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모는 자신이 어떻게 흡혈 욕구를 참았고, 또 어떻게 그것을 발산해 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너무도 오랜 시간 공복을 참은 탓이었다. 기억의 소실. 요모가 가장 경계하는 것이었지만 이번에는 어쩔 수 없었으려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자신을 우타라고 소개한 남자를 먹지 않기 위해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으니까.
요모는 자신이 먹은 사람 대신 그 남자의 이름을 외웠다. 우타. 너무나도 쉽고 간단해서 현실감이 없는 이름이었다.
우타는 식사 시간 내내 요모가 식사를 하는 걸 지켜보았다. 목덜미에 송곳니를 박아넣고, 뼈와 거죽이 닿을 정도로 피를 빨아먹고, 마침내 작은 뼈 하나하나까지 아득아득 씹어먹는 그 모습을 눈 하나 깜짝 않고 바라보았다.
요모는 손날에 묻은 피를 핥아먹었다. 그의 눈이 붉은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지금까지 굶은 것에 비해 인간 하나는 적은 양이었다. 하지만 요모는 그것으로 식사를 멈추었다.
먹을 수 있는 다른 인간이 없었기 때문은, 당연히 아니었다.
우타는 책상다리를 한 채, 한쪽 팔꿈치를 무릎에 대고 턱을 괸 채로 앉아있었다. 아주 흥미로운 것을 본다는 태도도 아니었고, 그 장면이 지루하다는 태도도 아니었다. 그저 관망하는 것. 그것이 바로 우타가 지금까지 해왔던 것이었다.
그런 우타에게선 아주 달콤한 냄새가 났다.
“식사, 끝난 거지?”
“응.”
“제대로 본 건 처음이라 조금 놀랐어. 아, 이런 말은 좀 실례인가?”
우타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고양이상, 붉은 눈동자에, 검은 머리카락. 온몸을 휘감은 문신과 곳곳의 피어싱.
대부분의 흡혈귀에게 있어 인간의 외형이나 목소리 따위는 크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으나, 우타의 외모는 어쩔 수 없이 사람의 시선을 잡아끄는 부분이 있었다. 길을 걷다가 한 번쯤 뒤돌아볼 외모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좋게 얘기하면 기억하기 쉬운 얘기였고 나쁘게 얘기하면 먹잇감이 되기 좋은 외모였다.
“…그다지.”
“응, 응. 그렇다면 다행이야.”
그렇게 말하며 우타는 몸을 일으켰다. 그가 탁탁 옷을 털자 공사장의 먼지가 가뿐히 내려앉았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갈게, 흡혈귀 씨.”
우타는 성큼성큼 요모의 앞으로 걸어왔고 종국에는 그와 코끝이 닿을 정도의 거리까지 다가왔다. 요모는 우타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 살아있는 자의 특권. 두 사람의 숨이 섞였다.
“나는 흡혈귀 씨의 손에 죽고 싶어.”
“이유는?”
“죽고 싶은 데에 이유가 있겠어?”
“왜 하필이면 내 손에 죽고 싶느냐, 하는 거야.”
두 사람 다 거리를 늘이지 않았다. 요모의 눈에 우타의 눈동자가 오롯이 담겼다. 어느 쪽도 시선을 피하거나 눈을 깜빡이지 않았다. 마치 기 싸움을 하는 것처럼 두 사람은 서로를 노려보았다.
“그야.”
먼저 한발 물러선 것은 우타쪽이었다. 우타는 몸을 뒤로 물리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인간이란 생물이, 자신보다 상위에 있는 존재에게 먹힐 기회란 없잖아?”
“그게 다인가?”
“응.”
요모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 걸 원하는 생명이 있단 말인가? 아니면 이건, 그저 오만일까?
“헛소리도 적당 것 해, 인간.”
“우타야. 아까 이름 말해줬잖아?”
“…우타.”
“나는 피식자의 상황에 놓여보고 싶은 거야. 그러면 좀, 뭔가가, 달라지지 않을까아, 하고.”
“제정신이 아니군.”
“흡혈귀 씨도 마찬가지잖아, 그건?”
요모는 우타를 노려보았다. 우타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우타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요모 렌지는 눈을 떴다. 달빛이 은은하게 들어오고 있었다. 그는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켜 앉았다. 공사 중인 건물의 휑한 벽면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토지 권리문제로 싸우다가 결국엔 건설이 무기한으로 연장된 건물. 그곳이 그가 거주하는 곳이었다.
물론 지내기는 폐가 쪽이 훨씬 좋았지만, 겁 없는 인간들 덕분에 그런 곳에서 잠을 잤다간 엄한 소문이 돌기 십상이었다. 차라리 이런, 누가 봐도 괴담 같은 것은 없어 보이는 공간에서 지내는 것이 나았다.
미미한 허기가 느껴졌다. 평생을 따라다니는 허기. 요모는 멍하니 달빛을 바라보았다.
그는 밤의 지배자이자 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남은 순혈 흡혈귀였다.
인간의 피를 마시고, 그림자에 몸을 숨기고, 기이할 정도의 수명에 날카로운 송곳니. 또 뭐가 있더라. 은탄환이나 심장에 대못을 박아 넣으면 죽는, 아니, 그 이전에 그저 태양 아래에만 나가도 소실되는 덧없는 생명체.
하지만 핏줄에 내재한 두려움 때문에 그 한 걸음을 걸어나가지 못하는 겁쟁이.
그것이 요모 렌지였다.
순혈 흡혈귀의 고귀함. 그런 것들은 기억도 못 할 과거에 스러졌다. 본래 살아남기 위해 다른 생명을 앗아가는 것이 하늘의 뜻이라지만, 모두가 그렇게 해서 살아가고 있다고 하지만, 어째서 이렇게 죄의식이 드는 것일까.
요모의 어린 시절엔 자택 지하에서 인간을 키우기도 했었다. 그때는 요모가 아직 흡혈귀로서의 정체성이 제대로 정립되지 않았을 때였는데, 본디 엄했던 그의 가정에서는 곧잘 요모에게 지하에서 인간의 아이를 조달해 오기를 시켰다. 요모는 그날의 첫 기억을 아직도 잊을 수 없었다.
지하에서 눈이 멀어가는 인간들. 제 핏덩이 하나 지키겠다고 자신을 버리는 여인들.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해 덜덜 떨리는 손으로 요모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아이만은, 아이만은 제발 살려달라고 애원하던 사람들. 그때 요모는 제 품속의 작은 생명의 심장 소리를 듣고 있었다. 콩닥콩닥, 주먹만 한 심장이 바쁘게 뛰며 생명을 이어나가고 있다.
요모가 하는 일은, 요모의 일족이 하는 일은 그 생명에 송곳니를 박아넣어 그것의 모든 것을 앗아가는 것이다.
