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프님과 연성교환용 글^~^
역린
Y A G I
For. 하프님
세상을 살면서 이해할 수 없었던 몇 가지.
악몽을 꾸는 것.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
아리마 키쇼는 예민한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자신의 변화를 진즉에 눈치채고 있었다. 하지만 아리마는 의식적으로 그 사실을 밀어냈다. 여태껏 이어왔던 자신의 삶을 유지하려면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변화는, 아리마 키쇼의 불안으로 모습을 바꿔 항상 그의 그림자에 몸을 숨기기 시작했다. 아리마는 그 사실 역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그림자를 떼어 어딘가에 버리고 올 수도 없는 노릇. 아리마는 그 불안을 꽤나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매일 같이 꾸는 악몽이 아니라면 아마 그는 이 상황을 훨씬 더 유연하게 견뎌내고 있을 터였다.
“…쥰.”
아리마는 어둠 속으로 손을 뻗어 안경을 집어 들었다. 새벽빛이 흐리게 창문을 타고 넘어오고 있었다. 얇은 안경다리를 펴는 아리마의 손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두려운 꿈을 꿨다. 아리마는 하얀 이불보를 꽉 붙잡고 길게 숨을 뱉었다.
차라리 자신이 죽는 꿈이라면 훨씬 더 유쾌했을지도 몰랐다. 자신이 여태껏 구축해온 구울들이 지옥에서 자신을 반기는 꿈이라면, 아리마는 이것이 자신의 운명이겠거늘, 하고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왜 하필이면 그는 치카세 쥰이 죽는 꿈을 꾸는 것인가. 쥰, 하고 아리마는 몇 번이나 그녀의 이름을 되뇌었다. 아직까지도 소리 내어 부르면 흉곽 깊숙한 곳 어딘가가 두근거리며 뛰는 이름이었다. 아리마는 바싹 마른 입술을 제 혀로 적셨다.
전화…….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아리마는 휴대전화로 손을 뻗어 연락처에서 즐겨찾기 표시가 되어 있는 그녀의 이름을 찾아내었다. ‘쥰♥’ 저 하트도, 언젠가 그저 ‘쥰’이라고 저장했던 것에 쥰이 몰래 붙여둔 것이었지. 아리마는 눈을 한 번 질끈 감았다가 떴다.
좋은 아침이야. 오늘 하루도 잘 보내길. 전화를 하는 대신 아리마는 쥰에게 짧은 메시지를 남겼다. 전화를 걸기엔 너무 이른 시각이었다. 마음만 같으면 지금 당장 쥰에게 전화를 걸어 괜찮으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아리마는 쥰을 걱정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쥰은 이대로, 행복하기만 하면 싶었다.
관심 없는 듯하면서도, 아리마는 자신의 별명을 모두 다 알고 있었다. CCG의 저승사자니, CCG 최후의 병기니 하는 것들. 딱히 알고 싶지 않아도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아리마는 그런 것들에 자부심을 느낀 적이 있던가? 아리마에게 있어서 구울을 구축하는 것은 숨을 쉬는 것만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런 일에 엄청난 자부심을 느끼기는, 사실 조금 힘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삶이란 것이 원래 그랬으니까.
생명을 빼앗기 위해 존재하는 삶. 지긋지긋한 인생이었지만 아리마는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겸허히 받아들여야만 했다. 적어도, 쥰을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쥰을 만난 이후, 아리마는 처음으로, 자신이 살아있다고 느꼈다. 어쩌면 그녀의 생명력이 죽어가는 자신에게 전해진 것일지도 몰랐다.
“여보세요?”
“응, 여보세요.”
“점심은 드셨어요?”
“아직. 쥰은?”
재잘거리는 쥰의 목소리가 잔뜩 들떠 있었다. 딱히 점심으로 맛있는 메뉴를 먹었기 때문은 아님이 분명했다. 아리마의 존재가 쥰에게는 그렇게나 큰 것일까.
예전의 아리마라면 분명 공감하지 못했을 감정이었을 테지. 하지만 아리마는 이제 알 수 있었다. 자신의 마음에도 그만큼의 쥰이 존재하기 때문에. 아리마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하늘은 여전히 흐렸다.
“나 이따 놀러 가도 돼요?”
“오늘은 안 돼.”
“오빠 너무 딱 잘라서 거절하는 거 아녜요?”
