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봄이었다
1
그 애에게서 전화가 왔다. 전화기를 붙잡은 손에서 땀이 배어나왔다. 갑자기 왜? 그 애는 이번 주 주말에 이쪽으로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더 이상 그 애의 목소리를 담아오지 못하는 수화기를 그대로 들고 나는 텔레비전 옆의 달력으로 눈을 돌렸다. 18일, 화요일이었다. 18이라는 숫자가 눈동자에 커다랗게 박혔다. 갑자기 왜? 나는 그 생각을 떨쳐낼 수가 없어 애꿎은 수화기만 계속 쥐고 있었다.
그 애는 나의 수치였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 애는 나의 수치였고 나는 그 애의 수치였다. 우리는 그런 관계였다. 우리는 서로의 수치가 됨으로써 이뤄진 관계였다. 나는 그 애를 더 보고 싶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우리는 만나기만 하면 서로의 수치를 들춰낼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 애는 나의 수치를 또 보고 싶어 하는 걸까? 나는 더 이상 내 수치를 보는 일도, 다른 사람의 수치를 보는 일도 그다지 겪고 싶지 않았다. 그 애가 내 곁에서 떠나고 난 뒤에야 비로소 체감한 것이었다. 나는 이 이전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겨울에는 해가 일찍 넘어가서 나는 자꾸 배가 고팠다. 저녁을 먹으려면 아직 한 시간이나 기다려야 했다. 위장이 비어서인지 그 애 생각이 계속 났다. 내가 그 애에게 고백했던 나의 수치들, 그 애가 내게 고백했던 그 애의 수치들. 보여주고 싶지 않은 것을 보여주고 보고 싶지 않은 것을 보았던 그때의 기억들이 머릿속을 채웠다. 체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는 저녁 시간까지 찬물로 위장을 달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는 너무 많은 것들을 떠올려버려 진짜 체할지도 몰랐다.
그 애는 여기엔 왜 오겠다고 하는 걸까? 여기가 그 애의 기억에 남을 만큼 좋은 장소라는 생각은 딱히 들지 않았다. 그 애가 이곳을 떠날 때 그 애의 등 뒤에는 미련이라고 할 만한 것들이 붙어있지 않았다. 그때 그 애는 차에 오르며 나를 한 번 쳐다보기는 했지만, 그건 정말 아무 의미도 없는 시선이었다. 그 애는 그냥 문득 뒤를 돌아본 것이고 우연히 거기에 내가 있었던 것이라는 생각 밖에 들지 않는, 아무런 생기도 없는 시선이 바람처럼 나를 그저 한 번 훑고 지나갔을 뿐이었다. 나는 너무 불안했다. 그 애의 입에서 나올 수치와 내 입에서 나오게 될 수치들이 얼마큼의 무게를 지니고 있는지 알 수가 없어서. 그 애가 이곳에 올 이유는 그것 밖에 없는 것 같아서.
그 애가 이사를 간 뒤로 그 애에게서 연락이 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나는 그냥 그 애가 어디선가 잘 살고 있겠거늘 했다. 그 애가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아예 안 하지는 않았지만 그 생각을 그렇게 오래 하지는 않았다. 그것이 그 애의 수치였으니까. 내가 살아있는 동안 그 애는 죽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 애는 그냥 그곳에서도 나를 대신할 또 다른 수치를 만들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 생각의 유통기한은 고작 삼 개월이었다. 나는 그 애를 생각할 틈이 없었다. 이제는 수치가 없는 삶을 살 필요가 있었고, 나는 그것에 집중해야만 했다.
그런데 그런 나의 삶에 그 애가 갑자기 끼어들어 버린 것이었다. 누군가 악의를 가지고 나의 삶을 다시 일 년 전으로 돌려놓으려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만약 그 누군가가 바로 그 애라면, 나는 그 애를 진심으로 미워해야 할까? 과도하게 뛰어버린 사고 과정을 따라가지 못하고 나는 잠시 멍하게 있었다. 그렇다면 나는 그 애를 미워하는 게 맞는 일일 것인데 왜 심장이 싸해지는 느낌일까. 어쩌면 그 애에게 미련이 남은 것은 나일지도 몰랐다. 내 미련이 차에 오르는 그 애의 시선을 끌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2
수요일엔 친구와 영화 약속이 있었다. 좋은 타이밍이었다. 부모님과는 그 애에 대한 문제를 상담하기 힘들었다. 부모님은 우리를 너무 잘 알았다. 어른의 입장에서는 그랬다. 사실 위선 한 꺼풀을 벗겨낸 우리를 알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우리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그 애와 관련된 일을 말한다면 부모님은 나와 그 애의 관계를, 우리의 수치를 눈치 챌지도 모른다. 나는 그 애보다 거짓말에 능숙하지 못했기에 내 말 어딘가에서 우리 사이의 미묘한 기류를 감지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무서운 일이었다. 대낮인데도 어두운 하늘을 피해서 우리는 영화관 안으로 들어섰다.
