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Y A G I

 

 

   고백하자면 그는 꽤 오랜 기간 동안 내게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단순히 어디에 감정 이입을 하는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었지만. 그 기간 동안 나는 일부러 그를 읽지 않으려고 애썼다. 빤히 보이는 그의 감정도 나는 그저 그렇구나, 하고 마음을 멀리 두고 바라보았다.

   아마 지금 주제로 쓰고 있는 드림 커플인 아리치카가 없었으면 나는 아직도 그때와 비슷하게 그를 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는 또 다른 이유로 더는 그가 나오는 장면을 보지 못하는 인간이 되었다.

   수많은 창작물에서 지금까지 내가 좋아했던 인물들은 모두 죽었다. 어쩌면 내가 수없이 죽음을 바라보는 사람이었기에 나와 닮은 인물들을 그렇게 집요하게 좋아했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스무 살을 넘기기 전에 나는 이미 내가 사랑했던 그들의 죽음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인간이 되어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사랑하는 그들이 죽지 않으면 도리어 미묘한 감정에 휩싸이곤 했다.

   마치 내가 손대지 않아야 할 것에 손을 대어버리고 만 것만 같은 느낌.

   그런 의미에서 내가 지금 말을 꺼내는 장르는 참으로 편했다. 항상 죽음이 존재하는 서사. 내가 좋아하는 이들이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그 불안한 상황에서 오는 이상한 편안함. 그러니까 나는 지금 그의 죽음을 아주 편하게 받아들였다는 말을 하고 있는 중이다. 이런 말을 하면 누군가는 나를 싫어하게 될까. 그렇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리치카를 접한 이후 나는 어떻게 되었는가. 물론 그 장면을 떠올릴 때 눈물샘이 차오르거나 하는 일은 없다. 애초에 나는 내가 사랑하는 존재가 죽을 때도 고작 눈물 몇 방울을 흘리다 다시 그를 사랑하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러나 그의 죽음은, 지금까지 내가 겪어왔던 죽음과는 뭔가 달랐다. 눈물도, 슬픔도 그다지 크지 않은 죽음이지만 그의 죽음은 내 안에서 너무 커다란 이미지로 남아버렸다.

이미지. 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다. 이유도 없이 내 안으로 들어와 나를 구성하고 있는 다른 수많은 이미지처럼 그의 죽음도, 그의 감상도, 그냥 그렇게 되어버렸다. 어쩌면 지금까지 몇 편의 아리치카를 쓰면서 너무 그들의 관계에 집중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나는 더 이상 그를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으며 아직까지 그의 죽음에 눈물을 흘리지는 못해도 심장 어딘가가 따끔거리는 느낌을 받는 인간이 되었다.

그리고 여기서 끝이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언젠가 얘기한 적이 있는 것처럼, 그가 어떤 이유로든 되살아나 다시 고통받는 일은 없었으면 하는 바람. 그저 내가 사랑하는 그 드림의 이야기에서만, 행복해지거나 슬퍼지거나 하는 하나의 인간으로 그가 존재하기를 바란다.

 

-

묘사노트가 아니라 수기가 되어버렸지만 으음

'SHORT-CAKE > 묘사노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름 없음  (0) 2018.01.21
파아란  (0) 2018.01.20
이를 닦는 것에 관한 이야기  (0) 2018.01.17
무리생활  (0) 2017.08.04
데빌 드롭(Devil Drop)  (0) 2017.07.30

 

이를 닦는 것에 관한 이야기

 

Y A G I

 

 

뭐가 잘못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중요한 것은 내가 아주 어릴 때부터 뱉어왔던 수많은 양치 거품 속의 핏물을 합하면 지금의 나를 두 명쯤은 구성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나는 퉤, 소리를 내며 입안에 남아있는 아주 작은 거품을 뱉었다. 그 작은 거품에도 선명한 핏물이 들어있었다. 나는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게 양치 컵에 따뜻한 물을 담았고, 오늘도 물이 너무 뜨겁다고 생각하며 입을 헹궜다. 뱉어낸 물에 거품이 섞여 조금씩 자신의 흔적을 잃어가고 있었고 나는 그것이 제법 마음에 들어 일부러 거품을 조준해 물을 뱉었다.

