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언제든 삭제될 수 있음  #단문 <이름 없음>에 덧붙인 이야기

 

 

유리

 

Y A G I

 

 

 

   나는 오전 두 시에 꼭 내가 이름도 제대로 모르는, 한참 전에 죽어 사라진 작곡가들의 클래식을 들었다. 그것에 별 이유는 없었다. 그저 누군가는 깊이 잠들어 있고 누군가는 아직 하루를 마무리할 준비도 끝내지 않은 시간이라서 내게는 다소 이질적인 클래식이라는 장르가 유난히 끌릴 뿐이었다. 나는 매일 알지도 못하는 다른 노래를 침대에 누워 들었다. 납작한 베개 두 개를 겹쳐서 베고, 나는 플레이어의 자그마한 바가 흘러가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곤 했다.

   적막이었다. 분명히 노래는 틀어져 있는데 그 시간의 내게 온 세상은 적막이었다.

언젠가 짧은 리듬만을 기억하는 노래를 길가에서 들었을 때만 해도 그랬다. 당연히 제목은 모르는 노래였다. 그곳은 카페도, 이탈리안 식당도 아닌 평범한 옷가게였다. 다른 가게들이 이미 유행에 빠르게 녹슬어버린 노래를 틀고 있을 때 그 가게는 클래식을 틀고 있었다. 나는 그 익숙한 클래식의 리듬 때문에 홀린 듯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시멘트벽에는 차가운 회색 페인트가 발려 있었고 너무 밝은 노란빛 조명이 가게 안의 옷들을 자신의 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가게 안으로 들어오니 노랫소리가 조금 더 크게 들렸다. 가게 주인인지, 아르바이트인지 알 수 없는 남자는 계산대에 기대어 서서 유일한 손님인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어색하게 옷들을 둘러보았다. 내 발자국 발자국 마다 그의 시선이 달라붙는 것 같아 나는 내 사이즈도 아니고 내 취향도 아닌 옷을 얼른 집어 들어서 계산대로 향했다.

만오천 원입니다.”

카드로 계산할게요.”

그럼 만칠천 원이에요.”

나는 별수 없이 만오천 원이었다가 만칠천 원이었다가 하는 옷을 사게 됐다. 바스락거리는 플라스틱 봉투가 내 손에 쥐어졌다. 스피커에서는 높은음의 현악기 소리가 쟁쟁 울리고 있었다.

저기요.”

나는 직원을 불렀다. 직원의 진갈색 눈동자가 노란 조명 밑에서 미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 노래 제목이 뭐예요?”

차이코프스키요.”

차이코프스키의, 뭐요?”

그건 저도 모르겠네요.”

그의 대답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그도 나와 동류일지도 몰랐다. 차이코프스키. 나는 낯설면서도 익숙한 그 이름을 되뇌었다. 그때부터 나는 매일 오전 두 시에 차이코프스키의 노래를 들었다. 나 역시 여전히 노래의 이름은 몰랐다. 그 가게에서 산 옷은 내게 너무 크고 무거웠지만 그래도 가끔 차이코프스키, 하는 이름을 나직하게 말할 수는 있는 정도였다.

차이코프스키.

오전 두 시의 미묘한 어둠 속에서 현악기가 조용히 흐느끼고 있을 때 나는 그의 이름을 불렀다. 당연하게도 그의 답은 없었다. 대신에 그저 그가 남기고 간 음악들이 이 세계를 채워나가고 있었다.

그 노래 제목을 본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내가 느끼기에 클래식의 제목들은 내가 결코 연주할 수 없는 악상 기호들로 채워진 하나의 악보처럼 보였다. 그래서 나는 클래식플레이리스트에 들어있는 노래들의 제목을 아예 읽어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노래의 제목을 본 것은 그곳에 알 수 없는 악상기호가 아닌, 한글로 익숙한 차이코프스키의 이름이 적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차이코프스키가 아니라 차이콥스키였다. 설마 차이코프스키와 차이콥스키가 다른 사람이지는 않겠지, 생각하면서도 나는 인터넷을 켜 차이콥스키를 검색해보았다. 차이코프스키가 아니라 차이콥스키가 맞는 표현이라는 것을 새로 알게 되었다. 그래도 나는 차이콥스키보다는 차이코프스키가 좋았다.

그 이후 나는 언제 끝날지 모르는 글자들을 나열을 바라보았다. 호두까기 인형. 이것도 익숙하나 이름이었다. 극에 대한 내용을 완벽하게 알지는 못해도, 이름 정도는 알고 있었다. 이 노래의 이름은 눈송이들의 왈츠라고 했다. 눈송이들의 왈츠. 나는 어두운 밤에 하늘하늘 떨어지는 눈송이들을 떠올렸다. 각각의 이름이 주어지지 않은 눈송이들.

아니, 어쩌면 내가 그저 그들의 이름을 모르고 있을 뿐일지도 몰랐다. 나는 문득 이 세상에서 자신의 이름을 모르는 것은 나 하나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나는 머리를 흔들어 그런 생각들을 털어내었다. 그러자 남은 것은 차이코프스키, 라는 말을 뱉은 남자의 옅은 색조의 입술이었다.

 

나는 생각보다 그 옷가게에 자주 들러서 내 취향이 아닌 옷을 샀다. 내가 갈 때마다 머리를 짧게 자른 남자는 어서 오세요, 하고 카운터에 기대어 내게 인사를 했다. 나는 사실 옷보다 가게에서 나오는 클래식에 관심이 있어서, 몇 번 얼굴을 들이밀고 난 이후에는 노래를 듣기 위해 가게를 몇 바퀴나 돌기도 했다. 남자는 내가 그러든 말든 별로 신경이 쓰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오늘은 무슨 노래에요?”

리스트요.”

리스트라는 사람도 있어요?”

그렇대요.”

이름이 이상하네요.”

저도 이름이 이상한데.”

남자가 요령껏 옷을 포장하면서 말했다. 예상치 못한 말에 나는 남자를 멀뚱히 바라보았다. 남자는 태연하게 매장의 로고가 박힌 희고 두터운 비닐봉지에 내가 입지 않을 옷을 담았다.

저는 유리에요.”

유리요?”

정확히는 유, 리에요. 성은 유, 이름은 리.”

유리. 나는 나도 모르게 남자의 이름을 입속말로 되뇌었다. 유리.

어렸을 때부터 놀림 많이 받았어요. 이름이 유리가 뭐냐고.”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그런가요. , 여기요.”

남자가 카드와 함께 비닐봉지를 건넸다. 나는 한 손으로 그것을 받았다. 유리. 남자의 이름을 알아버린 이상 나도 무언가를 말해야만 할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노래요.”

어떤 노래요?”

제가 처음 왔을 때 틀어져 있던 노래요. 눈송이들의 왈츠래요. 차이코프스키의, 눈송이들의 왈츠.”

나는 내 이름 대신 그 노래의 이름을 말했다. 남자가 눈을 깜빡이며 나를 바라보았다. 고마워요. 잠시간의 침묵 뒤에 남자가 뱉은 말이었다. 나는 하면 안 될 말을 한 것 같아 서둘러 그 가게를 빠져나왔다.

 

이제는 이름을 알게 된 그 노래를 들으며 나는 이름이 유리인 남자를 떠올렸다. 그의 얼굴이 완벽하게 그려지지는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와 나는 점원과 손님, 딱 그 정도의 사이였으니까. 아마 그도 내 얼굴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고 어쩌면 어둠이 내려앉은 이 오전 두 시에 자신의 이름을 내게 말한 것을 후회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내가 그에게 그 노래의 이름을 알려준 것처럼.

그때 나는 어째서 내 이름을 말하지 못한 걸까. 나는 몸을 돌려 휴대전화의 스피커를 등졌다. 그래도 좁은 방에서는 노랫소리가 쟁쟁하게 울렸다. 오늘의 노래는 오직 눈송이들의 왈츠의 반복이었다. 나는 그 노래를 들으며 유리를 생각하고 있었다. 낯선 사람에게 자신의 이름을 말할 수 있는 유리와 자신의 차이를 생각했다.

, 유리가 아니라 리, 라고 했지. 유는 성이고, 이름은 리. 하지만 나는 그를 리라고 부르는 것보다 유리라고 부르는 것이 훨씬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생각뿐이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부를 일은 앞으로 영영 없을 것이기 때문에.

나는 눈을 감았다. 노래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뜬금없이 내일은 병원에 가봐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언젠가 내원한 적이 있는 신경정신과였다. 처음으로 그곳에 내원했을 때 내게 그 이유를 설명할만한 뚜렷함은 없었다. 지금처럼 어느 날 문득 병원에 가봐야겠다고 생각했고 그 길로 병원에 내원했을 뿐이었다. 내원 이유를 묻는 의사에게 나는 오전 두 시에 클래식을 듣는다고 말했다. 의사는 내게 수면 유도제를 처방했지만 나는 지금까지 그 약을 먹을 적이 한 번도 없을뿐더러 그 이후로 그 병원에 내원한 적도 없었다.

이런 내가 갑자기 다시 병원에 가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순전히 이름 때문이었다. 차이코프스키니, 유리니 하는 그들의 이름이 머릿속에서 도무지 떠나지 않았다. 오전 두 시에 음악을 듣는 것은 문제가 되는 일이 아니지만 그것들에 집착하는 것은 문제이지 않을까. 나는 몇 주 전에 받았던 약을 꺼내 처음으로 수면 유도제를 먹고 잠이 들었다. 그때까지 차이코프스키가 작곡한 노래는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었다.

 

고작 몇 주 내원하지 않았을 뿐인데 병원의 풍경은 많이 바뀌어 있었다. 의자의 재질이 바뀌어 있었고, 한 잔에 백 원이던 커피도 이백 원으로 가격이 올라 있었다. 그러나 가장 큰 변화는 병원 귀퉁이에 금붕어 몇 마리를 키우는, 내 키의 반만 한 수조가 생겼다는 점이었다.

나는 대기자 목록에 내 이름과 생년월일을 적고는 그 수조 앞에 서서 금붕어들을 바라보았다. 치매기가 있는 노인이 누군가에게 자꾸 성을 내며 가위바위보를 하자고 말했다. 가위바위보를 해서 어떻게 하자는, 그러니까 이겼을 때의 혜택이나 졌을 때의 페널티 따위는 없었다. 그냥 가위바위보를 해야만 한다고 노인은 소리 지르고 있었다. 그런 시끌벅적함 속에서도 금붕어들은 적막 속에서 유유히 헤엄치고 있었다. 나는 그 금붕어가 마음에 들었다. 어쩐지 편안함과 안정을 주는 것만 같다고 그러면 좋을까. 내 시선은 살랑거리는 금붕어의 지느러미에 향해있었다.

간호사가 내 이름을 몇 번이고 불렀지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종종 그런 경우가 있는 모양인지, 간호사는 지체하지 않고 다음 환자의 이름을 불렀다. 내가 알지 못한 문제를 가진 그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나 유유히 진료실로 들어갔다. 마치 금붕어의 지느러미가 움직이는 것과 비슷한 움직임이었다. 나는 멋대로 저 사람도 금붕어를 키우고 있겠거늘 생각했고 나 역시 금붕어를 키워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어제 삼킨 수면 유도제보다 그것이 훨씬 내게 적당한 처방일 것 같았다.

 

손바닥보다 작은 금붕어 한 마리를 키우는 데는 생각보다 많은 돈과 공이 필요했다. 나는 수조 바닥에 돌을 하나하나 깔았다. 빨리 작은 봉투에 담긴 금붕어를 수조로 옮겨주고 싶었다. 오전 두 시가 거의 다 된 시간이었고 나는 습관처럼 클래식을 틀었다. 오늘은 기분이 괜찮았다. 도리어 이제 익숙해진 그 리듬을 콧노래로 따라 부를 수 있을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분명히 금붕어 때문이리라.

금붕어의 이름은 유리였다. 유리. 떠오르는 이름이 그것밖에 없었다. 유리야. 나는 수조 앞에 아빠 다리를 하고 앉아 유리를 불렀다. 유리는 내 말에 그다지 반응을 보이지 않았지만 나는 그것이 그렇게 싫지는 않았다. 유리는 도리어 아무 반응도 없었기에 나를 더욱 편하게 만들고 있었다.

유리야. 나는 금붕어를 부르며 옷가게의 그 남자를 떠올렸다. 그 남자는 어떻게 자신의 이름을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말할 수 있는 걸까. 나는 내 이름을 말하려 입을 몇 번 뻐끔거렸지만 물속에 있는 것처럼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내게는 이름이 없었다. 물론 부모가 지어준 이름은 있었다. 하지만 아주 어렸을 때부터 나는 그것이 내 이름이 아닌 것만 같았다. 그러니까, 유리라는 남자가 일하고 있는 옷가게에서 산 옷을 입을 때처럼 나에게 어딘가 무겁고 사이즈가 큰 옷처럼 느껴졌다. 나는 내 이름을 말하는 것을 싫어했다.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는 것도 사실 별로 좋아하진 않았지만,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포기한 지 오래였다.

어쩌면 이 금붕어의 이름은 유리가 아니라 내 이름을 지어주는 게 더 적당할지도 몰랐다. 자기 이름도 말하지 못하고 뻐끔거리는 모습이 꼭 그랬다.

 

금붕어를 샀어요.”

그래요?”

나는 이번에는 일부러 가게를 뱅뱅 돌지 않고 바로 카운터로 향했다. 남자도 어차피 내가 옷을 사러 온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는지, 별 신경도 쓰지 않았다. 남자는 왼손으로 턱을 괴고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의 눈동자를 피하지 않고 바라보았다.

이름이 뭐예요?”

유리요.”

금붕어 이름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턱을 괴고 있는 남자의 머리가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어떤 습관인 모양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남자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오늘도 클래식이 울리고 있었다. 이 노래는 제목을 알았다. 중고등학교에 다닐 동안 줄창 들었던 비발디의 사계였다. 분명히 이 노래에도 더욱 정확한 정보를 알려줄 이름이 덕지덕지 붙어있겠지만, 내게는 비발디의 사계 정도면 충분했다.

오랜 시간이 흘러 남자가 입술을 움직였다.

, 좋아해요?”

아뇨.”

근데 왜 내 이름을 지어줬어요?”

그냥 생각나는 이름이 그것밖에 없었어요.”

남자는 눈을 깜빡여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의 오른쪽 눈꺼풀에 자그마한 점이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이름이 뭐예요?”

유리요.”

금붕어 말고, 그쪽 이름이요.”

지영이요.”

무슨 지영?”

.”

흔한 이름이었다. 그래서 나는 내 이름이 싫었다. 이지영. 이 나라에는 수백 명, 어쩌면 천명 단위로 이지영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있을지도 몰랐다. 유리와는 다르게, 지영이라는 이름은 오롯이 내 것이 아닌 것만 같았다. , , . 이 세 문자로는 나를 도무지 정의할 수가 없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유리. , . 라는 이 두 글자는 저 남자를 얼마나 잘 묘사하고 있는가.

나는 유리라는 이름을 가진 그가 아주 조금 부러웠다.

저도 금붕어나 길러봐야겠어요. 이름을 지영으로 지어두게.”

나는 남자의 의중을 알 수 없어 잠시 남자를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남자가 빙긋 웃었다. 나는 남자가 웃는 이유도 알 수 없었지만, 그에게 말을 걸었다.

매일 일해요?”

아뇨. 일요일은 쉬어요.”

그럼 그때 만나요.”

데이트 신청이에요?”

.”

저 안 좋아한다면서요.”

남자의 말에 나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좋아해야만 데이트 신청을 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이상한 사람이네요.”

싫은가요?”

아뇨.”

남자의 말투는 단호했다. 이런 걸 데이트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유리가 데이트라고 말하면 데이트가 맞을 터였다. 그래서 우리는 좋아하는 사이도 아니면서 오는 일요일에 데이트 약속을 잡았다. 유리가 자신이 좋아하는 카페에서 만나자는 얘기를 했다. 그곳은 클래식도, 철 지난 팝송도 틀어주지 않는 아주 고요한 카페라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십 분이나 일찍 도착했는데 남자는 나보다 먼저 도착해 있었다. 언제부터 앉아있던 걸까. 나는 남자의 앞쪽에 있는 의자를 끌어 앉았다. 남자는 또 턱을 괴고 있었다. 나쁜 습관인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그를 말리지 않았다. 굳이 그러고 싶지 않았다.

지영 씨.”

그렇게 안 부르면 안 돼요?”

그럼 어떻게 불러요?”

그냥, 그쪽이나.”

지영 씨는 저를 어떻게 부를 건데요.”

유리.”

그럼 저도 지영이라고 부를래요. 그래야 쌤쌤이잖아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의지를 꺾기엔 내 의지가 너무 무력해 보였다. 나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음료를 주문하기 위해 매장 안쪽의 카운터로 향했다. 나는 흘긋 남자를 바라보았고 남자는 내가 알 수 없는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그것이 안도인지 실망인지는 아직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항상 깔끔하고 금방 나왔다. 나는 매장에서 마시고 간다고 말했음에도 일회용 플라스틱 컵에 나온 아메리카노의 빨대를 앞니로 살짝 씹었다. 남자는 그런 내 모습을 보더니 문득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말을 꺼냈다.

그 노래 들어봤어요.”

무슨 노래요?”

차이코프스키요.”

나는 차이코프스키가 아니라 차이콥스키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왜냐면 우리 둘 다 차이콥스키보다 차이코프스키를 더욱 좋아하는 것 같았으니까. 차이코프스키는 내게 있어서 첫 번째로 주어진 이름이었고 나는 그다지 그것을 남들이 말하기에 더 옳은 것으로 말하고 싶지 않았다.

이름을 알고 나니까 더 좋더라구요.”

그랬던가요.”

나는 살짝 접힌 빨대로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정말로 아무 노래도 들리지 않는 카페였기에 남자와 나의 대화는 어째서인지 이 좁은 테이블을 벗어나지 못할 정도로 작고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 가게에 왜 그렇게 많이 왔어요? 옷도 안 어울리는 것만 사가더만.”

그냥, 클래식이 들려서요.”

클래식 좋아해요?”

좋아하는 건아닌 것 같아요.”

그러면요?”

, 남자가 고개를 기울였다. 여기는 아메리카노도 별맛이 안 났다. 무거운 쓴맛도, 가벼운 신맛도 없는 마치 노래도 이름도 없던 과거의 나를 떠올리게 하는 맛이었다. 나는 한동안 입술을 빨대에서 떼어내지 않았다. 남자는 그동안 그 자세 그대로 나를 바라보았다.

썩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잘 모르겠어요.”

자기감정인데 잘 모르겠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턱을 괴던 것을 그만두고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웃을 때면 남자는 안 그래도 앳된 얼굴이 더 어려 보였다. 자기 딴에는 그런 이미지를 피하려고 짓는 웃음인 것 같았지만.

남자는 뜨거운 음료를 시켰는지 종이컵을 양손으로 붙잡고는 자신의 음료를 한 모금 마셨다. 그 안에 든 것이 무엇인지 내가 알 길은 없었다. 나는 또다시 빨대를 씹다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럼 그런 거에다가 유리라는 이름을 붙여 봐요. 금붕어에게 유리라는 이름을 지어준 것처럼.”

무슨 의미예요?”

이름을 붙이면 조금 더 나아질 수 있잖아요. 방금 그 감정은, ‘유리한 감정인 거예요.”

유리도 이상한 사람이군요.”

그래서 지영을 좋아하는 거예요.”

유리는 저를 좋아하나요?”

그의 고백에 설렜다거나 불쾌했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별다른 느낌도 들지 않았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었다. 다만 나는 왜 그가 나를 좋아하는지 궁금했을 뿐이었다.

그냥, 정이 들었나 봐요. ‘유리한 감정이랄까.”

내 질문에 남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유리한 감정을 말했다. 나는 가볍게 인상을 찌푸리며 남자를 바라보았다. 태어나서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다. 남자는 자신의 이름을 그렇게 좋아했던가. 자신의 이름을 처음으로 말했던 그때, 남자는 제 이름을 그렇게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는데.

어쩌면 남자는 그저 내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걸 좋아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나를 좋아한다고 말했으니까. 아니, 그렇게 영악한 사람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그는 그냥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었다. 정의할 수 없는 감정에 유리라는 이름을 주면 마음이 편해질 거라고 믿고 있는 것이었다. 하필이면 그것이 그의 이름인 것은 내가 나의 금붕어에게 유리라는 이름을 지어준 것과 같은 이유 때문이겠지.

유리도 역시 이상한 사람이에요.”

내 말에도 남자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그런 모습이 더 이상한 남자였다. 나는 더는 그 옷가게를 찾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유리한 감정 때문이었다. 더는 그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고, 더는 차이코프스키의 노래를 들을 자신이 없었다.

세상의 모든 것이 이름을 잃어버리고 유리가 되고 있었다. 유리. 왜 하필이면 그의 이름은 유리인가. 너무나도 깨지기 쉽고, 깨져버리면 아플 것 같은 그런 이름을 가져서 왜 이 세상의 모든 것에 그 이름을 주어버려서, 내가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만들어버렸나.

왜 나 자신까지 유리가 되게 만들어버렸나.

나는 내가 조금 더 싫어졌다. 자신의 이름을 잃어버리고 유리가 되어버린 내가 싫어졌다. 나는 씹다 남긴 빨대를 두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남자는 나를 붙잡지 않았다. 그것이 그의 유리함이었다.

카페의 커다란 창문 밖에서 그를 바라보았을 때, 그는 내가 떠난 자리를 한참 동안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너무 심하게 대한 것이 아닌가, 생각하면서도 그의 앞자리에 다시 앉지는 않았다.

 

유리.”

내가 남자를 찾은 것은 그로부터 며칠의 시간이 지난 뒤였다. 전화 연결음이 길게 이어졌다. 그가 카페 영수증 뒷면에 자신의 휴대전화 번호를 적어서 내게 준 기억이 내 안에서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연락하고 싶을 때 연락해요. 나는 그것을 조심스럽게 접어 지갑 안에 넣었다. 그러곤 그 뒤로 한동안 한 번도 펼쳐보지 않았다가 오늘에서야 그 영수증을 급히 펼쳐 유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전 두 시가 지난 시간이었다.

왜요?”

남자의 목소리는 조금 잠겨 있었다. 어쩌면 남자는 자고 일어났을지도, 아니면 나처럼 눈물로 오전 두 시를 보내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그것도 아니라면 차이코프스키겠지.

유리가 죽었어요.”

남자는 잠시 말이 없었다. 죽은 유리가 자신이 아니라 내가 키우던 금붕어라는 것을 깨닫는 데까지 아주 조금의 시간이 걸린 모양이었다.

왜요?”

모르겠어요. 유리는 제가 싫었나 봐요. 그래서 아예 가버렸나 봐요.”

나는 울지 않으려고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문득 유리는 갑자기 흰 배를 보이며 죽어있었다.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무얼 잘못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유리는 갑자기 내 곁을 떠났고, 나는 평소처럼 이름을 찾아가며 클래식을 듣다가 그것을 발견했을 뿐이었다.

유리의 투명한 지느러미가 마치 그 부분만이 살아있는 듯 물살을 따라 살랑이고 있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눈물방울을 뚝뚝 떨어트렸다. 그것은 수많은 유리들이었다.

있잖아요, 유리. , 이제 알 것 같아요. ‘유리하다는 게 뭔지 알 것 같아요.”

내 목소리가 너무 축축해서 내 것 같지가 않았다. 유리. 남자의 얼굴과 금붕어의 지느러미가 내 머릿속을 반복해서 지나갔다. 남자는 내 흐느낌을 들으며 내 입에서 나올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나는 슬프고 괴로웠다. 유리가 죽어서이기도 했지만 내가 느낀 이 유리라는 감정이 잘못된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 때문도 있었다. 두려움. 그 두려움을 한 꺼풀 벗겨내고 나면 보이는 그 감정이 바로 유리였다. 내가 보고 싶지 않았던 유리의 얼굴과 유리의 눈동자. 물과 같은 두 개의 유리.

유리가 들어있던 수조가 터져 내 발을 축축하게 적셨다. 내 눈물과도 비슷한 유리’. 방바닥에 내팽개쳐진 유리의 지느러미는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완전한 죽음이었다. 나는 깊은숨을 내쉬었다. 괜찮아요. 스피커에서 들리는 남자의 목소리는 바로 옆에서 내 어깨를 감싸 안으면서 하는 말 같았다. 나는 나도 모르게 이제야 이름 붙여진 나의 유리에 대해 털어놓았다. 남자의 목소리엔 그런 힘이 있었다.

외로워요. 나는 계속 외로웠어요. 그걸 이제야 알아버렸어요.”

괜찮아요. 외로워도 돼요.”

남자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나를 달랬다. 나는 내 모습이 남자에게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고개를 저었다. 흘러 내린 줄만 알았던 죽은 유리는 자세히 보니 여전히 수조 속에 둥둥 떠 있었다. 나는 유리를 어딘가에 버리거나 묻어줄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나를 감싸 안은 이 외로움처럼.

더 이상 유리하다는 말은 안 쓸래요.”

왜요?”

그러면 유리가 외로워지는 거니까.”

지영은 아직도 나를 좋아하지 않나요?”

그건그건 모르겠어요.”

이제 그게 그러면 유리한 감정이네요.”

남자의 말에 나는 눈을 끔뻑였다. 멎지 않은 눈물이 속눈썹에 맺혀 둥글게 떨어져 내렸다. 또 다른 유리가 생겨나고 있었다.

저는 그 유리가 좋아한다는 이름을 갖게 되면 좋겠어요.”

유리는 왜 그렇게 저를 좋아하는 거죠?”

“‘유리하기 때문이에요.”

그 말을 하고 남자는 작게 소리를 내어 웃었다.

그냥, 좋아졌어요. 자주 얼굴을 보다 보니까 그런가. 그러니까 저에게 유리하다는 좋아하다네요.”

나는 결코 떠올리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던 남자의 얼굴을 또렷하게 떠올렸다. 그렇지. 그의 눈꺼풀 어딘가에는 아주 작은 점이 있었지. 그리고 유리라는 자신의 이름을 말할 때 부드럽게 움직이는 입술이 있었지.

기다릴게요. 저는 지영을 떠나지 않아요. 유리는 아직 있어요.”

나는 유리의 말에 어떻게 답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어째서 유리는 그렇게까지 나를 기다리는지, 그리고 어째서 나는 유리가 그렇게까지 기다려주기를 바라는지. 그러나 지금 내 기분은 너무나, ‘유리했다. 나는 그래서 조금 더 눈물을 흘렸다.

 

(200*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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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프트 좀비물  #갑자기 삭제될 수도 있음

 

 

 

 

천사 케루빔은 신 앞에 선다

 

Y A G I

 

 

애인 있어요. 안은 박의 말을 몇 번이고 곱씹었다. 그때 아마 자신의 애인을 떠올리고 있을 터였던 그녀의 표정은 어떠했는가. 안은 도무지 그 얼굴을 기억해낼 수 없었다. 안은 그저 박의 애인 있어요, 하는 그 말만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래서 안은 그 목소리를 그렇게 오랫동안 복기할 만큼 그녀를 사랑했고 사랑하는가. 그렇게 생각하면 그것은 또 아니었다. 어쩌면 그 이상한 공간과 상황 속에서 안은 그저 마음 놓고 쉴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던 것일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것이 항상 혼자서 말도 없이 좀비들을 빤히 지켜보았던 박이었을지도.

안은 여전히 박이 준 유리 조각을 버리지 못했다. 굳은 피가 묻은 유리 조각은 안이 싸구려 팬시점에서 사 온 작은 박스 안의 새의 둥지 같은 종이 뭉치들 사이에 끼어있었다. 안이 직접 박과 그녀의 애인을 죽였던 그 유리 조각은 그렇게 의식적으로 방치되고 있었다.

 

 

 

 

실험실을 나가면 좀비가 된대. 점심시간이었다. 그들이 좀비를 접하지 않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그들 중 대부분은 꼭 좀비 이야기를 했다. 안은 주로 그런 이야기를 들어주는 편이었다. 그날도 그랬다. 안은 미간을 좁히며 그럴 리가 없잖아, 하고 그의 말에 답하곤 밥을 국에 말았다. 여기 와서 생긴 버릇이었다. 처음에는 넘어가지도 않는 밥을 억지로 삼키려는 목적이었지만 지금은 단순히 습관으로 굳어버린 것이었다.

, 국가 기밀 같은 거라서 발설할까 봐. 영화 보면 그런 일 있잖아.”

안은 남자의 말에 허, 하고 숨을 뱉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물론 들어올 때 기밀 사항을 밖으로 누출하지 않겠다는 서약서에 서명을 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좀비로 만들만한 나라는 아니었다. 아직은 살아있는 사람들의 인권은 보장하는 나라였으니까.

물론 죽은 자들의 인권은 보장되지 못했다. 애초에 그들은 인간이라기보다는 시체에 가까웠고.

나도 국가 기밀 하나 말해줄까?”

뭔데?”

너 이에 김 가루 꼈어.”

국가 기밀을 발설한 죄로 좀비가 되어야겠는데.”

안 그래도 이제 그 좀비 보러 간다.”

안은 의자를 뒤로 밀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같이 가. 남자는 안의 뒤를 따랐다.

좀비, 하면 요즘 사람들은 어기적거리며 걷은 좀비보다는 인간보다 훨씬 뛰어난 능력을 갖춘 좀비를 떠올리지 않을까. 달리거나, 매달리거나, 신체의 일부만 남아도 살아 움직인다거나. 하지만 현실의 좀비는 그와 달랐다. 본능만이 남은 썩은 짐승 같은 것들. 그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지만, 그렇다고 완전한 존재는 아니었다. 그들은 조금씩 죽어가고 있는 존재였다.

그렇게 생각하면 인간과 별로 다를 것도 없나. 안은 눈앞의 좀비를 바라보며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누군가가 우리도 살아가는 것이 아닌, 죽어가는 것이라는 말을 했던 것이 떠올랐다. 안은 여전히 그 말을 별로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오늘의 피험체는 여성이었다. 원래는 안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맡아야 했지만, 컨디션이 좋지 않다는 말에 안이 대타로 맡게 된 좀비였다. 포획되는 과정에서 떨어져 나간 팔 한쪽의 환부가 적나라하게 보였다. 현실의 좀비들은 그저 죽었다 살아난 시체였기 때문에 그다지 위험하지 않았음에도 안은 신체가 과도하게 손상된 좀비들을 왕왕 볼 수 있었다. 어쩌면 우리가 미디어에 길들여진 탓에 그들을 너무 강한 존재로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이겠지. 피험체는 안을 먹고 싶어서 이를 딱딱거렸지만 의자에 묶인 상태에서 안을 먹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런 좀비들을 데리고 실행되는 인지 실험이 좀비에 대해 알아가는 데 얼마나 도움을 줄까. 안은 이 모든 것들이 보고서에 인지 능력이 떨어짐이라는 아주 짧고 건조하나 문장을 쓰는 것 이상의 가치가 없는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해서 실험을 하지 않을 수는 없는 법이었다. 안은 실험을 위해 좀비의 앞에 간이 의자를 펼쳤다. 누군가 문을 힘없이 두드렸다. 들어오세요. 그때 안은 처음으로 박을 보았다.

박은 처음 보는 사람에 놀란 듯 잠시 굳어 있다가 옅은 갈색의 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안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안은 그녀의 창백한 피부를 보았다. 박은 이 실험에 자원한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런 것치고 그녀는 실험에 최소한의 성의 이상을 보이지 않는 편이었다. 그녀가 이 실험에 자원한 것은 단 하나의 이유였다. 피험체, 그녀에게는 절친한 친구였던 이 좀비가 죽는 과정을 마지막까지 보고 싶어서. 처음으로 그 보고서를 받았을 때 안은 박을 이해하지 못할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안이라면 과연 흉하게 한쪽 팔이 떨어져 나간 썩어가는 친구를 끝까지 보고 싶었을까. 안은 머릿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것은 살아있는 사람에게도, 죽었다 살아난 좀비에게도 끔찍한 일이었다.

어쨌든 그 끔찍한 일을 박은 하고 있었다. 박은 자신을 위해 준비된 의자에 앉아 좀비를 바라보았다.

안녕. 오늘도 찾아왔어.”

박의 목소리는 미묘하게 톤이 높은 편이었다. 안은 뒤늦게 녹음기를 작동시켰다.

나는 지난밤에도 네 꿈을 꿨어. 기억해? 우리 둘이 한겨울에 한강에 찾아간 거. 완전 얼어 죽을 뻔했다고, 내가 한여름에 에어컨을 켤 때마다 네가 그런 말을 했잖아.”

피험체는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이를 딱딱거리거나 주위의 모든 것들에 무의미한 시선을 던지거나, 묶여있는 몸을 숙여 자신의 발가락이라도 뜯어먹으려고 애쓰고 있었다. 피험체, 인지 능력 없어 보임. 안은 메모장에 미리 써둔 그 문구를 다시 한번 보았다. 박은 과거의 추억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었다. 안은 마치 남의 일기장을 들춰보는 느낌이 들어서 그렇게 유쾌하지 않았지만, 어쨌든 그것은 자신의 일이었기에 묵묵히 박의 말을 들었다.

박이 하는 말들은 정말로 사소한 일들이었다. 예를 들면 냉장고를 제대로 채워놓지 않았을 때 대신 마트 배송을 해줬다거나, 이전에 함께 본 영화의 감상이라거나, 네가 개를 무서워해서 지름길을 두고 빙 둘러간 이야기라거나.

실험자가, 이전에 개를 무서워했었나요?”

그의 질문에 박이 안을 돌아보았다. 박의 눈동자는 창백한 그녀의 피부와는 달리 예리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그 대비되는 인상이 안의 마음에 박혔다. 안은 그것이 아주 오래오래 갈 것이란 것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어렸을 때 개한테 물린 적이 있다고 그랬는데, . 팔이 없어져서 확인은 못 하겠군요.”

