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남자의 방
“밖에 춥냐.”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라면 끓이던 손을 멈추지 않고 현성에게 인사를 대신한 말 한마디를 건넸다. 후우. 현성은 문을 닫자마자 습관처럼 숨을 뱉었고 응, 하는 건조한 대답을 한숨처럼 흘렸다. 한창 끓고 있는 라면에서 올라오는 김이 오른손을 뜨근하게 적셨다. 부엌에서 몇 발만 걸어가면 되는 현관까지 현성을 마중 나가지 않은 건 라면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냥 우리 관계가 그랬다. 서로에게 큰 관심 가지지 않는 관계. 이제는 이런 관계도 제법 편해졌다.
“오늘 저녁 뭔데.”
“라면.”
또? 방의 안쪽에서 겨울옷을 벗어내던 현성이 살짝 갈라진 목소리로 불만을 표했다. 너는 요리를 배워라, 쫌. 바닥으로 툭툭 떨어지는 옷들의 소리와 뒤엉킨 현성의 목소리를 가볍게 무시하곤 인덕션의 전원을 껐다. 저런 잔소리가 하루 이틀도 아니고 김현성 저 새끼는 잔소리 하는 거 질리지도 않나, 어휴.
“그래서. 먹을 거야, 안 먹을 거야.”
“먹긴 먹어야지. 알바하고 왔더니 배고파 뒤지겠다.”
온갖 음식의 국물 자국이 묻어있는 싸구려 반팔 티셔츠를 입은 현성이 냉장고 옆에 웅크리고 있던 앉은뱅이책상의 다리를 펼쳤다. 나는 들고 있던 냄비를 책상 중앙의 유난히 꺼멓게 변한 부분에 올려놓았다. 나중에 이거 막 가운데에 구멍 뚫리는 거 아냐? 예전에 현성이 했던 말이 문득 생각났다. 나는 그 질문에 어떻게 대답했더라? 잘 기억나지 않는 부분이었다.
현성이 수저와 밥그릇을 가져오는 동안 밥솥을 열어 빈 밥그릇에 밥을 담았다. 반공기가 조금 넘을 정도로만. 현성과 같이 먹을 거라면 부족한 양이겠지만 어차피 라면 국물에 밥을 말아먹는 것은 나 혼자니 이 정도만 담아도 충분했다.
“잘 먹겠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누구에게 하는지 모를 말을 현성을 따라 웅얼거리곤 라면에 젓가락을 집어넣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라면 하나는 기가 막히게 끓인다니까. 속으로 품은 말을 라면과 함께 씹어 삼켰다. 입 안부터 식도, 그리고 위장까지 따끈한 기운이 번져나가는 것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먹을 만하냐?”
“그럭저럭.”
그 말을 하면서 현성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그럼 됐다. 우리는 다시 아무 말도 않고 라면을 먹는데 집중했다. 내가 입안으로 라면을 빨아들이는 소리가 요란하게 좁은 방 안을 울렸다. 현성은 왼손으로 밥그릇을 들고 라면의 면발을 앞니로 뚝뚝 끊어 먹었다. 라면은 후루룩 소리 내면서 먹어야 제 맛인데. 맞은편에서 깨작깨작 라면을 먹고 있는 현성을 흘깃 바라보다 냄비에 젓가락을 넣어 크게 한 젓가락 들어올렸다.
밥그릇에 담기지 못한 국물들이 책상 위에서 말라가고 있었다. 세 봉지 분량의 라면이 우리 둘의 위장으로 넘어간 것은 순식간이었다. 현성은 밥그릇에 입술을 대고 그 안에 남은 국물을 모조리 마셨다. 밥 말아 먹을 거지? 그럼 나 국물 좀 가져간다. 입안에 남아있는 것들을 아직 다 씹지 못한 나는 소리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나의 면발 씹는 소리와 현성의 국물 넘기는 소리가 귓바퀴에서 한데 섞여 맴돌고 있었다.
“그렇게 먹으면 안 짜냐.”
“별로. 밥 말아먹으면 국물 안 끈적끈적해지냐?”
“별로.”
