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비물  #퇴고 봐서 다시 올림

 

 

 

메시아를 듣는 밤

 

Y A G I

 

 

1

 

그녀의 죽음에 내가 했던 그 말이 관련되어 있을까? 요즘 들어 그런 생각이 자꾸 들었다. 그녀는 사고로 죽었고,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가능성이 현저히 낮은 것이었지만 나는 도무지 그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아저씨는 이것을 나의 삶의 이유로 삼으라고. 그러니까 그녀의 몫만큼 내가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말을 했지만 사실 나에게 그 말이 크게 와 닿지는 않았다. 그녀를 대신해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떻게 살아간다는 것일까? 아니 그 전에 내 생각이 죄책감에서 비롯된 것이 맞을까? 그것은 그냥 내가 그녀를 기억하는 방식일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아무 문제도 없어지는 것일까.

나 왔다.”

내가 학교에는 오기 싫다고 그렇게 말했는데. 텅 빈 손을 무안하게 털고 있는 아저씨를 보자니 아저씨도 이제는 어느 정도 내 생각에 동감하고 있는 것 같았다. 거봐. 내가 괜히 학교 오지 말자고 그런 거 아닌데. , 그래도 지금 와서 누군가의 탓을 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우리들의 생존을 위한 약속이었다. 어떤 결정이 안 좋은 결과를 낳더라도 누군가의 탓을 하지 않기.

허탕 쳤나 봐.”

. 애초에 편의점에 장기 보관이 가능한 음식이 그렇게 많지도 않고. 조금 더 나가면 마트 하나 있던데 내일은 거기 가볼까 생각 중이야.”

예전에 여기서 누가 살았을까?”

지애 언니의 물음에 아저씨는 어깨를 으쓱하곤 책상 위에 걸터앉았다. 나무 책상이 뒤로 조금 밀리며 끼익, 소리를 뱉었다. 아무튼 수고했어요. 지애 언니의 말을 끝으로 우리는 더 이상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얇은 창문이 덜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겨울이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제 겨우 늦여름을 벗어났는데도 벌써 그런 생각이 들었다.

원시 사회로 돌아간 것 같아. 언젠가 지애 언니가 말했다. 그때도 아저씨가 먹을 것을 구하러 떠났을 때였다. 그때 우리는 지애 언니가 일하던 빵집에서 살고 있었다. 곰팡이로 뒤덮인 빵들을 모두 밖으로 내다 버렸음에도 빵집에서는 어쩐지 밀가루 냄새가 계속 났다. 우리는 빵집의 잿빛 타일 바닥에 앉아 서로를 껴안고 있었다. 빵을 진열하던 나무 진열대의 차가운 온도가 등으로 옮겨 붙고 있었다. 검은 핏자국으로 더러워진 창문으로 하얀 달빛이 비춰들었다. 그 사람들은 낮에 그렇게 다니면서 덥지도 않을까? 지애 언니의 목덜미에서는 짙은 땀 냄새가 났다. 나는 이제 그런 거 못 느끼지 않을까, 하고 답했다. 그것들을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나는 아직 그들을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힘들었다. 나나 지애 언니, 아저씨, 그리고 내가 기억하는 사람들과는 너무 다르니까. 그들은 영화 속에서나 보던 존재였다. 그들이 현실로 나타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던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을 것 같았다. 그들이 존재하는 세상이 너무나 끔찍해서 아무도 그런 상상을 하고 싶지 않아 할 것 같았다.

영화에서 본 것처럼 그들은 양팔을 앞으로 죽 뻗고 있지는 않았다. 아니 팔을 뻗는 것은 좀비가 아니라 강시였던가? 아무튼 그들은 그냥 발이 아픈 사람들처럼 발을 바닥에서 떼지 않고 걸었다. 그러니까 그들은 빠르게 걸을 수 없었다. 달릴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영화와 달리 그들이 달리지 않는다는 점은 정말 다행이었다. 그들이 달리기를 아주 능숙하게 할 수 있었으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우리는 아마 더 지금보다 더 살아남기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지애 언니는, 자살 시도를 하기 전에 그들에게 잡혀 찢겨 죽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나나 아저씨의 미래도 크게 다를 것 같지는 않았다.

그들은 가끔 문손잡이를 잡고 흔들곤 했다. 세로로 긴 나무 손잡이를 힘없이 흔들었다가, 덜컹거리는 문을 손바닥으로 쿵쿵 두드렸다가, 다시 문손잡이를 흔드는 일을 반복했다. 그때마다 새 모양 장식이 매달린 금색 차임벨이 딸랑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손님 같아. 지애 언니가 속삭였다. 그들이 돌아간 이후 우리는 빵집에 남아있던 종이와 네임펜으로 휴업이라는 두 글자를 크게 써서 문에 붙였다.

“‘CLOSED'가 더 낫지 않을까? 요새는 그거 더 많이 쓰잖아.”

걔들이 영어를 읽을 수 있을까.”

아저씨가 무릎을 꿇고 앉아 글씨를 쓰고 있는 지애 언니와 그걸 지켜보고 있던 나의 사이에 끼어들었다. 시큰한 땀 냄새와 밖에서 묻어나온 썩은 공기가 섞여 콧속으로 달려들었다.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냄새라 처음처럼 헛구역질을 하는 일은 없었지만 그래도 아직은 그 냄새가 조금 껄끄러웠다. 나는 자리를 왼쪽으로 살짝 옮겼고 아저씨는 쪼그려 앉아 지애 언니가 글씨를 쓰는 것을 바라보았다.

한글은 읽을 수 있어?”

몰라. 영어보단 낫겠지.”

그 말을 끝으로 아저씨는 잠을 좀 자야겠다며 가게 안쪽으로 들어갔다. 지애 언니는 막 붙인 종이를 손바닥으로 쓰다듬고 있었다. 나는 영어니 한글이니 하는 문제를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해가 뜨고 있었다. 어디선가 몸을 사리고 있던 그들이 다시 밖으로 기어 나올 시간이었다.