올망올망한 쥰의 목소리에 아리마가 가볍게 소리를 내서 웃었다. 아리마는 뒤늦게 주위를 살폈지만 다행인지 주위엔 아무도 없었다. 아마 누군가 있었다면, 해가 지기 전에 CCG 내부에 아리마가 소리를 내서 웃었다는 소문이 쫙 퍼지겠지. 별로 달갑진 않은 일이었다.
“대신에 오늘 저녁은 같이 먹기야. 시간 괜찮지?”
“물론이죠!”
아리마는 전화를 들고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쥰의 모습을 생각하며 빙긋 웃었다. 소소한 대화였다. 그리고 그렇기에 더욱 좋은 대화였다. 간밤에 꿨던 꿈이 아리마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지만 않았어도 그랬다.
그 애 이름이, 카이토였던가. 아리마는 언젠가 그 아이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의 단정한 입매에서 나온, 끔찍하게도 이성적인 말들을.
쥰 몰래 카이토를 만난 적이 있었다. 단둘만 만나고 싶다는 카이토의 말이었다. 그때 아리마는 저도 모르게 가볍게 긴장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도둑놈이라는 말을 들으면 괜히 마음 한구석이 쿡 찔리던 때였다. 아리마는 카이토의 입에서도 그 말이 나오리라고 생각했다.
차라리 그 말이 나왔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리마 씨는, CCG의 저승사자라죠. 카이토의 입에서 나온 첫 마디였다. 그 말을 하고 그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투명한 유리잔에 든 아이스 아메리카노였다. 얼음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투명하게 울렸다.
아리마 씨 때문에, 쥰이 위험에 처하면 아리마 씨는 어떻게 할 겁니까?
아리마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리마는 당연히 쥰을 구하러 갈 것이었다. 하지만 카이토가 말하는 것은 그 부분이 아니었다. 아리마라는 존재가 쥰에게 얼마나 큰 위협이 될 수 있는지를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사랑이라는 건… 사랑이라는 감정만으로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아리마는 고요히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그 이후로 아무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카이토는 계속해서 아메리카노를 마시다, 컵 안의 얼음까지 모두 와그작 씹어 삼키고 있었다. 반대로 아리마의 커피는 자꾸 차게 식어가고 있었다.
이만 갈게요. 커피 잘 마셨습니다.
응, 조심히 들어가.
아리마는 카이토가 돌아간 뒤에도 그 자리에 아주 오랫동안 앉아있었다. 아리마는 턱을 괴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어디론가로 향하고 있었다. 저 사람들은 어떻게, 자신의 가야 할 길을 알고 있는 걸까. 아리마는 오른쪽 눈만을 슬쩍 감아보았다.
유감스럽게도 풍경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오빠!”
“어? 어… 미안, 쥰.”
“쥰이랑 통화하면서 딴 생각하다니, 너무해요.”
이런, 일 났군. 아리마는 쥰의 한 마디 한 마디에 쩔쩔맸다. 아리마는 쥰을 달래기 위한 말을 골랐다. 하지만 먼저 선수를 친 것은 쥰이었다.
“요즘 힘들어요?”
“어, 왜?”
“목소리에 기운이 없어 보여요.”
“…음, 쥰 생각하면서 힘낼게. 걱정하지 마.”
“힘들면 꼭 쥰한테 말하기에요.”
쥰의 목소리가 맑았다. 아리마는 무심결에 응, 하고 답했다.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해버렸다고, 아리마는 생각했다. 쥰의 점심시간은 항상 아쉬울 정도로 금방 끝나버렸다. 아니면 단순히 쥰과 함께 있어서 그런 것일지도. 아리마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사랑이란 건 사랑만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카이토의 그 말은 맞았다. 하지만 사랑할 수밖에 없는 관계도 존재한다고, 아리마는 생각했다. 아리마 키쇼는 생애 처음으로 행복을 탐냈다. 그리고 그 행복은 이미 아리마의 손끝에 걸려있는 것만 같았다.
이것만 놓치지 않는다면. 아리마는 주먹을 꼭 쥐었다.
“그럼 오빠, 이따 봐요.”
“그래. 쥰도 수업 잘 듣고.”
전화가 끊기고 나서도 아리마는 한동안 휴대전화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화면이 꺼진 휴대전화에 아리마의 얼굴이 비쳤다. 아리마는 가볍게 인상을 찌푸리곤, 휴대전화를 주머니 속에 넣어버렸다. 쥰과 저녁을 함께하려면 일에 조금 더 집중할 필요가 있었다.