영화관 안은 평일인데도 붐볐다. 친구는 티켓을 손에 들고 아동용 애니메이션의 포스터를 찬찬히 구경하고 있었다. 나는 그 옆에서 언제쯤 친구에게 그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좋을지를 재고 있었다. 영화관 안의 공기는 너무 무겁고 답답했다. 영화 포스터에서 관심이 떨어진 친구는 시간을 때우자며 그녀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녀가 좋아하는 아이돌 가수의 이야기, 그녀만 다니는 학원의 이야기 같은 것들을. 그녀의 삶은 그런 이야기들의 사이에서 살아갈 수 있는 삶이었다. 내가 가까스로 발을 들이게 된 세계였다. 나는 그 세계의 완전한 주민이 되고 싶었고 그 세계 밖으로의 외출은 최대한 삼가고 싶었다. 주기적으로 부끄러워하지 않고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영화는 재미가 없었다. 내가 자꾸 그 애를 생각하고 있어서 그런 걸지도 몰랐다. 영화는 내용이 뚝뚝 끊겼고 처음부터 끝까지 희미한 느낌만 주다가 끝나버렸다. 나는 클라이맥스가 확실한 영화를 좋아했다. 미적지근한 온도의 내용을 천천히 말하는 영화는 내 취향이 아니었다. 더욱이 그 애가 계속 연상이 되었다는 게 가장 싫은 점이었다. 여자 아이. 자신을 죽여 달라고 말하는 여자 아이. 그 여자 아이는 결국 죽지 못했다. 자살 시도도 하지 못했다. 죽음을 소망하던 여자 아이는 영화의 엔딩에서 꽃을 한 아름 들고 환하게 웃었다. 그 애는 이 영화를 보고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저 여자애는 분명 수치스러워서 저렇게 웃고 있는 걸 거야. 그럼 나는 그것이 억지라고 생각하면서도 아무런 말없이 고갤 주억거리겠지.
우리는 그런 관계였다. 서로의 수치를 침범할 수 있는 권리는 아무에게도 없었다.
영화관 밖의 공기도 영화관 안의 그것과 크게 다르진 않았다. 누군가 커다란 솜이불로 내 얼굴을 덮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일부러 크게 들이쉰 숨에서 배기가스 냄새가 희미하게 났다.
추위를 많이 타는 친구는 몸을 움츠리고 걸었다. 우리는 방금 봤던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친구는 여주인공이 참 좋았다고 했다. 그 여자 아이가 죽지 않아서 참 다행이라고, 자신의 삶을 찾아 떠나는 결말이 좋았다고 했다. 짧게 자른 머리 아래로 차가운 바람이 스쳐지나갔다. 나는 이야기의 틈새를 비집어 그 애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 빨간불이 켜진 보행자용 신호등 바로 아래였다. 우리의 관계에 대한 얘기는 물론 빼고 말했다.
“그럼 그 애를 안 보면 되잖아.”
“그렇지만…….”
친구는 너무나도 가볍게 내 고민에 대한 결말을 내렸다. 그녀는 그 말을 하면서 어떠한 감정의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보기 싫으면 보지 않는다. 당연한 일이었다. 보행자 신호가 초록불로 바뀌었고 그녀는 나보다 먼저 횡단보도의 하얀 선 위에 발을 얹었다. 나는 두발 쯤 늦게 그녀의 뒤를 따랐다.
보고 싶지 않으면 보지 않는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문제는 거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그 애가 보고 싶은 걸까, 아님 보고 싶지 않은 걸까? 그 애를 생각하면 물론 그 애와 나눴던 우리의 수치들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하지만 우리의 관계는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그 애는, 그래도 그때 나의 가장 친한 친구였고 거의 유일한 친구였다. 수치들 다음으로 떠오르는 것은 그 애와의 추억이었다. 그 애와 함께 키웠던 햄스터, 사루비아 꽃은 꿀을 빨아먹을 수 있다는 말을 듣고 학교 화단의 사루비아 절반 정도를 따버렸던 일, 슬레이트 처마 아래에서 봄비가 떨어지는 것을 구경했던 일 같은 기억들이 나를 계속 힘들게 했다. 그 애를 미워하게 되면 그런 기억들까지 미워하는 것 같아서. 나중에 어른이 되어 그때의 기억이 아무 의미가 없어진다면 나는 그 애를 아무 거리낌 없이 피할 수 있을까.