어쩌면 그것은 안과 이 시설을 비꼬는 이야기일지도 몰랐지만, 안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안은 무언가 말을 더 건네려다 이 모든 대화가 녹음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입을 다물었다. 박은 다시 자신의 이야기를 조곤조곤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이후에 안은 이 피험체의 담당이 될 수 있는지 슬쩍 자신의 상사에게 전했다. 나머지는 말랐는데, 배만 나온 남자가 느물거리며 웃었다.

그 여자가 예쁘장하게 생기긴 했지.”

그런 이유는 아닙니다.”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안은 자신의 가슴 한편이 뜨끈해지는 것을 느꼈다. 다만 안을 잡아끈 것은 그녀의 얼굴이 아닌, 그녀의 조곤조곤한 목소리였다. 안은 그녀의 목소리를 조금 더 듣고 싶었다. 어느 누구에게도 향하지 않은 그녀의 묵은 기억들을 조금 더 알고 싶었다.

안이 그 피험체의 담당이 되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창문을 통해 피험체를 바라보는 안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저 좀비도 심장이 뛰고 있긴 할까. 안은 문득 그것이 궁금해졌지만 굳이 알지 않으려고 했다. 심장이 뛰고 있다는 건 박이 한 얘기를 다 듣고 있다는 것과 같은 말이었으니까. 안은 박의 이야기들이, 저 좀비가 아닌 자신에게만 향하기를 바랐다.

 

박은 처음 이 시설에 들어왔을 때, 피험체, 그러니까 그녀와의 관계를 무어라고 적어야 할지 몰라 한참을 고민했다. 박과 그녀는 연인도 아니었고, 친구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섹스 파트너도 아니었다. 박은 그 세 단어 중에서 어떤 것을 적어 넣을지 오랫동안 고민했다. 박은 가장 먼저 섹스 파트너라는 가능성을 지웠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연인과 친구, 둘 중 하나였다.

박은 가장 먼저 연인이라는 단어를 쓰고 한참 동안 그것을 노려보았다. 박과 그녀는 수시로 사랑한다는 말을 서로에게 건네곤 했다. 박은 그것이 불쾌하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그녀와 나는 연인인가. 하지만 박의 마음 어딘가에서 자꾸 그것을 부정하고 있었다. 그녀가 나랑 연인이라니. 내가 누군가의 연인이 될 수 있다니.

불쾌하지 않은 것과 설렘은 분명히 달랐다. 사실 박이 그녀에게 뱉었던 사랑한다는 말은 그녀가 박에게 했던 말을 그래도 돌려주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박은 만약 자신이 좀비이고 그녀가 인간이었다면 그녀는 서슴없이 연인이라고 관계를 기술했을 거라는 생각을 하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박은 연인이라는 글씨가 보이지 않도록 그 위에 수많은 선을 그어 글자를 지웠다. ‘친한 친구’. 박이 결정한 그녀와 자신의 관계였다.

이 시설에서는 수많은 실험이 이루어진다고 했다. 그리고 그것은 향후 이 나라의 발전에 어마어마한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박은 그 말을 들으면서, 그것의 공은 어디로 가게 될 것인가에 대해서 생각했다. 적어도 자신이나, 좀비가 되어 목줄이 채워진 그녀가 받을 것 같지는 않았다.

박은 굳이 시설에서 다른 친구를 만들 노력을 하지 않았다. 여기 있는 지원자 모두들 누군가를 완전히 잃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그런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면 필연적으로 그들의 절절한 감정이 박에게 와닿았고, 박은 그것이 영 불편했다. 박은 그저 그녀와 자신의 관계에 대해 조용히 생각을 하기 위해 이 실험에 자원한 것뿐이었다. 죽은 그녀라면 사실 자신은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말 같은 걸 하더라도 그녀가 자신을 용서해줄 수 있을 것 같아서.

물론 박은 아직까지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 말을 하려고 할 때마다 숨이 턱턱 막혔다. 어쩌면 자신을 안이라고 소개한 그 남자 때문일지도 몰랐다. 박은 그 말은 단둘이 있을 때나 할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시설에서 그녀와 단둘이 있을 시간 따위는 주어지지 않았다.

대신에 박은 1인실 침대의 딱딱한 감각을 느끼며 그 말을 몇 번이고 말했다. 나는 너를 사랑한 적이 없어. 네가 지금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처럼. 그 생각을 하고 박은 바로 두 번째 말을 철회했다. 그녀라면 아직도 자신을 사랑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만약 좀비가 된 그녀가 글을 쓸 수 있거나 말을 할 수 있었다면, 그녀는 자신과 박의 관계가 연인이라는 말을 서슴없이 할 터였다.

박은 그녀에게 인지능력이 떨어진다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했다.

 

   “아마 오늘 실험이 마지막이 될 거예요.”

   실험 전에 개인적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안이 박을 찾아와 한 말이었다. 박은 그것이 그렇게 놀랍지도 않았다. 확실히 박과 그녀의 대화라고 할 수도 없는 방백은 어떤 성과도 보이지 못했으니까.

   “실험이 끝나면 그녀는 어떻게 되나요?”

   박의 질문에 안이 머뭇거리며 말을 꺼냈다.

   “다른 실험실로 옮겨질 거예요. 아마, , 신체적으로 조사를 하는.”

   “, 고문 같은 거요.”

   박은 말을 뱉고서야 자신이 안을 공격적으로 대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안에게는 아무 잘못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화풀이였다. 박은 그 순간 자신이 진심으로 싫어졌다.

   “고문. 그렇죠. 고문이죠.”

   부정할 줄 알았던 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박의 말을 긍정했다. 안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박은 그런 안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분명히 무언가 더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안은 그 말을 쉽게 꺼내지 않았다. 그 정도로 험악한 고문을 받는다는 뜻일까. 박은 안을 빤히 바라보며 그가 말을 잇기를 기다렸다.

   “저기요.”

   “.”

   “혹시 애인 있어요?”

   아, 이쪽인가. 박은 눈을 깜빡였다.

  “, 애인 있어요.”

   “역시그러시구나.”

   “여기에 있어요.”

   박의 말에 안이 머쓱하게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박을 바라보았다. 여기에 애인이 있다면 자신과 같은 실험자라는 것일까. 안은 어쩌면 그것 때문에 이 실험에 자원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가 그 생각을 바로 지워버렸다. 그럴만한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친한 친구였다. 안은 박을 바라보았다. 박의 기다란 속눈썹이 그녀의 눈 아래에 톱니바퀴 모양의 문양을 그리고 있었다.

   “그러면, 이따 실험실에서 봬요.”

   “저기, 잠시만요.”

   안은 박이 자신을 붙잡은 것이 기쁘기도 하면서, 그 이유를 알 것만 같아 조금은 슬퍼졌다. 분명히 자신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겠지. 그녀의 연인에 대한 이야기겠지. 여기의 사람들은 종종 실험자에게 죽은 이와 자신의 관계를 장황하게 늘어놓곤 했다. 실험자들은 보통 그 이야기를 열심히 듣는 척 하면서 건성으로 넘겼다. 이기적인 사람들. 안이 그들을 보면서 느꼈던 감정이었다.

   그러나 박은 살아있던 피험체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휴대폰을 들고 가도 되나요?”

   “그건 규정상 어려울 것 같아요.”

   “그러면, 뭔가 노래를 틀 수 있는스피커 같은 거는요?”

   안은 눈썹을 밀어 올려 다소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박을 바라보았다. 박은 담담하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좋아했던 노래가 있어요. 혹시 그걸 들으면 반응할까봐.”

   “그 사람이, 고문을 받는 걸 늦추고 싶은 거예요?”

   “아뇨.”

   박의 대답은 단호했다. 그러면요? 안의 물음에 박이 눈을 질끈 감으며 그 질문에 답했다.

   “그 사람이 저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궁금했을 뿐이에요.”

   ‘그 사람’. 안은 그 말이 마음속에 걸렸지만 이미 한 번 차인 상태에서 왜 자신의 애인을 그 사람이라고 부르느냐는 질문을 할 수는 없었다. 안은 호기심을 꾹 누르고 일과 관련된 이야기를 꺼냈다.

   “그 노래가 뭔데요?”

   “환희의 송가요. 베토벤.”

   “그 노래라면 저희가 준비할게요.”

   “알았어요. 고마워요.”

환희의 송가. 안은 박을 방을 떠나오며 자기도 모르게 몇 번이고 그 노래를 흥얼거렸다. 환희의 송가라는 제목만 들어도 익숙한 리듬이 머릿속에서 울렸다. 무엇에 대한 환희이고, 무엇에 대한 송가인지. 낯선 언어로 된 가사들이 어떤 뜻을 전하려하는지는 전혀 몰랐지만 안 역시 그 노래를 좋아했다.

박은 그 노래를 좋아할까. 애인이 좋아하는 노래라면 그녀도 좋아하겠지. 안은 피험체가 그 노래에 반응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애인의 목소리에도 반응하지 않았는데, 고작 좋아하는 노래를 틀어줬다고 반응할까. 하지만 안은 얇은 노트북에 그 노래를 다운받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안은 피험체의 반응보다 박의 반응이 더욱 궁금했다.

애인이 아닌 그 사람이 좋아했던 노래. 안은 자신이 마음이 여전히 흔들리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것도 오늘로써 끝일 것이다. 피험체는 노래에 반응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고 그러면 다음 과정은 완전한 죽음뿐이었다. 박을 만나는 것도 그랬다. 안은 이것이 사랑이 아닌, 그저 호감이었을 뿐이라고 자신을 다스렸다.

 

박은 항상 힘없이 노크를 하고 실험실 안으로 들어왔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고 안이 말했음에도 박은 습관이라며 항상 노크를 했다. 박은 오늘도 자신을 위해 준비된 의자에 앉았다. 피험체는 멍하니 안도 박도 아닌, 창문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은 네가 좋아하는 노래를 준비해 왔어.”

그 말을 하고 박은 안을 바라보았다. 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노래를 켰다. 무거운 현악기의 소리가 한꺼번에 쏟아졌다. 예상대로 피험체는 그렇게 뚜렷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노래가 울리는 곳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역시 인지 능력이 없는 건가. 안은 펜으로 메모장에 동그라미를 그렸다. 어쩌면 자신도 피험체의 반응을 기대하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그러면 박을 조금 더 오래 볼 수 있었으니까. 언제는 반응이 없기를 바랐는데. 인간의 사고라는 건 이토록 장황한 것이라고, 안은 혼자 쓰게 웃었다.

노래를 조금 더 뒤쪽으로 옮겨주세요.”

?”

뒤쪽에, 가사가 있는 부분을 들려주세요.”

박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조금 더 힘이 있었다. 안은 플레이어의 바를 조금씩 뒤로 옮겼다. 온갖 현악기와 관악기의 소리가 범람하고 있었다. 가사가 나오는 부분은 안의 생각보다 훨씬 뒤에 있었다. 노트북의 터치패드로 일곱 번이나 바를 옮겨야 그 부분을 찾을 수 있었다.

목소리가 두껍고 낮은 남자가 자신이 모르는 언어로 노래를 불렀다. 피험체는 그 목소리에는 그다지 반응하지 않았다. 안은 박이 짧게 한숨을 쉬는 것을 들었다. 바로 옆에 있는 노랫소리보다 그 한숨 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피험체가 반응을 보인 것은 안이 더 이상 의미 없는 이 노래를 끄려고 터치 패드를 조작했을 때였다. 피험체가 순간적으로 고개를 뒤로 꺾어 안을 바라보았다. 이 피험체는 그다지 공격성을 띠지 않은 좀비여서, 안은 그녀의 반응을 보고 순간적으로 몸이 굳었다.

피험체는 입을 뻐끔거리고 있었다. 나오지 않는 숨으로 노래를 따라 부르려 하는 것처럼. 안은 박을 바라보았다. 박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박의 긴 머리카락이 그녀의 얼굴을 가리고 있어 안은 박의 표정을 제대로 확인할 수 없었다.

안은 노래를 껐다. 피험체는 몸을 좌우로 흔들고 있었다. 마치 좋아하는 노래를 들었을 때 인간이 자기도 모르게 몸을 움직이는 것처럼. 환희의 송가. 안은 메모장에다 노래의 제목만을 적었다.

 

Freude, schöner Götterfunken Tochter aus Elysium

Wir betreten feuertrunken, Himmlische, dein Heiligtum

Deine Zauber binden wieder Was die Mode streng geteilt

Alle Menschen werden Brüder, Wo dein sanfter Flügel weilt[각주:1]

 

박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환희의 송가였다. 안은 녹음기를 껐다. 박은 분명히 그녀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다고 이야기를 했다. 즉 이 이후의 이야기는 실험과 전혀 관련이 없는 내용이라는 뜻이었다.

박의 목소리는 높고 아름다웠다. 박의 목소리는 정말로 환희에 가까운 것이라고 안은 생각했다. 박은 익숙한 리듬을 천천히 짚어나갔다. 안은 눈을 감고 박의 목소리를 들었다. 노래가 끝난 이후에도 박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안도 아무런 얘기를 하지 않았다. 방의 중앙에 묶여있는 피험체만이 몸을 흔들며 소리도 나지 않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이만 가볼게요.”

간이 의자가 덜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안은 박에게 묻고 싶은 게 많았지만 결국 박을 잡을 수는 없었다.

 

그 뒤로 아주 잠깐의 시간이 흘렀다. 좁은 어둠 속에서 안은 이어폰을 꽂고 환희의 송가를 듣고 있었다. 노래를 들을 때마다 박의 목소리가 자꾸 안의 머릿속에서 겹쳤다. 그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할 목소리였다.

그때 힘없는 노크 소리가 이어폰의 사이를 뚫고 안의 귀로 들어왔다. 들어오세요. 안은 노크 소리만으로도 그것이 박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박은 낮에 봤던 모습 그대로 안의 방에 들어왔다. 두 사람 중 어느 누구도 불을 켤 생각을 않았다. 어둠 속에서 박은 바퀴가 달린 싸구려 의자에 앉았다. 그녀가 앉자 의자에서 끽, 하는 소리가 들렸다.

안이 끼고 있던 이어폰에서 환희의 송가가 희미하게 흘러나왔다. 안은 얼른 음악을 껐다. 그러자 두 사람 사이에 무거운 고요가 내려앉았다.

저는 사실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어요.”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박이 말을 꺼냈다.

그 사람에게 사랑한다고 이야기를 하긴 했지만,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어요. 그 사람은 내 연인이 아니에요, 그렇다고 친구도 아니에요. 그러면 저에게 있어서 그 사람은 대체 어떤 존재였을까요.”

박이 쏟아내듯 말했다. 안은 도대체 어떤 말을 해줘야 할지 알 수 없어서 어둠 속에 묻혀있는 그녀의 얼굴을 멀뚱히 바라보기만 했다.

나는 그 사람한테 너무 미안했어요.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사랑한다고 말해버려서. 하지만 헤어지고 싶지는 않아서. 근데 그건 그 사람도 마찬가지였나 봐요.”

왜 그렇게 생각해요?”

애인의 목소리엔 자기 발가락이나 먹으려고 애쓰다가, 노래를 틀어주자마자 반응을 보였잖아요. 그 사람에게 있어서 저는 그 노래 이하인 거예요.”

그 말을 하고 박은 깊은숨을 내쉬었다. 박은 또다시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모든 인간은 형제가 되노라. 그대의 부드러운 날개가 머무는 곳에. 노래를 끝낸 박이 어두운 창밖을 보았다. 안의 방은 달빛조차 비치지 않는 구석에 있었다. 그걸 눈치챈 순간 박은 안의 방이 좋아졌다. 박의 방은 밤만 되면 달빛이 햇볕처럼 내리쬐는 곳이었다. 그 밝은 그림자를 볼 때마다, 박은 신 어쩌고 하는 것들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두려웠다.

근데 왜 이제 와서야 제가 그 사람을 사랑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을까요.”

그래서 박은 안의 방에 와서야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좀비 따위를 만들어 낸 신에게는 들려주고 싶지 않은 목소리였다.

제가 왜 하필이면 여기에 온 줄 알아요?”

안은 고개를 저었다. 어쩌면 단순히 박이 이 건물 안에서 아는 사람이 안 밖에 없는 걸지도 모르는 일이었지만.

그 사람도 안 씨에요. . 당신이 아는 안 씨는 몇 명이나 되나요. 저보다는 많겠죠. 저는 고작 그 사람이랑 당신 두 사람만 알고 있는데.”

박이 한숨처럼 말을 꺼냈다. 두 사람 사이에 다시 침묵이 이어졌다. 안은 할 말을 찾지 못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안의 눈에 비치는 것은 어둠밖에 없었다. 노래, 다시 불러줄 수 있어요? 오랜 생각을 끝낸 안이 간신히 뱉은 말이었다. 그러나 박은 고개를 저었다. 더는 그 노래를 부르고 싶지 않아요. 박의 말에 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에 텅 빈 창밖을 내다보던 박이, 지나가는 이야기를 하듯 안에게 질문을 했다.

좀비한테 물리면 좀비가 되나요?”

바이러스 감염으로 인해……. 아니, 이런 말이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 좀비에게 물리면 좀비가 돼요. 영화랑 똑같은 점이 있다면 그것뿐이에요.”

제가 좀비가 되면 어떨 것 같나요?”

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박은 입술을 놀리는 것을 그만두지 않았다.

나를 죽여줄 수 있어요?”

아뇨.”

노래, 불러줄게요. 죽을 때까지 그 노래를 불러줄게요.”

그래도, 아뇨.”

한 번만 그 사람을 다시 안아보고 싶어요. 안기면 저도 좀비가 되겠죠. 좀비가 되면 저도 저런 실험을 받나요. 들리지도 않는 말들을 듣다가 안 되면 실험대에서 잘리고 부서지는 거로 끝을 맞이하게 되나요.”

안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박이 한 말이 모두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죽은 자에게 인권이란 없었다. 먼 미래에는 생길지도 몰랐지만, 어쨌든 지금 당장은 없었다. 만약 박이 좀비가 된다면 그녀는 그녀의 말대로 말도 안 되는 인지 시험을 하다가 해부당해 죽을 운명이었다.

박이 그런 결말을 맞는 것이 옳은 일인가. 안은 과연 박이 그런 결말을 맞기를 원하는가.

혼란스러운 안과 달리, 박은 어디서 났는지 휴지로 둘둘 감싼 유리 조각을 꺼내 안에게 건넸다. 딱 안의 손바닥에 들어오는, 날카로운 유리 조각이었다. 안은 그 섬뜩한 단면을 바라보았다. 이런 거로도 사람은 죽었다. 썩어가는 좀비라면 더더욱 죽기 쉬웠다. 어려운 것이 있다면 안의 마음가짐이었다. 박이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마음가짐. 안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

이런 건 어디서 났어요.”

얼마 전에 좀비. 좀비 하나가 유리창을 깼잖아요.”

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드물게 과도한 폭력성을 보이는 좀비였다. 그의 부모에 따르면 생전부터 그는 그런 성향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때 얻은 것이 과거 기억이 좀비를 구성하는데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박은 자살을 위해 그중에서 가장 날카로운 유리 조각 하나를 숨겨왔다. 안과 박을 제외하면, 아무도 모르는 사실이었다.

그는 어떻게 됐나요.”

죽었어요.”

어떻게 죽었나요.”

군인들이 그의 머리에 총을 쐈어요.”

그래도 그는 해부되지는 않았군요.”

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평화로운 죽음이었다. 더 이상의 괴로움도, 아픔도 없는 인간과 다를 바 없는 죽음.

나를 사랑해줄 수 있어요?”

박은 안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총명한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도 빛나고 있었다. 안은 제 손안의 유리 조각을 한 번 더 바라보았다. 좀비에게 인권은 없어. 그들을 죽여도 살인죄 같은 게 성립할 리는 없었다.

물론 일자리에서 잘릴지도 몰랐지만. 안은 차라리 그러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안은 휴지 뭉치로 둘둘 쌓인 유리 조각을 꽉 쥐었다. 벌써부터 피가 배어 나오는 느낌이었다.

 

박의 연인은 목줄이 채워진 채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좀비라기보다는 그냥 시체에 더욱 가까운 편이었다. 가끔 먹을 것, 그러니까 인간이 앞에 있을 때나 본능에 따라 이를 딱딱거리는 그런 존재.

박은 그녀의 앞에 앉아 애틋한 눈빛으로 자신의 연인을 바라보았다. 평소라면 인간을 먹기 위해 허우적댔을 그녀도 지금은 잠잠히 박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이미 부드러운 날개들이 머무는 곳에 도달해 있는 사람 같았다. 박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박의 연인도 소리 없이 노래를 불렀다.

박의 눈동자에서 눈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나는 천국에 가지 못해도 좋아. 박이 웅얼거린 말이었다. 이곳에 있는 어느 누구도 천국을 원하지 않았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그저 끔찍하게 길고 긴 고요뿐이었다.

사랑해. 이번엔 진심이야. 진짜, 진짜 사랑해.”

박은 자신의 애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썩어가는 냄새가 났지만 그런 것쯤은 상관없었다. 이제 자신도 곧 썩어가기 시작할 테니까. 다시 땅으로 돌아가 결국엔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될 것이었으니까.

좀비들을 지배하는 것은 식욕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박의 애인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좀비는 인간을 물어뜯었고 인간은 통증 속에서 노래를 불렀다. 낙원의 딸들이여. 우리 모두 성소로 돌아가자. 돌아가자. 박은 어딘가 고장 난 것처럼 그 부분만을 반복해서 불렀다. 안에게 약속한 대로 그녀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안이 알지 못하는 언어로 된, 어떤 신에게 자신의 영혼을 바치는 그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안은 주먹을 꽉 쥐었다. 유리 조각 때문에 안은 마음이 아팠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안은 일자리에서 잘렸다. 그리고 그는 그 뒤로 다른 자리를 구하지도 못했다. 다행인 것은 좀비와 함께했던 실험실이 특히 급여가 높은 곳이었다는 것뿐이었다. 안은 법원에 갔지만 그가 죽인 것이 인간이 아닌 좀비이기 때문에 그에게 살인죄가 떨어지지는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모든 것은 당연하게 흘러갔다.

애인이 있어요. 안은 또 그 말을 떠올렸다. 안의 기억 속에 살아있는 박의 모습이었다.

이제 안은 환희의 송가의 가사가 독일어로 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그 가사의 내용을 이해하고 있었고, 다소 부정확한 발음이지만 박과 그녀의 애인이 좋아했던 부분을 따라 부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안은 더는 그 노래를 듣지 않았다. 가끔 그들을 죽인 유리 조각이 들어있는 상자를 무릎에 두고 그 노래를 부르기만 할 뿐이었다. 그날도 그랬다. 안은 검게 변색된 두 인간의 핏자국을 보았다.

오늘은 그들의 기일이었다. 좀비로서 죽은 날이 아닌, 인간으로서 죽은 날이었다.

안은 일인용 소파에 앉아 나지막한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안은 그들의 죽음을 어느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것이 그들의 죽음을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천사 케루빔은 신 앞에 서 있었다. 에덴동산에 더 이상 부정한 것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것이 안이 실낙원의 딸들에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하게 남은 것이었다.

 

(200*73.5)

  1. 환희여, 아름다운 신의 광채여, 낙원의 딸들이여. 우리 모두 정렬에 취해 빛이 가득한 성소로 들어가자. 가혹한 현실이 갈라놓았던 자들을 신비로운 그대의 힘으로 다시 결합시키는도다. 그리고 모든 인간은 형제가 되노라, 그대의 부드러운 날개가 머무는 곳에.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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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이

 

 

Y A G I

 

그 애는 학교 근처의 골목길에 서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가로등도 하나 없는 좁고 더러운 골목은 내가 하교를 할 때마다 종종 이용하는 길이었다. 유난히 찬바람이 불 때면 나는 그 골목으로 갔다. 그날도 그런 날이었다. 다들 잠시간 잊고 있었던 추위를 다시 떠올리며 미간을 좁히곤 하던 그런 날.

그런 날에 그 애는 그곳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내 존재를 눈치챈 그가 담배를 입으로 가져가다 말고 나를 불렀다. 그의 손끝에서 희미한 담배 연기가 밤하늘로 피어올랐다.

은우.”

내 이름을 어떻게 알고 있어?”

유명하잖아, .”

그랬나.”

나는 오른손으로 내 목 뒤를 쓸었다. 수많은 문신과 피어싱의 흔적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하긴, 한 번 보고 잊을만한 인상은 아니긴 했다. 그리고 그건 사실 그 애도 마찬가지였다. 그냥 그 애에게는 그런 게 있었다. 무뚝뚝하고, 조용하지만 사람의 시선을 끄는 그런 것이.

어쩌면 단순히 그가 입학 이후 줄곧 학년 일등을 놓치지 않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느껴졌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유명한 걸로는, 너가 더 그렇지 않아?”

그런가.”

그 애는 그렇게 말하며 담뱃재를 툭 털곤 반쯤 피운 담배를 입술로 가져다 대었다. 어둠 속에서도 그 애의 치아가 괜히 눈에 보였다.

우등생인 줄 알았는데.”

우등생은 담배 피우면 안 돼?”

그 애의 물음에 나는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생각해 보면 맞는 말이었다. 그래도 우등생이라면 어른들의 말을 꼭꼭 들을 거라는 이미지가 있는데. 그 애는 다시 한번 더 내 흥미를 잡아끌었다.

담배는 왜 피우는 거야?”

그냥. 피우고 싶어서.”

그게 돼?”

너는, 흡연은 안 하나?”

그 애의 질문에 나는 입을 꾹 닫았다. 수업에 들어가지 않거나, 가끔 근처 학교의 다른 사람들과 싸우다 경찰서까지 간 적은 있어도 담배를 피워본 적은 없었다.

안 하는 건 아니지만.”

하지만 그 애의 앞에서 나는 여태껏 담배를 피워본 적은 없다는 말을 할 수는 없었다. 그 애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내게 담배를 건넸다. 나는 선선히 그것을 받아들이고 필터 부분을 앞니로 깨물었다. 그 애가 손을 뻗어 담뱃불을 붙였다. 불어오는 바람 때문에 라이터의 불꽃이 혼란스럽게 흐트러졌다.

담배는 처음이었다. 나는 긴장으로 가득한 첫 번째 숨을 들이쉬었고, 곧바로 입안을 가득 채우는 연기의 맛에 캑캑거리며 결국 담배를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이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는데. 아직도 입안이 뻑뻑했지만 나는 그 애를 바라보았다. 그 애의 불꽃은 거의 필터 근처까지 가 있었다. 그 애도 담배를 바닥으로 떨어트리곤 발끝으로 담배를 짓이겨 불을 껐다. 마냥 무뚝뚝하기만 하던 그 애의 표정에 언뜻 미소가 비쳤다. 어쩌면 뿌연 연기에 내가 잘못 본 것일 수도 있었지만, 어쨌든 그 애는 처음으로 웃고 있었다.

안 하는 건 아니라며.”

오늘 일은 비밀이야.”

생각해 보고.”

그 애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나는 그 애가 바닥에 두었던 가방을 탈탈 터는 것을 바라보았다. 척 봐도 안에 책이 가득 들어있는 가방이었다. 가방을 메던 그 애가 아, 하는 소리를 내며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눈을 깜빡이며 그 애를 바라보았다.

학교에서는 서로 모른 척하는 걸로 하자.”

그렇지. 서로 귀찮아지니까.”

가끔 담배 피우고 싶으면 이리로 와.”

그 애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골목의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나는 그 애의 뒤를 바로 따르고 싶지 않아서 그 애가 기대어 서 있던 벽에 내 등을 맞댔다.

 

나는 오늘도 발작적인 기침을 뱉었다. 그 애는 이제 아예 소리를 내서 웃었다. 나는 그것이 나쁘지 않아 굳이 담배를 피우고 싶지 않은 날에도 그 골목에서 그 애를 기다렸다. 그 애는 매일 담배를 피우는지, 우리는 저물어가는 태양을 보며 입김과 비슷한 하얀 연기를 삼키고 뱉었다.

아직도 그래?”

너는 이런 걸 어떻게 피우는 거야?”

알려줄까?”

내가 고개를 끄덕임과 동시에 그 애의 입술이 내 입술에 닿았다. 나는 놀란 눈으로 그 애의 감은 눈을 바라보았지만 그 애를 밀어내지는 않았다. 우리의 첫 키스는 연기 맛이 났다. 나는 그 애와 입을 맞추며 연기의 맛을 오래오래 느꼈다.

어때, 이제 좀 피울만한 것 같아?”

나는 답하지 않았다. 그 애는 나를 바라보며 피우던 담배를 마저 태웠다. 이번에 그 애는 확실히 웃고 있었다.

. 우등생은 키스도 하면 안 돼?”

그런 건 아니지만.”

그러면?”

이제 담배 피울 수 있을 것 같아.”

내 말에 그 애가 즐겁다는 듯이 웃었다. 학교에서는 마냥 무뚝뚝하게만 보였던 그가, 지금은 완전히 살아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것이 퍽 기뻤다.

……나랑 할래?”

어쩌며 나는 조금 과하게 들떠 있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 애는 아무렇지도 않게 담배 연기를 뱉으며 입을 열었다. 그다지 놀랄 것도 없다는 표정이었다.

, 해본 적 있어?”

아니.”

나도.”

나는 단침을 삼켰다. 그 애가 평소보다 일찍 담배를 비벼 껐다. 좋아. 그 애의 대답이었다.

 

우리가 갈 곳은 둘 중 하나의 집밖에 없었고, 그중 부모가 집을 비운 것은 내 쪽이었다. 그 애는 자연스럽게 내 침대에 앉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나는 누군가를 집에 데려온 것이 처음이어서,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알지 못했다.

우리는 불을 끄고 어둠 속에서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 애의 입술은 아직도 연기 맛이 났다.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본능에 따라 서로를 찾았다. 그 애의 입술이 내 맨살에 닿을 때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느끼기에도 우리의 섹스는 어딘가 미숙했다. 더군다나 그 애의 이미지와는 너무 다르지 않나. 그래도 우리는 서로의 입술을 찾았고, 애써 신음을 억누르며 사랑한다는 말 따위는 없는 섹스를 했다.

, 냄새 되게 좋다.”

나는 모르겠던데.”

원래 자기 냄새는 자기가 모른다잖아.”

그 애는 내 팔을 베고 누워있었다. 그 애가 목을 쭉 빼고 내 목덜미에 얼굴을 가져다 대었다. 나는 몸을 살짝 뒤로 물렸다. 그 애와 이렇게 가까이 있는 것은 어딘가 낯설고 민망한 일이었다.

조금만 더.”

그러나 그 애는 내 허리를 잡아 끌어안았다. 우리는 서로의 품에 안겼다. 그 애는 내 쇄골에 자신의 뺨을 비볐다. 어린 동물이 어떤 종류의 애정을 갈구하듯이. 나는 그 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보기보다 그 애의 머리카락은 부드러웠다.

오늘 너희 부모님 오셔?”

그 애가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그 애의 머리를 쓰다듬는 것을 그만두었다.

아니.”

그럼 한 번 더 할래.”

두 번째 섹스는 처음보다 훨씬 좋아서, 우리는 서로의 몸을 조금 더 꽉 껴안았다.

 

재이야.”

우리 학교는 종종 체육관을 반으로 나눠 쓰곤 했다. 그 애의 반은 뜀틀 수행평가를 했고 우리 반은 배드민턴을 연습했다. 항상 그렇듯이 체육 교사는 오십 분의 수업 중에서 이십 분 정도만 학생의 곁에 있었다. 나머지는 자유 시간이었고, 그때까지도 운동을 계속하는 애는 거의 없었다.

그것은 그 애와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낡아빠진 배드민턴 채의 줄을 손톱으로 긁다가, 그 애의 옆으로 다가갔다.

옆에 앉아도 돼?”

그 애는 대답을 하지도, 고개를 끄덕이지도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냥 그 애의 옆에 앉았다. 그 애는 나를 흘끔 바라보지도 않았다.

뜀틀 넘는 거 봤어. 잘하더라.”

어려운 건 아니잖아.”

그 애가 책장을 넘기는 소리가 났다. 그 애의 반응에 지난밤의 섹스와 그 좁은 골목에서 담배를 함께 담배를 태웠던 일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것은 섭섭함이었다. 왜 그 애에게 섭섭함을 느끼는지도 모르면서, 나는 그 애가 나를 이렇게 대하는 것이 섭섭했다.

여기까지 와서 공부하는 거야?”

그거 말고는 딱히 할 것도 없으니까.”

이해가 안 돼.”

학교에서는 모른 척하기로 했었잖아. 사람들이 쳐다보고 있어.”

신경 안 쓰고 싶어.”

그래서, 용건이 뭐야.”

그 애가 드디어 책에서 눈을 돌리고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어떤 말이라도 해야만 했다.

왜 체육관 매트리스에서 하는 그런.”

불결해.”

아무래도그렇지.”

그 애는 다시 책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더는 할 말이 없어서, 멀뚱히 그런 그 애를 바라보았다. 그 애는 내 시선 따위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는 듯이, 체육 시간을 마치는 촌스러운 학교 종이 울릴 때까지 책장만 넘겼다.

 

그러면서도 그 애는 여전히 똑같은 자리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나는 인사도 없이 그 애의 옆에 앉았다. 그 애는 굳이 먼저 인사를 하지 않았다. 하늘을 바라보았다. 조만간 비라도 올 건지, 어두운 구름이 세상을 덮고 있었다.

재이는, 내 세계에서 멀어져 있는 것 같아.”

그래서?”

그 애는 흘끔 나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보면 섹스를 했을 때 그의 얼굴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학교 밖의 그와 학교 안의 그는 너무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나는 그 둘을 분리할 수 있을까. 그 둘 중 하나에게만 사랑받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네 세계로 들어갈 수 있어?”

네가 들어오는 거야?”

.”

