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프트 좀비물 #갑자기 삭제될 수도 있음
천사 케루빔은 신 앞에 선다
Y A G I
애인 있어요. 안은 박의 말을 몇 번이고 곱씹었다. 그때 아마 자신의 애인을 떠올리고 있을 터였던 그녀의 표정은 어떠했는가. 안은 도무지 그 얼굴을 기억해낼 수 없었다. 안은 그저 박의 애인 있어요, 하는 그 말만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래서 안은 그 목소리를 그렇게 오랫동안 복기할 만큼 그녀를 사랑했고 사랑하는가. 그렇게 생각하면 그것은 또 아니었다. 어쩌면 그 이상한 공간과 상황 속에서 안은 그저 마음 놓고 쉴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던 것일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것이 항상 혼자서 말도 없이 좀비들을 빤히 지켜보았던 박이었을지도.
안은 여전히 박이 준 유리 조각을 버리지 못했다. 굳은 피가 묻은 유리 조각은 안이 싸구려 팬시점에서 사 온 작은 박스 안의 새의 둥지 같은 종이 뭉치들 사이에 끼어있었다. 안이 직접 박과 그녀의 애인을 죽였던 그 유리 조각은 그렇게 의식적으로 방치되고 있었다.
¶
실험실을 나가면 좀비가 된대. 점심시간이었다. 그들이 좀비를 접하지 않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그들 중 대부분은 꼭 좀비 이야기를 했다. 안은 주로 그런 이야기를 들어주는 편이었다. 그날도 그랬다. 안은 미간을 좁히며 그럴 리가 없잖아, 하고 그의 말에 답하곤 밥을 국에 말았다. 여기 와서 생긴 버릇이었다. 처음에는 넘어가지도 않는 밥을 억지로 삼키려는 목적이었지만 지금은 단순히 습관으로 굳어버린 것이었다.
“왜, 국가 기밀 같은 거라서 발설할까 봐. 영화 보면 그런 일 있잖아.”
안은 남자의 말에 허, 하고 숨을 뱉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물론 들어올 때 기밀 사항을 밖으로 누출하지 않겠다는 서약서에 서명을 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좀비로 만들만한 나라는 아니었다. 아직은 살아있는 사람들의 인권은 보장하는 나라였으니까.
물론 죽은 자들의 인권은 보장되지 못했다. 애초에 그들은 인간이라기보다는 시체에 가까웠고.
“나도 국가 기밀 하나 말해줄까?”
“뭔데?”
“너 이에 김 가루 꼈어.”
“국가 기밀을 발설한 죄로 좀비가 되어야겠는데.”
“안 그래도 이제 그 좀비 보러 간다.”
안은 의자를 뒤로 밀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같이 가. 남자는 안의 뒤를 따랐다.
좀비, 하면 요즘 사람들은 어기적거리며 걷은 좀비보다는 인간보다 훨씬 뛰어난 능력을 갖춘 좀비를 떠올리지 않을까. 달리거나, 매달리거나, 신체의 일부만 남아도 살아 움직인다거나. 하지만 현실의 좀비는 그와 달랐다. 본능만이 남은 썩은 짐승 같은 것들. 그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지만, 그렇다고 완전한 존재는 아니었다. 그들은 조금씩 죽어가고 있는 존재였다.
