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사병

 

Y A G I

 

 

죽음은 어째서 사랑과 가까이 붙어있나. 한손으로 턱을 괸 채 먼 곳을 바라보았다. 무겁게 내려 앉아 있었던 밤의 기운이 새파란 새벽 공기에 밀려 사라지고 있을 때였다. 밤을 샜지만 머리는 맑았다.

아마도 그것은 우리에, 너를 생각했기 때문이리라.

뜨거운 물로 몸을 씻었다. 물줄기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대규모 전투가 예정되어 있었다. 아마도 많은 사람이 죽을 것이고, 그 중에 나 자신도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나는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다. 머릿속을 채우는 것은 죽음에 대한 공포 따위가 아니었다. 우리에 쿠키. 그 한 인물만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러며 나는 다시 한 번 더, 어째서 죽음과 사랑은, 특히 욕정은 함께 오는 것인지를 고민했다. 인간이란 죽기 전에도 누군가를 사랑하게 만들어진 생물인 걸까, 아니면 그 대상이 우리에이기 때문에 이러는 걸까.

샤워가 끝날 때까지 나는 그 답을 찾지 못했다. 평소처럼 멀끔하게 정장을 차려 입고 머리를 정리했다. 그러나 거울에 비치는 것은 나 자신의 모습이 아닌, 우리에 네가 고전하는 모습이었다.

너의 상처는 참으로 아름답다. 이것은 비단 네 육체적인 상처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었다. 네가 가지고 있는, 아마도 너는 필사적으로 부정할 어떠한 의식들까지도 아름다웠다. 평소라면 내가 거들떠보지도 않을 생각들이었지만 그것이 네게 존재하는 순간 모든 것이 바뀌었다. 너는 상처마저 아름다웠다. 나는 너의 비열한 상처까지 사랑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런 감정이 사랑이 맞기는 하겠지. 나는 가끔 그것이 불안했다. 사랑 따위의 감정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 본적은 없었다. 그런 감정은 업무에 불필요한 것이라 생각하고 완전히 배재해 두었다. 그런 내 삶에 네가 들어왔다. 이런 것이 사랑이라면, 나는 우리에 너를 열렬히 사랑하고 있었다.

발걸음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다만 그 의식이 향하고 있는 것은 전장이 아닌 다른 곳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전장은 전장이지만, 그곳의 전체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싸우고 있을 우리에를 보고 있었다. 너의 손끝과 그 끝에서 시뻘건 피를 흘리며 구축될 구울들을 보고 있었다. 아름다움과 아름다움이 더해진 모습. 그 이상의 아름다움이 이 세계에 존재할 수 있을까.

마음을 가다듬어야 했다. 어떤 이유에서든 전투 때는 모든 것을 잠시 내려놓고 심장을 차게 유지해야만 했다.

아마 우리에 네가 이번 전투에서 죽는다면 나는 몹시 슬플 터였다. 그러나 동시에 너의 죽음에 도취될 것이었다. 아름다운 시절의 너를 그리워하며 나는 또다시 너를 욕정할 것이다.

우리에 네가 만약 죽지 않는다면, 나는.

나는 어쩌면 좋을까. 이 욕정은 어디로 향하게 될까. 희미한 두려움까지 느껴졌다. 내가 파악할 수 없는 미래는 항상 두려움과 함께 있었다. 그렇다. 너는 아름다운 두려움이었다.

너 자체를 파악하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너는 의외로 꿰뚫어 보기 쉬운 타입의 인간이었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너 자체라기보다는 네가 내게 불러온 감정들이었다. 그래, 어쩌면 나는 나 자신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고 그를 두려워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러면 또 어떠랴. 이미 상황은 어떻게 할 수 없는 곳까지 도달했는데.

작전 개시.

내 입에서 떨어지는 목소리가 내 것이 아닌 것만 같았다. 나는 마지막으로 너를 생각했다. 살아있는 너도, 죽은 너도 아닌 내 곁에서 내 욕망을 받아주는 너를 생각했다. 전투에 앞서 너무 부정한 생각이었나. 나는 길게 숨을 내뱉으며 생각을 멈췄다. 다만 마지막으로 눈을 감았다 떴을 때, 아름다운 너의 모습을 한 번 더 눈꺼풀 뒤에 그려보았다.

아무래도 아직 너를 완전히 버리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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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모 생일 축전으로 쓰려던 글

 

 

이제는.

 

Y A G I

 

 

 

  1

 

 

너는 태어난 걸 후회하지 않아?”

요모의 말에 우타는 창밖을 내다보고 있던 시선을 요모에게 돌렸다. 그런 말을 해놓고 요모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우타는 반쯤 피우던 담배를 비벼 끄곤 요모를 바라보고 누웠다. 요모는 눈을 내리깔곤 나른한 숨을 내뱉고 있었다.

왜 그런 질문을 하는 건데?”

너라면 후회하지 않을 것 같아서.”

후회라. 우타는 흐린 시선을 천장의 어딘가에 두었다. 요모는 참을성 있게 우타의 다음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마도 염색한 것이 분명한, 우타의 노란빛 머리카락이 그의 어깨 위에서 한 번 흔들렸다가 가라앉았다.

별로. 후회라거나, 그런 거 생각해 본 적 없어.”

그래.”

질문에 비해 대답은 꽤 담백했다. 우타는 호기심이 담뿍 묻은 미소를 얼굴에 띄운 채 다시 요모를 바라보았다. 요모는 여전히 무뚝뚝한 표정으로 우타를 대했지만 으레 있는 일이기에 우타도 그에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다.

도리어 우타는 그 굳을 얼굴을 좋아하는 편이었다. 우타를 제외한 사람들이 볼 수 없는 표정이란 게 존재하는 얼굴이었으니까. 우타는 손을 뻗어 요모의 벗은 어깨를 손바닥으로 쓸어내렸다. 요모는 그 손의 온도에 살짝 몸을 움츠리면서도 그의 손을 받아내었다.

우타는 사뭇 다정한 목소리로 요모에게 말을 건넸다.

렌지는 후회해?”

모르겠어.”

즉답이었다. 확실히 요모의 속에서 많이 숙성된 질문인 모양이었다. 태어난 걸 후회하지 않느냐는 질문. 요모는 그 질문을 제 속에서 얼마나 굴린 후에 물어본 것일까.

어떻든, 렌지 생일 때 이런 얘기를 하는 건 좀 아닌 것 같은데.”

생일이니까 이런 얘기를 하는 거야.”

괜히 생각하게 되잖아. 우타는 요모의 말에 음, 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 못 하게 해줄까?”

뭐야.”

생일 선물.”

우타는 그렇게 말하며 요모의 위에 올라탔다. 그의 따뜻한 입술이 요모의 몸 곳곳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요모는 그런 우타를 밀어내지 않았다. 확실히, 아무 생각 안 들게 만들어 주긴 하지. 우타의 손끝이 제 허리를 쓸어내리는 것을 느끼며 요모는 우타의 목을 껴안았다.

