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사람들의 손때만큼 안개가 묻어있었다. 세상이 이상하게 조용했다. 나는 일부러 차도의 한 가운데로 걸었다. 그러면 곧 뒤에서 커다랗고 흰 트럭이 요란하게 경적을 울릴 것만 같았다. 그럼 나는 안심하고 죄송합니다, 하며 길가로 비켜서면 되는 것이었다.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습기가 가득한 바람이 불었고 키가 큰 국화의 줄기를 흐트러트려 놓았다.
낡은 마트는 주황색과 노란색의 딱 중간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마트 앞의 작은 아스팔트 마당엔 낡은 가전제품들이 늘어서 있었다. 중고가전제품특가판매. 하지만 카키색 먼지가 내려앉은 텔레비전은 아무리 봐도 쓸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구형 냉장고는 심지어 냉동실의 칸이 반쯤 열려있었다. 텅 빈 냉동실에 손을 넣어보았다. 당연히 냉기는 하나도 없었다.
고개를 돌려 마트의 유리문을 바라보았다. 할머니가 자주색 조끼를 입고 카운터에 서 있었다. 손님은 하나도 없어보였다. 냉기를 맞으며 시들어가는 야채칸의 풀뿌리들을 떠올리며 몸을 돌렸다.
멸망이란 것은 이런 것이 아닐까. 세상의 모든 가치가 지워지고 먼지만 내려앉게 되는 것이 아닐까. 나는 발을 잠시 멈추었다가 곧 뛰기 시작했다. 지금이 너무 무서웠고 얼른 세상의 소리로 다시 둘러싸이고 싶었다. 자동차의 매연소리가, 담배를 피우는 사람의 가래 뱉는 소리마저 그리울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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