그렇게 생각하면 인간과 별로 다를 것도 없나. 안은 눈앞의 좀비를 바라보며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누군가가 우리도 살아가는 것이 아닌, 죽어가는 것이라는 말을 했던 것이 떠올랐다. 안은 여전히 그 말을 별로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오늘의 피험체는 여성이었다. 원래는 안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맡아야 했지만, 컨디션이 좋지 않다는 말에 안이 대타로 맡게 된 좀비였다. 포획되는 과정에서 떨어져 나간 팔 한쪽의 환부가 적나라하게 보였다. 현실의 좀비들은 그저 죽었다 살아난 시체였기 때문에 그다지 위험하지 않았음에도 안은 신체가 과도하게 손상된 좀비들을 왕왕 볼 수 있었다. 어쩌면 우리가 미디어에 길들여진 탓에 그들을 너무 강한 존재로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이겠지. 피험체는 안을 먹고 싶어서 이를 딱딱거렸지만 의자에 묶인 상태에서 안을 먹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런 좀비들을 데리고 실행되는 인지 실험이 좀비에 대해 알아가는 데 얼마나 도움을 줄까. 안은 이 모든 것들이 보고서에 ‘인지 능력이 떨어짐’이라는 아주 짧고 건조하나 문장을 쓰는 것 이상의 가치가 없는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해서 실험을 하지 않을 수는 없는 법이었다. 안은 실험을 위해 좀비의 앞에 간이 의자를 펼쳤다. 누군가 문을 힘없이 두드렸다. 들어오세요. 그때 안은 처음으로 박을 보았다.
박은 처음 보는 사람에 놀란 듯 잠시 굳어 있다가 옅은 갈색의 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안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안은 그녀의 창백한 피부를 보았다. 박은 이 실험에 자원한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런 것치고 그녀는 실험에 최소한의 성의 이상을 보이지 않는 편이었다. 그녀가 이 실험에 자원한 것은 단 하나의 이유였다. 피험체, 그녀에게는 ‘절친한 친구’였던 이 좀비가 죽는 과정을 마지막까지 보고 싶어서. 처음으로 그 보고서를 받았을 때 안은 박을 이해하지 못할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안이라면 과연 흉하게 한쪽 팔이 떨어져 나간 썩어가는 친구를 끝까지 보고 싶었을까. 안은 머릿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것은 살아있는 사람에게도, 죽었다 살아난 좀비에게도 끔찍한 일이었다.
어쨌든 그 끔찍한 일을 박은 하고 있었다. 박은 자신을 위해 준비된 의자에 앉아 좀비를 바라보았다.
“안녕. 오늘도 찾아왔어.”
박의 목소리는 미묘하게 톤이 높은 편이었다. 안은 뒤늦게 녹음기를 작동시켰다.
“나는 지난밤에도 네 꿈을 꿨어. 기억해? 우리 둘이 한겨울에 한강에 찾아간 거. 완전 얼어 죽을 뻔했다고, 내가 한여름에 에어컨을 켤 때마다 네가 그런 말을 했잖아.”
피험체는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이를 딱딱거리거나 주위의 모든 것들에 무의미한 시선을 던지거나, 묶여있는 몸을 숙여 자신의 발가락이라도 뜯어먹으려고 애쓰고 있었다. 피험체, 인지 능력 없어 보임. 안은 메모장에 미리 써둔 그 문구를 다시 한번 보았다. 박은 과거의 추억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었다. 안은 마치 남의 일기장을 들춰보는 느낌이 들어서 그렇게 유쾌하지 않았지만, 어쨌든 그것은 자신의 일이었기에 묵묵히 박의 말을 들었다.
박이 하는 말들은 정말로 사소한 일들이었다. 예를 들면 냉장고를 제대로 채워놓지 않았을 때 대신 마트 배송을 해줬다거나, 이전에 함께 본 영화의 감상이라거나, 네가 개를 무서워해서 지름길을 두고 빙 둘러간 이야기라거나.
“실험자가, 이전에 개를 무서워했었나요?”
그의 질문에 박이 안을 돌아보았다. 박의 눈동자는 창백한 그녀의 피부와는 달리 예리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그 대비되는 인상이 안의 마음에 박혔다. 안은 그것이 아주 오래오래 갈 것이란 것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어렸을 때 개한테 물린 적이 있다고 그랬는데, 아. 팔이 없어져서 확인은 못 하겠군요.”
어쩌면 그것은 안과 이 시설을 비꼬는 이야기일지도 몰랐지만, 안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안은 무언가 말을 더 건네려다 이 모든 대화가 녹음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입을 다물었다. 박은 다시 자신의 이야기를 조곤조곤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이후에 안은 이 피험체의 담당이 될 수 있는지 슬쩍 자신의 상사에게 전했다. 나머지는 말랐는데, 배만 나온 남자가 느물거리며 웃었다.
