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체험 속에서 신성한 장소

 

 

 

  마침 비가 오는 날이다. 그곳에 대해 이야기하기 좋은 날씨다. 그곳을 떠올리면 항상 슬레이트 지붕 아래의 현관에서 그와 함께 빗소리를 듣던 때가 먼저 떠오른다. 현관이 너무 좁아 우리는 자주 서로의 팔꿈치가 맞닿았고, 팔꿈치인지 심장인지가 간질간질하면서도 우리는 붙어있는 팔을 떼지 않았다. 가끔 비가 날려 들어와 우리의 얼굴을 차갑게 적셨지만 팔꿈치만은 따뜻했다.

  그 집은 몇 년이나 된 집일까. 언젠가 할머니께 여쭈어보았던 것도 같지만 잘 기억나지 않는다. 삼십 년 쯤 되었던 것도 같고 고작 십몇 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던 것도 같다. 붉은 벽돌에 기와를 얹은 집이었다. 집의 전면엔 시멘트로 바닥을 덮은 마당이 있었고 그렇게 작지는 않은 화단이 두 개나 있었다. 키가 작은 홍단풍이 첫 번째 화단의 한쪽 귀퉁이를 장식하고 있었고 그 주위에는 봄이면 내가 심어놓은 민들레꽃이 노랗게 피었다. 파나 상추 등 주로 야채들을 키웠던 첫 번째 화단과는 달리 두 번째 화단에는 자그마한 장독 몇 개와 허리가 조금 굽은 대추나무 한 그루만이 서 있을 뿐이었다. 아주 어릴 때 할머니가 해주셨던 괴담에 나오는 나무와 닮아 그 나무를 조금 무서워했던 게 기억에 남는다. 밤이면 주황색 가로등빛을 받아 마당으로 길게 그림자를 늘어뜨리던 대추나무는 사실 살아있는지 죽어있는지 의심스러운 것이었다. 가을에 대추를 따서 그것을 입에 넣어보고서야 살아있긴 했구나, 하는 생각을 할 정도였다.

  마당의 왼쪽에는 지금은 쓰지 않는 화장실과 그에 바로 붙어있는 창고 하나가 있었다. 스테인리스로 만든 선반에 차곡차곡 쌓여있는 잡다한 물건들과 그 위를 덮고 있는 먼지들, 어딘가 박혀있을 게 분명한 바퀴벌레들이 떠오른다. 창고의 천장과 지붕 사이의 조그만 공간에 동네 길고양이가 제 새끼들을 데려왔던 일도 떠오른다. 마당에서 말리고 있던 고등어를 어미 고양이가 훔쳐간 것도, 그걸 또 뺏어온 우리 할머니도.

  우리 집의 오른편에는 보일러실로 들어갈 수 있는 좁은 공간과 함께 그의 집이 있었다. 그는 우리 집에 세 들어 살고 있었다. 처음 그가 이사를 왔을 때 나는 사실 그를 조금 미워했다. 내 놀이터로 쓰던 공간인데, 그 공간을 그가 차지하고 말아서. 그가 이사를 오는 바람에 내 많은 물건들이 버려지고 말았다. 그러니 당연히 그를 좋아할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의도적으로 그를 피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두 가정은 거의 붙어 살다시피 하고 있었고, 그는 나와 같은 초등학교를 다녔으며, 내 속을 모르는 부모님들은 우리가 함께 등교를 하게 했다. 그래서 나는 그를 피하는 것을 포기했다. 미워하는 것 역시 비슷한 시기에 포기했던 것 같다. 그의 집 부엌의 장판은 파란색이었는데, 그 파란 장판 위에 배를 깔고 누워 지내기 시작했던 것 역시 그맘때였다.

  우리는 줄곧 보일러실에 들어가서 놀았다. 보일러실에 들어가는 길은 너무 좁아 우리는 일렬로 서서 그곳을 기웃거려야 했다. 녹슨 철문 앞의 전등 스위치를 누르면, 철문에 달린 올록볼록한 무늬가 있는 유리가 희미하게 주홍색 빛을 흘려보냈다. 철문을 열 때는 항상 소리가 났다. 우리는 갑자기 그 철문이 잠길까 두려워 안에 들어가면 항상 문을 열어두었다. 사실 보일러실에 그렇게 재밌는 게 있을 리 없었다. 웅웅거리며 돌아가는 기계와, 사용하지 않는 물건들이 몇 개 쌓여있을 따름이었다. 시멘트 바닥에는 거의 항상 먼지가 엷게 쌓여있어 우리는 들어갈 때마다 작게 기침을 했다. 그곳에서 무얼 했더라? 주홍색 불빛 아래서 그곳에 있는 것들을 하나하나 뜯어보았던 것 같다. 그곳에 들어갈 때마다 그랬다. 그땐 그게 질리지도 않았는지. 우리는 단순히 어둡고 조용한 곳을 좋아했던 걸지도 몰랐다.

  그의 얼굴도, 이름도, 목소리도 기억나지 않지만 그의 수줍은 웃음과 아버지가 타지에서 일을 하시고 계신다는 사실은 정확하게 기억이 난다. 그는 나의 첫사랑이었나. 지금 그 장면을 영화를 보듯 제 3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솔직히 가슴이 좀 간질거리긴 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때 사랑에 대해 흐릿하게도 알지 못하던 때였고, 그래서 그와 그렇게 지낼 수 있었던 것도 같다. 빗소리를 들으며 손을 잡지 않았기에, 알전구 아래서 수줍게 입을 맞추지 않았기에 우리는 서로를 떠나보낼 때 쉬 손을 흔들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 집은 대략 오 년 전에 없어졌다. 도로 공사 때문이었다. 그가 그의 아버지의 직장이 있는 곳으로 이사를 간지 칠 년 쯤 이후의 일이었다. 새 집을 짓고 나는 고대하던 내 방을 가질 수 있게 되어 솔직히 기뻤다. 집에서는 더 이상 쥐도, 바퀴벌레도 나오지 않았고 웃풍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고향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면 왜 그때 기억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걸까. 가능하다면, 지금은 사라진 그 집에 한 번만 더 가보고 싶은 마음이다. 가능하다면 그가 옆집에 살았던 그때로. 다시 한 번 더 현관에서 그와 함께 비를 보고 싶고, 너가 떠난 후에 나는 사실 쓸쓸했노라고 말하고 싶다. 내가 없는 너의 삶은 어땠는지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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