생일이라고 해서 평소와 크게 다를 건 없었다. 기분의 차이, 같은 애매한 말도 없었다. 그저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가는 느낌, 그리고 그것을 채우는 낯설지 않은 욕망. 그런 것들만이 요모를 채우고 있었다. 그리고 우타의 마른 어깨를 껴안고 모든 것을 쏟아냈을 때, 요모의 머릿속엔 다시 한 번 더 그 질문이 떠올랐다. 너는, 과연 태어난 것을 후회하지 않는가.

 

 

2

 

예전에 그런 말 했던 거 기억나?”

지금의 우타는 담배 같은 것은 피우지 않고 있었다. 어린 시절의 짧은 일탈이라고 했던가. 대신에 그는 침대에 엎드려 천장을 바라보고 새된 숨을 내뱉고 있는 요모를 바라보았다. 우타의 질문에 요모는 눈동자만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우타는 싱긋 웃어보였다. 뭐가 그렇게 마냥 좋은 건지. 다음부턴 포지션을 바꾸자고 해야겠어. 요모는 우타에게 몇 번이나 물려 약간은 쓰라린 어깨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어떤 말?”

태어난 걸 후회하지 않느냐는 질문.”

요모는 아, 하고 짧은 탄성을 뱉으며 과거의 일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지. 요모의 기억이 맞다면 그때도 자신의 생일이었을 것이었다. 우타는 손을 뻗어 요모의 손끝과 자신의 손끝을 맞대었다.

지금은 어때?”

글쎄…….”

여전히 잘 모르겠다는 뜻일까. 우타는 요모에게로 몸을 가까이 붙이며 말했다.

내가 있는데도 후회가 돼?”

무슨 상관이야, 그건.”

뻣뻣하다니까, 렌지는.”

우타의 목소리는 나긋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그다지 불만스럽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우타가 있으면, 된 건가. 요모는 포지션을 바꾸지는 말도 잊고 제 위로 타고올라오는 우타를 보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요모는 자연스레 제게 입을 맞추려 드는 우타의 얼굴을 밀어내었다. 우타는 한쪽 눈썹을 밀어올리며 의문스러움을 표했다. 요모의 표정은 어딘가 굳어있었다. 싫은건가, 하고 우타가 생각할 때, 요모의 입술이 천천히 떨어지며 신중하나 아주 무겁지는 않은 말을 뱉어냈다.

후회하지 않아.”

그럼 됐어.”

요모의 말에 우타가 픽 웃었다. 곧이어 우타의 입술이 요모의 입술에 닿았다. 두 사람은 서로의 목덜미를 껴안으며, 후회하지 않는다는 요모의 말을 되뇌고 있었다.정말로 그럼 됐다. 렌지 네가 더는 살아남은 걸 후회하지 않을 수 있다면, 그걸로 우타는 충분했다.

 

THE SECOND KISS

 

Y A G I

 

 

우타는 처음 그를 봤을 때 그가 참 딱하다고 생각했다.

그 소년은 제 몸보다 훨씬 더 커다란 우리에 갇혀 쓰러지듯 엎드려 있었다. 그는 철로 된 바닥을 몇 번이나 손톱으로 긁었는지, 손끝이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바보같이. 그래도 빠져나갈 수 없다는 사실은 자기가 제일 잘 알고 있을 텐데 꼭 힘을 뺀단 말이지. 우타는 입으로 쯧쯧 소리를 내며 그를 불렀다. 소년이 목구멍을 울려 으르렁거렸다. 엉망으로 엉킨 회색 머리 아래에 같은 색의 눈동자가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우타는 그의 눈동자가 아직 살아있다는 사실에 아주 약간 놀라움을 느꼈다.

그는 우타에게 달려들었다. 우타는 익숙한 듯 몸을 두어 발자국 뒤로 물렸다. 철창에 매달려 으르렁거리는 그를 보며 우타는 그저 그의 이빨이 날카롭구나, 하는 생각을 할 뿐이었다.

소년은 예부터 발견하기 힘든 백호 인수였다. 그러니 포획되어 여기까지 굴러들어온 것이겠지만. 우타는 손을 뻗어 마치 호랑이가 아닌 고양이를 다루듯 그의 콧잔등을 톡톡 두드렸다. 그러면 소년은 손톱을 뻗어 우타의 살점을 조금이라도 긁어내려고 애썼다.

한동안 아무것도 안 먹었다고 해서 상태나 보러 왔더니 아직 멀쩡해 보이네.”

우타는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철창 안의 소년과는 다르게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조금 더 힘이 빠지면 다시 찾아올게. 소년은 철창을 붙잡은 채 멀어지는 우타의 뒷모습을 가만히 노려보았다.

소년은 이곳에서 빠져나갈 생각 따위는 사실 하지 않고 있었다. 이곳이 어떤 곳인지는 어렸을 때부터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희귀한 인수나 수인들을 잡아다가 옥션에 파는 악질 중의 악질들. 그는 무대 위에서 자신이 살아있는 생명이 아닌 물건으로서 거래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 미래가 기다릴 바에는 차라리 이대로 죽어버리는 게 나았다.

소년은 다시 철창의 한가운데로 걸어가 몸을 웅크렸다. 책임자로 보이는 남자는 소년을 다시 찾아온다고 말했다. 소년은 그때는 반드시 그의 목을 물어뜯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었다. 지하의 차가운 조명 아래에서 며칠 동안이나 식음을 거부했는지 그는 알 수 없었다. 머리가 윙윙 도는 것만 같아 천장을 바라보고 누워있는 것 빼고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이대로 죽어버리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그때 왜 그 남자가 떠올랐는지는 그도 모를 일이었다. 죽이지 못한 것에 대한 한일까, 아니면 다시 오겠다는 말이 생각보다 그의 기억에 각인된 걸까.

소년은 그 남자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마지막 순간에 떠오르는 게 자신을 팔아넘기려고 하는 사람이라니. 기운이 없는 와중에도 헛웃음이 났다. 소년은 감았던 눈을 다시 떴다. 놀랍게도 눈앞에 그 남자가 있었다. 소년은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남자는 소년의 어깨를 눌러 그것을 제지했다. 그다지 힘이 들어가 있지는 않았지만 소년에게는 겨우 그 정도의 힘을 버틸만한 기운 같은 건 없었다.

고집이 센 아이구나.”

우타는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조심스레 소년의 한쪽 뺨을 쓰다듬었다. 아직은 솜털이 보송보송하게 나 있는 부드러운 살결이었다.

죽고 싶겠지만, 너를 죽게 둘 수는 없어. 나도 내 사정이 있어서 말이지.”

미안하게 됐어, 하고 우타가 말했다. 그 목소리에는 묘한 진심이 묻어있었다. 소년은 툭툭 끊기는 생각을 이어붙이기 위해 부단히 애썼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는 머리가 새하얘지는 것을 느꼈다.

우타는 한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소년에게 입을 맞췄다.