“그 여자가 예쁘장하게 생기긴 했지.”
“그런 이유는 아닙니다.”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안은 자신의 가슴 한편이 뜨끈해지는 것을 느꼈다. 다만 안을 잡아끈 것은 그녀의 얼굴이 아닌, 그녀의 조곤조곤한 목소리였다. 안은 그녀의 목소리를 조금 더 듣고 싶었다. 어느 누구에게도 향하지 않은 그녀의 묵은 기억들을 조금 더 알고 싶었다.
안이 그 피험체의 담당이 되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창문을 통해 피험체를 바라보는 안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저 좀비도 심장이 뛰고 있긴 할까. 안은 문득 그것이 궁금해졌지만 굳이 알지 않으려고 했다. 심장이 뛰고 있다는 건 박이 한 얘기를 다 듣고 있다는 것과 같은 말이었으니까. 안은 박의 이야기들이, 저 좀비가 아닌 자신에게만 향하기를 바랐다.
박은 처음 이 시설에 들어왔을 때, 피험체, 그러니까 그녀와의 관계를 무어라고 적어야 할지 몰라 한참을 고민했다. 박과 그녀는 연인도 아니었고, 친구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섹스 파트너도 아니었다. 박은 그 세 단어 중에서 어떤 것을 적어 넣을지 오랫동안 고민했다. 박은 가장 먼저 섹스 파트너라는 가능성을 지웠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연인과 친구, 둘 중 하나였다.
박은 가장 먼저 연인이라는 단어를 쓰고 한참 동안 그것을 노려보았다. 박과 그녀는 수시로 사랑한다는 말을 서로에게 건네곤 했다. 박은 그것이 불쾌하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그녀와 나는 연인인가. 하지만 박의 마음 어딘가에서 자꾸 그것을 부정하고 있었다. 그녀가 나랑 연인이라니. 내가 누군가의 연인이 될 수 있다니.
불쾌하지 않은 것과 설렘은 분명히 달랐다. 사실 박이 그녀에게 뱉었던 사랑한다는 말은 그녀가 박에게 했던 말을 그래도 돌려주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박은 만약 자신이 좀비이고 그녀가 인간이었다면 그녀는 서슴없이 연인이라고 관계를 기술했을 거라는 생각을 하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박은 연인이라는 글씨가 보이지 않도록 그 위에 수많은 선을 그어 글자를 지웠다. ‘친한 친구’. 박이 결정한 그녀와 자신의 관계였다.
이 시설에서는 수많은 실험이 이루어진다고 했다. 그리고 그것은 향후 이 나라의 발전에 어마어마한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박은 그 말을 들으면서, 그것의 공은 어디로 가게 될 것인가에 대해서 생각했다. 적어도 자신이나, 좀비가 되어 목줄이 채워진 그녀가 받을 것 같지는 않았다.
박은 굳이 시설에서 다른 친구를 만들 노력을 하지 않았다. 여기 있는 지원자 모두들 누군가를 완전히 잃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그런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면 필연적으로 그들의 절절한 감정이 박에게 와닿았고, 박은 그것이 영 불편했다. 박은 그저 그녀와 자신의 관계에 대해 조용히 생각을 하기 위해 이 실험에 자원한 것뿐이었다. 죽은 그녀라면 사실 자신은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말 같은 걸 하더라도 그녀가 자신을 용서해줄 수 있을 것 같아서.
물론 박은 아직까지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 말을 하려고 할 때마다 숨이 턱턱 막혔다. 어쩌면 자신을 안이라고 소개한 그 남자 때문일지도 몰랐다. 박은 그 말은 단둘이 있을 때나 할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시설에서 그녀와 단둘이 있을 시간 따위는 주어지지 않았다.
