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매혹한 사람

 

 

 

  그 애의 이름은 송이었다. ‘도 아니고 하필이면 송이였다. 익숙하면서도 익숙지 않은 그 이름의 울림 때문인지, 아니면 그 뽀얀 얼굴 때문인지 그 애는 학우들에게 인기가 꽤 많았다. 반이 그 애를 중심으로 돌아가지는 않았지만, 그 애가 반을 구성하는 어느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했다. 그 애는 키가 작았고, 턱선까지 자른 단발머리를 밝은 갈색으로 염색하고 있었다. 그 애의 별명은 눈송이였다. 이름 때문인지, 하얀 얼굴 때문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초등학교 1학년, 그 애는 나의 짝이었다.

  우리는 반에서 키가 제일 작았다. 키 순서대로 번호를 매길 때 꼭 1번은 그 애였고 2번은 나였다. 그래서 우리는 짝이 될 수 있었다. 우리가 앉은 자리도 교실 책상에 번호를 붙이자면 1, 2번인 자리였다. 점심을 먹으러 급식소로 향할 때도 우리는 복도에 키 순서대로 줄을 섰다. 당연히 나는 2번이었다. 나는 내 번호가 2번이 아닌 것이 굉장히 이상하게 느껴졌다. 정 씨여서 20몇 번이었던 나. 자꾸만 1번으로 잘못 정의되던 그 애의 성씨는 기억나지 않는다.

  나를 매혹한 것은 그 애의 이름도, 얼굴도 아니었다. 등교 첫날부터 붙여진 눈송이라는 그 별명 때문이었다. 눈송이라는 단어가 주는 그 하얗고, 깨끗하고, 작으면서도 여린 이미지와 그 이미지에 어울리는 생김을 가졌다는 것이 그 애의 인상적인 점이었다. 나는 눈송이라는 그 예쁜 단어가 별명으로 아무렇지 않게 쓰일 수 있다는 것에 아주 놀랐다. 아무도 그것을 부정하지 않았다는 것 역시 그랬다. 그 애는 우리에게 송이라기보다는 눈송이였던 존재였다.

  그 당시 나는 어떤 별명을 가지고 있었더라. 단지 정 씨라는 것 때문에 정수기라느니, 정보와 사회라느니 하는 별명을 가졌던 것도 같다. 아니 어쩌면 그 때는 학우들에게 별명조차 받지 못할 정도로 미미한 존재감을 가지고 있었을 때였을지도 몰랐다. 어쨌든 나는 그 애의 눈송이라는 별명이 꽤 부러웠다. 동시에 그런 애가 나의 짝이라는 것이 좋았다. 상대적으로 그 애와 더 오랜 시간을 보낼 수 있었으니까. 나도 눈송이와 친해지고 싶어 했던 아이들 중 하나였던 것이다.

  우리는 조물거리는 손을 꼭 잡고 다녔다. 이유는 딱히 없었다. 둘 다 손을 잡는 것을 좋아했던가. 우리는 손을 잡고 음악실을, 미술실을, 급식소를 갔다. 한여름 맹렬한 햇볕 아래에서 우리는 운동장의 흙으로 그림을 그리며 놀았다. 그때도 물론 손을 잡고 있었다. 그 애의 얼굴은 그 땡볕 아래에서도 타지 않았다. 신기한 일이었다.

  그 애가 잘하던 과목은 무엇이었나. 수학이었던 것 같고 음악이었던 것 같고 그것들과 아무 상관없는 다른 어떤 과목이었던 것도 같다. 초등학교 저학년, 어떤 과목을 잘해봤자 남들과 얼마나 차이가 나겠느냐만은, 어쨌든 그 애는 공부를 참 잘했다. 선생님들에게도 그 애는 눈송이였다. 에어컨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 후덥지근한 교실에서 눈송이는 유난히 돋보였다.

  사실 그 애에 대한 기억은 더 이상 없다. 어느 순간 그 애는 내 곁에서 사라져버렸다. 1학년을 마치고 난 뒤의 일이었다. 겨울방학 때 그 애와 학교 운동장에서 만나 무언가를 했던 것 같은데, 아무리 생각해도 도통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있으나마나한 기억 이후에 그 애가 내 기억 속에 존재하는 일은 더 이상 없었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그 애를 지워버린 것처럼. 나는 새로운 친구를 사귀었다. 너무 어려서 기억나지 않는 일들과 매우 인상적이어서 평생 잊을 수 없는 일 몇 가지를 겪었다. 그러나 그 속에 눈송이는 없었다. 왜 나는 가끔 그 애를 떠올릴 생각을 못했을까. 그 애가 어떻게 되었는지, 이사를 갔는지 아니면 다른 일이 생긴 것인지 다른 사람에게 물어볼 생각조차 왜 못했을까. 요즘은 그 눈송이가 내 상상 속에만 존재하던 아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기도 한다. 어쩜 사람이 그렇게 깨끗하게 내 인생에서 사라져버렸나. 눈도 되지 못한 눈송이는 결국 녹아버렸나.

  그 애의 얼굴이 또렷하게 기억나지 않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내 인생에서 나를 처음으로 매혹해버린 존재인데, 나는 그 애의 이목구비도 기억하지 못했다. 나를 매혹시켰던 것이 다른 것이 아닌 눈송이였기 때문일까. 어쨌거나 여름의 초입에서 나는 그 지난날의 눈송이를 다시 한 번 더 떠올린다. 에어컨이 틀어져 있어 방은 시원하다. 그러나 겨울만큼은 아니다. 눈송이도 그랬다. 그 애에게는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사람을 평온하게 만들어주는 무언가가 있던 아이였다. 그 애와 손을 잡을 때, 나는 항상 오른손을 내밀었고 그 애는 항상 왼손을 내밀었다. 그래서인지 오른손이 자꾸 허전하다. 주먹을 꼭 쥐어도 채워지지 않는 허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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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잭리마X흑카네키   #잭리마X흑카네키-아리마X흑카네키-아리마X백카네키 순으로 바뀜(..)   #시간 순서 꼬임 원작 시간 생각 X에요

#얓쿠님과 연성교환용 글^~^  #자캐연성급임......저가 아리마를 생각보다 잘 모르더라구요.......쩜쩜..

 

 

 

퍼즐

 

Y A G I

For. 얓쿠님

 

 

그날도 역시, 그저 그런 날이었다. 세상의 대부분을 채우고 있는 그저 그런 날. 특별한 기쁨도, 슬픔도 없는 그저 그런 날. 솔직히 말해서 카네키 켄은 그런 날들을 싫어하지 않았다. 카네키 켄은 딱히 특별함을 동경하는 타입은 아니었다. 그는 평범하고 싶었고, 평범하게 행복하고 싶었다. 자신의 대부분을 구성하는 그저 그런 날들을 배신하고 싶지 않았다.

카네키 켄은 언젠가 자신도 행복해질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사람에게는 그게 언제든 그런 순간이 오기 마련이었다. 벼르고 벼르던 날들이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다가오는 그런 날이. 물론 아무도 그 날이 언제 올지 알 수는 없었다. 그것은 카네키 켄도 마찬가지였다.

하늘이 어둑하게 저물어가고 있었다. 카네키는 프랜차이즈 편의점 로고가 찍힌 봉투를 손에 들고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카네키는 책상 위에 고이 올려두고 온 타카츠키 센의 신작을 읽을 생각에 들뜬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새로 산 책의 냄새, 종이를 넘길 때 나는 버석거리는 소리, 어디로 흘러갈지 모르는 이야기와 그것을 받치고 있는 수많은 문장들.

문장 하나하나만을 떼어 놓고 보면 큰 가치를 지니지 않지만, 그것들이 모여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면서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냈다. 카네키는 그 감각을 즐겼다. 그중에서도 타카츠키 센 만한 작가가 없었다. 그 유려한 문장하며, 타카츠키 센 밖에 풀어낼 수 없는 이야기 하며.

저 멀리 횡단보도의 초록 불이 점멸하고 있었다. 뛸까, 고민하던 카네키는 깜빡이는 불빛을 무시했다. 이럴 땐 좀 걸리더라도 다음 신호를 기다리는 것이 훨씬 나았다. 카네키는 다시 수많은 책들을 생각했다. 자신을 스쳐 지나갔던 수많은 책들, 익숙한 단어들이 만들어내는 낯선 문장들…….

?”

카네키의 손바닥 안에서 편의점 봉투가 바스락거렸다. 카네키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커다란 기타 가방이었다. 처음에는 이 시간까지 부 활동 따위를 하고 귀가하는 학생이라고 생각했다.

그다음으로 눈에 들어온 것은 날 선 소년의 옆얼굴이었다. 얇은 안경이 소년의 코에 얹혀있었다. 그다음엔, 새벽의 색채를 그대로 가져다 놓은 것 같은 검은 머리카락. 그리고 마지막으로 소년의 앞에서 걸어가고 있는 풍채 좋은 남자였다.