물이 아주 천천히 빠지는 세면대에는 여전히 물이 고여 있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컵에 따뜻한 물을 받았다. 이번 물도 뜨거웠다. 물의 온도를 맞추는 것은 내가 항상 어려워하는 일이었기에 나는 그다지 개의치 않고 마지막으로 입을 헹궜다.

계면활성제의 껄끄러운 맛을 느끼며 나는 입맛을 다셨다. 양치를 하고 나면 입이 바싹 말랐다. 다들 그러는지, 아니면 나만 그러는지는 아직도 모르는 일이었다. 나에겐 양치를 하고 나서 목이 마르냐는 질문을 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나의 친구들이 말하는 것들은 아주 아름답거나 아주 추악하거나 하는 이야기였다. 나는 그 사이에서 고작 이를 닦는 행위에 대해 이야기를 하기가 껄끄러워서, 그저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오늘 나는 또 일정 분량의 피를 뱉어냈다는 점이었다. 나는 아주 조금씩, 조금씩 이 세상에서 사라져가고 있는 느낌을 받았다. 내가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분열하고 살아가는 세포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었지만 나는 그들이 얼른 그들의 활동을 그만두기를 바랐다.

그렇게 죽고 싶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또 그렇게 살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그냥, 그런 삶이었다.

, 그래서 이를 닦는 이야기.

이를 닦을 때는 원을 그리듯 닦아야 한다. 어금니의 안쪽까지 닦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혀를 닦을 때는 마찬가지로 원을 그리듯 닦는 것이 좋고, 가끔씩 헛구역질이 나면 나약한 자신을 탓하며 눈물을 닮은 침을 뱉어내면 끝난다. 모든 것이 그렇듯 닦는 것보다 헹구는 것이 중요했고 입안 곳곳에 남은 치약의 흔적을 뱉어내며 동시에 우리는 우리의 삶을 뱉어내야 한다. 우리의 피와 살과 머릿속을 채우는 생각들은 그렇게 하수구로 빨려 들어가 우리를 오늘도 살아지게 한다.

고작 양치를 한 것만으로 앞이 축축해진 목이 늘어난 티셔츠는 가만히 두면 건조한 겨울의 공기에 빠싹 마르기 마련이었다. 마지막으로 건조해진 입안에 생수를 채운다. 들이키지 않고 입에 물고 있는 것이 포인트이다. 한동안 입에 머금고 있던 물을 삼키면 오늘도 죽지 않고 살아있는 자신이, 거울도 아닌 어두운 창밖의 풍경에 겹쳐 보인다. 그러면 나는 하얗고 단정한 치아를 보이며, 그곳에 있는 나에게 웃어 보인다.

이렇게 생각보다 복잡한 이를 닦는 행위가 매일 밤 시작되고 매일 밤 끝난다.

 

 

'SHORT-CAKE > 묘사노트' 카테고리의 다른 글

파아란  (0) 2018.01.20
.  (0) 2018.01.18
무리생활  (0) 2017.08.04
데빌 드롭(Devil Drop)  (0) 2017.07.30
누가바  (0) 2017.07.27

#산다이바나시_ 빈 병/허리/늑대

 

 

무리생활

 

Y A G I

 

 

  대한민국에서 늑대는 멸종된 것이 아니었던가.

  문을 열었을 때 버티고 서 있던 붉은 털의 늑대를 보았을 때, 나는 딱 죽겠구나 싶어 눈을 질끈 감았다. 21세기 서울. 아무리 변두리라고는 하지만 늑대에게 잡아먹힐 거라고 생각한 사람이 그 누가 있겠는가. 심지어 우리 집 근처에는 동물원 따위도 없는데. 늑대에게 산채로 씹혀먹는 감각은 어떨까. 나는 제발 늑대에게도 연민 따위가 있어서 내 목을 한 번에 부러트려 아픔 없이 죽음으로 인도해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늑대는 고고한 발걸음으로 나를 지나쳐 방 안으로 들어갈 뿐이었다. 나는 실눈을 떠 늑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늑대의 기다란 꼬리가 방바닥을 설설 쓸었다. 나는 천천히 현관문을 닫았다.

  그렇게 해서 늑대와 나의 동거가 시작되었다.