그 애는 더 이상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 애의 손에 들린 담배는 아주 오랫동안 탔다. 그 애는 담배 연기가 그저 하늘로 날아오르는 것만 바라보았다. 그 애는 속삭이듯 말을 꺼냈다.

사실 나는 무서워.”

뭐가?”

내가 바뀔까 봐.”

바뀌는 게, 왜 무서운 건데?”

더 이상 내가, 내가 아니게 되는 것 같아서.”

그 애의 손에서 떨어진 담배가 바닥에서 엷은 연기를 내며 꺼져가고 있었다. 그 애는 평소보다 일찍 가방을 멨다. 나는 말 없이 그 애를 바라보기만 했다.

너랑 있으면 내가 바뀌는 것 같아.”

나는 이제 더 이상 그 애가 나를 보러 오지 않을 것이란 걸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 애의 뒷모습이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비는 그날 밤이 늦어서야 쏟아졌다. 나는 그 애와 섹스를 했던 침대에 누워 그 빗소리를 들었다. 그 애도 자신의 침대에서 나와 같은 소리를 듣고 있을까. 그 애라면 아직 잠자리에 들지 않을지도 몰랐다. 나는 그 애 생각을 했다. 그 애가 내 냄새가 좋다는 얘기를 했던 것이 기억나서, 나는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딱히 어떤 냄새가 나지는 않았다. 나는 그것이 조금 슬프기도 했다.

 

그 애는 항상 점심을 늦게 먹으러 갔다. 조금이라도 일찍 급식을 먹기 위해 줄을 서는 시간이 아깝다는 이유였다. 나는 슬쩍 그 애의 교실을 찾아갔다. 그 애는 왼손으로 턱을 괴고 오른손으로 영어 문제를 풀고 있었다.

그 애는 내가 온 걸 알고 있으면서도 나를 보지 않았다. 나는 그 애가 지문 속 어떤 문장 아래에 샤프로 줄을 긋는 것을 바라보았다. 자도 없는데 그 애는 아주 깔끔한 선을 그을 수 있었다.

나는 그 애 앞자리의,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누군가의 자리에 앉아 그 애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 애의 손가락이 문제집의 얇은 종이를 넘겼다.

재이야. 우리는 친구지.”

글쎄.”

그 애는 나를 보지도 않고 답했다.

그럼 애인?”

글쎄.”

그러면 그사이의 , 무언가인가?”

…….”

그 애의 샤프가 멈췄다. 그 애는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그 애의 어두운 회색빛 눈동자가 눈꺼풀 뒤로 숨었다가 나타나기를 몇 번 반복했다.

잘 모르겠어.”

나도.”

그 뒤로 우리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 애는 내 시선을 피하지 않았고 나 역시 그 애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줄을 서서 일찍 급식을 먹으러 간 아이들은 언제쯤 교실에 도착할까. 마음이 조금 급해진 나는, 손을 뻗어 그 애의 뺨을 쓰다듬었다.

너는 바뀌고 싶지 않다고 했지.”

.”

하지만 이미 바뀐 것 같은데.”

그 애가 한숨을 쉬었다. 나는 그 애의 뺨을 쓰다듬던 손을 거두었다. 그 애의 눈동자가 내 손끝에 따라붙었다.

그럼 어쩔 수 없겠지.”

의자가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났다. 그 애의 몸이 내 쪽으로 완전히 기울어져 있었다. 그 애의 팔은 그 애의 입술보다 한순간 늦게 찾아와 내 뺨을 쓰다듬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눈을 감았다. 이번 키스는, 연기 맛이 나지 않았다.

 

-

사실은 우타요모를 쓰려다 이건 도저히.. 캐해석이 아니다 싶어서 1차 비엘로 수정하게 된. . . . 그런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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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을 다루고 있음

 

 

이상기후

 

Y A G I

 

 

 

주위에 자살을 한 사람이 있니?

나는 그 질문에 순순히 예, 하고 대답을 하면서도 속으로는 학교 상담실을 향해 내가 아는 모든 종류의 욕을 쏟아붓고 있었다. 나이가 제법 든 상담 교사는 상담지의 한 항목에 또 동그라미를 그렸다. 저 부분에 동그라미가 그어지지 않을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나는 기도를 하듯 손을 모은 손을 유리 커버가 씌워진 테이블 위에 올렸다. 유리의 차가운 온도가 진득하게 손에 옮겨붙는 것이 느껴졌다.

혹시 종교가 있니?

내 손짓을 보고 상담 교사가 질문을 했다. 아뇨. 내 대답은 단호했고 상담 교사는 아까보다 훨씬 아래에 있는 항목에 동그라미를 그렸다. 그러면하고 교사가 말을 이었다. 믿지도 않고, 때문에 존재하지도 않을 신에게 지금의 내가 빌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이 끔찍한 상담 시간이 얼른 끝나기만을 비는 것뿐이었다.

죽지 않거나 죽거나 하는 일은 의례적인 상담이 끝나고 받는 과자를 초코파이로 고를 것이나 오예스로 고를 것이냐 하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냥 그 정도로 별 차이도 없었다. 어쨌든 그 둘 중에서 항상 내가 고르는 것은 초코파이였다. 물론 내가 먹을 것은 아니었고, 그냥 초코파이를 좋아하는 애가 있었다. 내가 초코파이를 고르는 것도, 죽지 않는 것을 고르는 것도 그저 그런 별 것 아닌 이유 때문이었다.

누군가는 우리 세대가 태어나서 별을 가장 많이 볼 세대라고 얘기했다. 그 말을 들으면서 나는 아마도 어쩌라고, 하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별이 아니라 다른 것, 예를 들면 우리 세대가 태어나서 물고기를 가장 많이 볼 세대라는 얘기를 들었으면 나는 그래도 그렇구만, 하고 넘어갔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별과 물고기는 달랐다. 살아서 바다를 헤엄치는 물고기와 죽으면서 지구로 떨어져 내리는 별은 달랐다.

우리 세대는 태어나서 유성을 가장 많이 보는 세대였다. 어둠이 우리의 어깨 위에 내려앉기 시작하면 그와 동시에 몇천 개나 되는 별들의 죽음이 우리의 눈앞에 펼쳐졌다. 그 광경은 퍽 아름다웠고, 그래서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기 때문인지 몰라도 그때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사라졌다. 사인은 모두 자살이었다.

매점 갈래?”

, 귀찮은데.”

나 자살 안 하려면 초코파이 전자레인지에 꼭 돌려먹어야 하는데.”

자살, 그게 뭔 대수라고.”

같이 가줄 거면서 너는 꼭 말을 그렇게 하더라.”

나와 유성은 아직 죽지 않은 사람들 중 하나였다. 유성은 내가 건넨 초코파이 포장지를 바스락거리며 예의 가느다란 눈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눈동자가 보이지 않아도 시선이 느껴지는 건 제법 신기한 일이라고, 나는 항상 그 애의 실눈을 봐왔으면서도 또 그런 생각을 했다.

나와 유성의 인연은 묘하게도 한여름, 시간당 최대 일만 개의 유성이 쏟아질 거라던 예보가 있던 날 밤에 시작되었다. 그때는 아직 별이 단체로 죽어가기 이전의 일이었고, 태어나서 한 번도 유성을 본 적 없던 나는 학교 운동장의 인조잔디 속 고무 입자의 따가움을 느끼며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많다던 유성은 다 어디로 간 걸까? 떨어지는 별은커녕 하늘에 붙어있는 별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날이었다. 나는 말라가는 눈을 껌뻑이며 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언제쯤 집에 돌아갈지를 생각하고 있었다. 유성은 여름 바람의 짭잘한 열기와 함께 그런 내 앞에 나타났다.

그 애는 내 근처에 서서 나와 마찬가지로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끝이 깔끔하게 떨어지는 애매한 길이의 단발이 그의 귀밑을 스쳤다. 목 아프겠다. 나의 첫 감상은 그것이었고 내가 그에게 했던 첫 번째 말은 별 떨어지는 거 못 볼 걸, 하는 그에게 하는 말이라기보다는 거의 자기 자신에게 하는 것에 가까운 말이었다.

그런가.

그는 뒤로 꺾었던 고개를 땅으로 숙여 나를 바라보았다. 그 하얀 얼굴이 그 밤중에도 유난히 또렷하게 보였다. 그 애는 나를 보고 얇은 입술을 움직여 미소를 지어 보였고 그래서 그의 오른쪽 볼에만 희미한 보조개가 패었다. 나는 몸을 일으켜 머리카락 사이사이에 들어찬 고무 조각들을 털어냈다. 그 애는 어째선지 내 옆에 무릎을 모으고 앉았다.

그러면 여기서 왜 이러고 있는데?

이제들어가려고.

날씨 덥다. 땀나는 것 같아.

미묘하게 합이 맞지 않는 대화가 이어졌다. 그의 목소리는 어딘가 톤이 높아서 인상적인 편이었고 때문에 나는 그와의 이상한 대화를 계속 이어갔다. 우리가 이야기를 나누는 새에 우리의 머리 위를 지나 작은 별이라도 하나 떨어지긴 했을까. 나는 가끔씩 그것이 궁금해지곤 했다.

나는 유성이야.

잘 부탁해, 하고 그가 내게 악수를 청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유성. 나는 그의 유성이라는 이름이 그날 그와 함께했던 대화 중에서 가장 이상한 지점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꿈을 아주 많이 꾸었고 그럴수록 우리는 더욱더 죽음에 가까워졌다. 잠을 자고 일어나면 이 세상에서 누군가가 또 사라져 있었다. 사실 그것은 하늘에서 별이 쏟아지기 이전에도 그래왔던 것일 테지만, 우리는 이제 와서야 그 미묘한 사실을 체감하곤 했다. 나 역시 이름도 지어줄 수 없는 아주 수많은 꿈을 꾸었고 종종 꿈을 꾼다는 사실이 두려워지면 잠을 피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하곤 했다. 그냥 우리 모두의 삶이 그랬다.

유성은 웬일로 점심 식사도 않고 교실 책상에 엎드려 잠을 청하고 있는 중이었다. 눈을 감았는지 떴는지 구분이 안 된다니까. 나는 그의 옆자리에서 마찬가지로 서늘한 책상에 뺨을 대고 그를 바라보았다. 냉방기에서 나오는 바람 소리가 마치 그의 숨소리처럼 느껴졌다. 세상이 이렇게 변했어도 우리의 삶은 어떻게든 그 이전의 궤도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그날따라 교실에 유성과 나 단둘만 남아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원래도 책상이 점점 줄어가는 교실이긴 했지만, 그날따라 이상하게 이 교실에, 이 지구상에 남아있는 인류라고는 그와 나 단둘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볍게 벌어진 유성의 입술 안에서 아주 부드러울 그의 혀를 본 것만 같아서, 나는 고개를 번쩍 들어 창밖을 바라보았다.

이 순간에도 하늘의 별은 줄어가고 있을 터였다.

세상은 점점 더 고요해졌고 그럴수록 유성과 나는 많은 이야기를 하곤 했다. 마치 그 비어있는 공간을 우리의 것으로 채우려는 듯이, 우리는 끊임없이 마른 입술을 혀로 적시며 말을 나눴다. 하지만 대부분의 대화는 그저 비어있었다. 우리의 말로 이 세상을 채우기엔 말이란 것은 너무 공허한 것일지도 몰랐다.

배고파.”

일어나자마자 한다는 말이…….”

뭐 보고 있었어?”

그냥, 하늘.”

하늘, 하고 유성은 내 말을 반복하며 고개를 돌려 나를 따라 파란 하늘을 보았다. 나는 어쩐지 유성이라면 내가 보지 않는 것들을 보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자 그 순간 유성과 나 사이에 알 수 없는 거리감이 생긴 것만 같아서 나는 조금 슬펐다.

무슨 꿈 꿨어?”

?”

안 꿨어?”

. 네가 죽는 꿈.”

뭐야, 그게.”

그의 말에 나는 웃어버렸다. 진짜 별것도 아닌 꿈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그에게 악몽을 꿨구나, 하고 말했다. 그의 꿈에서 나는 어떻게 죽었을까. 나는 그것이 궁금했지만 굳이 그에게 묻지는 않았다. 그 순간만큼은, 우리의 이야기 사이에 죽음이라는 단어가 끼어들지 않았으면 했다. 유성은 내가 죽었다는 꿈을 꿔놓고서도 나를 따라 씩 웃어 보였다.

그 순간만큼은 이상하게 세계가, 비어가는 하늘이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 감각을 아주 오래오래 가져가고 싶었다.

유성은 허물어지듯 다시 책상으로 엎어졌다. 점심을 일찍 먹고 돌아온 누군가가 교실의 뒷문을 열었고 복도의 열기가 내 팔꿈치를 가볍게 달궜다. 어제보다 가벼워진 세계 속에서 우리는 철제 사물함의 문을 또다시 열었고, 한동안은 반복되지 않을 역사를 배웠고, 쉬는 시간엔 가사를 제대로 알 수 없는 외국 가수 누군가의 노래를 나눠 들었다.

그날 밤 나는 유성의 꿈을 꾸었다. 그가 죽는 꿈은 아니었다. 나는 꿈속에서 우리의 첫 만남을 복기하고 있었고, 우리의 머리 위에서는 시간 당 일만 개의 별들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문득 죽고 싶을 때가 있었다. 유성은 자신의 체구에 맞지 않는 아동용 미끄럼틀에서 몸을 웅크리고 아주 짧은 거리를 미끄러져 내려왔다. 나는 그네에 앉아서 그가 몇 번이나 그 행동을 반복하는 것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내가 알지 못하는 재질의, 이상하게 푹신한 바닥이 내가 발을 한 번 까딱일 때마다 가볍게 아래로 꺼졌다가 다시 원래의 위치를 찾았다. 물 위를 걷는 느낌이 이럴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 나는 문득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차가운 강물에 나를 내던지기도 했고 내 방의 창문에서 꺼먼 아스팔트 바닥으로 추락하기도 했다. 나의 상상 속에서 유성은 내가 죽어가는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것을 깨달은 것은 아주 약간의 시간이 지난 뒤였다.

유성아.”

그는 미끄럼틀을 내려오며 나를 바라보았다. ? 우리의 머리 위로 아주 가느다란 햇살이 촘촘하게 쏟아지고 있었다. 나는 그 햇살 때문에 눈을 살짝 찌푸리며 유성을 봐야만 했다.

나랑 동반자살할래?”

싫어. 나는 죽을 때 혼자 죽을 거야.”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미끄럼틀에 걸터앉아 있던 유성은 몸을 뒤로 넘겨 하늘을 바라보았다. 가끔씩 아주 밝은 별이 죽을 때면 낮에도 하늘에 뭔가 반짝이는 것이 보일 때가 있었다. 지금도 그런 게 보이는 걸까? 나는 유성을 따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가 햇볕 때문에 눈이 따가워져 바로 고개를 숙여야만 했다. 대신에 나는 덤덤히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유성에게 말을 걸었다.

별 떨어지는 거 보여?”

아니. 아직도 그런 게 보고 싶어?”

그냥 태양도 언젠가 떨어질까 궁금해서.”

그거면 정말로 다 같이 죽겠네.”

너는 그 전에 자살해야겠다.”

내 말에 유성이 몸을 일으켜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나는 의미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어 그저 그의 시선을 마주 볼 뿐이었다.

내가 죽으면 좋겠어?”

아니.”

나는 언젠가 그 역시 죽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아니, 하고 답을 했다. 내 대답에 유성은 그냥 웃었다. 우리는 죽지 않을 수 있을까. 나는 언제까지 삶을 선택해서 지금처럼 유성의 모습을 볼 수 있을까. 유성은 미끄럼틀에서 내려와 내 뒤로 돌아와 내가 앉은 그네를 당겼다가 놓았다.

철이 절그럭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등에서 유성의 체온인지 햇볕의 따뜻함인지가 느껴졌다. 나는 가만히 앉아있었다. 나는 안 죽을 거야. 유성의 목소리가 바람처럼 귓가를 스쳤다. 나는 그때 응, 하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집의 방향이 완전히 반대였다. 어디선가 또 사고가 났는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소방차가 거리를 달려나가고 있었다. 나는 유성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러나 유성은 내게 등을 돌리고 떠나는 대신, 우리 집에 와보고 싶다는 얘기를 했다. 나는 우리 집에 다른 사람을 데려와 본 적이 없어 조금 낯선 기분이 되었다.

현관의 비밀번호를 꾹꾹 누르는 내 등 뒤에서 유성은 뭐가 그렇게 신이 났는지 제목을 모를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유성은 개인정보를 보호한다는 말을 하며 내게서 등을 돌리고 있었다. 우리 집은 14층이었고 복도의 난간에 기대어 아래를 내려다보는 유성이 위태로워 보여, 나는 공연히 유성아, 하고 그의 이름을 불러 그를 돌아 세웠다.

애들이 있었어.”

나는 어정쩡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세상에서도 아기가 태어나긴 할까? 생존 본능이 자극되면 인간은 이전보다 아이를 많이 낳는다는 말을 생각하면서도, 나는 이런 세상에서라면 자식을 낳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삶과 죽음이란 건 언제나 하나의 카드에 함께 있는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더 이상 카드를 뒤집는 놀이 같은 건 머리가 아파져서 하고 싶지 않았다.

유성은 나보다 먼저 현관을 넘어섰다. 뒤가 반듯하게 펴져 있는 그의 하얀 운동화가 현관의 구석에 놓였다. 우리는 나의 좁은 방에 몸을 구기고 앉았다. 음료라도 대접하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하면서도, 내어올 것이라고는 생수밖에 없어서 나는 그냥 유성의 곁에 앉았다.

애기 땐 귀여웠구나.”

유성은 벽에 걸려있는 내 어릴 적 사진을 보고 있었다. 내가 걸고 싶어서 건 것은 아니었고, 언젠가 부모님이 걸어둔 것을 떼어내지 않은 것뿐인 사진이었다. 이제 갓 돌이 넘은 어릴 적의 나는 그 검고 큰 눈동자로 카메라 렌즈를 아주 또렷이 바라보고 있었다.

네 첫 기억은 뭐야?”

그러면, 너는?”

맥락 없는 유성의 질문에 나는 유성에게 질문을 떠넘기곤 자신의 첫 번째 기억에 대한 생각을 했다. 보통 그런 것을 잘 생각하지 않지는 않은가. 본인이 질문해놓고 유성은 나와 마찬가지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잘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첫 번째 기억. 나는 기억의 강을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곳이 처음인가 싶으면 또 저 앞에 내가 기억하지 못했던 옅은 기억이 연못 속의 진흙처럼 질척하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제는 이것이 내 기억인지, 아니면 어디선가 전해 들었던 것을 내 것으로 여기고 있는 건지 헷갈리기 시작하는 시점에서 유성의 나긋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너를 처음 만난 날.”

농담이지?”

당연한 거 아니야?”

유성이 웃었고 또 그의 한쪽 볼에만 보조개가 생겼다. 나는 흠, 소리를 내며 입을 열었다.

나는 손에 돌을 쥐고 있었어. 왜 쥐고 있었는지는 모르겠는데, 그냥 돌이 손에 있었고 돌이 따뜻했던 것만 기억이 나네.”

되게 이상하다.”

그렇지. 첫 기억이라고 하면, 조금 더 뭔가 분위기 있는 느낌인데 말이야.”

내 말에 우리는 동시에 웃었다. 나의 공간에 유성은 아주 자연스럽게 녹아들고 있었다. 유성은 나와 자신의 교복이 아마도 사이즈가 같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했고, 우리는 목덜미에 붙은 태그를 확인하기 위해 서로의 셔츠 칼라를 뒤집었다. 우리의 셔츠는 사이즈도, 교복 회사도 완전히 같았다.

해가 지기 전에 돌아가 봐야 할 것 같다고, 유성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나는 그가 말끔한 운동화를 다시 신는 것을 보았다. 나는 그제야 유성의 제대로 된 첫 기억을 들은 적이 없다는 것이 떠올랐다. 내 질문에 유성은 다소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늘에서 별똥별이 떨어지고 있었어. 하나.”

그래서 이름이 유성이야?”

글쎄.”

유성은 또렷한 대답 대신 손을 흔들어 보였다. 하긴 그래서 이름인 것도 이상하지. 유성의 부모가 아닌, 유성의 첫 기억이었으니. 나 역시 유성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고, 처음 만났을 때보다 조금 더 자란 유성의 단발이 현관에서 불어온 바람에 살랑거렸다.

그날 밤 나는 내 이름이 인쇄된 비닐 재질의 약 포장지를 들고 비슷비슷한 하얀 알약 세 정을 바라보았다. 두 개는 자살을 막기 위한 항우울제였고 나머지 하나는 수면유도제였다. 잠을 자면 꿈을 꾼다. 꿈을 꾸면 죽을 것만 같다.

문득 죽음이 두려울 때가 있었다. 정확히는 죽는 과정이 두려울 때가 있었다. 유성우가 내리기 시작하면서 지금까지 숱하게 많이 봐왔던 죽음의 고통들이 주마등처럼 나를 스치고 지나갈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나는 다른 것보다 조금 더 작고 단단한 그 약을 포장지와 함께 쓰레기통에 버리곤 했다. 그날도 그런 날이었다. 그날 잠을 자면, 나는 또 말하지 못할 꿈을 꿔버릴 것만 같았다. 나는 약을 한 알 빼고 먹기로 했다.

항우울제는 너무 쓰고, 물에 잘 녹아서 나는 억지로 냉수와 함께 그것을 삼켜내며 우리는 어째서 죽지 않고 이렇게 쓴 것을 삼키며 살아남아야만 하는가를 생각했다.

 

잠을 자지 않는 날이 계속되었으면 싶었지만 살아있는 이상 우리는 잠을 자야만 했다. 불면에는 익숙해졌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턱을 괴고 멍하니 칠판을 바라보고 있었다. 해당 과목을 담당하던 교사가 자살을 해 자습 시간으로 수업을 때우던 날이었다. 아물아물 정신이 흐려지는 것이 느껴졌다. 잠을 깨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을 만큼 몸이 무거워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잠을 잔 날이 언제였더라. 그런 게 기억 날 리가 없었다.

나는 그저, 꿈에 유성만 나오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유성의 꿈을 꾼 날은 하루가 더욱 심란했다. 나는 꿈속에서 유성을 죽이기도 했고, 사랑하기도 했다. 우리가 꾸는 꿈이라는 게 다 그랬다. 납득할 수 없는 개연성 위에서 꿈의 이야기는 만들어졌고 나의 하루를 갉아먹었다. 나는 유성을 죽이는 꿈보다 유성을 사랑하는 꿈을 더욱 힘들어했다.

그런 날이면 유성의 짧게 자른 손톱이 더욱 깔끔해 보여서, 그의 목소리가 더욱 나긋하게 들려서 유성을 바라보기가 힘들었다. 고개가 책상으로 떨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 하고 내 이마와 책상이 부딪치는 민망한 소리가 나고 그래서 잠이 깨버렸으면. 그러면 좋으련만.

하지만 나를 깨운 것은 유성의 섬세한 손가락이었다. 편하게 자. 유성의 목소리가 돌아오는 정신에 섞여 흩어질 뻔했다.

자기 싫어.”

평생 안 잘 수는 없잖아.”

자살하면 평생 잘 수 있을 텐데.”

옆자리에 앉아있던 유성은 내 앞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고 보니 앞자리의 아이는 어디로 갔을까? 어제까지만 해도 살아있었던 것 같은데. 그렇게 친한 친구는 아니었지만, 집에 갈 때 안녕, 하고 인사를 했던 것도 같은데.

유성은 의자에 거꾸로 앉아 양팔을 내 책상 위에 올리곤, 그 위에 자신의 얼굴을 얹었다. 나는 그때 그의 눈동자를 처음으로 보았고, 지금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닌지를 생각했다.

네 꿈을 내가 없애줄 수 있을 것 같아.”

유성의 목소리는 아주 작고, 낮았다. 그의 목소리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여서, 나는 그의 낯선 눈동자를 마주 보았다. 그의 눈동자 안에서는 아주 작은 별무리가 펼쳐져 있었다. 그의 눈동자의 반짝임을 비유하는 게 아니라, 그냥 그의 눈동자 자체가 그랬다. 그의 보랏빛 홍채가 은은하게 반짝이며 내 까만 눈동자를 마주했다.

있잖아, 나는 지금까지 살면서 꿈을 꿔본 적이 없다.”

그가 평소처럼 눈을 접으며 웃었다. 그때 나는, 유성은 왜 저런 눈동자를 숨기고 다니는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 순간부터 이미 졸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의 눈동자에 담겨있던 별들이 아주 슬프게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은, 그래. 평소처럼 내리던 유성우가 그의 눈빛에 우연히 비쳐들었기 때문에 그랬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유성은 잘 자, 하고 말했다. 나는 아주 간만에 꿈도 없는 깊은 잠을 잤다.

나 배고파.”

나를 깨운 것은 유성의 말이었다. 나는 아물아물 돌아오는 정신을 서둘러 붙잡으려고 허둥댔다. 유성은 평소와 아주 다를 것이 없어 보였다. 유성과 했던 대화가 꿈이었나? 정말로 유성이 내 꿈을 없애줬을 리는 없는 일이었다. 나는 눈을 비볐고 유성은 손끝으로 피아노를 치듯 내 책상을 두드렸다.

교실은 비어있었다. 점심시간인 모양이었다.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자 요란한 소리가 내 아래에서 울렸다. 유성은 점심 메뉴가 자기 취향이 아니라고 매점이나 가자며 내 손을 잡아끌었다.

나는 꿈속에서 무성한 별무리를 본 것 같다고 유성에게 말했다. 유성은 내 말에 빙긋 웃으며 너는 항상 이상한 꿈을 꾸는구나, 하는 말을 했다.

 

이상한 꿈. 그날도 이상한 꿈을 꿨던가. 나는 어깨 위에 흐린 머리를 얹고 몽유병 환자처럼 늦은 새벽 거리를 걷고 있었다. 열대야 때문에 밤공기도 마냥 덥고 끈적이기만 했다. 나는 내가 모르는 거리를 걷고 있었고 이곳이 어디인지도 모르면서 나는 이 길의 끝이 어디로 향할지 알고 있었다.

내가 죽는 날은 과연 언제인가. 그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는 날들이었다. 나는 과연 살아도 괜찮은 존재인가. 삶에 이유 따위를 찾아봤자 답은 나오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집착하듯 그 질문을 물어뜯었다. 죽음을 선택한 사람들과 삶을 선택한 나 사이에는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 걸까.

나는 차가운 강물을 내려다보았다. 여름 강물은 언제나 불어있기 마련이었고, 그곳에는 유성이 비쳐 있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달이 없는 날에도 하늘이 밝았다. 셀 수 없이 떨어지는 별들을 바라보면서 나는 가족도 아닌 유성을 생각하고 있었다.

예전에는 별똥별이 떨어질 때 소원을 빌면 소원이 이뤄진다는 말도 있었지.

나는 애써 죽음 대신 그 말을 생각했다. 어쩌면 사람들이 자꾸 죽는 것도 그 때문일지도 몰랐다. 허튼 생각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먼저 간 사람들을 따라 소원을 빌었다. 적어도 유성만큼은 죽지 않게 해달라는 소원이었다.

돌아왔구나.”

아파트 현관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나의 부모가 아니라 유성이었다. 평소 보던 것보다 그의 모습은 조금 더 흐트러져 있었다. 그가 그곳에 있는 것이 꽤 의외여서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유성을 보았다. 다행이다. 유성이 숨이 많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네가 이번에는 진짜로 죽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러고 보니자살 시도할 때는 항상 네가 옆에 있었지.”

이번엔 조금 늦었네.”

, 안 떨어졌으니까.”

유성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나는 그를 걱정시킨 것 같아 괜히 머쓱했다. 우리는 집 근처 놀이터까지 걸었다. 저번에 유성이 아이들을 봤다는 곳이 여기일지도 모른다고, 나는 문득 생각했다.

우리는 편의점에서 산 초코파이 한 통과 함께 좁은 미끄럼틀에 몸을 욱여넣고 앉았다. 미끄럼틀에는 아주 낮은 천장이 있었고 우리의 둥근 무릎은 서로를 밀어내듯 닿아 있었다. 유성은 먼저 초코파이를 꺼냈다가, 그것을 내게 건넸다. 나는 단 것을 별로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그것을 받아들었다.

한동안 포장지가 바스락거리는 소리만 울렸다. 전에 없이 하늘이 맑아서 유성우가 떨어지는 것이 훨씬 뚜렷하게 보이는 날이었다.

너는 꼭, 초코파이만 먹더라.”

그냥……. 포장지가 좋아. 특히 빨간색이.”

촌스러운데.”

마시멜로우도 좋아. 오예스엔 마시멜로우 없잖아.”

그치. 오예스엔 없지.”

나는 그러면서도 흠, 소리를 내며 초코파이의 포장지를 바라보았다. 유성은 혹시라도 제 입술에 초콜릿이 묻어있을까 봐 손등으로 제 입술을 문지르고 있었다.

죽지 않아서 다행이다.”

그의 말에 나는 유성을 바라보았다. 유성은 그 말을 하지 않은 척, 아무렇지도 않게 초코파이를 씹고 있었다. 과자 가루가 그의 티셔츠 위로 떨어져 내렸다. 나는 그를 보면서 눈을 껌뻑이다가 까만 강물 속에서 그의 얼굴을 보고 왔다는 얘기를 했다. 죽으려고 강물을 봤는데, 그곳에 유성이 네 얼굴이 있었다고 나는 말했다. 하늘을 올려다보며 네가 죽지 않았으면 하는 소원을 빌고 왔다고 말했다.

내 말에 유성은 슬프게 웃으며 내 이름을 나지막하게 불렀다.

사람은 누구나 죽어.”

유성의 말이 너무 아파서, 나는 유성을 따라 초코파이를 하나 더 깠다. 역시 단맛은 내 입엔 별로였다.

 

자살 시도를 하고 살아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없던 일이 되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마치 지난밤에 그런 일이 없었던 양 행동했다. 추가로 교사가 들어오지 않은 수업이 많아서 우리의 시간표엔 이상할 정도로 자습이 많았다. 왜인지 자습 시간마다 교실을 돌며 감시를 하는 교감 선생님은 어째 아주 오래오래 살아계셨다. 우리는 그의 따가운 시선을 피해 이어폰을 한 짝씩 끼고 노래를 듣곤 했다.

나는 여전히 간혹 상담실로 향했고 학교를 다니는 학생 수가 조금씩 줄어들면서 나의 차례는 점점 더 빨리 돌아왔다. 내가 자살 시도를 했다는 말에 상담 교사는 자살 사고가 들 때 취할 수 있는 행동과 핫라인을 알려주었다. 과장을 조금 하면 이제 한 백 번쯤 들어본 말이었다. 그런 게 아무 소용도 없는 걸 알잖아요, 하고 한마디 하려다가 어쩌면 이런 행위가 그 상담 교사에겐 삶을 유지할 수 있는 것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는 바로 입을 다물었다.

자살을 하는 것은 그의 마음이었지만, , 나는 그의 삶을 그냥 엉망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다시 교실로 돌아왔을 때, 교실이 비어있어서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손에 들린 초코파이가 내 체온에 조금씩 녹아버릴 것만 같아 나는 그것을 일단 유성의 자리에 올려두었다. 유성은 어디로 갔을까? 나는 유성의 자리에 앉아 유성을 기다렸다.

어쩐지 눈물이 났다.

세상에 유성과 나 둘밖에 없는 느낌이었는데, 어째서인지 유성이 이대로 영영 사라져버릴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필이면 그의 이름도 유성이라서, 언젠가 땅으로 떨어져 내리다 대기권에서 불타 없어질 것만 같았다. 그 역시 하늘의 궤도를 벗어나지 못할 것만 같았다.

사람은 누구나 죽어. 그의 말대로였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유성은 나의 손을 떠나 죽는다. 우리 둘 중 하나는 서로를 버려둘 운명이었다. 나는 그것이 끔찍하게 싫었다.

유성아.”

교실 앞문을 열고 들어온 유성의 손이 젖어있었다. 나는 다행이다, 라고 말하는 대신 그에게 충동적으로 다른 말을 뱉었다.

나랑 죽자. 죽으러 가자. 유성아.”

뜬금없는 내 말에 유성은 멀뚱멀뚱 나를 바라보았다. 이것도 예의 자살 충동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나는 알 수 없었지만, 그의 자리에서 일어나 젖은 그의 손을 잡았다. 유성의 손은 차갑게 식어있었다.

나쁜 꿈이라도 꿨어?”

아니. 그런 거 아니야.”

그러면?”

유성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 정도 가지고는 그의 반짝이는 별빛이 보이지 않았다. 고개를 힘차게 가로 젓는 내 머리를, 유성이 쓰다듬었다. 내 마음속 어딘가가 녹아내리는 느낌이었다.

그냥, 이 세상이 싫어. 유성이 너를 잃는 것도, 너를 두고 가는 것도 싫어. 하지만언젠가 죽어야 한다면, 나는 유성이 너랑 같이 죽고 싶어. 내 욕심이겠지만.”

그렇구나. 내 말을 중간에 끊고 유성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성이 아주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바닥을 훑고 있는 그의 눈동자가 과연 무엇을 담고 무엇을 떠올리고 있을지 나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그의 입에서 나올 부정의 답에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그러면 도망가자, 우리.”

물기가 많은 유성의 목소리가 뚝뚝 떨어져 내렸다. 유성은 도망가자, 하고 그 말을 한 번 더 반복했다. 그 말을 하는 유성은 어쩐지 나를 대신해 울고 있었고 나는 발갛게 물든 그의 눈 밑을 엄지로 닦아내며 그의 어깨를 안았다. 유성의 눈물에 내 셔츠 칼라가 가볍게 젖었다.