심장이 두근, 하고 뛰었다.

어라? 카네키의 눈앞에서 횡단보도의 초록색 불빛이 정신없이 깜빡이고 있었다. 카네키 모르게 신호가 한 번 더 바뀐 모양이었다. 누군가 카네키를 지나쳐 빠르게 뛰어가고 있었다. 카네키는 그 자리에 박힌 듯 서 있었다. , 심장이 뛰었지? 카네키는 고개를 가볍게 갸웃거렸다.

카네키는 횡단보도로 눈을 돌렸다. 신호등은 다시 붉게 변했고 속도를 붙이기 시작한 자동차들이 횡단보도의 흰 선을 마구 짓밟고 있었다. 카네키는 그 소년이 들어선 골목에 따라 들어섰다. 그러니까, 걱정이 됐다. 풍채 좋은 남자와 소년은 무슨 관계가 있을까? 그냥 놓고 보면 접점이 하나도 없을 것 같은 사람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 엮여서는 안 되는 부류의 사람들 같았다.

물론 그것은 편견이었다. 카네키는 사람을 외모만 보고 판단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소년의 뒤를 따랐다. 만에 하나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안 되니까. 카네키는 싸움엔 별로 자신이 없었지만, 그래도 자신이 신고 정도는 해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골목은 도시의 그림자였다. 엉망으로 얽혀있는 관들이 낡은 벽에 엉겨 붙어 있었다. 소년의 뒷모습은 이미 카네키의 시야에서 사라져 있었다. 카네키는 귀를 귀울여 봤지만 딱히 들리는 소리는 없었다. 정말로 아무 일도 없는 것이 맞나? 카네키는 그러길 빌면서도, 동시에 사소한 일이 있길 바랐다.

물론 카네키 켄이 바란 사소한 일은 사람이 하늘에서 떨어진다거나 하는, 그런 일은 아니었다.

……!”

너무 놀란 나머지 카네키는 비명조차 지를 수 없었다. 카네키는 몸을 휘청거리며 하늘에서 떨어진 남자를 보았다. 남자의 어깨며 허리에선 진득한 피가 뚝뚝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구급차! 카네키는 얼른 휴대폰을 찾았지만 그의 휴대폰은 남자의 뒤쪽 어딘가에 떨어져 있었다.

휴대폰을 가지러 가려던 그 순간, 카네키는 남자의 허리춤에서 일렁이는 무언가를 보았다. 상처 입은 남자는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의 커다란 어깨가 쉴 새 없이 위아래로 움직였다.

?”

……피해!”

날카로운 목소리가 카네키의 귀를 찢었다. 남자의 몸이 카네키 위로 드리워진 것도 같은 순간이었다. 카네키의 뺨에 뜨끈한 피가 뚝, 떨어졌다. 카네키는 그제야 자신이 땅에 등을 대고 있다는 것도, 제 위의 남자가 아까의 소년이 뒤따라가던 남자란 것도 눈치챘다. 남자의 등허리에 있는 것이 피가 아닌 카네키가 알지 못하는 무언가라는 것도.

남자는 뭐라고 웅얼거렸지만 카네키는 그 말들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먹고, 끝내고, 없애고, 뭐 그런 폭력적인 단어들. 그 단어들이 왜, 자신에게 향하는지 카네키 켄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흰빛이 있었다.

카네키는 그것이 소년의 손에 들린 검이란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몇 번의 합이 있었다. 남자는 당황한 듯 뭐라고 소리를 질렀지만 그 호흡은 소년의 검에 갈려 사라졌다. 남자는 그 꼴이 되어서도 용케 움직이고 있었다.

소년은 카네키 앞을 막아섰다. 소년의 감색 머리카락이 공중으로 한 번 떠올랐다 다시 그 하얀 목덜미에 내려앉는 것이 카네키의 눈에는 아주 느리게 보였다. 덕분에 카네키는 그 모든 장면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젠장, 하고 소년이 날 선 말을 뱉어내는 것을 듣고서야 카네키는 정신을 차렸다. 멀리 내동댕이쳐진 편의점 봉투는 이리저리 밟혀 속에 있던 음식물들이 끔찍하게 튀어나와 있었다. 소년은 뒤돌아 카네키를 바라보았다. 소년은 미끄러져 내린 안경을 손끝으로 밀어 올렸다.

눈동자가 텅 비어 있다고, 카네키는 생각했다.

괜찮아요?”

소년은 카네키에게 손을 내밀었고 카네키는 흔쾌히 그 손을 잡았다. 왼손에 제 몸통보다 긴 검을 가지고 있는 소년이 이질적이었다. 그럼에도 카네키는 이 모든 상황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제 눈으로 본 사실이니, 당연했다.

카네키는 그 날 저녁을 걸러야만 했지만 별로 개의치는 않았다. 새로 산 책의 페이지가 도저히 넘어가지 않아 카네키는 결국 그대로 하루를 일찍 마감했다. 카네키는 침대에 누워 좁은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때까지 카네키 머릿속을 떠돌고 있던 것은 자신이 죽을 뻔했다는 사실이 아니라, 소년의 흰 목덜미였다.

 

, 이것 봐. 구울이래.”

히데는 항상 요란하게 등장했다. 교내 카페테리아 테이블에 앉아있던 카네키는 고개를 들어 히데를 바라보았다. 히데는 카네키 쪽으로 휴대폰 화면을 내밀었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누군가 CCG에서 배포한 전단을 찍어 SNS에 올린 모양이었다.

구울이라고 꼭 괴물처럼 생기진 않았네.”

나 이 사람 봤어.”

그럼 신고해. 포상금 준대.”

아니길에서 본 건 아니고, 죽을 뻔했다고 하면 좋을까.”

, 그런 일을 되게 태연하게 말한다…….”

히데는 짐짓 질린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나 카네키는 머릿속으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그 소년은 어떻게 구울에게 맞설 수 있던 걸까. 카네키는 소년의 손에 들려있던 검을 떠올렸다. 그 어린 나이에, 벌써 구울 수사관이기라도 한 걸까.

카네키는 소년의 이름이라도 물어 놓을 걸, 하고 후회했다. 생각해보면 살려줘서 고맙다는 말도 전하지 못했다.

히데가 자판을 누를 때마다 히데의 휴대폰에서는 톡, , 하는 소리가 났다. 히데는 구울이 아직 잡히지 않았다느니, 여러 사람들이 신빙성 없는 말들을 하고 있다느니, 하는 말들을 전했다.

카네키, 너 얼굴 봤다 그랬지.”

. 이렇게, 마주 봤는데.”

카네키는 히데를 멀뚱히 바라보았다. 그 순간 히데는 미간을 싹 찌푸렸다. 무언가 걸리는 게 있는 모양이었다.

?”

, 다시 죽이러 오면 어떻게 해?”

에이. 내가 어디 사는지 어떻게 알고.”

다니는 길에서 마주친 거 아니야?”

…….”

……, 몸조심해라.”

카네키는 고요히 고개를 끄덕였다. 카네키가 조심한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일은 아닐지 몰랐지만, 카네키는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에어컨 춥다, 하면서 히데는 몸을 떨었다. 에어컨 때문이 아님을 알면서도, 그들은 억지로 온도 조절을 잘 못 한다면서 가게를 욕했다.

 

안 그래도 배가 고팠는데…….”

해가 지면 외출을 가급적 금한다. 그날 이후로 카네키가 철저하게 지키고 있던 규칙이었다. 그런데 왜, 이 구울은 카네키의 방에 들어와 있는 거지?

카네키는 머리를 굴렸다. 어두운 밤에 다니지 않는다고 해도, 역시 집 위치를 발각당할 가능성은 있었다. 그러니까, 밝은 대낮에 미행을 했다는 거군. 카네키는 거기까지 어렵지 않게 알아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게 다였다.

잘 먹겠습니다아.”

먹힌다. 카네키는 오금이 저린다는 말을 체감했다. 도망쳐야 하는데, 도망칠 수가 없었다. 카네키는 비명조차 지를 수 없었다. 단기간에 두 번이나 느낀 무력감이었다. 카네키는 눈을 질끈 감았다.

죽는다. 주마등이 스쳐 지나갈 줄 알았는데, 그러지 않았다. 다만 그 소년의 얼굴이 자꾸 아른거렸다. 이름이 뭐였을까. 타나카, 야마모토, 스즈키. 카네키는 자신이 알고 있는 이름들을 몇 갠가 나열했지만 그 소년에게 어울리는 이름은 단 하나도 없었다.

카네키의 얼굴에 뜨끈한 것이 흩뿌려졌다. 침인가. 아니면 이미 먹혀 그의 식도 안에서도 나는 사고하고 있는 것인가. 카네키는 주저하며 실눈을 떴다. 웬 천장이 보였다. 자신의 방 천장이.