 

  늑대는 개과던가. 내가 늑대에 대해서 아는 것이라곤 <주토피아>라는 영화에서 멍청하게 나왔다는 것, 정도? 누구 하나가 아우우우, 하고 울면 다 같이 아우우우, 하고 울어야하는 그런 종족이었다는 것 정도. 나는 늑대를 보고 아우우우, 하고 울어보았지만 늑대는 하품만 쩍 하고 말 뿐이었다. 실로 무심한 늑대였다.

  TV도 없는 집이어서, 나는 휴대전화로 인터넷 기사를 뒤져봤지만 어떤 신문사에서도 늑대에 관한 이야기는 없었다. 공병 수거 비용이 작년보다 조금 더 비싸졌다는 기사만 몇 개인가 발견했을 뿐이었다. 쓰레기의 가치는 점점 올라가는데 내 가치는 아직도 제자리라는 사실만을 깨달은 나는 전원 버튼을 눌러 휴대전화의 액정을 꺼버렸다.

  “너는 이름이 뭐니.”

  늑대가 답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별로 답을 기다리는 것도 아니면서, 나는 늑대에게 계속 말을 걸었다.

  “어쩌다 여기까지 흘러들어왔니.”

  늑대는 또 하품을 쩍, 했다. 나는 방 한 켠에 마치 소파처럼 자리하고 있는 늑대의 머리를 쓰다듬어보았다. 막 따뜻함이 느껴져서 생명의 소중함이 차오르고 어쩌고, 그런 느낌은 별로 들지 않았다. 그저 푸석한 늑대의 털이 손바닥을 간질였을 뿐이었다. 늑대의 고요한 노란색 눈동자가 나를 응시했다.

  영화였다면 저 눈동자에서 어떤 자연적인 메시지를 읽어 종족을 넘은 우정을 보여줄 수 있었을 텐데 말이지. 유감스럽게도 나는 영화의 인물은 아니었다. 에이, 그럼 할 수 있는 게 없잖아. 나는 그냥 늑대의 허리에 냅다 머리를 대고 누워버렸다. 따뜻하고도 물렁한 감촉이었고, 늑대가 숨을 쉬는 소리가 묘하게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늑대도 무리를 지어 살아가는 생물이라지. 이 녀석은 어쩌다 그 무리에서 떨어져, 여기까지 흘러들어오게 된 걸까. 그러고 보면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나도. 나는 어쩌다 무리에서 떨어져 이 허름한 단칸방에 일생을 맡기고 있을까.

  내일은 근처 슈퍼에 공병이나 팔러 가야겠다.

  “, 스팸 먹을래?”

  하웅, 하고 늑대가 둥근 소리를 냈다. 나는 그것을 OK 싸인으로 받아들여 몸을 일으켰다. 스팸 귀한 건데. 아니다, 오늘 첫 날이니까. 이 정도는 해도 괜찮지, . 나는 스팸을 우리 집에서 가장 큰 대접에 넣어 늑대 쪽으로 밀었다. 짠맛도 모르는 늑대는 찹찹, 하는 소리까지 내며 게걸스럽게 스팸을 먹었다.

  나는 그런 녀석의 허리를 다시 베고 누웠다. 어쨌든, 당분간은 이렇게 둘이서 함께 지내야할 것 같았다.

 

 

'SHORT-CAKE > 묘사노트' 카테고리의 다른 글

.  (0) 2018.01.18
이를 닦는 것에 관한 이야기  (0) 2018.01.17
데빌 드롭(Devil Drop)  (0) 2017.07.30
누가바  (0) 2017.07.27
YOMI 1 (*)  (0) 2017.01.30

#산다이바나시_ 그림자 / 폭우 / 애드벌룬

 

 

데빌 드롭

 Devil Drop

 

Y A G I

 

  악마의 아이를 만난 것은, 그러니까 우리나라가 이상 기후로 인해 끝없이 폭우가 쏟아지게 된지 채 몇 년이 되지 않았던 때였다. 나는 검은색 장우산을 쓰고 있었다. 쏟아지는 비가 바지 끝단을 차게 적셨다. 후두두두, 하고 우산에 빗방울들이 몸을 부딪치며 죽어갔다.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져 올 때였다. 화이트 크리스마스란 것이 이제는 재미없는 농담처럼 변했기 때문에 12월이 다가와도 날씨가 그렇게 싸늘해지지는 않았다. 그저 떨어지는 빗방울이 마치 눈처럼 시렸다. 바뀐 것이라곤 그 뿐이었다.