유성이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어떻게 도망가자는 건지 나는 제대로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나는 유성의 그 말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우리는 그대로 학교를 빠져나왔다. 나는 뒤늦게야 유성의 책상에 두고 온 초코파이를 떠올렸지만, 이제 그런 것쯤은 아무 상관도 없었다.

갈 곳도 찾을 사람도 없어서 길을 헤매던 우리는 밤이 늦어서야 결국 우리가 처음 만났던 낯선 학교의 운동장에 도착했다. 그날처럼 우리는 인조 잔디 위에 주저앉았다. 그날과 다른 점이 있다면, 유성의 머리가 길어있다는 것과 하늘에서 점점 별들이 줄어가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우리는 떨어지는 별을 바라보았다. 궤도를 따라 불타오르는 별들이 하늘을 끝없이 빛내고 있었다. 유성이 내 쪽은 바라보지도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아직도 죽고 싶어?”

조금.”

그러면 우리 이렇게 매일 별을 보러 오자. 마지막 별이 떨어지는 걸 함께 보자. 그러고, 같이 죽자. 그때가 되면 같이 죽어줄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주에는 도대체 얼마나 많은 별이 있을까. 그것들이 다 떨어지려면 얼마의 시간이 걸릴까. 나의 생각보다 오래 걸리지 않을 수도, 생각보다 금방 끝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어쨌든 우리의 죽음은 그렇게 유예되었다.

유성의 죽음은 과연 어떨까. 어떤 죽음도 그에게 걸맞지 않는 것 같았다. 죽어버리기엔 그는 너무 맑은 사람이었고,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그를 더럽힐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나는 그냥 유성을 따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 나 너한테 궁금한 거 하나 있는데.”

뭔데?”

, 유성이란 이름 진짜 아니지.”

유성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전부터 이상하다 싶었다. 유성우가 떨어진다는 날에 처음 만난 애 이름이 유성이라니, 그런 장난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대답 대신에 유성은 작은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럴 것 같아?”

이제 더 못 속여.”

아깝다. 재밌었는데.”

진짜 이름이 뭔지 말해줄 수 있어?”

유성은 손을 까딱여 가까이 와보라는 신호를 했다. 나는 유성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가 아주 작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자신의 내 귓가에 자신의 이름을 속삭였다. 그 이름이 분명히 유성은 아니었지만, 어쩐지 지금 이 순간 하늘에서 떨어지고 있는 것과 비슷한 빛을 내는 이름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200*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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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물  #퇴고 봐서 다시 올림

 

 

 

메시아를 듣는 밤

 

Y A G I

 

 

1

 

그녀의 죽음에 내가 했던 그 말이 관련되어 있을까? 요즘 들어 그런 생각이 자꾸 들었다. 그녀는 사고로 죽었고,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가능성이 현저히 낮은 것이었지만 나는 도무지 그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아저씨는 이것을 나의 삶의 이유로 삼으라고. 그러니까 그녀의 몫만큼 내가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말을 했지만 사실 나에게 그 말이 크게 와 닿지는 않았다. 그녀를 대신해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떻게 살아간다는 것일까? 아니 그 전에 내 생각이 죄책감에서 비롯된 것이 맞을까? 그것은 그냥 내가 그녀를 기억하는 방식일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아무 문제도 없어지는 것일까.

나 왔다.”

내가 학교에는 오기 싫다고 그렇게 말했는데. 텅 빈 손을 무안하게 털고 있는 아저씨를 보자니 아저씨도 이제는 어느 정도 내 생각에 동감하고 있는 것 같았다. 거봐. 내가 괜히 학교 오지 말자고 그런 거 아닌데. , 그래도 지금 와서 누군가의 탓을 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우리들의 생존을 위한 약속이었다. 어떤 결정이 안 좋은 결과를 낳더라도 누군가의 탓을 하지 않기.

허탕 쳤나 봐.”

. 애초에 편의점에 장기 보관이 가능한 음식이 그렇게 많지도 않고. 조금 더 나가면 마트 하나 있던데 내일은 거기 가볼까 생각 중이야.”

예전에 여기서 누가 살았을까?”

지애 언니의 물음에 아저씨는 어깨를 으쓱하곤 책상 위에 걸터앉았다. 나무 책상이 뒤로 조금 밀리며 끼익, 소리를 뱉었다. 아무튼 수고했어요. 지애 언니의 말을 끝으로 우리는 더 이상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얇은 창문이 덜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겨울이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제 겨우 늦여름을 벗어났는데도 벌써 그런 생각이 들었다.

원시 사회로 돌아간 것 같아. 언젠가 지애 언니가 말했다. 그때도 아저씨가 먹을 것을 구하러 떠났을 때였다. 그때 우리는 지애 언니가 일하던 빵집에서 살고 있었다. 곰팡이로 뒤덮인 빵들을 모두 밖으로 내다 버렸음에도 빵집에서는 어쩐지 밀가루 냄새가 계속 났다. 우리는 빵집의 잿빛 타일 바닥에 앉아 서로를 껴안고 있었다. 빵을 진열하던 나무 진열대의 차가운 온도가 등으로 옮겨 붙고 있었다. 검은 핏자국으로 더러워진 창문으로 하얀 달빛이 비춰들었다. 그 사람들은 낮에 그렇게 다니면서 덥지도 않을까? 지애 언니의 목덜미에서는 짙은 땀 냄새가 났다. 나는 이제 그런 거 못 느끼지 않을까, 하고 답했다. 그것들을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나는 아직 그들을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힘들었다. 나나 지애 언니, 아저씨, 그리고 내가 기억하는 사람들과는 너무 다르니까. 그들은 영화 속에서나 보던 존재였다. 그들이 현실로 나타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던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을 것 같았다. 그들이 존재하는 세상이 너무나 끔찍해서 아무도 그런 상상을 하고 싶지 않아 할 것 같았다.

영화에서 본 것처럼 그들은 양팔을 앞으로 죽 뻗고 있지는 않았다. 아니 팔을 뻗는 것은 좀비가 아니라 강시였던가? 아무튼 그들은 그냥 발이 아픈 사람들처럼 발을 바닥에서 떼지 않고 걸었다. 그러니까 그들은 빠르게 걸을 수 없었다. 달릴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영화와 달리 그들이 달리지 않는다는 점은 정말 다행이었다. 그들이 달리기를 아주 능숙하게 할 수 있었으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우리는 아마 더 지금보다 더 살아남기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지애 언니는, 자살 시도를 하기 전에 그들에게 잡혀 찢겨 죽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나나 아저씨의 미래도 크게 다를 것 같지는 않았다.

그들은 가끔 문손잡이를 잡고 흔들곤 했다. 세로로 긴 나무 손잡이를 힘없이 흔들었다가, 덜컹거리는 문을 손바닥으로 쿵쿵 두드렸다가, 다시 문손잡이를 흔드는 일을 반복했다. 그때마다 새 모양 장식이 매달린 금색 차임벨이 딸랑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손님 같아. 지애 언니가 속삭였다. 그들이 돌아간 이후 우리는 빵집에 남아있던 종이와 네임펜으로 휴업이라는 두 글자를 크게 써서 문에 붙였다.

“‘CLOSED'가 더 낫지 않을까? 요새는 그거 더 많이 쓰잖아.”

걔들이 영어를 읽을 수 있을까.”

아저씨가 무릎을 꿇고 앉아 글씨를 쓰고 있는 지애 언니와 그걸 지켜보고 있던 나의 사이에 끼어들었다. 시큰한 땀 냄새와 밖에서 묻어나온 썩은 공기가 섞여 콧속으로 달려들었다.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냄새라 처음처럼 헛구역질을 하는 일은 없었지만 그래도 아직은 그 냄새가 조금 껄끄러웠다. 나는 자리를 왼쪽으로 살짝 옮겼고 아저씨는 쪼그려 앉아 지애 언니가 글씨를 쓰는 것을 바라보았다.

한글은 읽을 수 있어?”

몰라. 영어보단 낫겠지.”

그 말을 끝으로 아저씨는 잠을 좀 자야겠다며 가게 안쪽으로 들어갔다. 지애 언니는 막 붙인 종이를 손바닥으로 쓰다듬고 있었다. 나는 영어니 한글이니 하는 문제를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해가 뜨고 있었다. 어디선가 몸을 사리고 있던 그들이 다시 밖으로 기어 나올 시간이었다.

 

학교에서 우리는 2층의 한 교실을 거점으로 두고 살았다. 바로 옆에 우측 계단이 있는 2학년 교실이었다. 이곳을 거점으로 삼은 것은 간단했다. 창문이 그나마 덜 깨져있고, 크게 더럽지도 않고, 바로 옆이 계단이라 이동이 편하다는 것. 그리고 내가 다니던 학교라 지리를 잘 알고 있다는 것 때문이었다. 학교에는 의외로 그들이 많지 않았다. 다들 죽어서도 학교는 싫어하는구나……. 아주 본능적인 녀석들이야. 교실 문의 자물쇠를 잠그며 아저씨가 말했다. 낮에만 좀 조심하면 될 것 같아. 우리는 교탁과 책걸상을 이용해 바리케이드를 문 앞에 쌓았다. 사물함도 몇 개 가져다가 썼다. 그 모든 작업을 조용히 해야 한다는 점이 가장 힘들었다. 밤에 그들의 감각이 떨어진다 할지라도 주의해서 나쁠 것은 없었기 때문에. 이사를 끝낸 후 한숨을 돌리고 있었을 때 창밖에서는 시뻘건 태양이 제 모습을 뽐내기 위한 준비의 마무리를 하는 중이었다.

교실의 아이보리색 커튼이 너무 얇아서 교실 안이 환했다. 마트 가는 김에 창문을 막을 것도 가져와야겠어. 아저씨의 중얼거림을 귓가로 흘리며 나는 몸을 뒤척였다. 얇은 담요가 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를 막아주지 못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학교 다닐 때는 이 바닥에서 이러고 잠잘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었는데. 그녀도 지금쯤 밖에서 배회하고 있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녀와 내가 쓰던 삼 학년 교실은 일 층에 있었다. 나는 그 교실을 가까이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를 생각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녀의 흔적들을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에게 묻고 싶은 것들이 아주 많았다. 중학교 교복을 처음 입을 때는 어떤 기분이었는지. 어떤 날씨를 좋아하는지. 너도 다른 아이들처럼 고등학교는 공학으로 가고 싶은지. 너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그녀의 답을 듣고 난 뒤 나는 그녀에게 이렇게 말할 생각이었다. 중학교 교복을 처음 입을 때는 학교 교복이 좀 촌스럽다고 생각했어, 색깔이 이상해서. 나는 비 오기 직전에 물비린내가 나는 날씨를 좋아해. 나는 너와 같은 학교에 가고 싶어. 나는 너를 좋아해. 그녀와 조금 더 가까워지길 기다리며 아껴두었던 질문들이었는데.

그녀의 무덤은 과연 어디에 있을까? 나는 이제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그녀의 무덤으로 찾아가고 싶어졌다. 그녀의 텅 빈 무덤에 그녀 대신 내 죽은 말들을 매장하고 싶었다. 아니, 그녀는 어쩌면 묘지에 묻히기 전에 좀비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쪽 가능성이 더 클 것 같았다. 그렇다면 나는 이 말들을 어디에 묻어야 하는 것일까. 그녀의 무덤을 내 손으로 만들어주고 싶었다. 그녀가 돌아갈 자리를 만들어주고 싶었다.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녀가 다시 죽은 시체가 되었을 때 고요히 잠들 수 있는 장소를 만들어주고 싶었다.

아저씨는 피곤한지 코를 골았다. 지애 언니는 잘 자고 있을까? 지애 언니는 원래 잠을 잘 못 자는 편이었다고 그랬다. 예전에 지애 언니가 약국에서 파는 수면 유도제들의 이름을 읊어준 적이 있었다. 레돌민, 스피녹스, 슬리펠, 아론, 아졸……. 생소한 단어들이 지애 언니의 입에서 노래처럼 흘러나왔다. 레에돌미인, 스피이노옥스……. 그거 다 먹어봤어요? 서로 반말을 하자는 약속이 있기 전이라 그때의 나는 언니에게 존댓말을 했다. 지애 언니는 그 질문에 싱긋 웃기만 했다. 그러고는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약 이름을 읊을 때와 비슷한 음정이었다.

복도에서 발을 질질 끄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 중 누구도 이 교실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우리의 잠이 완벽하게 보장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마법 소녀가 변신할 때 괴물들이 건드리는 일이 없는 것처럼, 우리가 잠을 자고 있을 때는 그들이 공격하지 못하는 것이다. 마치 그것이 아주 불공평한 일인 것처럼.

아저씨의 코골이가 익숙해진 귀는 더 이상 그 소리들을 잡아내지 못했다. 나는 내가 잠을 자지 않기 때문에 그들이 이 교실에 들어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생각이 아주 어이없는 생각이란 것을 알면서도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머리를 제때 자르지 못해 제멋대로 자라기 시작한 머리카락이 뒷목을 자꾸 찔렀다. 나는 머리를 몇 번 가볍게 흔들었다. 문득 목덜미를 찌르는 것이 내 머리카락이 아니라 늦여름 햇볕인 것만 같이 느껴졌다. 나는 아저씨가 빨리 창문을 가릴 무언가를 찾아오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계속 눈을 감고 있었다.

 

2

 

손전등 불빛이 경비실의 노란 장판을 비췄다. 문이 닫혀있어서 아무도 못 들어왔나. 아저씨가 손전등의 고무 버튼을 누를 때마다 노란 불빛이 깜빡였다. 장판 위에는 파란색의 여름용 침구 세트가 널브러져 있었고 그 위에 하얀 먼지가 엷게 뒤덮여있었다. 이리저리 불빛을 휘둘러보는 아저씨 때문에 나는 눈앞이 조금 어지러웠다.

네가 말하는 그 애는 어떤 애였어?”

경비실 문손잡이를 돌리기 전에 아저씨가 슬쩍 말을 꺼냈다. 손전등 불빛은 이제 내 발밑을 향하고 있었다. 나는 커다란 무대 위에서 혼자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것처럼, 조금 부끄러워졌다.

그냥 음, 평범한 애였어. 머리가 길었는데, 지금 지애 언니처럼 매일 올려서 묶고 다녔고…… 아 키도 컸어. 키도 컸고…….”

눈에 그늘이 질 것처럼 속눈썹이 길었고, 쌍꺼풀이 아주 짙은 아이였고, 입술은 분홍색 장미를 말린 것 같은 색깔이었고, 복사뼈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튀어나와 있었고. 그녀가 살아있을 때의 모습을 떠올리자 심장이 강하게 뛰었다. 아랫입술을 잡아 뜯는 그녀의 하얀 앞니를 처음 보았을 때와 비슷한 박동이었다.

그러다 문득 그녀의 죽음이 다시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녀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죽었을까. 그 입술은 어떤 모양으로 벌어졌으며 그 둥그런 무릎 관절은 어떻게 뒤틀려 있었을까.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눈동자는 노란 햇볕을 담아내지 못했을 것이다. 바닥으로 흘러넘치는 그녀의 새빨간 피와, 여름 햇볕과, 그 날카로운 눈꼬리에서 떨어져 내릴 투명한 눈물 몇 방울과. 은색 자동차에 묻었을 그녀의 흔적. 그 흔적은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그 애도 학교를 싫어했어?”

, …… 공부를 잘했으니까, 좋아하지 않을까?”

공부를 잘하는 것과 학교를 좋아하는 것에는 아무런 연관성도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그렇게 답을 했다. 아저씨는 음, 소리를 내더니 경비실의 문을 열었다. 데려다줄게. 나는 아저씨의 손을 잡고 경비실 옆의 계단을 올랐다. 어둠에 뒤덮인 계단은 밟을 때마다 뒤틀리는 소리를 뱉었다. 1층과 2층 사이의 층계참에서 나는 그 아래를 한 번 더 내려다보았다. 계단의 끝은 벌써 어둠에 잠겨 있었다.

그 애는 지금 어디 있을까?”

나는 그 말을 듣고도 못 들은 척, 교실의 문을 열고 바리케이드 밑으로 기어들어갔다. 그녀는 무덤 속에 있으면 했다. 아니면 화장되어 뼛가루로 납골당에서 죽은 시간을 보내고 있던가. 우리는 햇볕 아래서 썩어가는 그들의 모습을 너무 많이 보았고 나는 그녀가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랐다. 그녀가 더 이상 흉해지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아서.

도움 될 만한 것이 있나 찾아보러 가겠다던 지애 언니는 아직 돌아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어두운 달빛이 교실바닥을 쓸었다. 나는 바닥을 더듬어 라이터를 찾았고 그것으로 양초에 불을 피웠다. 발간 불빛이 달빛을 밀어내고 미미한 온기를 주위로 천천히 퍼트리고 있었다.

아저씨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정장을 입고 있었다. 아저씨는 자신이 공무원이라고 그랬다. 아저씨는 그 일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그랬고 그래서 사람들을 구하지 못한 자신이 너무 꼴 보기 싫다고 그랬다. 너무 무서웠다고 했다. 자기는 무서운 걸 싫어해서 공포 영화도 못 보는데. 지애 언니가 그때 빵집의 문을 열어주지 않았더라면 아마 자기는 그 앞에서 죽었을 거라고 그랬다. 그리고 그건 지애 언니도 마찬가지였고.

지애 언니는 문손잡이에 포장용 리본을 묶을 생각이었다고 했다. 모아뒀던 수면 유도제를 한꺼번에 먹고, 거기에 목을 맨 채 앉거나 누우면 편하게 죽을 수 있지 않을까. 녹색이 좋을까, 붉은색이 좋을까? 두 가지 색의 끈을 손에 쥐고 끈의 색을 고르고 있던 지애 언니의 눈에 아저씨의 모습이 비쳤다고 했다. 지애 언니는 마치 만화처럼 아저씨의 얼굴에서 자신과 똑같은 얼굴을 발견했을까? 그것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어쨌든 지애 언니는 문을 열었고, 아저씨는 멀리서 다가오는 좀비들을 한 번 바라보았다가, 누구에게 초대받은 것처럼 실례합니다하고 빵집 안으로 들어갔다고 했다. 아저씨는 지애 언니 손에 들린 끈들과 바닥에 떨어져 있는 약통을 보고 상황을 얼추 눈치 챘으나 아무 말 하지 않았고 지애 언니는 그런 아저씨에게 크림빵 하나를 가져다주었다고 했다. 좀비들은 크림빵을 한입 베어 무는 아저씨를 빵집의 커다란 창밖으로 바라보고 있었다고 했다. 아저씨는 마치 연극배우가 된 것 같은 느낌을 받았고, 그때 아저씨의 역할은 크림빵을 먹으며 눈물 흘리는 생존자인 것 같았고, 그래서 아저씨는 크림빵을 먹으며 굵은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나는 손톱을 세워 바닥에 굳어있는 촛농을 떼어냈다. 지애 언니와 함께 언니의 수면 유도제를 구하기 위해 약국으로 갔을 때 그 얘기를 들었다. 아저씨와 지애 언니가 처음 만난 이야기. 지애 언니는 약들이 늘어져 있는 찬장에서 수면 유도제를 잔뜩 긁어모으고 있었다. 이제는 필요 없어져 모두 빵집에 버리고 온 것들이었지만.

네게 문을 열어준 것은, 지애 씨가 내 생명을 구해준 것에 대한 보답이었어.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어.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으면 다른 누군가를 도와주는 방식으로.

정장 바지가 헐거워져 벨트를 꽉 조여 맨 모습이 우스꽝스러웠던 아저씨는 낮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나는 과연 누군가의 생명을 구할 수 있을까. 갑자기 어깨 위로 이 세상이 내려앉은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언젠가 쓸 일이 생길지도 모르는 밴드를 주워 주머니에 쑤셔 넣는 것뿐이었다. 이 밴드 하나가 누군가를 살릴 수 있을까? 그보다는 한 번도 쓰이지 못하고 내 주머니 안에서 썩어갈 가능성이 더 클 것 같았다.

, 와 있었네. 이것 좀 들어줄래?”

교실 문이 열림과 동시에 지애 언니의 목소리가 바리케이드를 넘어서 들어왔다. 지애 언니의 하얀 손과 함께 바리케이드 위에 올라앉은 것은 구식 스피커였다. 잠자리의 눈 같은 커다란 스피커가 두 개 붙어있는, CD 뿐만 아니라 카세트테이프까지 넣을 수 있는 스피커가 책상 위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음악실 갔다 왔어?”

품 안에 안긴 스피커가 묵직했다. CD를 넣을 수 있는 곳에 매직으로 쓰여 있던 음악실이라는 글자는 거의 지워진 상태였다. 음악 수업 들으면서 한 번도 쓰는 걸 못 봤는데. 교실 안으로 들어온 지애 언니가 길게 숨을 내쉬었다.

교무실에서 마스터키를 찾아서. 음악실 말고 다른 곳도 들렀다 오려고 했는데 이거 너무 무거워서 그냥 들어왔어.”

이거 쓸 수 있을까? 학교 전기 안 들어올 텐데.”

건전지로도 돌아가는 것 같더라구. 너희 학교 건데 한 번도 안 써봤어?”

나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장이 났으면 어떡하나 싶으면서도 나는 그 스피커를 고이 품에 안았다. 지애 언니는 그런 내 팔목을 잡아 끌어 창가까지 데리고 갔다. 지애 언니 손이 들린 종이 가방 안에는 CD, 카세트테이프나 뭐 그런 것들이 들어있을 터였고 언니는 전리품을 자랑하고 싶었을 것이었다.

음악 선생님은 까탈스러운 분이었다. 특히 청결에 관해서는. 예전에 친구들과 음악 선생님이 결벽증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얘기를 나누기도 했었다. 공기청정기가 항상 돌아가고 있는 음악실에서 수업을 시작하기 전 선생님은 항상 손톱 검사를 했다. 그 선생님에게 손톱이 긴 것은 불결한 것이었고, 불결한 사람에게 돌아가는 것은 회초리였다. 손가락의 두 번째 마디를 정확히 노려서 내려치는 가느다란 회초리. 아이들 중 맞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그래서 대부분의 아이들은 그 선생님을 자연스럽게 싫어하고 있었다.

음악실이라 그런지 확실히 클래식 앨범이 많더라구. 클래식 좋아해?”

유명한 것밖에 몰라. 엘리제를 위하여나, 뭐 그런 것들.”

으응, 비슷하구나.”

일단 커버가 예쁜 것들 위주로 가져왔는데. 지애 언니는 CD들을 하나씩 바닥에 내려놓았다. 우리는 촛불 가까이에서 영어로 쓰인 그 이름들을 하나씩 읽어 내려갔다. 베토벤, 헨델, 비발디처럼 한 번에 읽을 수 있는 이름들도 있었고 쇼팽처럼,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 하며 기억을 더듬어나가야 하는 이름들도 있었다. CHOPIN이라는 얇은 갈색 글씨가 너무 낯설어 나는 앨범을 정리하며 그것을 일부러 제일 아래쪽에 두었다. 쇼팽이니 쵸오핀이니 하는 것들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될 것만 같았다. 그 생각이야말로 지금 이 상황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생각일 텐데.

그리고 음악실에 이런 것도 있더라구.”

지애 언니의 손에는 카세트테이프 몇 개가 들려 있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그것들을 하나하나 뜯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지애 언니의 손에서 그것들을 넘겨받았다. 요새는 음악 수업에서 트로트도 배우니? 지애 언니의 목소리가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음악 선생님과 트로트. 어떻게 보면 이상하고 어떻게 보면 전혀 그렇지 않은 조합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은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와 트로트가 잘 어울리나? 지금이야 긍정적인 답을 바로 할 수 있지만 그땐 그녀가 트로트를 좋아한다는 사실이 당황스러울 만큼 이상하게 느껴졌다. 발라드나, 클래식이나 뭐 그런 것을 좋아할 것처럼 생겼는데. 음악 선생님과 트로트에 대한 이야기를 한창 나누는 그녀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차라리 헤비메탈 같은 노래를 좋아한다고 하는 게 덜 이상하겠다. 나는 두 사람의 대화에 끼이지 못해 책상의 나무 무늬만을 쳐다보았다. 나무 무늬 시트지의 규칙성을 발견했을 무렵 그녀가 미안해, 하며 다가왔다. 너를 두고 너무 많이 이야기했지.

아냐, .

내가 그녀에게 아쉬운 소리를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녀의 볼이 조금 상기되어 있는 것도 같았다. 아마 그건, 음악실 히터의 온기 때문이었겠지. 우리는 평소처럼 점심을 같이 먹었고 그때 메뉴는 제육볶음이었다. 그녀는 항상 제육볶음을 밥과 함께 비벼 먹었다. 제육볶음의 벌건 기름장을 밥에 골고루 묻히며 그녀는 자신이 트로트를 좋아하는 이유에 대해 말했다. 아마 나를 빼두고 음악 선생님과 이야기를 한 것이 계속 신경 쓰였을 것이다. 크게 특별한 이유는 아니었다. 그녀는 할머니 손에 자랐고, 할머니는 트로트를 좋아했고, 어렸을 때부터 그녀는 트로트를 듣고 부르면서 자랐고. 뭐 그런 이야기들.

그날 저녁 집으로 돌아와서 그녀가 좋아한다고 말했던 트로트들을 들어보았다. 어딘가 익숙한 리듬과 싸구려 가사. 이것들을 들으며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할까? 나는 이어폰을 낀 채 모니터 앞에 엎드렸다. 이 노래에는 그녀의 어떤 추억들이 들어 있을까? 나는 그녀와 내가 이어폰을 나누어 끼고 트로트를 같이 듣는 상상을 했다. 그녀는 봄에 어울리는 하얗고 얇은 치마를 입고 있었고 나와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스스로가 뱉어낸 이산화탄소 때문에 머리가 몽롱해지는 것만 같았다. 나는 그녀가 트로트를 들으며 할머니가 아니라 내 생각을 해주었으면 했다.

지금 내가 카세트테이프를 보며 그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처럼. 나는 지애 언니의 손에 다시 카세트테이프를 들려주었다. 손끝에 테이프의 오돌토돌한 느낌이 아직 남아있었다. 나는 그녀가 부르는 트로트를 듣고 싶어졌다. 그녀와 함께 싸구려 가사들을 읊으며 아무 문제 없는 날들을 보내고 싶었다.

우리 학교로 오기 전에 만났던 사람들 기억해? , , 좀비가 신인류라고 말하던 사람들.”

지애 언니는 나를 보며 싱긋 웃었다. 달빛 때문인지 안 그래도 하얗던 지애 언니의 얼굴이 더 하얗게 보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지애 언니는 말을 이었다. 그 사람들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하고.

휴업이라고 쓰여 있는 종이가 붙은 이후로 그들은 빵집의 문을 한 번도 흔들지 않았다. 더 이상 옅은 잠을 방해받을 일이 없어졌다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와 동시에 우리는 더 이상 음식을 구해올 수 있는 곳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빵집에서 보낸 마지막 잠은 고요했다. 우리 모두 아무런 꿈도 꾸지 않았다. 지애 언니마저도. 우리는 빵집을 떠나며 문에 붙여두었던 종이를 그동안 감사했습니다라고 쓴 종이로 바꿔 붙였다. 빵집이 없어져서 그들이 슬퍼할까? 어쩐지 그들은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우리는 빵집의 차임벨을 마지막으로 울리는 인간일 것이다. 달이 밝은 밤이었다. 우리 짐은 많지 않았다. 얼마 남지 않은 음식들과 빵집 카드키뿐이었다. 지애 언니는 카드키만은 도무지 버리지 못하겠다고 말했다. 그 많은 수면 유도제들은 버리고 왔음에도. 나는 지애 언니가 버린 수면 유도제 위에 약국에서 챙겨두었던 밴드를 올려놓고 나왔다.

오늘 밤 안에 학교에 도착하려면 서둘러야 했다. 학교가 그렇게 멀리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곳에서 지낼만한 곳을 찾고 바리케이드를 만들고 하는데 시간이 적게 걸리지는 않을 것 같았다. 아저씨는 혼자 다닐 때보다 더욱 긴장한 모양이었다.

그 사람들을 만난 것은 저 멀리 학교가 눈에 보이기 시작했을 때였다. 어디선가 노랫소리가 들렸다. 어쿠스틱 기타의 현이 밤공기를 울리고 있었다. 우리는 우리 말고도 누군가가 살아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생존자가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못했다. 좀비들은 소리를 듣지 못하는 걸까? 그들의 감각이 생전보다 훨씬 떨어져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아예 가능성이 없는 소리는 아닌 것도 같았다. 우리는 노랫소리의 근원을 찾기 위해 귀를 기울였다. 우리가 텅 빈 골목을 울리는 소리의 시작을 찾았을 무렵 노래는 마지막 가사를 뱉어내고 있었다.

그 사람들은 몇 명이나 될까? 열 명? 열다섯 명? 그들은 기타를 치는 사람을 중심으로 두고 자그마한 원을 그리고 있었다. 그들 중 몇 명은 횃불을 들고 있었다. 그것으로 근처에 다가오는 좀비들을 쫓아내는 것 같았다. 그들의 모습은 버스커와 관객의 관계를 떠올리게 했다. 비록 관객이 그렇게 많아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것은 그들에게 그렇게 문제가 되는 일은 아닌 모양이었다.

가운데 앉아있던 남자가 마이크를 끌어당겼다. 과연, 공연의 클라이맥스였다. 우리는 남자에게 가까이 가지 않았지만 남자는 우리의 기척을 눈치 채기라도 한 것처럼 우리 쪽을 바라보고 말을 하기 시작했다. 신이 인간에게 삶의 제2부를 열어준 것이라고. 우리는 신의 뜻을 겸허히 받아들일 것이라고. 신의 뜻은 내일 밤에 이루어질 것이라고 그가 말했다.

가까이 가지 말자.”

저 사람들 죽겠다는 거야?”

.”

아저씨는 그들에게서 바로 등을 돌렸다. 그 남자를 감싸고 있던 사람들의 짧은 박수가 이어지고 그는 다시 노래를 시작했다. 학교는 아까보다 조금 더 흐릿해져 있었다. 그가 부르는 노래를 계속해서 듣고 있다간 저기 있는 학교가 더 흐려질 것만 같았다. 나는 지애 언니의 손을 잡고 아저씨의 등만 보고 걸었다. 찬송가를 가사만 바꿔서 부르는 것 같아. 나중에 지애 언니가 해준 말이었다.

그 사람들 죽었을까?”

죽지 않았을까?”

어떻게 죽었을까?”

그러게. 나는 머릿속에서 몇 가지의 죽음을 생각해보았으나 그것을 굳이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그것은 지애 언니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그 사람들이 좀비에 물려 죽지만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니, 나는 그냥 그 사람들이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계속 살아나갔으면 좋겠다. 어떠한 방법으로도 죽지 않고 버텼으면 좋겠다. 사람이 죽는 것은 항상 끔찍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세계라도 그랬다.

잘 있었나 보네.”

우리가 더 대화를 잇기 전에 아저씨가 교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저씨는 바리케이드 아래로 기어오는 것을 힘들어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저씨는 덩치도 크고 정장도 입고 있으니까. 책상들의 사이에 끼인 발목을 빼내며 아저씨가 긴 숨을 쉬었다. 그의 손에는 검은 비닐봉지 하나가 덜렁거리고 있었다.

창문 막을 건 못 찾았어. 보드마카 같은 걸로 칠해볼까 했는데 영 아니겠더라.”

괜찮을 것 같은데?”

먹을 것도 없는데 힘 빼지 말고. 이따 미술실 가서 스케치북 같은 거라도 구해서 떼다 붙이자.”

아저씨가 내려놓은 비닐봉지에서 캔 몇 개가 덜그럭거리는 소리를 냈다. 여기서도 오래는 못 있겠어. 아저씨가 관자놀이를 벅벅 긁으며 지애 언니와 나 사이에 앉았다. 아저씨는 그제야 스피커를 본 모양인지 손을 뻗어 그것을 끌어당겼다. 이거 돼? 아저씨도 노래 듣는 것을 좋아하는 걸까? 아저씨 표정이 묘하게 밝아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저씨의 취향은 클래식보다 트로트에 가까울 것 같았다. 나는 트로트가 들어있는 카세트테이프를 숨겨버리고 싶었다.

건전지 있으면? 아직 안 해봤어.”

잠깐만. 손전등에 넣으려고 건전지 몇 개 들고 왔어.”

비닐봉지를 휘젓던 아저씨의 손이 건전지를 집어 들었다. 무슨 노래 들을까? 아저씨가 스피커에 건전지를 끼우는 동안 지애 언니가 내 쪽을 보며 말했다. 다행히도 노래 선택권은 내게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가장 위에 놓여있는 앨범을 건넸다. 헨델의 메시아였다.

스피커에서는 가끔 노이즈가 튀긴 했지만 노래를 듣는데 크게 껄끄럽지는 않았다. 우리는 아무 대화 없이 노래를 들었다. 나는 앨범 커버를 확인했다. 한 여성이 정신을 잃고 쓰러진 것처럼 보이는 남성을 자신의 무릎 위에 눕혀두고 있는 조각의 사진이었다. 여자는 성모 마리아고 남자는 예수일까? 종교에 대해 아무런 관심도 없는 나로서는 그 사진을 보고 떠오르는 것이 그 정도밖에 없었다. 다음 노래로 넘어갔는지 스피커에서는 남자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저씨는 볼륨 조금 더 줄였고 그 덕분에 우리는 스피커에 더욱 가까이 붙었다. 이 세상에는 언제쯤 구세주가 내려올까? 세상이 이렇게 변한 것은 신의 뜻이라고 말하던 그 남자가 다시 떠올랐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지금 이 상황은 신인류의 출현이 아니라 노아의 방주 때와 비슷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애, 키가 크고 머리가 길었다고 그랬나?”

나는 아저씨 쪽으로 몸을 돌려 누웠다. 아저씨는 똑바로 누운 채 고개만 이쪽을 향해 있었다. 나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려다 소리를 낮춰 응, 하고 답했다. 우리는 결국 앨범 안의 모든 노래를 듣지 못하고 자리에 누웠다. 하얀 도화지를 뚫고 들어오느라 흐려진 아침 햇살이 교실 안의 공기를 천천히 데우고 있었다.