그 입맞춤은 눅눅했다. 우타는 천천히 머금고 있던 물을 소년에게 넘겨주었다. 그는 우타의 키스를 피하지 않았다. 도리어 그의 목을 껴안아 조금 더 그에게 가까이 붙었다. 살기 위한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우타는 입술을 떼어내며 살며시 눈을 떠 소년의 표정을 확인했다. 그의 눈동자가 가볍게 흔들리고 있었다.

나머지는 직접 마셔.”

우타는 소년의 곁에 물병을 놓고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소년은 비척비척 일어나 앉아 멀뚱히 물병을 바라보았다. 우타는 그런 소년을 보고 웃음기가 묻은 목소리로 말했다.

안 마실 거야? 아니면 또 키스해 주기를 바라는 거야?”

우타의 말에 소년은 무릎을 짚고 일어났다. 우타는 철창에 등을 기대고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소년은 우타에게 한 발 한 발 다가갔다. 소년은 우타의 작은 손바닥으로 우타의 뺨을 감쌌다. 우타는 그의 그런 행동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나의 죽음에게 2

 

Y A G I

 

0

 

태초에 죽음의 신과 쾌락의 신은 한 몸이었다. 그것에 이유는 없었다. 그저 세상이 처음 구성되었을 때 삶과 함께 태어난 죽음의 품에 쾌락이 안겨져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어느 날, 죽음과 쾌락의 신이 죽었다. 그들은 이 세계에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그리고 그 두 죽음의 신의 마지막을 본 한 명의 인간이 있었다.

그것은 하나의 우연이었으나, 결국 그것은 우연이 아닌 필연처럼 그 인간의 몸을 감싸 안았다. 그러나 더 이상 죽음에 쾌락은 없었다. 죽음의 신은 더 이상 쾌락을 줄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 인간은 죽음의 신의 자리를 차지했다. 사람들은 조금씩 죽음을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죽음 이후에 남는 것은 더 이상 쾌락이 아닌, 슬픔이었다.

그는 죽음과 눈물의 신이었다. 굵은 눈물방울을 떨어트리며 인간들의 영혼을 거두는 신이었다. 그럴 때마다 하늘에서는 소나기가 쏟아져 내렸다.

 

 

1

 

요모 렌지는 검은 드레스 셔츠에 검은 정장을 맞춰 입은 채 검은 장우산을 들고 지하철에 타고 있었다. 요모는 새로운 죽음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 수단이 꼭 지하철일 필요는 없었지만, 그는 지하철을 타는 것을 즐겼다. 별 이유는 없었다. 그저 사람들이 죽은 눈을 하고 지하철을 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요모는 이 지하철이 커다란 관처럼 느껴졌다. 그런 의미에서 지하철은 편했다. 다른 곳보다 죽음에 훨씬 더 가까이 있는 느낌이었다.

그런 지하철에도 생기가 넘치는 사람이 없지는 않았다. 그 생기가 주위의 다른 사람에게 전혀 영향을 끼치지 않기는 했지만, 어쨌든 그런 사람들도 있기는 있었다. 요모는 어쩐지 그런 생기 넘치는 인간들이 불편했다. 요모의 눈에 그들은 죽음이나 슬픔 같은 것과 잠시나마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 같았다.

그것이 질투라면 질투였다. 요모가 날 때부터 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느끼는 감정일지도 몰랐다. 아마 자신 이전의 죽음의 신이라면 이런 것에 더욱 흥미를 느끼고 바짝 다가가겠지.

요모는 생각을 그만두기로 했다. 말 그대로 그가 죽였으니까. 요모는 고개를 문 쪽으로 돌렸다.

요모가 그를 본 것은 슬슬 지하철에서 내려 조금 더 생생한 죽음이 있는 곳으로 바로 움직일까 고민하던 때였다.

우타.”

요모는 자기도 모르게 그 이름을 입에 담았다. 우타, 타우, 우타, 타우. 자기가 사랑했던 죽음의 신의 이름들. 요모의 목소리에 문가에 서 있던 사람이 몸을 돌려 요모를 바라보았다.

많아봤자 고등학생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 머리를 노랗게 물들이고 머리띠로 앞머리를 뒤로 넘긴 아이였다. 요모가 알고 있는 우타의 모습과는 달랐다. 하지만 요모는 그것이 우타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요모가 죽음의 신이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그 사람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우타이기 때문이었을까.

문 가까이에 서 있던 우타가 몸을 움직여 요모의 앞에 서서 요모를 올려다보았다. 요모는 그 도발적인 시선을 슬쩍 피했다.

아저씨 제 이름은 어떻게 알았어요?”

……아니, 아무것도.”

하지만 제 이름, 불렀잖아요.”

그냥 해본 말이야.”

누가 사람 이름을 그냥 불러요.”

마침 지하철 문이 열려서 요모는 우타를 지나쳐 문밖으로 도망치듯 빠져나갔다. 그러나 역시 우타는 집요하게 요모의 뒤를 따라 개찰구 밖까지 쫓아왔다.

사람들이 몰려 들어갔다 몰려나오는 지하철 입구에서 요모는 뒤를 돌아 우타를 바라보았다. 우타의 눈동자에는 이유를 알 수 없는 힘이 들어있었다.

왜 자꾸 따라오는데?”

아저씨가 제 이름을 불렀잖아요.”

그게, 뭐 어때서?”

그냥, 아저씨는 궁금하지 않아요? 처음 보는 사람이 이름을 불렀는데.”

그 말을 하며 우타는 빙긋 웃어보였다. 우타는 그런 녀석이었지. 호기심이 위험보다 훨씬 더 앞서는 그런 타입의.

요모는 우타를 내려다보았다. 하필이면 이름과 성격이 같은 걸까, 아니면 신이 죽으면 이렇게 환생하게 되는 걸까. 아직 자신의 죽음을 맞이해본 적이 없는 죽음의 신 요모 렌지는 우타를 내려다보며 그런 고민을 했다.

고민을 해서 답이 나오지 않는 일이란 걸 알면서도 그랬다.

너는 모르겠다정말.”

저도 아저씨 모르는걸요.”

우타가 태연하게 말했다. 요모는 깊은숨을 내뱉었다.

아저씨 말고, 렌지. 요모 렌지.”

요모 렌지.”

편하게 렌지라고 불러.”

그래, 렌지.”

우타는 서슴없이 요모의 이름을 불렀다. 요모에겐 어려운 이런 일들을 우타는 곧잘 해내곤 했다. 이번의 우타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말이 많이 짧아지지 않았어?”

그래서 싫어?”

그 말에 요모는 답하지 않았다. 싫으냐 좋으냐를 굳이 따지자면, 좋았다. 요모는 물끄러미 우타를 바라보았다. 우타는 고개를 들어 요모를 보면서도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우타.”

요모가 나지막하게 우타의 이름을 불렀다. 날이 좋았는데 요모는 우산을 폈다. 우타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 일련의 행동들을 바라보았다. 요모는 사람들 사이로 섞여 들어가며 말했다.

우리는 곧 다시 만나게 될 거야.”