이름도 모를 그 구울은, 머리를 잃어버리고 카네키의 침대 옆으로 굴러떨어졌다. 카네키는 그제야 몸이 움직였다. 몸을 퍼뜩 일으킨 뒤 카네키가 가장 먼저 본 것은 그 소년이었다. 죽기 전까지 카네키의 머릿속에 아른거리던 그 소년.

괜찮아요?”

덕분에…….”

카네키는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카네키는 소년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시선을 느낀 소년은 입술을 앙다물고 카네키를 의뭉스럽게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고, 시선을 먼저 피한 것은 소년이었다.

실례했습니다.”

, 잠시만요!”

카네키는 그대로 몸을 돌려 떠나려는 소년을 붙잡았다. 소년의 얼굴은 어둠 속에 묻혀있었다. 그의 표정을 확인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카네키는 소년의 이름을 물었다. 소년은 즉각 고개를 저었다. 알 것 없다는 표시였다

저는, 카네키. 카네키 켄이에요.”

……아리마 키쇼.”

아리마는 다소 떨떠름한 듯 자신의 이름을 뱉었다. 상대가 먼저 이름을 말한 상황에서 그것을 무시하는 것은 별로 예의가 아니었다. 아리마는 고개를 까딱, 숙이고 카네키의 방을 떠났다.

카네키 켄.”

후속 조치를 취하는 동료 수사관들의 모습을 보며, 아리마는 그 이름을 중얼거렸다. 몰랐으면 좋았을 텐데. 아리마는 고개를 가볍게 왼쪽으로 젖혔다. 그 이름을 몰랐으면, 그저 지나치는 사람에 불과하지 않을 수 있었을 텐데.

아마 별일이 없다면, 두 사람의 인연은 거기서 끝이 날 게 분명했다. 아리마는 곧 다른 구로 이동할 예정이었다. 그렇게 그들은 서로의 기억 속에서 희석되다, 미래의 어느 순간 카네키라는 이름을, 아리마라는 이름을 간혹 떠올리곤 희미해진 감정을 억지로 끌어올리는 관계로 끝날 운명이었다.

그러나 운명의 여신은 여태껏 잡고 있던 두 사람의 운명의 실을 새로 고쳐 쥐었다. 여신은 두 사람의 운명의 실을 왼손에 그러잡았다. 그렇게 두 사람은 죽음과 삶의 경계에 서서 서로를 마주하게 되었다.

 

카네키 켄은 종종 자신이 인간인 꿈을 꿨다. 자기 자신을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있음에도, 그는 자신이 인간이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꿈을 꿨다. 잠을 자고 나면 항상 개운하지가 않고 괴로웠다.

자신은 무엇인가, 구울인가, 인간인가? 요시무라 씨는 그렇기에 카네키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고 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카네키 켄은 그런 일을 하고 싶지 않았다. 카네키 켄이 하고 싶은 것은 그저 평범하게 사는 것뿐이었다.

죽을 위기를 넘기고 싶지도, 구울이 되고 싶지도 않았다. 더군다나 구울 수사관인 아리마 키쇼에게, 적으로 보이고 싶지도 않았다.

아리마 키쇼. 어째서 그 이름은 카네키의 머릿속에서 자꾸 부유하는가. 카네키는 자신의 감정을 알 수 없어 혼란스러워했다. 사실 카네키를 구성하는 모든 것이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그래서 카네키는 아리마 키쇼에 관한 자신의 마음을 더욱 알 수 없었다.

언젠가 토우카의 앞에서 무심결에 아리마 키쇼, 하고 중얼거린 적이 있었다. 마른행주로 컵을 닦고 있던 토우카의 손이 미끄러졌다. 그러나 토우카는 태연하게 떨어지는 컵을 잡아 작업대 위에 올려두었다. 그리고는, 카네키를 노려봤다.

그 이름 어디서 들었어?”

무슨 이름?”

방금, 아리마 키쇼라고 했잖아.”

. 카네키는 그제야 자신이 그 이름을 입에 담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물아물 토우카의 시선을 피하던 카네키는 문득 토우카와 눈을 맞췄다. 토우카는 그 이름을 어떻게 알고 있을까. 토우카도 아리마를 만난 적이 있는 걸까.

그 사람이 왜?”

“CCG의 저승사자.”

저승사자?”

아리마 키쇼의 별명이다.”

토우카는 침을 뱉듯 아리마 키쇼라는 이름을 발음했다. 그렇구나. 카네키는 고개를 끄덕이며 쓰게 웃었다. 아무래도 자신은 저승사자를 마음에 두고 있는 것 같았다. 앞으로 한 번 더, 아리마 키쇼를 마주치면 카네키는 죽게 될까.

카네키는 아리마의 손이라면 죽어도 상관없으리라고 생각했다. 다만 카네키가 궁금한 것은, 아리마가 자신을 기억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였다.

 

밤하늘이 청명했다. 지금까지 숱하게 봐온 밤하늘인데, 오늘따라 더 그렇게 보였다. 카네키는 자신을 뒤쫓는 사람이 있는 것을 느꼈다. 안테이크에서 퇴근한 후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식은땀이 배어 나와 카네키는 허벅지에 제 손바닥을 문질러 닦았다.

피할 수 있을까. 만난다면 싸울 수 있을까.

이렇게 죽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싸우고 싶지도 않았다. 인간이잖아. 나는 인간이잖아. 인간이 인간을 죽일 수는 없는 거잖아. 나는, 구울이 아니잖아. 하지만 그런 상황은 카네키가 정하는 것이 아니었다.

철컥, 하는 소리가 들렸다. 싫게도 벌써 익숙해진 소리였다. 수트케이스였다. 쿠인케, 라고 했던가. 카네키의 삶은 너무나도 많은 부분이 바뀌었고, 쿠인케의 경우는 바뀐 것들 중에 나쁜 것들에 속했다.

죽고 싶지 않아. 카네키는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인간을 반쯤 잃어버리고, 카네키는 지금까지 얼마의 죽음을 봐왔던가. 죽음에 가까이 있던 자들을 봐왔던가. 카네키 본인부터가 다른 사람의 생명을 먹고사는 생명이었다. 죽음이란 것이 조금 익숙해진 것도 같다고 카네키는 생각하곤 했다.

그런데 왜, 자신의 죽음만은 이렇게도 크고 무거운 것인가.

……카네키 켄?”

마스크를 쓰고 오진 않은 것이 문제였을까. 아니, 그 전에. 너무나도 익숙하고, 그리운 목소리였다. 카네키는 발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카네키는 그런 남자를 알지 못했다. 그런데 왜.

바람이 카네키 쪽으로 불어왔다. 익숙한 향내가 섞인 바람이었다. 잊을 수 없는 냄새. 아주 잠깐 카네키를 스치고 지나갔던 그 냄새가 났다.

아리마. 아리마, 키쇼.”

안대.”

하아, 하고 아리마는 깊은숨을 내쉬었다. 느낌이 안 좋더라니. 사실 안대의 구울은 아리마의 담당은 아니었다. 안대의 구울은 아리마 정도 되는 사람이 담당할 만큼 위험하거나 중요한 구울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리마는 자신이 안대의 구울을 맡겠다고 말했다. 마도 쿠레오의 죽음 이후였다. 안대의 구울. 아리마는 그 단어에서 불길한 감각을 느꼈다. 하지만 아리마조차 그 불길한 기운의 정체가 바로 이 상황이라는 것을 알 수는 없었다.

카네키 켄. 그를 이렇게 다시 만나고 싶지는 않았는데.

아리마 씨. 저를죽일 겁니까.”

그렇게 물어보면, 안 죽인다고 말할 수 없잖아.”

그렇게 말하면서도 아리마는 쿠인케를 수트케이스에 집어넣었다. 카네키가 기억하던 쿠인케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카네키는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아리마를 바라보았다. 그의 머리는 이제는 하얗게 새어있었다. 하지만 안경 뒤의 그 날카로운 눈빛만은, 예전의 그것과 다를 것이 없었다.

그 텅 비어있는 눈빛. 자신과 다를 바 없는 그 눈빛만큼은.

잠깐 걷지.”

아리마는 카네키를 지나쳐 걸어갔다. 그는 최대한 담담하고자 했다. 아무렇지도 않게 카네키의 앞에서 행동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아리마의 목소리는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아리마 본인이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마치 아리마의 감정을 아리마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것처럼. 아리마의 심장은 심하게 쿵쾅거리고 있었다. 이러다 죽어버리는 것이 아닐까 싶은 느낌이었다. 아리마는 자신을 뒤따라오는 카네키의 발걸음을 들었다.

