 항상 소리가 났다. 우리는 갑자기 그 철문이 잠길까 두려워 안에 들어가면 항상 문을 열어두었다. 사실 보일러실에 그렇게 재밌는 게 있을 리 없었다. 웅웅거리며 돌아가는 기계와, 사용하지 않는 물건들이 몇 개 쌓여있을 따름이었다. 시멘트 바닥에는 거의 항상 먼지가 엷게 쌓여있어 우리는 들어갈 때마다 작게 기침을 했다. 그곳에서 무얼 했더라? 주홍색 불빛 아래서 그곳에 있는 것들을 하나하나 뜯어보았던 것 같다. 그곳에 들어갈 때마다 그랬다. 그땐 그게 질리지도 않았는지. 우리는 단순히 어둡고 조용한 곳을 좋아했던 걸지도 몰랐다.

  그의 얼굴도, 이름도, 목소리도 기억나지 않지만 그의 수줍은 웃음과 아버지가 타지에서 일을 하시고 계신다는 사실은 정확하게 기억이 난다. 그는 나의 첫사랑이었나. 지금 그 장면을 영화를 보듯 제 3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솔직히 가슴이 좀 간질거리긴 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때 사랑에 대해 흐릿하게도 알지 못하던 때였고, 그래서 그와 그렇게 지낼 수 있었던 것도 같다. 빗소리를 들으며 손을 잡지 않았기에, 알전구 아래서 수줍게 입을 맞추지 않았기에 우리는 서로를 떠나보낼 때 쉬 손을 흔들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 집은 대략 오 년 전에 없어졌다. 도로 공사 때문이었다. 그가 그의 아버지의 직장이 있는 곳으로 이사를 간지 칠 년 쯤 이후의 일이었다. 새 집을 짓고 나는 고대하던 내 방을 가질 수 있게 되어 솔직히 기뻤다. 집에서는 더 이상 쥐도, 바퀴벌레도 나오지 않았고 웃풍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고향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면 왜 그때 기억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걸까. 가능하다면, 지금은 사라진 그 집에 한 번만 더 가보고 싶은 마음이다. 가능하다면 그가 옆집에 살았던 그때로. 다시 한 번 더 현관에서 그와 함께 비를 보고 싶고, 너가 떠난 후에 나는 사실 쓸쓸했노라고 말하고 싶다. 내가 없는 너의 삶은 어땠는지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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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매혹한 사람

 

 

 

  그 애의 이름은 송이었다. ‘도 아니고 하필이면 송이였다. 익숙하면서도 익숙지 않은 그 이름의 울림 때문인지, 아니면 그 뽀얀 얼굴 때문인지 그 애는 학우들에게 인기가 꽤 많았다. 반이 그 애를 중심으로 돌아가지는 않았지만, 그 애가 반을 구성하는 어느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했다. 그 애는 키가 작았고, 턱선까지 자른 단발머리를 밝은 갈색으로 염색하고 있었다. 그 애의 별명은 눈송이였다. 이름 때문인지, 하얀 얼굴 때문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초등학교 1학년, 그 애는 나의 짝이었다.

  우리는 반에서 키가 제일 작았다. 키 순서대로 번호를 매길 때 꼭 1번은 그 애였고 2번은 나였다. 그래서 우리는 짝이 될 수 있었다. 우리가 앉은 자리도 교실 책상에 번호를 붙이자면 1, 2번인 자리였다. 점심을 먹으러 급식소로 향할 때도 우리는 복도에 키 순서대로 줄을 섰다. 당연히 나는 2번이었다. 나는 내 번호가 2번이 아닌 것이 굉장히 이상하게 느껴졌다. 정 씨여서 20몇 번이었던 나. 자꾸만 1번으로 잘못 정의되던 그 애의 성씨는 기억나지 않는다.

  나를 매혹한 것은 그 애의 이름도, 얼굴도 아니었다. 등교 첫날부터 붙여진 눈송이라는 그 별명 때문이었다. 눈송이라는 단어가 주는 그 하얗고, 깨끗하고, 작으면서도 여린 이미지와 그 이미지에 어울리는 생김을 가졌다는 것이 그 애의 인상적인 점이었다. 나는 눈송이라는 그 예쁜 단어가 별명으로 아무렇지 않게 쓰일 수 있다는 것에 아주 놀랐다. 아무도 그것을 부정하지 않았다는 것 역시 그랬다. 그 애는 우리에게 송이라기보다는 눈송이였던 존재였다.