“어려운 일이네.”
친구는 그렇게 말하며 하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 하늘을 보았지만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구름만이 하늘 위에서 느릿하게 몸을 꾸물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빨간불이 켜진 신호등의 바로 옆에 섰다. 헤어질 시간이었다.
“그래도 주말까지는 시간이 남아서 다행이야.”
“응, 그러게.”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친구는 또 다른 횡단보도를 건넜다. 그녀의 뒷모습이 작아지는 것을 보다 나는 몸을 돌렸다. 발걸음이 땅에 자꾸 붙었다. 사실 지금 바로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집에 돌아가면 그 애의 냄새가 남아있을 것만 같았다. 누군가 같이 있어줬으면 싶었다. 그래서 그 냄새를 지워줬으면. 혼자 있기는 너무 추운 날씨였다.
그 애에게 다시 전화가 온 것은 수요일에서 목요일로 넘어가기 두 시간쯤 전이었다. 이번에도 역시 집 전화가 울렸고 나는 바로 휴대용 전화기를 뽑아들어 귀에 가져다댔다. 여보세요? 그 애의 목소리가 귓구멍을 울렸다. 응, 나야. 목소리가 갈라질 거라 생각했는데 그러지 않아 다행이었다.
그 애는 이번에는 바다에 가고 싶다는 말을 했다. 토요일에 이쪽 터미널까지 올 테니까, 자기와 함께 바다를 보러 가달라고. 나는 전화기를 들고 방에 들어가 속삭이듯 말했다. 근데, 왜, 하필이면 나야?
실례될 수 있는 질문이란 생각은 그 말을 뱉고 난 이후에 떠올랐다. 전화 스피커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 애의 옅은 숨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지만 음질이 좋지 않은 전화였기에 그것을 확신할 수는 없었다. 이럴 때 바로 말을 철회해야 할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입술을 놀리지 않았다.
“그냥…….”
말꼬리가 길게 이어질 듯 하다가 뚝 끊겼다. 우리는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전화를 끊지도 않았다. 서로의 숨소리를 들으려는 듯 수화기를 꽉 움켜쥐고 심장 박동을 느끼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냥 갑자기 바다가 가보고 싶은데 혼자 가기는 무서워서, 생각나는 게 너 밖에 없었어.”
“응… 그래.”
우리의 통화는 거기서 끝났다. 누가 먼저 전화를 끊었는지 확실하지 않았다. 평소 성격대로 그 애가 먼저 끊었을 것도 같고, 그 적막을 견디지 못한 내가 끊어버렸을 것도 같았다. 생각나는 게 나밖에 없다니. 그 말을 서글퍼 했으면서도 나는 아직도. 그 애는 빈 수화기를 들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전화를 끊고서도 심장이 계속 뛰었다. 창밖에서 짐승의 울음 같은 바람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그것은 어떠한 신호 같았다. 언젠가 다큐멘터리에서 본 적 있는, 자신의 동료들에게 사냥을 시작한다고 알리는 신호와 매우 비슷했다. 그 애도 나와 똑같은 바람소리를 듣고 있을 것 같았다. 바람은 너와 나 중 누구를 잡아먹고 싶어서 저렇게 애탄 울음을 온 세상에 흩뿌리고 있는 걸까. 불도 켜지 않은 방엔 구석구석 짙은 어둠이 몸을 사리고 있었다.