 

학교에서 우리는 2층의 한 교실을 거점으로 두고 살았다. 바로 옆에 우측 계단이 있는 2학년 교실이었다. 이곳을 거점으로 삼은 것은 간단했다. 창문이 그나마 덜 깨져있고, 크게 더럽지도 않고, 바로 옆이 계단이라 이동이 편하다는 것. 그리고 내가 다니던 학교라 지리를 잘 알고 있다는 것 때문이었다. 학교에는 의외로 그들이 많지 않았다. 다들 죽어서도 학교는 싫어하는구나……. 아주 본능적인 녀석들이야. 교실 문의 자물쇠를 잠그며 아저씨가 말했다. 낮에만 좀 조심하면 될 것 같아. 우리는 교탁과 책걸상을 이용해 바리케이드를 문 앞에 쌓았다. 사물함도 몇 개 가져다가 썼다. 그 모든 작업을 조용히 해야 한다는 점이 가장 힘들었다. 밤에 그들의 감각이 떨어진다 할지라도 주의해서 나쁠 것은 없었기 때문에. 이사를 끝낸 후 한숨을 돌리고 있었을 때 창밖에서는 시뻘건 태양이 제 모습을 뽐내기 위한 준비의 마무리를 하는 중이었다.

교실의 아이보리색 커튼이 너무 얇아서 교실 안이 환했다. 마트 가는 김에 창문을 막을 것도 가져와야겠어. 아저씨의 중얼거림을 귓가로 흘리며 나는 몸을 뒤척였다. 얇은 담요가 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를 막아주지 못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학교 다닐 때는 이 바닥에서 이러고 잠잘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었는데. 그녀도 지금쯤 밖에서 배회하고 있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녀와 내가 쓰던 삼 학년 교실은 일 층에 있었다. 나는 그 교실을 가까이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를 생각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녀의 흔적들을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에게 묻고 싶은 것들이 아주 많았다. 중학교 교복을 처음 입을 때는 어떤 기분이었는지. 어떤 날씨를 좋아하는지. 너도 다른 아이들처럼 고등학교는 공학으로 가고 싶은지. 너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그녀의 답을 듣고 난 뒤 나는 그녀에게 이렇게 말할 생각이었다. 중학교 교복을 처음 입을 때는 학교 교복이 좀 촌스럽다고 생각했어, 색깔이 이상해서. 나는 비 오기 직전에 물비린내가 나는 날씨를 좋아해. 나는 너와 같은 학교에 가고 싶어. 나는 너를 좋아해. 그녀와 조금 더 가까워지길 기다리며 아껴두었던 질문들이었는데.

그녀의 무덤은 과연 어디에 있을까? 나는 이제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그녀의 무덤으로 찾아가고 싶어졌다. 그녀의 텅 빈 무덤에 그녀 대신 내 죽은 말들을 매장하고 싶었다. 아니, 그녀는 어쩌면 묘지에 묻히기 전에 좀비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쪽 가능성이 더 클 것 같았다. 그렇다면 나는 이 말들을 어디에 묻어야 하는 것일까. 그녀의 무덤을 내 손으로 만들어주고 싶었다. 그녀가 돌아갈 자리를 만들어주고 싶었다.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녀가 다시 죽은 시체가 되었을 때 고요히 잠들 수 있는 장소를 만들어주고 싶었다.

아저씨는 피곤한지 코를 골았다. 지애 언니는 잘 자고 있을까? 지애 언니는 원래 잠을 잘 못 자는 편이었다고 그랬다. 예전에 지애 언니가 약국에서 파는 수면 유도제들의 이름을 읊어준 적이 있었다. 레돌민, 스피녹스, 슬리펠, 아론, 아졸……. 생소한 단어들이 지애 언니의 입에서 노래처럼 흘러나왔다. 레에돌미인, 스피이노옥스……. 그거 다 먹어봤어요? 서로 반말을 하자는 약속이 있기 전이라 그때의 나는 언니에게 존댓말을 했다. 지애 언니는 그 질문에 싱긋 웃기만 했다. 그러고는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약 이름을 읊을 때와 비슷한 음정이었다.

복도에서 발을 질질 끄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 중 누구도 이 교실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우리의 잠이 완벽하게 보장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마법 소녀가 변신할 때 괴물들이 건드리는 일이 없는 것처럼, 우리가 잠을 자고 있을 때는 그들이 공격하지 못하는 것이다. 마치 그것이 아주 불공평한 일인 것처럼.

아저씨의 코골이가 익숙해진 귀는 더 이상 그 소리들을 잡아내지 못했다. 나는 내가 잠을 자지 않기 때문에 그들이 이 교실에 들어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생각이 아주 어이없는 생각이란 것을 알면서도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머리를 제때 자르지 못해 제멋대로 자라기 시작한 머리카락이 뒷목을 자꾸 찔렀다. 나는 머리를 몇 번 가볍게 흔들었다. 문득 목덜미를 찌르는 것이 내 머리카락이 아니라 늦여름 햇볕인 것만 같이 느껴졌다. 나는 아저씨가 빨리 창문을 가릴 무언가를 찾아오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계속 눈을 감고 있었다.

 

2

 

손전등 불빛이 경비실의 노란 장판을 비췄다. 문이 닫혀있어서 아무도 못 들어왔나. 아저씨가 손전등의 고무 버튼을 누를 때마다 노란 불빛이 깜빡였다. 장판 위에는 파란색의 여름용 침구 세트가 널브러져 있었고 그 위에 하얀 먼지가 엷게 뒤덮여있었다. 이리저리 불빛을 휘둘러보는 아저씨 때문에 나는 눈앞이 조금 어지러웠다.

네가 말하는 그 애는 어떤 애였어?”

경비실 문손잡이를 돌리기 전에 아저씨가 슬쩍 말을 꺼냈다. 손전등 불빛은 이제 내 발밑을 향하고 있었다. 나는 커다란 무대 위에서 혼자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것처럼, 조금 부끄러워졌다.

그냥 음, 평범한 애였어. 머리가 길었는데, 지금 지애 언니처럼 매일 올려서 묶고 다녔고…… 아 키도 컸어. 키도 컸고…….”