입에 남아있던 음식물을 대충 목구멍으로 밀어 넣곤 냄비로 손을 뻗었다. 자알도 먹는다. 냄비 째 밥을 마는 내 모습에 현성이 힘없이 웃었다. 이미 오래 전에 익숙해진 반응이라 어떠한 감정도 들지 않았다. 그냥 그러나보다, 생각할 뿐. 현성은 다시 국물을 마시기 시작했다. 까칠하게 돋아난 그의 수염 사이로 주홍빛 라면 국물이 주륵, 흘러내렸다.
“맥주.”
“뭐?”
“뭐 마실 거냐고.”
라면 국물이 얼룩덜룩 묻은 냄비와 밥그릇에 물을 채워 넣고 있던 현성이 몸을 돌려 이쪽을 바라보았다. 조그마한 냉장고에서 나오는 서늘한 기운이 발끝을 간질였다. 아무거나. 현성은 미간을 살짝 좁히며 대답하더니 다시 개수대 쪽으로 몸을 돌려 수도꼭지를 잠갔다. 나는 가장 가까이에 있던 카스 라이트와 아사히를 꺼냈다.
우리는 생활은 제법 단순했다. 각자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자취방으로 돌아오면 먼저 들어온 사람이 요리해 둔 저녁을 같이 먹었다. 그러고 크게 재미도 없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보며 취향에 맞는 맥주—나는 항상 아사히만 마셨고 현성은 카스 라이트나 하이네켄, 아니면 기린 맥주를 마셨다—를 한 캔씩 마셨다. 맥주를 마실 때도 우리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낮에도, 밤에도, 같이 살을 부비고 있을 때도 우리 사이에는 고요의 해구가 깊이 자리하고 있었다.
맥주의 차가운 온도가 식도를 타고 흘렀다. 우리 관계는 과연 연인이라는 단어로 정의할 수 있는 관계일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연인인 것 같기도 하고 연인이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영화나 인터넷에서 본 연애란 것들을 머릿속에 그려보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들은 우리와 상관없는 이야기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 사람들처럼 현성에게 하루에 몇 번씩이나 보고 싶다고 난리 브루스를 추는 문자를 보낸다고 상상해보았다. 현성아 지금 뭐 해? 난 지금 너 생각하는 중이야. 현성이 네가 너무 보고 싶어……. 와. 지랄 옘병. 심장까지 소름이 오소소 돋는 느낌이 들었다. 저딴 걸 한다고? 현성에게 그런 문자를 보낸다면 받을 답장은 뻔하디 뻔했다. 너 약했냐?
아빠다리를 하고 앉은 현성이 리모컨을 들고 채널을 이리저리 돌렸다. 예능, 예능, 다큐, 예능……. 현성은 채널을 뒤로 다시 돌려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틀었다. 진흙으로 만들어진 집 사이에서 피부가 검은 아이들이 너덜너덜한 공을 차며 놀고 있었다. 언젠가 현성이 자기는 사실 TV를 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던 것이 기억났다. 그런데 왜 현성은 맥주를 마실 때마다 항상 TV를 켜는 걸까? 그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했지만 그것을 눈앞에 두어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다. 떨어져 앉은 현성과 나 사이에 다큐멘터리의 내레이션이 차곡차곡 쌓였다.
어쩌면 남자 대 남자의 관계라서 이런 느낌이 드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남자끼리의 사랑이란 것이 ‘일반적인’ 사랑과 그렇게 다를 것 같지는 않았다. 그것도 형태가 조금 다르다 뿐이지 어차피 같은 사랑일 테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역시, 사랑보다는 쾌락에 기반을 둔 관계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심장의 판막에 아까 먹었던 라면의 찌꺼기가 말라붙어있는 느낌이 들었다. 반쯤 남은 맥주 캔을 두어 번 흔들었다가 한꺼번에 마셔버렸다. 입 안에 살짝 미지근해진 맥주의 쓴 맛이 퍼졌다.
“이제 잘까.”
“어.”
현성이 남은 맥주를 삼키고 리모컨으로 TV를 끄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빠른 속도로 흘러가던 구름이 TV의 깜깜한 화면 속에 갇혔다. 우리는 텅 빈 맥주 캔을 구석에 대충 밀어두고 천천히 옷을 벗었다. 겨울의 싸늘한 공기가 맨살에 다닥다닥 달라붙었다. 보일러를 틀어도 추워, 이 집은. 현성이 티셔츠를 바닥에 떨어트리며 말했다. 후우, 습관적으로 내뱉는 그의 호흡에 차가운 공기가 잠시 갈라졌다가 붙었다. 나는 팔을 뻗어 전등 스위치를 꾹 눌렀다.
