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02. 23. 산다이바나시 : 느티나무, 입술, 유리

 

 

 

유리의 맛

 

 

 

   언젠가 느티나무 아래에서 남녀가 서로 입술을 맞대는 장면이 나오는 영화를 본 적이 있었다. 조각난 기억 속에 남아있는 것은 그뿐이었다. 그 기억은 로맨틱하다는 단순한 감상과 함께 붙어있었다. 언젠가 나도 저런 느티나무 아래에서 누군가와 입을 맞출 수 있을까. 아니, 어쩌면 나는 이미 그렇게 해 봤을지도. 단순히 그것이 느티나무인지 아닌지 몰랐던 것뿐일지도.

   나는 단순히 여자와 사랑을 하면 어떤 느낌일지 궁금해서 너와 연애를 시작했다. 물론 네게는 숨긴 감정이었다. 나는 너에게 사랑을 말하며 가슴속에 피어나는 회의감과 죄책감을 애써 무시했다. 나는 그것들을 애써 꾹꾹 누르며 너의 사랑을 받았고, 나의 가짜 사랑을 주었다. 너는 내가 준 것을 꽤 만족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면 그럴수록, 나는 내 진짜 감정을 꾹꾹 눌러야만 했다. 어쨌든 너와 함께 있는 것은 좋았으니까. 어쩌면 이런 것도 사랑일지 몰랐으니까.

   그러나 그것이 사랑이 아님을 알게 된 순간이 있었다. 너의 일방적인 감정, 그리고 나의 일방적인 감정. 내가 아직도 이름을 알지 못하는 어떤 나무 아래에서 처음으로 우리가 혀를 섞었을 때, 나는 우리의 감정이 결코 섞일 수 없는 것이란 걸 깨달아버렸다.

   첫 키스의 맛은 천사의 종소리가 아니라 유리가 와장창 소리를 내며 깨질 때 나는 맛과 비슷했다. 그 순간 우리가 공유하는 것이 있었다면 바로 그 맛이었다. 버티고 버티다가 한계를 맞이해버리는, 햇볕 아래에서 투명하게 빛나는 유리의 맛이었다.

그때부터 우리는 헤어짐을 직감해 왔다.

그럼에도 우리가 아직까지 함께하고 있는 것은 머릿속에 남은, 느티나무 아래에서 남녀가 서로의 입술을 맞대고 있는 장면 때문이었다. 너도 그 영화를 본 적이 있다고 했고, 너도 그 영화를 로맨틱하다고 생각했고, 너도 그 영화의 결말을 몰랐다.

나는 우리가 입을 맞춘 나무가 느티나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언젠가 함께 그 영화를 볼 것이고, 그들이 입을 맞출 때 한 번 더 입을 맞출 것이고, 그러고 나서 우리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서로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게 될 것이다.

언젠가 찾아올 일이었지만 그것이 언제가 될지는 우리 둘 다 모르는 일이었다. 몰라도 되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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