대신에 박은 1인실 침대의 딱딱한 감각을 느끼며 그 말을 몇 번이고 말했다. 나는 너를 사랑한 적이 없어. 네가 지금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처럼. 그 생각을 하고 박은 바로 두 번째 말을 철회했다. 그녀라면 아직도 자신을 사랑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만약 좀비가 된 그녀가 글을 쓸 수 있거나 말을 할 수 있었다면, 그녀는 자신과 박의 관계가 연인이라는 말을 서슴없이 할 터였다.
박은 그녀에게 인지능력이 떨어진다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했다.
“아마 오늘 실험이 마지막이 될 거예요.”
실험 전에 개인적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안이 박을 찾아와 한 말이었다. 박은 그것이 그렇게 놀랍지도 않았다. 확실히 박과 그녀의 대화라고 할 수도 없는 방백은 어떤 성과도 보이지 못했으니까.
“실험이 끝나면 그녀는 어떻게 되나요?”
박의 질문에 안이 머뭇거리며 말을 꺼냈다.
“다른 실험실로 옮겨질 거예요. 아마, 그, 신체적으로 조사를 하는.”
“아, 고문 같은 거요.”
박은 말을 뱉고서야 자신이 안을 공격적으로 대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안에게는 아무 잘못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화풀이였다. 박은 그 순간 자신이 진심으로 싫어졌다.
“고문…. 그렇죠. 고문이죠.”
부정할 줄 알았던 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박의 말을 긍정했다. 안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박은 그런 안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분명히 무언가 더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안은 그 말을 쉽게 꺼내지 않았다. 그 정도로 험악한 고문을 받는다는 뜻일까. 박은 안을 빤히 바라보며 그가 말을 잇기를 기다렸다.
“저기요.”
“예.”
“혹시 애인 있어요?”
아, 이쪽인가. 박은 눈을 깜빡였다.
“네, 애인 있어요.”
“역시… 그러시구나.”
“여기에 있어요.”
박의 말에 안이 머쓱하게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박을 바라보았다. 여기에 애인이 있다면 자신과 같은 실험자라는 것일까. 안은 어쩌면 그것 때문에 이 실험에 자원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가 그 생각을 바로 지워버렸다. 그럴만한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친한 친구’였다. 안은 박을 바라보았다. 박의 기다란 속눈썹이 그녀의 눈 아래에 톱니바퀴 모양의 문양을 그리고 있었다.
“그러면, 이따 실험실에서 봬요.”
“저기, 잠시만요.”
안은 박이 자신을 붙잡은 것이 기쁘기도 하면서, 그 이유를 알 것만 같아 조금은 슬퍼졌다. 분명히 자신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겠지. 그녀의 연인에 대한 이야기겠지. 여기의 사람들은 종종 실험자에게 죽은 이와 자신의 관계를 장황하게 늘어놓곤 했다. 실험자들은 보통 그 이야기를 열심히 듣는 척 하면서 건성으로 넘겼다. 이기적인 사람들. 안이 그들을 보면서 느꼈던 감정이었다.
그러나 박은 살아있던 피험체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휴대폰을 들고 가도 되나요?”
“그건 규정상 어려울 것 같아요.”
“그러면, 뭔가 노래를 틀 수 있는… 스피커 같은 거는요?”
안은 눈썹을 밀어 올려 다소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박을 바라보았다. 박은 담담하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좋아했던 노래가 있어요. 혹시 그걸 들으면 반응할까봐.”
“…그 사람이, 고문을 받는 걸 늦추고 싶은 거예요?”
“아뇨.”
박의 대답은 단호했다. 그러면요? 안의 물음에 박이 눈을 질끈 감으며 그 질문에 답했다.
“그 사람이 저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궁금했을 뿐이에요.”
‘그 사람’. 안은 그 말이 마음속에 걸렸지만 이미 한 번 차인 상태에서 왜 자신의 애인을 ‘그 사람’이라고 부르느냐는 질문을 할 수는 없었다. 안은 호기심을 꾹 누르고 일과 관련된 이야기를 꺼냈다.
“그 노래가 뭔데요?”
“환희의 송가요. 베토벤.”
“그 노래라면 저희가 준비할게요.”
