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낙원 이메레스

 

 

"도망치는 건 비겁한 짓이야"

 

Y A G I

 

 

토오루 씨는 어떻게 그럴 수 있나요.”

아우라의 말에 무츠키는 고개를 돌려 아우라를 바라보았다. 사이코와 우리에를 만나기 위해 간만에 샤토에 들른 참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잠시 외출 중이었다. 그 빈자리를 채우고 있는 것이 바로 아우라였다. 무츠키는 소파에 무릎을 모으고 앉아 아우라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뭐가?”

아우라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무츠키는 눈을 깜빡였다. 아우라는 잠시 시간을 끌다가 바싹 마른 입술을 천천히 열었다.

어떻게 그렇게앞만 보고 달려갈 수 있나요.”

아우라는 사사키를 사랑하는 무츠키를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랬다가는 무츠키를 영영 잃어버릴 것만 같아서였다. 무츠키의 옆에 서서 그를 따르고 있지만 아우라는 사사키에 대한 증오를 도저히 버릴 수 없었다.

그것은 비단 아우라 키요코의 복수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것보다 더 본질적으로 타오르는 감정이 있었다. 아우라는 그것에 눈을 돌리려 애썼다. 자신이 품어서는 안 될 감정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람 마음이 생각대로 될 리가 없었다. 아우라는 그걸 알면서도 그 감정을 무시하려 애써왔다.

무츠키는 그런 아우라를 빤히 바라보았다. 아우라는 슬쩍 시선을 땅으로 돌렸다.

도망치는 건 비겁한 짓이라고 생각해.”

자신을 말하는 것일까. 그 말에 아우라는 다시 무츠키를 바라보았다. 그때 아우라가 가장 먼저 본 것은 무츠키의 얼굴이 아닌, 자신에게 천천히 다가오는 무츠키의 섬세한 손끝이었다.

도망쳐서 도착한 곳에 낙원은 없으니까.”

무츠키의 그 말은 더없이 감미로웠다. 나는 이런 걸 원하고 있었나. 아우라는 그렇게 생각하며 가만히 눈을 감았다. 무츠키의 말대로, 확실히 도망치지 않아야만 얻을 수 있는 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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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쿄구울 전력 60분_ 섞여서 만들어진 것  # 약간의 섹스 암시가 있음

 

 

Jelly Lover

 

Y A G I

 

너를 사랑할지도 몰라.

우이 코오리의 입에서 단단히 정제되어 나온 말이었다. 우이는 그 말을 하고 굳게 입술을 다물었다. 후루타 니무라는 국장실에 앉아 그 반듯한 입술을 떠올리고 있었다. 달도 없는 밤이 도쿄의 거리에 내려앉아 있었다. 후루타는 거대한 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퍽 나쁘지 않아 보였다. 후루타는 테이블 위의 젤리 봉지에 손을 넣었다. 그는 이번 젤리는 씹어 삼키는 대신 입속에서 이리저리 굴려보았다. 인공적인 과일의 맛이 입안 여기저기에 달라붙었다. 아직 봉지 속에 젤리는 많이 남아있었지만 후루타는 유난히 그 젤리를 아꼈다.

그것은 우이 코오리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기 때문이었다. ‘사랑한다도 아니고 사랑할지도 몰라라니. 후루타는 그 두 가지 말 사이의 깊은 간극을 느끼고 있었다. 참담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저 우이답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우이는 여러 의미로 아름다운 존재였다. 후루타는 CCG에서 볼 수 있는 그의 모습을 머릿속으로 그려보았다. 쉽게 부러지지 않을 것 같은 곧은 사람이었다. 그런 모습이 생각보다 쉽게 부러졌을 때는 어떤 쾌감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후루타는 입술을 비틀어 소리 없이 웃었다. 그 쾌감이 후루타가 우이에게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질 수 있게 해주었다. 그의 내면을 잔뜩 휘두르고 그를 내 아래에 두었을 때의 그 쾌감.

우이 코오리와 후루타 니무라는 결코 섞일 수 없을 것만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그들은 어떻게든 섞이고 있었다. 주로 후루타가 우이의 빈틈을 벌리고 그 사이로 자신의 존재감을 끼워 넣는 방식이었다. 연기맛이 나는 몇 번의 입맞춤 이후에 두 사람은 자연스레 몸을 섞었다. 바로 이 국장실 안에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그때만 생각하면 후루타는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독점욕에 가까운 무언가였다. 후루타 자신만이 볼 수 있는 흐트러진 우이의 표정. 후루타는 혀를 굴리며 그 뜨겁고 질척한 감각을 떠올렸다. 그런 관계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우이는 국장실에서 일을 벌이는 걸 탐탁지 않아 하면서도 후루타를 밀어내지는 않았다.

그런 우이의 입에서 사랑이라는 말이 나올 줄이야. 후루타는 우이가 사랑 같은 걸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의 그가 사랑이란 걸 할 수 있는 여유가 있을 리가 없었다. , 그래서 사랑할지도 모른다고 했던 걸까. 그것이 아니라면 우리의 관계가 생각보다 그에겐 복잡한 것이었을까.

후루타는 입안에서 아주 천천히 마모되고 있던 젤리를 씹어 반으로 갈랐다. 처음에는 형태를 유지하려던 젤리가 후루타의 입에서 형태를 잃고 사라져갔다. 젤리의 단맛은 금방 그의 혀를 그 맛으로 마비시켰다.

섞일 수 없는 것이 섞이면 과연 무엇이 나올까.

재미있겠네요.”

후루타는 입안을 가득 채운 진득한 단맛을 핥으며 휴대전화를 손에 들었다. 우이의 번호는 진작 즐겨찾기로 설정되어 있었다. 후루타는 그 번호를 눌렀다. 신호 대기음은 그다지 오래가지 않았다. 여보세요, 하고 말하는 우이의 목소리는 단단하게 굳어 있었다.

우이 씨. 그때의 답을 해드리려고 하는데, 만날 수 있을까요?”

후루타는 조금의 여유도 없이 바로 하려던 말을 뱉었다. 그러며 후루타는 다시 젤리 봉지에 손을 넣어 젤리 하나를 꺼냈다. 달이 없어도 도쿄의 밤은 밝았다. 후루타는 그 희미한 불빛에 젤리를 비춰보았다. 아무리 어두워도 어딘가 몸을 맡길 곳은 있었다. 사랑하든 사랑하지 않든 밤을 보낼 수 있는 곳은 많았다. 어중간한 사랑이 존재할 곳은 얼마든지 있었다.

#고교물  #펠라치오 주의

 

 

한낮의 여름

 

Y A G I

 

 

창밖의 소음이 교실로 날아 들어올 때마다 요모 렌지는 책상을 붙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운동장에서는 운동부가 한참 땀을 빼고 있었다. 매미가 요란하게 우는 여름이었다. 투명한 유리창을 통과한 햇볕이 요모의 손끝을 따갑게 비추고 있었다.

그 속에서 요모 렌지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달뜬 숨을 내뱉고 있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평소와 다른 것이 있었다면 이제는 정말로 여름이다, 싶을 정도로 날이 더워지기 시작했다는 것 정도였다. 빈 교실에서 요모를 바라보던 우타의 눈빛이 전에 없이 뜨거웠던 것도 그 이유일지 몰랐다.

렌지는 덥지 않아?”

나는 별로.”

더워 보이는데.”