그때의 기억은 요모에게 일종의 트라우마로 남았다. 하지만 흡혈을 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몸. 요모는 때때로 아이를 먹었고, 연인 중 한쪽을 먹었고, 형제를 갈라놓았다. 빼앗는 것이 요모의 삶이었다. 그가 흡혈귀였기 때문에. 그 누구도 주지 않은 권능을 손에 쥔 일족이기 때문에.
그러나 인간은 생각보다 빠르게 진화했고 흡혈귀의 권능을 없애는 법을 알아내었다. 너무나도 오랜 시간을 살아온 흡혈귀에게 변화란 없었고 때문에, 순혈 흡혈귀들은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다.
인간과 피를 섞던가, 죽음을 맞이하던가.
대부분의 흡혈귀는 죽음을 맞이했다. 어쩌면 다들 영생이란 것에 지긋지긋해졌을지도 모르는 일이라고, 언젠가의 요모는 생각했다.
여하튼, 그리하여 남은 순혈 흡혈귀는 이제 요모 렌지 하나뿐이었다. 자신을 저주하는, 저주받은 종족.
사사키가 토오루에게 말을 건 것은 그들이 감금된 지 약 3일가량 되었을 때였다. 물론 그것은 사사키 하이세가 식사의 주기로 판단한 정보이기 때문에, 실제로 그보다 더 오래 이곳에 갇혀 있었을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여기에 얼마나 있었는가가 아니라, 무츠키가 얼마나 버틸 수 있는가였다.
사사키에 비해 터무니없이 형편없는 식사. 무츠키는 그런 식사를 손도 쓰지 못한 채 엎드려서 힘겹게 식사를 해야 했다. 이대로 시간이 더 흐르면 무츠키의 몸이 손쓸 수 없을 정도로 나빠질지도 모른다. 그 생각에 사사키는 조금 초조했다.
생각해놓은 방안이 있기는 했지만, 그것이 과연 얼마나 통할까. 그런 생각을 하며 사사키는 입을 열었다.
“사실은, 무츠키가 좀, 신경 쓰여서.”
토오루는 무표정하게 무츠키를 바라보았다. 그는 사사키가 무츠키에 대해 얘기하는 걸 달가워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자신을 제외한 모든 것에 그런 행동을 보였다.
뭐가 신경 쓰이는데요?
착 가라앉은 목소리에 사사키의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지만, 사사키는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양 말을 이어갔다.
“더 진한 걸 하고 싶어도, 맘 편하게 못 하잖아.”
“…더 진한 거요?”
“응. 더 진한 거.”
토오루의 얼굴이 눈에 띄게 붉어졌다. 아이, 정말. 양손으로 얼굴을 가린 토오루는 부끄럽다는 듯이, 그리고 기쁘다는 듯이 사사키에게 말했다.
“정말, 하이세 오빠는, 정말.”
가볍게 사사키의 어깨를 때린 토오루는 곧 무츠키에게 향했다. 토오루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무츠키의 머리채를 붙잡아 그를 일으켰다. 무츠키는 반항은커녕 제대로 서 있는 것조차 어려워 보였다. 무츠키의 숨결은 곧 끊어질 것처럼 이어지고 있었다.
“무츠키 언니, 잠시 다른 곳에 가 있어요.”
“그냥 풀어줘. 이 집에 토오루랑 단둘이서만 있고 싶거든. 처음은, 이런 지하실보다 적어도 침대 위에서 하고 싶어.”
그 말에 토오루는 사사키를 보았다. 얼굴은 완전히 달아오른 채였다. 토오루가 생각했던 ‘더 진한 것’이 맞았다. 지금까지 하이세를 돌보고, 사랑한다 말하고, 입 맞추고, 껴안았던 것이 이렇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하이세 오빠를 이제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
그 생각만으로도 아드레날린이 솟구쳤다.
“무츠키 언니만 여기 가두면 되잖아요. 그럼 방해도 안 되고.”
“아무리 그래도 무츠키는 내 후배야. 후배에게 성적인 행위를 알게 하는 건, 아무리 내가 남자라지만…… 부끄러운 일인걸. 우리 집 방음 잘 안 되는 거, 토오루도 잘 알고 있잖아?”
거기다가 그렇게 되면 우리 둘만의 관계가 되는 게 아니잖아. 안 그래?
사사키의 말에 무츠키는 마치 그의 말 속으로 퐁당 빠져드는 것만 같았다. 토오루는 거침없이 무츠키의 결박을 끊고, 그를 문 쪽으로 밀쳤다. 무츠키는 힘없이 밀려나 바닥에 쓰러졌다.
“그래서 더 진한 게, 뭐예요 오빠?”
토오루가 사사키의 무릎에 올라타 앉으며 말했다. 사사키는 바로 대답하는 대신 그 뒤의 무츠키를 바라보았다. 아직도 쓰러져 있는 무츠키. 설마 도망갈 기운조차 없는 걸까. 토오루는 사사키의 뺨과 턱을 손끝으로 쓰다듬었다.
“눈 감아봐.”
사사키의 말에 토오루는 눈을 감았고, 두 사람은 입을 맞췄다.
농염한 밀도의 타액이 서로 섞였다. 사사키는 눈을 감고 있는 토오루를 바라보았다. 이 아이는 진심이다. 하지만 모든 진심이 옳은 것은 아니었다.
나를 희생해서 한 생명을 살릴 수 있다면. 사사키는 눈을 감았다. 무츠키가 몸을 일으킬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벌기 위해 더욱 적극적으로 토오루에게 다가섰다.
그리고 곧 토오루의 입술이 떨어졌다.
“……무츠키.”
“사사키 선배.”
그곳에는 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는 무츠키가 있었다. 무츠키의 손에는 망치가 들려있었다. 무츠키는 힘없이 팔을 늘어뜨렸고, 망치가 시멘트 바닥에 부딪히며 커다란 소리를 냈다. 그럼에도 쓰러진 토오루는 일어나지 않았다.
사사키는 무츠키의 손을 잡아 그를 부축하려 했다. 그러나 무츠키는 그 손을 밀어내고 다시 망치를 잡았다.
둔탁한 소리가 몇 차례나 이어졌다. 사사키는 충분하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모든 것을 잃은 무츠키에게 충분한 것이란 없을 터였으니.
“괜찮아?”
사사키는 아직도 떨리고 있는 무츠키의 어깨를 조심스레 안았다. 경찰이 곧 두 사람에게서 진술을 들을 예정이라고 했다. 그때까지 무츠키가 괜찮아지길 바라며, 사사키는 자신의 체온을 나누어주었다.
“……선배는 너무 착해서 탈이라니까요.”
“무츠키야말로.”
무츠키의 떨림이 점점 더 엷어지고 있었다. 무츠키는 사사키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두 사람의 악몽은 이걸로 끝인듯했다.
