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구울 전력 60분_ 교차로 #아리마/하이루, 그들이 죽고 난 이후의 이야기
쉬어가기
Y A G I
아리마 키쇼는 이곳이 사후세계란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아리마가 있는 곳은 그저 하얀 공간이었다. 아리마는 손으로 차갑고 깨끗한 바닥을 쓸어보다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위의 공기가 흐물거리며 느리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건, 안개인가. 짧은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몸을 훑어보던 아리마는 문득 쓰게 웃었다. 죽고 나서도 하얀 코트라니. 설마 수의를 이걸로 입힌 건 아니겠지. 미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무심코 매만진 목덜미가 깨끗한 것만은 다행일지도 몰랐다.
죽고 나면 개운한 기분이 들 줄 알았는데 딱히 그런 것도 아니었다. 아리마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쿠인케가 있어야만 할 것 같은 손은 웬일로 텅 비어있었다. 죽고 나서도 그 일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아리마는 그것 역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할 일도 없었고 해야 할 일도 없어서 아리마는 일단 앞으로 걸었다. 어차피 죽었는데 뭐가 무서울 게 있을까 싶어서, 아리마는 그 하얀 어둠 속을 거침없이 걸었다. 자신의 발소리가 투명하게 울리고 있었다.
아리마는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은 살면서 그다지 남겨 놓은 것이 없어서 지금 이 길도 이렇게 비어있는 모양이었다. 아래 세상에 버리고 온 원망들은 자신을 쫓아 여기까지 따라오진 않은 모양이었다.
아니면, 이곳은 그들이 만들어 낸 지옥일지도. 아리마는 아주 잠깐 그런 생각을 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을 아리마는 그저 걸었다. 자신이 들이쉬고 내쉬는 숨이, 죽은 뒤에도 숨은 쉬어야 한다는 사실이 아리마는 퍽 낯설었다. 죽은 뒤에는 아무 것도 없었으면 했는데. 아리마를 진득하게 잡고 있는 생각이었다.
시간 감각이 죽어버려 아리마는 자신이 얼마나 이 길을 걸어왔는지 알 수 없었다. 아리마는 문득 뒤를 돌아 자신이 걸어온 길을 바라보았다. 걸어갈 길과 다를 바 없는 풍경에 아리마는 순간적으로 방향 감각을 잃을 뻔 했다. 어디로 가던 다를 건 없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아리마는 앞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정돈되지 못한 숨이 턱 아래까지 차올랐다.
힘을 주어 땅을 딛을 때마다 아리마의 머릿속을 잡고 있던 생각들이 빠져나갔다. 자신이 지금까지 빼앗은 수많은 삶에 대한 생각과 남겨 놓고 온 것들의 생각들이 뒤죽박죽 엉켜 아리마의 귓바퀴를 타고 흘러내렸다. 아리마는 머리를 흔들었다.
이곳에 존재하는 건 그저 아리마 키쇼, 나 혼자 뿐이야. 아리마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아리마 주위를 감싸고 있는 풍경은 그저 하얗기만 한 공간이 아니었다. 그는 짧은 숨을 들이마셨다. 익숙한 길이었다. CCG에서 그렇게 멀리 떨어지지 않은 대로변이었다.
항상 사람이 많은 곳이었는데 지금은 아무도 찾아볼 수 없었다. 길옆의 모든 가게들은 까맣게 불이 꺼져 있었다. 아리마는 자연스럽게 CCG를 향해 걸었다. 이 길이 제 앞에 나온 이유가 있다면, CCG를 찾아 가라는 뜻이 분명했다.
죽어서까지.
아리마가 저주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운명 밖에 없었다. 아리마의 거침없는 발걸음을 잡은 것은 멀리서 누군가의 작고 가벼운 발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아리마는 교차로에서 발을 멈췄다. 이대로 쭉 앞으로 나가면 CCG 건물이 보이기 시작할 터였다. 하지만 발소리는 그의 오른쪽에서 들렸다.
아리마는 교차로의 중앙에서 자신의 정면과 오른쪽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아리마의 고민은 그렇게 오래 가지 않았다. 아리마가 마음을 정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오른편에서 아리마를 향해 다가오는 흐릿한 실루엣은 아리마의 눈에 퍽 익숙했다.
“…하이루.”
“아리마 씨는 행동력이 너무 좋아서 탈이라니까. 한참 찾았잖아요.”
아리마는 하늘하늘한 걸음걸이로 걸어온 그녀의 모습을 보며 의외라고 생각했다. 끔찍한 얼굴을 한 죽음이 아니었다니. 아리마는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하이루, 그녀는 가볍게 뒷짐을 지고는 아리마를 향해 웃어보였다. 한결같이. 아리마는 마음이 편해져 그녀를 따라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죽고 나니 이런 경험도 하는군. 그의 짧은 감상이었다.
“계속 기다렸어요. 누구 하나쯤은 마중 나오는 것도 좋을 것 같아서.”
그 말을 하며 하이루는 아주 천천히 아리마를 향해 다가갔다. 아리마는 그 자리에 멈춰 서 하이루가 가까이 다가오기만을 기다렸다.
“내가 언제 죽을 줄 알고.”
“평생 살지는 못할 거니까요. 자, 아리마 씨. 이건 선물.”
하이루가 뒷짐을 지고 있던 팔을 풀어 아리마의 머리에 무언가를 씌웠다. 옛날부터 어울릴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녀의 목소리가 얇은 날개를 가진 나비처럼 아리마의 귓가에 내려앉았다. 아리마는 제 머리 위에 얹혀 있는 것을 손끝으로 만졌다. 아주 조금 뻣뻣하면서도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화환이었다.