눈에 그늘이 질 것처럼 속눈썹이 길었고, 쌍꺼풀이 아주 짙은 아이였고, 입술은 분홍색 장미를 말린 것 같은 색깔이었고, 복사뼈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튀어나와 있었고. 그녀가 살아있을 때의 모습을 떠올리자 심장이 강하게 뛰었다. 아랫입술을 잡아 뜯는 그녀의 하얀 앞니를 처음 보았을 때와 비슷한 박동이었다.

그러다 문득 그녀의 죽음이 다시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녀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죽었을까. 그 입술은 어떤 모양으로 벌어졌으며 그 둥그런 무릎 관절은 어떻게 뒤틀려 있었을까.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눈동자는 노란 햇볕을 담아내지 못했을 것이다. 바닥으로 흘러넘치는 그녀의 새빨간 피와, 여름 햇볕과, 그 날카로운 눈꼬리에서 떨어져 내릴 투명한 눈물 몇 방울과. 은색 자동차에 묻었을 그녀의 흔적. 그 흔적은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그 애도 학교를 싫어했어?”

, …… 공부를 잘했으니까, 좋아하지 않을까?”

공부를 잘하는 것과 학교를 좋아하는 것에는 아무런 연관성도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그렇게 답을 했다. 아저씨는 음, 소리를 내더니 경비실의 문을 열었다. 데려다줄게. 나는 아저씨의 손을 잡고 경비실 옆의 계단을 올랐다. 어둠에 뒤덮인 계단은 밟을 때마다 뒤틀리는 소리를 뱉었다. 1층과 2층 사이의 층계참에서 나는 그 아래를 한 번 더 내려다보았다. 계단의 끝은 벌써 어둠에 잠겨 있었다.

그 애는 지금 어디 있을까?”

나는 그 말을 듣고도 못 들은 척, 교실의 문을 열고 바리케이드 밑으로 기어들어갔다. 그녀는 무덤 속에 있으면 했다. 아니면 화장되어 뼛가루로 납골당에서 죽은 시간을 보내고 있던가. 우리는 햇볕 아래서 썩어가는 그들의 모습을 너무 많이 보았고 나는 그녀가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랐다. 그녀가 더 이상 흉해지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아서.

도움 될 만한 것이 있나 찾아보러 가겠다던 지애 언니는 아직 돌아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어두운 달빛이 교실바닥을 쓸었다. 나는 바닥을 더듬어 라이터를 찾았고 그것으로 양초에 불을 피웠다. 발간 불빛이 달빛을 밀어내고 미미한 온기를 주위로 천천히 퍼트리고 있었다.

아저씨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정장을 입고 있었다. 아저씨는 자신이 공무원이라고 그랬다. 아저씨는 그 일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그랬고 그래서 사람들을 구하지 못한 자신이 너무 꼴 보기 싫다고 그랬다. 너무 무서웠다고 했다. 자기는 무서운 걸 싫어해서 공포 영화도 못 보는데. 지애 언니가 그때 빵집의 문을 열어주지 않았더라면 아마 자기는 그 앞에서 죽었을 거라고 그랬다. 그리고 그건 지애 언니도 마찬가지였고.

지애 언니는 문손잡이에 포장용 리본을 묶을 생각이었다고 했다. 모아뒀던 수면 유도제를 한꺼번에 먹고, 거기에 목을 맨 채 앉거나 누우면 편하게 죽을 수 있지 않을까. 녹색이 좋을까, 붉은색이 좋을까? 두 가지 색의 끈을 손에 쥐고 끈의 색을 고르고 있던 지애 언니의 눈에 아저씨의 모습이 비쳤다고 했다. 지애 언니는 마치 만화처럼 아저씨의 얼굴에서 자신과 똑같은 얼굴을 발견했을까? 그것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어쨌든 지애 언니는 문을 열었고, 아저씨는 멀리서 다가오는 좀비들을 한 번 바라보았다가, 누구에게 초대받은 것처럼 실례합니다하고 빵집 안으로 들어갔다고 했다. 아저씨는 지애 언니 손에 들린 끈들과 바닥에 떨어져 있는 약통을 보고 상황을 얼추 눈치 챘으나 아무 말 하지 않았고 지애 언니는 그런 아저씨에게 크림빵 하나를 가져다주었다고 했다. 좀비들은 크림빵을 한입 베어 무는 아저씨를 빵집의 커다란 창밖으로 바라보고 있었다고 했다. 아저씨는 마치 연극배우가 된 것 같은 느낌을 받았고, 그때 아저씨의 역할은 크림빵을 먹으며 눈물 흘리는 생존자인 것 같았고, 그래서 아저씨는 크림빵을 먹으며 굵은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나는 손톱을 세워 바닥에 굳어있는 촛농을 떼어냈다. 지애 언니와 함께 언니의 수면 유도제를 구하기 위해 약국으로 갔을 때 그 얘기를 들었다. 아저씨와 지애 언니가 처음 만난 이야기. 지애 언니는 약들이 늘어져 있는 찬장에서 수면 유도제를 잔뜩 긁어모으고 있었다. 이제는 필요 없어져 모두 빵집에 버리고 온 것들이었지만.

네게 문을 열어준 것은, 지애 씨가 내 생명을 구해준 것에 대한 보답이었어.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어.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으면 다른 누군가를 도와주는 방식으로.

정장 바지가 헐거워져 벨트를 꽉 조여 맨 모습이 우스꽝스러웠던 아저씨는 낮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나는 과연 누군가의 생명을 구할 수 있을까. 갑자기 어깨 위로 이 세상이 내려앉은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언젠가 쓸 일이 생길지도 모르는 밴드를 주워 주머니에 쑤셔 넣는 것뿐이었다. 이 밴드 하나가 누군가를 살릴 수 있을까? 그보다는 한 번도 쓰이지 못하고 내 주머니 안에서 썩어갈 가능성이 더 클 것 같았다.

, 와 있었네. 이것 좀 들어줄래?”

교실 문이 열림과 동시에 지애 언니의 목소리가 바리케이드를 넘어서 들어왔다. 지애 언니의 하얀 손과 함께 바리케이드 위에 올라앉은 것은 구식 스피커였다. 잠자리의 눈 같은 커다란 스피커가 두 개 붙어있는, CD 뿐만 아니라 카세트테이프까지 넣을 수 있는 스피커가 책상 위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음악실 갔다 왔어?”