16
“토오루!”
“아, 선배!”
무츠키는 약간 목소리를 높여 사사키의 부름에 응했다. 그 사건 이후, 무츠키가 이사를 하였기 때문에 두 사람은 제법 간만에 얼굴을 보는 것이었다. 워낙에 큰 사건이라 어딜 가나 무츠키를 알아보는 사람은 있었지만, 그래도 그 끔찍한 기억이 있는 마을에서 벗어나는 것만으로도, 무츠키에겐 큰 도움이었다.
“미안해, 기다리게 했네.”
“아녜요. 제가 일찍 나온 건데요.”
일찍 나올 수밖에 없었다. 간만에 사사키를 만나는 날이었으니까. 무츠키는 그날 이후로 사사키에게 묘한 연정을 품고 있었다. 사지를 헤쳐나온 동지애와는 어딘가 다른 감정이었다. 그 감정은 K군을 짝사랑했을 때 느꼈던 감정과는 또 달랐다.
무츠키는 이런 것이 정말로 사랑인가,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물론 사사키가 무츠키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모를 일이었지만, 서로 성이 아닌 이름으로 부르기로 약속했고, 또 그 약속을 철저히 지키는 것으로 보면 사사키도 무츠키에게 아주 감정이 없는 것은 아닌 듯 보였다.
“토오루는 요즘 어때? 괜찮아? 나보다 더 힘든 일을 많이 겪었잖아.”
“가끔 악몽 꾸는 것 빼고는 괜찮아요. 선배가 곁에 있어 주니까요.”
“믿음직스럽게 여겨줘서 고맙네.”
사사키의 말에 무츠키는 싱긋 웃었다. 두 사람은 거리를 걸었다. 벌써 졸업식 시즌이었다. 사사키는 대학에 진학한다고 했고 그 대학은 마침, 무츠키가 이사를 간 지역과 아주 가까이 있었다.
“그나저나 머리는…….”
“아. 스트레스 때문이라는 것 같아요.”
무츠키는 곤란한 듯 말했다. 어느 순간부터 백발이 자라기 시작했다. 마치, ‘그’ 무츠키 토오루처럼. 지금은 원래의 머리카락 색보다 흰 머리가 훨씬 더 많았다. 사건의 후유증이 이런 것이라니, 얄궂은 일이었다.
“신경 쓰이죠, 아무래도? 염색할까요?”
“아냐, 괜찮아. 토오루가 괜찮다면, 나도 괜찮아.”
“선배는 역시 좋은 사람이에요.”
그렇게 말하며 무츠키 토오루는 부드럽게 웃었다. 사사키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사랑으로 가득 차 있었다. 사사키는 자연스럽게 무츠키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무츠키 토오루는 그 온기가 너무나도 기뻤다. 이 온기가 오직 내 것이라니. 무츠키 토오루의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지금까지의 일이 모두 녹아버리는 따스함.
“어, 하이세 오빠 맞죠!”
그때 누군가 사사키를 불렀다.
사사키는 몸을 돌려 목소리의 주인을 보았다. 하이세 ‘오빠’라니. 무츠키의 관심 역시 사사키의 시선을 따랐다. 그곳에는 낯선 여성이 있었다. 사사키는 반갑게 웃으며 그에게 인사를 했다.
“아, 오랜만이야.”
“오빠, 잘 지냈어요?”
“응. 그럭저럭. 아, 이쪽은 무츠키 토오루. 학교 후배야.”
여자는 무츠키를 빤히 바라보았다. 무츠키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곧이어 다시 사사키에게로 시선을 돌린 여자가 장난스레 웃으며 말했다.
“여자친구가 아니라요?”
“아니야, 그런 거.”
어째서 그 사실이 이렇게 서글플까. 무츠키는 계속해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들었다.
“나, 오빠 좋아했던 거 알죠? 저 아직도 좋아한다구요.”
“그런 말은 됐어.”
“진심인데. 각오하라고요, 오빠! 제가 대학만 가면 아주 그냥.”
여자는 여전히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고, 사사키는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치고 있었다. 무츠키는 이 상황이 퍽 싫었다. 질투가 났다. 그런 말 같은 걸, 다른 사람이 하게 두는 사사키가 미웠다.
무츠키는 모자를 깊이 눌러썼다. 누군가 자신을 알아보지는 않을까,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그의 시선은 불안에 가득 차 있었다. 벌써 여름의 끝자락이었다. 무츠키는 힘을 주어 제 옷의 끝단을 움켜쥐었다.
무츠키는 지금, 사사키 하이세의 집 근처에 몸을 숨겼다. 이미 교복을 입은 학생 몇 명이 무츠키를 지나쳐갔다. 무츠키는 집중하여 녹색 교복을 입은 사람들을 주시했다. 사사키를 찾는 것은 예상대로 너무도 쉬운 일이었다. 사사키 하이세 특유의 그 분위기를 흉내 낼 수 있는 사람은, 적어도 이 학교 안에는 없을 터였으니.
무츠키는 용기를 내 사사키의 앞에 섰다. 그는 모자를 쓴 무츠키를 잠시 내려다보더니, 무언가 말을 하려 했다. 무츠키는 그가 대화를 시작하기 전에 소매를 잡아끌어 인적 드문 골목으로 들어섰다. 사사키는 선선히 무츠키의 뒤를 따랐다.
“너는…… 무츠키. 무츠키 토오루지.”
사사키의 말에 무츠키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츠키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토오루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뉴스에서는 실종 상태라고 했는데, 괜찮은 거야?”
“선배, 저랑 잠시 어디 좀 가주실 수 있을까요?”
무츠키는 사사키를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흔들림 없는 눈빛 뒤쪽은 두려움이 군데군데 묻어있었다. 사사키는 그 두려움을 읽을 수 있었고, 그렇기에 말없이 무츠키의 뒤를 따라 걸었다.
무츠키는 인적 드문 골목만을 골라 걸었다. 사사키는 그런 무츠키에게 무언가 사정이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째서 자신에게 무츠키가 찾아왔는지는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었다. 그때 빌린 두 권의 책을 돌려주려고 이러는 것은 아닐 것이고. 사사키는 무츠키의 드러난 팔과 다리를 살폈지만 상처는 없었다. 그렇다는 건, 아주 악질적인 자에게 위협을 당하고 있거나 간간이 들려오는 소문처럼 그가 범인이거나 둘 중 하나라는 것일까.
하지만 사사키는 무츠키가 범인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비록 그를 오래 알지는 않았지만, 무츠키를 보았을 때 느껴지는 느낌이라는 게 그랬다.
어느 순간, 사사키는 무츠키가 향하는 곳이 학교 근처라는 걸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둘의 발소리만이 정적을 채웠다. 길은 점점 비포장으로 바뀌었고 결국에는 산처럼 보이는 곳을 오르기 시작했다. 사사키는 직감적으로 이곳이 학교 근처 공원 뒤의 언덕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여기는…….”