“알았어요. 고마워요.”
환희의 송가. 안은 박을 방을 떠나오며 자기도 모르게 몇 번이고 그 노래를 흥얼거렸다. 환희의 송가라는 제목만 들어도 익숙한 리듬이 머릿속에서 울렸다. 무엇에 대한 환희이고, 무엇에 대한 송가인지. 낯선 언어로 된 가사들이 어떤 뜻을 전하려하는지는 전혀 몰랐지만 안 역시 그 노래를 좋아했다.
박은 그 노래를 좋아할까. 애인이 좋아하는 노래라면 그녀도 좋아하겠지. 안은 피험체가 그 노래에 반응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애인의 목소리에도 반응하지 않았는데, 고작 좋아하는 노래를 틀어줬다고 반응할까. 하지만 안은 얇은 노트북에 그 노래를 다운받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안은 피험체의 반응보다 박의 반응이 더욱 궁금했다.
애인이 아닌 ‘그 사람’이 좋아했던 노래. 안은 자신이 마음이 여전히 흔들리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것도 오늘로써 끝일 것이다. 피험체는 노래에 반응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고 그러면 다음 과정은 완전한 죽음뿐이었다. 박을 만나는 것도 그랬다. 안은 이것이 사랑이 아닌, 그저 호감이었을 뿐이라고 자신을 다스렸다.
박은 항상 힘없이 노크를 하고 실험실 안으로 들어왔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고 안이 말했음에도 박은 습관이라며 항상 노크를 했다. 박은 오늘도 자신을 위해 준비된 의자에 앉았다. 피험체는 멍하니 안도 박도 아닌, 창문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은 네가 좋아하는 노래를 준비해 왔어.”
그 말을 하고 박은 안을 바라보았다. 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노래를 켰다. 무거운 현악기의 소리가 한꺼번에 쏟아졌다. 예상대로 피험체는 그렇게 뚜렷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노래가 울리는 곳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역시 인지 능력이 없는 건가. 안은 펜으로 메모장에 동그라미를 그렸다. 어쩌면 자신도 피험체의 반응을 기대하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그러면 박을 조금 더 오래 볼 수 있었으니까. 언제는 반응이 없기를 바랐는데. 인간의 사고라는 건 이토록 장황한 것이라고, 안은 혼자 쓰게 웃었다.
“노래를 조금 더 뒤쪽으로 옮겨주세요.”
“네?”
“뒤쪽에, 가사가 있는 부분을 들려주세요.”
박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조금 더 힘이 있었다. 안은 플레이어의 바를 조금씩 뒤로 옮겼다. 온갖 현악기와 관악기의 소리가 범람하고 있었다. 가사가 나오는 부분은 안의 생각보다 훨씬 뒤에 있었다. 노트북의 터치패드로 일곱 번이나 바를 옮겨야 그 부분을 찾을 수 있었다.
목소리가 두껍고 낮은 남자가 자신이 모르는 언어로 노래를 불렀다. 피험체는 그 목소리에는 그다지 반응하지 않았다. 안은 박이 짧게 한숨을 쉬는 것을 들었다. 바로 옆에 있는 노랫소리보다 그 한숨 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피험체가 반응을 보인 것은 안이 더 이상 의미 없는 이 노래를 끄려고 터치 패드를 조작했을 때였다. 피험체가 순간적으로 고개를 뒤로 꺾어 안을 바라보았다. 이 피험체는 그다지 공격성을 띠지 않은 좀비여서, 안은 그녀의 반응을 보고 순간적으로 몸이 굳었다.
피험체는 입을 뻐끔거리고 있었다. 나오지 않는 숨으로 노래를 따라 부르려 하는 것처럼. 안은 박을 바라보았다. 박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박의 긴 머리카락이 그녀의 얼굴을 가리고 있어 안은 박의 표정을 제대로 확인할 수 없었다.
안은 노래를 껐다. 피험체는 몸을 좌우로 흔들고 있었다. 마치 좋아하는 노래를 들었을 때 인간이 자기도 모르게 몸을 움직이는 것처럼. 환희의 송가. 안은 메모장에다 노래의 제목만을 적었다.