품 안에 안긴 스피커가 묵직했다. CD를 넣을 수 있는 곳에 매직으로 쓰여 있던 음악실이라는 글자는 거의 지워진 상태였다. 음악 수업 들으면서 한 번도 쓰는 걸 못 봤는데. 교실 안으로 들어온 지애 언니가 길게 숨을 내쉬었다.

교무실에서 마스터키를 찾아서. 음악실 말고 다른 곳도 들렀다 오려고 했는데 이거 너무 무거워서 그냥 들어왔어.”

이거 쓸 수 있을까? 학교 전기 안 들어올 텐데.”

건전지로도 돌아가는 것 같더라구. 너희 학교 건데 한 번도 안 써봤어?”

나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장이 났으면 어떡하나 싶으면서도 나는 그 스피커를 고이 품에 안았다. 지애 언니는 그런 내 팔목을 잡아 끌어 창가까지 데리고 갔다. 지애 언니 손이 들린 종이 가방 안에는 CD, 카세트테이프나 뭐 그런 것들이 들어있을 터였고 언니는 전리품을 자랑하고 싶었을 것이었다.

음악 선생님은 까탈스러운 분이었다. 특히 청결에 관해서는. 예전에 친구들과 음악 선생님이 결벽증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얘기를 나누기도 했었다. 공기청정기가 항상 돌아가고 있는 음악실에서 수업을 시작하기 전 선생님은 항상 손톱 검사를 했다. 그 선생님에게 손톱이 긴 것은 불결한 것이었고, 불결한 사람에게 돌아가는 것은 회초리였다. 손가락의 두 번째 마디를 정확히 노려서 내려치는 가느다란 회초리. 아이들 중 맞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그래서 대부분의 아이들은 그 선생님을 자연스럽게 싫어하고 있었다.

음악실이라 그런지 확실히 클래식 앨범이 많더라구. 클래식 좋아해?”

유명한 것밖에 몰라. 엘리제를 위하여나, 뭐 그런 것들.”

으응, 비슷하구나.”

일단 커버가 예쁜 것들 위주로 가져왔는데. 지애 언니는 CD들을 하나씩 바닥에 내려놓았다. 우리는 촛불 가까이에서 영어로 쓰인 그 이름들을 하나씩 읽어 내려갔다. 베토벤, 헨델, 비발디처럼 한 번에 읽을 수 있는 이름들도 있었고 쇼팽처럼,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 하며 기억을 더듬어나가야 하는 이름들도 있었다. CHOPIN이라는 얇은 갈색 글씨가 너무 낯설어 나는 앨범을 정리하며 그것을 일부러 제일 아래쪽에 두었다. 쇼팽이니 쵸오핀이니 하는 것들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될 것만 같았다. 그 생각이야말로 지금 이 상황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생각일 텐데.

그리고 음악실에 이런 것도 있더라구.”

지애 언니의 손에는 카세트테이프 몇 개가 들려 있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그것들을 하나하나 뜯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지애 언니의 손에서 그것들을 넘겨받았다. 요새는 음악 수업에서 트로트도 배우니? 지애 언니의 목소리가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음악 선생님과 트로트. 어떻게 보면 이상하고 어떻게 보면 전혀 그렇지 않은 조합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은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와 트로트가 잘 어울리나? 지금이야 긍정적인 답을 바로 할 수 있지만 그땐 그녀가 트로트를 좋아한다는 사실이 당황스러울 만큼 이상하게 느껴졌다. 발라드나, 클래식이나 뭐 그런 것을 좋아할 것처럼 생겼는데. 음악 선생님과 트로트에 대한 이야기를 한창 나누는 그녀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차라리 헤비메탈 같은 노래를 좋아한다고 하는 게 덜 이상하겠다. 나는 두 사람의 대화에 끼이지 못해 책상의 나무 무늬만을 쳐다보았다. 나무 무늬 시트지의 규칙성을 발견했을 무렵 그녀가 미안해, 하며 다가왔다. 너를 두고 너무 많이 이야기했지.

아냐, .

내가 그녀에게 아쉬운 소리를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녀의 볼이 조금 상기되어 있는 것도 같았다. 아마 그건, 음악실 히터의 온기 때문이었겠지. 우리는 평소처럼 점심을 같이 먹었고 그때 메뉴는 제육볶음이었다. 그녀는 항상 제육볶음을 밥과 함께 비벼 먹었다. 제육볶음의 벌건 기름장을 밥에 골고루 묻히며 그녀는 자신이 트로트를 좋아하는 이유에 대해 말했다. 아마 나를 빼두고 음악 선생님과 이야기를 한 것이 계속 신경 쓰였을 것이다. 크게 특별한 이유는 아니었다. 그녀는 할머니 손에 자랐고, 할머니는 트로트를 좋아했고, 어렸을 때부터 그녀는 트로트를 듣고 부르면서 자랐고. 뭐 그런 이야기들.

그날 저녁 집으로 돌아와서 그녀가 좋아한다고 말했던 트로트들을 들어보았다. 어딘가 익숙한 리듬과 싸구려 가사. 이것들을 들으며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할까? 나는 이어폰을 낀 채 모니터 앞에 엎드렸다. 이 노래에는 그녀의 어떤 추억들이 들어 있을까? 나는 그녀와 내가 이어폰을 나누어 끼고 트로트를 같이 듣는 상상을 했다. 그녀는 봄에 어울리는 하얗고 얇은 치마를 입고 있었고 나와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스스로가 뱉어낸 이산화탄소 때문에 머리가 몽롱해지는 것만 같았다. 나는 그녀가 트로트를 들으며 할머니가 아니라 내 생각을 해주었으면 했다.

지금 내가 카세트테이프를 보며 그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처럼. 나는 지애 언니의 손에 다시 카세트테이프를 들려주었다. 손끝에 테이프의 오돌토돌한 느낌이 아직 남아있었다. 나는 그녀가 부르는 트로트를 듣고 싶어졌다. 그녀와 함께 싸구려 가사들을 읊으며 아무 문제 없는 날들을 보내고 싶었다.