  눈도 내리지 않는 나라에서는 여전히 흰 눈 사이로, 썰매를 타고, 하는 캐롤이 울렸다. 나는 동네 교회에 바로 붙어있는 골목을 걷고 있었다. 거대한 크리스마스트리가 빗속에서 은은한 불빛을 뿜어대고 있었다.

  어디선가 번개가 내리쳤다. 이제 천둥번개를 무서워하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나는 무심히 골목의 끝을 바라보았다. 그래. 생각해 보면 그날은 이상하게도 번개가 많이 쳤다. 마치 무언가를 암시하는 것처럼. 하지만 그걸 깨닫기엔 나는 너무 둔했다.

  번개가 칠 때마다 교회의 그림자가 골목 쪽으로 길게 드리워졌다. 골목의 끝이 교회 십자가 끝과 맞닿아 있었다. 그리고 그 아이는, 십자가의 끝에 몸을 웅크리고 앉아있었다. 세상에서 자신의 존재를 지워버리고 싶다는 듯이. 그렇게.

  눈치 없는 나는 아이에게 우산을 드리웠다. 왼쪽 어깨가 아프게 젖었다.

  “저리가.”

  아이가 웅얼거렸다. 이때 아이의 목소리가 끔찍하게 거칠었다면 나는 이대로 도망갔을까. 하지만 아이의 목소리는 푹 젖어있었다. 그리고 나는 아직 약간의 선민의식이 남아있는 사람이었다.

  “비오는 데 뭐하고 있어.”

  “후회할 거야.”

  아이가 나를 물끄러미 올려다봤다. 불길할 만큼 샛노란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나를 향했다. 그것 말고는, 그냥 평범한 아이였다. 단지 눈빛이 불길하고 어딘가 어두운 다섯 살 쯤 되어 보이는 아이.

  번개가 한 번 더 지상에 내리꽂혔다. 어딘가의 교회에서 띄워놓았던 주 예수의 탄생 어쩌고 하는 문구가 적혀있던 빨간 애드벌룬이 번개에 맞아 강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매캐한 냄새가 나는 것만 같았다. 나는 고개를 쭉 뻗어 그쪽을 바라보았지만 더 볼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아이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체구에 비해 긴 팔이 힘없이 흐느적거렸다.

  “나는 세계를 멸망시킬 거야.”

  “네가 없어도 세계는 멸망할 거야.”

  눈앞의 아이가 악마의 아이였다는 것을 알았을 때도 나는 이렇게 답했을까. 아이의 눈동자에서 다시 굵은 눈물이 방울져 흘렀다. 나는 말없이 아이의 머리를 꾹 눌렀다. 우는 아이를 요령 있게 달래는 방법 같은 것은 몰랐다.

  지속되는 폭우로 인해 지대가 낮은 곳은 물밑으로 가라앉은 지 오래였다. 지대가 높은 곳이라고 크게 상황이 좋지는 않았다. 인간들은 그저 세상이 침수되어 가는 것을 힘없이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고, 이 작은 악마도 그러했다.

  “가자.”

  우리는 둘 다 의지할 곳이 없는 사람, 아니. 사람 하나와 악마 하나였다. 아이는 여전히 눈물이 그치지 않은 얼굴을 끄덕이곤 내 손을 잡았다. 비에 젖은 손은 차갑고, 작았다.

 

-

 

어지간히 흥미가 안 동하는 주제였다....

'SHORT-CAKE > 묘사노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를 닦는 것에 관한 이야기  (0) 2018.01.17
무리생활  (0) 2017.08.04
누가바  (0) 2017.07.27
YOMI 1 (*)  (0) 2017.01.30
무화과  (0) 2017.01.19

#소프트 BL  #산다이바나시_ 종이비누/지팡이/슬그머니

 

 

누가바

 

 

  “꽃은 시들 때 추해져서 싫어해.”

  내 후배였던 녀석이 했던 말이었다. 삼월인데 아직 바람이 쌀쌀했다. 신입생 입학식을 하루인가 이틀인가밖에 남겨두지 않았던 때였다. 그때 우리는 동복을 입고 교정의 벤치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빨고 있었다. 그 녀석은 항상 누가바를 먹었다. 녀석의 황갈색 손가락을 타고 누가바가 진득하게 흘렀던 것을, 녀석은 항상 눈을 지그시 감고 혀끝으로 그것을 핥아 먹었던 것을 기억한다.