“제 전 남자친구가 묻힌 곳이에요.”
K의 실종이라면, 사사키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 애초에 K와는 어느 정도 친분이 있었기도 했었고. 그나저나 묻힌 곳이라니? K는 실종된 것이 아니었던가? 물론 그의 사망이 거론되기도 했지만, 초동수사에서는 실종이나 가출에 더욱 무게를 두지 않았던가.
아니, 무츠키가 이곳에 K가 묻혀있다는 걸 안다는 건, 무츠키가 그 사건에 연루되어 있다는 뜻이었다. 문제는 어떤 식으로 연루되어 있는가인데.
“선배, 도와주세요.”
“무츠키…….”
아무래도, 나쁜 쪽으로 연루된 모양이었다.
“이러다가 저도 선배도 죽을지도 몰라요.”
“무츠키 언니.”
무츠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낯선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사사키는 흠칫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자신들이 걸어온 그 길을, 흰 머리의 소녀가 걸어오고 있었다. 그의 등장에 무츠키는 마치 죽은 사람을 보기라도 한 양 눈에 띄게 두려워했다. 사사키는 그런 무츠키의 앞을 막아섰다.
저 아이라면, 사사키도 알고 있었다.
사사키 하이세가 자신 주위를 맴도는 소녀를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다만 중학교 교복을 입은 아이기에, 더는 아무 말 않고 넘어갔을 뿐이었다.
“여기서 뭐해요? 무슨 말 하고 있었어요?”
무츠키는 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소녀의 모습이 점점 드러남에 따라, 사사키는 그의 손에 무언가가 들려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망치.
이미 토오루의 시야에 들어온 이상, 도망칠 시간은 턱없이 부족했다.
무츠키는 자신을 껴안아 보호하는 사사키의 얼굴을, 그 모습을 보고 화가 난듯해 보이는 토오루의 얼굴을 보았다. 사사키가 망치를 맞고 쓰러진 이후에 바닥에 그저 주저앉은 무츠키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14
“정말, 두 사람을 옮기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아요? 무츠키 언니. 이러면 곤란해요, 정말”
“사……살….”
“살려달라고요? 이렇게 일을 망치는 사람을 살려둘 필요는 없잖아요.”
두 사람의 대화에 사사키는 어렴풋이 눈을 떴다. 머리는 끝없이 지끈거렸고, 어딘지 모를 몸의 부위는 계속해서 불편함을 토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사키는 고개를 일으켰고, 의자에 손과 발이 결박되어있는 걸 깨달았다. 그 모든 행위는 무츠키를 위한 것이었다.
살려달라고 비는 무츠키에게 다가가기 위해 몸을 일으키려다 깨달은 것들.
“너는…….”
“하이세 오빠. 저, 알아요?”
토오루의 관심이 순식간에 사사키에게로 옮겨졌다. 사사키는 토해내듯 숨을 뱉었다. 작은 조명 하나에 의지한 방은 너무나도 어두워 빛이 닿는 곳보다 그렇지 않은 곳이 더 많았다. 사사키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소녀를 바라보았다. 아직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한 의식 속에서 건져 올릴 수 있는 이름은 하나뿐이었다.
“……무츠키 토오루.”
“어머!”
토오루는 눈에 띄게 기뻐했다. 순수한 행복이 느껴지는 웃음에, 사사키는 오히려 소름이 끼쳤다. 그러며 사사키는 곧 눈앞의 사람이, 여태껏 자신을 따라다니던 그 소녀라는 것을 깨달았다.
“…무츠키가 아니군.”
“맞아요. 무츠키 토오루.”
“진짜 무츠키는…!”
“저도 진짜 무츠키에요. 무츠키 언니의 이복동생. 무츠키 토오루.”
토오루는 무츠키의 옆에 가서 섰다. 무츠키 역시 손발이 의자에 결박된 상태였다. 토오루가 다가가자 무츠키는 눈을 질끈 감으며 눈물을 떨구었다. 그것만으로도, 사사키는 무츠키에게 토오루란 어떤 존재인지를 알 수 있었다.
“저희도 쌍둥이라고 할 만큼 닮았죠? 미츠키 언니가 없어서 참 아쉬워요, 이럴 때는.”
“그 애는 놓아줘. 네가 원하는 건 나잖아.”
“지금 무츠키 언니를 걱정하는 거예요? 정말, 하이세 오빠는 마음씨도 곱다니까.”
토오루가 이런 짓을 벌인 이유를 사사키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사사키는 지난 시간 동안 무츠키에게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K의 실종과 화재로 인한 가족의 상실. 그 모든 것에 저 아이가 속해있을 것이 분명했고, 그 이유는 아마도, 자신의 육체일 터였다. 가족도 재산도 없는 사사키에게 바랄 수 있는 것은 오직 그 육체밖에 없었다.
“하지만 있잖아요, 무츠키 언니의 역할은 이제 끝났어요. 더는 쓸모가 없다구요.”
“무츠키 토오루!”
사사키의 말에 토오루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토오루의 기억 속에서, 사사키가 언성을 높이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 새로운 매력이란. 토오루는 지그시 사사키를 바라보았다. 피가 엉겨 붙은 희고 검은 머리카락과 어떻게든 이 상황을 헤쳐나가려고 애쓰는 눈동자. 모든 것이 사랑스러웠다. 모든 것이 영광이었다.
“그 애가 조금이라도 다치면, 난 너를 용서하지 않을 거야.”
“……역시 오빠는, 멋있어요, 정말. 백마 탄 왕자님 같잖아.”
“무츠키 토오루. 나에게 사랑받고 싶다면, 그 아이를 가만히 둬.”
그 말에 토오루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식사를 준비해 오겠다며 어둠 속에 잠긴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사사키는 그 문 너머에 위로 향하는 계단이 있는 것을 얼핏 보았다. 그렇다면 이곳은 지하일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아마도, 사사키 하이세의 짐작이 맞다면, 이곳은 자신의 집 지하였다.
익숙한 잡동사니들과 분위기. 무츠키 토오루는 사사키가 가족이 없다는 것도, 심지어 사사키의 집 구조도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악질적인 스토킹이라고밖에 할 수 없었다.
“선배.”
“미안해 무츠키, 나 때문에…….”
“아니에요…….”
무츠키는 고개를 푹 숙였다. 무츠키는 자기를 탓하고 있었다. 만약에 내가 사사키 선배를 찾지 않았더라면. 그날 밤 밖으로 나오지 않았더라면. 애초에 K라는 존재를 신경 쓰지 않았더라면. 그의 안에서 그의 모든 행동은 잘못으로 변질되었고 모든 악행의 원인은 그에게 있었다. 무츠키는 소리 없이 눈물을 떨구었다. 그런 무츠키에게, 사사키가 말했다.