우리 학교로 오기 전에 만났던 사람들 기억해? , , 좀비가 신인류라고 말하던 사람들.”

지애 언니는 나를 보며 싱긋 웃었다. 달빛 때문인지 안 그래도 하얗던 지애 언니의 얼굴이 더 하얗게 보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지애 언니는 말을 이었다. 그 사람들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하고.

휴업이라고 쓰여 있는 종이가 붙은 이후로 그들은 빵집의 문을 한 번도 흔들지 않았다. 더 이상 옅은 잠을 방해받을 일이 없어졌다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와 동시에 우리는 더 이상 음식을 구해올 수 있는 곳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빵집에서 보낸 마지막 잠은 고요했다. 우리 모두 아무런 꿈도 꾸지 않았다. 지애 언니마저도. 우리는 빵집을 떠나며 문에 붙여두었던 종이를 그동안 감사했습니다라고 쓴 종이로 바꿔 붙였다. 빵집이 없어져서 그들이 슬퍼할까? 어쩐지 그들은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우리는 빵집의 차임벨을 마지막으로 울리는 인간일 것이다. 달이 밝은 밤이었다. 우리 짐은 많지 않았다. 얼마 남지 않은 음식들과 빵집 카드키뿐이었다. 지애 언니는 카드키만은 도무지 버리지 못하겠다고 말했다. 그 많은 수면 유도제들은 버리고 왔음에도. 나는 지애 언니가 버린 수면 유도제 위에 약국에서 챙겨두었던 밴드를 올려놓고 나왔다.

오늘 밤 안에 학교에 도착하려면 서둘러야 했다. 학교가 그렇게 멀리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곳에서 지낼만한 곳을 찾고 바리케이드를 만들고 하는데 시간이 적게 걸리지는 않을 것 같았다. 아저씨는 혼자 다닐 때보다 더욱 긴장한 모양이었다.

그 사람들을 만난 것은 저 멀리 학교가 눈에 보이기 시작했을 때였다. 어디선가 노랫소리가 들렸다. 어쿠스틱 기타의 현이 밤공기를 울리고 있었다. 우리는 우리 말고도 누군가가 살아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생존자가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못했다. 좀비들은 소리를 듣지 못하는 걸까? 그들의 감각이 생전보다 훨씬 떨어져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아예 가능성이 없는 소리는 아닌 것도 같았다. 우리는 노랫소리의 근원을 찾기 위해 귀를 기울였다. 우리가 텅 빈 골목을 울리는 소리의 시작을 찾았을 무렵 노래는 마지막 가사를 뱉어내고 있었다.

그 사람들은 몇 명이나 될까? 열 명? 열다섯 명? 그들은 기타를 치는 사람을 중심으로 두고 자그마한 원을 그리고 있었다. 그들 중 몇 명은 횃불을 들고 있었다. 그것으로 근처에 다가오는 좀비들을 쫓아내는 것 같았다. 그들의 모습은 버스커와 관객의 관계를 떠올리게 했다. 비록 관객이 그렇게 많아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것은 그들에게 그렇게 문제가 되는 일은 아닌 모양이었다.

가운데 앉아있던 남자가 마이크를 끌어당겼다. 과연, 공연의 클라이맥스였다. 우리는 남자에게 가까이 가지 않았지만 남자는 우리의 기척을 눈치 채기라도 한 것처럼 우리 쪽을 바라보고 말을 하기 시작했다. 신이 인간에게 삶의 제2부를 열어준 것이라고. 우리는 신의 뜻을 겸허히 받아들일 것이라고. 신의 뜻은 내일 밤에 이루어질 것이라고 그가 말했다.

가까이 가지 말자.”

저 사람들 죽겠다는 거야?”

.”

아저씨는 그들에게서 바로 등을 돌렸다. 그 남자를 감싸고 있던 사람들의 짧은 박수가 이어지고 그는 다시 노래를 시작했다. 학교는 아까보다 조금 더 흐릿해져 있었다. 그가 부르는 노래를 계속해서 듣고 있다간 저기 있는 학교가 더 흐려질 것만 같았다. 나는 지애 언니의 손을 잡고 아저씨의 등만 보고 걸었다. 찬송가를 가사만 바꿔서 부르는 것 같아. 나중에 지애 언니가 해준 말이었다.

그 사람들 죽었을까?”

죽지 않았을까?”

어떻게 죽었을까?”

그러게. 나는 머릿속에서 몇 가지의 죽음을 생각해보았으나 그것을 굳이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그것은 지애 언니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그 사람들이 좀비에 물려 죽지만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니, 나는 그냥 그 사람들이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계속 살아나갔으면 좋겠다. 어떠한 방법으로도 죽지 않고 버텼으면 좋겠다. 사람이 죽는 것은 항상 끔찍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세계라도 그랬다.

잘 있었나 보네.”

우리가 더 대화를 잇기 전에 아저씨가 교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저씨는 바리케이드 아래로 기어오는 것을 힘들어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저씨는 덩치도 크고 정장도 입고 있으니까. 책상들의 사이에 끼인 발목을 빼내며 아저씨가 긴 숨을 쉬었다. 그의 손에는 검은 비닐봉지 하나가 덜렁거리고 있었다.

창문 막을 건 못 찾았어. 보드마카 같은 걸로 칠해볼까 했는데 영 아니겠더라.”

괜찮을 것 같은데?”

먹을 것도 없는데 힘 빼지 말고. 이따 미술실 가서 스케치북 같은 거라도 구해서 떼다 붙이자.”

아저씨가 내려놓은 비닐봉지에서 캔 몇 개가 덜그럭거리는 소리를 냈다. 여기서도 오래는 못 있겠어. 아저씨가 관자놀이를 벅벅 긁으며 지애 언니와 나 사이에 앉았다. 아저씨는 그제야 스피커를 본 모양인지 손을 뻗어 그것을 끌어당겼다. 이거 돼? 아저씨도 노래 듣는 것을 좋아하는 걸까? 아저씨 표정이 묘하게 밝아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저씨의 취향은 클래식보다 트로트에 가까울 것 같았다. 나는 트로트가 들어있는 카세트테이프를 숨겨버리고 싶었다.