 

아리마 키쇼는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그다지 원망하지도, 괴로워하지도 않았다. 도리어 구울 수사관으로서의 삶이 퍽 마음에 들기도 했다. 그의 삶의 목표는 구울을 구축하는 것이었다. 그것이면 충분했다. 다른 것은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아리마의 곁을 지나쳐갔다. 하지만 아리마는 외롭지 않았다. 처음으로 친구라는 것을 사귀기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그 사람 때문에, 아리마는 외로움이라는 단어를 깨달아버렸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추억이 퇴색되지는 않았다. 외롭더라도, 아리마는 사실 별로 상관없었다. 그의 외로움은 구울을 구축하는데 원동력이 되지도, 방해가 되지도 않았다. 그의 삶에 작은 외로움이 추가되었을 뿐이었다. 그게 다였다.

그 외로움을 흔들어 놓은 것이 카네키 켄의 존재였다. 아리마는 자신의 감정을 납득할 수 없었다. 그것을 납득하기 위해 카네키의 모습을 떠올리면 아리마의 심장 어딘가가 욱신 쑤셔오는 것이었다.

아리마는 수없이 많은 꿈을 꾸었다. 모두 카네키 켄의 앞에서 자신의 존재가 먼지처럼 스러저버리는 꿈이었다. 카네키는 없어져 가는 자신을 잡지 않았다. 아리마 본인도 그런 카네키를 붙잡으려 하지 않았다. 붙잡을 수 없었다는 말이, 정확했다.

자신의 삶은 누군가를 사랑하기엔 저주받은 삶이 아니었던가.

두 사람은 근처 공원에 도달했다. 흐릿한 가로등 불빛 아래에 벤치들이 드문드문 놓여있었다. 아리마가 먼저 벤치에 앉았고, 다음은 카네키였다. 두 사람 사이에 깊은 침묵이 가라앉았다. 어느 누구도 먼저 말을 꺼내려 하지 않았다.

둘 다, 너무 많이 바뀌었네요. 사실, 아리마 씨가 아닌 줄 알았어요.”

나도 마찬가지다. 그땐, 구울이 아니었으니까.”

많은 일이 있었어요. 아리마 씨에게, 많은 일이 있었듯이.”

카네키는 자신에게 있었던 일들을 띄엄띄엄 아리마에게 전했다. 아리마는 음,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카네키의 말을 경청했다. 좋은 목소리였다. 부드럽고, 따뜻하고, 다정하고, 뭐 그런 단어들로밖에 설명할 수 없는 그런 목소리.

아리마는 카네키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안대로 가려진 눈 뒤에는 아직 숨기지 못하는 혁안이 있다고 했다. 카네키의 얘기 중간에, 아리마는 손을 뻗어 그의 안대를 벗겼다.

……그렇네요. 그렇게, 됐어요.”

그럼 카네키 너는 이제구울인가.”

구울은 아니에요. 그렇다고인간은 아니지만요.”

카네키. 네가 CCG 구축 대상인 것은 알고 있겠지.”

안대의 구울, 이라면서요?”

아리마는 몸을 일으켰다. 카네키의 칠흑 같은 머리가 가로등 아래에서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카네키의 시선이 아리마를 따라 움직였다. 그의 시선은, 슬픔이었다. 그리고 아리마는 자신의 눈빛이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오늘은 이만 물러가지.”

아리마 씨.”

다음에는, 구축이야. 나를 더 이상 기억하지 마, 카네키 켄.”

아리마 씨!”

카네키는 아리마가 이대로 떠날 것 같아 마음이 급했다. 정말, 우리의 관계는 이대로 끝인 것인가. 카네키는 아리마에 손에 죽어도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렇게 끝내는 건 싫었다. 이렇게, 두 사람의 관계가 아주 없었던 것으로 바뀌어버리는 것이 싫었다.

아리마 씨, 차라리 여기서 저를…….”

수트케이스가 바닥에 툭,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카네키는 더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아리마의 손바닥이 카네키의 뺨을 감싸고 있었다. 아리마의 입술이 부드럽게 카네키의 입술을 짓눌렀다.

부드럽게 두 사람의 혀가 얽혔다. 두 사람의 혀는 어색하면서도 집요하게 서로를 탐했다. 카네키는 아리마의 목을 껴안았다.

두 사람의 첫 키스는. 그러니까, 눅눅한 맛이었다.

 

어이, 바보 카네키. 뭘 그렇게 멍때리고 있냐?”

아무것도……. 그나저나, 바보라고 부르는 건 슬슬 그만해 줬음 하는데.”

그러면 바보짓을 안 하면 되지, 바보.”

토우카는 바보, 라는 말을 부러 길게 늘여 말했다. 요사이 카네키 켄의 모습은 좀 이상했다. 하긴 원래부터 이상한 녀석이긴 했지만, 저렇게까지 넋을 놓고 있진 않았는데. 토우카는 카네키의 그런 모습이 아직은 썩 못마땅했다. 그가 좋은 녀석인 걸 알면서도 그랬다.

좋은 녀석인 걸 알았기 때문에 더욱 그러는 것일지도 몰랐다.

카네키는 설거지를 이어갔다. 식기끼리 부딪히며 쨍, 하는 맑은소리가 울려 퍼졌다. 카네키는 도저히 그 날 있었던 일들을 말할 수 없었다. 누가 들으면 미쳤다고 그러지. CCG의 저승사자와 키스했다고 그러면.

그 키스가 너무 따뜻했다고 말하면.

그래서 이제는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다면. 카네키는 속이 쓰렸다. 이제 겨우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는 것을 알았는데, 이젠 다시 만나면 안 된다니. 정말 글자 그대로 죽음을 각오하고 만나야만 하는 사이가 된 것이었다.

평범한 삶을 살고 싶었는데. 평범하게 사랑하고, 함께 있고, 데이트도 하는 삶을. 하지만 지금 이 꼴이 뭔가. 같이 데이트를 하러 가도 카네키가 먹을 수 있는 건 커피밖에 없지 않은가.

평범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게 되었지만, 카네키는 그 삶에 익숙해져야 했다. 그리고 카네키는 꽤 그것에 충실했다. 안테이크의 일상도, 음식을 먹는 하는 것도, 시체를 먹는 것도 제법 익숙해진 일들이었다. 하지만 아리마 키쇼와 더는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은, 아무래도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았다.

카네키는 그날 결국 찻잔을 하나 깨트렸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한번 더 만났다.

수많은 일들이 스쳐 지나간 뒤였다. 카네키는 삶의 궤도라는 것을 체감했다. 처음에는 작은 틈이었던 것이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커져갔다. 카네키 켄은 이제, 카네키 켄이라기보다는 안대의 구울이었다.

운명은 카네키를 자꾸 카네키에게서 밀어냈다. 카네키가 사랑했던 사람들에게서도 밀어냈다. 카네키는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에 눈물을 흘렸다. 자기 눈물에 자기가 질식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렇게 눈물을 흘리며 카네키는.

카네키는.

결국 카네키는 그 이후로 아리마를 만나지 못했다. 그의 소식조차 들려오지 않았다. 아리마가 일부러 피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카네키는 그것이 그의 배려라는 것을 알면서도 못내 섭섭했다.

하지만 카네키의 생각과는 달리, 두 사람의 운명은 아예 멀어질 수 없는 것이었던 모양이었다. 카네키는 수많은 사람들의 시체를 넘어 아리마를 만났다. 그리고, 그를 죽이고 그를 지나가야만 했다. 아리마 키쇼가, 구울인 자신을 그냥 보낼 리는 없을 테니까.

카네키 켄과 아리마 키쇼. 만나고 싶지 않으면서도, 가장 만나고 싶은 사람이었다. 발밑에서 피었을 리 없는 하얀 꽃들이 피어났다. 아리마는 카네키의 뺨을 매만졌다. 이전보다 조금 살이 빠진 것도 같았다.

비슷해졌구나.”

그렇다고 같아질 순 없겠죠.”

그렇겠지. 아쉽게도.”

카네키는 자연스럽게 눈을 감았다. 몇 번이고 상상해왔던 장면이었다. 아리마의 입술은 카네키의 기억보다 훨씬 더 뜨겁고, 축축했다. 카네키는 아리마에게 매달리듯 붙었다. 이것은 분명히 마지막이었다. 다음은 없었다.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은 대가를 바라지도 않았다. 카네키는 두 사람의 몸을 훑고 지나가는 차가운 소나기를 상상했다. 이대로 스며들어 가면 좋겠어. 그렇게라도 평생 함께하고 싶어. 하지만 그들에게 쏟아지는 것은 소나기가 아니라 전쟁의 뜨거운 피였다.

하아…….”

누구 것인지 모를 호흡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눈을 바라보았다. 카네키는 혀로 제 입술을 훑었다. 눈물맛이 났다. 둘은 천천히 뒤로 물러서며 거리를 벌렸다. 하얀 꽃잎이 엉망으로 짓밟히고 흩어졌다.