혹시 삼 학년 사 반이었어?”

아무렇지 않게 응, 하고 대답을 하려 했는데 그 끝이 불안하게 흔들려버렸다. 아저씨가 무슨 말을 할지 대충 할 것 같았다. 나는 그것이 아니기를 바랐다. 그녀가 여기에 있지 않았으면 했다. 내가 머리를 대고 누운 이 교실 바로 아래에서 배회하고 있지 않았으면 했다. 나는 아저씨가 꺼낼 다음 말을 기다리며 그 입을 바라보았으나 아저씨는 아무 말도 않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가보고 싶으면 언제든 말해.”

아저씨는 그 말을 하고 깊이 고여 있던 숨을 뱉어냈다. 나는 다시 몸을 뒤척여 아저씨에게서 등을 돌려버렸다. 그녀의 얼굴이 생각나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아저씨가 본 것이 그녀가 아니기를 바랐다. 키가 크고 머리가 긴 사람은 정말로 많았다. 그런 사람이 어쩌다 우리 교실에 들어갔을 수도 있고. 사실 아저씨가 본 그것이 그녀일 확률보다 그녀가 아닐 확률이 더 높을 것이었다.

그런데 왜 계속 심장이 뛰는 걸까. 자기 전에 이 얘기를 한 아저씨가 조금 미웠다. 내일 저녁이나, 뭐 그럴 때 꺼낼 수도 있지 않았을까. 지금 자면 꿈에 그녀가 나올 것만 같았다. 옆에서 아저씨가 자꾸 몸을 뒤척였다. 우리는 해가 학교 옥상을 똑바로 비출 때까지 쿵쿵대는 심장을 숨기며 억지로 눈을 감고 있었다.

 

3

 

우리는 지금까지 헨델의 메시아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들었고 'LA SERIN'이라는 뜻 모를 말이 적힌 앨범과 바흐의 바이올린 협주곡도 모두 들었다. 우리는 매일 밤 노래를 들으며 노래에 대한 감상을 말했고 그것은 지루한 밤을 넘기기에 아주 좋은 방법이었다. 우리는 그동안 카세트테이프는 전혀 건드리지 않았다. 나는 그 테이프들을 사물함에 밀어 넣었다. 가지런히 개어져 있는 파란 체육복과 교과서 몇 권이 그녀를 또 연상시키기에 나는 일부러 그 사물함을 뒤엎고는 문을 닫았다.

아저씨 손에 들린 검정 비닐봉지는 날마다 가벼워져 갔다. 이제 아저씨는 식량이 아니라 다음에 살게 될 곳을 찾아다녔다. 학교를 떠날 때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지애 언니는 학교를 떠나기 전에 노래를 한 곡이라도 더 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눈을 뜨고부터 자기 전까지 계속 노래를 틀었다. 아저씨는 그날 밤 이후로 내게 그녀와 관련된 이야기를 꺼내는 일이 없었다. 나는 매일 꿈에 그녀가 나올 것 같다는 생각을 했지만 그녀가 내 꿈에 나온 적은 그 날 이후로 한 번도 없었다. 나는 그것이 이상하게 섭섭하기도 했다.

다음으로 갈 곳을 알아봤어.”

아저씨의 벨트는 저번에 봤을 때보다 더욱 조여 있었다. 나중에는 구멍을 뚫어서 저 벨트를 써야할까? 나는 두 번 접은 치마허리를 슬그머니 쓰다듬었다. 그렇게 멀지는 않은데. 아저씨가 쪼그리고 앉아서 손가락으로 바닥에 투명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여기가 학교고, 여기가 우리가 왔던 빵집이고, 그러니까 이쪽 대로를 따라가면. 나는 아저씨가 그린 그림들이 눈에 보이는 것처럼 고개를 눈동자를 굴리며 아저씨의 손끝을 좇았다.

그럼 한 이쯤에, 김밥 천국이 있어. 거기로 가자.”

문은 열려 있어?”

열쇠를 부주의하게 두었던데. 아까 안에 들어가 봤는데 장사할 때 쓰는 깡통 햄이나 라면 같은 거 좀 남아있더라고.”

사람들이 안 가져간 게 신기하네.”

밤만 되면 저놈들이 잠이라도 잘 건지 아파트로 몰려가니 사람들이 쉽게 나올 수가 있어야 말이지.”

김밥 천국이라니. 지애 언니와 아저씨의 대화를 적당히 흘리며 나는 어딘가에 있을 김밥 천국을 떠올려보았다. 주황색 간판에, 투박한 하얀 글씨. 이따가 지애 언니를 졸라 마지막으로 메시아를 한 번 더 듣고 가자고 말해야겠다. 천국으로 갈 건데, 메시아를 한 번쯤 더 듣고 가야 맞는 말 같았다.

카세트테이프를 넣어뒀던 사물함을 잠깐 바라보았다. 내일이면 이제 이 학교에 다시 올 일은 영영 없을 것이었다. 만약 세상이 진정되고 그때까지 내가 살아남아 있다고 할지라도. 나는 우리 교실에 있는 것이 자꾸만 그녀 같았다. 그녀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을 하루에도 몇 번씩 하면서. 그녀가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처럼.

미국 좀비 영화처럼, 나도 총을 쓸 수 있으면 좋겠어.”

, 가서 쏘아 죽여 버리게?”

. 그래야 내 맘이 편할 것 같아. 죽여서 학교 운동장에 묻어주고 가야 내 맘이 편할 것 같아.”

우리는 함께 메시아를 들었다. 지애 언니는 나를 껴안았다. 나는 머리에서 냄새가 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곧바로 그 생각을 지워버렸다. 우리 모두에게서 나는 냄새니까. 나는 피부가 안쪽에서 썩어가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깐 했다. 우리 몸에서 곧 좀비들이 내는 냄새와 비슷한 냄새가 진득하게 묻어나올 것만 같았다.

그 아이도 네가 보고 싶어서 거기에 있는 것 아닐까. 마지막 인사 같은 거 하려구.”

지애 언니는 이 이야기를 오늘 처음 들었음에도 아무 문제없이 대화에 섞여들었다. 아저씨가 나 몰래 지애 언니와 상담을 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지애 언니는 내 팔뚝을 계속 쓰다듬었다. 그녀가 나와 마지막 인사를 하고 싶어 할까? 생전의 그녀라면 지애 언니처럼 나를 꼭 껴안고 인사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그녀에게 안겼다가는 나는 머리가죽부터 그녀에게 뜯어 먹힐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그녀는 내게 어떻게 인사를 하고 나는 그녀에게 어떻게 인사를 해야 한다는 말일까?

아저씨는 내게 정말로 그녀가 보고 싶으냐고 물어보았고 나는 잘 모르겠다는 대답을 남겼다. 내일까지야. 아저씨는 그 말을 하며 스피커의 다음 곡 재생 버튼을 자꾸 눌렀다. 아저씨의 손이 멈춘 것은 43, 아멘이라는 이름을 가진 노래가 흘러나올 때였다.

예전 같으면 단칼에 그녀를 보고 싶지 않다고 말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그녀를 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면……. 그녀가 어딘가에 있겠지, 운이 좋으면 화장되어 뼛가루가 되어 있겠지. 그렇게 생각했을 때와 그녀가 바로 이 아래층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 때 해야 하는 결정의 무게는 완전히 달랐다. 거기다 마지막이라는 옵션까지 붙어있다면, 내가 결정을 쉽게 내리지 못하는 것은 당연했다.

우리는 결국 메시아를 다 듣지 못했다. 아저씨는 스피커는 두고 갈 생각이지만 메시아 앨범은 들고 갈 것이라고 말했다. 지애 언니는 바흐의 바이올린 앨범도 들고 가고 싶다고 말했고 우리는 그렇게 그 두 앨범을 남은 음식과 함께 가방에 넣었다. 해가 천천히 떠오르고 있었다. 오늘 하늘에는 분홍색이 평소보다 많이 돌았다. 나는 똑바로 누운 채 고개를 젖혀 도화지 틈으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을 거꾸로 보고 있는 탓에 태양이 아래로 떨어져 내릴 것만 같았다. 나는 뒷목과 정수리가 얼얼해질 때까지 그 자세를 유지했고 그 후에는 하얀 교실 천장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녀와 여기에 누워있으면 어떤 느낌일까. 그녀는 좀비가 되었어도 여전히 아름다울까. 나는 좀비가 된 그녀의 모습은 좋아할 수 없는 걸까. 예전에 본 좀비 드라마의 한 장면이 생각났다. 여동생이 좀비가 되자 그녀의 마지막을 지켜주며, 그녀가 좀비로 변하기 직전에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던 언니. 나와 그녀가 그 상황이라면 나는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출 수 있을까?

지애 언니와 아저씨는 숨소리도 내지 않고 잠을 자고 있었다. 나는 이 세상에 혼자 남은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그녀에게 하고 싶은 말들이 많았다. 나는 네가 보고 싶어. 나는 너를 좋아해, 너를 좋아해. 너를 정말로 좋아해. 만약 그녀가 말을 할 수 있다면 그녀는 내게 무슨 말을 할까? 그녀도 나를 좋아한다고 말해줬으면 싶었다. 나도 너를 좋아해, 정말로 좋아해, 하고.

 

4

 

해가 천천히 기울어갔다. 저 하늘에는 해가 다니는 길이 있다고 했던가. 그 길 위에서 이 세상을 내려다보면 어떤 느낌일지 궁금했다. 아저씨는 함께 미술실로 가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잘 생각했다거나, 고생했다거나, 하는 말들을 한마디쯤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우리는 미술실에서 어렵지 않게 유성 매직을 찾을 수 있었다. 나는 검은색 유성 매직을 들어 교탁 위에 줄 몇 개를 죽죽 그었다. 아직 잘 나오고 있었다.

노을이 더러운 신발코를 벌겋게 물들였다. 지애 언니는 우리가 지내던 교실 앞에서 스피커를 껴안고 기다리고 있었다. 언니, 내가 들게. 스피커의 묵직한 무게가 팔을 눌렀다. 심장이 자꾸 뛰었다. 스피커를 꽉 껴안고 있으면 스피커에 심장박동이 묻어날까? 그럴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나는 온 힘을 다해서 스피커를 껴안았다. 아저씨의 손에 들린 마스터키가 계단을 내려가면서 쩔렁거리는 소리를 냈다.

아저씨 나 우리 반 열쇠만 빼서 가질래.”

다 끝나면 줄게.”

아저씨는 마스터키에서 열쇠 하나를 빼서 왼손에 쥐었다. 우리는 마스터키를 일 층과 이 층의 층계참에다 두었다. 다음에 이 열쇠 쓰는 사람이 있을까? 지애 언니의 물음에 우리는 아무도 답하지 못했다. 나는 아무도 이 열쇠를 건드리지 않았으면 했다. 그냥 영원히 이 자리에 남아있으면 했다.

삼 학년 사 반은 멀리 있지 않았다. 아직도 그녀가 거기에 있을까? 나는 스피커를 꽉 껴안았다. 나는 교실로 들어가기 전에 밖에서 교실 문을 잠글 수 있는 열쇠구멍을 확인했다. 손끝에 꺼슬한 구멍의 단면이 달라붙었다. 문은 지애 언니가 열어주었다. 나는 그녀가 머리를 풀고 있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붉게 물든 창문에 그녀의 얼굴이 흐리게 비쳤다. 그녀는 아무래도 목이 조금 꺾여있는 것 같았고…… 나는 숨을 삼켰다. 그녀는 내가 들어온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계속해서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창문을 통해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나밖에 남지 않은 그녀의 시선이 내 등에 계속해서 매달리고 있었다. 나는 교실 뒷문을 잠갔고, 그 문과 가장 가까운 책상 위에 스피커를 올려두었다. 그때까지도 그녀는 움직이지 않았다. 스피커가 놓인 책상의 의자를 끌어당기자 의자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의자 등받이에 한쪽 팔을 얹고 몸을 돌렸다. 너는 역시 하복이 잘 어울리는구나. 그때도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초록색 명찰이 그녀의 가슴께에서 천천히 흔들리고 있었다.

시들어가는 노을이 그녀의 검은 머리를 붉게 물들였다. 그녀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고 나는 일부러 그녀의 관절들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녀가 발을 끄는 소리와 의자가 끌리는 소리가 엉망으로 섞였다. 그녀와 나 사이의 거리가 한 분단 정도 남았을 때 나는 스피커의 재생버튼을 꾹 눌렀다. 싸구려 리듬과 싸구려 가사. 나도 간만에 들어보는 트로트였다. 너와 함께 마지막으로 트로트를 듣는 시간이었다. 밖에서 아저씨와 지애 언니가 마음 쓰고 있을 것을 알면서도 나는 끝까지 자리에 앉아서 그 노래를 들었다.

그녀는 노래를 틂과 동시에 발을 멈추었다. 그녀의 뒤로 환한 노을이 빛나고 있어 그녀의 표정을 도통 확인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다시 발을 끌기 시작한 것은 첫 번째 노래가 끝난 뒤였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녀가 스피커에서 카세트테이프를 꺼내 B면의 노래를 들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녀와 술래잡기를 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나는 그녀가 스피커에 관심을 가지는 대신 나를 따라와 준다는 사실이 내심 기뻤다. 그것이 그녀의 본능이라 할지라도. 나는 뒷걸음질을 치며 그녀의 얼굴을 계속 바라보았다. 자꾸 보다 보니 그 얼굴도 예뻤다. 내가 그녀에게 미소를 보내자 그녀도 싱긋 웃음을 지었다. 밤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이제는 그녀가 잠들 시간이었다.

내가 복도로 나오자 아저씨는 바로 문을 잠가버렸다. 문에 끼어 있는 불투명한 유리로 그녀의 실루엣이 얼핏 보였다. 그녀는 얼굴을 문에 붙였다. 그렇게 하면 밖을 뚜렷이 볼 수 있다는 듯이. 나는 그 실루엣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아저씨가 유성 매직을 건넸다. 그 뚜껑을 열자 매직 특유의 냄새가 코를 확 찔렀다. 창문에 가득 글씨를 박아 넣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내 키가 너무 짧았다. 나는 발뒤꿈치를 들고, 최대한 팔을 뻗어 좌우가 뒤집힌 글씨를 커다랗게 쓰기 시작했다. 나는, 네가, 보고싶을, 거야, 나는, 너를, 좋아해, 정말로, 좋아해. 유성 매직의 끽끽거리는 소리가 간간이 복도를 울렸다. 쓰고 나니 창문 하나가 남아서 그녀와 내 이름을 나란히 적어두었다. 나는 몇 발 뒤로 물러서 혹시 틀린 글자는 없는지 확인했다.

아저씨는 내게 삼 학년 사 반의 열쇠를 건넸다. 열쇠는 따뜻했다. 우리가 등을 돌림과 동시에 그녀는 손바닥으로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지애 언니의 손바닥이 내 손바닥 안으로 들어와서 나는 그것을 꽉 잡았다. 태양은 완전히 땅 밑으로 내려갔지만 하늘에는 여전히 붉은 기운이 어른어른 돌고 있었다.

겨울이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나는 교문을 나서기 직전에 운동장의 흙을 팠다. 지애 언니와 아저씨가 도와주겠다고 말했지만 나는 이 일만은 혼자서 끝내고 싶었다. 흙을 깊게 팔 필요는 없었다. 나는 그 자그마한 구덩이에 열쇠를 조심스레 넣었다. 그 위에 다시 흙을 덮고 손바닥으로 꾹꾹 눌렀다. 이곳이 그녀의 무덤이 될 것이었다. 나는 손을 털고 그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기에도 스피커가 있으면 좋겠어. 지애 언니의 말이었다. 우리는 모두 그 말에 동의했다. 만약 스피커가 있다면 다시 메시아를 처음부터 듣자고 아저씨가 말했다. 천국에 입성한 기념으로. 지애 언니와 나는 그 말에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밤이 점점 더 깊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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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젤

 

Y A G I

 

  음식물쓰레기봉투가 터져있었다. 외출을 하던 수연은 무심코 쓰레기장 쪽으로 눈을 돌리다 그것을 발견했다. 길고양이겠지. 수연은 자신의 앞으로 쭉 이어진 길을 한 번, 또 쓰레기장을 한 번 보곤 먼저 저것을 처리하자고 마음을 먹었다. 외출을 하는 것은 그리 급한 일이 아니었다. 아직은 해가 떠있을 시간이 길게 남은 이른 아침이었다.

  수연은 쓰레기봉투를 들고 잠시 상태를 확인했다. 봉투의 중간이 터져있었다. 뭔가를 크게 빼내서 뜯어 먹은 흔적은 없었다. 바보 같은 고양이들. 뜯었으면 제대로 먹기라도 할 것이지. 수연은 입속말을 중얼거리며 건물의 유리문을 밀었다. 고개를 돌려 문이 닫혔는지 확인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수연의 방은 일층 제일 안쪽에 위치해 있었다. 며칠을 열리지 않은 문 앞의 먼지와, 언젠가 복도에 흩뿌려졌고 지금은 꺼멓게 말라있는 피를 수연은 아무렇지도 않게 밟고 지나갔다. 이제는 수연에게 딱히 무서울 것도 없었다. 수연은 열쇠구멍에 열쇠를 넣고 돌렸다. 수연이 이 방에 처음 왔을 때 음산하다고 생각했던 소리가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게 복도에 울렸다.

  수연은 쓰레기봉투를 현관에 두었다. 여분의 쓰레기봉투는 옷장 안에 들어있을 것이었다. 삼 리터짜리 샛노란 음식물쓰레기봉투. 수연은 이것이 자신만의 장례 방법이라고, 터져버린 쓰레기봉투를 새 봉투에 담으며 생각했다. 그리고 오늘은 드디어 커봤자 십 리터 정도밖에 안 되는 음식물쓰레기봉투가 아니라 소각용 쓰레기봉투를 구하러 가야할 때였다. 그것도 가장 큰 것이 필요했다. 수연은 손끝을 세워 쓰레기봉투의 귀를 두 번 꼭 묶었다. 유난히 곧았던 준의 오른손 뼈의 장례식은 두 번이나 치러지게 되었다.

  수연은 현관문을 열기 전에 도어스코프로 밖을 확인했다. 아무도 없었다. 별 생각 없이 이어오던 습관이 이런 시대에 도움이 될 줄은, 어린 날의 수연은 당연히 모르고 있었다. 수연은 쌓여있는 쓰레기의 최대한 높은 곳에 그 쓰레기봉투를 올려두었다. 인류가 멸망한 이후에도 남아있을 거라던 비닐들이 서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수연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근처에 하나가 있었다. 아까 나올 때는 보지 못했던 것이었다. 아무래도 죽으면서 목이 꺾인 건지, 그것은 고개를 이상한 각도로 오른쪽으로 기울이고 수연이 있는 곳을 빤히 바라보았다. 누군가에게 뜯어 먹힌 코에 파리들이 들락날락거렸다.

  수연은 발소리를 죽이고 그것을 빙 둘러 걸어갔다. 낮에는 다들 어디 길에 처박혀서 해바라기나 하고 있더니. 아무래도 그새 해의 방향이 이동한 것 같다고, 수연은 생각했다. 수연의 눈은 좌우를 빠르게 살피고 있었다.

  세상의 제 2막이 찾아온 거야. 마치 낮 다음에 밤이 오는 것처럼. 어차피 우리 지구는 언젠가 다시 빙하기가 와서 모든 생물이 멸종할 예정이었다지. 수연과 준이 처음 만났을 때, 준이 수연에게 건넨 말이었다. 수연은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수연은 별로 죽고 싶지는 않았다. 그것도 이상한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낮엔 해바라기, 밤엔 사냥을 하며 시간과 자신의 몸을 한꺼번에 죽이는 생물은 별로 되고 싶지 않았다.

  수연은 마트를 뒤지는 대신 사람들이 떠나간 집을 주로 뒤졌다. 어느 집이나 보존식품 하나쯤은 가지고 있기 마련이었다. 이제 수연은 잠긴 문을 여는데 꽤 선수가 되어 있었다. 수연이 사는 곳은 도시의 중심이면서 바이러스가 퍼지기 시작한 지역의 중심이었다. 빠져나갈 사람들은 진작 이곳을 빠져나갔다. 수연이 이곳에 남은 것은 부모와 연락이 되지 않는 것에 자꾸 집착했기 때문이었다. 급하게 설치한 휴대폰 라디오 어플리케이션에선 부모의 연락이 아닌 바이러스의 조기 진압 때문에 도시가 봉쇄되었다는 뉴스 앵커의 말이 흘러나왔던 것을, 수연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수연이 부모의 생사 파악을 포기한 것이 그때였다.

  라디오에선 많은 말들이 이어졌다. 지금은 소위 말하는 좀비사태이며 원인은 변종 바이러스로 추정된다던지, 바이러스는 체액으로 감염된다던지, 감염 후 고열을 앓다가 좀비로 되살아난다던지. 수연은 휴대전화의 전원이 꺼질 때까지 그 정보들을 유심히 듣고 있었다. 수연이 마지막으로 들은 말은 외부로 도망친 생존자 때문에 바이러스가 퍼져 진원지 구제를 사실상 포기했다는, 말이었던가.

  수연은 원룸 근처에 있는 집부터 시작해서 샅샅이 먹을 것을 찾아 빈집을 털었다. 간혹 안에서 생존자가, 또는 좀비가 발견되는 경우가 있었다. 수연에겐 대체로 좀비보다 생존자 쪽이 더욱 귀찮은 편이었다. 좀비야 열었던 문을 다시 닫아버리면 그만이었지만, 수연은 생존자 중 누군가가 자신의 생명을 위협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수연이 준을 제 집으로 들인 것은, 수연이 준을 완전히 믿었던 것보단 준이 집요하게 수연을 따라다녔기 때문이었다.

  준은 수연 또래의 남자였다. 수연과 처음 만날 당시만 해도 준은 단정하게 머리를 손질하고 있었다. 원래부터 머리를 기르고 있어 그 당시 이미 어깨에 머리카락이 닿을랑말랑하던 수연과는 분명 다른 모습이었다. 준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통조림을 모두 수연에게 건네며, 이것을 다 줄 테니 제발 자신을 거두어달라고 말했다. ‘거두어 주세요.’ 준은 분명 수연에게 그렇게 말했다. 수연은 그런 준을 분명 재수 없다고 생각했었다.

  통조림이 있을 법한 곳만 골라 찾던 수연은 잠시 낯선 사람의 침대에 몸을 뉘었다. 자신의 집에 처음 찾아왔던 준이 느꼈던 감정일지. 수연이 두 바퀴를 굴러도 바닥으로 떨어지지 않을 넓이의 침대에서, 수연은 어쩐 이유에선지 깨진 전등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별로 푹신하지는 않네.

  수연은 자신이 준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새로운 세상의 한낮은 너무 조용했다. 수연은 준의 얼굴을 그렸다. 섬세한 콧날과 불안하게 떨리던 속눈썹을. 생의 마지막에 자신에게 맞춰오던, 과거 언젠가는 보드러웠을 거친 입술을. 수연은 입맛을 다셨다. 죽이지 말걸 그랬나.

  어쨌거나 자신은 준의 유언을 들어준 것이라고, 수연은 생각했다.

 

  수연의 침대에는 여러 종류의 통조림이 올라와 있었다. 수연은 다시 한 번 더 통조림의 개수를 꼼꼼히 세곤 백팩에 차곡차곡 챙겨 넣었다. 종이 지도 같은 것이라도 있으면 더 편했을까. 수연은 미국에서 제작된 좀비 드라마를 떠올리며 생각했다. 수연은 한국에서 종이 지도를 파는 곳이 어디인줄도 몰랐다. 수연은 자신이 지도를 제대로 읽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문득 깨달았다. 이렇게 되면 감으로 찾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언젠가부터 수연은 이렇게 살아가는 게 별로 불편하지는 않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 생각은 식량을 구하기 다소 좋은 조건에 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사람이 없는 유령 도시에서는 좀비도 떠나기 마련이었다. 전염성은 높지만 낮에는 경계 강도를 낮춰도 되는 것 역시 그나마 삶의 질을 높여준 것이라고 수연은 생각했다. 수연은 자주 과거의 삶과 현재의 삶을 비교했다. 수연은 새로운 삶의 목표가 설정된 것을 내심 기뻐하기도 했다.

  준과 함께 살기 전 수연이 주로 하던 것은 대체로 누워있는 것이었다. 낮에는 설렁설렁 음식을 조달하러 다녀왔다가 밤에는 문 앞에 엉성한 바리케이드를 쳐두고 침대에 누웠다. 수연은 똑바로 누운 채 양손을 배에 올리고 많은 소리를 들었다. 풀벌레 소리 아니면 비명 소리였다. 수연은 저렇게는 되고 싶지 않다고, 수도 없이 생각했다. 언젠가부터 수연은 잠자리에 들기 전에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물. 수연은 이 리터짜리 물 한 통을 일단 가방에 넣었다. 한 통을 더 넣을까 말까, 바닥에 앉아 고민하던 수연은 물 두 통이 들어간 가방을 메고 좁은 집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녀 보았다. 이 정도 무게라면 괜찮을까. 수연은 이 도시를 빠져나가고자 했다. 이 역시 준의 유언이었다. 준이 죽은 이 시점에서 수연이 굳이 준의 소원을 들어줄 필요는 없었겠지만.

  사실 수연은 준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좁은 원룸에 둘이서 산다는 것도, 낯선 사람이 자신에게 들러붙은 것도 그랬다. 수연이 준에게 자신의 방으로 들어오라 한 적은 결코 없었다. 그저 문을 닫지 않았을 뿐이었고 이것이 준에게 동의의 행동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수연은 잘 알고 있었다. 애초에 수연은 방에 돌아와서 준과 얘기를 할 생각이었다. 수연은 낯선 장소에서 언성을 높이는 것이 아무리 낮이라도 별로 좋은 선택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도대체 왜 나한테 그래요?

  그냥요. 더 이상 그 집에서 살고 싶지 않아서요.

  그럼 다른 곳에 가면 되잖아요.

  혼자 살고 싶지 않아요. 처음 만나는 사람을 따라가기로 결심했어요.

  아니 그럼, 내 의지는요?

  같이 살면 좋잖아요. 잘 할게요.

  준은 그 말을 하면서 어깨를 움츠렸다. 수연은 준에게서 받은 통조림 더미를 내밀었고 준은 그것을 보고서도 받지 않았다. 수연은 혼자 사는 것에 익숙해진 상태였다. 수연에게 필요한 것은 연대보단 생존이었다. 그리고 이는 수연에게 아주 멀리 떨어져 있던 것이었다. 연대라는 것은 자신의 생존을 남의 어깨에 맡기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수연은 준을 바라보면서 했다.

  하지만 준은 일부러 수연의 그런 생각들을 무시하고자 했다. 그가 지칠 때까지 이러고 있으면 혹시 자신을 받아주지 않을지. 그 때 그에게 잘 대해준다면 그는 자신이 있는 것이 사실은 좋은 일이라고 생각해 주지는 않을지. 자신은 타인 없이 살아가지 못하는 존재라고, 준은 생각했다. 깡통 안에 혼자 들어가 뚜껑을 닫고 있다간 준은 미쳐버릴지도 몰랐다.

  수연과 준의 동거는 이렇게 순전히 준 때문에 시작된 것이었다. 수연과 준은 수연의 좁은 침대에서 등을 붙이고 잠을 잤다. 준이 바닥에서 잠을 잔 것은 동거 시작 후 고작 이틀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삼일 째 밤, 가로등 불빛도 없는 어둠 속에서 준은 슬그머니 침대에 걸터앉았고 수연은 아무 말 없이 벽 쪽으로 붙어 누웠다. 준은 거의 웅크리듯 잠을 자는 편이었다. 그날 밤, 수연은 자신의 마른 등으로 굽은 준의 등뼈를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 수연이 준의 이름을 처음으로 물었을 때도, 그들이 말을 놓기 시작한 것도 그때였다.

  수연은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고 그대로 침대로 누웠다. 수연의 마지막 밤이었다. 해가 짧아지는 계절이 점점 오고 있었다. 수연은 속으로 가을장마를 걱정했다. 날이 흐리면 놈들의 활동력이 좋아지지는 않을까. 수연은 그 가능성을 얕보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수연은 계속 이동을 하면서 장마를 대비해야만 했다. 수연은 여행을 하면 할수록 좀비들이 많아질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수연은 진압 초에 정부에서 세운 바리케이드까지 도달하는 것을 일단은 목표로 하고 있었다. 바깥세상은 어떻게 되었을까. 주기적으로 헬기가 뜨는 것으로 보아 그쪽은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도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내장배터리로 작동되는 준의 라디오에서 바이러스의 확산 범위가 계속 넓어지고 있다는 말을 준과 함께 듣기는 했지만.

  수연은 준처럼 몸을 웅크리곤 잠을 청했다. 집 곳곳에 준의 냄새가 배어있다고 생각하면서. 시체 냄새가 아니라, 준의 냄새가.

 

  수연은 전날 편의점에서 집어온 황사용 마스크를 귀에 걸었다. 시체를 처리하는데 황사용 마스크가 과연 효과가 있긴 할까, 생각하면서. 수연은 과거 영화에서 보았던, 검시관들이 검시를 할 때 코 밑에 싸한 냄새를 풍기는 뭔가를 바르는 것을 기억해내곤 치약이나 발라볼까 생각도 했다. 냄새가 섞이면 더 역할 것 같아서 그만두었지만.

  처음으로 날씨가 추워지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한여름이었다면 준의 시체는 버티지 못했겠지. 그것은 바깥을 돌아다니는 녀석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수연은 생각했다. 지금보다 훨씬 썩은내를 풍기며 돌아다니는 좀비들. 수연은 저도 모르게 얼굴을 찡그린 채로 화장실의 문을 열었다.

  이 바이러스에는 항체가 존재한다고, 언젠가 준은 수연에게 말했다.

  둘 다 유난히 잠이 오지 않아 나란히 침대에 앉아 해가 뜨기를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수연이 그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에 대해 준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떤 바이러스든 항체가 있기 마련이잖아. 준의 말이었고 수연은 나는 문과야.’라는 대답으로 그 머쓱함을 넘겼다. 그 말을 듣고 준은 웃었다. 준 역시 문과라는 것을 그는 굳이 말하지 않았다.

  대신 준은 자신의 부모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준은 부모와 함께 살고 있었고 준이 외출하고 돌아왔을 때 부모는 이미 죽어 있었다고 말했다. 준은 부모의 방에서 아버지의 복부에 얼굴을 처박고 있는 한 놈을 보았고, 그대로 문을 닫아버렸다고 했다. 준이 수연에게 통조림을 내밀며 거두어달라고 말했을 때, 준의 집 안방에는 좀비 셋이 나란히 해바라기를 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준이 말했다. 수연은 굳이 준의 표정을 확인하지 않았다.

  준이 수연을 따라 머리를 기르기 시작했을 때가 언제부터였는지, 수연은 기억하지 못했다. 수연은 그저 준이 머리가 빨리 자라지 않는다고 거울을 보며 작게 투덜거렸던 일만 기억하고 있을 뿐이었다. 준은 수연에게 자신도 수연처럼 머리를 묶을 수 있을 정도로 머리가 빨리 자라면 좋겠다는 얘기를 했다. 체모가 자라지 않는다는 걸 지금까지 소소한 축복이라고 생각했는데 처음으로 그게 아쉽다는 말을 덧붙이기도 하면서.

  준의 죽음 이후 수연이 이 화장실을 연 것은 이번이 딱 두 번째였다. 첫 번째는 준의 호의에 의해서 준의 살을 발라내기 위함이었다. 이 역시 준의 유언 때문이라고 해둘 수 있을까. 준은 화장실 바닥에 누워있었다. 준은 다리가 긴 편이었다. 그 긴 다리를 접느라 수연이 얼마나 고생을 했던가. 수연은 오돌토돌한 준의 등뼈를 손끝으로 만졌다. 손으로 준의 등을 만지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수연은 생각했다. 수연은 준의 얼굴을 덮고 있는 앞머리를 준의 귀 뒤로 넘겨주었다. 생전부터 준이 곤란해하던 것이었다.

  수연은 자주 집 밖의 좀비들과 자신의 다른 점을 생각했다. 그들과 다른 점이 없다는 말은 수연에게 있어서 꽤 불쾌한 것이었다. 그 누구도 그 말을 수연에게 하지 않았음에도 수연은 스스로 그 말을 떠올리곤 괴로워했다. 수연이 준의 시체를 화장실에 처박아두고 나오지 않은 것도 그와 같은 이유였다. 수연은 자신이 훼손시킨 준의 시체를 직시하는 것이 힘들었다. 아무리 준의 유언이 있었다곤 하지만, 결국 자신의 선택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이 수연을 견디기 힘들게 만들었다.

  수연은 준의 시체를 하얀색 소각용 쓰레기봉투에 밀어 넣었다. 백 리터짜리 쓰레기봉투는 준을 넉넉하게 담고 있었다. 수연은 봉투를 눌러 공기를 빼고 쓰레기봉투의 귀를 묶었다. 그러곤 준을 안아보았다. 팔뚝이 묵직하게 눌렸다. 무겁다고, 수연은 생각했다.

  수연의 마지막 식사는 준의 심장이었다. 수연은 그래도 낮에는 가스버너라도 쓸 수 있는 게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지를 생각했다. 처음 준의 팔뚝살을 잘라내어 먹었을 때 그것을 생으로 먹느라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수연은 비위가 약한 편이었다. 먼 과거에 먹어보았던 육회를 떠올리려 했다. 그러나 털도 없이 민숭민숭한 사람의 살가죽은 왜 이렇게 역겨운 것인지. 수연은 눈을 질끈 감고 몇 번의 헛구역질을 했다.