건전지 있으면? 아직 안 해봤어.”

잠깐만. 손전등에 넣으려고 건전지 몇 개 들고 왔어.”

비닐봉지를 휘젓던 아저씨의 손이 건전지를 집어 들었다. 무슨 노래 들을까? 아저씨가 스피커에 건전지를 끼우는 동안 지애 언니가 내 쪽을 보며 말했다. 다행히도 노래 선택권은 내게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가장 위에 놓여있는 앨범을 건넸다. 헨델의 메시아였다.

스피커에서는 가끔 노이즈가 튀긴 했지만 노래를 듣는데 크게 껄끄럽지는 않았다. 우리는 아무 대화 없이 노래를 들었다. 나는 앨범 커버를 확인했다. 한 여성이 정신을 잃고 쓰러진 것처럼 보이는 남성을 자신의 무릎 위에 눕혀두고 있는 조각의 사진이었다. 여자는 성모 마리아고 남자는 예수일까? 종교에 대해 아무런 관심도 없는 나로서는 그 사진을 보고 떠오르는 것이 그 정도밖에 없었다. 다음 노래로 넘어갔는지 스피커에서는 남자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저씨는 볼륨 조금 더 줄였고 그 덕분에 우리는 스피커에 더욱 가까이 붙었다. 이 세상에는 언제쯤 구세주가 내려올까? 세상이 이렇게 변한 것은 신의 뜻이라고 말하던 그 남자가 다시 떠올랐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지금 이 상황은 신인류의 출현이 아니라 노아의 방주 때와 비슷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애, 키가 크고 머리가 길었다고 그랬나?”

나는 아저씨 쪽으로 몸을 돌려 누웠다. 아저씨는 똑바로 누운 채 고개만 이쪽을 향해 있었다. 나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려다 소리를 낮춰 응, 하고 답했다. 우리는 결국 앨범 안의 모든 노래를 듣지 못하고 자리에 누웠다. 하얀 도화지를 뚫고 들어오느라 흐려진 아침 햇살이 교실 안의 공기를 천천히 데우고 있었다.

혹시 삼 학년 사 반이었어?”

아무렇지 않게 응, 하고 대답을 하려 했는데 그 끝이 불안하게 흔들려버렸다. 아저씨가 무슨 말을 할지 대충 할 것 같았다. 나는 그것이 아니기를 바랐다. 그녀가 여기에 있지 않았으면 했다. 내가 머리를 대고 누운 이 교실 바로 아래에서 배회하고 있지 않았으면 했다. 나는 아저씨가 꺼낼 다음 말을 기다리며 그 입을 바라보았으나 아저씨는 아무 말도 않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가보고 싶으면 언제든 말해.”

아저씨는 그 말을 하고 깊이 고여 있던 숨을 뱉어냈다. 나는 다시 몸을 뒤척여 아저씨에게서 등을 돌려버렸다. 그녀의 얼굴이 생각나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아저씨가 본 것이 그녀가 아니기를 바랐다. 키가 크고 머리가 긴 사람은 정말로 많았다. 그런 사람이 어쩌다 우리 교실에 들어갔을 수도 있고. 사실 아저씨가 본 그것이 그녀일 확률보다 그녀가 아닐 확률이 더 높을 것이었다.

그런데 왜 계속 심장이 뛰는 걸까. 자기 전에 이 얘기를 한 아저씨가 조금 미웠다. 내일 저녁이나, 뭐 그럴 때 꺼낼 수도 있지 않았을까. 지금 자면 꿈에 그녀가 나올 것만 같았다. 옆에서 아저씨가 자꾸 몸을 뒤척였다. 우리는 해가 학교 옥상을 똑바로 비출 때까지 쿵쿵대는 심장을 숨기며 억지로 눈을 감고 있었다.

 

3

 

우리는 지금까지 헨델의 메시아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들었고 'LA SERIN'이라는 뜻 모를 말이 적힌 앨범과 바흐의 바이올린 협주곡도 모두 들었다. 우리는 매일 밤 노래를 들으며 노래에 대한 감상을 말했고 그것은 지루한 밤을 넘기기에 아주 좋은 방법이었다. 우리는 그동안 카세트테이프는 전혀 건드리지 않았다. 나는 그 테이프들을 사물함에 밀어 넣었다. 가지런히 개어져 있는 파란 체육복과 교과서 몇 권이 그녀를 또 연상시키기에 나는 일부러 그 사물함을 뒤엎고는 문을 닫았다.

아저씨 손에 들린 검정 비닐봉지는 날마다 가벼워져 갔다. 이제 아저씨는 식량이 아니라 다음에 살게 될 곳을 찾아다녔다. 학교를 떠날 때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지애 언니는 학교를 떠나기 전에 노래를 한 곡이라도 더 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눈을 뜨고부터 자기 전까지 계속 노래를 틀었다. 아저씨는 그날 밤 이후로 내게 그녀와 관련된 이야기를 꺼내는 일이 없었다. 나는 매일 꿈에 그녀가 나올 것 같다는 생각을 했지만 그녀가 내 꿈에 나온 적은 그 날 이후로 한 번도 없었다. 나는 그것이 이상하게 섭섭하기도 했다.

다음으로 갈 곳을 알아봤어.”

아저씨의 벨트는 저번에 봤을 때보다 더욱 조여 있었다. 나중에는 구멍을 뚫어서 저 벨트를 써야할까? 나는 두 번 접은 치마허리를 슬그머니 쓰다듬었다. 그렇게 멀지는 않은데. 아저씨가 쪼그리고 앉아서 손가락으로 바닥에 투명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여기가 학교고, 여기가 우리가 왔던 빵집이고, 그러니까 이쪽 대로를 따라가면. 나는 아저씨가 그린 그림들이 눈에 보이는 것처럼 고개를 눈동자를 굴리며 아저씨의 손끝을 좇았다.

그럼 한 이쯤에, 김밥 천국이 있어. 거기로 가자.”

문은 열려 있어?”