그리고 그 순간, 요모는 우타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우타는 얼른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요모는 그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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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죽음에게

 

Y A G I

 

0

 

태초에 죽음의 신과 쾌락의 신은 한 몸이었다. 그것에 이유는 없었다. 그저 세상이 처음 구성되었을 때 삶과 함께 태어난 죽음의 품에 쾌락이 안겨져 있을 뿐이었다. 이 세상 어느 때나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 알고 싶은 만큼 죽음을 알지 못했지만, 그들은 죽음을 결코 두려워하지는 않았다.

죽음은 그들에게 약속된 순수한 쾌락이었다.

그러나 어느 날, 죽음의 신의 몸이 둘로 갈라지며 두 쌍둥이가 태어났다. 그들의 몸에 각각 죽음과 쾌락이 깃들지 않은 것은 누군가의 실수라고도 볼 수 있는, 하나의 우연이었다. 그렇게 해서 이 세상에는 죽음과 쾌락의 신이 두 명이 되었다.

세상에 죽음이, 그리고 쾌락이 넘쳐흐르기 시작했다.

 

 

1

 

   요모가 그를 만난 것은 요모 자신이 만들어 낸 시체들의 산 위에서였다. 요모는 자신의 것이 아닌 피를 뱉으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세상의 소리가 사라진 것처럼 사위가 조용했다. 요모는 고개를 꺾어 뻐근한 몸을 풀었다.

   “이런, 이미 신의 곁으로 가버렸네.”

   그의 목소리를 들은 것은 요모가 그 장소를 떠나려 했을 때였다. 그는 발소리조차 없이 요모의 곁에 다가와 있었다. 요모는 자기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그는 요모가 죽인, 이름도 모르는 남자의 손목을 들었다가 툭 놓았다. 그의 몸을 잡아먹을 듯 휘감고 있는 문신과는 대조적으로 남자는 계절과 맞지 않게 헐렁한 차림이었다.

   마르고 키도 자신보다 작은 남자에게 요모는 어째서 두려움을 느꼈는가. 요모는 뒤로 한 걸음 발을 물리다 질퍽한 피 웅덩이를 밟고는 가볍게 인상을 구겼다.

   “걱정하지 마. 오늘 내가 데리러 온 건 네가 아니야.”

   남자의 미묘하게 높은 톤의 목소리가 겨울 공기를 울렸다. 요모는 의문을 알 수 없는 남자의 말에, 여전히 몸의 긴장을 풀지 않은 채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러지 마. 아무리 그래도 너는 나를 죽이지 못할 것이야.”

   “무슨.”

   “그리고.”

   그리고, 하는 말로 남자는 요모의 입을 막았다. 그는 요모를 향해 느리게 다가왔다. 요모는 그런 그를 피할 수도 있었지만 피하지 않았다. 어쩌면 피할 수 없었다는 말이 더욱 가까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자신보다 압도적인 존재를 만났을 때 느낄 수 있는 두려움. 요모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 것은 바로 그 두려움이었다.

   “다음에 봐, 렌지.”

   남자는 그 말과 함께 요모의 이마에 가벼운 키스를 남기고는 유유히 사라졌다. 요모는 그 뒷모습을 끝까지 바라보았다. 그가 어째서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었는지, 다음에 만나자는 말은 무엇인지, 왜 자신에게 키스를 한 것인지 알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요모는 그가 입술을 남기고 간 곳을 손끝으로 문질렀다. 그의 몸에서는 희미한 단 냄새가 난 것만 같았다. 그 순간 어떻게 그 냄새를 맡았는지는, 역시 요모가 알 수 없는 것이었지만.

   요모는 죽음의 냄새를 맡았다. 그리고 그 냄새는 마치 운명처럼 자신을 지긋지긋할 정도로 따라다니고 있던 냄새였다.

 

 

2

 

요모는 그의 생각보다 이른 시일에 남자를 다시 만났다. 그곳은 요모가 제 손바닥의 금을 내려다보듯 볼 수 있는, 도쿄의 어느 변두리에 얽혀있는 골목이었다. 그곳엔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를 깨진 술병의 조각들이 아주 천천히 바람에 의해 깎여갔고, 살아있는 생물의 내장처럼 꼬여있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파이프에서 후끈한 열기가 주위를 데우고 있었다.

그 남자를 보고 털 사이사이에 까맣게 먼지가 내려앉은 길고양이 한 마리가 몸을 둥글게 말며 날카로운 소리를 내고 있었지만 남자는 그것을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하던 일을 계속했다.

남자는 키스를 하고 있었다. 요모가 잘 알지 못하는 두 명의 남자가, 자신의 눈앞에서 진득하게 입을 맞췄다. 간간히 신음소리를 닮은 희미한 숨소리가 들렸다. 요모 렌지는 어째서인지 그들에게서 눈을 떼어내지 못했다. 이런 것을 보는 게 처음도 아닌데, 그때는 왜 그랬을까.

뒤늦게 생각해 보면 스스로도 잘 이해가 가지 않는 행동이었지만, 어쨌든 요모 렌지는 그들의 키스를 끝까지 바라보았다. 남자는 평생 떨어지지 않을 것 같던 입술을 떼어내며, 눈동자만을 돌려 요모를 바라보았다.

차마 말로 표현하기 힘든 그 시선. 요모는 가볍게 몸을 떨었다. 지금 느끼는 이 감정은, 두려움 따위가 아니었다. 두려움보다 조금 더 안쪽에 있는 것. 자신이 탐하면 안 되는 에덴동산의 사과 같은 것.

그 감정이 쾌락이라는 것을 깨닫기까지 요모 렌지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동안 남자와 입을 맞췄던 사람은 아주 느리게 다리가 풀려 무릎을 꿇었고, 남자는 방금까지 입을 맞추고 있던 그에게 더 이상의 관심을 주지 않았다. 요모는 본능처럼 그의 죽음을 깨닫고는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너는정체가 뭐지?”

진짜 알고 싶어? 알면 후회할 텐데.”

남자는 자신의 앞에 떨어지듯 놓인 죽은 이의 손을 가뿐하게 건너 요모에게 다가왔다. 요모는 그의 또렷한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 보기 위해 적잖은 노력을 해야 했다. 남자는 부드럽게 요모의 양 뺨을 붙잡고 자신의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마치 곧 키스라도 할 것처럼. 요모는 몸을 뒤로 약간 뺐지만 그렇다고 남자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는 키스를 하는 대신, 요모의 귓가에 아주 작은 목소리로 한 마디를 속삭였다.

나는 죽음과 쾌락의 신이야.”

?”

, 신을 진짜로 보는 건 처음이라서, 안 믿어지는 거야?”

정말로 신이 있다면, 그가 이런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텐데. 남자의 모습에게서 경건함은 조금도 찾을 수 없었다. 그가 가지고 있는 분위기라면 아주 커다란 불길함, 또는 그것과 비슷한 크기의 농밀함이었다. 죽음이란 그런 것인가, 하고 요모는 생각했다.

죽음의 신이어서 사람들을 죽이는 건가?”

, 그렇지.”

사람을 죽이는 기준은 뭐지?”

내 마음.”

그의 말에 요모는 가볍게 표정을 구겼다. 남자는 태연하게 웃었다.