  “목련은 그렇지. 누렇게 변해가지고.”

  “목련 말고, .”

  옆에서 쪽, 하고 그가 흐르는 누가바를 빨아먹는 소리가 들렸다. 쟤는 왜 꼭 누가바를 먹어서 저렇게 고생한담. 그때 나는 무슨 아이스크림을 먹었나. 하도 여러 종류의 아이스크림을 즐겨서 아무리 생각해도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그 녀석이 그때도 누가바를 먹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꼭 누가바를.

  “나는 그래서 꽃이 싫어.”

  “누가 물어봤냐.”

  “됐고, 다 먹었으면 일어나자.”

  그가 먼저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다. 겨울의 날카로운 햇살에 그의 끈적한 손등이 닿았다. 나는 그의 지팡이를 그에게 건넸다. 땡큐, 그의 간결한 인사였다. 그는 절뚝거리며 두어 발 앞서 나가 굳이 나를 돌아보았다.

  그의 왼쪽 다리가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몰랐다. 녀석의 다리는 우리가 동아리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랬고, 그래서 나는 그 이유를 굳이 묻지 않았다. 나는 그저 입학식 때부터 소문이 파다하게 돌던 녀석이 저 녀석이구나, 하고 말을 뿐이었다.

  끈적하고 검은 젤리 비슷한 것들이 덕지덕지 붙어있는 쓰레기통에 우리는 아이스크림 쓰레기를 버렸다. 춥다. 녀석이 중얼거리듯 뱉은 말이었다. 점심시간도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그때 녀석은 꽃이 어쩌고 하는 얘기 따위를 하고자 했던 것이 아니었을지도 몰랐다. 거기서 그가 하고 싶었던 얘기는 많았겠지. 나 전학 가. 이제 우리 못 봐. 졸업 축하해주지 못해서 미안해.

  그것도 아니라면. , 선배 좋아했는데.

  녀석이 내게 인사를 건네지 않은 것을, 나는 서운해했던가? 서운할 겨를도 없었다는 것이 맞는 말 같았다. 나는 그 사실을 꽤 늦게 알았다. 녀석의 전학은 내게, ‘걔 전학 갔다며?’로 전해졌다. 그것도 나한테 직접 전해오는 말이 아니라, 사람들의 대화 속에 둥둥 떠다니던 말로.

  나는 우리가 항상 만나던 그 벤치로 달려갔다. 거기 가면, 녀석이 평소처럼 누가바를 먹으며 있을 것만 같았다.

 

  “선배.”

  “학교 졸업한지 얼마나 됐는데, 선배는 무슨 선배야. 형이라고 불러.”

  “.”

  녀석은 여전히 지팡이를 짚고 다니고 있었다. 녀석이 키가 큼에 따라 녀석의 지팡이도 자란 것 같았다. 녀석은 길어진 지팡이를 빼면 예전과 별 다를 게 없어보였다. 사람이 어쩜 저렇게 안 늙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이 년인지 삼 년인지 하는 시간이 지났는데도 녀석의 얼굴은 그대로였다.

  두 사람이 만난 것은 자취방 근처 편의점 앞이었다. 이렇게 좁은 동네에서 이제야 만난 것도 놀라운 일이었다. 그 날은 딱 열대야가 시작되는 밤이었다. 끈적한 습기와 열기가 온몸에 달라붙어서 지긋지긋해지기 시작할 때, 그가 먼저 나를 불렀다.

  편의점 외부 테이블은 나무로 되어 있었다. 나무는 잠깐 서늘했다가 우리의 체온 때문에 금새 뜨거워졌다. 녀석과 나는 바로 옆에 앉아 테이블에 등을 기댔다. 녀석의 취향은 바뀌지도 않았는지, 또 누가바였다.

  그의 손이 다른 아이스크림으로 향하다가 누가바로 향하는 것을, 나는 봤으면서도 못 본척했다. 나는 그때, 빠삐코였다.

  “, 전학갈 때 나한테 미리 말해주지 그랬냐.”

  “미안해. 말하려고 했는데, 힘들어서.”

  녀석의 따뜻한 입술 아래서 누가가 녹아 흘러내렸다.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각자의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할 말은 많았는데, 어떤 말부터 시작해야할지 몰랐다. 하여간 예전부터 둘 다 말주변은 별로 없었다.