  그 당시 나는 어떤 별명을 가지고 있었더라. 단지 정 씨라는 것 때문에 정수기라느니, 정보와 사회라느니 하는 별명을 가졌던 것도 같다. 아니 어쩌면 그 때는 학우들에게 별명조차 받지 못할 정도로 미미한 존재감을 가지고 있었을 때였을지도 몰랐다. 어쨌든 나는 그 애의 눈송이라는 별명이 꽤 부러웠다. 동시에 그런 애가 나의 짝이라는 것이 좋았다. 상대적으로 그 애와 더 오랜 시간을 보낼 수 있었으니까. 나도 눈송이와 친해지고 싶어 했던 아이들 중 하나였던 것이다.

  우리는 조물거리는 손을 꼭 잡고 다녔다. 이유는 딱히 없었다. 둘 다 손을 잡는 것을 좋아했던가. 우리는 손을 잡고 음악실을, 미술실을, 급식소를 갔다. 한여름 맹렬한 햇볕 아래에서 우리는 운동장의 흙으로 그림을 그리며 놀았다. 그때도 물론 손을 잡고 있었다. 그 애의 얼굴은 그 땡볕 아래에서도 타지 않았다. 신기한 일이었다.

  그 애가 잘하던 과목은 무엇이었나. 수학이었던 것 같고 음악이었던 것 같고 그것들과 아무 상관없는 다른 어떤 과목이었던 것도 같다. 초등학교 저학년, 어떤 과목을 잘해봤자 남들과 얼마나 차이가 나겠느냐만은, 어쨌든 그 애는 공부를 참 잘했다. 선생님들에게도 그 애는 눈송이였다. 에어컨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 후덥지근한 교실에서 눈송이는 유난히 돋보였다.

  사실 그 애에 대한 기억은 더 이상 없다. 어느 순간 그 애는 내 곁에서 사라져버렸다. 1학년을 마치고 난 뒤의 일이었다. 겨울방학 때 그 애와 학교 운동장에서 만나 무언가를 했던 것 같은데, 아무리 생각해도 도통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있으나마나한 기억 이후에 그 애가 내 기억 속에 존재하는 일은 더 이상 없었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그 애를 지워버린 것처럼. 나는 새로운 친구를 사귀었다. 너무 어려서 기억나지 않는 일들과 매우 인상적이어서 평생 잊을 수 없는 일 몇 가지를 겪었다. 그러나 그 속에 눈송이는 없었다. 왜 나는 가끔 그 애를 떠올릴 생각을 못했을까. 그 애가 어떻게 되었는지, 이사를 갔는지 아니면 다른 일이 생긴 것인지 다른 사람에게 물어볼 생각조차 왜 못했을까. 요즘은 그 눈송이가 내 상상 속에만 존재하던 아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기도 한다. 어쩜 사람이 그렇게 깨끗하게 내 인생에서 사라져버렸나. 눈도 되지 못한 눈송이는 결국 녹아버렸나.

  그 애의 얼굴이 또렷하게 기억나지 않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내 인생에서 나를 처음으로 매혹해버린 존재인데, 나는 그 애의 이목구비도 기억하지 못했다. 나를 매혹시켰던 것이 다른 것이 아닌 눈송이였기 때문일까. 어쨌거나 여름의 초입에서 나는 그 지난날의 눈송이를 다시 한 번 더 떠올린다. 에어컨이 틀어져 있어 방은 시원하다. 그러나 겨울만큼은 아니다. 눈송이도 그랬다. 그 애에게는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사람을 평온하게 만들어주는 무언가가 있던 아이였다. 그 애와 손을 잡을 때, 나는 항상 오른손을 내밀었고 그 애는 항상 왼손을 내밀었다. 그래서인지 오른손이 자꾸 허전하다. 주먹을 꼭 쥐어도 채워지지 않는 허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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