노란색 장판 위에 깔아 놓은 매트리스 한 장 위에서 나는 항상 현성의 목을 끌어안았다. 현성에게 따로 마음이 있어서 그런 행동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냥 그렇게 하면 쾌감이 극대화 된다고 해야 하나, 그런 느낌이 들어서 그랬다. 짜릿한 전기 신호가 두뇌를 관통하며 펑, 터지는 것만 같은 느낌. 현성의 목을 끌어안을 때면 항상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 느낌은 항상 달큰한 땀 냄새를 풍기며 나를 유혹했다. 한 번 맛본 쾌감을 포기하기는, 정말 쉽지 않았다.
가끔씩은 오늘처럼, 관계가 끝으로 치달아갈 때 현성도 내 머리를 끌어안았다. 성인 남성 한 명 분량의 압박감과 함께 현성의 체온이 피부 안쪽까지 스멀스멀 손을 뻗어 나갔다. 그럴 때면 나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어 가며 꾹꾹 참아오던 감정들을 터트렸다. 그러고 나면 현성은 주저 없이 몸을 떼어냈다. 현성의 끈끈한 땀 냄새가 코끝을 툭툭 치고 지나갔다. 현성은 또, 습관적으로 숨을 길게 내뱉었다. 나는 손바닥으로 어둠 속을 뒤적거리다 티슈 몇 장을 뽑아왔다.
관계는 하루에 한 번. 그것이 우리의 암묵적인 약속이었다. 사실 우리 둘 다 몇 번이고 더 관계를 가져도 큰 상관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러지 않는 것은 굳이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은 아닐까. 현성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자기 전에 현성과 붙어있는 것은 일종의 의식에 가까운 행동이었다. 밤에 잠을 잘 자기 위한 의식. 누구는 베개를 안고 자야지 잠을 잘 자고, 누구는 자기 전에 30분 쯤 노래를 들어야만 잘 잘 수 있는 것과 같은 것. 나에게는 그것이 현성과 관계를 갖는 것이었다. 실제로 현성과 같이 살게 된 이후 나는 꿈을 꾸거나 잠을 자다가 깨는 일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이전에는 하루에 꿈을 두 어 개씩은 꼭 꾸곤 했는데. 좁은 매트리스에서 현성과 달라붙어 자면 그런 것 없이 몸은 조금 불편할지 몰라도 잠 하나는 푹 잔다는 사실이 조금 신기하긴 했다.
“자세 안 불편하냐?”
“팔에 쥐날 것 같어. 머리 쫌만 더 위로 올려주라.”
“이렇게?”
“응… 이제 됐다.”
나는 현성의 오른쪽 어깨 바로 아래쪽에 머리를 대고 있는 것을 좋아했다. 다른 곳보다 살짝 안으로 들어간 그 부분에 머리를 대고 있으면 유난히 기분이 편했다. 퍼즐 조각이 딱딱 맞춰지는 것처럼, 그 움푹한 부분에 내 머리를 밀어 넣으면 딱 맞을 것 같은 느낌. 그런 느낌이 좋아 어느 순간부터 나는 잠을 잘 때면 꼭 그곳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다.
쿵쿵, 현성의 심장 박동이 귓가에 울렸다. 아르바이트 안 나가고 집에서 놀아서 그런가? 오늘따라 평소보다 더 잠이 오지 않는 날이었다. 현성은 자고 있을까? 현성의 가지런한 숨소리가 머리 위에서 울리긴 했지만 현성이 잠에 들었는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잘 자고 있을 것 같긴 한데. 현성은 원래 잠을 설친다는 걸 모르고 사는 사람이기도 하니까.