이젠 끝이구나.”

그렇군요……. 안녕히 계세요, 아리마 씨.”

안녕, 하고 아리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두 사람은 서로에게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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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타요모 #진단메이커- 연성문장 #도쿄구울 re: 코쿠리아 침입 직전의 이야기

 

 

필수불가결

 

Y A G I

 

   “우타.”

   “, .”

   우타는 고개만 돌려 요모를 바라보았다. 대부분의 전등이 까맣게 꺼진 우타의 작업실이었다. 요모는 손끝으로 우타의 작업대를 매만졌다. 어둠 속에서 가면들이 두 사람을 텅빈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가끔,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어.”

   “나 아무 생각도 안 하는데?”

   “장난치는 거 아니야.”

   “나도 장난치는 거 아니야.”

   우타는 입 꼬리만 말아 올려 미소를 지어보였다. 우타의 눈동자는 요모를 미동 없이 보고 있었다. 우타는 잠시 시선을 유지하다 다시 작업물로 고개를 돌렸다.

   우타는 요모가 왜 갑자기, 이 작업실로 찾아왔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척안의 왕 어쩌고 하는 문제겠지. 참 요모가 그런데 관심이 있는 줄 전혀 몰랐는데 말이야. 역시 카네키 켄, 그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일까.

   툭, 하고 샤프심이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우타는 샤프의 꽁무니를 꾹꾹 눌렀다. 결국 나는 렌지에게 그 정도 가치도 못 가지는 사람이라는 거잖아.

   “너는피에로는 뭘 계획하고 있는 거지?”

   “말했잖아 딱히 생각하고 있는 건 없다고. 그냥, 재밌어 보이는 판에 가서 노는 것뿐인데, 우리 렌은 왜 이렇게 딱딱하게 구실까.”

   우타는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질투니, 독점욕이니 하는 것과는 관계가 멀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이건 뭘까? 알 수 없었다. 우타의 감정이란 것은 항상 일그러져 있어서, 우타 본인조차 그것의 정체를 가늠하기 힘들 때가 많았다.

   가늠하려 하지 않을 때가 더 많았다고 하는 편이 정확했다. 우타는 그저 흐르는 대로 흘러가는 존재였으니까. 우타는 자신의 삶의 방식이 구울로서 최고의 방식이라고 생각했다.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목숨, 재밌게 살아가는 게 가장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타인과 관계를 맺고, 사랑을 하고, 그런 건 난 모른단말야.

   “우타, 네가 이러면 나는너와 반목할 수밖에 없어.”

   “어려운 말을 쓰네, 요모 렌지.”

  우타는 의자를 돌려 요모를 바라보았다. 요모의 입술은 평소처럼 꾹 다물어져 있었다. 전반적으로 평소와 별 다를 것 없는 모습이었다. 그렇단 말이지. 렌지는, 지금 이 상황이 아무렇지도 않단 말이지.

   “나는 카네키를 구하러 간다. 하지만 나는 그가 척안의 왕이 되는 것은 반대야.”

   “렌이 반대한다고 없어지는 일이 아니라는 건 잘 알고 있잖아. 안 그래?”

   “정말로, 카네키를 왕으로 만들 생각인가?”

   “나를 보러 와서까지 카네키, 카네키. 참 말이 많네.”

   우타는 몸을 일으켜 천천히 요모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내딛었다. 요모는 꿈쩍도 하지 않고 우타를 바라봤다. 요모는 빛과 어둠의 경계에 두 발을 딛고 서있었다. 우타는 양손으로 요모의 뺨을 감싸 쥐었다.

   “한 마디로, 오늘이 우리의 마지막 밤이라는 거 아냐?”

   우타는 장난스럽게 요모의 양볼을 꾹 눌렀다. 요모는 제 얼굴이 일그러지고 있는 와중에도 꼿꼿이 우타를 바라보았다. 차갑지는 않은, 눈동자였다. 냉랭하다기 보다는 슬픔에 가득 잠겨 어쩔 줄 모르는 눈동자였다.

   우타는 빙긋 웃으며 요모의 몸을 돌려 작업대에 앉혔다. 요모는 순순히 자리에 앉았다. 마지막 밤이라는 그 말 때문일까. 우타는 요모의 상의 아래에 손을 집어넣어 그의 허리를 슬슬 쓰다듬었다.

   바로 그때, 요모는 그런 우타의 어깨를 확 끌어안았다. 우타의 코끝에 요모의 냄새가 훅 끼쳤다. 우타 역시 요모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우타는 요모의 목에 고개를 파묻고 눈을 감았다.

   “사랑한다고 말해줘, 우타.”

   “사랑해. 사랑해, .”

   우타여전히 계획엔 변동이 없는 건가?”

   “대답 알면서 묻지 말아줄래. 지금 대답하긴 조금, 곤란하니까.”

   “왜지?”

   “즐거운 기분이 안 된단 말이야.”

   요모는 우타의 등을 넓은 손바닥으로 천천히 쓸었다. 요모와 함께 하는 밤은 항상 그랬다. 항상 아침이 오지 않길 바랐다. 아침이 오면 지난밤의 일들이 모두 없어져버리는 것만 같아서. 우타는 항상 그랬다.

   오늘은 더더욱 아침이 오지 않았으면 했다. 우타는 요모의 가슴을 가볍게 밀어 그를 떼어냈다. 그러곤 부드럽고, 건조한 입맞춤을 했다.

-

 

글 쓰기 싫어서 진단메이커 휘리릭 돌리고 가볍게 단문 쓰기

 

#우타요모 #요모가 기억을 잃었다는 설정

 

잃어버린다는 것

 

Y A G I

 

 

우타는 요모에게 간혹, 기회만 된다면 요모를 버리고 다른 사랑을 찾아갈 것이라고 얘기하곤 했다.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했을까? 우타는 자신도 자신의 속마음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땐 분명히 무슨 생각이 있어서 그렇게 말했을 텐데. 지금에 와서 드는 생각은, 왜 그런 말을 했을까, 하는 후회뿐이었다.

우타는 요모의 집 현관문 앞에서 한참이나 서성거렸다. 비밀번호는 당연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우타는 바로 문을 열고 들어갈 수가 없었다.

요모는 여태껏 쌓아왔던 모든 기억을 잃어버렸다. 우타에 관한 기억을 포함해서.

우타는 직접 비밀번호를 입력하는 대신, 초인종을 눌러 요모를 불렀다. 요모는 금방 문을 열었다. 요모는 우타가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무른 표정을 짓고 있었다. 우타가 기억하던 요모는 조금 더 첨예하고 위태로웠던 남자였는데, 지금의 요모는 꽤나 편안해 보였다. 우타는 그것을 좋아해야 할지, 싫어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 오늘도 오셨네요.”

. 걱정되니까, 아무래도.”

우타는 태연하게 말하고는 있었지만 그의 속은 타들어 가고 있었다. 괜히 왔나, 하는 생각이 우타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우타는 신발을 벗고 요모의 방으로 들어섰다. 자그마한 원룸이었다.

기억을 잃은 요모가 처음 이 방에 도착했을 때, 그는 방에서 낯선 사람의 냄새가 난다고 했다. 기억을 잃는다는 것은, 자신의 냄새마저 낯설게 된다는 것일까. 그런 요모가 어떻게 자신의 냄새를 뒤따라 자신을 찾아왔는가.

우타는 요모에게 과연 어떤 존재였는가.

연락도 없이 우타가 찾아오는 것은 별로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그들의 만남은 종종 그렇게 이뤄졌다. 우타는 그날도 그런 줄만 알았다. 평소처럼 조금 날이 서있을지도 모르는 말들을 요모에게 뱉으려는 찰나, 요모가 먼저 입을 열었다.

당신은 누구냐고. 나는 왜, 당신을 찾아왔냐고.

그땐 장난인 줄로만 알았지…….

컨디션은 좀 어때?”

몸은 괜찮아요. 아직, 이 얼굴이 낯설긴 하지만요.”

곧 익숙해질 거야.”

우타우타 씨.”

무릎을 꿇고 앉아있는 요모와 달리, 우타는 요모의 침대에 풀썩 걸터앉았다. 지금은 요모보다도 우타쪽이 이 방이 더 익숙할 터였다. 당연하지. 이 침대에서 요모랑 뒹군 게 한두 번도 아닌데.

얇은 벽을 탓하며 신음소리를 죽였던 기억들, 달뜬 숨소리만으로 서로를 충분히 자극할 수 있었던 그런 날들, 그런 것들이 지금의 요모에게는 존재하지 않았다. 대신 남아있는 것은 우타가 겪어보지 않았던 요모였다.