  수연은 준의 고기를 토해내고 싶지 않았다. 준을 자신의 영양소로 완벽하게 흡수시키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 생각해 낸 방식이 조리를 하는 것이었다. 수연은 자취를 시작하고 얼마 쓰지 않은 식칼을 꺼내 지방 부분을 잘라내며 생각했다. 이것이 준의 고기라는 것을, 생명이라는 것을 잊지 않겠다고.

  수연과 준이 항체에 관한 얘기를 했던 적이 한 번 더 있었다.

  준은 수연에게 수연을 한 번만 안아 봐도 되겠냐는 말을 했다. 수연이 침대 위에서 준에게 등을 돌리고 있을 때였다. 수연은 몸을 똑바로 하곤 준을 돌아보았다. 어둠 속에서 준의 실루엣이 흐릿하게 비치고 있었다. 수연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자기가 항체를 가지고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게?

  글쎄.

  죽은 사람의 피에 자신의 피를 섞어보면 된대. 피가 엉기지 않으면 항체가 있는 거래.

  라디오에서 그랬어?

  응.

  그래서 그걸 왜 말하는데?

  수연은 몸을 일으켰다. 준의 얼굴이 어둠에 가려져있어 수연은 준의 표정을 확인할 수 없었지만, 준이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수연은 준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알 것 같았다. 준의 입에서 대답이 나오기 전부터 수연은 혼란스러워했다.

  나는 수연을 좋아해.

  나 게이 아니야.

  알아.

  준은 몸을 옮겨 수연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서 붙었다. 수연은 그 거리에서도 준의 호흡이 느껴질 것 같다고 생각했다. 수연은 준의 눈에 자신의 얼굴이 어떻게 보일지가 궁금했다. 자신이 준을 보는 것처럼, 아무 표정을 읽을 수 없을 정도로 까맣다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수연은 준이 무언가를 말하기 전에 준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준의 입술은 수연의 손바닥 아래서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소리 없이 오물거렸고 수연은 손바닥에 닿아오는 준의 입김 때문에 손을 떼어낼 수밖에 없었다.

  나는 내일 죽을 생각이야.

  수연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준의 말이었다.

 

  심장은 어떻게 조리를 하면 좋을지 수연은 막막했다. 아무래도 굽는 것은 곤란할 것 같아 수연은 일단 냄비에 물을 받아 그것을 삶았다. 수연은 순대를 시킬 때 간도, 허파도, 심지어 피순대도 입에 대지 않는 사람이었다. 동물도 아니고 사람의 심장을 먹을 수 있을까. 생각보다 크지 않은 사람의 심장이 냄비 속에서 익어가는 것을 보며 수연은 긴 숨을 내쉬었다.

  어느 부위를 얼마나, 어떻게 먹어야 먹는 사람의 몸에 항체가 생기는지는 준도 모르는 일이었다. 심지어 준은 항체가 있는 사람을 먹으면 항체가 생긴다는 말도 낭설일 수 있다는 말을 덧붙였다. 라디오에서 나온 남자의 사연은 항체가 있는 사람을 먹으면 항체가 생긴다, 그 뿐이었다. 준은 심지어 그 남자도 사실은 항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말까지 했다. 수연과 준에게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럼에도 수연은 준의 시체를 먹었다. 바글바글 끓는 물을 보며 수연은 준이 자신에게 일부러 그런 말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푹 삶아진 심장은 순대를 먹으며 설핏 보았던 간이랑 크게 다를 것 없어 보였다. 수연은 뜨거운 준의 심장을 두껍게 썰었다. 심장을 썰며 이미 썰어둔 것을 제 입으로 가져갔다. 퍽퍽했다. 수연은 자신이 잘못 조리한 것이 아닌지를 문득 생각했다. 통조림 속 음식들도 한 때는 살아 움직이던 것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수연은 어색해하기 시작했다. 퍽퍽하게 잘못 조리된 심장과 통조림 속 죽어있는 고기의 느낌은 분명 달랐다. 먹고 있는 것이 준의 심장이기 때문일까? 지금까지 통조림 인생을 살아왔던 수연에게 그 판단을 맡기는 것은 무리한 일이었다.

  수연은 준에게 항체가 없어도, 자신에게 항체가 생기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항체라는 건 좀비가 되는 것을 막아주는 것뿐이니까. 항체는 사람을 죽지 않게 해주는 것은 아니었다. 수연은 살아남고 싶었다. 수연은 준의 입술과 가벼운 호흡을 느끼고 난 다음날 준이 죽어있는 것을 발견했다. 준은 조용히, 자는 듯이 누워있었다. 수연이 눈을 감겨줄 것도 없었기에, 수연은 준의 입술에 입을 맞추는 걸로 인사를 대신했다. 그리고 그 때, 준의 유언을 들어주자고 결심했다.

  수연은 쓰레기봉투 안에 들어있는 준의 시체를 껴안았다. 어쩌면 준은 특이한 성벽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마조히스트라던가, 아니면 그것보다 더 한 무언가가 준의 마지막을 잠식하고 있지는 않았을까. 어쩌면 준은 수연을 만난 시점에서 이미 어딘가 나사가 빠져있던 것일지도 모른다고, 예의 쓰레기장에 준을 내려놓으며 수연은 생각했다. 수연이 이제 준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길고양이가 준을 뜯어먹지 않기를 비는 것뿐이었다.

  수연은 쓰레기장에서 등을 돌렸다. 좀비 하나가 머리가 터진 채 하늘을 보고 누워있었다. 예전의 수연이라면 그것을 빙 둘러갔겠지만 지금의 수연은 그의 눈을 빤히 바라보며 발을 옮겼다. 동질성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었다. 같은 것으로 생명을 유지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수연은 명복을 비는 방법을 몰랐다. 그래서 좀비의 시체 앞에서 잠시 눈을 감고 고개를 숙였다.

 

  골목보다는 확실히.

  수연은 무심코 거기까지 말하곤 입을 다물었다. 지금까지 준과 지낸 탓에 습관처럼 생각하던 걸 말한 것이었다. 수연은 자신에게 몰린 시선을 느꼈다. 낮에는 해바라기를 위해 큰길에 몸을 붙이고 있는 좀비들이 많았다. 수연은 이전에는 상상조차 해보지 못했던 좀비의 시선을 받아내고 있었다. 초점이 흐리지만 어딘가 집요한 시선이 수연의 몸을 훑었다. 수연은 좀비들의 발이 얼마나 빠른지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낮이니까 방해요소가 많지 않을까 생각하며 천천히 옆의 건물로 발을 옮길 뿐이었다.

  좀비의 삶의 목적은 무엇인지, 수연은 생각해보았다. 그들은 단지 먹기 위해 살고 있는 것인지, 애초에 그것을 삶이라고 할 수 있는지 수연은 알 수 없었다. 태어났기 때문에 살아지는대로 살고 있는 것뿐일까. 수연은 고개를 저었다. 자신의 인생과 그들의 인생을 등치시키는 것은 결코 좋은 것이 아니었다. 수연은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일단 이 도시를 빠져나가고, 그러고 어떻게든 살아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수연은 카운터에 남아있는 물건들을 매대 쪽으로 던지며 좀비들의 시선을 끌었다. 이젠 외부의 좀비들이 이 소리를 듣고 몰려들기 전에 빠져나가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것 자체는 어려운 일은 아니었지만 수연은 앞으로의 길이 슬슬 걱정되기 시작했다. 큰길만 따라 갈 것이라지만 자신에게 그런 것이 가능할지, 수연은 확신할 수 없었다.

  준을 만나기 전엔 수연은 그냥 살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것은 맹목적인 것이었다. 거기에는 맛있는 걸 먹고 싶다거나, 도시 밖으로 나가고 싶다는 생각 같은 것은 없었다. 준은 어째서 밖으로 나가고 싶다고 말했을까. 준은 원래부터 한 장소에 있는 것을 갑갑해하던 사람일지도 몰랐다. 수연은 자신은 원래 준의 모습이 어땠는지 잘 모르고 있다고 생각했다. 수연은 세상이 이렇게 변했으니, 그런 건 별로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와서 수연은 그것을 후회했다. 준과 함께 살 때 조금 더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둘걸, 싶었다. 수연이 본 준은 그저 어딘가 약간 이상한 동거인, 그 정도였다. 그 정도의 감상밖에 남아있지 않는 것은 아쉬운 일이었다.

  건물 밖으로 수연은 거리가 자신이 알고 있는 것과는 많이 다르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정돈된 거리란 얼마나 무해한 것이었던가. 사방에 깔린 피냄새와 시체냄새, 사람들이 던진 물건들과 깨진 술병들을 수연은 밟으며 지나갔다. 이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온갖 냄새가 수연을 스치고 지나갔다. 수연은 얼굴을 찌푸렸다. 이르지만 어딘가 들어갈 곳을 찾을까 싶기도 했다.

  야, 황수연! 너 거기서 뭐해!

  어디선가 들려온 목소리에 수연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수연에게 어쩐지 익숙한 목소리였다. 수연은 곧 살짝 열린 빵집 문으로 얼굴만 내보이고 있는 남자 하나를 발견했다. 남자는 손을 크게 휘두르고 있었다. 수연은 그에게 가까이 가서야 그가 누구인지 알아보았다. 같은 대학에 다니던 선배였다. 이 선배가 이 근처에서 자취하고 있었던가. 수연은 머리를 굴려보았지만 교우 관계가 별로던 그가 그 사실까지 알고 있을리는 없었다.

  너 부르다가 좀비들한테 죽는 줄 알았다, .

  좀비도 별로 관심 없던데요, 선배.

  야, 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 아무튼 잘 지냈냐? 내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는 이 동네에 남아 있을 줄 알았다니까.

  남자는 대화에 목이 마른 것 같아보였다. 수연은 빵집 문에 등을 기대고 섰다. 남자는 굳이 그런 수연은 손목을 잡아 끌어 오븐이 늘어서 있는 안쪽 방까지 데리고 갔다. 이 남자는 예전부터 그랬다. 좋게 말하면 겉도는 사람을 놔두지 못하는 사람이었고 나쁘게 말하면 다른 사람의 호흡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었다. 때문에 수연도 남자를 별로 좋게 평가하지는 않고 있었지만, 이런 상황에서 누군가와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이 수연은 조금 기뻤다. 그것은 남자도 마찬가지인 것으로 보였다.

  남자는 셔츠 소매를 접어 올리곤 맨바닥에 그대로 앉았다. 수연은 남자가 입은 셔츠가 꽤 깔끔하다는 것에 조금 놀라며, 저도 남자를 따라 앉았다. 남자의 마른 손목뼈를 수연은 굳이 의식하지 않았다. 자신의 것도 비슷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남자는 제 앞에 자리 잡은 수연의 양손을 잡곤 흔들었다. 그것은 남자 특유의 친밀감을 표현하는 방식이었다. 남자가 유난히 손에 땀이 많은 편이 아니기만 했다면 썩 괜찮은 인사법이었을 것이라고, 수연은 생각했다.

  선배는 빵집에서 지내는 거예요? 예전부터 빵 좋아하더니.

  내가 빵을 좋아해서 빵집에서 살겠냐. 이 근처가 먹을 거 구하기 쉬우니까 여기서 그냥 죽치고 있는 거지. 나 살던 곳에서 시내까지 나오려면 힘들다고.

  선배 어디서 살고 있었죠?

  학교 근처 원룸촌에서. 거기는 다 원룸밖에 없고, 그 근처 편의점은 다 털렸거든.

  수연은 그 근처 편의점을 털어버린 사람 중 하나가 자신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굳이 말하지 않았다. 남자와 수연은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남자는 자신이 학생회장이었던 누구를 사랑했던 일이나, 모두가 싫어했던 교수의 욕을 했던 일을 말했다. 대부분 수연이 쉽게 대응하기 어려운 말들이었다. 수연은 어쩌면 선배는 그냥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둘 사이의 정적은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그래서어디 가고 있었냐? 먹을 거 찾으러 가면 내가 좀 나눠줄게.

  선배잖냐, 라고 남자가 덧붙였다. 수연은 작게 고개를 저었다.

  이 동네를 빠져나가 보려구요.

  왜? 밖에 나가면 뭐라도 다를 것 같아서? 바깥 사정 잘 알지도 모르면서 막 나가지 말어라. 그냥 몸만 상하면 나도 안 말릴 텐데 너도 죽어서 저런 꼴 나고 싶지 않을 거 아냐. 너 지금까지 잘 지내왔으면 그냥 가서 살던대로 살어.

  누가 같이 좀 나가자고 해서요.

  수연은 준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렸다. 내가 만약 다시 집으로 돌아간다면 준은 그것을 싫다고 말할까? 수연은 준에 대해서 아는 것이 별로 없음에도 어쩐지 준은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수연은 더 준의 유언을 이뤄주고 싶었다. 감정적인 문제가 컸다.

  수연은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문득 가방을 풀었다. 수연의 손에 들려 나온 것은 통조림 참치였다. 수연은 남자에게 그것을 건넸다. 남자는 그것을 받아들지 않았다. 수연은 그것이 준과 자신이 처음 만났을 때를 보는 것만 같아 슬쩍 웃음을 지으려다 말았다. 수연은 바닥에 통조림을 두곤 등을 돌려 빵집을 나섰다.

  남자 말대로 수연은 바깥에 대해서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자신이 보균자로 의심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라는 것도 잘 알았고, 만약 준의 말대로 정말 항체가 생겼다면 정부 차원에서 어떤 대접을 받을 수 있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수연이 길을 걷는 동안 준은 썩지 않는 비닐봉지 속에서 잘 지내고 있을 것이었다. 수연은 언젠가 준의 살이 썩어 문드러져도 그 비닐 안에 모든 것이 남아있을 것이라는 생각했다. 언젠가 수연이 그것을 되찾으러 올 날이 올 수 있을까.

  수연은 그런 날은 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수연은 익숙지 않은 침대에 몸을 눕혔다. 수연이 들어오기 전에 어떤 여자가 살고 있었을 방이었다. 수연은 극세사 이불에 몸을 넣었다. 여자의 검은 코트가 의자에 걸려 있었다. 음식물이 들어 있던 쓰레기들이 바닥에 널려있었으나 밤이 깊어지도록 여자는 돌아오지 않았다. 수연은 여자의 운명이 안 좋은 방향으로 끝났으리라 짐작했다.

  준의 방은 어떤 모양이었을까. 수연은 낯선 방에서 준의 냄새를 찾았다. 수연은 자신이 설마 준을 사랑하게 된 것이 아닐지 고민해보았다. 수연은 준을 떠올리며 몸을 둥글게 말곤 베개를 끌어안았다. 어째서 이 시점에 그런 고민을 하게 된 것인지, 수연은 알 수 없었다.

  수연은 자신이 준을 사랑할지도 모른다는 고민을 준이 전부터 하고 있었다면, 준이 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어쩌면 도시 밖으로 나가는 여행을 준과 함께 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만약 준이 죽지 않았더라면. 수연은 눈을 질끈 감았다. 준이 죽고 난 이후 처음으로 수연은 눈물을 흘렸다. (71.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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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SMO少年

 

  Y A G I

 

 

   안은 자신이 죽을 자리를 찾고 있었다. 그것은 안이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방법이었다. 안에게 있어서 그것은 일종의 보험 같은 것이었다. 살기 싫어지면 여기로 와서 죽어버리면 되니까. 그런 생각이었다. 안은 담배의 필터 부분을 엄지와 검지로 짓이기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불은 붙이지 않은 채였다. 아무렇게나 발라 표면이 울퉁불퉁해진 시멘트벽이 그늘 아래에서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안은 이 골목이 마음에 들었다. 사람이 없는 것도 마음에 들었지만, 그보다 더 마음에 드는 것은 음식물 쓰레기 냄새가 없다는 것이었다. 쓰레기봉투에서 터져 나와 보도블록의 틈 사이사이로 스며드는 그 냄새를 안은 견디지 못했다. 그 냄새를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떠올리고 싶지 않은 광경을 자꾸 떠올리며 안은 얼굴을 찡그렸다.

   안은 자신이 죽을 자리는 골목일 것이라고 항상 생각했다. 죽고 싶은 자리, 가 더욱 정확한 말일까. 안은 이리저리 얽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으로 자신을 이끌어 주는 골목이 자신의 삶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골목은 막다른 골목으로 끝나는 경우가 더 많다고 생각하기도 하면서. 지금 안이 걷고 있는 골목도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골목의 끝에는 누군가의 집이 있었다. 안은 벌겋게 녹이 묻어있는 대문과 각종 광고 용지를 한껏 삼킨 허연 우편함을 멀리서 살펴보았다. 그러나 거기서 안은 발을 돌리지 않았다. 대문 앞에 아무렇게나 놓인 검은색 초밥 가게 광고지가 가을 햇볕에 노랗게 색이 바래가고 있었다. 해가 지고 있었다. 안은 방에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내일 다시 이 근처 골목을 돌아보아야겠다고 결심하면서. 여기서는 괜찮은 장소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안은 문득 옅은 꽃향기를 느꼈다. 안은 붉은 벽돌담을 손으로 짚었다. 안의 손에서 담배가 떨어졌다. 벽돌담은 끝으로 갈수록 제대로 된 모양을 유지하지 못하고 점점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바람이 불면 담은 위태롭게 흔들릴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런 담 위에 누군가의 옆얼굴이 있었다. 그의 발아래에 펼쳐진 연분홍빛 꽃들의 무리가 바람이 불 때마다 몸을 흔들거렸다.

   햇볕이 소년의 머리 위에서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소년은 무릎을 접어 담에서 튀어나온 벽돌에 스니커즈를 신은 발을 올려놓고 있었다. 그의 하얀 무릎이 희미하게 반짝이는 것도 같았다. 안은 자신의 시선을 서둘러 거두었다. 안은 자신의 시선이 무례하다는 생각을 했다. 안은 서둘러 자리를 피하려 했다. 소년이 무얼 하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안은 소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저쪽으로 가도 길이 나올 것 같지는 않으니까. 자기합리화 비슷한 것을 하며 안은 고개를 돌렸다.

   “나는, 코스모야.”

   소년은 무얼 하고 있던 걸까. 안은 반사적으로 소년에게 고개를 돌렸다. 소년의 뒤에서 햇빛이 내려오고 있어 안은 그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안은 소년과 눈을 마주쳤다고 생각했다. 소년의 발에 꽃 몇 송이가 짓눌려 있었다. 짧은 반바지 아래로 내려온 소년의 하얀 다리가 움직이는 것을 보고 안은 바로 그곳에서 몸을 돌렸다. 그곳의 공기는 어쩐지 무거워 안은 견딜 수가 없었다. 소년이 입을 연 순간부터 수만 송이의 꽃이 한꺼번에 향기를 뿜어내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농도를 버틸 수가 없어서 안은, 그것이 실례임을 알면서도 그곳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안이 빠져나온 골목의 입구에는 누군가 반쯤 먹다 버린 스타벅스 커피가 놓여있었다. 사람들이 끊임없이 안의 앞을 지나갔다. 안은 셔츠의 가장 위쪽 단추를 풀었다. 가슴 아래서 훅 끼치는 열기를 느끼며 안은 뒤를 돌아보았다. 소년도, 소년을 따라다니는 것만 같았던 햇빛도 안을 따라오지 않았다. 차가운 골목길의 입구에서 안은 여긴 절대로 죽기 좋은 장소가 아니라는 생각을 잠시 했다. 사실 죽을 생각도 딱히 없었지만. 안은 담뱃갑에서 담배를 하나 꺼내 들곤 다시 손끝으로 짓이기기 시작했다.

 

   안은 오늘도 고개를 푹 숙여야 했다. 이제는 창가 자리도 못 앉겠군. 곁눈질로 소년이 카페에서 멀어진 것을 확인한 후에야 안은 고개를 들 수 있었다. 왜 자꾸 그 소년이 눈에 밟히는지 안은 알 수가 없었다. 어쩌면 소년은 이전부터 이 거리를 계속 돌아다니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안은 그걸 자신이 이제야 인식했고, 그래서 더 자주 소년이 보이는 것은 아닐지 생각했다.

   안은 소년을 보기가 껄끄러웠다. 그의 인사에 자신이 등을 돌렸던 일이 자꾸 떠올랐다. 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는데. 속에서부터 올라오는 말을 꾹꾹 삼키며 빨대에 입을 대었다. 원래대로라면 소년에게 사과하는 것이 옳을 테지만 안에게는 그럴 용기조차도 없었다.

   안은 다시 창밖을 보았다. 그 아이는 무얼 하러 가고 있었을까. 괜한 호기심이었다. 안은 소년이 조금 부러워졌다. 무엇인가 할 것이 있는 것 같아서. 안은 담배를 꺼내려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가 금연 구역인 것을 깨달았다. 담배도 피우지 못하는 주제에. 안은 흡연실까지 들어가 담배를 만지작거리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렇다고 불을 빌려 담배를 피우는 것 역시 싫었다. 안은 담배 대신 유리잔을 만지작거렸다. 차가운 커피의 냉기가 손끝을 적셨다.

   습한 날이었다. 일기 예보에서는 오후 일곱 시부터 비가 온다고 했다. 안은 아직 바짝 말라 있는 우산을 챙겨 몸을 일으켰다. 우산은 챙겼지만 집에 돌아가기 전까지는 비가 오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면서. 해가 지고 있었다. 사람들은 오늘도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카페 문에 달린 종이 안의 뒤에서 몇 번 울렸다가 멎었다.

   안은 자신도 무언가를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그 작은 애도 자기 할 일을 찾아가는데. 소년이 걸었던 길을 그대로 밟으며 안은 길게 숨을 뱉었다. 하늘이 흐려 노을빛이 땅을 훑어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안은 차라리 이런 하늘이 좋았다.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모르게 하루가 지나가 버리는 것이 좋았다.

   기어코 굵은 빗방울들이 떨어져 내렸다. 안은 자신이 죽을 자리를 찾는 것이 아무 의미도 없다는 생각을 했다. 안은 죽을 일이 없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 죽을 일이 없었다. 어쩌면 죽는 일도 자신에게는 불가능한 일 일지도 모른다고, 안은 생각했다. 여기저기서 우산을 펴는 소리가 들렸다. 안도 자신의 우산을 폈다. 안은 십삼 점 이이 제곱미터인 자신의 방으로 발을 옮겼다. 아무 의미가 없어도 안은 자신이 죽을 자리를 찾는 일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정말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으니까.

   안이 소년을 다시 만난 것은 정말 우연한 일이었다. 안이 바로 방으로 돌아가고 싶었더라면, 설사 돌아가고 싶지 않더라도 근처 아파트 단지를 경유하지만 않았더라면, 안이 소년을 마주하는 일은 아마 끝까지 없었을 것이다. 안의 기억 속에서 코스모라는 이름은 아마 떨어지는 빗물처럼 순식간에 사라졌을 게 분명했다.

   소년을 마주했을 때 안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안과 소년은 한참 동안 서로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눈동자가 보라색이네. 안의 머릿속에는 그런 실없는 생각만 떠오르고 있었다. 안은 소년에게 우산을 씌워줄 생각도 하지 못했다. 소년 역시 안에게 우산을 씌워 달라, 말할 수 없었다. 소년은 그저 기다렸다. 안이 자신에게 어떻게든 하기를 기다리고만 있었다. 야아옹. 재촉하는 것은 소년의 발치에서 맴돌고 있던 노란 고양이 한 마리뿐이었다.

   “괜찮니?”

   안은 자신의 질문이 우습다고 생각했다. 소년에게 몇 발짝 다가가 우산을 기울여주며 한 말이었다. 비에 푹 젖은 모습이 괜찮을 리가 없었다. 고양이가 안과 소년 사이로 들어와 비를 피했다. 안의 등이 조금씩 젖어갔다. . 소년이 몸을 숙여 고양이를 안았다. 회색 맨투맨의 둥근 넥 라인 조금 아래에 자수 놓여 있던 흰 새 한 마리가 고양이의 몸통 아래에 숨어버렸다.

   “고양이가 자꾸 따라와.”

   변성기가 아직 오지 않은 목소리였다. 안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고양이가 자꾸 따라온다니. 소년에게 곤란한 문제일 것 같긴 했다. 안에게는 소년의 맨다리가 차게 젖어있을 것이 더 곤란한 문제였지만. 소년은 물에 젖어 눈을 찌르는 앞머리를 왼손으로 넘겼다. 네 집에 가도, 괜찮을까. 소년의 말이었다.

   안은 자신의 방을 떠올렸다. 환기가 제대로 되지 않는 방이라 아마 좀 습할 것이었다. 최악의 상황으로는 냄새가 날 수도 있었다. 그래도 더럽지는 않겠지. 안은 소유한 물건이 적은 편이었다. 그것들은 항상 있어야 할 곳에 있었고, 있어야 할 곳에 들어가면 나올 일이 없었다. 바싹 말려놓은 수건들도 화장실 서랍 안에 잘 있을 것이었다. 안은 자신의 겉옷을 소년의 어깨 위에 걸쳐주었다. 고양이는 벌써 눈을 감고 소년에게 온몸을 다 맡기고 있었다.

 

   “나는, 코스모야.”

   소년은 옷을 갈아입으려 하지 않았다. 차게 젖은 흰 양말만을 벗었을 뿐이었다. 마른 수건 한 장을 더 부탁해 바닥에 깔고 앉아있는 소년을 위해 안은 보일러의 전원을 켰다. 자신의 머리를 닦던 수건으로 고양이의 털을 닦아주고 있던 소년의 입에서 나온 말에, 안은 아직도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안녕, 이라고 말해야 하는 거야?”

   자신을 올려다보는 소년의 눈동자를, 안은 피했다. 바닥에 앉아있는 소년의 몸이 너무 작아 보인다고, 안은 생각했다. 책상에 기대어 서 있던 안은 소년을 따라 바닥에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보일러의 열기가 서서히 올라오고 있었다.

   “나는 이 안이야.”

   “.”

   “.”

   안은 코스모, 하고 소년의 이름을 불러주려다 말을 삼켰다. 얼마 전 소년의 발에 밟혔던 꽃들의 향기가 아직도 소년에게서 묻어나고 있는 것 같았다. 빗소리가 계속 창문을 때렸다. 안은 소년에게 배가 고프지 않으냐고 물었고 소년은 딱히 생각이 없다고 했다. 그것은 안도 마찬가지였다. 안은 고양이를 위해 참치 통조림을 따주었다. 안이 고양이에게 줄 만한 것은 그것밖에 없었다.

소년은 앞으로 이 고양이를 어떻게 해야 할지 물었다. 고양이치곤 너무 붙임성이 좋은 녀석이었다. 그새 참치 통조림을 싹 비운 고양이는 소년의 곁에 다시 몸을 뉘었다. 하얗게 뻗은 손가락으로 소년은 고양이의 털을 만졌다. 안은 고양이가 가르릉대는 소리를 내는 걸 난생처음 들었다고 말했다. 소년은 자주 듣는다고 했다. 소년은 새를 손바닥 위에 얹어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고 안은 대답 없이 고개를 저었다.

나도 얘를 기를 형편은 안 되니까. 어쩔 수 없이 비가 그치면 내보내야겠지.”

안은 자신이 한 말이 소년에게 상처가 될까 걱정하며 소년의 표정을 읽었다. 노란색과 하얀색, 그리고 그 두 가지 색의 경계에 있는 수많은 색이 소년의 손가락에 의해 섞였다. 소년은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그래도 가끔 놀러 오는 건 어때? 소년의 말에 고양이가 야옹, 대답했다. 안은 그것이 자신이 마음에 드는 것인지, 자신의 집이 마음에 드는 것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소년의 손길이 마음에 드는 것인지 구분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일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고양이가 놀러 온다는 것이 무엇인지, 놀러 와도 자신이 방에 있을지 알 수는 없었지만.

우산, 빌려 가도 될까?”

안이 보일러를 끄려 몸을 일으켰을 때였다. 소년은 안에게 젖은 수건 두 장을 내밀었다. 안은 아까 자신이 쓰고 왔던 우산을 가지고 가라고 말했다. 창을 통해 들리는 빗소리가 줄어든 것 같기는 했으나 우산을 들고 가서 나쁠 것은 없어 보였다. 안은 소년을 이대로 보내도 좋을지 몰랐다. 몸을 말고 누워있던 고양이도 소년의 발을 따라 움직였다. 안은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오고 있다는 생각을 잠깐 했다. 그것은 안도이기도 했고 아쉬움이기도 했다. 소년은 안의 싸구려 우산을 집어 들었다. 소년은 안이 쓰기에 우산이 너무 작다는 생각을 잠깐 했다. 두 사람은 서로 눈을 마주쳤고 동시에 안녕, 하고 인사했다.

고양이는 그들 사이에서 크게 하품을 하다 소년을 따라나섰다. 고양이가 잠깐 뒤를 돌아보았을 때 안이 마주쳤던 눈동자의 색은 파랑이었다.

 

안은 일주일에 한 번씩, 자신의 집 앞에 고양이를 안고 있는 코스모가 서 있는 것을 봐야만 했다. 처음에는 우산을 돌려주러 왔겠거늘 했던 안도 후엔 놀러 온다는 게 고양이가 아니라 코스모 본인이었던가, 하는 생각을 했다. 코스모가 놀러 올 때마다 안은 코스모를 방안으로 들였다. 안의 죽을 자리를 찾는 계획은 자꾸만 미뤄졌다. 그들은 항상 많은 이야기를 했다. 저번 주에는 길거리의 수많은 동물에 관한 이야기였고 그 이전에는 안의 생활 방식에 관한 이야기였다. 안이 라면을 끓이는 법, 설거지하는 순서, 잠을 잘 때 어떻게 눕는지에 대해 코스모는 의문을 가졌다. 그리고 코스모 본인에 대해 말했다. 코스모는 아직 라면을 맛있게 끓이는 방법을 모르며, 설거지는 수저를 꼭 마지막에 헹구며, 베개를 껴안고 자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안은 코스모의 말하는 방식을 좋아했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할 때마다 코스모가 보랏빛 눈동자를 맞춰오는 것을 좋아했다. 오늘 이야기는, 두 사람의 곁을 맴도는 고양이에 관한 것이었다.

얘 이름은, 미미야.”

얘 암컷이야?”

으으응, 몰라.”

코스모가 말꼬리를 길게 늘였다. 미미는 오늘도 참치 통조림을 먹고 있었다. 처음 봤을 때와 차이가 있다면 뜨거운 물로 기름을 빼서 주었다는 것 정도였다. 그는 넙데데한 얼굴로 요란하게 소리를 내며 참치 통조림을 먹었다. 안의 한 끼 반찬으로 이용될 통조림이었지만 안은 그것이 별로 아깝지 않았다. 명절 선물로 받은 통조림이었고, 어차피 안은 통조림을 크게 좋아하지 않았다. 잘 먹지도 않는 통조림을 주고 고양이를 잔뜩 만질 기회를 얻는 건 나름 합당하다고, 안은 생각했다. 안은 습관적으로 미미의 발을 잡았다. 담배를 짓이길 때보다 훨씬 조심스러운 손짓이었다. 안은 그제야 왜 사람들이 고양이 발바닥을 보고 젤리라고 말하는지 이해했다.

오늘, 밖에 나갈래?”

안은 줄곧 만지작거리고 있던 미미의 발을 놓았다. 밖에 나가면 할 게 있나? 안은 코스모를 빤히 쳐다보았다. 안이 코스모와 비슷한 나이였을 때, 밖에서 무얼 하며 놀았는지 안은 떠올리지 못했다. 아니, 떠올리더라도 세대 차이가 나겠구나. 안의 시선에 코스모는 입을 열었다. 아이스크림, 먹고 싶어. 생각보다 세대 차이가 크게 느껴지는 말은 아니었다, 고 안이 생각했다.

코스모는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골랐다. 맛이 서른한 가지나 있다는 가게에 왔는데도 굳이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골랐다. 안은 제 몫의 슈팅 스타 콘 하나와 바닐라 콘 하나를 결제했다. 아이스크림을 받아 든 코스모는 곧장 야외 테이블로 향했다. 아직은 야외에서 아이스크림을 먹어도 괜찮은 날씨였다. 여전히 하늘은 높았고 미미는 또 낙엽을 입에 물었다. 코스모는 안에게 자신의 아이스크림을 잠시 맡겼다. 코스모는 회색 맨투맨의 소매를 살짝 걷어 올렸다. 하얗게 도드라진 그의 손목뼈에 가을 햇살이 오랫동안 머물러있었다.

안은 코스모가 아이스크림을 먹는 모습이 미미가 물을 마시는 모습과 꼭 닮았다고 생각했다. 주인을 닮는다더니. 주인이 고양이를 닮아버린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안의 입안에서 알갱이 하나가 톡, 소리를 내며 터졌다.

안은 코스모를 처음 만났던 때를 떠올렸다. 그렇게 오래된 일이 아님에도 너무 옛날의 일처럼 느껴져서 낯설었다. 안은 코스모에게서 나던 냄새를 떠올렸다. 그날 두 사람의 머리카락에 묻어있던 햇볕을 떠올렸다. 생각해보면 이상할 정도로 밝은 햇볕이었다. 반짝거리는 빛의 알갱이들이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것 같았다. 그때 그곳은 은하수였다. 그곳을 다시 찾으면 그런 광경을 만날 수 있을까. 안은 코스모와 함께 다시 그곳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코스모는 그때를 기억하고 있을까.

안은 이제 자신이 죽을 장소를 찾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안은 자신의 변화가 좋았다. 그는 자신을 떠나간 수많은 사람에 대해 생각하기도 했지만 그것은 안에게 더는 큰 의미를 지니는 것들이 아니었다. 안은 단지 그들을 추억할 뿐이었다. 모든 감정이 희석된 사진을 보는 것처럼.

그거, 맛있어?”