가만히 누워 심장 소리를 듣고 있자니 현성과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그 때가 언제지. 이 년 전? 이 년 밖에 안 됐다니. 못해도 오 년은 된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이 년 전의 현성은 지금과 큰 차이가 없는 사람이었다. 지금이랑 다른 점이라면 조금 더 시골 사람 같은 느낌이 나는 정도. 어색한 억양의 서울말 사이사이에 섞여있던 경상도 사투리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났다. 예전에는 그걸로 많이 놀려먹고 그랬던 것 같은데. 그러니까, 우리가 이런 관계로 지내기 전에.
건배, 하는 말과 함께 유리잔이 깨지는 것과 비슷한 소리가 여기저기서 울려 퍼졌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술잔이 내게는 꽤 버거웠다. 취할 만큼 마시고 싶진 않은데. 이제 그만 마신다고 말했을 때 주위 사람들이 보일 반응이 무서워 나는 숨을 꾹 참고 술을 입 안으로 털어 넣었다. 소주의 알코올향이 두개골 안쪽을 쿡쿡 찌르는 느낌이 들었다. 이젠 그만하고 싶은데. 끝없이 차오르는 술잔은 도무지 마를 생각을 않았다. 오리엔테이션만 아니었어도 이렇게 술을 마실 일은 없을 텐데. 술맛만큼 쓴 생각을 억지로 삼켰다. 그러곤 젓가락을 들어 맛도 없는 싸구려 안주를 입에 집어넣었다. 양념의 매운맛에 술의 쓴맛이 녹아내릴 때 쯤 누군가가 팔을 툭툭 치는 것이 느껴졌다.
잠깐 밖에 나갔다 올래요? 귀 완전 빨개졌는데.
아직 얼굴에 앳된 티가 남아있는 남자였다. 신입생인가? 선배인가? 아까 각자의 학번과 이름을 주고받았던 것을 기억해 보려고 했지만 술에 잠겨있는 두뇌는 정상적인 활동을 하는 것을 거부할 따름이었다. 남자는 물끄러미, 나를 계속 쳐다보기만 했다.
안 나갈 거예요?
아, 아뇨. 나갈 거예요.
저희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남자는 먼저 몸을 일으켰고 나는 주위 사람들의 눈치를 보다 남자를 따라 몸을 일으켰다. 다들 우리가 화장실을 다녀오던 다른 곳을 다녀오던 크게 신경 쓰지 않을 것 같은 눈치였다. 테이블에 등을 돌리며 남자는 한숨 같은 긴 숨을 한 번 내뱉었다. 등 뒤에서 유리잔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가 다시 한 번 더 울렸다.
2월의 밤공기는 이러다 봄이 오긴 하는 걸까, 싶을 정도로 차가웠다. 가로등 불빛이 희미하게 낡아가는 건물의 외벽을 비추고 있었다.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남자의 밤갈색 머리가 가로등 불빛에 하얗게 빛났다.
저기, 신입생 맞으시죠?
네, 맞아요.
스무 살?
네, 스무 살.
남자가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선지 옆에 있는 사람이 동기에 같은 나이라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한결 편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게 그런 건가, 그, 소속감 같은 거. 대학 와서 처음으로 동기랑 얘기해 보는구나. 이 사람과 앞으로 잘 지내면 좋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피어났다.
혹시 휴대폰 번호…….
가로등 불빛만큼 희미하게 말꼬리를 흐리며 남자가 휴대 전화를 내밀었다. 휴대 전화 모서리 중 두 개의 액정이 박살나 있는 상태였다. 떨어트린 건가. 그래도 쓰는데 불편함은 없네.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았다. 남자의 휴대폰에 내 번호를 저장하곤 내 휴대 전화로 전화를 걸었다. 주머니에서 웅웅 울리던 휴대 전화의 액정에 낯선 번호가 떠올라있었다.
참, 이름이 뭐였죠?
남자의 번호를 저장하기 위해 켠 주소록의 성, 이름 부분을 멀뚱히 바라보다 남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렇게 번호 교환할 줄 알았으면 아까 잘 들어둘 걸.
김현성이요.
김현승이요?
김현, 성이요.
현성이 ‘성’자에 악센트를 넣어 발음했다. 김현…성. 새로 산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은 조금 낯선 휴대 전화의 키패드로 현성의 이름을 또박또박 입력해 나갔다. 현성의 전화번호가 내 휴대 전화에 처음 입력되었던 때였다.