  침묵을 먼저 깬 것은 녀석 쪽이었다.

  “, 그거 알아?”

  “?”

  “나 누가바 별로 안 좋아하는 거.”

  “너 맨날 누가바만 먹었잖아.”

  “형 앞에서만 그랬지. 누가바, 되게 잘 녹잖아.”

  그가 그 말을 하는 도중에도 누가바는 녹고 있었다. 초콜릿색 누가와 바닐라 아이스크림이 섞여 그의 손가락과 손등을 타고 흘렀다. 그는 예전처럼 고개를 가볍게 기울이곤 혀를 뻗어 그것을 핥아 먹으려 했다. 간간이 쪽, 소리를 내면서.

  나는 그의 손을 잡아 내쪽으로 가볍게 끌어당겼다. 녹은 누가바가 의자에 뚝, 떨어졌다.

  “그거 알아? , 너가 준 종이꽃 아직 안 버렸다. 우리가 맨날 아이스크림 먹던 벤치에 네가 두고 갔던 거 말야.”

  녀석은 대답 없이 물끄러미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거, 시들지는 않는데 녹아버리더라. 졸업식도 아닌데 비누꽃 같은 건 어디서 구해서.”

  “.”

  “그래도 시드는데 추하진 않더라.”

  녀석의 손은 의외로 차가웠다. 한여름인데도 불구하고 그랬다. 나는 혀를 뻗어 그의 손에 묻은 아이스크림을 핥았다. 끔찍할 정도로 달았고, 조금 짰다.

'SHORT-CAKE > 묘사노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무리생활  (0) 2017.08.04
데빌 드롭(Devil Drop)  (0) 2017.07.30
YOMI 1 (*)  (0) 2017.01.30
무화과  (0) 2017.01.19
  (0) 2017.01.05

#학대소재 #수인물

 

 

YOMI 1

  

 

   눈은 차갑다. 새삼스레 그것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 있다. 몸을 웅크리고 앉아 발을 꼬리로 덮으면 어떻게든 버틸 만은 했다. 눈이 참 많이 오는 동네라고, 집 뒤뜰에서 맨몸으로 눈을 맞으며 생각했다. 아버지가 없는 존재라고 여기면 마음이 편했다. 사실 그것과 그렇게 다른 관계는 또 아니었다. 아버지라기보다는 주인님에 가까운 관계였고 나는 그저, 멍멍, 짖기만 하면 될 뿐이었다.

   ‘애완동물이라는 건 어쩌면 하나의 완구처럼 다루어지는 것이 숙명일지도 몰랐다. 무척 아껴 품에 끼고 있는 완구든 멋대로 먼지 구덩이에 뒹구는 완구든 그것이 주인과 동등하지 않다는 사실은 똑같았다. 같이 산다기보다는 길러진다는 것에 더 가까운 관계였고 길러진다는 것은, 무언가 채무 관계가 존재하는 관계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애완동물은 애교를 떨거나 얻어맞거나 해서 그 채무를 갚는 것이라고, 아버지는 말했다.

   나는 그것을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부정해서 내게 좋을 것은 딱히 없었다.

   이름이라는 것은 단지 새로운 닉네임을 다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이름이라는 것은 새로운 페르소나일 뿐이며 그런 이름을 다른 사람에게 부여받아야한다는 것은, 나는 어쨌든 종속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이겠지. 내가 수행해야할 역할은 유우(有宇)’라는 존재였다. 내게 부여된 새로운 페르소나는 귀엽고, 싹싹하고, 눈치도 제법 빨라야하는, 애완동물이었다.

   “들어와라.”

   “네에.”

   유리문이 날선 소리를 내며 열렸다. 아버지는 문만 열어두고 몸을 돌려 사라졌다. 들어가기 전에 털에 붙은 눈은 깔끔히 털고 들어가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또 맨몸으로 눈발에 나가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냥 그렇게 해야 해서 그렇게 했다. 이제야 발이 시렸구나, 하는 걸 알 수 있었다. 아마 곧 따끔따끔 간지러워지겠지. 나는 그것을 더 참기 힘들어했다. 벌겋게 달아오른 발을 긁을 수 없었다. 긁으면 또 짐승 같은 짓을 한다고 혼만 날 것이었다. 나는 자신이 인간보단 짐승에 가까운 동물이 아닌지, 생각했다.