우타는 요모를 사랑했던가? 지금까지 우타는 자신을 즐기는 존재로 생각해왔다. ‘연인이니 사랑이니 하는 단어들에 구속되지 않고 자신의 쾌락을 최고로 좇는 존재라고. 요모와 지속적인 관계를 가져온 것 역시, 요모가 자신을 만족시켜주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지금 이 모습을 보면마치 우타가 요모를 사랑하고 있는 것 같지 않은가. 우타는 그런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것이 우타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우타 씨, 우타 씨 하는 건 이만 그만둬 주지 않을래? 편하게 이름 부르라고.”

하지만아직 저에겐 낯선 걸요. 우타 씨는.”

고집이 센 것만은 바뀌지 않았군. 우타는 속으로 쯧, 혀를 찼다. 우타 씨라니. 요모의 입에서 이런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는데. 기억이 돌아오면 내가 이때를 평생 놀려먹을 줄 알라고, 요모 렌지. 우타는 그 말을 입속으로 씹었다. 쓴맛이 났다.

제가 왜, 우타 씨를 기억하고 있을까요? 다른 건 하나도 기억 안 나는데. 심지어, 저 자신마저도요.”

……. 그건 내가 묻고 싶은 건데.”

저랑 우타 씨가, 아무런 관계도 아니라고 그랬죠? 그냥 아는 사이라고.”

우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대로 말할 수 없었다. 친구 이상 연인 미만인 관계라고.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섹스 파트너 이상 연인 미만인 관계가 맞았으려나. 더더욱 우타 자신은 기회가 되면 요모를 떠날 생각을 했다는 걸 말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래도 가끔씩은, 우타 씨를 기억하고 있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왜지?”

우타 씨랑 같이 있으면 어쩐지 편안하거든요. 사실 기억을 잃고 나서는 항상 불안한 상태였어요. 자신의 존재라는 것마저 희미해진다는 건그런 거겠죠. 하지만 우타 씨랑 있으면, 그런 걸 잊을 수 있달까…….”

요모는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우타는 요모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요모의 목소리는 깊은 호수의 한 조각을 떼어 온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요모는 알고 있을까. 그 목소리가 우타를 설레게 할 때가 있다는 것을 알고나 있을까.

그래서, 우타 씨랑 제가 연인이나 되는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그건 착각이었나 보네요.”

요모, 잠깐 이리 와 볼래?”

우타는 손바닥으로 침대를 툭툭 건드렸다. 요모는 무릎에 손을 짚으며 일어섰다. 우타는 쭈뼛거리는 요모의 손을 침대로 끌어당겼다. 예상외로 요모는 순순히 끌려왔다. 우타는 자신도 요모처럼 자기를 잃어버린 것 같다고 생각했다.

우타는 자신을 아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요모가 기억을 잃기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그때의 우타는 모든 것에 확신이 있었다. 요모는 우타의 위에 얹히듯 끌려왔다. 이제 우타에게 남은 것은 충동밖에 없었다.

우타는 요모의 목을 껴안으며 요모에게 입을 맞췄다. 요모는 우타를 피하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몸에 익은 행동이었다. 우타는 요모의 입술을 깨물고, 혀를 얽었다. 그럴수록 요모는 우타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가 붙었다.

이렇게 하면 생각날지도 몰라.”

아직 생각 안 나니까…….”

두 사람의 말은 거친 호흡 속에서 아주 짧게 이어졌다. 달큰하게 달아오르는 숨이 누구의 것인지도 모른 채,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서로의 입술을 다시 찾았다. 지금까지 키스 없이 보낸 시간을 보답 받고 싶어 하는 것처럼.

우타. 우타는 저를 사랑했나요?”

잘 모르겠어.”

그럼 지금부터 사랑해줄 수는 있나요?”

그것도 잘 모르겠어.”

그럼 한 번 더 키스해주는 건요?”

그건, . 할 수 있어.”

우타는 침대에 등을 대고 누워있었다. 요모는 우타의 위에 올라타 부드럽게 우타의 손목을 붙잡았다. 우타는 이대로 요모를 사랑하게 되어버려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원래부터 요모를 사랑하고 있던 걸까. 아마 이것은 우타가 평생토록 내리지 못할 질문일 것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두 사람의 관계가 사랑이라고 정의내리지 못할 것이어도 우타는 상관없었다. 우타는 어쨌든 자신의 곁에 요모만 있어 주면 된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사랑이라면, 우타는 아마 요모를 사랑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것이 상실이라면, 우타는 그래도 요모를 사랑하고 있을 터였다.

나를나를 가장 먼저 찾아줘서 고마워, .”

, , 하는 소리를 내며 요모는 우타의 목덜미에 얼굴을 비볐다. 우타는 그런 요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

 

아 엄청 단문......

뭔가를 더 써보려 했으나....준비된 것이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는 딱 이 정도 분량밖에 나오질 않네요. 더 뭔가를 붙이면 지금보다 글이 엉망이 될 것 같아서.... 음음 아무튼. 기억을 잃는다는 것에 대해서 더 할 말이 많을 게 분명한데 이 정도 밖에 풀어내질 못해서 아쉬움이 크네요.

 

COSMO少年

 

  Y A G I

 

 

   안은 자신이 죽을 자리를 찾고 있었다. 그것은 안이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방법이었다. 안에게 있어서 그것은 일종의 보험 같은 것이었다. 살기 싫어지면 여기로 와서 죽어버리면 되니까. 그런 생각이었다. 안은 담배의 필터 부분을 엄지와 검지로 짓이기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불은 붙이지 않은 채였다. 아무렇게나 발라 표면이 울퉁불퉁해진 시멘트벽이 그늘 아래에서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안은 이 골목이 마음에 들었다. 사람이 없는 것도 마음에 들었지만, 그보다 더 마음에 드는 것은 음식물 쓰레기 냄새가 없다는 것이었다. 쓰레기봉투에서 터져 나와 보도블록의 틈 사이사이로 스며드는 그 냄새를 안은 견디지 못했다. 그 냄새를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떠올리고 싶지 않은 광경을 자꾸 떠올리며 안은 얼굴을 찡그렸다.

   안은 자신이 죽을 자리는 골목일 것이라고 항상 생각했다. 죽고 싶은 자리, 가 더욱 정확한 말일까. 안은 이리저리 얽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으로 자신을 이끌어 주는 골목이 자신의 삶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골목은 막다른 골목으로 끝나는 경우가 더 많다고 생각하기도 하면서. 지금 안이 걷고 있는 골목도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골목의 끝에는 누군가의 집이 있었다. 안은 벌겋게 녹이 묻어있는 대문과 각종 광고 용지를 한껏 삼킨 허연 우편함을 멀리서 살펴보았다. 그러나 거기서 안은 발을 돌리지 않았다. 대문 앞에 아무렇게나 놓인 검은색 초밥 가게 광고지가 가을 햇볕에 노랗게 색이 바래가고 있었다. 해가 지고 있었다. 안은 방에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내일 다시 이 근처 골목을 돌아보아야겠다고 결심하면서. 여기서는 괜찮은 장소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안은 문득 옅은 꽃향기를 느꼈다. 안은 붉은 벽돌담을 손으로 짚었다. 안의 손에서 담배가 떨어졌다. 벽돌담은 끝으로 갈수록 제대로 된 모양을 유지하지 못하고 점점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바람이 불면 담은 위태롭게 흔들릴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런 담 위에 누군가의 옆얼굴이 있었다. 그의 발아래에 펼쳐진 연분홍빛 꽃들의 무리가 바람이 불 때마다 몸을 흔들거렸다.

   햇볕이 소년의 머리 위에서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소년은 무릎을 접어 담에서 튀어나온 벽돌에 스니커즈를 신은 발을 올려놓고 있었다. 그의 하얀 무릎이 희미하게 반짝이는 것도 같았다. 안은 자신의 시선을 서둘러 거두었다. 안은 자신의 시선이 무례하다는 생각을 했다. 안은 서둘러 자리를 피하려 했다. 소년이 무얼 하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안은 소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저쪽으로 가도 길이 나올 것 같지는 않으니까. 자기합리화 비슷한 것을 하며 안은 고개를 돌렸다.

   “나는, 코스모야.”