왜 그런 표정을 짓고 그래? 너도 네 마음에 따라서 사람들을 죽이곤 하잖아.”

요모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와의 첫 만남이 그가 만들어낸 시체의 산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가 죽음의 신이기 때문에, 요모는 그에게 있어서 죽음과 관련된 거짓말이 통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정확히는, 그렇게 느꼈다.

그 감각은 본능과 비슷한 것이었다. 그에게는 거짓말이 통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와의 죽음이라면 행복할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동시에 요모의 머릿속을 채웠다.

볼래?”

그 말을 하며 남자는 아, 하고 입을 벌렸다. 퍼뜩 정신이 돌아온 요모는 무심코 그의 입속을 바라보았다. 아주 단정하고 흰 그의 치아가 가장 먼저 요모의 눈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한 마리의 뱀처럼 남자의 입속에 자리하고 있는 그 붉고 부드러운 혀.

아니, 실제로 그곳에는 뱀이 있었다. 남자의 목구멍을 타고 올라 차가운 비늘을 빛내는, 새까만 비늘과 붉은 눈동자를 가진 뱀 한 마리가. 남자는 곧 입을 다물고는 눈을 지그시 감고 뱀을 다시 삼켰다.

다시 뜬 그의 눈동자도, 붉은색이었다. 아까의 그 뱀과 똑같은 온도의 붉은빛.

나랑 키스하면, 이 뱀이 너의 몸으로 들어가서 너를 안쪽에서부터 잡아먹는 거야.”

하지만 저 사람은.”

그걸 알면서도 아무도 내 키스를 피하지 않는 거지.”

그 정도의 쾌감이니까. 그 말을 하며 남자는 죽은 이를 돌아보았다. 그 얼굴에는 어떠한 유감이나 애도 같은 것이 보이지 않았다. 그저 무생물을 보는 그 정도의, 별 감정도 존재하지 않는 그저 그런 시선. 남자는 다시 요모를 바라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 내가 너를 죽일까 봐 겁나?”

요모는 그 물음에 대답할 수 없었다. 그렇다는 대답은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렇지 않다는 대답을 할 수도 없었다. 그런 거짓말은 바로 간파되어 버리니까.

유감스럽게도 나, 지금 너한테는 별로 키스하고 싶지 않아.”

남자는 이번에도 또, 다음에 보자는 말을 남기고는 사라졌다. 요모는 멀어져가는 그를 잡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의 뒷모습이 아주 작아질 때까지 바라보았다. 남자가 남기고 간 달큰한 향기가 요모의 코끝을 스쳤다.

요모는 몸을 숙여 남자가 죽인 사람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그의 얼굴은 마냥 행복해 보였다. 그의 죽음이 정말로 그렇게 행복한 것이었는지까지는 요모가 알 수 있는 일이 아니었지만.

요모는 눈을 꼭 감았다가 떴다. 그는 언젠가는 분명 만날 것이 분명한 죽음의 신의 얼굴을 다시 한번 더 떠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자신에게 선사하지 않은 쾌락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요모 렌지 생일 축전

 

너에게 꽃다발을 안겨줄게

 

Y A G I

 

 

1

 

그러고 보니 렌 생일은 언제야?”

이토리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요모는 눈을 깜빡였다. 4구에서 이들과 함께 지낸 지 벌써 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였다. 요모는 또로록 눈을 굴리곤 일부러 이토리 쪽을 바라보지 않으며 질문에 답했다.

칠월.”

칠월?”

이토리의 뒤집힌 목소리가 요모의 귓가에 울렸다. 요모는 아주 가볍게 인상을 썼다. 생일 같은 것은 요모의 삶에서 그다지 중요한 요소는 아니었다. 누나가 살아있을 때야 그것이 의미 있는 일이었지. 누나는 꼭 그런 걸 챙겨야 하는 사람이었으니까.

칠월 며칠?”

구일.”

한참 지났네. 왜 진작 말 안 했어?”

우타가 나긋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이토리는 양손을 제 허리에 얹고 요모를 바라보았다. 요모는 조금은 머쓱하게 말을 꺼냈다.

원래 생일 같은 거 안 챙겨서.”

지금까지 우타랑 나랑 생일 챙기는 거 봤으면서.”

그냥 너희는 그런가 보다 했지.”

너희라니. 이제는 우리지.”

우리, . 요모는 이토리의 말에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그럴 사이가 됐다는 건가. 확실히 4구의 친구들은 자신에겐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긴 했다. 정착할 생각이 없었던 이곳에 남아있게 된 것도 그들 때문이었으니까.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챙겨줄까, 렌지 생일.”

좋지. 사람들 불러. 생일 축하 노래라도 불러야지.”

요모는 손을 뻗어 지금 당장이라도 사람들을 모으러 가려고 하는 이토리를 제지했다. 애초에 생일도 아닌데 축하 노래를 뒤늦게 부르는 것도 좀 그랬고.

됐어, 챙기고 싶으면 다음 생일 때 챙겨 줘.”

아무튼, 렌은 너무 뻣뻣해서 탈이야.”

뻣뻣한 것과 생일을 말하지 않은 것이 과연 어떤 상관관계에 있는지 요모는 알지 못했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생일을 챙기는 게 과연 얼마 만인가……. 요모는 속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그렇게 먼 과거도 아닌데 어쩐지 기억이 흐려진 느낌이 들었다. 이것은 좋은 것일까, 나쁜 것일까. 요모는 머릿속으로 그것을 판단하고 있었고 그러는 동안 우타와 이토리는 다음 요모 생일을 어떻게 하면 축하할 수 있을지를 토의하기 시작했다.

요모는 그런 그들을 보며 생각을 멈추었다.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지금을 살 수 있는 것은 좋은 일임이 분명했다. 아직까지 그 과거를 완전히 벗었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이 정도로도 요모는 만족할 수 있었다.

 

 

2

 

다음 칠월까지는 금방이었다. 그동안 많은 변화가 있어서 더욱 그렇게 느껴지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요모는그 사이에 4구에서 안테이크로 적을 옮겼고, 그에 따라 자연스럽게 우타나 이토리와도 어느 정도 거리가 생겼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마냥 멀게 느껴지는 것은 또 아니었지만.

두 사람은, 특히 우타는 종종 안테이크로 찾아와 4구의 근황을 얘기하곤 했다. 4구는 요모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이 크게 다르진 않은 듯했다. 워낙 많은 구울들이 왔다가 떠나가는 그런 곳이어서 그럴까. 차이가 있다면 간혹 요모를 그리워하는 구울들이 존재한다는 것 정도였다.

걔들을 위해서라도 좀 더 자주 들려.”

카페 일 안정되고 나면.”

새로 나기 시작한 검은색의 머리 뿌리가 언뜻언뜻 보이는 우타가 카페의 바 자리에 앉아 요모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고 있었다. 우타는 4구의 대장 노릇을 그만두었다고 말했다. 왜 그랬냐는 요모의 질문에, 우타는 그저 재미없어졌다는 대답만 내놓을 따름이었다.