Freude, schöner Götterfunken Tochter aus Elysium
Wir betreten feuertrunken, Himmlische, dein Heiligtum
Deine Zauber binden wieder Was die Mode streng geteilt
Alle Menschen werden Brüder, Wo dein sanfter Flügel weilt 1
박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환희의 송가였다. 안은 녹음기를 껐다. 박은 분명히 그녀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다고 이야기를 했다. 즉 이 이후의 이야기는 실험과 전혀 관련이 없는 내용이라는 뜻이었다.
박의 목소리는 높고 아름다웠다. 박의 목소리는 정말로 환희에 가까운 것이라고 안은 생각했다. 박은 익숙한 리듬을 천천히 짚어나갔다. 안은 눈을 감고 박의 목소리를 들었다. 노래가 끝난 이후에도 박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안도 아무런 얘기를 하지 않았다. 방의 중앙에 묶여있는 피험체만이 몸을 흔들며 소리도 나지 않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이만 가볼게요.”
간이 의자가 덜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안은 박에게 묻고 싶은 게 많았지만 결국 박을 잡을 수는 없었다.
그 뒤로 아주 잠깐의 시간이 흘렀다. 좁은 어둠 속에서 안은 이어폰을 꽂고 환희의 송가를 듣고 있었다. 노래를 들을 때마다 박의 목소리가 자꾸 안의 머릿속에서 겹쳤다. 그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할 목소리였다.
그때 힘없는 노크 소리가 이어폰의 사이를 뚫고 안의 귀로 들어왔다. 들어오세요. 안은 노크 소리만으로도 그것이 박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박은 낮에 봤던 모습 그대로 안의 방에 들어왔다. 두 사람 중 어느 누구도 불을 켤 생각을 않았다. 어둠 속에서 박은 바퀴가 달린 싸구려 의자에 앉았다. 그녀가 앉자 의자에서 끽, 하는 소리가 들렸다.
안이 끼고 있던 이어폰에서 환희의 송가가 희미하게 흘러나왔다. 안은 얼른 음악을 껐다. 그러자 두 사람 사이에 무거운 고요가 내려앉았다.
“저는 사실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어요.”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박이 말을 꺼냈다.
“그 사람에게 사랑한다고 이야기를 하긴 했지만,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어요. 그 사람은 내 연인이 아니에요, 그렇다고 친구도 아니에요. 그러면 저에게 있어서 그 사람은 대체 어떤 존재였을까요.”
박이 쏟아내듯 말했다. 안은 도대체 어떤 말을 해줘야 할지 알 수 없어서 어둠 속에 묻혀있는 그녀의 얼굴을 멀뚱히 바라보기만 했다.
“나는 그 사람한테 너무 미안했어요.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사랑한다고 말해버려서. 하지만 헤어지고 싶지는 않아서. 근데 그건 그 사람도 마찬가지였나 봐요.”
“왜 그렇게 생각해요?”
“애인의 목소리엔 자기 발가락이나 먹으려고 애쓰다가, 노래를 틀어주자마자 반응을 보였잖아요. 그 사람에게 있어서 저는 그 노래 이하인 거예요.”
그 말을 하고 박은 깊은숨을 내쉬었다. 박은 또다시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모든 인간은 형제가 되노라. 그대의 부드러운 날개가 머무는 곳에. 노래를 끝낸 박이 어두운 창밖을 보았다. 안의 방은 달빛조차 비치지 않는 구석에 있었다. 그걸 눈치챈 순간 박은 안의 방이 좋아졌다. 박의 방은 밤만 되면 달빛이 햇볕처럼 내리쬐는 곳이었다. 그 밝은 그림자를 볼 때마다, 박은 신 어쩌고 하는 것들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두려웠다.
“근데 왜 이제 와서야 제가 그 사람을 사랑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을까요.”
그래서 박은 안의 방에 와서야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좀비 따위를 만들어 낸 신에게는 들려주고 싶지 않은 목소리였다.