3
김지영. 그 애는 이름만큼 흔하게 있는 애였다. 그 애는 딱히 예쁘진 않았지만 딱히 못생기지도 않았고, 사람들에게 벽을 치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사람들과 힘껏 어울리는 것을 즐기지도 않았다. 교칙에 규정되어 있는 외모 규정에서 단 한 발짝도 벗어나지 않았을 뿐더러 딱히 잘 하는 것도 없어서 선생님들의 기억 속에서도 큰 지분을 차지하지 못했을 게 뻔한 애였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무릎 뼈 언저리까지 오는 감색 치마 앞으로 손을 모으는 버릇 정도일까. 그마저도 너무 작아서 그것을 눈치 챈 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니까 그 애는 시간이 지나면 제대로 기억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법한 애였다. 머리가 길었는지 짧았는지, 키가 컸는지 작았는지, 그 존재마저 쉽게 잊힐 사람이었다. 그 애는 그런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 자신을 바꾸려는 노력을 하나도 하지 않은 걸 보면 그 애는 그런 자신이 나름 만족스러워 했을지도 몰랐다. 그 애는 사람들에게 잊히는 게 익숙해보였고 가끔씩은 그것을 즐기는 것 같기도 했다.
그 애와 함께 나의 수치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나는 그 애에게 오백 원짜리 동전 세 개를 건넸다. 모종삽 가지러 가야겠지? 동전들을 주머니에 넣고 그 애가 한 말이었다.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집 뒤편의, 어느 집의 소유인지 모를 감나무 아래의 부드러운 땅을 그 애가 파냈다. 그 애의 파란 하복 치마에 짙은 색의 흙이 조금 튀었다. 내가 훔쳐온 물건을 숨기는 것은 항상 그 애의 담당이었다. 그것이 나의 수치를 공유하는 방법이었다.
그 애는 손을 뻗어 파란색 상자 뚜껑을 조심스레 들어올렸다. 곧 상자를 비워야겠어. 싸구려 큐빅이 달린 귀걸이 한 짝, 집 열쇠, 낡은 손톱깎이, 카드가 없는 카드 지갑, 몇 종류의 동전들. 소량의 검은 흙과 함께 손바닥만 한 상자에 들어차 있는 것들이었고 모두 우리 집에서 없어져버린 것들이었다. 그 애는 오백 원짜리 동전을 그것들 위에 조심스레 올려놓고는 상자의 뚜껑을 닫았다. 나는 그제야 숨을 길게 내쉬었다.
이 물건들은 너희 가족의 기억에서 벌써 잊혀졌겠지?
상자 위에 흙을 덮으면서 그 애가 했던 말이었다. 나는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다 응, 하는 대답을 흐릿하게 남겼다. 큐빅 귀걸이는 내가 훔치기 이전부터 잊힌 것이었고, 열쇠나 손톱깎이, 카드지갑은 이미 새로운 것들로 대체된 뒤였다. 동전은 사라진 줄도 모르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나는 그 질문에 담긴 뜻을 이해하지 못해 그 애의 뒤통수를 멀뚱히 바라보았다. 새까만 머리카락이 한여름의 태양빛을 하얗게 반사시키고 있었다.
조금 부럽기도 해.
잊혀지는 게?
그 애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곤 흙을 다졌다. 관자놀이부터 광대뼈, 턱까지 끈끈한 땀이 천천히 흘러내리는 게 느껴졌다. 나는 그 애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만약 모두가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면 나는 아마 엄청나게 끔찍한 기분을 느낄 것 같은데, 그게 어째서 부럽다는 걸까. 그 당시 나는 그런 말을 하는 그 애가 조금 무섭게도 느껴졌던 것 같다. 내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볼 때의 무서움. 나는 먼저 우리 집 쪽으로 발을 옮겼다.
그날 저녁 나는 결국 생리를 했다. 핏자국이 번진 속옷을 샴푸로 빨며 그 애가 했던 말을 곱씹어 보았다. 모두에게 잊히는 게 부럽다는 말을. 아랫배보다 조금 아래의, 정확히 짚을 수 없는 어떤 부분이 당겨왔다. 나는 또 뭔가를 가져가고 싶어졌다. 오늘 밤 생리를 시작했으니 이제 길어봤자 오일 정도면 도벽도 잠깐 숨을 죽이고 있을 것이었다. 그 애가 했던 말이 핏자국처럼 가슴 속에 엷게 번졌다. 그런 걸 부러워하는 건 어떤 기분일까? 나는 아빠의 일회용 면도기를 손바닥 안에 숨겼다. 내일 또 그 애를 찾아가야 했다.
나의 수치가 도벽이라면 그 애의 수치는 살아가는 것 그 자체였다. 우리는 우리 둘 다 다닌 적이 없는 초등학교의 낡은 그네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머리 위에서 간간이 끽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몸을 크게 움직일 때마다 발밑에서 낙엽이 바삭거렸다. 주말인데도 운동장엔 아무도 없었다. 물에 빠져 죽는 건 어떨까. 떨어지는 도중에 심장마비로 죽는다던데. 그 애가 말했고 나는 바로 고개를 크게 저었다.