요모는 그 대답이 너무나 우타답다고 생각해서, 더 이상의 무언가를 묻지는 않았다. 대신에 우타가 스스로 풀어내는 자신의 이야기를 컵의 물기를 닦으면서도 귀 기울여 듣고 있었다.

있잖아, 렌지.”

?”

마스크 가게를 하겠다는 이야기 바로 다음에 이어진 대화였다. 요모는 컵에 향해 있던 시선을 우타에게로 옮겼다. 우타의 눈빛이 카페의 하얀 조명 아래에서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오늘 렌 집에서 자고 가도 돼?”

요모는 그제야 그날이 자신의 생일 바로 전날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3

 

이건 내 생일 선물.”

생일인데 너무하게 대하는 거 아니야?”

요모는 저도 모르게 눈물을 몇 방울 떨군 눈 밑을 손등으로 닦았다. 짠 눈물이 손등에 엷게 달라붙었다. 요모의 위에 올라타듯 그를 안고 있었던 우타가 몸을 빙글 돌려 요모의 옆에 누웠다. 아직 정돈되지 않은 두 사람의 숨이 공기 중에서 서로 섞였다.

그래서 싫었어?”

싫다고는 안 했어.”

그 말에 우타가 작게 웃었다. 그는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요모의 머리카락을 넘겨주다가, 눈을 돌려 문득 시계를 찾았다. 그저 삭막한 요모의 방, 이라기도 어려운 컨테이너였지만 그런 집에도 시계 하나쯤은 있었다.

“12시 지났네. 생일 축하해, .”

우타는 그렇게 말하며 요모의 뺨에 쪽, 입을 맞췄다. 천장을 보고 있던 요모가 낮게 웃었다.

왜 웃어?”

낯간지럽게.”

하긴, 사귀는 사이도 아닌데.”

같이 잔 사이긴 하지만.”

이번에는 우타가 웃음을 터트렸다. 사귀지는 않았지만 같이 잠은 잔 사이. 우타는 그 미묘한 관계가 퍽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우타는 요모의 품에 파고들었다. 아까는 그렇게 요모를 안았으면서도 그랬다. 요모는 차게 땀이 말라가고 있는 우타의 허리를 껴안았다.

오늘은 우리 동네에 들를 거지?”

, 그럴 거야.”

우타의 웅얼거리는 물음에 요모는 고개까지 끄덕이며 답했다.

기다리는 사람이 있으니까.”

20구에서의 삶이 싫지는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요모는 그 삶을 좋아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4구에서의 삶이 그렇게 나빴던 것도 아니었다. 요모에게 있어서 그 둘은 다른 삶이었다. 비교하기 어려운 층위에 있는 그런 삶.

지금 자신의 삶은 20구에 위치해 있었지만, 생일 하루 정도는 4구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도 나쁘진 않은 일이었다.

 

 

4

 

요모의 생일 때마다 두 사람이 몸을 섞는 것은 일종의 관례처럼 몇 년 동안 이어졌다. 물론 그들은 생일이 아니어도 관계를 가지긴 했다. 하지만 생일의 밤은, 무언가 달라도 달랐다. 단순히 기분 탓일 수도 있는 문제였지만 요모는 그런 것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특별한 날의 묘하게 특별한 쾌감. 요모는 그것이면 충분했고 우타도 마찬가지인 듯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어쩌면 요모만의 착각일지도 몰랐다.

우타.”

생일이니까.”

꽃다발의 포장지가 요모의 손 아래에서 바스락거렸다. 요모는 우타가 제게 건넨 꽃다발을 마치 이상한 것인 양 빤히 내려다보았다. 수없이 많은 생일을 지나왔지만 우타에게 꽃다발 같은 것을 받은 것은 그날이 처음이었다. 요모는 꽃다발에서 떨어지지 않는 시선을 억지로 우타에게로 옮겼다.

여름의 뜨거운 공기 속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맞았다. 우타는 조금은 주저하듯이, 조금은 곤란하다는 듯이 고개를 왼쪽으로 살짝 기울이며 말했다.

저기, .”

.”

그냥, 좋아한다고.”

나도.”

요모의 대답에 우타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을 깜빡여 요모를 바라보기만 했다. 찰나의 시간과 긴 시간, 그 사이에 있을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렀고 우타는 다물고 있었던 입술을 열었다.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고 대답하는 거지?”

내가 그 정도로 눈치가 없어 보여?”

렌지 눈치 없잖아.”

그 말에 요모는 한숨을 쉬듯 웃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런 말은 누구나 알아들어. 요모의 말에 우타는 소리 없이 웃었다. 그는 발을 옮겨 요모에게 좀 더 바싹 다가가 붙었다. 꽃다발의 포장지가 우타의 몸에 닿아 아주 작게 바삭거리는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저기, 키스해도 돼?”

언제는 허락 맡고 했어?”

새삼스럽게 허락 맡고 하고 싶어서.”

우타의 말에 요모는 픽 웃으며 눈을 감았다. 요모는 결코 웃음이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지금은 얘기가 달랐다. 어쩌면 우타의 입에서 떨어진 말은 지금까지 요모가 기다려왔던 말일지도 몰랐다. 우타의 말처럼, 눈치가 없어서 그 말을 기다려왔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아챈 것일지도.

우타는 쓰다듬듯 요모의 양 뺨을 두 손으로 감쌌다. 요모는 눈을 감고도 자신에게로 가까이 다가온 우타의 기척을 알 수 있었다.

우타는 입을 맞추기 직전, 요모의 숨과 자신의 숨이 하나로 합쳐지는 그 순간에 요모에게 무언가 비밀스러운 것이라도 말하듯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생일 축하해, .”

 

 

장마

 

Y A G I

 

 

 

요모 렌지는 굳은살이 박인 우타의 손끝을 매만졌다. 얼핏 봤을 때는 마냥 섬세하게 생긴 손인데, 만져보면 또 그 느낌이 달랐다. 요모는 벗은 몸으로 자신을 보고 누워있는 우타의 얼굴을 잠시 살폈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우타의 고른 숨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굵은 빗방울이 요란하게 컨테이너의 지붕을 때리고 있었지만 요모는 그 사이에서도 쉽게 우타의 숨소리를 걸러낼 수 있었다. 아마도 오랫동안 그를 알아왔고, 안아왔기 때문이리라. 요모는 우타의 손을 쓰다듬던 것을 멈추고 잠시 빗소리에 신경을 두었다. 금세 멎을 비는 아닌 듯싶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우타가 우산을 들고 온 것 같지도 않았다. 요모는 제 우산을 우타에게 들려 보낼 수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우타가 비 핑계를 대고 늦은 저녁까지 자신과 함께 있어 주길 바라는 마음이 더 컸다. 우타에게도 우타의 삶이 있는 법이었지만, 가끔씩은 상대에게 그 삶의 궤도에서 틀어지기를 종용하고 싶을 때도 있지 않은가.

특히 그것이 연인도 친구도 아닌 애매한 관계일 때면, 무언가 조그마한 확신이라도 얻고 싶은 그런 관계일 때면 더더욱 그렇지 않은가.