   소년은 무얼 하고 있던 걸까. 안은 반사적으로 소년에게 고개를 돌렸다. 소년의 뒤에서 햇빛이 내려오고 있어 안은 그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안은 소년과 눈을 마주쳤다고 생각했다. 소년의 발에 꽃 몇 송이가 짓눌려 있었다. 짧은 반바지 아래로 내려온 소년의 하얀 다리가 움직이는 것을 보고 안은 바로 그곳에서 몸을 돌렸다. 그곳의 공기는 어쩐지 무거워 안은 견딜 수가 없었다. 소년이 입을 연 순간부터 수만 송이의 꽃이 한꺼번에 향기를 뿜어내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농도를 버틸 수가 없어서 안은, 그것이 실례임을 알면서도 그곳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안이 빠져나온 골목의 입구에는 누군가 반쯤 먹다 버린 스타벅스 커피가 놓여있었다. 사람들이 끊임없이 안의 앞을 지나갔다. 안은 셔츠의 가장 위쪽 단추를 풀었다. 가슴 아래서 훅 끼치는 열기를 느끼며 안은 뒤를 돌아보았다. 소년도, 소년을 따라다니는 것만 같았던 햇빛도 안을 따라오지 않았다. 차가운 골목길의 입구에서 안은 여긴 절대로 죽기 좋은 장소가 아니라는 생각을 잠시 했다. 사실 죽을 생각도 딱히 없었지만. 안은 담뱃갑에서 담배를 하나 꺼내 들곤 다시 손끝으로 짓이기기 시작했다.

 

   안은 오늘도 고개를 푹 숙여야 했다. 이제는 창가 자리도 못 앉겠군. 곁눈질로 소년이 카페에서 멀어진 것을 확인한 후에야 안은 고개를 들 수 있었다. 왜 자꾸 그 소년이 눈에 밟히는지 안은 알 수가 없었다. 어쩌면 소년은 이전부터 이 거리를 계속 돌아다니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안은 그걸 자신이 이제야 인식했고, 그래서 더 자주 소년이 보이는 것은 아닐지 생각했다.

   안은 소년을 보기가 껄끄러웠다. 그의 인사에 자신이 등을 돌렸던 일이 자꾸 떠올랐다. 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는데. 속에서부터 올라오는 말을 꾹꾹 삼키며 빨대에 입을 대었다. 원래대로라면 소년에게 사과하는 것이 옳을 테지만 안에게는 그럴 용기조차도 없었다.

   안은 다시 창밖을 보았다. 그 아이는 무얼 하러 가고 있었을까. 괜한 호기심이었다. 안은 소년이 조금 부러워졌다. 무엇인가 할 것이 있는 것 같아서. 안은 담배를 꺼내려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가 금연 구역인 것을 깨달았다. 담배도 피우지 못하는 주제에. 안은 흡연실까지 들어가 담배를 만지작거리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렇다고 불을 빌려 담배를 피우는 것 역시 싫었다. 안은 담배 대신 유리잔을 만지작거렸다. 차가운 커피의 냉기가 손끝을 적셨다.

   습한 날이었다. 일기 예보에서는 오후 일곱 시부터 비가 온다고 했다. 안은 아직 바짝 말라 있는 우산을 챙겨 몸을 일으켰다. 우산은 챙겼지만 집에 돌아가기 전까지는 비가 오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면서. 해가 지고 있었다. 사람들은 오늘도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카페 문에 달린 종이 안의 뒤에서 몇 번 울렸다가 멎었다.

   안은 자신도 무언가를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그 작은 애도 자기 할 일을 찾아가는데. 소년이 걸었던 길을 그대로 밟으며 안은 길게 숨을 뱉었다. 하늘이 흐려 노을빛이 땅을 훑어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안은 차라리 이런 하늘이 좋았다.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모르게 하루가 지나가 버리는 것이 좋았다.

   기어코 굵은 빗방울들이 떨어져 내렸다. 안은 자신이 죽을 자리를 찾는 것이 아무 의미도 없다는 생각을 했다. 안은 죽을 일이 없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 죽을 일이 없었다. 어쩌면 죽는 일도 자신에게는 불가능한 일 일지도 모른다고, 안은 생각했다. 여기저기서 우산을 펴는 소리가 들렸다. 안도 자신의 우산을 폈다. 안은 십삼 점 이이 제곱미터인 자신의 방으로 발을 옮겼다. 아무 의미가 없어도 안은 자신이 죽을 자리를 찾는 일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정말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으니까.

   안이 소년을 다시 만난 것은 정말 우연한 일이었다. 안이 바로 방으로 돌아가고 싶었더라면, 설사 돌아가고 싶지 않더라도 근처 아파트 단지를 경유하지만 않았더라면, 안이 소년을 마주하는 일은 아마 끝까지 없었을 것이다. 안의 기억 속에서 코스모라는 이름은 아마 떨어지는 빗물처럼 순식간에 사라졌을 게 분명했다.

   소년을 마주했을 때 안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안과 소년은 한참 동안 서로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눈동자가 보라색이네. 안의 머릿속에는 그런 실없는 생각만 떠오르고 있었다. 안은 소년에게 우산을 씌워줄 생각도 하지 못했다. 소년 역시 안에게 우산을 씌워 달라, 말할 수 없었다. 소년은 그저 기다렸다. 안이 자신에게 어떻게든 하기를 기다리고만 있었다. 야아옹. 재촉하는 것은 소년의 발치에서 맴돌고 있던 노란 고양이 한 마리뿐이었다.

   “괜찮니?”

   안은 자신의 질문이 우습다고 생각했다. 소년에게 몇 발짝 다가가 우산을 기울여주며 한 말이었다. 비에 푹 젖은 모습이 괜찮을 리가 없었다. 고양이가 안과 소년 사이로 들어와 비를 피했다. 안의 등이 조금씩 젖어갔다. . 소년이 몸을 숙여 고양이를 안았다. 회색 맨투맨의 둥근 넥 라인 조금 아래에 자수 놓여 있던 흰 새 한 마리가 고양이의 몸통 아래에 숨어버렸다.

   “고양이가 자꾸 따라와.”

   변성기가 아직 오지 않은 목소리였다. 안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고양이가 자꾸 따라온다니. 소년에게 곤란한 문제일 것 같긴 했다. 안에게는 소년의 맨다리가 차게 젖어있을 것이 더 곤란한 문제였지만. 소년은 물에 젖어 눈을 찌르는 앞머리를 왼손으로 넘겼다. 네 집에 가도, 괜찮을까. 소년의 말이었다.

   안은 자신의 방을 떠올렸다. 환기가 제대로 되지 않는 방이라 아마 좀 습할 것이었다. 최악의 상황으로는 냄새가 날 수도 있었다. 그래도 더럽지는 않겠지. 안은 소유한 물건이 적은 편이었다. 그것들은 항상 있어야 할 곳에 있었고, 있어야 할 곳에 들어가면 나올 일이 없었다. 바싹 말려놓은 수건들도 화장실 서랍 안에 잘 있을 것이었다. 안은 자신의 겉옷을 소년의 어깨 위에 걸쳐주었다. 고양이는 벌써 눈을 감고 소년에게 온몸을 다 맡기고 있었다.

 

   “나는, 코스모야.”

   소년은 옷을 갈아입으려 하지 않았다. 차게 젖은 흰 양말만을 벗었을 뿐이었다. 마른 수건 한 장을 더 부탁해 바닥에 깔고 앉아있는 소년을 위해 안은 보일러의 전원을 켰다. 자신의 머리를 닦던 수건으로 고양이의 털을 닦아주고 있던 소년의 입에서 나온 말에, 안은 아직도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안녕, 이라고 말해야 하는 거야?”

   자신을 올려다보는 소년의 눈동자를, 안은 피했다. 바닥에 앉아있는 소년의 몸이 너무 작아 보인다고, 안은 생각했다. 책상에 기대어 서 있던 안은 소년을 따라 바닥에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보일러의 열기가 서서히 올라오고 있었다.

   “나는 이 안이야.”

   “.”

   “.”

   안은 코스모, 하고 소년의 이름을 불러주려다 말을 삼켰다. 얼마 전 소년의 발에 밟혔던 꽃들의 향기가 아직도 소년에게서 묻어나고 있는 것 같았다. 빗소리가 계속 창문을 때렸다. 안은 소년에게 배가 고프지 않으냐고 물었고 소년은 딱히 생각이 없다고 했다. 그것은 안도 마찬가지였다. 안은 고양이를 위해 참치 통조림을 따주었다. 안이 고양이에게 줄 만한 것은 그것밖에 없었다.

소년은 앞으로 이 고양이를 어떻게 해야 할지 물었다. 고양이치곤 너무 붙임성이 좋은 녀석이었다. 그새 참치 통조림을 싹 비운 고양이는 소년의 곁에 다시 몸을 뉘었다. 하얗게 뻗은 손가락으로 소년은 고양이의 털을 만졌다. 안은 고양이가 가르릉대는 소리를 내는 걸 난생처음 들었다고 말했다. 소년은 자주 듣는다고 했다. 소년은 새를 손바닥 위에 얹어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고 안은 대답 없이 고개를 저었다.

나도 얘를 기를 형편은 안 되니까. 어쩔 수 없이 비가 그치면 내보내야겠지.”