   “내일 놀러나간다고 그랬지?”

   “. 친한 친구 만나려구요.”

   “그래, 잘 다녀와라.”

   아버지는 손수 옷을 입혀주셨다. 언 발을 데워놓은 수건으로 덥혀주시는 것도 잊지 않았다. 가만히 아버지의 손길을 따르고 나면 아버지는 꼭 머리를 쓰다듬어주셨다. 잘했다는 거다. 무엇을 칭찬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SHORT-CAKE > 묘사노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데빌 드롭(Devil Drop)  (0) 2017.07.30
누가바  (0) 2017.07.27
무화과  (0) 2017.01.19
  (0) 2017.01.05
BONDAGE (19)  (0) 2017.01.02

 

 

무화과

 

 

   집 앞마당에서 무화과나무를 기른다는 것을 처음 알았을 때, 여자는 당혹감을 숨길 수 없었다. 여자는 어렸을 때 아몬드나무를 기르고 싶어했던 사람이었다. 고흐의 아몬드나무 그림을 좋아했으며, 당시 즐겨 읽던 소설에서 아몬드나무의 향기라는 구절이 자주 등장했기 때문이었다. 아몬드나무란 여자에게 이국의 로망과 같은 것이었다. 뽀얀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분수대에서 나온 물이 포말로 변하고, 그 앞에서 기타로 잔잔한 음악을 연주하는 컬이 굵은 곱슬머리를 가진 남자가 존재할 세계 어딘가의 풍경을 상상하는 것이었다. 여자가 그 로망을 접어둔 것은 고등학교에 진학한 이후였다. 여자는 여전히 고흐의 아몬드나무 그림을 좋아했다. 하지만 여자는 아몬드를 포함한 견과류를 싫어하는 사람이 되었고, 아몬드나무의 향기를 이제는 궁금해 하지 않았다. 그런 여자가 무화과나무라는, 다소 뜬금없는 생물이 제 집의 앞마당에 심어진 것을 알게 된 것이었다.

   웬 무화과에요?

   여자가 무화과에 대해서 아는 것은, 무화과나무가 어쩌고저쩌고 하는 죄를 저질러서 꽃을 안쪽에서만 피우게 되었다는 이야기였던가. 여자는 어머니와의 통화를 이어가며 그 이야기를 잠깐 떠올렸다. 꽃도 없는 과일이라는 거지. 아주 어린 시절의 여자는 그 이야기가 로맨틱하다고 생각하기도 했던 것을 기억했다.

   무화과요? 아니당연히 먹어본 적 없죠.

   꽃의 맛은 떫다. 여자는 숱한 경험으로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담 무화과는 떫은맛인가. 여자는 스마트폰으로 무화과에 대해 검색해보려 하다가 바로 그 스마트폰으로 어머니와 전화를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네? 보내준다면 먹어야죠.

   여자는 떫은맛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불안함이 여자를 가볍게 흔들고 지나갔다. 여자의 어머니는 손이 큰 사람이었다. 본가에는 무화과나무가 과연 몇 그루나 있을까? 키워다 팔만큼의 수많은 나무들이 존재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여자의 집 앞마당은 여자가 아는 것보다 더 몸집을 부풀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여자의 어머니는 손이 큰 사람이었으니까. 여자는 단 한 그루였던 이름도 모르는 백합과의 꽃나무가 단 몇 년 만에 열두 그루로 불어난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 나무들은 현관의 왼쪽 오른쪽에 각각 여섯 그루씩 늘어서게 되었다. 현관을 들락거릴 때마다 맡았던 그 숨 막히는 향기를 여자는 잊을 수 없었다. 여자는 이제, 무화과는 꽃이 피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믿을 수밖에 없었다.

 

 

'SHORT-CAKE > 묘사노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누가바  (0) 2017.07.27
YOMI 1 (*)  (0) 2017.01.30
  (0) 2017.01.05
BONDAGE (19)  (0) 2017.01.02
버블  (0) 2016.12.31

 

 

 

   사람들의 손때만큼 안개가 묻어있었다. 세상이 이상하게 조용했다. 나는 일부러 차도의 한 가운데로 걸었다. 그러면 곧 뒤에서 커다랗고 흰 트럭이 요란하게 경적을 울릴 것만 같았다. 그럼 나는 안심하고 죄송합니다, 하며 길가로 비켜서면 되는 것이었다.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습기가 가득한 바람이 불었고 키가 큰 국화의 줄기를 흐트러트려 놓았다.