“이런 곳에서 꽃은 어떻게 구해서.”
“어라. 여기, 사방이 꽃인걸요.”
그녀의 말에 아리마는 퍼뜩 주위를 둘러보았다. 과연, 그녀의 말대로였다. 하얀 꽃잎이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에 날려 공기 중에 흐트러졌다. 익숙한 냄새가 났다. 백일정. 하이루는 이곳을 그리워하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갈 곳을 잃은 자신과는 다르게.
“계속 여기서 기다린 거야?”
“여기 있으면 아리마 씨가 찾아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뭐, 결국 제가 찾으러 나갔지만.”
“…그거, 미안하게 됐네.”
아리마의 사과에 하이루는 그저 맑게 웃어 보일 뿐이었다. 이럴 때는 미안하다고 하는 것보다 고맙다고 하는 게 훨씬 더 좋아요. 하이루의 말이었다. 하이루 네가 나보다 사회성이 조금 더 떨어진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리마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하이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고마워. 잘 했어.”
“어, 방금 칭찬해 준 거예요?”
하이루의 커다란 눈동자가 동그랗게 열렸다. 아리마는 멀뚱히 그녀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나, 아리마 씨한테 칭찬 받는 게 소원이었는데.”
“IXA를 갖는 게 소원인 줄 알았는데.”
“둘 다 소원이에요. 생전 칭찬 한 번 안 해주던 사람이 무슨 일이람. 역시 사람이 죽으면 성격이 갑자기 바뀐다더니, 그 말이 맞나 봐요.”
“성격이 갑자기 바뀌면 죽는다는 말이 맞는 거야.”
“그거나 그거나, 네요. 그나저나 아리마 씨. 화환 만들 줄 알아요? 모르면 제가 알려 줄까요?”
응, 하고 웃어 보이며 아리마는 하이루의 머리를 꾹 눌렀다. 이런 걸 할 여유도 지금까지는 없었으니까.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며 웃던 하이루가 아리마의 손을 잡아 당겼다.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아리마 씨를 기다리면서 연습 많이 했어요. 화환 만드는 거.”
꼭 예전으로 돌아간 것 같다고, 아리마 키쇼는 생각했다.
“아, 이제 갈 시간이 됐나 봐요.”
멀리서부터 어떤 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무거운 것이 덜컹거리면서 움직이는 소리였다. 그 소리르 들은 하이루가 가뿐하게 몸을 일으키는 것을, 아리마는 그저 바라만 볼 따름이었다. 아리마의 손끝에서 파랗게 짓이겨진 꽃대가 힘을 잃고 고개를 꺾었다. 아리마는 하이루를 따라 자신의 등 뒤를 바라보았다.
아리마의 뒤에 있는 것은 벌건 녹이 드문드문 슬어 있는 낡은 기차였다. 요즘도 이런 기차가 다니긴 하는 걸까, 하는 정도로 낡아 보이는 기차. 선로도 없이 달리는 기차 아래에서 키가 작은 꽃들이 뭉개졌다. 아리마는 그것이 묘하게 마음이 쓰였다.
“어딜 또, 가야하는 거야?”
“계속 여기에 있고 싶어요?”
하이루는 아리마에게 손을 내밀었다. 일어나라는 표시였다. 아리마는 그녀의 뜻을 읽었음에도 그녀의 손을 잡는 것을 주저했다. 여기는 평화로운데, 계속 여기 있으면 안 되는 걸까? 하이루처럼 다른 사람들을 기다리면서 줄곧 여기 있는 건.
하지만 하이루는 아리마를 더 이상 기다리지 않을 모양이었다. 그녀는 아리마의 손을 잡아 끌곤 그의 몸을 일으켰다. 만들다 만 화환이 그의 손에서 떨어졌다. 기다렸다는 듯 기차의 문이 힘겹게 열렸다.
“아리마 씨랑 기차 여행도 해보네요.”
“이건… 어디로 가는 기차지?”
“그건 저도 몰라요. 저도 처음 타는 거라.”
하이루가 먼저 기차 안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아리마도 어쩔 수 없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 모든 객석이 아직 텅 비어있는 기차는 의외로 깨끗했다. 아리마는 문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고, 하이루는 통로를 건너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옆자리에 앉지, 왜 거기에?”
“아리마 씨 얼굴 마주보면서 가고 싶어서요.”
저런 녀석이었지. 그녀의 말에 아리마는 작게 웃었다. 그 사이에 기차의 문이 닫히고 기차는 몸을 움직일 준비를 끝내고 있었다. 하이루는 마냥 신이 난 모양이었다. 아리마는 앞뒤로 천천히 발을 흔드는 그녀의 모습을 잠깐 바라보았다.
“언제는 우리가 알고 갔던가요.”
“뭐가?”
하이루는 잠시 창밖을 돌아보고 있었다. 그 탓에 그녀의 목소리가 조금 희미하게 들리는 것도 같았다.
“이 기차요.”
“응…. 그렇네.”
그래도 좋은 곳으로 가면 좋겠어요. 하이루는 다시 아리마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나긋한 목소리가 그의 발끝에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
<검과 방패의 끝>을 쓰면서 생각 했던 이야기를 이렇게 써보네요. 하이루가 꼭 아리마에게 칭찬을 받았으면 했습니다 ㅜㅡㅜ 행복하세요... 두 사람.....
'FAN-CAKE > 도쿄구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몬우타] Bittersweet (0) | 2017.10.07 |
---|---|
[우타요모] 思春期 (0) | 2017.09.25 |
[잭리아리] 첫 숨 (0) | 2017.09.19 |
[우타요모] 물그림자 아래에서 (0) | 2017.09.09 |
검과 방패의 끝 (0) | 2017.09.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