우타는 천천히 입술을 움직이며 나긋하게 말했다. 에어컨도 켜져 있지 않던 빈 교실이라 확실히 후덥지근 하긴 했다. 우타는 눈을 깜빡여 희미한 열감을 털어냈다. 요모는 그런 우타를 보며 손등으로 제 입술을 훔쳤다. 한차례 입을 맞춘 이후의 일이었다. 더워, 하고 말하는 우타에게 책상 위에 앉아있던 요모는 몸을 기울여 그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대었다.

우타는 손을 뻗어 요모의 셔츠 단추를 위에서부터 차근차근 풀었다. 요모는 그런 우타를 말리지 않았다. 다만 그의 가느다란 목덜미를 매만지던 손을 아래로 치우지 않을 뿐이었다. 요모의 하얀 교복 셔츠 아래로 희미하게 땀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꽤 더웠던 것 같은데.”

못 참을 정도는 아니었어.”

요모의 말에 그의 가슴팍에 입을 맞추던 우타가 작게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요모는 우타의 숨이 간지러웠지만 딱히 그것을 내색하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우타의 둥근 뒤통수를 손바닥으로 쓸어내렸다.

그러면 왜 가만히 있었어?”

네가 그러길 원하는 것 같았으니까.”

내가 원하면 다 해줄 거야?”

글쎄.”

그렇게 말하며 요모는 희미하게 웃었다. 우타는 요모와 눈을 마주치며 그의 허리를 쓰다듬었다. 그의 손끝이 섬세하게 요모의 허리선을 훑었다. 우타는 숙이고 있던 몸을 일으켜 요모의 귓가에 호흡이 많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에도 가만히 있어 줄 거지?”

우타.”

요모는 자신의 아래로 다가오는 우타의 손목을 붙잡았다. 우타는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요모를 바라보았다. 요모의 뒤쪽에서 여름의 햇볕이 내리쬐고 있었다. 우타는 요모의 얼굴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 그림자 뒤의 요모의 표정은 평소와 별로 다를 것이 없었다. 우타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곤 요모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우타의 손은 요모의 바지 끝에 걸려 있었다.

, 그만했으면 좋겠어?”

그건 아니지만.”

그 대답에 우타는 머뭇거리지 않고 요모의 바지 버클을 풀어버렸다. 요모는 조용히 숨을 삼켰다. 교실에서 욕정을 해소한다는 것. 그것을 상상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현실로 이루어질 줄은 몰랐다. 요모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찰나의 어둠 속에서 요모는 자신의 심장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뛰고 있는 것을 느꼈다.

그런 요모를 두고 우타는 태연하게 손바닥으로 요모의 페니스를 가볍게 힘을 주어 훑었다. 요모는 몸을 살짝 굽혔다. 요모의 시야 끝에 우타의 손이 자리하고 있었다. 요모는 이번엔 눈을 조금 더 오래 감았다가 떴다. 살과 살이 스치는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사실 요모에게는 그 소리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러나 그것은 요모의 사정이었고, 우타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이왕 시작한 거, 우타는 끝을 볼 생각이었다.

우타는 혀로 입술을 축였다. 발갛게 달아올라 단단하게 서 있는 요모의 페니스 끝에 우타는 축축하게 젖은 자신의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다른 살에 입을 맞추는 것과는 무언가 다른 느낌이 드는 건 그저 기분 탓일까. 우타는 공을 들여 요모의 것을 입안으로 밀어 넣으며 혀로 그것을 훑어 내려갔다. 머리 위에서 요모가 낮은 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요모는 우타의 생각보다 훨씬 더 잘 버티고 있었다. 이러 것은 처음이니 금방 가버릴 줄 알았는데. 우타는 그것이 싫지는 않았다. 그저 조금 의외네, 하는 생각을 했을 뿐이었다. 요모는 간간이 뜨거운 숨을 뱉으며 신음을 참고 있었다. 책상을 붙잡고 있는 요모의 손끝이 바르르 떨렸다. 요모는 내리깐 우타의 눈을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그의 얇은 눈꺼풀과 섬세한 속눈썹을 바라보았다.

요모는 그것만으로도 갈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요모는 앓는 듯 신음을 흘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요모는 스러지듯 우타, 하고 말했다. 그의 말에 대답이라도 하듯 우타는 시선을 요모의 얼굴로 옮겼다. 요모는 우타의 깊은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고 그 순간 우타는 부드럽게 눈을 접으며 웃었다. 그건 정말로, 견디기 힘들었다. 사실 여기서 더 참는 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요모는 사실 우타의 입안에 사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여기까지 와서 요모를 놓아줄 우타가 아닌 것을 요모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요모는 꾹꾹 신음을 억누르며 입을 열었다.

우타. , 이제.”

그러나 요모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우타는 으으응, 하고 비음이 살짝 섞인 목소리를 냈다.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 요모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정감은 요모의 발끝에서부터 시작해 그의 온몸을 타고 흘렀다. 요모는 발끝에 힘을 꼭 주었다.

요모의 절정은 조용히 찾아왔다. 우타는 그것이 조금 불만이었다.

우타는 일부러 아, 하는 소리를 내며 입을 벌려 제 입안의 정액을 요모에게 보여주었다. 요모는 우타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우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타는 그 저의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에 개의치 않고 요모의 정액을 삼켰다. 미끈하고 비렸지만 아주 나쁜 느낌은 또 아니었다. 우타는 앞으로 익숙해져야 할 감각이라고 생각하며, 제 머리를 쓰다듬는 요모를 올려다보았다.

나머지도 교실에서 할 거야?”

요모의 목소리는 살짝 잠겨 있었다. 우타는 소리없이 웃으며 답했다.

끝까지 가고 싶은가 봐?”

요모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그저 고개만 돌렸다. 우타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바로 다음 말을 이었다.

렌지는 장소 바꾸면 좋겠어?”

요모는 아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타는 그런 요모의 턱을 부드럽게 붙잡곤 자신을 마주 보도록 했다. 우타의 입술 끝에는 엷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근데, 집에 갈 때까지 참을 수 있겠어?”

아니.”

요모의 말끝에는 긴 입맞춤이 이어졌다. 여름의 온도를 그대로 본뜬 키스였다. 우타는 그것을 가감 없이 받아들였다. 두 사람의 혀가 얽히는 것처럼 두 사람의 몸도 얽혔고, 그것은 두 입술이 떨어져 나갈 때까지 풀리지 않았다.

적극적이네, .”

우타는 그렇게 말하며 제 이마를 요모의 이마에 가져다 대었다. 두 사람은 한 번 더 입을 맞췄다. 여름 햇볕은 여전히 닿으면 살이 아플 만큼 따가웠다.

 

 

 

 

여름의 햇살

 

Y A G I

 For. 시온 님

 

 

키리시마 토우카는 올해 들어 처음으로 에어컨을 켰다. 어느덧 여름이 가까워져 있었다. 토우카는 에어컨 리모컨을 손에서 놓고 테이블을 닦았다. ‘그 녀석이 온다고 하면 괜히 마음이 미묘해졌다. 신경 쓰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자꾸 신경이 쓰인다고 하면 좋을까. 차라리 자신이 왜 그를 이렇게까지 신경 쓰는지 모른다면 차라리 나을 텐데. 그 이유를 알 것만 같아서 기분이 더욱 묘했다.

토우카는 천천히 커피를 내렸다. 뜨거운 물과 원두가 만나며 커피 특유의 향기가 온 카페에 퍼졌다. 차라리 연락을 하지 않고 불쑥 찾아오는 게 더 좋을지도 모르는데. 토우카는 카페 문이 열릴 때마다 그쪽을 흘끔흘끔 바라보며 생각했다. 평소처럼 불쑥 찾아오면, 기다리지도 않고 얼마나 좋아.

