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프트 BL  #산다이바나시_ 종이비누/지팡이/슬그머니

 

 

누가바

 

 

  “꽃은 시들 때 추해져서 싫어해.”

  내 후배였던 녀석이 했던 말이었다. 삼월인데 아직 바람이 쌀쌀했다. 신입생 입학식을 하루인가 이틀인가밖에 남겨두지 않았던 때였다. 그때 우리는 동복을 입고 교정의 벤치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빨고 있었다. 그 녀석은 항상 누가바를 먹었다. 녀석의 황갈색 손가락을 타고 누가바가 진득하게 흘렀던 것을, 녀석은 항상 눈을 지그시 감고 혀끝으로 그것을 핥아 먹었던 것을 기억한다.

  “목련은 그렇지. 누렇게 변해가지고.”

  “목련 말고, .”

  옆에서 쪽, 하고 그가 흐르는 누가바를 빨아먹는 소리가 들렸다. 쟤는 왜 꼭 누가바를 먹어서 저렇게 고생한담. 그때 나는 무슨 아이스크림을 먹었나. 하도 여러 종류의 아이스크림을 즐겨서 아무리 생각해도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그 녀석이 그때도 누가바를 먹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꼭 누가바를.

  “나는 그래서 꽃이 싫어.”

  “누가 물어봤냐.”

  “됐고, 다 먹었으면 일어나자.”

  그가 먼저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다. 겨울의 날카로운 햇살에 그의 끈적한 손등이 닿았다. 나는 그의 지팡이를 그에게 건넸다. 땡큐, 그의 간결한 인사였다. 그는 절뚝거리며 두어 발 앞서 나가 굳이 나를 돌아보았다.

  그의 왼쪽 다리가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몰랐다. 녀석의 다리는 우리가 동아리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랬고, 그래서 나는 그 이유를 굳이 묻지 않았다. 나는 그저 입학식 때부터 소문이 파다하게 돌던 녀석이 저 녀석이구나, 하고 말을 뿐이었다.

  끈적하고 검은 젤리 비슷한 것들이 덕지덕지 붙어있는 쓰레기통에 우리는 아이스크림 쓰레기를 버렸다. 춥다. 녀석이 중얼거리듯 뱉은 말이었다. 점심시간도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그때 녀석은 꽃이 어쩌고 하는 얘기 따위를 하고자 했던 것이 아니었을지도 몰랐다. 거기서 그가 하고 싶었던 얘기는 많았겠지. 나 전학 가. 이제 우리 못 봐. 졸업 축하해주지 못해서 미안해.

  그것도 아니라면. , 선배 좋아했는데.

  녀석이 내게 인사를 건네지 않은 것을, 나는 서운해했던가? 서운할 겨를도 없었다는 것이 맞는 말 같았다. 나는 그 사실을 꽤 늦게 알았다. 녀석의 전학은 내게, ‘걔 전학 갔다며?’로 전해졌다. 그것도 나한테 직접 전해오는 말이 아니라, 사람들의 대화 속에 둥둥 떠다니던 말로.

  나는 우리가 항상 만나던 그 벤치로 달려갔다. 거기 가면, 녀석이 평소처럼 누가바를 먹으며 있을 것만 같았다.

 

  “선배.”

  “학교 졸업한지 얼마나 됐는데, 선배는 무슨 선배야. 형이라고 불러.”

  “.”

  녀석은 여전히 지팡이를 짚고 다니고 있었다. 녀석이 키가 큼에 따라 녀석의 지팡이도 자란 것 같았다. 녀석은 길어진 지팡이를 빼면 예전과 별 다를 게 없어보였다. 사람이 어쩜 저렇게 안 늙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이 년인지 삼 년인지 하는 시간이 지났는데도 녀석의 얼굴은 그대로였다.

  두 사람이 만난 것은 자취방 근처 편의점 앞이었다. 이렇게 좁은 동네에서 이제야 만난 것도 놀라운 일이었다. 그 날은 딱 열대야가 시작되는 밤이었다. 끈적한 습기와 열기가 온몸에 달라붙어서 지긋지긋해지기 시작할 때, 그가 먼저 나를 불렀다.

  편의점 외부 테이블은 나무로 되어 있었다. 나무는 잠깐 서늘했다가 우리의 체온 때문에 금새 뜨거워졌다. 녀석과 나는 바로 옆에 앉아 테이블에 등을 기댔다. 녀석의 취향은 바뀌지도 않았는지, 또 누가바였다.

  그의 손이 다른 아이스크림으로 향하다가 누가바로 향하는 것을, 나는 봤으면서도 못 본척했다. 나는 그때, 빠삐코였다.

  “, 전학갈 때 나한테 미리 말해주지 그랬냐.”

  “미안해. 말하려고 했는데, 힘들어서.”

  녀석의 따뜻한 입술 아래서 누가가 녹아 흘러내렸다.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각자의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할 말은 많았는데, 어떤 말부터 시작해야할지 몰랐다. 하여간 예전부터 둘 다 말주변은 별로 없었다.

  침묵을 먼저 깬 것은 녀석 쪽이었다.

  “, 그거 알아?”

  “?”

  “나 누가바 별로 안 좋아하는 거.”

  “너 맨날 누가바만 먹었잖아.”

  “형 앞에서만 그랬지. 누가바, 되게 잘 녹잖아.”

  그가 그 말을 하는 도중에도 누가바는 녹고 있었다. 초콜릿색 누가와 바닐라 아이스크림이 섞여 그의 손가락과 손등을 타고 흘렀다. 그는 예전처럼 고개를 가볍게 기울이곤 혀를 뻗어 그것을 핥아 먹으려 했다. 간간이 쪽, 소리를 내면서.

  나는 그의 손을 잡아 내쪽으로 가볍게 끌어당겼다. 녹은 누가바가 의자에 뚝, 떨어졌다.

  “그거 알아? , 너가 준 종이꽃 아직 안 버렸다. 우리가 맨날 아이스크림 먹던 벤치에 네가 두고 갔던 거 말야.”

  녀석은 대답 없이 물끄러미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거, 시들지는 않는데 녹아버리더라. 졸업식도 아닌데 비누꽃 같은 건 어디서 구해서.”

  “.”

  “그래도 시드는데 추하진 않더라.”

  녀석의 손은 의외로 차가웠다. 한여름인데도 불구하고 그랬다. 나는 혀를 뻗어 그의 손에 묻은 아이스크림을 핥았다. 끔찍할 정도로 달았고, 조금 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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