싫어. 물에 불어서 흉해지잖아. 죽는 것만 생각하면 옥상에서 떨어지는 거랑 다를 게 뭐야.
그 애는 으응, 소리를 내더니 그네에서 뛰어내렸다. 우리는 빠르고 깔끔한 자살 방법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 애는 죽을 때 아픈 것이, 죽고 난 후 자신의 모습이 흉할 것이 싫어서 죽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말을 했다. 그 방법을 찾고 나면 자신은 죽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더 이상 수치스럽지 않아도 괜찮을지 모른다는 말을 했다. 이전의, 자신을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으면 좋겠다는 말도 같은 맥락의 말이었다.
그네에서 뛰어내린 그 애는 몸을 돌려 내 쪽을 바라보았다. 나는 그 애에게 죽지 말라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나는 그 말을 침과 함께 삼켜버렸다. 그건 규칙 위반이었다. 목에 걸린 그 말이 가시가 되어 목구멍 안쪽을 쿡쿡 찔러서 나는 침을 모아 한꺼번에 삼켰다. 어렵네. 그 애의 목소리가 이명처럼 울렸다.
나는 죽고 싶은데 왜 자살을 못할까? 나는 그게 너무 부끄러워. 언젠가 그 애가 했던 말이었다. 우리는 아직 춘추복을 어색하게 입고 있었다. 그 애는 봄바람이 귀 끝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처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가 본격적으로 수치를 나눈 때는 아니었다. 내게 말을 거는 걸까? 나는 아무 대답도 않고 가만히 있었다. 그 애는 내 쪽으로 얼굴을 두고 있었지만 시선이 뿌옇게 번져있어 나를 보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 날 저녁 나는 처음으로 죽음에 대한 생각을 했다. 그 애의 시선만큼이나 뿌연 생각이었다.
그네에서 뛰어내린 그 애는 운동화 뒷굽으로 딱딱하게 다져진 흙을 파고 있었다. 나는 사실 죽고 싶지 않은 걸까? 그 애는 이 말을 할 때마다 목소리를 삼키듯 말을 했다. 나는 이번에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떻게 말을 해줘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자살을 할 수 있을 거라는 말도, 자살을 포기하라는 말도 이상했다. 대신 나는 다른 말을 입에서 뱉었다. 너는 왜 자살을 하고 싶은 거야? 하고.
너는 왜 물건을 훔치고 싶은 거야?
그 애의 입에서 질문이 떨어질 줄은 몰랐다. 생리를 하는 것 처럼 아랫배가 묵직해졌다. 몰라…… 생리를 할 때면, 배란통 때도, 그럴 때면 물건을 그냥 훔치고 싶어져. 그냥, 어떤 이유가 있다고 하기보다는. 나는 그 애에게 변명을 하듯 말을 늘어놓았다. 그 애가 나의 죄를 추궁하는 것 같아서. 달려가 부모님께 모든 일을 말해버릴 것 같아서.
나도 비슷한 거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으면서도 전혀 다른 세계의 말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냥 죽고 싶다는 걸까, 아니면 죽고 싶은 이유가 명확하지 않다는 걸까? 전자도 후자도 내 가치관으로썬 이해하기 힘든 말이었다. 내게 있어서 죽음은 그렇게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그 애가 자살한다면 주위 사람들은 죽음의 원인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으나 품었던 의문을 그 애에게 내비치지는 않았다. 그 애가 죽으면 다들 그 애를 조용히 잊을 것 같아서.
4
그 다음날도 어김없이 그 애에게 전화가 왔다. 나는 내 휴대폰 번호를 알려줄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지번으로 시작되는 숫자의 나열들이 전화기의 자그마한 화면 안에서 번잡스레 움직이고 있어서 그랬다. 그 애는 토요일 아침 여덟 시에 도착하는 차표를 예매할 것이라고 했다. 나는 그 애에게 내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여덟 시까지 터미널에 가 있을까?
응, 하는 그 애의 대답이 한 박자 정도 늦었다. 그 애도 나처럼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 분명했다. 우리는 서로 맞닿아 있는 지점이 꽤 있었다. 친구끼리는 닮는다고 그러던가. 그 말이 사실일지도 몰랐다. 우리는 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은 채 전화를 끊었다. 희미하게 빛나던 화면이 수화기를 내려놓음과 동시에 꺼졌다. 아까까지만 해도 벌겋던 하늘도 어느 순간엔가 빛을 잃고 숨을 죽이고 있었다.