토우카는 그런 생각을 했다가 무언가를 깨달은 듯 화들짝 놀라며 원두에 물을 붓던 것을 멈추었다. 내가 왜 그 녀석을 기다리고 있지? 토우카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난 기다린 적 없는데. 토우카는 그러면서도 들어오는 손님에게 평소보다 오래 시선을 두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 녀석은 어째서 언제쯤 온다는 얘기도 하지 않았을까. 토우카는 어쩌면 시온이 자신을 기다리게 하려고 일부러 그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 녀석 생각대로 움직여 줄 내가 아니지. 토우카는 그렇게 생각하며, 하필이면 오늘따라 더 자주 열리는 것 같은 문을 신경 쓰지 않으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녀가 그렇게 생각한다고 해서 그녀의 몸이 그녀 마음대로 움직이는 것은 또 아니었다. 토우카는 무심결에 또다시 열리는 문을 흘긋 바라보았다가 문을 밀고 들어오는 시온과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시온은 토우카를 향해 씩 웃어 보였다.

나 기다렸어?”

아니거든.”

토우카는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리며 답했다. 도저히 시온을 마주 볼 자신이 없었다. 토우카는 그가 자신의 달아오른 얼굴을 눈치챌까 봐 걱정이었다. 토우카의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시온은 바 자리에 앉아 턱을 괴고 토우카를 바라보았다. 어쩜 저 눈빛은 단 한 순간도 변하지 않을까. 토우카는 시야 끝에 걸려 있는 시온을 바라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기다린 것 같은데.”

됐고. 주문이나 해.”

네에, . 그러면 맨날 마시던 거로 부탁할게.”

시온의 대답에 토우카는 커피를 내리기 위해 몸을 돌렸다. 여름의 햇살 같은 그는,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항상 토우카의 곁에 있었다.

#석가탄신일 돌발본

 

 

붓다의 생일을 축하하여 직장 동료들과 절에 갔더니 주지 스님은 구울에 죽은줄 알았던 직장 동료는 부활?!

 

Y A G I

 

 

우리는 지금부터 절에 간다.”

말을 꺼낸 것은 와슈 마츠리였다. 그는 평소처럼 손가락 끝으로 안경을 밀어 올렸다. 아리마 키쇼와 스즈야 쥬조는 멀뚱히 그를 바라볼 따름이었다. 갑자기 절에 간다는 것도, 하필이면 그 구성원이 이 멤버인 것도 의문이었다.

특이한 조합이네요-.”

제비뽑기다.”

언제부터 CCG에서 일을 그렇게 했나요.”

불만 있나?”

아뇨, 불만이라기보다는-.”

그냥 해본 소리인지, 쥬조는 금방 딴청을 피우며 시선을 하늘 멀리 두었다. 마츠리는 깊은숨을 내쉬고는 제 옆의 아리마를 바라보았다. 아리마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입을 꾹 다물고 서 있었다.

그럼 이만 출발하지.”

네에, 네에.”

쥬조는 말꼬리를 늘이면서도 먼저 발을 옮겼다. 생각해보면 쥬조는 절 같은 곳에 가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당연한 일인가. 쥬조는 속으로 절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당연하게도 잘 그려지지는 않았다. 그저 석탑 몇 개가 흐릿하게 떠오를 뿐이었다.

석가탄신일에 절에 간다. 그런 단순한 사고의 과정도 쥬조의 머릿속에는 이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에 어떤 감상적인 감각을 느낄 쥬조는 아니었다. 쥬조는 그저 옛날 생각을 아주 조금 했다. 단지 그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절에 가는 건 간만이군.”

계속 일 때문에 바빴으니까.”

어쩌면 쉬고 오라는 말일지도 몰라요-.”

그럼 휴가를 주면 될 텐데 왜 굳이 절에. 아리마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굳이 그 생각을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괜히 분위기를 깨트리고 싶지도 않았을뿐더러 말을 보태 이어지는 이 침묵을 깨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리마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버스는 점점 더 산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쥬조가 가볍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마츠리는 덜컹거리는 버스 안에서도 서류를 뒤적이고 있었다. 절에 가까워질수록 버스는 비어갔다. 결국에 남은 것은 그 셋뿐이었다.

세 사람은 말없이 절의 계단을 올랐다. 그새 봄이 지나가려는지 녹음이 온 천지에 짙게 깔려있었다. 주위를 유심히 둘러보던 쥬조가 산뜻한 목소리로 먼저 말을 꺼냈다.

공기는 좋네요.”

뭔가 평화로운 느낌이 들어.”

절은 마땅히 그래야 하는 법이지.”

그러나 절의 입구를 넘어서자마자 들리는 날카로운 목소리는 평화와는 꽤 거리가 있었다.

아리마키쇼!”

세 사람의 앞에 선 키가 큰 회색 머리의 남자는 빗자루를 들고 굳은 듯이 서 있었다. 아리마와 남자의 시선이 맞부딪혔다. 구울이다. 아리마의 말에 쥬조는 쿠인케를 들고 발을 한 발 앞으로 내세웠다.

그때 또 다른 남자가 태연한 발걸음으로 그들 사이를 막아섰다.

, 렌지. 절까지 와서 서로 싸우지 말자구. 그쪽의 수사관들도 마찬가지예요.”

그 말을 하며 남자는 빙긋 웃어 보였지만, 그의 눈빛은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절대 싸움을 말리는 사람의 눈빛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여차하면 이 자리의 모두를 제힘으로 눌러버리겠다는 눈빛이었다.

그러나 그런 눈빛에 기가 눌릴 마츠리는 아니었다. 마츠리는 일부러 낮게 깐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구울은 박멸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부처님은 모든 생명을 소중히 하라고 했어. 적어도 석가탄신일인 오늘 하루만큼은 서로 싸우지 않는 게 맞지 않을까?”

다소 톤이 높은 목소리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아리마는 잠시 쥬조와 시선을 맞춘 후 쿠인케를 집어 드는 대신 입술을 열었다.

너는 누구지?”

마스크 가게의 우타입니다아.”

그런데 왜 여기에 있나?”

일일 아르바이트야. , 손님들은 안쪽으로.”

싹싹하게 수사관 일행을 다루는 우타와는 달리 요모는 고개를 돌려 먼 곳을 바라보았다. 그들과 그다지 엮이고 싶지 않다는 표정이었고, 우타 역시 억지로 그런 요모를 잡아끌지는 않았다.

수사관 일행은 약간은 의심스럽다는 표정으로 긴장을 늦추지 않은 채 우타의 뒤를 따랐다. 쿠인케를 쥔 손에 아주 약간의 땀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우타는 그들을 절의 안쪽으로 데리고 갔다. 그곳에는 한쪽 자리 문이 달린, 나무로 지어진 자그마한 건물이 한 채 있었다. 우타는 그 문 앞에 섰다. 마치 이곳이 도착점이라는 듯이.

아리마는 다소 긴장된 표정으로 우타를 바라보았지만 우타의 표정은 어떠한 표정의 변화도 없었다. 들어가 계세요. 우타는 그 말을 남기고 떠났다. 잠시간의 차가운 정적이 세 사람을 감쌌다. 그 문을 연 것은 쥬조였다. 혹시 안에 뭐가 있을지 모르니 작전을 세우고 문을 열어봐야 한다는 마츠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일어난 행동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상상하지도 못했던 사람을 만났다.

마도……!”