열쇠를 부주의하게 두었던데. 아까 안에 들어가 봤는데 장사할 때 쓰는 깡통 햄이나 라면 같은 거 좀 남아있더라고.”

사람들이 안 가져간 게 신기하네.”

밤만 되면 저놈들이 잠이라도 잘 건지 아파트로 몰려가니 사람들이 쉽게 나올 수가 있어야 말이지.”

김밥 천국이라니. 지애 언니와 아저씨의 대화를 적당히 흘리며 나는 어딘가에 있을 김밥 천국을 떠올려보았다. 주황색 간판에, 투박한 하얀 글씨. 이따가 지애 언니를 졸라 마지막으로 메시아를 한 번 더 듣고 가자고 말해야겠다. 천국으로 갈 건데, 메시아를 한 번쯤 더 듣고 가야 맞는 말 같았다.

카세트테이프를 넣어뒀던 사물함을 잠깐 바라보았다. 내일이면 이제 이 학교에 다시 올 일은 영영 없을 것이었다. 만약 세상이 진정되고 그때까지 내가 살아남아 있다고 할지라도. 나는 우리 교실에 있는 것이 자꾸만 그녀 같았다. 그녀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을 하루에도 몇 번씩 하면서. 그녀가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처럼.

미국 좀비 영화처럼, 나도 총을 쓸 수 있으면 좋겠어.”

, 가서 쏘아 죽여 버리게?”

. 그래야 내 맘이 편할 것 같아. 죽여서 학교 운동장에 묻어주고 가야 내 맘이 편할 것 같아.”

우리는 함께 메시아를 들었다. 지애 언니는 나를 껴안았다. 나는 머리에서 냄새가 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곧바로 그 생각을 지워버렸다. 우리 모두에게서 나는 냄새니까. 나는 피부가 안쪽에서 썩어가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깐 했다. 우리 몸에서 곧 좀비들이 내는 냄새와 비슷한 냄새가 진득하게 묻어나올 것만 같았다.

그 아이도 네가 보고 싶어서 거기에 있는 것 아닐까. 마지막 인사 같은 거 하려구.”

지애 언니는 이 이야기를 오늘 처음 들었음에도 아무 문제없이 대화에 섞여들었다. 아저씨가 나 몰래 지애 언니와 상담을 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지애 언니는 내 팔뚝을 계속 쓰다듬었다. 그녀가 나와 마지막 인사를 하고 싶어 할까? 생전의 그녀라면 지애 언니처럼 나를 꼭 껴안고 인사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그녀에게 안겼다가는 나는 머리가죽부터 그녀에게 뜯어 먹힐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그녀는 내게 어떻게 인사를 하고 나는 그녀에게 어떻게 인사를 해야 한다는 말일까?

아저씨는 내게 정말로 그녀가 보고 싶으냐고 물어보았고 나는 잘 모르겠다는 대답을 남겼다. 내일까지야. 아저씨는 그 말을 하며 스피커의 다음 곡 재생 버튼을 자꾸 눌렀다. 아저씨의 손이 멈춘 것은 43, 아멘이라는 이름을 가진 노래가 흘러나올 때였다.

예전 같으면 단칼에 그녀를 보고 싶지 않다고 말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그녀를 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면……. 그녀가 어딘가에 있겠지, 운이 좋으면 화장되어 뼛가루가 되어 있겠지. 그렇게 생각했을 때와 그녀가 바로 이 아래층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 때 해야 하는 결정의 무게는 완전히 달랐다. 거기다 마지막이라는 옵션까지 붙어있다면, 내가 결정을 쉽게 내리지 못하는 것은 당연했다.

우리는 결국 메시아를 다 듣지 못했다. 아저씨는 스피커는 두고 갈 생각이지만 메시아 앨범은 들고 갈 것이라고 말했다. 지애 언니는 바흐의 바이올린 앨범도 들고 가고 싶다고 말했고 우리는 그렇게 그 두 앨범을 남은 음식과 함께 가방에 넣었다. 해가 천천히 떠오르고 있었다. 오늘 하늘에는 분홍색이 평소보다 많이 돌았다. 나는 똑바로 누운 채 고개를 젖혀 도화지 틈으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을 거꾸로 보고 있는 탓에 태양이 아래로 떨어져 내릴 것만 같았다. 나는 뒷목과 정수리가 얼얼해질 때까지 그 자세를 유지했고 그 후에는 하얀 교실 천장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녀와 여기에 누워있으면 어떤 느낌일까. 그녀는 좀비가 되었어도 여전히 아름다울까. 나는 좀비가 된 그녀의 모습은 좋아할 수 없는 걸까. 예전에 본 좀비 드라마의 한 장면이 생각났다. 여동생이 좀비가 되자 그녀의 마지막을 지켜주며, 그녀가 좀비로 변하기 직전에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던 언니. 나와 그녀가 그 상황이라면 나는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출 수 있을까?

지애 언니와 아저씨는 숨소리도 내지 않고 잠을 자고 있었다. 나는 이 세상에 혼자 남은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그녀에게 하고 싶은 말들이 많았다. 나는 네가 보고 싶어. 나는 너를 좋아해, 너를 좋아해. 너를 정말로 좋아해. 만약 그녀가 말을 할 수 있다면 그녀는 내게 무슨 말을 할까? 그녀도 나를 좋아한다고 말해줬으면 싶었다. 나도 너를 좋아해, 정말로 좋아해, 하고.

 

4

 

해가 천천히 기울어갔다. 저 하늘에는 해가 다니는 길이 있다고 했던가. 그 길 위에서 이 세상을 내려다보면 어떤 느낌일지 궁금했다. 아저씨는 함께 미술실로 가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잘 생각했다거나, 고생했다거나, 하는 말들을 한마디쯤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우리는 미술실에서 어렵지 않게 유성 매직을 찾을 수 있었다. 나는 검은색 유성 매직을 들어 교탁 위에 줄 몇 개를 죽죽 그었다. 아직 잘 나오고 있었다.

