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연
Y A G I
15
“저기, 토오루.”
“네?”
사사키가 토오루에게 말을 건 것은 그들이 감금된 지 약 3일가량 되었을 때였다. 물론 그것은 사사키 하이세가 식사의 주기로 판단한 정보이기 때문에, 실제로 그보다 더 오래 이곳에 갇혀 있었을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여기에 얼마나 있었는가가 아니라, 무츠키가 얼마나 버틸 수 있는가였다.
사사키에 비해 터무니없이 형편없는 식사. 무츠키는 그런 식사를 손도 쓰지 못한 채 엎드려서 힘겹게 식사를 해야 했다. 이대로 시간이 더 흐르면 무츠키의 몸이 손쓸 수 없을 정도로 나빠질지도 모른다. 그 생각에 사사키는 조금 초조했다.
생각해놓은 방안이 있기는 했지만, 그것이 과연 얼마나 통할까. 그런 생각을 하며 사사키는 입을 열었다.
“사실은, 무츠키가 좀, 신경 쓰여서.”
토오루는 무표정하게 무츠키를 바라보았다. 그는 사사키가 무츠키에 대해 얘기하는 걸 달가워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자신을 제외한 모든 것에 그런 행동을 보였다.
뭐가 신경 쓰이는데요?
착 가라앉은 목소리에 사사키의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지만, 사사키는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양 말을 이어갔다.
“더 진한 걸 하고 싶어도, 맘 편하게 못 하잖아.”
“…더 진한 거요?”
“응. 더 진한 거.”
토오루의 얼굴이 눈에 띄게 붉어졌다. 아이, 정말. 양손으로 얼굴을 가린 토오루는 부끄럽다는 듯이, 그리고 기쁘다는 듯이 사사키에게 말했다.
“정말, 하이세 오빠는, 정말.”
가볍게 사사키의 어깨를 때린 토오루는 곧 무츠키에게 향했다. 토오루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무츠키의 머리채를 붙잡아 그를 일으켰다. 무츠키는 반항은커녕 제대로 서 있는 것조차 어려워 보였다. 무츠키의 숨결은 곧 끊어질 것처럼 이어지고 있었다.
“무츠키 언니, 잠시 다른 곳에 가 있어요.”
“그냥 풀어줘. 이 집에 토오루랑 단둘이서만 있고 싶거든. 처음은, 이런 지하실보다 적어도 침대 위에서 하고 싶어.”
그 말에 토오루는 사사키를 보았다. 얼굴은 완전히 달아오른 채였다. 토오루가 생각했던 ‘더 진한 것’이 맞았다. 지금까지 하이세를 돌보고, 사랑한다 말하고, 입 맞추고, 껴안았던 것이 이렇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하이세 오빠를 이제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
그 생각만으로도 아드레날린이 솟구쳤다.
“무츠키 언니만 여기 가두면 되잖아요. 그럼 방해도 안 되고.”
“아무리 그래도 무츠키는 내 후배야. 후배에게 성적인 행위를 알게 하는 건, 아무리 내가 남자라지만…… 부끄러운 일인걸. 우리 집 방음 잘 안 되는 거, 토오루도 잘 알고 있잖아?”
거기다가 그렇게 되면 우리 둘만의 관계가 되는 게 아니잖아. 안 그래?
사사키의 말에 무츠키는 마치 그의 말 속으로 퐁당 빠져드는 것만 같았다. 토오루는 거침없이 무츠키의 결박을 끊고, 그를 문 쪽으로 밀쳤다. 무츠키는 힘없이 밀려나 바닥에 쓰러졌다.
“그래서 더 진한 게, 뭐예요 오빠?”
토오루가 사사키의 무릎에 올라타 앉으며 말했다. 사사키는 바로 대답하는 대신 그 뒤의 무츠키를 바라보았다. 아직도 쓰러져 있는 무츠키. 설마 도망갈 기운조차 없는 걸까. 토오루는 사사키의 뺨과 턱을 손끝으로 쓰다듬었다.
“눈 감아봐.”
사사키의 말에 토오루는 눈을 감았고, 두 사람은 입을 맞췄다.
농염한 밀도의 타액이 서로 섞였다. 사사키는 눈을 감고 있는 토오루를 바라보았다. 이 아이는 진심이다. 하지만 모든 진심이 옳은 것은 아니었다.
나를 희생해서 한 생명을 살릴 수 있다면. 사사키는 눈을 감았다. 무츠키가 몸을 일으킬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벌기 위해 더욱 적극적으로 토오루에게 다가섰다.
그리고 곧 토오루의 입술이 떨어졌다.
“……무츠키.”
“사사키 선배.”
그곳에는 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는 무츠키가 있었다. 무츠키의 손에는 망치가 들려있었다. 무츠키는 힘없이 팔을 늘어뜨렸고, 망치가 시멘트 바닥에 부딪히며 커다란 소리를 냈다. 그럼에도 쓰러진 토오루는 일어나지 않았다.
사사키는 무츠키의 손을 잡아 그를 부축하려 했다. 그러나 무츠키는 그 손을 밀어내고 다시 망치를 잡았다.