바다. 바다엔 왜 가고 싶은 걸까? 냉장고에서 생수통을 꺼내 그대로 병 입구에 입을 대고 마시며 생각했다. 바다. 바다는 그 애에게 어떤 의미일까? 각종 영상에서 본, 제 발로 바다 속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잠깐 머릿속을 스쳤다. 그것에 마음이 조금 쓰였다.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랬다. 그 애가 바뀌었을까? 사람이 그렇게 쉽게 바뀌겠어, 하는 생각과 동시에 지금 내 모습이 겹쳤다.
그 애가 이사를 간 이후 나는 감나무 밑의 파란 상자를 그대로 버렸다. 그 애가 떠나가고 난 뒤에 일어난 일이었다. 길거리에 아무렇게나 놓여있는 누런 쓰레기봉투 위의 그 상자를 보며, 나는 깊은 숨을 내뱉었다. 이제는 더 이상 마음 졸이지 않아도 괜찮아. 자신을 달래듯 중얼거린 말이었다. 그 순간 나는 왜, 사람들에게 잊히는 게 부럽다는 그 애의 말을 떠올렸을까. 도벽은 나와 그 애를 연결하는 가장 짙고 굵은 끈이었다. 이상한 생각인 걸 알면서도 자꾸 그 애가 내 도벽을 가져간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내 기억 속에서 살아있고 싶지 않아서. 남들처럼 내가 그 애를 잊었으면 싶어서.
사실일리는 없겠지만,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 애는 완전히 성공한 것이었다. 얼마 전 그 애에게 전화가 오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그 애에 대한 생각을 전혀 하고 있지 않았으니까.
자살하려는 애가 설마 다른 사람을 부르겠어. 일 점 오 리터짜리 생수병의 뚜껑을 꽉 돌려 잠갔다. 손바닥에 남은 거칠거칠한 느낌을 바지 위에 문질러 닦았다. 바다. 나도 바다에 가보는 건 오랜만이었다. 여기는 바다를 가려면 마음을 단단히 먹고 떠나야 했다. 그런데 그 애는 왜 여기까지 오는 걸까? 내가 어디 도망이라도 갈 것 같았던 걸까. 그 애도 많이 불안했을 것이다. 내가 어떻게 변했을지, 내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내가 자신을 잊어버리진 않았을지. 그 애는 역시 죽지 못하는 사람인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잊히고 싶어 하면서도 동시에 기억되고 싶어 하는 그 아이는.
그 애와 나는 변한 것이 아무것도 없을지도 몰랐다. 많이 바뀐 것처럼 보여서, 그래서 서로가 멀리 있는 것 같아도 우리는 아직 서로의 수치를 나누고 있을 때와 전혀 바뀌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만나고 싶어 하는 게 아닐까. 나는 생수병의 뚜껑을 다시 열어서 물을 크게 한 모금 더 마셨다.
5
버스가 덜컹거렸다. 우리는 둘 다 아무 말 없이 창밖만 내다보고 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서로 간만에 만난 게 좋아서 껴안고 소리 지르고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우리 관계는 바뀐 것이 없었다. 오랜만이야. 이 짧은 한 마디를 동시에 말하곤 우리는 그저 서로의 눈만 바라보다 서로 다른 쪽으로 고개를 슥 돌렸다. 그것이 우리 인사의 끝이었다.
차 안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이렇게 큰 차를 우리 둘이서만 타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예 세상에 우리 둘 밖에 없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이파리를 죄다 털어버린 나무들이 빠른 속도로 창문을 스쳐 지나갔다. 잘 지냈어? 창가에 앉아 있던 그 애는 몸을 내 쪽으로 조금 돌렸다. 전화와는 목소리가 또 달라서, 나는 그 목소리가 조금 어색했다.
"응 나름. 너는 어때? 거기는 지낼만해?"
"좀… 심심한 동네야. 그래도 애들은 좋아. 다 잘 대해줘."
그 애는 허벅지 위에 올려놓은 손을 맞잡았다. 그 애의 왼쪽 손목에는 못 보던 팔찌가 걸려 있었다. RWANDA라는 글씨가 희게 자수로 놓여있는 연한 주황색 끈팔찌였다. 르, 완, 다. 팔찌의 글자를 속으로 찬찬히 읽어보았다. 팔찌를 사면 그 이익금이 가난한 나라의 어린이들에게로 보내진다는 팔찌였다. 르완다. 르완다의 어린 아이는 네게 얼마큼의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너의 손목에 그어져 있던 아주 얕고 붉은 상처들이 아직도 눈꺼풀 안쪽에 남아있었다.