요모는 여태껏 자신이 원해 왔던 것을 떠올렸다. 어렸을 때 같았으면 아마도 복수를 가장 먼저 떠올렸겠지. 그때의 그는 증오가 뭉쳐서 태어난 존재였다. 아리마 키쇼라는 남자를 쫓긴 하였으나, 요모는 사실 그 증오가 비단 그 한 남자에게만 향하는 것이 아닌, 이 세계를 향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세계를 증오하는 것은 얼마나 힘들고 괴로운 일인가. 세계를 증오한다는 것은 곧 자신을 증오한다는 것과 같았다. 어린 요모는 그것에서 눈을 돌리고 싶었다. 그리고 그때보다 조금 더 나이가 들어버린 요모는 더는 눈을 돌리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도 항상 빛은 있었다. 이렇게 쏟아붓는 장마도 언젠가 그치는 것처럼.

장마. 요모에게는 장마 같은 것이 필요했을지도 몰랐다. 어쩌면 그 증오라는 것이 그의 삶의 한 궤도를 넘어서는 일일지도 몰랐다. 속에 있던 모든 것을 쏟아내고 텅 빈 곳에 새로운 것을 담아내는, 그런 과정이 필요했을지도 몰랐다.

요모는 자신이 그 과정을 그래도 잘 버텨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타가 중요하게 작용했다는 것을 요모는 부정하지 않았다. 요시무라 씨가 요모를 붙잡아 놓는 존재였다면 우타는 반대로 요모가 마음껏 날뛰며 쌓아뒀던 것을 해소할 수 있게 해준 존재였다. 요모가 감춰왔던 욕망들이 우타의 손을 거쳐 나름의 방법으로 (그 방법이 과연 건전했는가는 둘째로 치고) 표출되었었다.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고 싶다는 원초적인 욕망도 그에 포함되는 것이었다.

우타는 과연 요모를 사랑하는가. 요모는 그것을 알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애초에 요모 본인부터가 우타를 사랑하는지 확신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런 상태에서 어떻게 상대의 마음을 읽을 수 있겠는가. 요모는 그저 서로 몸을 섞으며 갈증 비슷한 것을 해소하는 이 관계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우리에겐, 구울에겐 그런 것이 더 어울렸다. 사랑 같은 것을 추구하는 것보다 눈앞의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 그들의 삶의 방식에 더욱 걸맞은 것이었다.

렌지.”

깼어?”

, 하고 우타는 아직 잠에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우타는 습관적으로 요모의 품을 찾았다. 요모는 그런 우타를 선선히 받아들였다. 비가 오는 바람에 습도가 높아서 함께 살을 맞대고 있는 것만으로도 땀이 배어 나오는 날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그것을 개의치 않았다. 서로의 존재가 그곳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충분히 만족할 수 있었다.

사랑 같은 것이 없더라도, 그 행동의 근간에 약간의 불쾌함이 섞여 있더라도 상관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있어서 삶이란 으레 그런 것이었기 때문에.

요모는 우타의 척주를 손끝으로 따라 그리며 그 살의 감촉을 다시 떠올렸다. 어쨌든 그들은 살아나가고 있었다. 그 방식이 어떠한가는 그들에게 크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인간 세상에서 사는 구울의 삶이란 게, 바로 그런 것이었으니까.

비가 쏟아지네.”

오늘부터 장마래.”

렌지 살은 차갑구나.”

우타의 말에 요모는 그를 더욱 꽉 껴안았다. 그의 마른 몸이 요모의 몸에 달라붙듯 와닿았다. 우타는 손을 뻗어 요모의 뒷머리를 빗어 내리듯 쓰다듬었다. 아주 귀한 것을 다루는 마냥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우타 네 살은, 차갑지는 않은 것 같아.”

그럼. 내가 누군데.”

오늘 안 나가면 안 돼?”

렌이 이런 부탁을 할 줄이야.”

비가 내리는 김에.”

나쁘지 않지. 이렇게 비를 피하는 것도.”

우타는 요모의 손을 찾았고, 그 손에 제 손을 끼워 넣어 깍지를 꼈다. 요모의 심장 박동이 손가락 사이사이로 전해져 왔다. 살아있는 감각. 그것으로 충분한 삶. 두 사람은 습관적으로 혀를 섞었다. 빗방울은 여전히 컨테이너 지붕을 수도 없이 때리고 있었다.

 

# 낙원 이메레스

 

 

"낙원은 없어"

 

Y A G I

 

 

이렇게 도망치나요? 당신 낙원의 열쇠는 제게 있을 텐데.”

후루타는 침대에 몸을 누인 채 자신의 아래에서 빠져나간 우이를 바라보았다. 우이를 잡을 의지 같은 것은 전혀 없어 보이는, 그저 나른한 태도였다. 우이는 셔츠의 첫 번째 단추를 풀었다. 후루타는 여전히 고개만 돌려 그런 우이를 바라보았다.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어요, 우이 씨.”

이제 낙원은 없어.”

그렇게 말하며 우이는 후루타의 손목을 잡고 그의 위로 올라탔다. 모텔의 싸구려 매트리스가 불안정하게 그의 무릎을 받쳐주었다. 후루타의 위로 우이의 머리카락이 쏟아지듯 흘러내렸다. 지금껏 후루타가 보지 못한 모습이었다. 여태껏 우이는 제 아래에서 욕구를 참을 줄만 알았지,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은 처음이었다.

후루타는 이 상황을 예상하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황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새로운 전개에 묘하게 심장이 뛰는 것도 같았다. 후루타는 웃는 낯으로 말을 이었다.

어머, 의외여라. 지금까지 우이 씨는 이상주의자인 줄 알았거든요.”

이상도 없어진 지 오래야.”

우이는 몸을 낮춰 후루타의 입술을 찾았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감촉이었다. 우이의 손 아래에 잡힌 후루타의 손목은 잠깐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마치 태연하게 우이의 혀를 받아드리는 후루타의 혀처럼, 어떠한 저항도 없었다.

우이는 그게 싫었다. 후루타가 이렇게 태연하게 구는 것도, 모든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들을 포기한 자신도 싫었다. 어쩌면 후루타에게 이렇게 구는 것은 그 감정의 반발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우이는 그것을 부정하고 싶었지만, 그렇다고 그 감정이 고개를 쳐드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지금 내게 중요한 건 이 현실뿐이야.”

우이 씨는 저를 싫어하지 않았나요?”

싫어해.”

우이는 씹어내듯 말을 뱉었다. 우이의 단호한 대답에 후루타는 그저 훗, 소리를 내며 웃었다.

이런 거로 저를 파멸시킬 순 없을 텐데요.”

상관없어.”

우이는 후루타의 손목이 생각보다 더 가늘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자신을 가지고 놀았던 자의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자신은 후루타를 파괴하고 싶은가. 우이는 딱히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후루타를 사랑하는가. 그것은 확실히 아니라고 생각했다.