“제가 왜 하필이면 여기에 온 줄 알아요?”
안은 고개를 저었다. 어쩌면 단순히 박이 이 건물 안에서 아는 사람이 안 밖에 없는 걸지도 모르는 일이었지만.
“그 사람도 안 씨에요. 안. 당신이 아는 안 씨는 몇 명이나 되나요. 저보다는 많겠죠. 저는 고작 그 사람이랑 당신 두 사람만 알고 있는데.”
박이 한숨처럼 말을 꺼냈다. 두 사람 사이에 다시 침묵이 이어졌다. 안은 할 말을 찾지 못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안의 눈에 비치는 것은 어둠밖에 없었다. 노래, 다시 불러줄 수 있어요? 오랜 생각을 끝낸 안이 간신히 뱉은 말이었다. 그러나 박은 고개를 저었다. 더는 그 노래를 부르고 싶지 않아요. 박의 말에 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에 텅 빈 창밖을 내다보던 박이, 지나가는 이야기를 하듯 안에게 질문을 했다.
“좀비한테 물리면 좀비가 되나요?”
“바이러스 감염으로 인해……. 아니, 이런 말이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네, 좀비에게 물리면 좀비가 돼요. 영화랑 똑같은 점이 있다면 그것뿐이에요.”
“제가 좀비가 되면 어떨 것 같나요?”
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박은 입술을 놀리는 것을 그만두지 않았다.
“나를 죽여줄 수 있어요?”
“아뇨.”
“노래, 불러줄게요. 죽을 때까지 그 노래를 불러줄게요.”
“그래도, 아뇨.”
“한 번만 그 사람을 다시 안아보고 싶어요. 안기면 저도 좀비가 되겠죠. 좀비가 되면 저도 저런 실험을 받나요. 들리지도 않는 말들을 듣다가 안 되면 실험대에서 잘리고 부서지는 거로 끝을 맞이하게 되나요.”
안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박이 한 말이 모두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죽은 자에게 인권이란 없었다. 먼 미래에는 생길지도 몰랐지만, 어쨌든 지금 당장은 없었다. 만약 박이 좀비가 된다면 그녀는 그녀의 말대로 말도 안 되는 인지 시험을 하다가 해부당해 죽을 운명이었다.
박이 그런 결말을 맞는 것이 옳은 일인가. 안은 과연 박이 그런 결말을 맞기를 원하는가.
혼란스러운 안과 달리, 박은 어디서 났는지 휴지로 둘둘 감싼 유리 조각을 꺼내 안에게 건넸다. 딱 안의 손바닥에 들어오는, 날카로운 유리 조각이었다. 안은 그 섬뜩한 단면을 바라보았다. 이런 거로도 사람은 죽었다. 썩어가는 좀비라면 더더욱 죽기 쉬웠다. 어려운 것이 있다면 안의 마음가짐이었다. 박이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마음가짐. 안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
“이런 건 어디서 났어요.”
“얼마 전에 좀비…. 좀비 하나가 유리창을 깼잖아요.”
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드물게 과도한 폭력성을 보이는 좀비였다. 그의 부모에 따르면 생전부터 그는 그런 성향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때 얻은 것이 과거 기억이 좀비를 구성하는데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박은 자살을 위해 그중에서 가장 날카로운 유리 조각 하나를 숨겨왔다. 안과 박을 제외하면, 아무도 모르는 사실이었다.
“그는 어떻게 됐나요.”
“죽었어요.”
“어떻게 죽었나요.”
“군인들이 그의 머리에 총을 쐈어요.”
“그래도 그는 해부되지는 않았군요.”
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평화로운 죽음이었다. 더 이상의 괴로움도, 아픔도 없는 인간과 다를 바 없는 죽음.
“나를 사랑해줄 수 있어요?”
박은 안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총명한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도 빛나고 있었다. 안은 제 손안의 유리 조각을 한 번 더 바라보았다. 좀비에게 인권은 없어. 그들을 죽여도 살인죄 같은 게 성립할 리는 없었다.