“많이, 힘들었지.”
무츠키는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미츠키의 죽음 이후 그에게 그런 말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저 말 한마디가 뭐라고 무츠키의 심장을 이렇게 울린단 말인가. 무츠키는 크게 소리를 내지도 못하고 울었다.
무엇이 저 아이를 저렇게 만들었을까. 사사키는 서재에서 무츠키와 나누었던 얘기들을 떠올렸다. 그때는 그렇게, 순수하고 여려 보였는데.
자매의 방은 고요했다. 밤이 깊어가고 있었지만 두 사람은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 결국엔 이층 침대의 위쪽을 차지하고 있던 미츠키가 아래로 내려왔고, 두 사람은 무츠키의 침대에 마주 보고 앉아 대화를 시작했다.
“사사키 선배, 괜찮을까.”
미츠키는 아무 말도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안전할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오히려 사랑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사사키 하이세는 더욱 위험했다. 하지만 존재하는 것은 심증뿐, 어디에도 물증 같은 건 없었다. 물증이 있다고 하면, 두 자매가 K군을 살해했다는 증거뿐이겠지. 그리고 물론 그 증거에는 토오루가 빠져있을 것이 분명했다.
미츠키는 입술을 씹었다. 머릿속이 팽팽 돌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답이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도 없었다. 오늘 본 사사키 선배는 너무나 좋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 사람이 위험에 처한 것을 알면서도 가만히 있는 건 도리가 아닌듯했다.
“무츠키. 아무래도 안 되겠어.”
“응?”
“토오루에게 더는 휘둘리기만 할 수 없잖아.”
미츠키는 무츠키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말하듯 단어들을 씹어뱉었다.
“아무리 그래봤자 중학생이야. 키도 체격도 우리보다 작고.”
“하지만 무서운걸…….”
“나도 무섭지만, 지금 이대로 가면 앞으로 더 무서운 일을 하게 될 게 분명해.”
미츠키는 바로 휴대 전화로 손을 뻗었다. 토오루의 연락처를 누르기 전에 잠시 고민하긴 했지만, 그래도 그는 용기 있게 그 번호를 눌렀다. 아주 짧은 신호음이 울리더니 곧 정적이 이어졌다. 여보세요, 같은 형식적인 인사 같은 건 없었다.
어쩌면 그건 토오루가 더는 우리에게 자신을 감추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는 것 같다고, 무츠키는 생각했다.
“무츠키 토오루.”
“뭔가 결심을 한 모양이네요?”
무거운 미츠키의 목소리에 비해 토오루는 마냥 태연했다.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있다고 해서 저렇게 태연할 수 있을까.
“우리는 네 꼭두각시 노릇은 안 할 거야.”
“그거, 무츠키 언니도 동의한 말이에요?”
“뭐라고?”
“지금 미츠키 언니만 말하고 있잖아요. 미츠키 언니의 생각을 무츠키 언니에게 강요한 건 아니냐구요.”
“강요라니. 이런 일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어.”
“그럴까요, 과연.”
토오루의 말 속에는 분명 웃음이 섞여 있었다. 미츠키의 마음이 일렁였다.
K가 문득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이런 일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과연, 이 세상에 아무도 없을까. 식은땀이 흘렀다. 사정을 모르는 무츠키는 그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미츠키를 보고 있었다. 태연해져야 하는데, 그게 마음대로 안 됐다. 미츠키의 귓가에서 토오루의 목소리가 울렸다.
“아무튼, 알았어요, 미츠키 언니.”
“더는 연락하지마.”
전화를 끊고 미츠키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무츠키는 미츠키의 잠옷 끝을 잡아끌었다. 미츠키는 자연스럽게 무츠키를 껴안아 그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우리 둘이 함께 있다면 괜찮을 거야. 미츠키는 주문을 걸듯 거듭 무츠키를 생각했다.
“정말 이걸로 끝인 걸까?”
“본인 입으로 알아들었다고 했으니, 괜찮을 거야.”
“미츠키, 솔직히 말하면 나, 너무 무서워.”
“괜찮아. 괜찮아, 무츠키.”
미츠키는 다시 위쪽 침대에 누웠다. 이럴 때일수록 기본적인 생활을 지켜야 했다. 수면도, 식사도, 어느 것 하나 거르지 않고 건강하게 지내는 것이 좋다고, 미츠키는 말했다.
하지만 무츠키는 쉽게 잠자리에 들지 못했다. 심장이 두근두근 뛰고 있었다. 막연한 불안함. 열려 있는 모든 가능성이 다 지옥으로 향하는 길일 것만 같은 두려움. 무츠키가 눈을 감을 때마다 어둠이 무츠키를 덮쳤고 그것이 무서워 무츠키는 감았던 눈을 다시 뜨기를 반복했다.
그래서 휴대 전화의 진동이 한 번 울렸을 때, 무츠키는 거의 소리를 지를 뻔했다. 진동은 한 번으로 멈췄고 무츠키는 떨리는 손으로 휴대 전화를 집어 들었다. 저장되지 않은 번호였지만, 무츠키는 이 번호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잠깐 나와봐요. 근처 놀이터.]
무츠키는 바로 휴대 전화를 뒤집었다. 미츠키 말대로, 토오루에게 휘둘릴 필요는 없었다. 이런 연락쯤 못 본 척하고 있으면 되는 거였다. 되는 거였는데.
[10분.]
다시 울린 진동에 손을 떨며 뒤집어 본 화면에는 저 문구와 사진 한 장이 보내져 있었다.
살인. 살해. 비밀과 협박. 산. 산. 산. 선혈과 뜬금없이 울리던 새의 울음과 깊은 흙의 어두운색. 축축한 흙 속으로 빠져들어 가는 그. 이제는 결코 잊을 수 없는 얼굴을 가진, 그.
그리고 그것을 보고 있는 나.
사진 속에는 K의 시체를 보고 있는 무츠키가 있었다.
“토, 토오루.”
“무츠키 언니.”
토오루는 그네에 앉아있었다. 그는 바로 자신의 옆자리를 권했다. 무츠키에게 거절할 권리 같은 것은 이미 없었다.
“아까 미츠키 언니가 한 말, 무츠키 언니는 어떻게 생각해요?”
“나도… 토오루가 하고 있는 행동이 올바르다고 생각하지는 않아.”
“하긴, 무츠키 언니는 남자친구가 그렇게 됐으니까요. 많이 충격이었을 거예요.”
토오루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의외로 정상적이어서 무츠키는 더욱 혼란스러웠다. 이 말을 하고자 나를 부른 걸까. 무츠키는 토오루의 얼굴을 보았다. 토오루는 하늘을 빤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마치 그곳에 신이라도 존재하는 것처럼, 존재하길 갈망하는 것처럼.