지금의 그는 다만 그의 욕구가 이끌리는 대로 움직일 뿐이었다.

낙원도 없어졌는데, 파멸이 무슨 소용이 있겠어.”

우이 씨는 참 기특하네요.”

그럼 어디 저를 만족시켜 보세요. 후루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우이는 다시 제 입술로 후루타의 입술을 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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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원 이메레스

 

 

"도망치게 한 이 상황이 나빠"

 

Y A G I

 

 

아키라가 의외의 인물을 만난 것은 잠이 오지 않아서 찾은 건물의 옥상이었다. 천장에 누워있던 히나미도 아키라를 만난 것이 꽤 의외였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키라를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 없이 두 사람만 만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아키라는 아주 잠깐 멈칫하다 히나미의 옆에 누웠다. 히나미는 그에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별이라도 보고 있었나?”

그러려고 나왔는데, 별이 없네요.”

그렇군.”

아키라는 히나미의 말을 듣고 하늘로 시선을 옮겼다. 심지어 달도 없는 어두운 하늘이 아키라의 눈앞에 펼쳐졌다. 그 대화를 끝으로 한동안 누구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한참의 정적 이후에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의외로 아키라였다.

후에구치, 궁금한 게 있는데.”

, 말씀하세요.”

너희들은구울들은 어째서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도망쳐서 도착한 곳에 낙원은 없으니까요.”

예상외로 바로 나온 대답에 아키라는 고개를 돌려 히나미를 바라보았다. 아직은 앳된 기운이 있는 히나미의 얼굴은 사뭇 비장해 보였다. 아키라는 아주 인상적인 것이라도 본 듯 그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키라가 입을 연 것은 그녀가 다시 시선을 하늘로 돌렸을 때였다.

나는 도망치게 한 이 상황이 나쁜 거라고 생각해.”

이제는 히나미가 아키라를 바라보았다. 아키라는 히나미의 시선을 느끼면서도 그녀를 바라보지 않았다.

당신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는데.”

, 이제는 같은 처지니까.”

그 말을 하고 아키라는 숨을 내뱉었다. 누군가를 탓하는 것은 아니었다. 탓할 것이 있다면, 그녀의 말대로 이 상황밖에 없었다. 이런 몸이 되고 나서야 그런 것을 깨닫다니. 아키라는 자신의 아둔함에 속으로 혀를 찼다. 그러나 그녀는 동시에 그렇게 생각해 봤자 아무 소용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키라는 자신의 과오를 돌아보는 것보다 그것을 바탕으로 앞으로 나아가는데 훨씬 능한 사람이었다.

낙원은 만들어 가면 되는 거야. 그러기 위해 이렇게 싸우고 있는 거잖아.”

그렇네요.”

히나미의 목소리는 조금 가벼워져 있었다. 아키라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구울의 기분이 나아진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니. 이전의 자신이라면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이전의 자신은 이미 사라져버린 존재라는 걸 잘 알고 있기에 아키라는 더는 그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다. 대신에 그녀는 히나미의 말에 집중했다.

우리들의 낙원은 어떤 모습일까요.”

그건 나도 모르지.”

그 말을 듣고 히나미가 무슨 말을 하려 하기 전에 아키라는 하지만, 하고 먼저 운을 떼었다. 무어라 말을 하려던 히나미는 다시 아키라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단정한 옆모습이 어둠 속에서도 뚜렷하게 보였다.

하지만, 지금보다는 훨씬 좋은 세상일 거야.”

그렇겠죠.”

믿음을 가져. 너희들이 하는 건 옳은 일이다.”

너희가 아니라, 우리예요.”

히나미의 말에 아키라는 한숨을 쉬듯 웃었다.

그렇군. 우리, .”

아키라는 그 말을 음미하듯 말을 되뇌었다. 그러곤 그녀는 소리 없이 웃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은 여전히 어두웠다. 하지만 어둠 속에서도 그들은 살아가고 있었다. 그것이면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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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원 이메레스

 

 

"힘들면 도망칠 수도 있어"

 

Y A G I

 

 

죽음 이후에도 그는 떠돌고 있었다. 아리마 키쇼는 어쩐지 낯선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아리마는 그 낯섦을 생각했다. 아마 자신의 뒷모습을 볼 일이 거의 없어서 그렇게 느끼는 것 같았다. 특히 자신의 젊은 시절의 뒷모습을 보게 되었으니 그런 낯섦을 느끼는 것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아리마는 조용히 푸른 머리의 소년을 따라갔다. 아리마의 기척을 느꼈음이 분명한데도 소년은 뒤돌아 아리마를 보지 않았다. 한동안 두 사람은 그저 같은 길을 걸었다. 아리마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익숙한 거리였다. 여태껏 자신이 구축했던 수많은 구울 중 하나를 발견하게 되는 거리였다.

그러니까 곧 이 거리에는 죽음의 색이 넘쳐흐를 것이라는 말이었다.

소년은 소년이 겪었던 수많은 죽음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마치 그것이 자신을 구성하는 가장 큰 무언가라도 된다는 것처럼. 아리마가 보기에 그는 죽음에 집착하고 있었다. 애증이라는 표현이 더욱 적절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다른 생명을 빼앗는 것으로 자신의 존재가치가 인정된다는 것은 그런 것이었다.

아리마가 그 무게를 모를 리는 없었다. 아리마는 그러기 위해 태어나고 길러진 존재였다. 아리마는 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어째서 죽은 뒤에도 이런 것을 보아야만 하는가. 아리마는 신을 믿지는 않았지만 이 상황에 어떤 이유가 있을 거라는 생각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이런 일을 꾸민다면 신이 아니라 악마겠지. 아리마는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어쨌든, 아리마는 이 상황을 끝내고 이제는 그만 쉬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아리마, 하고 소년을, 자신을 불렀다.

소년은 고개를 돌려 아리마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익히 알고 있는 황폐한 눈동자가 아리마를 향했다. 아리마는 저보다 한참 작은 소년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소년은 아리마를 올려다보았다.

힘들면 쉬어도 괜찮아.”

힘들지 않아.”

힘들다는 거, 알고 있어.”

나도 겪은 일이니까. 아리마는 그 말은 삼켰다. 소년의 시선과 아리마의 시선이 맞닿았다. 비슷하면서도 다른 시선이었다. 그 다름이 어디에서 오는지, 아리마는 잘 알고 있었다.

도망쳐서 도착한 곳에 낙원은 없어.”

소년은 씹어내듯 말을 뱉었다. 낙원이라. 아리마는 쓰게 웃었다. 과거의 자신은 언젠가 낙원 따위를 믿은 적이 있었던가. 아리마는 숨을 내쉬었다. 그는 소년을 부드럽게 안았다.

힘들면 도망쳐도 괜찮아.”

어차피 우리 앞에 낙원 같은 건 없으니까. 아리마의 말에 소년은 눈물을 쏟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래. 이래야 아리마 키쇼지. 아리마는 생각보다 훨씬 더 작은 소년의 몸을 조금 더 꽉 껴안았다.

아리마를 빤히 바라보고 있던 소년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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