“쥰은 카레에 들어간 당근, 잘 먹는구나.”
“오빠, 쥰은 편식 안 해요.”
“응, 착하다.”
CCG 근처의 카레 가게였다. 약간 붉은빛이 도는 목제 테이블에서 두 사람은 마주 앉아있었다. 식기가 가볍게 그릇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아리마는 쥰이 카레를 오물거리는 것을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죽음. 아리마가 쥰을 볼 때 아리마에게 드리워지는 어두운 그림자였다. 아리마는 자신 안의 시계에 귀를 기울였다. 아주 빠른 속도로 초침이 움직이고 있었다. CCG의 저승사자도 어떻게 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내가 이런 몸이 아니었다면. 카레를 한 숟갈 뜨며 아리마는 이뤄질 수 없는 꿈을 꿨다. 처음으로 죽음이란 것이 두려웠다. 아리마 자신의 죽음도, 쥰의 죽음도. 아리마의 숟가락이 그릇의 바닥을 날카롭게 긁는 소리가 났다.
“이런, 미안.”
“오빠, 나 봐요.”
고개를 들자 턱을 괴고 아리마를 바라보고 있는 쥰이 보였다. 아리마는 슬쩍 쥰의 시선을 피했다. 쥰이 무얼 얘기하고 싶어 하는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쥰을 만날 땐 쥰에게 집중해야 하는 걸 알면서도, 아리마는 그게 잘 안 됐다. 빛과 그림자는 항상 같이 있다는 말처럼, 쥰과 함께하는 행복에는 지독하게 눈치 없는 불안이 언제나 뒤따랐다.
“아까 약속했죠? 고민 있으면 쥰에게 꼭 말하기로.”
“…그게. 쥰에겐 조금, 미안한 이야기일 수도 있어서.”
아리마는 숟가락을 그릇 옆에 내려두었다. 그릇 속의 카레는 거의 줄어있지 않았지만 식욕이 크게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아리마는 깍지를 껴 테이블 위에 두었다. 언젠가는 해야만 하는 이야기였다.
아리마는 지그시 눈을 감고 머릿속을 떠다니는 단어들을 솎아냈다. 최대한 쥰이 걱정하지 않을 만한 단어들을 골라내고 싶었다. 아리마는 천천히 말들을 꺼냈다. 가게 안의 모든 소리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아리마는 이 가게에 쥰과 자신 단 둘만 남아있는 것만 같았다. 쥰은 아리마의 얘기가 끝날 때까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얘기를 마친 아리마는 미세하게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물잔을 들어 남은 물을 들이켰다. 물은 미지근하게 식어있었다.
“참……. 오빠는 정말 바보라니까.”
아리마는 쥰이 자신 쪽으로 가볍게 몸을 기울이는 것을 멀뚱히 바라보았다. 아리마와 눈이 마주친 쥰이 씩 웃어 보였다. 아리마가 반했던 쥰의 웃음이었다. 쥰이 검지를 뻗어 아리마의 콧잔등을 툭, 건들었다.
“그래서, 고민하면 답이 나오는 문제에요?”
“그건… 아니지.”
“오빠 만약에, 만약에요…. 내가 죽으면 오빠는 이 순간을 후회할 거라구 생각해요. 지금처럼, 눈앞에 저를 두고 자꾸 그런 생각만 한 걸요.”
쥰의 손끝의 아리마의 머리를 부드럽게 스쳤다. 아리마는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오빠가 고민하는 건 알겠지만……. 그렇다고 오빠가 지금 눈앞의 행복을 놓치는 건 싫은데.”
“그렇네…. 오늘 쥰한테 한 수 배웠는걸.”
“그럼 오늘 수업료는 뽀뽀 한 번인 거, 알죠?”
응, 하고 아리마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쥰 역시 아리마를 따라 밝게 웃었다. 쥰에게 모든 것을 말하길 잘했어. 아리마는 진심으로 생각했다. 어떻게든 핑계를 대고 말하지 않았다면, 언젠가 쥰의 말처럼 지금 이 상황을 후회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쥰, 내가 그림자라면 너는 내 빛이야. 아리마는 쥰 몰래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한 줌의 그림자도 없는 웃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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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아리마의 캐해석......아직 잘 모르겠어요 ㅋㅋㅋㅋㅋㅋㅜㅜ 그렇답니다....쥰과 아리마의 캐해석이 하프님의 캐해석과 너무 동떨어져있지만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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