일주일에 한 번, 내가 아르바이트를 쉬는 날을 제외하면 저녁 담당은 항상 현성이었다. 오늘 저녁은 뭘까. 현관에 달려 있는 도어락의 비밀번호를 기분 좋게 눌렀다. 잘 할 수 있는 음식이 라면 뿐인 나와는 달리 현성은 꽤 많은 요리를 할 수 있는 편이었다. 패딩 점퍼의 바느질 선 사이사이에 묻은 돼지고기 냄새가 집안에서 흘러나오는 불빛과 섞여 현관에 떨어져 내렸다.
“오늘 저녁은 카레?”
“어.”
어제 내가 그랬던 것처럼 현성도 나를 현관까지 마중 나오는 일은 없었다. 왼손을 골반 위에 얹은 채 오른손에 든 국자로 카레를 휘휘 젓고 있는 현성의 뒷모습을 잠시 눈에 담았다. 아직 되려면 쪼금 남았어. 현성의 목소리가 뒤통수에 달라붙었다. 나는 조용히 집 밖의 냄새를 내 몸에서 벗겨냈다.
카레가 되기를 기다리며 밥그릇에 밥을 눌러 담았다. 앉은뱅이책상에 두 개의 밥그릇과 수저를 올려놓고 그 앞에 앉아 턱을 괴고 현성을 올려다보았다. 현성이 입고 있는 티셔츠에 카레 얼룩도 묻어있지 않을까? 현성의 옷에서 샛노란 카레의 흔적을 찾아보려 한껏 눈을 굴려보았지만 역시 이 자리에서 그것을 확인하기는 어려웠다.
“어미 새가 밥 갖다 주길 기다리는 참새 새끼 같다, 너.”
“이렇게 큰 참새 새끼가 어딨냐.”
“그럼 짐승 새끼는 어떠냐?”
미간을 좁히며 입술 끝만 살짝 올려 웃던 현성이 냄비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밥그릇. 현성이 내민 손에 밥그릇을 올려주었다. 부족하면 더 퍼다 먹어. 현성의 손바닥 위에서 따끈한 카레가 채워진 밥그릇을 건네받았다. 숟가락과 밥그릇이 서로 닿으며 내는 소리가 한동안 방 안에 울렸다.
현성과 함께 카레를 먹을 때는 좋은 점이 많았다. 제일 큰 장점은 현성의 카레가 맛있다는 것. 그리고 그 다음으로는 우리 둘의 카레 취향이 전혀 다르다는 것이었다. 나는 국물보다는 건더기가 많은 것이 좋았고 현성은 카레를 잔뜩 부어 거의 카레 죽처럼 만들어 먹는 것을 좋아했다. 이런 쪽의 궁합은 잘 맞는다고 해야 하나. 현성과 내가 같이 살기에 나쁜 궁합이 아닌 것은 확실했다.
오늘도 현성은 다큐멘터리를 보고 있었다. 어제 보던 게 나름 재밌었나. 아빠다리를 하고 허리를 살짝 구부린 현성은 TV에 눈을 고정하고 발치에 놓인 기린 맥주를 손끝으로 톡톡 치고 있었다. 오늘따라 맥주가 입에 안 맞나. 평소라면 홀짝홀짝 맥주를 마셔댈 녀석이 오늘따라 캔을 입에 가져다 대지 않았다. 어쩌면 단순히 다큐멘터리에 집중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지만. 무슨 내용이기에 저렇게 보고 있담. 궁금증에 흘긋 본 TV에서는 다이버가 시퍼런 바다 속에서 산호 같은 것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다.
바다. 현성과 처음 관계를 가졌을 때, 우리는 바다를 보러 갔었다. 처음 바다에 놀러가자고 제안한 사람이 누구였더라. 현성인 것 같기도 하고 나였던 것 같기도 했다. 사람들 몰리기 전에 바다 한 번 다녀오는 게 어떠냐. 그 말을 들은, 현성인지 나인지 모를 사람은 남자 둘이서 칙칙하게 무슨 바다냐는 핀잔을 장난스레 던졌던 것 같았다. 그런 말을 하면서도 우리는 여행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바다는 동해가 좋다느니, 서해가 좋다느니 하면서. 사실 동해와 서해의 차이도 잘 몰랐을 텐데도 그랬다.