둔탁한 소리가 몇 차례나 이어졌다. 사사키는 충분하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모든 것을 잃은 무츠키에게 충분한 것이란 없을 터였으니.
“괜찮아?”
사사키는 아직도 떨리고 있는 무츠키의 어깨를 조심스레 안았다. 경찰이 곧 두 사람에게서 진술을 들을 예정이라고 했다. 그때까지 무츠키가 괜찮아지길 바라며, 사사키는 자신의 체온을 나누어주었다.
“……선배는 너무 착해서 탈이라니까요.”
“무츠키야말로.”
무츠키의 떨림이 점점 더 엷어지고 있었다. 무츠키는 사사키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두 사람의 악몽은 이걸로 끝인듯했다.
16
“토오루!”
“아, 선배!”
무츠키는 약간 목소리를 높여 사사키의 부름에 응했다. 그 사건 이후, 무츠키가 이사를 하였기 때문에 두 사람은 제법 간만에 얼굴을 보는 것이었다. 워낙에 큰 사건이라 어딜 가나 무츠키를 알아보는 사람은 있었지만, 그래도 그 끔찍한 기억이 있는 마을에서 벗어나는 것만으로도, 무츠키에겐 큰 도움이었다.
“미안해, 기다리게 했네.”
“아녜요. 제가 일찍 나온 건데요.”
일찍 나올 수밖에 없었다. 간만에 사사키를 만나는 날이었으니까. 무츠키는 그날 이후로 사사키에게 묘한 연정을 품고 있었다. 사지를 헤쳐나온 동지애와는 어딘가 다른 감정이었다. 그 감정은 K군을 짝사랑했을 때 느꼈던 감정과는 또 달랐다.
무츠키는 이런 것이 정말로 사랑인가,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물론 사사키가 무츠키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모를 일이었지만, 서로 성이 아닌 이름으로 부르기로 약속했고, 또 그 약속을 철저히 지키는 것으로 보면 사사키도 무츠키에게 아주 감정이 없는 것은 아닌 듯 보였다.
“토오루는 요즘 어때? 괜찮아? 나보다 더 힘든 일을 많이 겪었잖아.”
“가끔 악몽 꾸는 것 빼고는 괜찮아요. 선배가 곁에 있어 주니까요.”
“믿음직스럽게 여겨줘서 고맙네.”
사사키의 말에 무츠키는 싱긋 웃었다. 두 사람은 거리를 걸었다. 벌써 졸업식 시즌이었다. 사사키는 대학에 진학한다고 했고 그 대학은 마침, 무츠키가 이사를 간 지역과 아주 가까이 있었다.
“그나저나 머리는…….”
“아. 스트레스 때문이라는 것 같아요.”
무츠키는 곤란한 듯 말했다. 어느 순간부터 백발이 자라기 시작했다. 마치, ‘그’ 무츠키 토오루처럼. 지금은 원래의 머리카락 색보다 흰 머리가 훨씬 더 많았다. 사건의 후유증이 이런 것이라니, 얄궂은 일이었다.
“신경 쓰이죠, 아무래도? 염색할까요?”
“아냐, 괜찮아. 토오루가 괜찮다면, 나도 괜찮아.”
“선배는 역시 좋은 사람이에요.”
그렇게 말하며 무츠키 토오루는 부드럽게 웃었다. 사사키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사랑으로 가득 차 있었다. 사사키는 자연스럽게 무츠키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무츠키 토오루는 그 온기가 너무나도 기뻤다. 이 온기가 오직 내 것이라니. 무츠키 토오루의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지금까지의 일이 모두 녹아버리는 따스함.
“어, 하이세 오빠 맞죠!”
그때 누군가 사사키를 불렀다.
사사키는 몸을 돌려 목소리의 주인을 보았다. 하이세 ‘오빠’라니. 무츠키의 관심 역시 사사키의 시선을 따랐다. 그곳에는 낯선 여성이 있었다. 사사키는 반갑게 웃으며 그에게 인사를 했다.
“아, 오랜만이야.”
“오빠, 잘 지냈어요?”
“응. 그럭저럭. 아, 이쪽은 무츠키 토오루. 학교 후배야.”
여자는 무츠키를 빤히 바라보았다. 무츠키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곧이어 다시 사사키에게로 시선을 돌린 여자가 장난스레 웃으며 말했다.
“여자친구가 아니라요?”
“아니야, 그런 거.”
어째서 그 사실이 이렇게 서글플까. 무츠키는 계속해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들었다.
“나, 오빠 좋아했던 거 알죠? 저 아직도 좋아한다구요.”
“그런 말은 됐어.”
“진심인데. 각오하라고요, 오빠! 제가 대학만 가면 아주 그냥.”
여자는 여전히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고, 사사키는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치고 있었다. 무츠키는 이 상황이 퍽 싫었다. 질투가 났다. 그런 말 같은 걸, 다른 사람이 하게 두는 사사키가 미웠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그 여자가 미웠다.
“아는 사람이에요?”
“응. 교외 활동하다가 알게 됐어. 간만에 보네.”
“응……. 혹시, 저 사람 이름은 뭐예요?”
무츠키는 사사키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것은, 사랑에 빠진 소녀의 눈빛이었다.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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