“잘 지낸다니 다행이야. 너 보러 간다니까 엄마가 또 이거 줬어.”
안전벨트 때문에 주머니 안을 한참이나 헤매다 홍삼 캔디를 꺼냈다. 내가 아는 사람 중 홍삼 캔디를 좋아하는 사람은 딱 그 두 사람밖에 없었다. 뻘건 봉지의 사탕을 받곤 그 애가 살짝 웃었다. 여전하시구나. 그 애는 자리에서 바로 봉지를 까서 사탕을 입에 넣었다. 일 년 전으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치아와 사탕이 부딪히는 소리가 간간히 말갛게 울렸다.
시외버스에서 내리고, 지하철을 타고, 시내버스를 두 번이나 갈아타고도 오 분 정도 걸어야 하는 곳에 바다가 있었다. 우리는 살짝 지쳐있었다. 사람들이 없을 만해. 이렇게 멀리까지 누가 오고 싶겠어. 찬바람이 텅 빈 도로를 건너왔다. 해수욕장 입구를 표시하는 간판은 칠이 벗겨져 분홍색으로 칠해져 있었다는 걸 간신히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이었다. 우리는 잠시 그 간판 앞에 서서 조금만 더 걸어가면 보일 바다를 상상했다. 갈매기는 아닌 것 같은 새 한 마리가 하늘을 날고 있었다.
“바다는 왜 오고 싶다고 그랬어?”
운동화 아래에서 하얀 모래가 버석거렸으나 바다는 아직 보이지 않았다. 그 애의 옆얼굴이 살짝 미소를 띠고 있었다. 사실 나, 아직 바다에 가본 적이 없어서. 더 바빠지기 전에 바다에 한 번 가보고 싶었어. 파도 소리가 작게 들렸다. 신발을 벗어두고 바다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그 애의 모습이 씻겨 나갔다. 운동화 안으로 모래 알갱이 몇 개가 들어온 것 같았다.
‘해수욕 금지!’라는 붉은 글씨가 굵게 적힌 현수막이 한쪽만 걸린 채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사람이 아무도 없을 줄 알았던 바다에는 생각보다 꽤 많은 사람들이 흩어져 있었다. 바람이 세게 불었고 그만큼 파도가 높게 치솟았다가 떨어졌다. 여자들의 가느다란 비명소리와 웃음소리가 공기를 울렸다. 우리는 바닷물 때문에 짙은 색으로 물든 모래를 밟으며 걸었다. 겨울 바다는 역시 춥구나. 그 애는 얼굴을 가리는 머리를 넘겼다. 이전보다 머리가 많이 길어있었다. 주인이 없는 것 같은 개 한 마리가 모래사장을 헤집고 있었다.
하늘이 흐렸다. 나는 아직도 그 애의 입에서 언제 죽음이라는 단어가 나올지 긴장하고 있었다. 그 애가 죽기 위해 바다에 온 것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나는 그 애의 입에서 언제든지 죽음이 튀어나올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아직도 우리 관계에서 수치가 빠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것에 익숙해진 관계여서 그런 것일까. 생각이 이어질 것 같으면서도 자꾸 끊겼다.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말을 아끼고 있었다. 노을이 지기 시작했을 때 부터였던 것도 같고 우리가 걷기를 멈췄을 때부터 그랬던 것도 같았다. 아까보다는 많은 사람들이 빠져 있었다. 밤의 파도 소리에는 분위기를 가라앉게 하는 힘이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말을 아끼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잠깐 앉을래?”
우리는 옷에 모래가 묻는 것을 염려하면서도 바닥에 주저앉았다. 바닥에 앉으니 파도 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 느낌이었다. 바다 바람이 얼굴을 계속 때렸지만 우리는 크게 추운 티를 내지 않았다. 누구 한 명이 춥다는 말을 꺼내면 일어나서 따뜻한 곳으로 가버려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아직까지는 바다를 떠나고 싶지 않아서. 어디선가 폭죽이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참, 그, 하루랑 밤이는 어떻게 됐어? 잘 크고 있어?”