그들은 이곳에 있으면 안 되는 얼굴을 보고 놀란 듯 굳었다. 마도 쿠레오는 별일도 아니라는 듯 침착하게 뜨거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차는 조금 썼다.

여기는 어떻게…….”

석가탄신일이지 않은가. 가끔은 이런 일도 일어나 줘야 하는 법이지.”

그 말을 하며 그는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하는 웃음이었다. 아리마는 그가 죽고 난 이후에도 제법 잘 살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 이 상태를 살고 있다라고 표현해도 될지는 잘 모르겠지만.

세 사람은 마도의 곁에 앉았다. 네 사람이 앉기에는 테이블이 커서 그들은 사소한 어색함을 느꼈다. 뭘 하고 계셨나요? 쥬조의 물음에 마도는 음, 하고 짧은소리를 뱉고는 입을 열었다.

아까 여기 구울이 있었는데.”

무슨 구울이 있었나?”

래빗이었네.”

래빗. 그 이름을 말하는 마도의 목소리는 침착했다.

죽여버릴까 했는데 석가탄신일이라 그냥 쫓아만 내고 말았네.”

마도는 제법 상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턱을 괴고 멀리 창밖을 바라보던 쥬조가 불현듯 고개를 돌려 마도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마도 씨는 돌아가시고 난 이후에도 쿠인케를 가지고 계시는군요.”

사람이 죽으면 특별한 것 하나쯤은 저승에 가져갈 수도 있고 그런 거네.”

마도 씨의 특별한 것은 역시 쿠인케였군요.”

그것 말고도 사실 챙겨간 특별한것은 많았지만.”

그 말을 하는 마도의 표정은 편안해 보였다. 그때 우타가 문을 열고 얼굴을 불쑥 내밀었다. 그의 시선이 방을 한 번 슥 훑고 지나갔다.

아야토 군은 어디 갔어?”

아야토?”

래빗 말이야.”

마도가 쫓아냈다는군.”

아리마의 말에 우타는 팔짱을 끼고 고개를 내저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 행동이 그렇게 탓하는 뉘앙스는 아니었다. 따지자면 그럴 줄 알았다에 가까웠다.

내가 참, 잘 지내라고 말했는데.”

죽이지 않은 것만으로도 나름 애쓴 거야.”

아야토 데리고 올 테니까 렌지는 손님 대접 좀 부탁해.”

바람처럼 지나간 우타의 뒤에는 요모 렌지가 서 있었다. 그의 표정은 아직도 단단하게 굳어 있었다.

그 표정을 보고 아리마는 입을 열지 않을 수 없었다.

……너는.”

오늘은 그 얘기는 하지 말지. 우타의 말대로, 석가탄신일이니까.”

잠시간의 침묵이 이어졌다. 아리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를, 모든 것을 용서하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인지 아리마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오늘 단 하루만이라면, 그런 일이 가능할지도 몰랐다.

 

아야토.”

그때 우타는 아야토를 찾아 절을 헤매고 있었다. 아예 가버렸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아야토는 예상보다 가까운 곳에 있었다. 아야토는 절 구석의 연못을 바라보고 있었다. 진녹색의 연못 위에는 연꽃 몇 송이가 섬세하게 꽃잎을 벌리고 있었다.

쫓겨났다며.”

, 나도 수사관이랑 같이 있고 싶지는 않았어.”

이제 돌아가자.”

우타의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아야토는 우타를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호수로 고개를 돌렸다.

피에로는 도대체 왜 이런 일을 꾸미는 거지?”

피에로의 일이 아니야. 내 일이야.”

아야토는 그 두 가지가 어떻게 다른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그저 우타가 그렇다니까 그렇구나, 하는 정도였다. 사실 아야토에겐 이 일을 꾸민 것이 피에로든 우타든 큰 상관은 없었다.

아야토는 연꽃을 보며 적지 않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주로 자신이 잃은 것에 대한 생각이었다.

우타는 아야토의 머리를 꾹 누르듯 쓰다듬었다. 아야토가 불만 어린 소리를 내었지만 우타는 그저 돌아가자, 하고 말할 뿐이었다.

아야토는 그 말에 순순히 따랐다. 돌아가자. 어쩐지 그 말이 아야토의 속에 박혔다. 그래도 돌아갈 곳이 있었다. 많은 것을 잃었지만, 아직은 그가 돌아가야 할 곳 정도는 남아 있었다.

 

, 뭐야 이 싸한 분위기. 렌지. 또 이상한 말 했지?”

아무 말도 안 했어.”

손님 대접인데 아무 말도 안 하면 어떻게 해. 차도 안 내놓고.”

우타가 반쯤은 농을 치듯이, 반쯤은 핀잔을 주듯이 요모에게 말을 건넸다. 요모는 가볍게 고개를 돌리는 것으로 그 말을 내쳤다. 아무튼, 고집은 세다니까. 우타는 숨을 내쉬었다.

애초에 왜 이러고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군.”

차를 준비하려는 우타의 뒤에 마츠리의 목소리가 꽂혔다. 우타는 웃는 낯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어떠한 섬뜩함 따위도 섞이지 않은, 그런 미소였다. 그렇다고 부처의 미소다 뭐다라고 표현하기는 좀 그랬지만.

석가탄신일이잖아. 오늘은 좀 쉬어. 죽었던 동료도 돌아왔는데.”

우타의 말에 마츠리는 흥, 소리만 낼뿐 대화를 더는 이어가지 않았다. 조용하고 조금은 평화로운 분위기가 흘러갔다.

누군가는 우타가 내온 차를 홀짝였고 누군가는 창밖의 녹음을 바라보고 있었다. 수사관과 구울의 만남이라니. 익숙하기도 하면서 낯선 감각이었다.

가끔은 이렇게 만나는 것도 나쁘지 않군.”

아리마는 자신의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지금껏 남의 생명을 빼앗아오기만 했다. 그러니 이렇게 아무 생명도 빼앗지 않고 지낼 수 있는 이런 날. 소중하다면 소중한 날이었다.

그리고 사실 그 자리의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소중한 날. 그런 날이 흘러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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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구울 전력 60분_ 경계선

 

 

심연

 

 

Y A G I

 

 

 

내가 보기에 와슈 키치무라, 그러니까 후루타 니무라라는 남자는 자신이 그려둔 경계선을 절대 넘지 않는 남자였다. 문제는 그 경계선이었다. 보통 사람은 이해하지 못할 곳에 그는 경계를 긋고 있었다.

지금 나는, 그 경계 바로 앞에 서 있었다.

무슨 볼일 있나요?”

후루타 니무라는 태연하게 국장실 의자를 빙글 돌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의 능글능글한 미소를 피하지 않았다. 내가 국장실을 찾은 이유는 딱히 없었다. 그저 그에게 얼굴을 한 번 더 익히고자 할 따름이었다. 나는 제법 공들여 세공한 이유를 늘어놓았다. 후루타 니무라는 턱을 괸 채 웃는 낯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내 이야기를 전부 듣기만 했다.

벌써 이런 만남만 삼 일째였다. 그것은 성과가 없는 일을 이틀이나 했다는 말과 같은 뜻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 정도로 물러날 사람은 아니었다. 어떻게든 후루타 니무라를 구워삶아서 내 편으로 만들어야만 했다.

모두를 위해서라면 내가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 모두를 위해서라면. 공적 따위가 아니라 모두를 위해서라면. 나는 사사키 하이세의 얼굴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는 과연 이런 일을 했을까? 의문이었다. 그는 생각보다 요령이 없는 사람이라서, 이런 일엔 맞지 않을지도 몰랐다.