“미츠키 언니, 너무 미워하지 말아요.”
그 말이 왜 위로가 될까.
무츠키는 저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토오루는 조금 거친 아이일 뿐, 나쁜 아이는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토오루에게 속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섬세한 무츠키의 마음은 토오루에게로 기울었다. 토오루는 무츠키의 표정을 보고 빙긋 웃었다.
“……응.”
“이제 슬슬 가보는 게 좋으려나요?”
무츠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제 집에 가봐야지. 미츠키가 있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는 그곳으로.
무츠키는 토오루에게 손을 흔들곤 그네에서 일어섰다. 토오루는 무츠키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나는 대신 땅을 한 번 발로 찼다. 토오루가 탄 그네가 흔들리며 쩔렁이는 소리를 냈다. 그 소리 사이사이를 토오루의 작은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불구경은요, 소방차가 오기 전이 제일 재밌거든요.”
무츠키는 달렸다. 그 와중에 슬리퍼 한 짝이 벗겨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머릿속이 일렁였다. 마치 두뇌에 불이라도 난 것 같았다. 불, 불, 화재…… 방화….
무츠키의 집은 이미 불꽃에 휩싸여 있었다. 비명소리가 들렸다. 이웃들이 소란스러웠다. 그중 몇 명은 무츠키를 발견하곤 걱정스런 시선을 보내기도 했다. 소방차가 요란하게 달려왔다.
무츠키는 다시 놀이터로 달렸다. 토오루는 여전히 그네를 타고 있었다.
“어떻게 했는지 궁금해요?”
“토오루.”
“무츠키 토오루, 연인의 상실로 인한 방화…. 가족 간에 문제가 없던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쌍둥이 언니인 미츠키 토오루와 연인을 사이에 두고 불화가 있어…. 그 연인은 지난 여름 실종된 K군으로 모두의 선망을 받는 아이였고…….”
토오루의 입에서 정제된 말이 쏟아졌다. 아주 그럴듯한 기사였다. 정말로 미래의 어딘가에서 보고 온 것 같은 정교한 기사.
“뭐, 이런 느낌이겠지요?”
토오루는 소리를 내 웃었다. 무츠키는 그런 토오루를 넋이 나간 채 바라보았다. 모든 것은 무대 위에 올라가 있었고 그 무대의 계획자는 토오루였다. 신 같은 게 아니라, 무츠키 토오루, 그의 이복동생이었다. 그리고 그 이복동생의 취향은 아주아주 끔찍한 비극이었다.
“저는요, 하이세 오빠가 정말 좋아요.”
갑자기 웃는 것을 멈춘 토오루가 말했다.
“책 읽을 때 그 눈빛과 다정한 목소리와, 단단한 몸매에. 어딘가 우수에 차 있는 눈동자. 기다란 손가락. 단정하게 입은 교복 아래로 보이는 손목뼈. 목과 어깨가 이어지는 그 부분과 간혹 보이는 쇄골뼈.”
사사키 하이세의 방은 예상대로 깔끔했다. 모든 것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있었다. 그렇기에 오히려 어딘가 ‘사람 냄새가 없는’ 느낌을 주기도 했지만, 미츠키는 그것이 싫지 않았다.
“의외로 책이 별로 없네요…….”
“서재가 따로 있어. 아버지 책들이 많아서.”
“서재…….”
무츠키는 순수하게 감탄하고 있었다. 미츠키는 그런 무츠키를 보며 속으로 웃었다. 최근 본 무츠키의 모습 중에서 가장 편안하고 안정되어 보였다. 정말로 우리 자매는 이렇게 더 돈독해질 수 있겠지. 미츠키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빼곡히 나무가 심겨 있었다. 옆집의 시선에서 자유로운 곳이군. 아무도 모를 이런 독립적인 공간에서조차 사사키 하이세는 자신을 완벽히 가다듬고 있었다.
무츠키는 기어이 책 두 권을 사사키에게 빌리고 나서야 그의 집에서 나섰다. 책이라는 공통 주제로 두 사람은 제법 친해진 모양이었다. 그러면서도 틈틈이 미츠키까지 신경 쓰는 사사키의 인간성이란. 직접 그를 보고 나니 괜히 그를 동경하는 사람들이 많은 게 아닌 모양이었다.
“무츠키, 이러려고 일부러 선배 집까지 따라간 건 아니지?”
“아니, 그건 아닌데…. 이야기 하다 보니까 너무 재미있어서…….”
“간만에 웃는 얼굴 봐서 좋았어.”
미츠키의 말에 무츠키는 조금은 수줍은 듯 미소지었다. 무츠키는 품속의 책 두 권을 보았다. 사사키와의 대화는 정말로 재미있었다. 독서를 원래 좋아하는 편이긴 했지만, 사사키의 시선으로 본 독서의 세계란, 너무도 새로웠다. 앞으로 무츠키 역시 향유할 그 세계. 무츠키는 거기까지 생각했다가, 문득 토오루의 얼굴이 떠올랐다.
“토오루한테 말하게?”
“응. 그래야지.”
선선한 미츠키의 반응과는 달리, 무츠키는 어딘가 주저하는 모습이었다. K군이 자연스럽게 연상되는 모양이었다.
“…좀 그래?”
“사실, 조금……. 설마 토오루가 좋아하는 사람한테까지 나쁜 일을 할까 싶기도 하지만.”
불안하긴 해. 무츠키는 속삭이듯 말했다.
“언니들.”
토오루의 목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은 흠칫 놀라며 정면을 바라보았다. 한 블록 앞의 가로등 아래에서, 토오루가 두 사람을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우리 대화를 얼마나 들었을까. 미츠키는 사사키의 집에서 나온 이후의 대화들을 복기했다. 딱히 걸릴만한 것은 없어 보였다.
토오루는 사뿐사뿐 걸어 아직 당황이 가시지 않은 두 사람의 앞까지 왔다.
분명 우리보다 키도 덩치도 작다. 하지만 왜 이렇게 토오루의 존재는 커 보일까. 압도당하는 느낌. 마치 거대한 그림자가, 그만큼의 어둠이 드리워지는 느낌이었다.
“제가 설마, 하이세 오빠 집도 모를 거로 생각한 건 아니죠?”
“그럼 왜 우리한테 그런 일을 시킨 건데?”
“조금 놀라긴 했어요. 저도 집 안까지 들어가 본 적은 없거든요.”
토오루는 역시 사사키의 집을 알고 있었다. 미츠키는 단침을 삼켰다. 토오루가 자신의 질문을 일부러 회피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기에 더욱 긴장되고, 초조했다.
“어땠어요? 하이세 오빠의 방은? 역시 깔끔하겠죠? 특이한 게 있었나요? 어서 말해봐요. 어서.”
