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01. 20.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면 행복한 결말의 이야기가 될까.

 

   

파아란[각주:1]

 

Y A G I 

 

우리의 사랑은 찬란했지만 그만큼 아팠다. 너와 처음으로 했던 섹스와 비슷한 감각이었다. 우리의 섹스는 충분히 유쾌하고, 두 사람 다 그럭저럭 만족한 섹스였지만 그 안에는 아픔이 있었다. 미숙함의 통증. 너는 사실 여자와 자본 것이 처음이라고 말했다. 나는 남자와도 섹스를 해본 적이 없다고 했다. 우리는 (남자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 분명한) 레즈비언 섹스 비디오를 모텔 PC에서 함께 봤고 그것을 따라 하려 애썼지만, 그 어떤 것도 성공하지 못했다. 그래도 그때는 유쾌했다. 나는, 남자로 치면 발기부전 같은 건가? 네가 벗은 내 몸을 안으며 얘기했다. 나는 그 말에 어떻게 답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웃었다.

우리의 그때는 제법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었다. 지금 와서 돌아보면 단순히 행복하고 싶었던 것이 아닌가 싶기도 했지만. 우리는 처절하게 서로를 사랑했다. 사랑하는 것 말고는 아무 의미도 없는 것처럼 서로를 사랑했다. 우리는 손을 잡고 다니다 서로의 손바닥을 간질이기도 했고, 남자와 여자가 사랑하는 영화를 보며 그사이에 서로를 대입하기 힘들어하기도 했고, 오르가즘이란 단어를 처음으로 체감하기도 했다.

그렇게 사랑했기에 어쩌면 더 아픈 것일지도 몰랐다. 숙성된 아픔은 우리가 생각했던 얄팍한 행복 아래에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는 그것을 일부러 부정했다. 그런 아픔쯤이야 점점 두터워져 갈 사랑으로 억누를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항상 그렇듯이 무언가를 억누르면 언젠가는 그것이 터져 흐르기 마련이었다.

마치 자연법칙 같은 것이었다. 여름이면 찾아오는 장마와 비슷한 것.

우리의 사랑은 너를 삼켰다. 정확히 말하자면 너는 삼켜졌다.’ 너를 삼킨 것은 무엇이었을까. 짐작되는 것은 많지 않았다. 왜냐면 우리는 행복하고 싶었기 때문에. 결국 내가 너의 아픔에 대해서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고작 깨물린 살에서 느껴지는 미미한 아픔 따위만 알고 있었다.

만약 우리가 사랑하지 않았다면 너는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나는 네게 국화가 아닌 작약을 선물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이라는 작약이었다. 너는 내게 있어서 그런 존재였다. 어쩌면 너의 사신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나였을지도 몰랐다. 네게 작약을 바치며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우리는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였지만 그렇기에 만나지 말았어야 했던 것일지도.

너는 유서도 없이 죽었다. 그토록 증오하던 부모에게도, 내게도, 이 세계에도 남기고 싶었던 말이 없던 모양이었다. 아니면 너무나 하고 싶은 말이 많아 그것들을 활자 대신 눈물로 쏟아부었을지도.

네가 좋아하던 노래가 있었다. 가끔 모텔에서 일부러 창문을 열어놓고 함께 보곤 했던 창백한 새벽빛과 같은 노래였다. 우리는 휴대전화로 노래를 틀어놓고 새벽의 파란빛이 세상에서 사라져가는 것을 보았다. 너는 가끔 후렴구를 따라 불렀다. 어느 순간부터는 나도 그 후렴구를 따라 부르고 있었다. 우리에겐 서로의 벗은 몸을 매만지며 서로의 사랑에 매몰되는 노래를 함께 불렀던 때가 있었다.

 

 

  1. 안예은 <파아란>을 인용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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