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자주 우리가 무엇인지를 증명해야 할 때가 있다.

내가 왜 범성애자이며, 왜 신체적 성별과 정신적 성별이 일치하지 않으며, 어떻게 정신질환이 있고, 어떻게 이루어져 있고……. 증명이란 행위는 생활뿐만 아니라 법정에서도 이루어진다. ‘왜 나는 피해자가 아닌가.’, ‘어떻게 그 공장이 환경을 오염시켰는가?’.

꽤 자주, 내가 내가 아닌 이유를 타인의 입에서 듣곤 한다. 너는, 남자랑 연애를 해봤기 때문에 완전한 퀴어가 아니야. 정신적 성별이라는 게 따로 존재한다는 게 말이 되니. 믿기지 않아, 그 사람은 임신한 아내도 있다고!

그렇다면 나는 무엇인가.

 

하나의 사람에는 다수의 시야가 있다. 그리고 세상은 수많은 사람으로 이루어져 있다. ‘라는 존재를 바라보는 시선의 종류는 얼마나 많을까. 어쩌면 그들이 나를 완전히 받아들이고 그저 그 존재라고 생각하길 바라는 것이 욕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폭력임을 알아야 한다.

내가 내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폭력임을 이제 우리는 알아야 한다.

 

이야기 속에서 곰은 자신이 곰임을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그 증거는 없다. 어떻게 증거가 있을 수 있겠는가. 곰인 증거를 찾으라니! 어처구니가 없는 말을 곰 주위의 인간들은 해댄다. 심지어 같은 곰들도 자신의 기준으로 곰을 판단한다. 차를 타서, 춤을 추지 못해서 곰은 곰이 아니게 된다.

곰은 푸른 옷을 입는다. 마치 죄수복과도 비슷한 색이다. 면도를 하고 숫자를 다섯까지 배우고, 일을 하고, 그러다 보면, 내가 곰인지 인간인지 아니면 공장의 기계 부품 중 하나인지 모르게 된다.

하지만 곰은 곰이었다.

매년 찾아오는 자연스러운 겨울잠. 자신을 잊은 곰은 그 이유를 알 수 없게 된다. 나는 왜 졸린가? 곰은 그리고 인간은- 디스포리아를 느끼게 된다. 주변과 나는 분명히 다르다. 내 안에는 분명 다른 것이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하지만 외부의 압력은 그것을 방해한다. 곰은 다시 기계의 부품이 되었다가, 쓸모없다는 이유만으로 쫓겨난다.

우리가 미처 어떻게 할 수 없는 폭력이라는 해일이 드디어 우리를 물가에 내려놓았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낙원을 잊은 상태였고 곰도 곰임을 잊은 상태였다. 결국 곰은, 타인에 의해서 자신이 이라는 말을 듣고 나서야 모든 것을 깨닫게 된다.

곰은 곰이다.

동굴 앞에서 곰은 고민한다. 지금까지의 삶에서 믿어왔던 가치에서 곰은 곰이 아니었다. 묵은 때와 비슷한 가치를 벗겨내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곰은 계속 눈을 맞았다. 이러다 얼어 죽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눈을 맞다가.

모든 옷가지를 벗어 던지고 동굴로 들어간다.

인간이라는 껍질을 훌훌 벗고 곰으로 돌아간다.

그 장면엔 아무런 대사도 없다. 하지만 발자국이 있다. 어쩌면 그것은, 우리가 따라가야 할 발자국일지도 모른다.

내가 어린 시절에 이 동화를 읽었다면 어땠을까, 하고 생각해본다. 나의 정체성이 무엇인가 고민하기 이전에 이를 접했다면 나는 이 동화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어쩌면 계속 목에 걸려있는 가시처럼 남아있다가, 어느 순간 다시 펼쳐보는 때가 오지 않을까. 그것이 아니라면 내 옆의 누군가가 곰임을 깨닫기 위해 펼쳐보는 때가 오지 않을까.

많은 사람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어졌다. 메시지는 어디에나 스며들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깨닫는다. 나는 이 동화를 읽으며 조금은 울었고, 조금은 위로받았고, 조금은 화가 났다. 여전히 우리는 부정당하면서도 같은 이야기를 읽고 동질감을 느낀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외부의 시선에 의해 인정받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화가 난다.

앞으로 많은 곰을 만나게 될 것이다. 나는 곰에게 곰이라고 말해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마치 모텔 직원처럼.

 

곰인 채로 있고 싶은 누군가에게, 곰이어도 괜찮다고 말하고 싶다.

언젠가는 우리가 그 증명을 하지 않아도 되기를 바란다.