“……그런 것까지 말해야 할 의무는 없잖아.”
“하지만 미츠키 언니, 우리는 공범인걸요. 공범끼리는 뭐든지 공유해야죠. 그래야 배신을 안 하지.”
그리고 토오루는 표정을 바꿨다. 순진무구한 아이의 표정.
“저에게 이복 언니들이 있었다구요? 세상에. 전혀 몰랐어요…….”
두 자매는 토오루의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저 천연덕스러운 연기를 모두들 믿으리라는 것도, 두 자매가 토오루에게 맞선다 한들 승률이 그렇게 높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결국 우리는 토오루의 말이었을 뿐이야.
미츠키는 그렇게 생각했다. 무츠키와의 관계, K군에 대한 연정, 그런 건 토오루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토오루가 내게 접근한 것은 오직, 자신의 말을 철저하게 듣는 꼭두각시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토오루.”
“시험이었어요. 내 말을 얼마나 들을지 궁금하잖아요.”
토오루는 그저 웃었다. 미츠키와 무츠키는 어떠한 말도 하지 못한 채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스스로 어둠 속으로 걸어간 꼴이었다. 투명한 어둠은 타인에게 들키는 일 없이 두 사람의 목을 졸라올 것이다.
고등학교 3학년. 잘생기고 성격 좋고 똑똑하기로 유명하다. 문무를 겸하는 팔방미인.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다정하며, 겸손하고 상대를 존중할 줄 아는 사람.
고등학교에 다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사사키 하이세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사사키는 학생회장 후보로도 거론이 되었지만, 앞에 나서는 것을 즐기지 않아 그 제안을 거절한 적도 있었다. 그는 그저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의 사람에게 잘하기 위해 힘쓰는 편이었다.
사사키와 쌍둥이의 접점은 거의 없었다. 학년도 달랐고 행동반경이 겹치는 일도 없었다. 그러니 방법은 단 하나뿐이었다. 사사키가 하교하기를 기다리는 것.
다행히 사사키는 독서 동아리에 들어있었기에 두 자매보다 하교가 늦었다. 시간이 엇갈릴 일은 없었다. 미츠키와 무츠키는 운동장 한쪽에 마련된 벤치의 끝과 끝에 걸터앉았다.
두 사람 사이에 대화가 오가지는 않았다.
언제부터 이렇게 변한 걸까. 무츠키는 그런 생각을 했다. 자신이 K군을 좋아했기 때문일까? 만약에 K군과 교제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까? K군의 마지막 모습이 떠오르자 무츠키는 치마를 꼭 쥐었다. 이제 누군가의 소매를 붙들 수도 없었다. 이 모든 일을 혼자 해결해나가야 했다.
“무츠키.”
미츠키의 부름에 무츠키는 흠칫 놀라며 그를 바라보았다. 미츠키의 시선은 무츠키에게 닿아있지 않았다. 언뜻 보면 멍때리는 것처럼 보였지만, 무츠키는 그렇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미안해.”
“…갑자기?”
“사과는 해야 할 것 같아서.”
이제 미츠키는 무츠키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눈빛은 무츠키가 알고 있던 미츠키 본래의 눈빛이었다.
“날 용서하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난 정말로, 우리를 위해 그렇게 행동한 거였어.”
“K군을 차지하려고 그랬던 게 아니라?”
“K군이 우리 사이를 갈랐었잖아.”
무츠키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기 때문에. 무츠키조차 미츠키와의 관계가 소원해졌다고 느꼈는데 그 대상인 미츠키는 어땠을까.
“나는 그저, 무츠키와 예전처럼 지내고 싶었을 뿐이었어.”
그 말을 하면서 미츠키는 고개를 푹 숙였다. 무츠키의 심장이 두근두근 뛰고 있었다. 미츠키의 진심이 전해지고 있었다. 그렇구나. 미츠키는 정말 나를 생각해서 그랬던 거구나.
무츠키는 미츠키가 조금 용서될 것도 같았다.
“……사사키 선배 나왔다.”
사사키의 존재를 먼저 발견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미츠키와 함께, 토오루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서. 그리고 예전의 우리가 되기 위해서. 무츠키는 미츠키를 보고 순수하게 웃었다. 마음이 편안해지는 미소였다.
두 사람은 사사키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사사키는 혼자서 귀가하는 타입이었다. 자매는 신중히 뒤를 따랐다. 다른 사람들에 섞여, 마치 이 길로 하교하는 학생들처럼.
하지만 사사키는 두 사람의 생각보다도 더욱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다.
“안녕, 얘들아.”
사사키가 뒤돌아 두 사람에게 밝은 표정으로 인사했을 때, 두 사람은 그 인사의 대상이 자신들이 아닌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사사키의 시선은 두 사람에게 흔들림 없이 닿아있었다.
심지어 그는 성큼성큼 걸어 두 사람의 앞에 섰다. 무츠키는 고개를 들어 사사키를 바라보았다. 웃는 얼굴이었지만, 그래서 더 속을 알 수 없었다.
“너희는… 1학년 쌍둥이들이구나.”
“저희를 알고 계세요?”
“우리 학교 학생들은 대충 아는 편이야. 이름은 잘 모르지만.”
사사키는 허리에 양손을 얹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두 사람의 미행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모양이었다. 미츠키는 조금은 허둥지둥하며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미츠키 토오루입니다. 이쪽은 무츠키 토오루, 제가 언니 쪽이에요.”
“응, 응. 그렇구나. 정말 닮았네, 두 사람. 인상은 조금 다른 것 같지만.”
사사키의 시선이 두 사람의 얼굴을 잠깐 훑었다가 떨어졌다. 관찰하는 듯한 눈빛이었지만 결코 기분 나쁜 정도는 아니었다. 사사키의 인간성은 어쩌면 소문으로 들리는 것 이상일지도 몰랐다.
“미츠키는 좋은 언니겠구나.”
사사키는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그렇게 보면 알기라도 하는 걸까. 미츠키는 그것이 궁금했지만 굳이 묻지는 않았다. 사사키가 말을 이어갔다.
“그래서, 나한테 볼 일이라도 있는 거야? 두 사람 평소 하굣길은 여기가 아닐 텐데.”
“아, 그게…….”
“책을, 추천받고 싶어서요.”
무츠키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사사키는 물론이고 미츠키도 놀라 무츠키를 바라보았다. 거짓말 같은 것은 할 줄 모르는 아이일 텐데. 하지만 무츠키의 입에서는 마치 준비하기라도 한 양 말이 쏟아졌다.
“책을?”
“사사키 선배는 좋은 책을 많이 읽는다고 선생님들도 그러시니까…. 혹시 추천받을 수 있으면, 정말 좋을 것 같아서요.”
“그렇구나. 그런 거라면 언제나 환영이지. 그럼 내일 학교에서….”