그러면 결국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건 나 자신밖에 없었다. 누군가의 개가 되는 게 한두 번도 아니고, 뭐가 어렵겠는가.

그때 의자가 덜컹, 하고 뒤로 밀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아래로 향하고 있던 시선을 들어 다시 후루타를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웃는 낯이었다. 그의 웃음이란 참 묘했다. 후루타는 테이블을 짚고 몸을 내 쪽으로 기울였다. 나는 그의 접근을 딱히 막지는 않았다.

제가 그렇게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보였나요?”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습니다.”

계속 저를 흔들어서 어쩔 셈이죠? 저를 흔들어 봤자 나올 것은 딱히 없습니다만.”

역시 내가 사적으로 접근할 생각이란 걸 알고 있었나. 하지만 그 정도는 예상했던 일이었다. 별로 놀랍지도 않았다. 일등 수사관 시절 초연한 모습을 보이며 모두를 속였던 것을 생각하면, 그가 국장이 되고 난 이후의 구울 대처 방식을 보면 그가 이런 얄팍한 수 정도는 금방 파악할 것이란 건 뻔했다.

그러니까 이건 아예 패를 보여주고 치는 포커였다. 내 패의 끝의 끝까지 보여주어 상대를 안심하게 하는 포커.

제가 선을 넘으면, 위험한 건 당신이에요. 그건 아시나요?”

이 불리한 포커의 승률은 얼마나 높을까. 그것까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후루타를 상대로서 내 앞에 앉히는 것까지는 성공했다. 일단은 그러면 된 것이다. 일단은.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이미 위험한 일은 숱하게 겪었습니다.”

이런 류의 경험은 한 번도 없었을 것 같은데.”

후루타는 여전히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였다. 그가 손을 뻗어 내 턱을 가볍게 붙잡았다. 그가 무슨 행동을 할지 뻔히 보였다. 어째서 이런 도발을 하는지도. 아마도 내가 이런 행동을 싫어하리라고 생각하겠지. 후루타는 내 쪽으로 몸을 더 기울였다. 그와 나의 숨이 아주 좁은 틈 사이에서 섞였다.

불쾌하나요?”

내 뺨에 입을 맞추고 멀어지던 그가 속삭인 말이었다. 나는 그때, ‘걸려들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후루타는 나를 완전히 얕보고 있었다. 아마도 패를 빤히 보여준 것이 그 이유 중 하나일 터였다.

이런 것으로 불쾌감을 느끼고 일을 끝낼 것이었다면, 아예 시작도 하지 않았다.

저를 흔들려면 이 정도 각오는 하고 오셨어야지.”

나는 웃음을 흘리며 멀어지는 그의 뺨을 양손으로 붙잡고는 한발 앞으로 나섰다. 발끝이 국장실 테이블에 닿았다. 그의 입술은 생각보다 훨씬 더 부드러웠다. 나는 눈을 감았다. 그러는 게 정석이라고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후루타는 별 저항 없이 내 입술을 받아들였다. 그다지 길지도, 그렇다고 짧지도 않은 시간 동안 우리는 서로의 입술을 맞대고 있었다. 아까보다 아주 조금 더 흐트러진 숨이 서로의 뺨을 스쳤다. 나는 몸을 뒤로 물려 입술을 떼어내었다. , 하고 물기가 있는 것들이 붙었다 떨어지는 소리가 고요한 국장실을 울렸다.

각오는, 이 정도입니다.”

박력 넘치네.”

나쁘지 않아요, 하고 그의 작은 목소리가 내게 닿았다.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의 낮은 웃음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좋아요. 어울려 주죠. 아무리 그래도 우리에 군이 원하는 건 주지 못하겠지만요.”

원하는 건 딱히 없습니다.”

어라, 그러면 원하는 건 저 자체?”

생각하고 싶은 대로 생각하라지. 나는 딱히 그의 말에 답하지 않았다. 그도 그 사실에 별로 개의치 않는지 제법 산뜻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나는 그 미소를 바라보았다. 억지로 그를 따라 웃으려는 노력은 하지 않았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앞으로도 자주 들러줘요.”

위험을 두려워하고 뛰어드는 것은 실패의 지름길일 뿐이었다. 이왕 뛰어들 거라면 위험 따위를 겁내지 않고 끝까지 가버리는 게 나았다. 다만 내가 인지하지 못한 것은, 후루타 니무라라는 남자가 내 생각보다 훨씬 더 깊고 어두운 심연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안에서 질식해 버릴지도 몰랐다.

죽어도 좋은 심연이란 있는가. 죽을 줄 알면서 빠져드는 심연이란 있는가.

과연 후루타 니무라는 나를 얼마나 잡아먹을 수 있을까.

…….

하지만 결국 먹히는 것은 내가 아니라 그일 것이다. 나는 후루타 니무라라는 이 남자를 잡아 먹어버릴 생각이었다. 그러고 나면 내게 남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그게 무엇이든 상관없다는 생각을 했다.

 

 

#타투이스트 우타 X 인어 10대 요모

 

 

좁은 욕조의 안에서

 

Y A G I

 

 

식용 목적으로 인어를 포획하는 것은 불법이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수의 인어들이 포획되고 버려지고 있다.

인어는 어릴수록 맛과 효능이 좋다는 말에,

포획되는 인어의 연령은 점점 낮아지고 있다.

 

 

*

 

 

요모 렌지는 좁은 욕조 안에서 눈을 떴다. 그는 눈을 뜨자마자 주위를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얀 타일로 덮인 욕실에 수술 도구 같은 것은 없었다. 그저 몸을 씻기 위한 물건들이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을 뿐이었다.

요모는 욕조의 가장자리를 짚었다. 자신이 왜 여기까지 흘러들어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어쩌면 중요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닐지도 몰랐다. 요모는 손을 뻗어 제 허리를 더듬어 보았다. 아직은 어설프게 상처가 아물어 있었고 당연하게도 그곳에 지느러미는 더 이상 없었다.

요모는 입을 꾹 다물고 자신의 상처들을 바라보았다. 복잡한 심경이었다. 기억의 일부가 잘린 것도 그에게 불쾌감을 주었다. 인간에게 포획당한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이후의 기억은 누군가 가위로 엉망으로 잘라놓은 듯 조각조각 흩어져 있었다. 지금 요모가 알 수 있는 사실은 자신의 지느러미가 아마 식용으로 팔리기 위해 잘렸고, 그리고 버려졌고, 누군가에게 주워져 이 욕조에 들어 있다는 사실뿐이었다. 요모는 욕조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는 사실이 어쩐지 분했다.

일어났어?”

욕실의 문이 열리고 낯선 남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요모는 처음 그 남자를 본 순간, 잘못 걸렸다고 생각했다. 그의 양팔을, 그리고 아마도 상체의 대부분을 뒤덮고 있을 문신 때문이었다. 요모는 잔뜩 긴장한 채 욕조를 붙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물속으로 들어가고 싶었는데 욕조의 물은 그러기엔 너무 얕았다. 남자는 욕조 앞에 쭈그려 앉은 채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요모에게 말을 걸었다.

이름이 뭐야?”

…….”

요모는 답하지 않았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요모 역시 수상한 남자에게 제 이름을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우타야.”

우타라는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손을 뻗어 요모의 젖은 머리를 쓰다듬었다. 요모는 몸을 가볍게 떨며 그의 손길을 피했다.

머리 만지지 마.”

, 싫어?”

.”

그럼 안 할게.”