바닐라 아이스크림으로 얼룩덜룩해진 콘을 들고 있던 코스모가 말했다. 안은 바닐라보다는 맛있을 것이라 했다. 아이스크림을 건네는 안에게, 코스모는 새로운 맛은 무섭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코스모는 안의 아이스크림을 작게 베어 물었다. 코스모의 입에서 슈팅 스타가 제대로 터졌을지 안은 알 수 없었지만 안은 콘을 거두어 들었다. 코스모는 조용히 웃었다.

난 그래도 바닐라가, 좋아.”

그래. 그럼 많이 먹어.”

안은 바닐라가 코스모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안의 입안에서 알갱이 하나가 더 터졌다. 코 바로 아래에서 달콤한 냄새가 올라오고 있었다. 왜 예전엔 아이스크림 하나 사 먹으러 나올 생각을 못 했을까. 안은 코스모에게 자신이 죽을 자리를 찾다 그가 있던 골목을 발견했다는 사실은 말하지 않기로 했다. 와플 콘이 부서지는 소리가 안의 귀에 울렸다. 아니, 어쩌면 그것은 미미가 뛰어오르며 낙엽을 밟아 부수던 소리였을까. 안은 바닥에 떨어진 아이스크림을 보며 생각했다. 미미는 안의 무릎 위에서 천연덕스럽게 야옹, 하며 울었다.

옷에 안 묻은 게 다행이지. 안은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노력했다. 코스모는 한숨을 쉬며 미미의 목덜미를 만지는 안의 모습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러고는 자신 몫의 아이스크림을 서둘러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거칠한 와플 콘의 가루가 코스모의 목 안에 달라붙어 코스모는 몇 번이나 침을 삼키곤 말을 꺼내야만 했다.

아이스크림 사줬으니까, 좋은 거 보여줄까?”

뭔데?”

안은 코스모 쪽으로 몸을 돌렸다. 안은 주머니로 향하던 손을 생각을 바꿔 미미의 등 위에 손을 두었다. 주머니에 담배가 있지도 않았을뿐더러 코스모에게 담배를 쥐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설사 자신이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 하더라도. 너무 어린 코스모에게 자신의 그런 모습이 어떤 영향을 끼칠지, 안은 짐작할 수 없었다.

오늘 안 집에서 자도 돼?”

너가 자고 가는 게 좋은 거야?”

안은 크게 웃었다. 엉뚱하다 싶었다. 어린아이니까 할 수 있는 발상일까. 코스모의 머리를 쓰다듬으려던 안은 코스모의 눈을 보고 그 손을 거두었다. 안은 코스모를 처음 만났을 때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코스모는 자신의 입술에 묻은 아이스크림을 혀로 핥았다.

그거 말고, 따로 있어.”

코스모의 목소리가 공기를 울렸다. 세상의 모든 소리가 그의 목소리에 공명하는 것만 같았다. 안은 짙은 꽃향기를 맡았지만 애써 자신의 착각이라고 여겼다. 그래, 그럼 집에 가자. 안은 입을 열기를 조금 주저했다. 세계의 균형이 자신 때문에 깨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코스모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안은 조금 어지럼증을 느껴 테이블을 짚었다. 소음기를 뗀 오토바이가 빠르게 지나갔다. 안은 너무 많은 소리가 갑자기 머릿속으로 들어온다고 생각했다.

 

안과 코스모는 나란히 누워있었다. 일인용 침대에서 두 사람은 서로 팔꿈치를 맞대고 있었다. 창밖에서 넘어온 가로등 불빛이 천장의 무늬를 따라 번져가고 있었다. 이 시간이면 가끔 들리던 술 취한 사람들의 노랫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밤이었다.

코스모는 잠을 자고 있을까. 안은 코스모가 준다던 좋은 것이 무엇인지 아직 알지 못했다. 두 사람은 그대로 안의 방으로 돌아왔다. 그들의 곁에 미미는 없었다. 그래서 방이 더 조용했다. 미미의 울음소리라도 있었다면 이 밤이 조금 더 가벼웠을까. 안은 어제가 된 낮을 떠올렸다. 바닥에 떨어진 아이스크림이 유난히 크게 느껴지는 기억이었다. 안은 그때의 감각을 아직도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 안에게 그것은 낯선 감각이었다. 누군가의 시선이 그렇게 무거울 수 있다는 것을, 안은 처음으로 알았다.

안의 옆에서 코스모가 뒤척였다. 안은 코스모가 자신 쪽으로 돌아눕는 것을 보고 있었다. 고개만 돌리고 있던 안의 눈과 몸을 완전히 돌려 누운 코스모의 눈이 잠시 마주쳤다. 잠이 안 와? 코스모의 말이었다. 안은 대답을 않았다. 안의 상태는 잠이 오지 않는다기보다는 당장 자고 싶지 않은 것에 가까웠다. 그러나 그렇게 잠이 오지 않는 것도 사실이니, 안은 고개를 끄덕여야 할지 저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가로등 빛에 물든 코스모가 살짝 웃었다.

좋은 거, 보여줘?”

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안은 코스모가 무엇을 할지 전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코스모는 안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안은 코스모의 손이 차다고 생각했다. 원래부터 손이 찼던가, 아니면 지금만 이런 건가. 그래도 안은 그 냉기가 싫지만은 않았다. 저도 모르게 머리에 몰려있던 열이 내려가는 것 같았다. , 감을래? 안은 코스모의 말에 순순히 따랐다. 나는 안이, 좋은 꿈을 꾸면 좋겠어. 안의 귓가에서 코스모의 말이 울렸다.

안의 옆에는 코스모가 앉아있었다. 바람 한 점 없는 날이었다. 두 사람이 앉아있는 벤치 아래에 익숙한 꽃들이 피어있었다. 안은 공중으로 차분히 번지는 그 향이 좋았다. 코스모는 안에게 기분이 어떠냐고 물었고 안은 괜찮다고 말했다. 하늘은 깜깜했고 땅은 두 사람이 앉은 벤치와 그 주변을 감싸고 있는 꽃들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바로 옆에 있는 서로의 얼굴도 뚜렷하게 보기 힘들 정도였다. 안은 꼭 영화가 시작하기 직전 같다는 생각을 했다. 비슷해, 하고 코스모가 말했다. 안은 코스모가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해 코스모를 한 번 바라보았다가, 다시 먼 하늘로 고개를 돌렸다. 어둠 때문에 하늘과 땅의 경계가 흐려져 있었다. 안의 뒤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수많은 꽃잎이 날렸고. 코스모는 안의 손을 잡았다.

코스모?”

이제부터, 안이 보고 싶은 걸 보는 거야.”

안은 문득 코스모의 얼굴이 너무 잘 보인다고 생각했다. 안은 무심결에 시선을 하늘로 두었다. 은하수가 있었다. 하늘을 거대한 무대로 삼아 별들이 춤을 추듯 천천히 회전하고 있었다. 별들의 운행이었다. 가끔 바람이 불어왔고, 그럴 때면 별들은 더욱 빠르게 몸을 움직였다. 바람에 강물이 흐르는 소리가 작게 섞여 들어왔다.

나는 안의 우주야.”

코스모의 목소리가 안의 귀에 또렷하게 닿았다. 나는 안을 위해 태어난 존재야.

안은 눈을 떴다. 여전히 어두운 천장이었다. 안은 자신의 이마에서 코스모의 손바닥이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안의 이마에 엷은 땀이 배어 나와 있었다. 천장이 어두워? 안은 문득 든 의문에 창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창밖의 가로등이 그새 고장이 난 모양이었다.

코스모?”

내가 꿈을 꾼 건가? 안은 자신의 시간 감각이 흐려지는 것을 느끼며 코스모를 불렀다. 아직 어둠에 익숙해지지 않은 눈이 허공을 헤매고 있었다. 안은 코스모 쪽으로 돌아누웠다. 방을 비추는 빛이 없을 게 분명했음에도 안은 코스모의 얼굴이 뚜렷하게 보였다. 그의 보랏빛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그 눈동자가 우주 같다고, 안은 생각했다.

어떻게 된 거야?”

안의 물음에 코스모는 소리 없이 웃기만 할 따름이었다. 코스모는 안에게 조금 더 가까이 붙어 숨이 많이 들어간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는, 코스모야, 하고.

 

안은 더는 담배를 사지 않게 되었다. 죽을 자리를 찾지 않게 되기도 했다. 그는 죽을 자리 대신 일자리를 찾았고, 그 일은 꽤 잘 이루어지고 있었다. 안은 그런 자신의 변화가 마음에 들었다.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자신이 좋았다. 하지만 코스모가 나오는 꿈을 다시 꾸는 일은 없었다. 코스모와 안이 그날 이후 함께 잠을 잔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안은 그 꿈을 좋아했다. 그래서 안은 그 날의 환상을 자주 되새겼다. 코스모가 했던 모든 말들이 또렷하게 안의 머릿속에 남아있었다.

코스모는 그 이후로도 꼭 일주일에 한 번씩 안을 찾았다. 미미가 안을 찾는 빈도는 약간 늘었다. 코스모와 함께 오지 않을 때 미미는 항상 그 작은 발로 창문을 열고 안의 방에 무단침입을 했다. 안은 기꺼이 창문을 잠그지 않고 다니게 되었다. 안은 외출 후 방문을 열었을 때 미미가 방 안에 있는 것이 좋았다. 안은 왜 사람들이 동물을 키우는지 조금 이해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코스모는 그 이후로도 여전했다. 여전히 안이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했으며 여전히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좋아했다. 하루는 안이 코스모에게 짧은 바지를 입으면 춥지 않으냐고 묻기도 했다. 코스모는 자신은 괜찮다고 말했다. 왜냐면, 자신은 코스모니까. 그것은 안이 코스모의 자기 인식에 관한 생각을 해보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괜히 쓸데없는 생각을 했다고, 안은 넘겼지만.

안은 모든 일이 잘 풀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코스모가 없어지기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안이 초겨울이 시작되었다는 뉴스를 보았을 즈음이었다.

미미야.”

안은 미미의 등을 쓰다듬으려 손을 뻗었지만 그는 허리를 쓱 빼는 것으로 안의 손길을 피했다. 안은 야속한 기분이 들었다. 그것은 코스모에게도 그랬다. 그리움의 반작용이었다. 안은 코스모가 없어지고서야 코스모가 어디에 살고 있었는지 자신이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안은 코스모와 처음 만났던 그 골목을 찾아보았지만 그곳엔 시든 꽃들만이 가득했다. 안은 겨울의 시작이 자신이 일자리를 구했을 때와 같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코스모는 그래서 나를 떠났나. 안이 생각했다. 코스모가 더는 자신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것은 아닐까. 안은 자신의 구직활동을 처음으로 후회했다.

안의 꿈에는 이제 코스모가 나오지 않았다. 별들이 회전하지도 않았다. 안의 꿈에서는 매일 별들이 쏟아졌다. 안은 자꾸 이렇게 별들이 떨어지면 언젠가 하늘에 별이 하나도 남지 않을까 봐 두려웠다. 별이 남지 않을 때면 이 꿈이 완전히 깨져버릴까 봐 두려웠다. 안은 자신이 갑자기 어른이 되어버린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세상에 내팽겨진 느낌과 비슷했다. 그 꿈을 꾸다 눈을 뜨면 안은 눈가에 맺혀 있던 눈물이 관자놀이를 타고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어쩌면 예정되어 있었던 이별일지도 몰랐다. 안은 그렇게 자신의 마음을 다스렸다. 그렇게 일상을 이어가려고 노력했다. 안은 코스모를 잊어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원래 자신에게 속해있던 사람은 아니었지 않으냐며 자신을 위로하면서. 안은 자신이 잊는 것만은 잘한다고 믿고 있었다. 그리고 하루하루 그 믿음은 깨져가고 있었다.

 

야옹. 미미의 울음소리에 안은 눈을 떴다. 어쩐지 가슴이 묵직하더라니. 너 때문에 어제 가위눌릴 뻔 했어. 안은 괜히 미미에게 말을 걸며 자신의 가슴 위에 있는 그를 팔로 밀어내었다. 안은 간밤에 꾸었던 꿈을 떠올렸다. 유성우가 끝났다. 대신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안은 벤치에 앉아 파랗게 떠오르는 새벽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안은 그것이 자신과 코스모의 관계가 완전히 끊어져 버렸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은 욕실 문이 열리기 전까지 유효했지만.

미안. 욕실 좀, 썼어.”

코스모가 머리를 수건으로 닦으며 나오고 있었다. 안은 그런 코스모를 바라보기만 했다. 안에게 그 재회는 너무 갑작스러운 것이었다. 코스모는 안의 침대에 걸터앉았다. 안은 생각보다 별 느낌이 들지 않는 자신에 놀랐다. 좀 더 반갑거나, 화가 나거나 할 줄 알았는데. 그런 그들 사이에 미미가 끼어들었다. 자꾸 팔에 머리를 비비는 미미 때문에 코스모는 그의 머리에 손을 얹고 있어야 했다.

어딜 갔다 왔어.”

안은 괜히 말이 퉁명스럽게 나왔다. 코스모는 멋쩍게 웃었다. 코스모들이 원래 좀 바빠. 안은 몸을 일으켰다. 안은 코스모가 그새 좀 큰 것 같다고 생각했다. 목소리도 좀 바뀐 것 같고. 슬슬 변성기가 오는 걸까. 코스모는 안의 손을 잡았다. 따뜻했다.

집 비밀번호는 어떻게 알았어.”

으응, 글쎄.”

코스모가 능청스레 시선을 돌렸다. 저것도 나는, 코스모야로 해설될 수 있는 것일까. 안은 코스모에게 들을 이야기가 많다고 생각했다. 코스모는 목에 걸치고 있던 수건을 잘 개어 무릎 위에 두었다. 코스모는 어떻게 말을 시작해야 할지 찾고 있었다.

일단, 미안해.”

나는 너가 영영 떠나간 줄 알았어.”

안은 아직 코스모의 바뀐 목소리가 익숙하지 않았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사람을 맞이하고 있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이 상황이 사실 꿈인 것은 아닐까? 안은 코스모 몰래 자신의 허벅지를 꼬집었다. 다행히도, 허벅지가 얼얼했다.

안을 떠날 리가 없잖아. 나는 안을 위해 태어났는걸.”

그래, 그게 무슨 말이야?”

나는, 코스모라는 거야.”

코스모가 웃었다. 익숙한 꽃향기가 코스모에게서 났다. 코스모의 머리카락이 빛을 받아 하얗게 반짝였다. 안은 그의 보랏빛 눈동자가 그리웠다. 안은 고개를 숙였다. 그래, 나는 저 말이 듣고 싶었던 걸지도 몰라. 코스모가 안의 어깨를 안았다. 코스모의 무릎 위에 있던 수건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안은 코스모가 자란 것이 확실하다고 생각했다.

-

 

16년 5월에 썼던 글.

코스모 시리즈의 첫 번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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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고안했음ㅜㅜ   #언제든 삭제 및 수정되어 다시 업로드 될 수 있는 글   #범죄장면있음(연쇄살인)   #가벼운 유혈묘사 있음

 

 

MYSTERY SECTION

~ 그리고 아무도 없는 화 ~

 

 

지영은 거울을 보며 바싹 올려묶은 자신의 머리를 정돈했다. 조금 있으면 지영이 전담해야 할 신입이 상사의 손에 이끌려 이 방에 들어올 것이다. 지영은 이런 비인기 부서에 배정받은 신입을 안타까워했다. 꼭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만 같았다. 처음으로 이 부서에 배치되었던 날, 지영은 자신이 무언가 잘못한 것이 있는지 곱씹어 봐야만 했다. 인사 담당자는 지영에게 유감이라는 말 밖에는 하지 않았다. 윗선에서 따로 내려온 지시였고, 그도 어찌할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그런 그에게서 뒤돌아서며 지영은 그가 자신을 비웃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열심히 일했는데. 바득바득 이를 갈면서도 지영은 새로운 부서에서 꾸준히 실적을 쌓아나갔다.

자신의 아래에 신입이 들어온다는 것은 그런 노력의 결과였다. 지영은 꼭 성공하고 말겠다고 다시 한 번 더 다짐하며 딱딱한 소파에 반듯이 앉았다. 지영이 이번 신입에 대해 아는 것을 별로 없었다. 지영은 어떤 사람이 오든지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일부러 다루기 어려운 신입을 보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영은 자신이 그런 것쯤에 굴할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미안, 늦었지.”

괜찮습니다. 별로 안 기다렸어요.”

머리를 어깨까지 길러 뒤로 느슨하게 묶은 남자가 문을 밀고 들어왔다. 지영의 상사 되는 사람이었고, 소위 말하는 별종인 사람이었다. 이 부서에 아주 만족하는,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였다. 그는 습관적으로 알이 굵은 안경을 중지로 밀어 올렸다. 지영은 그 뒤의 키가 작은 여자에게 시선을 주었다. 아주 짧게 자른 머리와 살짝 치켜 올라간 눈꼬리가 인상적인 사람이었다. 지영과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까딱, 움직였다.

서로 인사 하고. 난 나간다.”

지영과 그녀는 좁고 낡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있었다. 지영은 여자의 차림을 살폈다. 빳빳하게 다려진 흰 셔츠와 짙은 회색의 정장 바지였다. 물론 가벼워 보이는 재킷도 잊지 않았다. 신입은 신입이군. 지영은 숨을 내쉬었다. 지영은 세탁할 타이밍을 놓친 자신의 운동화를 잠깐 내려다보았다.

미스테리부의 김지영입니다.”

안녕하세요. 이번에 새로 들어오게 된 하 연이라고 합니다.”

두 사람은 딱딱한 악수를 나누었다. 그러고 곧 이어지는 것은 조용함이었다. 두 사람 다 말주변이 좋은 편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지영은 선배로서 어떤 말이라도 꺼내보아야 하지 않을까 고민했다. 연은 그저 그런 지영을 빤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연은 두 손을 가지런히 무릎 위에서 모으고 있었다.

저기, 여기서는 그렇게 정장 같은 거 안 입어도 괜찮아요.”

지영이 입을 열었다. 옷에 관한 얘기는 미리 해두는 것이 좋았다. 미스테리부는 일반 부서와는 성격이 달랐다. 다른 부서처럼 공직이라고는 하지만 그들의 뒤에 숨어 여러 일들을 처리하는 곳이었고, 때문에 책상 업무보다는 직접 현장에서 몸으로 부딪히는 일이 더욱 많았다. 미스테리부는 이름을 그대로 미스테리한 업무를 처리하는 곳이었다. 국가적 차원에서 사회에 혼란을 일으킬만한 일들을 처리한다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 비밀리에 활동하는 것은, 국민 정서 때문이라던가. 같은 공무원이라도 미스테리부의 존재를 모르는 경우도 많았다. 지영은 속으로 한숨을 쉬며 언제까지 이 부서가 국민 정서 운운하며 물밑에 잠겨 있을지 생각했다. 그렇게 계속 숨기니까 미스테리부로 발령받으면 아예 내쳐진 거라는 소문까지 돌지.

미스테리부가 뭐 하는 부서인지는 들었죠?”

, 들었습니다.”

연의 목소리에는 깊은 울림이 있었다. 연은 그 말을 하며 눈을 살짝 내리깔았다. 지영은 그것이 실망의 표시일 것으로 생각했다.

   미스테리부에 들었다는 것은 지금까지의 일상을 버린다는 것과 같은 말이었다. 미스테리부는 괴담에서부터 시작해서 오컬트적인 부분까지, 상식에서 벗어난 모든 일을 처리하는 곳이었다. 당연하게도 적응을 제대로 하는 사람보다는 그렇지 않은 사람이 더 많은 곳이었다. 지영 역시 이런 일에 익숙지는 않은 편이었다. 지영은 태어나서 귀신이라는 단어에는 한여름에 잠깐 반짝하고 지나가는 괴담으로밖에 얽히지 않은, 귀신보다는 낯선 사람이 더욱 무서운 그런 삶을 살고 있었다.

   “저희는 굳이 정장 같은 거 안 입어도 돼요. 제일 편하신 옷 입으시면 됩니다.”

   “이게 제일 편한 옷이라 입고 왔습니다.”

   “정장이요?”

   “. 정장은 입으면 안 됩니까?”

   연이 지연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당돌한 편일지도 모르겠다고, 그래서 더욱 다루기 까다로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지영은 속으로 작게 한숨을 쉬었다. 지영은 아직 연이 이 부서에 쉽게 적응할 수 있는 인간인지 아닌지 판단할 수가 없었다. 차라리 조금 더 난감해한다면 훨씬 더 다루기 편했을 텐데.

   “남에게 방해는 안 되도록 하겠습니다.”

   연의 눈빛은 지영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도록 했다. 제발. 지영은 속으로 간절히 빌었다. 제발 자신의 발목을 잡는 일은 없게 해 달라고.

 

미스테리부에서 인원을 뽑는 것은 단 한 가지의 이유였다. 인원이 부족할 때. 물론 대부분의 직장이 그럴 테지만, 미스테리부의 인원 부족은 주로 기존 인원의 이탈로부터 비롯되었다. 그 이탈이란 것에 업무로 인한 사고나 부서 변경으로 인한 이탈이 아니라 직장을 그만두는 것이 가장 많은 이유를 차지한다는 것이 특이하다면 특이한 점이었다.

사실 지영은 신입이 들어온다는 말을 듣고 부서 인원을 머릿속으로 세어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남아 있는 것은 그래도 이제는 꽤 일에 익숙해진 인원이어서 추가 인원 없이도 웬만한 일은 거뜬히 처리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전국적으로 폐가 탐험이 성행하는 시즌도 지나서 일 년 중 가장 비수기일 터였다. 그런데 이 시기에 왜 신입이? 지영은 또 무언가 험한 일 하나를 시키겠구나, 하고 맘을 먹고 있었다. 지영은 그것을 연에게 굳이 말해주지 않았다. 한 번 고생해봐라는 심정보다는 어떤 식으로 말을 꺼내야할지 판단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연은 지영이 지금까지 다루어보지 못했던 유형의 사람 중 하나였다.

그 뒤로도 연은 계속 정장을 입고 다녔다. 자연스레 부서 내에서 굉장히 튀는 사람이 되었지만 연은 그것을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부서 사람들도 저러다 곧 복장을 바꾸겠거니, 하고 말아버리는 눈치였다. 애초에 남에게 큰 신경을 쓰지 않는 사람들이 다수인 집단이었지만.

오늘 저녁에 시간 괜찮습니까?”

얼마 안 되는 비수기를 맘껏 누리느라 잔업도 없는 날이었다. 퇴근 준비를 하고 있는 지영에게 연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그때는 마침 지영이 첫인상에 연연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우치고 있던 때였다. 지영은 마냥 쌀쌀맞을 줄 알았던 연이 뜻밖에 사람을 잘 대하고 웃음도 많다는 사실을 보고 혼자 감정적 친밀감을 쌓아가고 있었다.

괜찮으시면술 한 잔 어떠신가 싶어서요.”

그 말을 하며 연은 살짝 시선을 시야 구석으로 돌렸다. 지영은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영은 술을 잘하지도, 좋아하지도 않는 편이었으나 술자리에서 얻을 수 있는 친밀감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편은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를 악물면서 술자리에 참여하던 지영도 연의 제안에는 선뜻 응했다.

지영은 자신의 첫 후배가 여자라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지영에게 있어 남자란 아직까지도 어쩐지 낯설고 불편한 존재였다. 그것이 단순히 지영이 여중 여고에 여초인 학과를 나왔기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존재하는지 지영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아마 남자 후배가 퇴근 후 개인적으로 술을 한잔하자는 제의를 했다면 그 술자리 내내 지영은 엷은 불안감을 느끼고 있어야만 했을 것이다.

 

지영과 연의 술자리는 조명이 어둡게 내려앉은 술집 귀퉁이에서 이루어졌다. 지영은 난생처음 맛보는 맥주를 맛보며 연과 함께 웃었다. 누군가와 단둘이 술을 먹는 것은 이번이 처음인 것 같다고, 지영은 연에게 말했다. 연은 그 상대가 자신이라는 것이 좋다고 했다.

그나저나 선배는 일이 힘들진 않으세요?”

연이 선배는, 이라고 말할 때 목소리가 살짝 떨리는 것을 지영은 놓치지 않았다. 평소라면 이것이 어떤 감정의 반응인지 파악하려고 지영은 머리를 굴리고 있었겠지만 이번만큼은 지영도 아직 그 호칭이 낯설겠거니, 하며 편하게 넘어갔다.

안 힘들다고는 못하지하지만 해야지, 어쩌겠어.”

선배 되게 열심히 일하는 것 같아요.”

나는성공하고 싶어. 그냥 공무원 하고 있지만, 그래도 좀 높은 자리까지 올라가 보고 싶기도 하고. , 내가 명예욕이 좀 있거든. 초등학생 때는 전교 회장 선거에도 출마했는데.”

어떻게 되셨어요?”

떨어졌지. 어쩔 수 없었어. 당시 교장이 여자가 전교 회장 되는 거 상상도 못 하던 사람이라서.”

지영은 쓰게 웃었다. 그 당시 집에 있던 싸구려 복합기에서 인쇄되던 흐린 빨강 파랑의 그림들이. 글씨만은 직접 쓰겠다며 검은색 플러스 펜으로 이름과 공약을 써서 명함을 만들어 학교 여기저기에 뿌리고 다녔던 것이 기억났다. 교장이 그런 사람인 걸 알았으면 좀 누가 말려주지. 그렇게까지 기대하지도, 열심히 하지도 말라고.

저는 선배가 성공하면 좋겠어요.”

잔을 내려놓은 연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지영은 입에 남은 술의 쓴맛을 꿀꺽 삼켜버리곤 연을 보고 마주 웃었다.

 

연은 행동이 빠른 편이었다. 자신의 판단에 혼자 주저하는 편은 아니었다. ‘될 대로 되라지의 좋은 경우가 아닐까? 지영은 연의 그런 모습이 조금 부럽고, 대단해 보이기도 했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지영은 자신이 짊어지고 있는 것들에 대해 생각을 하게 되었다. 막연한 두려움이었다. 지영은 자신은 연과는 다른 사람이라는 생각을 종종 하곤 했다.

연의 정장이 이제는 미스테리부에서도 더는 튀어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굳이 이 시기에 연이 새로 들어오게 된 이유가 밝혀졌다. 지영과 연의 앞에는 각각 책이 한 권씩 놓여 있었다. 책의 표지를 확인하거나 팔랑팔랑 책장을 넘겨보는 연과 달리 지영은 그저 눈짓으로 책의 제목만 확인한 후 자신의 상사를 바라보았다. 상사에 대한 예의 때문은 아니었다. 단지 지영이 이전에 그 책을 읽었고, 얼마 정도의 내용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추리소설이네요? 미스테리부라고 이런 책도 읽어야 합니까?”

지금 읽는 건 별 의미 없을 거고, 일 끝나고 한 번 읽어봐. 깜짝 놀랄걸.”

재밌나요?”

나도 안 읽어봐서 몰라.”

목소리를 몇 번 가다듬던 남자가 말을 이어갔다. 남자는 근처에 있는 파일로 손을 뻗어 몇 장의 종이를 꺼냈다. 종이를 찬찬히 읽어가던 지영은 어떤 사실을 깨닫고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자신이 기억하는 것과 전혀 다른 내용이었다. 심지어 범인마저도. 지영이 그 정도도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인상에 남지 않은 작품은 아니었다. 제법 추리소설을 좋아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지영이라 더욱 고개가 갸웃, 기울어졌다.

두 사람이 종이의 내용을 얼추 다 읽었다고 생각한 남자는 다시 입을 열었다. 책벌레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책벌레요?”

책벌레라고, 책등 틈에서 사는 작은 벌레가 있어. 그리고 걔들의 주식은 책의 내용. 책벌레가 책을 먹으면 책의 내용이 좀 희한하게 바뀌어.”

책을 많이 읽는다는 뜻의 책벌레와는 관련이 있습니까?”

책이라면 종류 불문하고 탐한다는 게 관련이 있으려나……. , 그쪽은 이번엔 별로 생각 안 해도 될 것 같고. 아무튼, 요새 책벌레 현상이 빈번하게 나타나는 것 같더라고. 가을이라 그런가.”

연은 조금 놀란 눈치였다. 연은 책의 중간을 펼쳐 책을 읽기 시작했다. 다섯 개째의 인디언 인형 머리가 없어졌고 두려움에 떠는 사람들 뒤에서 큰 소리를 내며 천둥이 쳤다는 부분이었다. 연은 아랫입술을 살짝 내밀고 빠르게 글자를 훑어나갔다. 아랫입술이 나오는 것은 연이 집중할 때 보이는 버릇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해결하면 되나요?”

책 속으로 들어가야지.”

?”

기술적 준비는 내일이면 끝나니까, 내일 바로 작업에 들어가도록 하지. 더 질문 있나?”

책 속엔 어떻게 들어갑니까?”

책에 눈을 박고 있던 연이 고개를 살짝 들고 의문을 표했다. 남자는 어깨를 한 번 으쓱했다.

내일이 돼보면 알겠지.”

연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건성으로 책장을 몇 장 넘기더니 책을 덮었다. 지금 당장 그것을 읽어봤자 별 소용은 없다는 것을 깨달은 눈치였다. 지영은 남자의 설명에 이해한 것처럼 보이는 연을 보고 당황스러웠다. 어떻게 저 설명을 가지고 이해를 할 수 있지. 지영은 저것도 연의 될 대로 되라지의 속성인지 짧게 고민하고 있었다.

 

* *

 

연의 짧은 머리가 바닷바람에 날리고 있었다. 지영은 괜히 연의 원피스 차림이 낯설었다. 그런데도 지영은 파란색이 연에게 아주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파란 원피스를 입은 연은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졌다. 그녀에게서는 그냥 그런 분위기가 풍겼다. 지금의 연은 정장을 입었을 때보다 더 아담해 보였다. 귀엽다, 는 인상을 주기 좋은 분위기였다. 그렇다고 지영이 연의 정장 차림을 싫어하는 것은 또 아니었다. 비교하자면, 지영은 원피스보다는 정장 쪽이 훨씬 좋았다. 귀여운 연도 좋지만, ‘각을 잡고 있는연의 분위기가 훨씬 더 좋았던 것이다.

지영과 연은 유람선을 타고 있었다. 이번 소설의 무대는 외딴 섬의 저택이었다. 의문의 저택 주인이 사람들을 초대하면서 생기는 일이었다. 당연하겠지만 저택 주인의 정체는 끝까지 나오지 않았다. 그것은 아마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두 사람의 존재는 책벌레를 통해 미리 조작해 놓은 정보였다. 지영과 연이 해야 할 일은 아직까지도 책 속에 들어있을 책벌레를 찾아 죽이는 것이었다. 책벌레는 책의 어느 장면에 아마 몸을 숨기고 있을 것이고, 이미 내용의 변형이 꽤 진행된 것으로 보아 벌레의 무리는 꽤 몸을 불리고 있을 것이었다. 유감이라면 무리가 커졌음에도 불구하고 개개의 크기가 너무 작아 그 무리를 발견하는데 딱히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다. 어쩌면 다수의 무리가 존재할 수도 있다는 말을 떠올린 지영이 사방으로 눈을 돌렸다.

바닷바람이 찬데, 얇게 입으시고 춥지는 않으십니까?”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지영과 연은 몸을 돌려 목소리의 상대를 바라보았다. 키가 큰 남자였다. 짙은 남색 정장에 자주색 넥타이를 입은 사내였다. 지영의 머릿속에 번뜩하고 지나가는 무언가가 있었다.

책벌레가 내용을 바꾸어놓지 않았더라면, 아마 이 사람은 곧 이 배에 탄 모든 사람을 죽여버렸을 것이다. 지영은 몸을 살짝 떨었다. 지영은 눈앞의 남자가 자신의 떨림을 단순히 추위로만 생각해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저는 메리고, 이쪽은 크리스틴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필립입니다.”

지영과 연은 가명을 쓰고 있었다. 크리스틴 쪽이 지영이었다. 연은 악수를 위해 손을 내밀었고 남자도 능숙하게 악수를 받아냈다. 지영은 연에게 그 남자와 친하게 지내는 것은 별로라고 말해줘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다른 사람들하곤 인사해 보셨습니까?”

아뇨. 처음 만난 사람이 필립 씨에요.”

이 기회에 만나보시겠습니까? 23일간은 같이 지낼 사람들이니까요.”

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남자의 뒤를 따랐다. 그들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갑판 아래의 방에 모여있었다. 단출한 인원이었다. 안락해 보이는 조명이 방을 은은하게 비추고 있었다. 필립은 지영과 연에게 방 안의 사람들을 소개했다. 긴 흑발을 느슨하게 묶고 붉은 리본으로 포인트를 준 짙은 녹색의 원피스를 입고 있는 쪽이 데이지였다. 밝은 금발 머리를 양 갈래로 묶고 무릎 위로 올라오는 원피스를 입은 쪽은 안나였다. 필립이 안나를 소개할 때 안나는 지영과 연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붙임성이 썩 좋은 모양이었다.

구석 쪽 의자에 파묻히듯 앉아있는 여자는 에밀리라고 했다. 아무래도 그녀는 배멀미를 하는지 컨디션이 그렇게 좋아 보이진 않았다. 땋아 내린 머리카락에서 비죽 튀어나온 잔머리가 식은땀이 붙어있는 그녀의 뺨에 몇 가닥 달라붙어 있었다. 지영은 모든 사람의 이름과 얼굴을 매칭시키기 위해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연은 소설 속 인물을 직접 만난다는 부분 때문에 조금 들떠있는 상태였다. 이런 소설이 아니라 조금 더 유쾌한 소설이었다면 어땠을까. 연은 예전에 인상 깊게 읽었던 책들을 되짚고 있었다. 하지만 딱히 만나고 싶은 인물은 없다는 생각이 든 순간 연의 흥미는 순식간에 식어버렸다. 혼자 들떠올랐다 식어버린 것이 민망한 듯 연은 배 이리저리를 둘러보았다. 책벌레 무리를 찾기 위한 행동이었다.