 

불완전-완전

 

Y A G I

 

  요모는 자신이 어떻게 흡혈 욕구를 참았고, 또 어떻게 그것을 발산해 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너무도 오랜 시간 공복을 참은 탓이었다. 기억의 소실. 요모가 가장 경계하는 것이었지만 이번에는 어쩔 수 없었으려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자신을 우타라고 소개한 남자를 먹지 않기 위해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으니까.

  요모는 자신이 먹은 사람 대신 그 남자의 이름을 외웠다. 우타. 너무나도 쉽고 간단해서 현실감이 없는 이름이었다.

  우타는 식사 시간 내내 요모가 식사를 하는 걸 지켜보았다. 목덜미에 송곳니를 박아넣고, 뼈와 거죽이 닿을 정도로 피를 빨아먹고, 마침내 작은 뼈 하나하나까지 아득아득 씹어먹는 그 모습을 눈 하나 깜짝 않고 바라보았다.

  요모는 손날에 묻은 피를 핥아먹었다. 그의 눈이 붉은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지금까지 굶은 것에 비해 인간 하나는 적은 양이었다. 하지만 요모는 그것으로 식사를 멈추었다.

  먹을 수 있는 다른 인간이 없었기 때문은, 당연히 아니었다.

 

  우타는 책상다리를 한 채, 한쪽 팔꿈치를 무릎에 대고 턱을 괸 채로 앉아있었다. 아주 흥미로운 것을 본다는 태도도 아니었고, 그 장면이 지루하다는 태도도 아니었다. 그저 관망하는 것. 그것이 바로 우타가 지금까지 해왔던 것이었다.

  그런 우타에게선 아주 달콤한 냄새가 났다.

  “식사, 끝난 거지?”

  “.”

  “제대로 본 건 처음이라 조금 놀랐어. , 이런 말은 좀 실례인가?”

  우타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고양이상, 붉은 눈동자에, 검은 머리카락. 온몸을 휘감은 문신과 곳곳의 피어싱.

  대부분의 흡혈귀에게 있어 인간의 외형이나 목소리 따위는 크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으나, 우타의 외모는 어쩔 수 없이 사람의 시선을 잡아끄는 부분이 있었다. 길을 걷다가 한 번쯤 뒤돌아볼 외모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좋게 얘기하면 기억하기 쉬운 얘기였고 나쁘게 얘기하면 먹잇감이 되기 좋은 외모였다.

  “그다지.”

  “, . 그렇다면 다행이야.”

  그렇게 말하며 우타는 몸을 일으켰다. 그가 탁탁 옷을 털자 공사장의 먼지가 가뿐히 내려앉았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갈게, 흡혈귀 씨.”

  우타는 성큼성큼 요모의 앞으로 걸어왔고 종국에는 그와 코끝이 닿을 정도의 거리까지 다가왔다. 요모는 우타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 살아있는 자의 특권. 두 사람의 숨이 섞였다.

  “나는 흡혈귀 씨의 손에 죽고 싶어.”

  “이유는?”

  “죽고 싶은 데에 이유가 있겠어?”

  “왜 하필이면 내 손에 죽고 싶느냐, 하는 거야.”

  두 사람 다 거리를 늘이지 않았다. 요모의 눈에 우타의 눈동자가 오롯이 담겼다. 어느 쪽도 시선을 피하거나 눈을 깜빡이지 않았다. 마치 기 싸움을 하는 것처럼 두 사람은 서로를 노려보았다.

  “그야.”

  먼저 한발 물러선 것은 우타쪽이었다. 우타는 몸을 뒤로 물리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인간이란 생물이, 자신보다 상위에 있는 존재에게 먹힐 기회란 없잖아?”

  “그게 다인가?”

  “.”

  요모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 걸 원하는 생명이 있단 말인가? 아니면 이건, 그저 오만일까?

  “헛소리도 적당 것 해, 인간.”

  “우타야. 아까 이름 말해줬잖아?”

  “우타.”

  “나는 피식자의 상황에 놓여보고 싶은 거야. 그러면 좀, 뭔가가, 달라지지 않을까아, 하고.”

  “제정신이 아니군.”

  “흡혈귀 씨도 마찬가지잖아, 그건?”

  요모는 우타를 노려보았다. 우타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우타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일부러 사람을 먹지 않고 있잖아. 매일 밤마다 먹은 사람들의 이름을 외우고 있잖아.”

  “정체가 뭐지?”

  “나는 흡혈귀 씨를, 흡혈귀 씨가 생각하는 것보다 오랫동안 보아왔어.”

  우타는 미소지었다. 달이 구름에 가려지며 어둠이 두 사람의 얼굴에 드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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