요모는 우타를 어떻게 파악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요모가 여태껏 만나보지 못한 유형의 인간이었다. 요모가 만난 인간이라 봤자 그를 포획하려는 인간들이 대부분이어서 그의 경험으로 인간을 분류한다는 게 별 의미 없긴 했지만.

이름은 말해주라.”

왜 나를 구해준 거야?”

요모는 이름을 말하는 대신 날이 선 목소리로 우타에게 질문을 던졌다. 우타는 별일도 아니라는 목소리로 태연하게 말을 꺼냈다.

불쌍하잖아. 하수구에서 죽어가고 있었는데.”

동정 같은 건 필요 없었는데.”

하지만 그대로 죽었을지도 모르는걸.”

어차피 나는 죽은 거나 다름없어.”

바다로 가고 싶어?”

우타의 말에 요모는 고개를 저었다.

이제 그러지도 못해.”

지느러미가 없으니, 제대로 헤엄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어쩐지 상처가 욱신거리며 쑤셔오는 느낌이 들었다. 요모는 애써 그 아픔을 무시하고 말을 보탰다.

그리고 나는 민물 인어야.”

.”

바다 인어였으면 이미 죽었겠지. 이거, 민물이잖아.”

거기까진 생각을 못 했는데. 다행이네.”

우타가 소리 없이 웃었다. 요모는 그의 미소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우타는 요모의 머리를 만지는 대신 요모가 짚고 있는 욕조의 가장자리에 손을 얹었다. 우타의 손과 요모의 손은 서로 닿을 듯 아주 가까이 붙어 있었다.

그래서, 이름은?”

엄청 집요하네.”

궁금하잖아.”

요모는 가만히 우타를 바라보았다. 그의 붉은 눈동자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알기가 어려웠다. 요모는 한숨을 쉬듯 제 이름을 말했다. 요모가 그에 대해 알 수 있는 건 쉽게 포기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 정도였다.

렌지. 요모 렌지.”

잘 부탁해, 렌지.”

그 말을 하며 우타는 손을 내밀어 요모에게 악수를 청했다. 그러나 요모는 그저 고개를 돌릴 뿐이었다. 인간하고 잘 지내고 싶지 않았다. 요모에게 인간이란 언제나 공포와 분노의 대상이었다. 착한 사람이나 나쁜 사람으로 그들을 분류하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었다. 요모에게, 인어에게 낯선 인간이란 모두 경계해야 하는 대상이었다.

우타는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선선히 손을 거두곤 욕실을 떠났다. 요모는 다시 고개를 돌려 우타가 닫고 떠난 욕실 문을 바라보았다.

 

욕실의 작은 창문으로 해가 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요모는 그제야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처럼 멍하니 떨어지고 있는 노을을 바라보았다. 살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지, 지옥이라고 생각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때 우타가 다시 욕실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요모는 무심코 그쪽을 바라보았다. 요모와 눈이 마주치자 우타가 빙긋 웃으며 말을 꺼냈다.

같이 씻자.”

?”

욕조는 네가 쓰고 있잖아.”

요모는 할 말이 없었다. 우타는 옷을 벗어 욕실 문밖에 두곤 욕조 안으로 들어왔다. 요모는 제 꼬리가 우타의 몸에 닿지 않게 하려고 몸을 비틀었지만 좁은 욕조 안에서 서로의 몸이 닿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요모는 우타의 몸에 있는 수많은 문신을 바라보았다. 그의 몸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는 문신이 어쩐지 제 몸의 흉터와 비교되는 것처럼 보여 요모는 몸을 움츠렸다. 우타는 그런 요모의 비늘을 쓰다듬었다. 이번에 요모는 그의 손길을 피하지 않았다. 대신에 우타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아프지 않아?”

뭐가?”

문신.”

요모의 말에 우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 하는 소리를 냈다. 우타는 오른손 손끝으로 제 왼쪽 팔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물이 찰랑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별로. , 렌지도 하고 싶어?”

아니.”

공짜로 해줄게. , 타투이스트거든.”

요모는 고개를 끄덕이지도 가로젓지도 않았다. 그는 대신 다른 질문을 던졌다.

왜 이렇게까지 해주는 거야?”

인어는 태어나서 처음 봤어.”

우타는 슬쩍 미소를 지었다. 요모는 눈을 깜빡여 우타를 바라보았다. 요모는 우타를, 지금까지 본 사람 중에서 가장 특이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가장 특이하지만, 가장 위협적이지 않은 사람.

그리고 나는 궁금한 건 못 참는 성격이야.”

우타는 요모를 바라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른 사람의 입에서 듣는다면 다소 위협적이게 들렸을 그 말이, 우타의 입에서 나오니 느낌이 달랐다. 어쩌면 요모가 우타에게 자신의 생명을 모두 맡기고 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우타의 말에 요모는 눈을 감았다. 요모는 여전히 우타의 가지런한 비늘을 쓰다듬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렌지를 애완동물로 삼을 생각은 아니야.”

알고 있어.”

알고 있어? 기특하네.”

우타가 작게 소리를 내며 웃었다. 요모는 몸을 틀어 우타에게로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우타의 시선이 요모에게 닿았다. 요모는 우타의 손등에 새겨진 문신을 매만졌다.

진짜 안 아파?”

익숙해지면 견딜만해.”

, 아픈 건 익숙해.”

그러면 괜찮을 거야.”

요모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해줄게. 욕실의 습기 때문인지 우타의 목소리가 조금 젖어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

 

아파?”

조금.”

참을 수 있겠어?”

이 정도는 괜찮아.”

더 한 아픔도 겪어봤으니까. 요모는 그 말은 삼켰다. 굳이 이 상황에 필요한 말 같지는 않았다.

흉터가 많네.”

우타는 지나가듯 말을 했다. 요모는 그에 답하지 않았다. 우타도 딱히 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닐 터였다.

다 예쁘게 만들어줄게, .”

요모는 우타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이 그 말이 진심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우타는 요모의 어깨에 찬찬히 무늬를 새겨넣고 있었다. 그 작업은 요모의 생각보다 훨씬 빨리 끝났다. 요모는 고개를 돌려 제 어깨에 새겨진, 별자리를 본따서 그려진 검은 문신을 바라보았다. 우타는 그것이 자신의 별자리라고 말했다.

요모는 왜 제 별자리를 자신의 몸에 새기는가에 의문을 가지면서도 그것이 퍽 싫지는 않았다. 요모는 손끝으로 문신을 매만졌다. 흉터보다는 훨씬 더 나은 것 같았다.

무슨 자리야?”

사수자리.”

사수면, 뭔갈 사냥하는 사람인 거야?”

그럼 셈이지.”

안 어울려, 하고 요모가 말했다. 그 말에 우타는 즐겁다는 듯이 웃었다.

요모는 너무 순진한 구석이 있어. 아직 어려서 그런가.”

나 말고 다른 인어를 잡아본 적 있어?”

아니.”

우타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요모가 무어라 더 말을 보태기 이전에 하지만, 하고 말을 꺼냈다. 요모는 그의 입술이 움직이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하지만, 요모를 잡았잖아.”

요모는 어쩐지 그 말이 그다지 싫지 않았다.

 

.”

이게 뭐야?”

그날도 우타는 요모와 함께 씻기 위해 욕실로 들어왔다. 우타는 요모의 손바닥에 얹힌 진주 몇 알을 잠시 바라봤다가 요모에게로 눈을 돌렸다.

선물. , 타투 해줬으니까.”