노을이 더러운 신발코를 벌겋게 물들였다. 지애 언니는 우리가 지내던 교실 앞에서 스피커를 껴안고 기다리고 있었다. 언니, 내가 들게. 스피커의 묵직한 무게가 팔을 눌렀다. 심장이 자꾸 뛰었다. 스피커를 꽉 껴안고 있으면 스피커에 심장박동이 묻어날까? 그럴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나는 온 힘을 다해서 스피커를 껴안았다. 아저씨의 손에 들린 마스터키가 계단을 내려가면서 쩔렁거리는 소리를 냈다.

아저씨 나 우리 반 열쇠만 빼서 가질래.”

다 끝나면 줄게.”

아저씨는 마스터키에서 열쇠 하나를 빼서 왼손에 쥐었다. 우리는 마스터키를 일 층과 이 층의 층계참에다 두었다. 다음에 이 열쇠 쓰는 사람이 있을까? 지애 언니의 물음에 우리는 아무도 답하지 못했다. 나는 아무도 이 열쇠를 건드리지 않았으면 했다. 그냥 영원히 이 자리에 남아있으면 했다.

삼 학년 사 반은 멀리 있지 않았다. 아직도 그녀가 거기에 있을까? 나는 스피커를 꽉 껴안았다. 나는 교실로 들어가기 전에 밖에서 교실 문을 잠글 수 있는 열쇠구멍을 확인했다. 손끝에 꺼슬한 구멍의 단면이 달라붙었다. 문은 지애 언니가 열어주었다. 나는 그녀가 머리를 풀고 있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붉게 물든 창문에 그녀의 얼굴이 흐리게 비쳤다. 그녀는 아무래도 목이 조금 꺾여있는 것 같았고…… 나는 숨을 삼켰다. 그녀는 내가 들어온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계속해서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창문을 통해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나밖에 남지 않은 그녀의 시선이 내 등에 계속해서 매달리고 있었다. 나는 교실 뒷문을 잠갔고, 그 문과 가장 가까운 책상 위에 스피커를 올려두었다. 그때까지도 그녀는 움직이지 않았다. 스피커가 놓인 책상의 의자를 끌어당기자 의자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의자 등받이에 한쪽 팔을 얹고 몸을 돌렸다. 너는 역시 하복이 잘 어울리는구나. 그때도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초록색 명찰이 그녀의 가슴께에서 천천히 흔들리고 있었다.

시들어가는 노을이 그녀의 검은 머리를 붉게 물들였다. 그녀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고 나는 일부러 그녀의 관절들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녀가 발을 끄는 소리와 의자가 끌리는 소리가 엉망으로 섞였다. 그녀와 나 사이의 거리가 한 분단 정도 남았을 때 나는 스피커의 재생버튼을 꾹 눌렀다. 싸구려 리듬과 싸구려 가사. 나도 간만에 들어보는 트로트였다. 너와 함께 마지막으로 트로트를 듣는 시간이었다. 밖에서 아저씨와 지애 언니가 마음 쓰고 있을 것을 알면서도 나는 끝까지 자리에 앉아서 그 노래를 들었다.

그녀는 노래를 틂과 동시에 발을 멈추었다. 그녀의 뒤로 환한 노을이 빛나고 있어 그녀의 표정을 도통 확인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다시 발을 끌기 시작한 것은 첫 번째 노래가 끝난 뒤였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녀가 스피커에서 카세트테이프를 꺼내 B면의 노래를 들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녀와 술래잡기를 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나는 그녀가 스피커에 관심을 가지는 대신 나를 따라와 준다는 사실이 내심 기뻤다. 그것이 그녀의 본능이라 할지라도. 나는 뒷걸음질을 치며 그녀의 얼굴을 계속 바라보았다. 자꾸 보다 보니 그 얼굴도 예뻤다. 내가 그녀에게 미소를 보내자 그녀도 싱긋 웃음을 지었다. 밤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이제는 그녀가 잠들 시간이었다.

내가 복도로 나오자 아저씨는 바로 문을 잠가버렸다. 문에 끼어 있는 불투명한 유리로 그녀의 실루엣이 얼핏 보였다. 그녀는 얼굴을 문에 붙였다. 그렇게 하면 밖을 뚜렷이 볼 수 있다는 듯이. 나는 그 실루엣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아저씨가 유성 매직을 건넸다. 그 뚜껑을 열자 매직 특유의 냄새가 코를 확 찔렀다. 창문에 가득 글씨를 박아 넣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내 키가 너무 짧았다. 나는 발뒤꿈치를 들고, 최대한 팔을 뻗어 좌우가 뒤집힌 글씨를 커다랗게 쓰기 시작했다. 나는, 네가, 보고싶을, 거야, 나는, 너를, 좋아해, 정말로, 좋아해. 유성 매직의 끽끽거리는 소리가 간간이 복도를 울렸다. 쓰고 나니 창문 하나가 남아서 그녀와 내 이름을 나란히 적어두었다. 나는 몇 발 뒤로 물러서 혹시 틀린 글자는 없는지 확인했다.

아저씨는 내게 삼 학년 사 반의 열쇠를 건넸다. 열쇠는 따뜻했다. 우리가 등을 돌림과 동시에 그녀는 손바닥으로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지애 언니의 손바닥이 내 손바닥 안으로 들어와서 나는 그것을 꽉 잡았다. 태양은 완전히 땅 밑으로 내려갔지만 하늘에는 여전히 붉은 기운이 어른어른 돌고 있었다.

겨울이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나는 교문을 나서기 직전에 운동장의 흙을 팠다. 지애 언니와 아저씨가 도와주겠다고 말했지만 나는 이 일만은 혼자서 끝내고 싶었다. 흙을 깊게 팔 필요는 없었다. 나는 그 자그마한 구덩이에 열쇠를 조심스레 넣었다. 그 위에 다시 흙을 덮고 손바닥으로 꾹꾹 눌렀다. 이곳이 그녀의 무덤이 될 것이었다. 나는 손을 털고 그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기에도 스피커가 있으면 좋겠어. 지애 언니의 말이었다. 우리는 모두 그 말에 동의했다. 만약 스피커가 있다면 다시 메시아를 처음부터 듣자고 아저씨가 말했다. 천국에 입성한 기념으로. 지애 언니와 나는 그 말에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밤이 점점 더 깊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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