저 섬인가 봐요.”

창가에 앉아있었던 데이지가 가장 먼저 섬을 발견한 사람이 되었다. 그녀의 말에 컨디션이 좋지 않던 에밀리마저 몸을 쭉 빼어 창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자그마한 섬이었다. 저택보다 더 눈에 쉽게 띄는 것은 저택 주변의 울창한 숲이었다. 낙엽이 지기 직전의 계절이었지만 나무들을 푸름을 기운차게 내뿜고 있었다. 그런 숲에 안겨있는 모양새로 고풍스러운 저택이 자리하고 있었다.

저택에서 보는 광경이 멋있겠는데요.”

, 두근거려요. 저택 내부도 멋있겠죠.”

지영과 연 역시 두근거리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이런 문화를 이렇게 생생하게 접할 기회는 딱히 없었다. 어렸을 때는 저택이란 게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기도 했었는데, 이제야 어린 지영의 의문이 풀리고 있었다. 아마 저택 내부는 근사할 것이다. 샹들리에 같은 것도 있을 테고, 고급스러운 천으로 덮인 소파 같은 것들도 있을 것이다. 발소리를 완벽하게 죽여주는 붉은 카펫도 있을까? 지영은 어쩐지 여행을 온 기분이 되었다.

 

건물 내부는 생각했던 것보다 크고 넓었다. 복층 구조 덕분에 천장이 굉장히 높아 보였고, 그 정점에 샹들리에가 눈부시게 반짝이고 있었다. 마치 쏟아지기 직전의 별들을 그대로 붙여둔 것만 같았다. 복도를 장식하는 조각상이나 그림들은 없었지만 멀지 않은 거리를 두고 키 큰 관상용 꽃들이 복도의 좌우를 장식하고 있었다.

지영이 놀란 것 중 하나는 벽난로에서 정말로 타닥거리는 소리가 난다는 점이었다. 이 소리가 과장이 아니었다니! 괜히 들뜬 지영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낮은 채도의 가구들 덕분에 중후한 분위기가 연출되고 있는 홀이었다. 하지만 가구들을 자세히 보면 복잡한 무늬가 금색 실로 놓여있었다. 빛이 비치는 각도에 따라 실들이 묘하게 빛나고 있었다. 벽난로의 양옆에는 지영의 키보다 큰 흰 대리석 조각이 놓여있었다. 여성의 신체를 가지고 있는 조각상은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두 조각상의 손에 아름다운 얼굴과는 이질적인 긴 칼을 들고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주인님은 조금 있다가 오신다고 합니다.”

나이가 제법 있어 보이는 메이드가 허리를 꾸벅 숙였다. 그녀의 손에는 열쇠가 걸려있는 상자가 들려있었다. 메이드는 상자의 걸쇠를 열어 투과율이 좋은 유리로 되어있는 뚜껑을 열었다. 열쇠 위에는 자그마한 태그가 달려 있었다. 방 열쇠인 듯했다.

저녁 식사가 준비될 때까지 방에서 편히 쉬고 계시면 됩니다.”

지영과 연은 2층의 각각 끝 방을 배정받게 되었다. 지영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런 경우 보통 방이 아주 가까이 붙어 있는 경우가 많을 텐데. 지영은 문고리에 열쇠를 돌려 끼우려다 말고 멀리 연의 방이 있을 곳을 바라보았다. 연은 이미 방에 들어간 이후인지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단지 지영의 시선을 눈치챈 안나가 고개를 까딱 움직여 보였을 뿐이었다. 지영은 그녀의 묵례에 답하곤 방으로 들어섰다. 자신의 상사가 그렇게 간단한 처치를 빼먹을 사람인지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가지고 있었다.

방은 생각보다 소소했다. 지금까지 봐왔던 저택의 분위기가 너무 화려했기 때문에 침실마저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장식적이고 화려한 홀에 비해 침실은 실용적인 디자인으로 꾸며져 있었다. 채도가 낮은 카펫엔 자수 하나 없었다. 침대도, 침구도, 나무로 된 탁자도 장식이라곤 그다지 붙어있지 않은 것들이었다. 그러나 짐을 대충 구석에 밀어 넣고 침대에 걸터앉은 지영은 솔직히 놀랄 수밖에 없었다. 돈이란 건 정말 얕볼 수가 없다고 생각하며, 지영은 그대로 뒤로 드러누워 침대의 느낌을 맘껏 느꼈다.

좀 쉬었어?”

지영이 연을 찾아간 것은 저녁 식사가 시작되기 삼십 분 전이었다. 지영은 조금 뻗친 연의 머리를 보고 속으로 웃었다. 연도 생전 저런 느낌의 침대에선 자 본 적이 없는 거겠지. 연의 방은 지영의 방과 비슷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다른 것이 있다면 가구의 위치 정도였다. 연의 방의 지영의 방과 좌우대칭의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지영은 계단을 중심으로 왼쪽은 연의 방처럼, 오른쪽은 자신의 방처럼 설계되었으리라 생각했다.

어쩐 일이십니까?”

아까 배에서 너랑 얘기했던 남자 말이야.”

, 선배는 소설 읽어봤다고 하셨죠. 어떤 역할입니까?”

별건 아니고. 그땐 그 사람이 범인이었는데그래도 책의 내용이 바뀌었으니까 또 모르지 뭐.”

눈을 동그랗게 뜬 연을 보며 지영은 서둘러 뒤의 말을 덧붙였다. 그러나 연은 한숨을 살짝 쉬었다. 아무래도 조금 혼란스러운 모양이었다.

좋은 사람인 것처럼 보였는데……. 세상에 믿을 남자 없다는 말을 들었는데 맞는 말인 것 같습니다. 아무튼, 이제 식사하러 갈 때 되지 않았습니까?”

연은 곧 씩 웃어 보였다. 연은 사실 어렸을 때 이렇게 커다란 저택에서 먹는 음식이란 어떤 음식일지 궁금했었다고 말했다. 연은 간단하게 달린 주석들을 봐도 이해하기 힘든 음식이 있다는 사실이 당시 연에게는 아주 새로운 느낌을 주었었다고 했다. 하지만 상상하지도 못할 것들이라 연의 관심에 그렇게까지 오래 남아있었던 것들은 또 아니라고도 했다.

그래서 이런 생각 하면 저는 항상 카레가 먹고 싶더라구요.”

카레?”

카레는 만들어 놓고 한참 먹을 수 있으니까요. 어렸을 땐 맨날 카레만 먹어서 카레를 싫어했는데, 이렇게 되니 또 당기네요. 여기서 카레를 먹을 수는 없겠죠?”

일 끝나면 같이 먹자. 어려운 일도 아니니까.”

지영이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며 말했다. 곧 그들은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섰다. 방을 나서며 연이 셔츠 소매의 단추를 매만지는 것을 알아챘다. 긴장하는 것일까, 아니면 일에 집중하기 위한 자신만의 방법일까.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이제부터 그들의 일은 시작이었고, 그 일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이란 것을 두 사람은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다. 이곳의 추리 소설의 안이다. 그것도 대량의 살인 사건이 일어나는 소설의 안이었다. 이제는 모든 감각을 예민하게 만든 채 주위를 둘러보아야 할 때였다.

 

연은 성애화 되지 않은 메이드라는 것을 태어나서 처음 본다고, 지영에게 속삭였다. 지영 역시 연의 말에 동감했다. 이 저택의 메이드들은 흔히 메이드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보다 더욱 전문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이 사람들도 일종의 서비스직 직원이구나. 지영은 속으로 이들을 조금 동정했다. 이런 저택의 메이드로 일한다는 것이 대한민국의 편의점 아르바이트와 어느 정도로 비슷할지는 모르지만.

지영은 고개를 돌려 자신의 옆에 앉은 남자를 바라보았다. 하필이면 자리가 이렇게 정해지다니. 지영의 옆에는 예의 살인범, 필립이 앉아있었다. 지영은 소설에서 읽었던 시체들의 모습을 떠올렸다. 지영은 그런 장면을 즐기는 편은 아니었다. 도리어 영화 같은 것을 보다가도 그런 장면들이 나오면 눈살을 찌푸리거나 고개를 돌려버리는 타입에 더욱 가까웠다. 때문에 그 소설을 읽었을 때도 시체의 모습은 일부러 떠올리지 않았었다. 그러나 그 일의 원인이 되는 남자가 바로 옆에 있다고 생각하니 지영의 속이 메슥거리기 시작했다. 억지로 나이프로 썰고 있는 고기에 시선을 두었지만 식욕은 오히려 더 떨어졌을 뿐이었다.

식욕이 없으십니까?”

사실 배멀미를 좀 해서요. 아직도 몸이 안 좋나 봐요.”

지영은 거짓말을 하며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이 정도로 필립이 자신의 거짓말을 눈치챌 일은 없을 것이라 생각하면서. 지영은 필립에게서 벌써부터 피 냄새가 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오늘 밤에 파티가 있다던데요.”

아무래도 몸이 안 좋아서 저는 앉아만 있어야겠어요.”

아쉬운 일입니다.”

싱긋 미소를 지어 보이는 그의 모습에 지영은 가장 먼저 살해를 당했던 것이 자신과 비슷한 또래의 여성이라는 것을 떠올렸다. 지영은 도무지 필립을 따라 웃을 수도, 그와 대화를 나눌 수도 없었다. 필립도 그런 그녀의 심정을 눈치챘는지 더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지영은 그가 제발, 뱃멀미 때문에 그러는 것으로 생각해주었으면 했다. 지영은 식후 문을 잘 잠그고 자라고 연에게 충고를 해야겠다고 다짐하며 옆자리에 앉은 연을 넘겨보았다.

연의 왼쪽엔 안나가 앉아 있었다. 배에선 양 갈래로 묶어 산뜻한 느낌을 주었던 머리를 지금은 솜씨 좋게 틀어 올려 그때와는 다른 이미지를 보여주려 하고 있었다. 지영은 그녀가 수완이 좋은 아가씨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영과 눈이 마주친 안나가 살짝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어떻게 보면 책벌레라는 건 좋은 것 같습니다. 책 속에서만 가능하다고 해도, 이런 옷은 언제 입어보겠어요.”

지영의 허리끈을 조이며 연이 말했다. , 장난스레 지영이 낸 소리에 두 사람은 짧게 웃었다. 여기까지는 지영이 기억하는 것과 비슷한 궤도로 내용이 흘러가고 있었다. 그렇다는 말은, 곧 살인 사건이 시작된다는 말과 같았다.

어라?”

아래층으로 내려간 지영은 가장 먼저 벽난로 위부터 확인했다. 벽난로 위에는 여섯 개의 도자기 인형이 있었다. 고개를 갸웃하는 지영을 보며 연은 슬쩍 이유를 물었다. 지영이 그렇게 당황해하는 이유는 당연했다. 도자기 인형이라니? 책벌레라는 것이 벌써 이 소설의 근간이 되는 부분까지 침식했다는 말인가? 지영은 혹시 벌레의 무리가 있는지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딱히 눈에 띄는 것은 없었다.

저 인형의 수만큼 사람이 죽을 거야.”

그럼 저희도 포함인 거네요? 책 속에서 죽으면 어떻게 되나요?”

글쎄…….”

지영과 연은 벽난로에 가까이 다가가 인형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파란 드레스를 입은 여자 인형이 다섯, 검은 턱시도를 입은 남자 인형이 하나 있었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그들은 모두 얼굴이 지워진 상태였다. 하지만 어떤 인형이 누구를 대표하는가는 그렇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두 사람은 인형엔 어떠한 처리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솔직히 말해 연은 기분이 조금 찝찝했다. 이 사람들이 아무리 소설 속 인물이라고는 하지만 지금 이렇게 자신 앞에 살아 움직이고 있는데. 이 사람들의 죽음을 알면서도 그것을 방관하고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 연의 입맛을 나쁘게 했다. 연은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자신들을 제외하곤 이 인형에 시선을 두는 이는 딱히 없어 보였다.

준비가 좀 늦네. 그쵸?”

투덜거리듯 말하며 에밀리는 바로 근처에 있는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그 말은 딱히 누군가를 특정하고 향한 말은 아니어서, 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 말을 이어나갔다.

그러게요. 뭔가 일이 있는 것은 아닐까요?”

더 기다리긴 지치는데. 갑자기 손님 접대가 엉망이네요. 집주인이 누군진 몰라도 이렇게 되면 민망하겠어요.”

에밀리는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꼬며 말했다. 그 모습도 교양이 있는 모습이라고는 말하기 힘들지도 모르지만, 연은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연은 시계를 바라보았다. 예정된 시간보다 이십 분 정도 일정이 늦어지고 있었다. 행여 음식 같은 것이 늦어지더라도 메이드 중 누군가는 양해를 구하러 와야 할 시간이었다. 연은 저녁 식사 때 보았던 메이드들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들이 이 정도로 손님을 내버려 둘 것 같지는 않았다.

첫 번째 사건은 필립에 의해 밝혀졌다.

일이 어떻게 되었는지 대표로 물어보고 오겠다던 필립이 사색이 되어 뛰쳐 들어왔을 때, 지영과 연은 본능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 수 있었다. 필립은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메이드들이. 지영은 눈을 꼭 감았다. 그 뒤는 더 이상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지영은 불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지영의 기억이 확실하다면, 메이드들은 적어도 다음 날 아침까지는 살아있어야 할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첫 번째 피해자를 발견하는 것이 그들이니까. 이것은 완전히 새로운 사건이었다.

가보죠.”

먼저 앞선 것은 연이었다. 연은 지영의 손을 잡았다. 지영은 연의 손 역시 차갑고 축축하다고 생각했다. 지영은 이 일이 연이 미스테리부에 들어온 후 첫 번째로 맡은 일이었다는 것을 문득 깨달았다. 지영은 연의 손을 한 번 꽉 맞잡았다. 자신은 연의 선배였고, 때문에 모범을 보여야 하는 것이 맞았다. 지영은 연보다 한 발 더 먼저 발을 내딛었다.

주방의 모습은 끔찍했다. 지영은 도무지 그 광경까지는 볼 수 없어 연의 이야기를 듣기만 했다. 연의 말에 따르면 주방은 거의 피바다였다고 했다. 뭔지 모를 국물들이 냄비에서 끓어 넘치고 있었다. 홀로 나갈 준비가 끝난 음식들이 접시 위에서 장식된 채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그것은 그곳에 있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연의 얼굴이 창백하게 굳어있었다.

선배가 읽었던 소설도, 이랬나요?”

연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지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찌 되었든 이제부터 이런 광경을 몇 번은 더 봐야 할 것이라고, 지영은 말했다. 이 일이 끝나고 나서도, 연은 계속 예전처럼 일할 수 있을까? 그것은 지영도 마찬가지였다. 나름대로 미스테리부의 일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한 지영이었지만 시체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미디어에서 보여지는 시체라는 것은 너무 얄팍한 것들이라고 지영은 생각했다.

사람들은 모두 홀에 모여 있었다. 안나는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린 채 훌쩍이고 있었다. 두려움 때문일까, 아니면 죽은 사람에 대한 애도일까? 데이지는 그런 안나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그녀를 위로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 역시 컨디션이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에밀리와 필립은 지영과 연의 근처에서 집주인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고 있었다. 필립의 입에서 집주인을 향한 욕이 튀어나왔다.

나는 내일 당장 이 집을 떠야겠어.”

배가 없을 텐데요.”

연의 말을 듣고 에밀리는 몸을 가볍게 떨었다. 이 섬 밖으로 연락할 수 있는 수단은 없었다. 삼 일 뒤에 배가 온다는 사실을 지금 같은 상황에서 그들은 믿을 수 있는가? 집주인이 누군지도 모르는 이 상황에서? 에밀리 역시 그것을 깨달은 것처럼 보였다.

아무튼!”

그녀는 몸을 휙 돌려 계단을 올랐다. 그것을 시작으로 홀에 있던 사람들도 한둘 이 층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홀에 지영과 연 두 사람밖에 남지 않게 되자 두 사람은 구석구석을 살펴보았다. 책벌레는 보이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필립을 조사해보는 건 의미 없겠죠?”

그 사람도 정말 당황한 것처럼 보였는데.”

그럼 역시, 다른 범인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겠지.”

짙은 붉은색 쿠션을 소파 위로 던지며 지영이 말했다. 지영은 추리를 하는 것엔 별로 자신이 없었다. 이 사건이 해결되기 전에 책벌레 무리를 찾을 수 있을까? 앞이 깜깜했다. 괜히 저택 여기저기를 들쑤시고 다니느라 다른 사람의 의심을 사는 일만 없으면 좋겠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지영과 연은 함께 밤을 보냈다. 그들이라고 편히 잠을 잔 것은 아니었다. 두 사람 다 밤새 잠을 뒤척이면서도 대화를 나누는 일은 없었다. 살인 사건이 일어날 것임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단순히 머릿속으로 알고 있는 것과 그 사건의 당사자가 되는 것은 분명히 달랐다. 멀리서 동이 트기 시작한 시간이 돼서야 지영은 짧은 잠에 들었다. 옅은 잠에 들었다가 깨어났을 때 눈에 보이는 것은 연이었다.

   “푹 주무셨습니까?”

   “연이는안 잤어?”

   “잠이 안 와요. 그리고 원래 밤은 잘 샙니다.”

   두 사람은 몸을 일으켰다. 아직도 근육이 딱딱하게 굳어있는 것 같다고 지영은 생각했다. 연은 고개를 좌우로 까딱꺼려 뭉친 어깨를 풀어보려 하고 있었지만 잘 되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지영은 연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가볍게 안마라도 해줄 목적이었다.

   “간지러워요!”

   연은 몸을 꿈틀, 움직이면서도 킥킥대며 웃었다. 그들은 잠시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지영과 연은 동시에 긴 숨을 내뱉었다. 그러고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제 일 해야지요.”

   “별로 안 하고 싶은데.”

   “어쩌겠어요. 월급 받으려면 해야죠. 선배 저 방 가서 준비하고 올게요. 좀 있다 계단 앞에서 만나요.”

지영은 문을 나서는 연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며 조심하라는 말을 덧붙였다. 문이 닫힌 후 지영은 길게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바다는 잔잔했다. 바닷바람에 간간이 파도가 쳤지만 배가 뜨지 못할 정도의 날씨는 분명 아니었다. 하늘도 맑았다. 외부로 연락만 할 수 있다면 탈출하는 것은 무리도 아닐 것 같았다.

외부로 연락만 할 수 있다면.

지영은 생각을 접고 몸을 씻기 시작했다. 연의 말대로 이젠 정말 일을 해야 할 때였다. 빨리 책벌레 무리를 발견해서 이 일을 끝내고 싶었다. 그러고 다시 현실로 돌아가서 좀 쉬고 싶었다. 아무리 좋은 침대라도 이런 상황에 그 감촉을 제대로 느낄 수 있을 리는 없었다. 자신의 방에 있는 싸구려 침대에 눕는 것이 피로 회복에 훨씬 더 도움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지영과 연은 계단 아래가 소란스럽다고 생각했다. 불길한 감각이었다. 연이 홀로 뛰어 내려갔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필립의 얼굴이었다.

두 분은 괜찮으십니까.”

그렇다는 건.”

에밀리가.”

필립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당장 시체는 보이지 않았다. 지영은 벽난로 위로 시선을 옮겼다. 당연하게도 여자 인형 하나가 손상되어 있었다. 도자기 인형의 머리는 분리되어 인형의 앞에 놓여 있었다. 절단면은 깔끔했다. 필립이 곧 지영의 시선에 따라붙었다. 그는 그 도자기 인형을 이번에 처음 보는 것 같았다.

우연은 아니겠지요?”

아마도.”

지영의 대답에 필립은 남자 인형을 손에 들었다. 마치 그 인형이 없으면 자신은 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필립은 그녀가 방에서 목이 졸린 채 발견되었다고 말했다. 첫 발견자는 이번에도 그였다. 지영은 그의 얼굴이 눈에 띄게 어두워진 것을 알아챘다. 그도 심정적으로 괴롭긴 할 것이었다.

연은 시체를 확인하고 오겠다고 이 층으로 다시 올라갔다. 지영은 혹시 누군가 더 빠진 사람이 없는지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신을 포함해서 세 명밖에 없었다. 한 명이 더 있어야 할 텐데?

안나가 없었다.

안나는요?”

아침 내내 못 봤습니다. 방엔 없었어요.”

두 사람은 저택 여기저기를 뛰어다녔다. 지영은 그렇게 경계하던 필립에게 감정적으로 친밀감을 느끼고 있는 자신이 조금 낯설었다. 지금 자신에게 있어 필립은 살아나가고자 하는 인물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책벌레로 바뀐 책 속의 세상에서, 이 사람이 단순히 살인을 위해 살인을 했던 사람이었는지 아니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미 그의 캐릭터는 바뀌어 있었다.

가을 햇살이 쨍했다. 아침보다는 바람이 조금 더 강하게 불고 있었다. 그들은 저택 주변을 한 바퀴 돌아보았지만 그다지 수확은 없었다. 저택 바깥에서 더 찾아볼 수 있는 곳이라고는 숲 정도밖에 없었다. 앞으로 이틀만 더 버티면 배가 온다고 했다. 버티려면 방에서 문을 잠그고 틀어박히는 것이 숲으로 가는 것보다 훨씬 더 나은 선택이었다. 그녀가 그 정도 판단을 못 할 사람은 아니었다. 결국 두 사람은 안나의 흔적을 찾지 못한 채 저택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죽을 때 저항은 없어 보였습니다. 아마 약 같은 걸로 푹 재우지 않았을까요.”

지영과 연은 홀에서 에밀리의 시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지영은 벽난로를 바라보았다. 아직 파손된 인형은 에밀리의 것 하나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버렸기에 홀에는 두 사람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남은 사람들 모두 오늘 아무것도 입에 대지 않았으나 아무도 식사를 찾지는 않았다. 입맛이 떨어진 것도 이유였지만, 음식을 찾으려면 메이드들의 시체 사이에서 음식물을 찾는 수밖에 없었다.

끈은?”

드레스의 끈을 이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고생했어. 너도 이런 일에 낯설 텐데.”

선배보다는 괜찮으니까요. 그나저나 안나는, 결국 못 찾았습니까?”

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그녀는 살아있다는 뜻이었다. 그녀는 과연 어디에서 뭘하고 있는걸까? 그녀의 행동은 사람들에게 불안감을 불러오고 있었다. 그녀가 범인이 아닐까, 하는 불안이었다. 지영은 안나의 모습을 떠올려보았다.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소공녀의 이미지에 아주 가까운 인물이었다. 그녀는 아마 여자치고는 키가 큰 편에 속했다. 잘 모르긴 모르지만, 이 정도 시대에서는 그녀의 키가 흠으로 작용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지만 이때가 아무리 여자에게 가혹한 기준이 가해지는 시대라고 할지라도 그녀는 그녀의 아주 작은 단점 정도는 쉽게 덮을 수 있을 정도로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지영은 그녀의 가는 손목과 목을 떠올렸다. 그런 그녀가 그런 끔찍한 범죄를 저지를 수 있을까? 범죄자라는 것이 외형으로 판단할 순 없다고 하지만……. 지영은 안나가 그 가는 손목으로 사람의 목을 조르는 것을 상상해보았다. 소름이 안 돋지는 않지만. 지영은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별로 자신은 없었다.

안나 씨요? 선배, 처음 여기 왔을 때 항구 모습 기억나십니까?”

아니, ? 배라도 있었어?”

연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무언가를 확신하고 있었다. 지영은 연의 눈빛을 읽고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지만 지영의 마음속에서는 그녀과 과연 배를 운전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이 일고 있었다.

연의 예상대로 항구는 텅 비어있었다. 배를 묶고 있던 밧줄이 잘린 흔적도 없었다 어쨌든 그녀는 배를 타고 떠난 것이었다. 지영은 그것이 자의이기만을 바랐다.

안나 아버지가 해상과 관련된 일을 하신대요.”

그렇다고 안나가 배를 운전할 수 있는진 모르잖아. 이 시대에서는,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더 높지 않을까?”

일단은 믿어봐요, 우리.”

연이 지영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정말로 안나가 떠난 것이라면, 그들은 예정된 일정보다 더 빨리 이 섬을 탈출할 수 있을 것이었다. 두 사람은 그 사실로 기운을 차린 후 책벌레를 찾기 위해 섬을 한 바퀴 돌아보았다. 웬만큼 큰 무리가 있지 않은 이상 이 정도로 이야기가 바뀌진 않을 텐데. 지영은 그 사실이 자꾸만 걸렸다. 결국 그날도 그들은 책벌레를 찾는 것에 실패했다.

 

배가 와야 할 날짜가 되었는데도 배는 도착하지 않았다. 범인도 그동안은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도리어 그것이 생존자들의 피를 더욱 말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서로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데이지가 연을 범인으로 의심하는 바람에 그 두 사람의 사이는 거의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거기다 배까지 제때 도착하지 않으니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그날 저녁은 홀에 모인 사람 중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변화를 가장 먼저 알아챈 것은 의외로 신경과민 증세를 보이고 있던 데이지였다.

여자 인형 하나의 목이 없어져있었다. 데이지의 짧은 비명을 뒤로하고 지영과 연은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눈빛에서 서로의 생각이 똑같음을 그들은 읽어낼 수 있었다. 그들은 급히 발을 옮겼다. 어디로 가느냐고 소리 높여 그들을 부르던 필립도 곧 그들의 뒤를 따랐다. 항구에는 배 한 척이 돌아와 있었다. 표면에 자잘한 상처가 많은 작은 보트였다. 지영은 무심코 보트의 안을 보았다가 급히 고개를 돌렸다. 속에서 신물이 올라왔다.

목이 없는 시체는 이미 부패가 제법 진행된 이후였다. 이것이 안나라는 것은 옷을 통해 알 수 있었다. 그녀가 마지막까지 입고 있었던 옷은 엉망이 된 상태였다. 그녀의 소매 끝이 검게 물들어 있었다. 손톱도 몇 개인가 빠진 것처럼 보였다. 머리의 행방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지영은 이 시체가 바다를 헤매다 우연히 다시 이 항구로 돌아왔으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것은 분명 의도된 것이었다. 엄청난 악취미였다. 이제 와서야 인형을 부순 것도 그랬다. 배는 돌아왔지만 셋 중 어느 누구도 그것을 타고 나갈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들에게 이것은 경고처럼 느껴졌다. 책의 안에서 죽으면 어떻게 되나? 그 생각만이 지영의 머릿속을 채웠다. 만약 현실로 돌아가지 못한다면. 지영은 곁눈 길로 연을 바라보았다. 연은 입을 앙다문 채 먼 바다를 보고 있었다.

그때, 길고 날카로운 비명이 무거운 공기를 발기발기 찢었다. 데이지! 세 사람은 몸을 돌려 저택을 향해 달렸다. 흙투성이 발이 홀에 도착했을 때 데이지는 자신의 배를 끌어안고 있었다. 안 돼. 가느다란 목소리가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비록 뒷모습이었지만 지영은 그녀가 무엇을 주워 담기 위해 애쓰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지영은 결국 몸을 돌리고 바닥에 위액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지영은 데이지가 쓰러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 순간 지영의 눈앞이 어두워졌다. 사람이 너무 충격을 받으면 잠깐 앞도 안 보이게 되나? 입안에 고여있는 신 침의 맛을 느끼면서도 지영은 그렇게 생각했다. 지영이 구부리고 있던 허리를 곧게 편 순간 지영의 시야가 크게 흔들렸다. 아직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지 않은 상태임에도 그것은 또렷하게 느낄 수 있었다. 뒤통수가 얼얼하다고 생각한 그 순간 누군가 지영의 뒤통수를 다시 가격했다. 지영은 연의 목소리가 아주 멀리서 들리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지영은 자신의 입술이 바짝 말라있는 것을 느꼈다. 아직은 눈이 좀 흐렸다. 눈이 좀 따끔거리는 것도 같았다. 연은 지영이 제정신을 차릴 때까지 손을 잡아주며 기다렸다. 연은 지영에게 말해야만 하는 것이 있었다.

사건은 끝났습니다.”

지영이 목을 축이고 난 이후에 연이 입을 열었다. 연의 말을 듣는 순간 지영은 다시 목이 타는 것 같았다. 물은 한 모금 더 마시면서 살핀 연의 표정은 어둡기만 했다. 아무래도 원하던대로 사건이 끝난 것 같지는 않았다. 지영은 마음의 준비를 했다.

선배가 일어나면당장 데리고 돌아가라고 했습니다. 배를 준비해두었다고. 그리고 현실로 돌아가서…….”

뭐라고?”

지영의 목소리가 뒤집어졌다. 연은 지영의 시선을 피했다.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고…….”

얼굴은?”

못 봤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냐. 네 잘못은 아니니까.”

잘못은 온전히 범인의 것이었다. 일단은 돌아가자. 지영은 연의 어깨를 감싸쥐었다. 그들은 가지고 온 짐을 그대로 두고 방을 나섰다. 지영은 층계참에서 남자 인형 하나가 박살 나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필립의 시체는 계단 바로 아래에 있었다. 수많은 상처보다도 눈도 제대로 감지 못한 얼굴이 지영의 눈에 먼저 들어왔다. 지영은 고개를 돌렸다.

그들이 섬에 들어올 때 타고 왔던 것과 같은 여객선이 항구에 있었다. 이 섬에 들어올 때 두 사람이 서 있었던 갑판에는 두 개의 도자기 인형이 나란히 누워있었다. 연은 인형을 바다로 던져버렸다.

 

* *

 

괜찮아. 상황 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한 우리 잘못인걸.”

남자의 눈썹은 아래로 축 쳐져 있었다 책은 리콜 처리가 되었다. 지영과 연이 현실로 돌아온 이후 책의 모든 내용이 소멸되어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영과 연은 사건 이후 일주일 동안의 휴가 동안 서로에게 거의 연락하지 않았다. 연이 지영에게 전화를 건 것은 두 사람의 휴가 마지막 날 새벽이었다. 그들은 전화를 하면서도 사건에 대한 말은 하지 않았다. 그저 서로의 안부 인사를 나누고 전화를 끊었을 뿐이었다.

아마 연쇄성이 있는 사건이겠지.”

남자는 특별반이 편성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특별반의 구성원은 거의 정해졌으며, 남은 것은 지영과 연의 선택뿐이라고 말했다.

두 사람이 원한다면 다른 부서로 보내줄 수 있는 것으로 결정되었어. 전적으로 우리 책임이니 그에 따른 불이익은 없을 거다.”

저는 계속할 겁니다.”

남자의 말이 끝나자마자 연이 대답했다. 남자는 의외라는 듯 눈을 뜨고 그 이유를 물었다.

사실안 무서운 건 아닙니다. 근데, 이렇게 끝내는 건 뒷맛이 너무 나빠서요. 저희가 속수무책을 당했던 것은 아무 정보도 없이 부딪혔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특별반까지 편성된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봐요.”

지영이는?”

저는.”

지영은 말끝을 흐리며 연을 바라보았다. 사실 지영은 휴가 기간 동안 위쪽에서 이 사건에 대한 대책을 세우리라는 것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다. 그것이 특별반 정도의 규모일줄은 생각지도 못했지만. 거기다 이 지긋지긋한 미스테리부를 빠져나갈 수 있는 기회라니. 지영에게 있어서 지금 이 기회는 미스테리부를 빠져나갈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임은 확실했다.

저도 할게요.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지영은 연을 바라보았다. 지영과 눈이 마주치자 연은 살짝 웃어 보였다.

이번 건만 해결하고 빠지겠습니다. 제 커리어에 오점 하나 남기고 싶지 않아서 하는 거니까요. 판은 벌인 사람이 치워야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말을 끝내고 지영이 긴 숨을 내쉬었다. 그래, 이렇게 되면 되는 것이다. 커리어 문제는 사실 핑계에 불과했다. 여기에 있는 모두 다 그것을 눈치 채고 있을 것이었다. 일주일 동안 지영은 사건에서 멀어지고 싶은 욕구와 조금 더 파헤치고 싶은 욕구를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지영은 범인이 지영과 연에 관심을 두고 있다고 느꼈다. 그렇다면 그것에 보답을 해줘야 하는 것이 지영의 성격이었다.

그럴 것 같아서 위에는 이미 한다고 말해뒀어.”

남자는 무심하게 말을 뱉곤 가방에서 서류 뭉치를 꺼내 두 사람에게 내밀었다. 특별반에 관련된 서류였다. 한동안 고생 좀 하겠네. 지영은 그것이 비꼼의 의미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지영이 씩 웃어 보였다.

이번 일 해결하고 다른 부서로 옮겨서 성공할 겁니다.”

네네, 그건 그때 가서 알아서 하시구요.”

   지영은 이 선택의 결과가 어떻든 후회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지영과 연은 서로를 마주보았다. 사실 지영은 아직 모든 것이 막막했다. 특별반이 있다 해도 아무 소용없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사건은 이미 벌어졌다. 그리고 그것은 지영과 연 두 사람을 애타게 부르고 있었다.

   “선배, 이따 술 마시러 갈래요? 그때 그 술집요.”

   “좋지. 이번엔 네가 사라.”

   “저는 선배가 다른 부서로 갈 줄 알았습니다.”

   “나도 그랬어.”

   “그래도 선배가 같이 있어서 든든해요.”

   지영은 연의 머리를 장난스럽게 쓰다듬었다. 연이 이 정도 접촉을 허용할까 조금 긴장하기도 했지만, 사람 좋게 웃어 보이는 연의 표정을 보고 지영 역시 마음이 좀 풀렸다. 지영은 여유가 좀 있을 때 연과 좋은 추억을 쌓아야겠다고 결심했다. 퇴근 이후에 함께 갈 술집은 그것의 시작이 될 것이었다.

 

*

 

   너무 좋은 말을 많이 들었지만 아직 퇴고 손대지 못한 글......ㅜㅜㅜㅜ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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