하루와 밤은 우리가 석 달 정도 같이 키우던 햄스터였다. 우리는 그 두 마리가 새끼를 낳기를 바랐지만 결국 그 애가 이사를 가기 전까지 새끼를 보지는 못했다. 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나는 그들이 새끼를 낳았기를 바랐다.
“하루가 새끼 낳았어. 근데 어느 순간 보니까 다 죽어 있더라.”
햄스터가 스트레스를 받으면 자기 새끼를 물어 죽일 수도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은 있지만, 하루가 그랬다니. 하루는 아주 순한 햄스터였다. 하루를 손에 올려놓고 논적도 많았었는데. 나도 모르게 눈을 바다로 돌렸다. 그래도 하루랑 밤이는 살아 있으니까, 또 새끼를 낳을 수 있지 않을까. 그 애는 그렇게 말했지만 나는 그들이 다시는 새끼를 낳지 않았으면 했다. 나는 더 이상 죽음을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죽음을 그렇게 가까이에서 보고 싶지도 않았다. 그 애도 그랬으면 했다.
더 이상 웃음소리도, 폭죽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해가 져서 바다와 하늘의 경계가 흐릿했다. 늦은 시간인데도 배 한 대가 작은 불을 밝히고 있었다. 경계가 흐려진 공간에서 그 배는 공중에 붕 떠있는 것처럼 보였다.
우리는 몸을 일으켰다. 소금기가 가득한 모래는 몸에 딱 달라붙어 잘 털리지 않았다. 시간이 느리게 흘렀다. 그래서 우리는 더 추위를 느꼈다. 이 밤은 도무지 빨리 지나갈 것 같지 않았다. 영원히 밤이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고, 그래서 우리는 영원히 추위를 느껴야만 할 것 같았다. 언젠가 해가 뜰 걸 알면서도 우리는 검은 바다를 보며 불안에 떨었다.
사람이 많이 오지 않는 해변인데도 새벽까지 커피를 팔고 있는 트럭이 있었다. 트럭에 매달려 있는 몇 개의 전구 중 하나는 수명이 거의 다되었는지 간간이 눈을 깜빡이듯 빛을 숨겼다. 모래사장에 한쪽 발을 슬며시 올려둔 흰 트럭에서는 노래 한 마디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커피를 내리는 소리가 파도소리 대신 텅 빈 겨울 공기를 채우고 있을 뿐이었다. 나이가 꽤 있어 보이는 주인아저씨는 수염이 난 턱을 벅벅 긁었다.
커피는 너무 썼다. 나는 얼굴을 찌푸리지 않도록 애를 썼다. 주인아저씨는 우리 때문에 끊겼던 담배를 다시 피우기 시작했다. 커피의 맛만큼 자극적인 담배 연기가 노란 전등을 감싸 안았다. 우리 둘 다 커피는 반도 못 마신 채 잔을 내려놓았다. 머리 위의 전등이 한 번 깜빡였다.
하품을 하던 그 애가 팔을 길게 뻗었다. 르완다가 수놓아진 팔찌가 팔을 따라 공중을 한 바퀴 빙 돌았다. 우리는 다시 한 번 더 해변을 걸었다. 해변의 끝에서부터 끝까지 걷는 것이 우리의 목표였다. 빈속에 마신 커피 때문에 속이 조금 쓰렸다. 모래사장이 발을 자꾸 잡아챘기 때문에 우리는 아주 천천히 걷고 있었다. 우리는 나누지 못했던 근황을 마저 다 나누었다. 나는 내가 새로 사귄 친구에 대한 이야기를 했고 그 애는 새로 다니기 시작한 학교에 대한 얘기를 했다. 서로에게 큰 의미도, 관심도 없는 이야기였다. 해변의 끝에 도착했을 때는 우리의 이야기도 거의 갈무리된 상태였다.
해변의 끝에서 우리는 바다를 바라보았다. 걸어온 길이 멀었다. 얼굴을 때리는 바람이 더 이상 크게 차갑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그 애는 다시 한 번 더 팔을 길게 뻗었고, 그러고 난 뒤에는 르완다 팔찌를 손목에서 풀었다. 나는 실례인 걸 알면서도 그 애의 손목 안쪽에 시선을 두었다.
깨끗하기만 했다. 부드러운 살이 매끄럽게 차올라 있었다. 귀로 파도소리가 밀려들었다. 손바닥이 간질거리는 것 같아 하얀 모래를 한 움큼 집어 바다로 던졌다.
그 애는 내가 하는 행동을 잠시 바라보다, 살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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