가까운 서해나 가자. 동해는 산 넘어야 하잖어. 빨리 폰으로 어디 해수욕장이 좋은지나 검색해봐라.
아직 사투리를 완전히 벗지 못한 현성이 턱짓으로 내 휴대 전화를 가리키며 말했다. 서해 해수욕장 순위. 내 맞은편에 앉아있던 현성이 내 쪽으로 몸을 쭉 뻗었다. 어디 괜찮은 곳 있냐? 나는 계속해서 엄지손가락을 움직이며 대답했다. 성격도 급하네. 방금 검색했는데 뭐 벌써 물어보냐.
‘바다를 간다’는 것 이외에는 그다지 별 내용도 없는 여행 일정을 안고 우리는 서해로 향했다. 차를 렌트할 돈도 없어 대중교통을 타고 이동하는, 이동 시간으로만 몇 시간을 소모하는 1박 2일 여행이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충분히 들떠있었다. 고속버스의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이런 여행도 나쁘지는 않은 것 같다는 얘기를 현성과 주고받았던 것 같았다.
바다에도 한 번 빠져보고 인터넷에서 맛집이라는 곳을 갔다가 실망도 해보는, 별로 특별할 것도 없는 여행이었다. 펜션으로 돌아와 같이 술잔을 기울일 때까지만 해도 그랬다. 우리 둘 다 술을 싫어하면서도 우리는 ‘어쩌다보니’ 같이 술을 마셨고, ‘어쩌다보니’ 같이 잠자리에 들었다. 그것이 우리 관계의 시작이었다.
아침보다는 점심에 가까운 시간에 눈을 떴다. 옷을 제대로 갖춰 입은 현성은 침대 옆에 놓인 조그마한 TV앞에 앉아 있었다. 이름을 알지 못하는 연예인 한 무리가 촬영장 여기저기를 뛰어다니는 것이 보였다.
나 사실 남자 좋아해.
여전히 TV에 시선을 주고 있던 현성이 오른손으로 왼손 검지를 만졌다. 지난밤의 일을 생각하면 그렇게 놀랍지도 않은 고백이었다. 나는 어째서 지금까지 그걸 깨닫지 못했던 걸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현성이 그 사실을 꽁꽁 숨기려 애쓴 것도 있겠지만 그래도 약간의 낌새라도 발견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미안해. 현성의 조그마한 목소리가 TV속 방청객들의 억지스런 웃음에 섞였다. 나는 현성에게 화를 내지도, 괜찮다는 말을 건네지도 않았다. 그냥 머릿속으로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지금 현성은, 내가 어제 밤에 술에 거의 취해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인지 아닌지를.
두 번째 관계를 갖게 된 것도, 우리가 이렇게 같이 살게 된 것도 모두 내가 원인을 제공하였다는 사실을 지금의 현성은 알고 있을까.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냐.”
현성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다큐멘터리가 끝난 TV에서는 이름 모를 여자 연예인이 나와 한 손에 비타민 음료를 들고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어, 그냥 너랑 처음, 만났을 때 생각.”
“계집애도 아니고, 무슨 그런 생각을 그렇게 넋이 나가도록 하고 있냐.”
너랑 처음 했을 때 생각, 이라고 말을 하려다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어 말을 바꿨다. 그냥 갑자기 생각이 나서. 탄산이 빠진 맥주를 입에 가져다 대었다. 현성은 아무 말 없이 자기 허벅지 위에 올려두었던 리모컨을 들어 TV를 껐다. 중독성 강한 CM송이 중간에 뚝 끊겨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이제 잘까.”
“어.”
평소처럼 짧은 대답을 끝맺은 현성은 맥주 캔을 쓰레기통에 버렸고 나는 꽤 남은 맥주를 개수대에 흘려보냈다. 옷을 벗기 시작하는 현성을 잠시 바라보다가 따라서 옷을 벗었다. 팔뚝에 좁쌀만 한 소름이 질서 없이 올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날씨는 언제쯤 풀리려나. 빨리 날이 따뜻해져야지 지내기 좀 편할 텐데. 자신이 방금 벗은 속옷을 손에 쥐고 현성이 따뜻한 숨을 내뱉었다. 나는 팔을 뻗어 전등 스위치를 꾹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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