물론 일자리에서 잘릴지도 몰랐지만. 안은 차라리 그러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안은 휴지 뭉치로 둘둘 쌓인 유리 조각을 꽉 쥐었다. 벌써부터 피가 배어 나오는 느낌이었다.
박의 연인은 목줄이 채워진 채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좀비라기보다는 그냥 시체에 더욱 가까운 편이었다. 가끔 먹을 것, 그러니까 인간이 앞에 있을 때나 본능에 따라 이를 딱딱거리는 그런 존재.
박은 그녀의 앞에 앉아 애틋한 눈빛으로 자신의 연인을 바라보았다. 평소라면 인간을 먹기 위해 허우적댔을 그녀도 지금은 잠잠히 박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이미 부드러운 날개들이 머무는 곳에 도달해 있는 사람 같았다. 박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박의 연인도 소리 없이 노래를 불렀다.
박의 눈동자에서 눈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나는 천국에 가지 못해도 좋아. 박이 웅얼거린 말이었다. 이곳에 있는 어느 누구도 천국을 원하지 않았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그저 끔찍하게 길고 긴 고요뿐이었다.
“사랑해. 이번엔 진심이야. 진짜, 진짜 사랑해.”
박은 자신의 애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썩어가는 냄새가 났지만 그런 것쯤은 상관없었다. 이제 자신도 곧 썩어가기 시작할 테니까. 다시 땅으로 돌아가 결국엔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될 것이었으니까.
좀비들을 지배하는 것은 식욕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박의 애인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좀비는 인간을 물어뜯었고 인간은 통증 속에서 노래를 불렀다. 낙원의 딸들이여. 우리 모두 성소로 돌아가자. 돌아가자. 박은 어딘가 고장 난 것처럼 그 부분만을 반복해서 불렀다. 안에게 약속한 대로 그녀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안이 알지 못하는 언어로 된, 어떤 신에게 자신의 영혼을 바치는 그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안은 주먹을 꽉 쥐었다. 유리 조각 때문에 안은 마음이 아팠다.
¶
당연한 말이겠지만 안은 일자리에서 잘렸다. 그리고 그는 그 뒤로 다른 자리를 구하지도 못했다. 다행인 것은 좀비와 함께했던 실험실이 특히 급여가 높은 곳이었다는 것뿐이었다. 안은 법원에 갔지만 그가 죽인 것이 인간이 아닌 좀비이기 때문에 그에게 살인죄가 떨어지지는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모든 것은 당연하게 흘러갔다.
애인이 있어요. 안은 또 그 말을 떠올렸다. 안의 기억 속에 살아있는 박의 모습이었다.
이제 안은 환희의 송가의 가사가 독일어로 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그 가사의 내용을 이해하고 있었고, 다소 부정확한 발음이지만 박과 그녀의 애인이 좋아했던 부분을 따라 부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안은 더는 그 노래를 듣지 않았다. 가끔 그들을 죽인 유리 조각이 들어있는 상자를 무릎에 두고 그 노래를 부르기만 할 뿐이었다. 그날도 그랬다. 안은 검게 변색된 두 인간의 핏자국을 보았다.
오늘은 그들의 기일이었다. 좀비로서 죽은 날이 아닌, 인간으로서 죽은 날이었다.
안은 일인용 소파에 앉아 나지막한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안은 그들의 죽음을 어느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것이 그들의 죽음을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천사 케루빔은 신 앞에 서 있었다. 에덴동산에 더 이상 부정한 것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것이 안이 실낙원의 딸들에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하게 남은 것이었다.
(200*73.5)
- 환희여, 아름다운 신의 광채여, 낙원의 딸들이여. 우리 모두 정렬에 취해 빛이 가득한 성소로 들어가자. 가혹한 현실이 갈라놓았던 자들을 신비로운 그대의 힘으로 다시 결합시키는도다. 그리고 모든 인간은 형제가 되노라, 그대의 부드러운 날개가 머무는 곳에.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