“괜찮으시면 선배 방을… 볼 수 있을까요?”
무츠키는 사사키에게 한 발짝 다가갔다. 사사키의 얼굴에 곤란한 기색이 스치고 지나갔다. 무츠키는 학교에서 집까지 가는 길을 확실히 알아둘 심산이었다. 그것이 토오루가 우리에게 원하는 것이었으니까.
“그게, 직접 표지를 보고 싶기도 하고……. 선배 방에 어떤 책들이 있는지도 궁금하고. 물론, 그, 여자 후배가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좀 그렇지만요. 그래도, 그게… 궁금하니까…….”
“좋아. 같이 가자.”
그렇게 말하며 사사키는 웃었다. 무츠키의 표정은 눈에 띄게 밝아졌다. 마치 누가 보면 사사키를 짝사랑하기라도 하는 것으로 오해할지도 모르는 표정이었다. 사사키는 그 표정을 그저, 자신과 같은 독서광의 기쁨 정도로 해석하고 넘어갔다.
“참, 타카츠키 센 작가님 신작 읽으셨어요?”
“음, 아직 안 읽었는데. 무츠키는 읽었어?”
“저도 아직 안 읽었어요. 사두긴 했는데 시간이 없어서.”
무츠키와 사사키는 태연하게 책에 관해 얘기를 하며 걸었다. 미츠키는 조금 뒤에서 두 사람을 따랐다. 아주 작은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토오루는 어째서 이런 일은 맡긴 것일까.
하굣길을 아는 것 정도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토오루에게 있어서는 더욱 그럴 터였다. 그런데 왜, 이런 일을 시키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해결되지 않는 의문이었다.
“들어와. 부모님은 지금 안 계시니까 신경 쓰지 말고.”
미츠키의 의문은 사사키의 집 앞에 도착해서야 멈췄다. 미츠키는 사사키의 집을 올려다보았다. 아마 저기 2층의 어딘가가 사사키 선배의 집이겠지. 미츠키는 사사키의 집으로 들어가기 전에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다.
K군의 실종 소식은 빠르게 마을에 퍼졌다. 학급 반장의 전화를 끊은 후 무츠키는 심장을 졸였다.
혹시나 내가 그랬다는 증거가 나오면 어떻게 하지.
무츠키는 어느새, 자신 역시 공범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게 되었다. 토오루의 말은 계속해서 되뇌게 된다. 그러다 보면, 그의 말대로 정말 두려움에 의한 일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게 되고 K군과 자신의 관계보다 K군의 결말을 생각하게 되었다. 멘탈이 유난히 약한 무츠키였기 때문에 토오루의 방식은 아주 효과적이었다.
다행인지, 그의 부모는 무츠키의 행동이 단순히 동급생의 실종에 의한 충격이라고 여기고 있다는 점이었다. 무츠키가 손을 떠는 것도, 작은 소리만 들려도 흠칫 놀라는 것도, 시종일관 어두운 표정인 것도 그 때문이라고 여겼다. 미츠키는 그런 무츠키를 보며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다.
자매의 밤은 고요했다. 눈물 자국도 없는 밤이었다.
K군을 찾는 수색대는 빠르게 모집되었고 마지막으로 K군을 만난 미츠키의 증언을 토대로 마을의 강 부근부터 수색이 시작되었다. 물론 미츠키의 증언은 거짓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미츠키가 거짓을 고할 것이라고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우등생이면서 쌍둥이 동생을 끔찍이도 아끼는 미츠키가, K군에 관해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었다. 그래 보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믿었다.
K군은 결국 발견되지 않은 채 새 학기가 시작되었다.
9
미츠키와 무츠키는 여전히 함께 등교했다. 다만 둘 사이에는 아무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무츠키가 미츠키와 함께 등교하는 이유는 오직 하나였다. ‘이상한 점을 보이면 들킨다.’ 최대한 평소처럼, 감정이 동하지 않는 것은 슬픔으로 덮는다.
무츠키는 K군의 복수를 하겠다고 몇 번이고 다짐했다.
하지만 그 마음을 읽기라도 한 걸까. 두 사람의 등굣길에는 언제나 토오루가 스쳐 지나갔다. 마치 무츠키를 감시하기라도 하는 듯한 행동. 절대 가까이 다가오거나 직접 접촉하지는 않지만 자신의 존재가 그곳에 있음은 어필한다.
무츠키는 토오루의 흰 머리카락이 보일 때마다 그때의 공포를 사소하게나마 다시금 느꼈다. 그 공포는 무츠키가 실질적인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하지만 토오루는 알고 있었다. 이 공포는 언젠가 분노 때문에 가려질 것이라고. 그러려면 그 전에 행동해야 했다.
사실 토오루에게는 목표가 있었다. 미츠키조차 모르는 목표. 정확히는, 토오루가 두 사람에게 접촉한 이유.
토오루는 처음 만났을 때처럼, 문패 앞에서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언니들, 간만이에요.”
토오루가 웃었다. 무츠키는 습관적으로 미츠키의 옷을 붙잡았다가 화들짝 놀라며 손을 떼어냈다.
“사사키 하이세, 알고 있죠?”
“사사키 선배?”
“네. 사사키, 오빠.”
토오루의 뺨이 아주 조금 붉어졌다. 토오루는 오른발로 작은 원을 그리더니 입을 열었다.
“저, 사사키 오빠를 좋아하거든요. 근데 언니들이 같은 학교잖아요.”
“K군을 그렇게 해놓….”
“쉿, 너무 크게 말하면 들켜요, 언니.”
무츠키는 입을 다물었다. 자신에게는 잘못이 없다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정말로 잘못이 없을까……? 무츠키 속에서 피어나는 불안과 의심은 무츠키의 안을 엉망으로 헤집어놓고 있었다.
“도와줄 수 있지요?”
“어떻게 도와주면 되는데?”
미츠키의 대답이었다. 미츠키는 토오루의 등장이 아무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오히려 미츠키는 토오루에게 감사를 느끼고 있었다. 무츠키와의 사이는 시간이 지나면 다시 굳건해질 것이라 믿었다. 우리는 쌍둥이니까. 그것도 서로 통하는 게 있는, 아주 특별한 사이니까.
“사사키, 아니, 하이세 오빠의 귀갓길을 알아봐 주세요.”
토오루가 두 사람에게 바라는 것은 아주 사소한 것이었다. 전화번호를 알아봐 주는 것도 아니고, 토오루를 직접 소개해주는 것도 아니다. 그저 어느 길로 귀가를 하는지를 알기만 하면 되는, 아주 쉬운 미션.
미츠키는 스스럼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츠키는 땅을 바라본 채 미동도 없었지만 토오루는 알고 있었다. 무츠키 역시, 자신의 말대로 움직이게 될 것이란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