요모의 눈 밑이 발갛게 부어있었다. 우타는 직감적으로 그 진주알들이 요모가 자기 스스로를 아프게 해서 억지로 뽑아낸 눈물로 만든 진주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우타는 요모의 몸을 훑어보았다. 가지런하던 비늘 몇 개가 뒤로 꺾여있었다. 그의 몸에 난 것과는 달리 금방 나을 상처이긴 했지만, 그래도 우타는 고개를 저었다.

이런 건 필요 없어, 렌지. 난 렌지가 울지 않는 게 더 좋아.”

우타의 말에 요모는 눈을 깜빡여 우타를 올려다보았다. 우타는 요모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요모는 이제 우타의 손길을 피하지 않았다.

렌지가 다 자라면 꼭 렌지의 고향으로 데려다줄게.”

그럴 필요 없어. 이제 여기가 내 고향이야.”

그래?”

요모는 무언가 결심했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우타는 그런 요모의 표정이 퍽 귀여워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요모는 그런 우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요모는 우타에게로 손을 뻗었다. 그의 손바닥에 올려져 있었던 진주 알들이 욕실 바닥으로 떨어져 요란한 소리가 났다.

진주가 싫다면, 이런 건 어때?”

요모는 우타가 더 무어라 말하기 전에 그의 옷깃을 끌어당겨 입을 맞췄다. 욕조에 담긴 물이 찰랑거리는 소리가 들렸다가 곧 잠잠해졌다. 대신 두 사람의 축축한 호흡이 섞이는 소리가 욕실에서 희미하게 울리고 있었다.

이런 건 어디서 배운 거야?”

나도 알 건 다 아는 나이야.”

의외인걸, 렌지.”

우타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인어의 키스는 어땠어?”

짰어.”

, 민물 인어라니까.”

. 그랬지.”

그 말을 하며 우타는 몸을 숙여 한 번 더 요모에게 입을 맞췄다. 민물 인어와의 키스는 의외로 비리지 않고 달콤한 맛이었다.

 

 

따뜻한 것

 

Y A G I

For.  유로 님

 

 

이것은 어쩌면 예정된 결말이었을지도 몰랐다. 이즈미는 숨을 내쉬었다. 힘든 일이었지만 이것은 그녀의 손으로 끝내야 하는 일이었다. 이것을 다른 누군가에게 맡기면 그녀는 평생 그 일을 후회하며 살아갈 것이 뻔했다.

우리에 쿠키. 그는 쿠인쿠스 실험을 받았고, 언젠가 폭주했다가 진정되었으나, 지금 이 순간 다시 한번 더 폭주했고, 결국엔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았다.

이즈미는 그 사실에만 집중했다. ‘결국엔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렇다는 것은 그녀의 눈앞에 있는 남자가 자신이 알던 우리에 쿠키가 아닌, 하나의 구울이라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그녀에게 구울은 구축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그것에 다른 생각이 끼어든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번에도 그래야만 했다.

하지만.

이즈미는 치아 자국이 남을 정도로 입술을 꽉 깨물었다. 사람의 마음이 생각처럼 움직이면 참 좋을 텐데. 이즈미는 두 발쯤 뒤로 물러서며 생각했다. 우리에의 날카로운 시선이 이즈미에게 박혔다. 이즈미는 그 눈빛을 피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것이 이즈미가 볼 수 있는 우리에의 마지막 시선일지도 몰랐다.

이즈미는 천천히 카구네를 꺼냈다. 비록 그의 시선은 이즈미가 알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지만 이즈미는 그마저도 사랑할 수 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우리에였으니까. 그러니까, 다른 구울과는 달랐으니까. 사랑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으니까.

이즈미는 우리에를 최대한 아픔 없이 보내주고 싶었다. 돌아올 수 없다면, 그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이즈미는 언젠가 이런 식으로 우리에의 품에 안겼던 적을 떠올렸다.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따뜻한 포옹이었다.

그렇지. 마치 지금 나를 뒤덮는 핏줄기처럼.

이즈미의 자조적인 생각이었다. 이즈미의 일격은 단번에 우리에의 목덜미를 꿰뚫었다. 어쩌면 우리에는 피할 수 있었음에도 피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니, 아나. 그런 일은 없어야만 했다. 우리에가 원래대로 돌아올 수 있다는 희망 같은 건 없어야만 했다. 이즈미는 옷 소매로 얼굴을 닦았다. 소매가 금방 축축해졌다.

구울, 우리에 쿠키는 다른 사람들의 생각보다 쉽게 이즈미의 손에 구축되었다.

 

그렇게 하나의 구울이 사라지고, 이즈미의 세상이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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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단메이커가 잘못해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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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있는 곳

 

Y A G I

For. 푸링 님

 

 

돌아가지 못할 곳을 그리워하는 만큼 미련한 짓이 또 있을까.

카네키 켄. 나는 나를 그리워했다. 내가 잃어버린 것, 또는 더는 가지지 못할 것을 그리워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그때의 나를 그리워했다. 딱히 예전의 그 평화로운 일상으로 돌아가길 원하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의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고, 그럼으로써 어떠한 보람 따위를 느끼곤 했으니까. 나는 지금의 삶도 그럭저럭 만족해하고 있었다.

그냥 가끔 꿈에 그날의 카네키가 나올 뿐이었다. 내가 가진 미련은 단지 그뿐이었다.

우리는 항상 끝도 없는 하얀 공간에서 마주했다. 너와 나는 당연히 닮아있으면서도 달랐다. 너는 예의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고 한동안 나는 너의 그런 미소가 조금은 당황스럽기도 했다. 너는 너 자신에게 미소를 지어줄 수 있는 사람이었나. 나는 너를 따라 입꼬리를 밀어 올려 보았지만 네 것과는 아주 다른 씁쓸한 미소만이 지어질 뿐이었다.

내 표정을 읽은 너는 고개를 한쪽으로 아주 약간 기울이며 조금은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쪽으로 돌아오고 싶어?”

아니.”

그러면, ?”

왜라니?”

나는 네 질문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어 네게 되물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너의 생각은 곧 나의 생각일 텐데. 어쩌면 나는 너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나왔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왜 자꾸 내가 네 꿈에 나타나는 건데?”

그러게. 왜일까.”

무거운 정적이 우리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너는 후우, 하고 숨을 길게 내쉬곤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런 너를 그저 가만히 바라보았다. 너의 의중을 확실히 파악하기 어려웠다. 너는 항상 그랬다. 속마음을 숨기고 사는 게 당연한 사람이었다.

물론 이런 말을 하는 나도 그런 사람이지만. 그러나 어쩐지 내 마음은 네게 환히 읽히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나는 그것이 그렇게 크게 불쾌하지는 않았다. 누구 하나쯤은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도 없지 않아 있었으니까.

카네키.”

너는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너의 단정한 눈매와 눈을 마주쳤다. 나는 내 속마음을 알아채는 것이 나 자신이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추악한 면모를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알게 된다면 나는 얼마나 미움받을까. 똑같은 감정을 공유하고 있는 너만이 받아들일 수 있는 모습이었다.

우린 어차피 하나가 될 거야.”

어떻게?”

어떻게든.”

그 말을 하며 너는 천천히 내게로 다가왔다. 나는 너를 피하지 않고 마주했다. 피할 이유도 딱히 없었다. 코앞까지 다가온 너는 양손으로 부드럽게 내 뺨을 붙잡았다. 네 손에서 피어난 온기가 내게로 옮겨붙었다.

예를 들면, 이런 것도 있을 수 있지.”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에게 입을 맞췄다. 자신의 입술이란 것은 익숙하면서도 낯선 감각이었다. 그렇기에 더욱 자극적인 그런 감각이었다. 너는 손을 뻗어 내 목을 껴안았다. 나는 너의 허리를 안았다. 우리는 서로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애썼다. 그렇게 하면 정말로 하나가 될 수 있다는 듯이.