   낡은 마트는 주황색과 노란색의 딱 중간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마트 앞의 작은 아스팔트 마당엔 낡은 가전제품들이 늘어서 있었다. 중고가전제품특가판매. 하지만 카키색 먼지가 내려앉은 텔레비전은 아무리 봐도 쓸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구형 냉장고는 심지어 냉동실의 칸이 반쯤 열려있었다. 텅 빈 냉동실에 손을 넣어보았다. 당연히 냉기는 하나도 없었다.

   고개를 돌려 마트의 유리문을 바라보았다. 할머니가 자주색 조끼를 입고 카운터에 서 있었다. 손님은 하나도 없어보였다. 냉기를 맞으며 시들어가는 야채칸의 풀뿌리들을 떠올리며 몸을 돌렸다.

   멸망이란 것은 이런 것이 아닐까. 세상의 모든 가치가 지워지고 먼지만 내려앉게 되는 것이 아닐까. 나는 발을 잠시 멈추었다가 곧 뛰기 시작했다. 지금이 너무 무서웠고 얼른 세상의 소리로 다시 둘러싸이고 싶었다. 자동차의 매연소리가, 담배를 피우는 사람의 가래 뱉는 소리마저 그리울 지경이었다.

 

 

 

 

'SHORT-CAKE > 묘사노트' 카테고리의 다른 글

YOMI 1 (*)  (0) 2017.01.30
무화과  (0) 2017.01.19
BONDAGE (19)  (0) 2017.01.02
버블  (0) 2016.12.31
나비  (0) 2016.12.29

 

 

 

버블

  

 

   나는 왜 모텔에서 주는 입욕제 따위에 배신감을 느끼고 있을까. 나는 생각보다 큰 욕조에 앉아서도 무릎을 껴안고 있었다. 커플들을 위해 디자인 되었을 욕조는 너무 낯설었다. 내가 생각했던 것은 외국 영화에서 나오는 작은 방에 딸린 아주 자그마한 욕조였는데. 뜨거운 물이 차게 식은 발에 닿아서 발끝이 따끔거렸다. 욕조 바로 옆에 있는 흰 변기는 냉기를 뿜어내고 있는 것 같았다.

   태어나서 거품 목욕을 해본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입욕제라는 단어조차 낯선 때, 나는 처음으로 모텔에 갔고 처음으로 관계를 가졌으며 처음으로 입욕제가 들어있는 포장지를 만져보았다. 일반실엔 욕조가 없었다. 특실을 가려면 만 원을 추가해야만 했다. 특실에는 욕조가 있었고 데스크톱이 두 대에 티비는 조금 더 큰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목욕 가운. 내가 접해 본 목욕 가운은 아주 어렸을 때 수건 한 장을 몸에 둘러 그것을 흉내 낸 것밖에 없었다.

   난생 처음 써본 입욕제는 색이 예쁘지도 않았고, 장미 꽃잎은커녕 장미 냄새도 나지 않았다. 몇 번 부풀어 오르다 꺼져버린 거품은 뜨거운 물에 녹아 없어진지 오래였다. 결국엔 그냥 뜨거운 물이 남았다. 그것도 빠르게 식어가는 뜨거운 물.

   나는 배수구 마개를 열었다. 그리고 뜨거운 물을 다시 틀었다. 배수구에 모든 물이 빨려 들어갈 때까지 욕조에 앉아 있으려 했다. 거품이란 것은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며, 조용히 물소리만 들었다. 목욕을 하고 나면 아이스크림을 먹을 것이다. 편의점에서 사온 투게더 아이스크림을 혼자서 퍼먹으면서 오늘 밤을 보내야지. 무료 브이오디 영화를 틀어놓고 보지도 않아야지. 나는 그렇게 밤을 새고 나면 모든 것이 리셋되길 바랐다.

'SHORT-CAKE > 묘사노트' 카테고리의 다른 글

YOMI 1 (*)  (0) 2017.01.30
무화과  (0) 2017.01.19
  (0) 2017.01.05
BONDAGE (19)  (0) 2017.01.02
나비  (0) 2016.12.29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