하지만 결국 얽히던 혀는 달큰한 호흡을 뱉으며 서로에게서 떨어졌고 우리는 한동안 가볍게 숨을 몰아쉬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네가 그렇게 적극적인 줄은 몰랐는데.”

나도 네가 이렇게 키스를 잘 하는 줄은 몰랐네.”

꿈이니까.”

, 꿈이니까 가능한 거지.”

너는 그렇게 말하곤 그대로 자리에 무릎을 세우고 앉았다. 나는 너를 따라 네 앞에 앉았다. 우리는 아주 오랫동안 서로를 쳐다보기만 했다. 그 침묵을 깬 것은 너였다.

있잖아, 카네키.”

너는 나긋하게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응, 하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카네키는 나를 좋아해?”

. 좋아해.”

카네키는 내가 그리워?”

조금. 아주 조금. 하지만 돌아가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포기가 빠르구나, 카네키는.”

네가 그렇다시피, 나도 그래.”

내 대답에 너는 응, 하고 답했다. 너는 무릎을 짚고 일어서선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면 이제 꿈에서 깨어날 시간이야, 카네키. 오늘도 바쁘겠네.”

너는…….”

나는 여기에서 기다릴게. 카네키 네가 또다시 내가 그리워지면 그때 찾아올 수 있도록.”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꿈속에서 눈을 감았다가 뜨면 익숙한 천장이 나를 마주했다. 익숙하지 않은 게 있다면 너와 맞댄 입술의 감각뿐이었다. 나는 그 꿈을 아주 잠깐 복기했다. 언제까지나 기다리겠다던 너의 말을 떠올렸다.

너는 내가 돌아가지 못할 곳에 서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도달할 수 없는 곳에 있지는 않았다. 언제든, 너는 그곳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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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타요모 에반게리온 AU  #10대 우타요모

 

영혼의 자리[각주:1]

 

Y A G I

 

싱크로율이 낮아도 에바에 탈 수 있다. 우타가 에바에 타는 이유는 그 하나 때문이었다. 탈 수 있다. 그다지 타고 싶어서 타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에바에 타라는 지시를 거절할 이유도 딱히 없었다.

사도와의 싸움에서 죽는 것은 두렵지 않았다. 그렇다면 어차피 다 같이 죽음을 맞이하게 될 테니 별로 억울하지도 않았다. 그저 아주 약간의 미련이 남을 뿐이다. 우타를 에바에 타게 하고 에바에서 내리게 하는 미련이었다.

 

처음으로 하얀 천장을 보았다.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것이 하얀 천장이라니, 낯설었다. 환풍기가 돌아가는 소리가 미미하게 들렸다. 우타는 고개를 돌렸다. 요모가 창밖을 보고 앉아있었다. 우타가 몸을 움직이는 탓에 이불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을 텐데도 요모는 우타를 바라보지 않았다. 일부러 그러는 게 분명했다.

그런 요모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사도는?”

겨우 골라낸 말이 그것밖에 되지 않았다. 우타는 노랗게 염색한 머리를 손빗으로 쓸어내렸다. 요모는 창문에 비친 우타를 보며 말했다.

다른 칠드런들이 어떻게 했어.”

다행이다.”

그렇지. 다른 칠드런들이 어떻게든 했으니까 내가 이렇게 누워 있는 거겠지. 다시 정적이었다. 우타는 환풍기의 소리가 자꾸 신경 쓰였다. 차라리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완벽한 정적이면 더 좋았을 텐데. 우타는 시선을 아래로 깔아 제가 꼭 붙잡고 있는 침구를 바라보았다. 그것도 완벽한 백색이었다.

렌지는 나 따라서 여기 온 거, 후회하진 않아?”

별로.”

그제야 요모는 몸을 돌려 우타를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은 단단히 굳어있었다. 완전 화났군. 우타는 요모의 그다지 변화도 없는 표정을 읽어내는데 노련했다. 그저 오랫동안 가까이 알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너는 어떤데?”

나도 별로.”

요모의 말에 우타는 천장을 바라보았다. 별로. 우타는 제가 했던 말을 되뇌었다. 말이 공허하게 흩어져 사라졌다. 후회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단지 그뿐이었다. 딱히 갈 곳도 없어서 처음엔 칠드런으로서, 그리고 지금은 연구원으로서 이곳에 남아있는 것뿐이었다.

렌지의 별로는 어떤 별로일까. 우타는 고개를 돌려 요모의 얼굴을 바로 바라보며 생각했다. 요모를 네르프로 끌어들인 것이 다름 아닌 자신이기 때문이었다. 그와 자신의 별로가 같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우타는 그것을 굳이 요모에게 따져 묻지 않았다. 요모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등받이도 없는 간병인용 의자가 바닥에 끌리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두 사람의 첫 섹스는 그날 밤 이뤄졌다. 우타가 몰래 병실을 빠져나가 요모의 방에 들어간 것이 시작이었다. 요모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환자복을 입은 채 방문을 열고 들어오는 우타를 바라보았다. 요모의 방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사람이 살고 있다는 감각조차 없는 방이었다.

그런 방에서 우타와 요모는 처음으로 관계를 가졌다. 한없이 나긋했으나 분명 열기를 띤 섹스였다. 우타가 처음으로 요모에게 담배를 배운 것도 그때였다. 환자인데 담배를 피워도 괜찮은 거야? 요모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우타에게 담배를 권했다. 우타는 그전까지는 요모가 담배를 피운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

두 사람은 나란히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요모는 손끝으로 우타의 상처를 매만지고 그곳에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아프지 않았어?”

별로.”

엄청 아파 보였어. 에바에서 막 내릴 때.”

그때는 좀 아팠을지도. 사실은 잘 기억도 안 나.”

그 말을 하며 우타는 작게 웃었다. 요모의 입술이 닿을 때마다 간지러움이 찌릿하게 몸을 타고 올라왔지만 우타는 요모를 밀어내지 않았다.

우타.”

.”

너는 앞으로도 계속 네르프에 남아있을 거야?”

.”

그렇다면 나도 계속 있을래.”

네르프를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요모의 손가락에 걸린 담배에서 무용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우타는 땀에 젖은 요모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그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그건 그렇지.”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이번에는 환풍기 소리 따위도 들리지 않는 완벽한 침묵이었다. 요모는 몸을 돌려 다시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었다. 일인용 침대의 이불이 그의 다리에 말리며 우타의 맨몸이 여름밤의 열기에 닿았다.

이 세계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고작 이거밖에 없는 걸까. 에바에 타고, 아파하고, 걱정하고.”

우타의 말에 요모는 우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우타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우타는 그가 다가오는 것을 피하지 않았다. 요모는 우타의 입술에 제 입술을 맞댔다. 연기맛이 났다. 우타의 손에서 타오르는 담배와 비슷한 감각이었다.

사랑도 할 수 있어.”

렌지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다니, 의외인데.”

진지하게 하는 말이야.”

알아. 알고 있어.”

우타는 손을 뻗어 물이 담긴 종이컵에 담뱃재를 털다가 아예 담배를 꺼버렸다. 우타는 다시 요모의 위로 올라탔다. 요모는 거부하지 않고 담배를 껐다.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다시 입을 맞췄다.

  1. 신세기 에반게리온 TVA 14화의 소제목 ‘제레, 영혼의 자리’에서 인용.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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