안은 자신이 한 말이 소년에게 상처가 될까 걱정하며 소년의 표정을 읽었다. 노란색과 하얀색, 그리고 그 두 가지 색의 경계에 있는 수많은 색이 소년의 손가락에 의해 섞였다. 소년은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그래도 가끔 놀러 오는 건 어때? 소년의 말에 고양이가 야옹, 대답했다. 안은 그것이 자신이 마음에 드는 것인지, 자신의 집이 마음에 드는 것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소년의 손길이 마음에 드는 것인지 구분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일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고양이가 놀러 온다는 것이 무엇인지, 놀러 와도 자신이 방에 있을지 알 수는 없었지만.

우산, 빌려 가도 될까?”

안이 보일러를 끄려 몸을 일으켰을 때였다. 소년은 안에게 젖은 수건 두 장을 내밀었다. 안은 아까 자신이 쓰고 왔던 우산을 가지고 가라고 말했다. 창을 통해 들리는 빗소리가 줄어든 것 같기는 했으나 우산을 들고 가서 나쁠 것은 없어 보였다. 안은 소년을 이대로 보내도 좋을지 몰랐다. 몸을 말고 누워있던 고양이도 소년의 발을 따라 움직였다. 안은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오고 있다는 생각을 잠깐 했다. 그것은 안도이기도 했고 아쉬움이기도 했다. 소년은 안의 싸구려 우산을 집어 들었다. 소년은 안이 쓰기에 우산이 너무 작다는 생각을 잠깐 했다. 두 사람은 서로 눈을 마주쳤고 동시에 안녕, 하고 인사했다.

고양이는 그들 사이에서 크게 하품을 하다 소년을 따라나섰다. 고양이가 잠깐 뒤를 돌아보았을 때 안이 마주쳤던 눈동자의 색은 파랑이었다.

 

안은 일주일에 한 번씩, 자신의 집 앞에 고양이를 안고 있는 코스모가 서 있는 것을 봐야만 했다. 처음에는 우산을 돌려주러 왔겠거늘 했던 안도 후엔 놀러 온다는 게 고양이가 아니라 코스모 본인이었던가, 하는 생각을 했다. 코스모가 놀러 올 때마다 안은 코스모를 방안으로 들였다. 안의 죽을 자리를 찾는 계획은 자꾸만 미뤄졌다. 그들은 항상 많은 이야기를 했다. 저번 주에는 길거리의 수많은 동물에 관한 이야기였고 그 이전에는 안의 생활 방식에 관한 이야기였다. 안이 라면을 끓이는 법, 설거지하는 순서, 잠을 잘 때 어떻게 눕는지에 대해 코스모는 의문을 가졌다. 그리고 코스모 본인에 대해 말했다. 코스모는 아직 라면을 맛있게 끓이는 방법을 모르며, 설거지는 수저를 꼭 마지막에 헹구며, 베개를 껴안고 자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안은 코스모의 말하는 방식을 좋아했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할 때마다 코스모가 보랏빛 눈동자를 맞춰오는 것을 좋아했다. 오늘 이야기는, 두 사람의 곁을 맴도는 고양이에 관한 것이었다.

얘 이름은, 미미야.”

얘 암컷이야?”

으으응, 몰라.”

코스모가 말꼬리를 길게 늘였다. 미미는 오늘도 참치 통조림을 먹고 있었다. 처음 봤을 때와 차이가 있다면 뜨거운 물로 기름을 빼서 주었다는 것 정도였다. 그는 넙데데한 얼굴로 요란하게 소리를 내며 참치 통조림을 먹었다. 안의 한 끼 반찬으로 이용될 통조림이었지만 안은 그것이 별로 아깝지 않았다. 명절 선물로 받은 통조림이었고, 어차피 안은 통조림을 크게 좋아하지 않았다. 잘 먹지도 않는 통조림을 주고 고양이를 잔뜩 만질 기회를 얻는 건 나름 합당하다고, 안은 생각했다. 안은 습관적으로 미미의 발을 잡았다. 담배를 짓이길 때보다 훨씬 조심스러운 손짓이었다. 안은 그제야 왜 사람들이 고양이 발바닥을 보고 젤리라고 말하는지 이해했다.

오늘, 밖에 나갈래?”

안은 줄곧 만지작거리고 있던 미미의 발을 놓았다. 밖에 나가면 할 게 있나? 안은 코스모를 빤히 쳐다보았다. 안이 코스모와 비슷한 나이였을 때, 밖에서 무얼 하며 놀았는지 안은 떠올리지 못했다. 아니, 떠올리더라도 세대 차이가 나겠구나. 안의 시선에 코스모는 입을 열었다. 아이스크림, 먹고 싶어. 생각보다 세대 차이가 크게 느껴지는 말은 아니었다, 고 안이 생각했다.

코스모는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골랐다. 맛이 서른한 가지나 있다는 가게에 왔는데도 굳이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골랐다. 안은 제 몫의 슈팅 스타 콘 하나와 바닐라 콘 하나를 결제했다. 아이스크림을 받아 든 코스모는 곧장 야외 테이블로 향했다. 아직은 야외에서 아이스크림을 먹어도 괜찮은 날씨였다. 여전히 하늘은 높았고 미미는 또 낙엽을 입에 물었다. 코스모는 안에게 자신의 아이스크림을 잠시 맡겼다. 코스모는 회색 맨투맨의 소매를 살짝 걷어 올렸다. 하얗게 도드라진 그의 손목뼈에 가을 햇살이 오랫동안 머물러있었다.

안은 코스모가 아이스크림을 먹는 모습이 미미가 물을 마시는 모습과 꼭 닮았다고 생각했다. 주인을 닮는다더니. 주인이 고양이를 닮아버린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안의 입안에서 알갱이 하나가 톡, 소리를 내며 터졌다.

안은 코스모를 처음 만났던 때를 떠올렸다. 그렇게 오래된 일이 아님에도 너무 옛날의 일처럼 느껴져서 낯설었다. 안은 코스모에게서 나던 냄새를 떠올렸다. 그날 두 사람의 머리카락에 묻어있던 햇볕을 떠올렸다. 생각해보면 이상할 정도로 밝은 햇볕이었다. 반짝거리는 빛의 알갱이들이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것 같았다. 그때 그곳은 은하수였다. 그곳을 다시 찾으면 그런 광경을 만날 수 있을까. 안은 코스모와 함께 다시 그곳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코스모는 그때를 기억하고 있을까.

안은 이제 자신이 죽을 장소를 찾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안은 자신의 변화가 좋았다. 그는 자신을 떠나간 수많은 사람에 대해 생각하기도 했지만 그것은 안에게 더는 큰 의미를 지니는 것들이 아니었다. 안은 단지 그들을 추억할 뿐이었다. 모든 감정이 희석된 사진을 보는 것처럼.

그거, 맛있어?”

바닐라 아이스크림으로 얼룩덜룩해진 콘을 들고 있던 코스모가 말했다. 안은 바닐라보다는 맛있을 것이라 했다. 아이스크림을 건네는 안에게, 코스모는 새로운 맛은 무섭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코스모는 안의 아이스크림을 작게 베어 물었다. 코스모의 입에서 슈팅 스타가 제대로 터졌을지 안은 알 수 없었지만 안은 콘을 거두어 들었다. 코스모는 조용히 웃었다.

난 그래도 바닐라가, 좋아.”

그래. 그럼 많이 먹어.”

안은 바닐라가 코스모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안의 입안에서 알갱이 하나가 더 터졌다. 코 바로 아래에서 달콤한 냄새가 올라오고 있었다. 왜 예전엔 아이스크림 하나 사 먹으러 나올 생각을 못 했을까. 안은 코스모에게 자신이 죽을 자리를 찾다 그가 있던 골목을 발견했다는 사실은 말하지 않기로 했다. 와플 콘이 부서지는 소리가 안의 귀에 울렸다. 아니, 어쩌면 그것은 미미가 뛰어오르며 낙엽을 밟아 부수던 소리였을까. 안은 바닥에 떨어진 아이스크림을 보며 생각했다. 미미는 안의 무릎 위에서 천연덕스럽게 야옹, 하며 울었다.

옷에 안 묻은 게 다행이지. 안은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노력했다. 코스모는 한숨을 쉬며 미미의 목덜미를 만지는 안의 모습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러고는 자신 몫의 아이스크림을 서둘러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거칠한 와플 콘의 가루가 코스모의 목 안에 달라붙어 코스모는 몇 번이나 침을 삼키곤 말을 꺼내야만 했다.

아이스크림 사줬으니까, 좋은 거 보여줄까?”

뭔데?”

안은 코스모 쪽으로 몸을 돌렸다. 안은 주머니로 향하던 손을 생각을 바꿔 미미의 등 위에 손을 두었다. 주머니에 담배가 있지도 않았을뿐더러 코스모에게 담배를 쥐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설사 자신이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 하더라도. 너무 어린 코스모에게 자신의 그런 모습이 어떤 영향을 끼칠지, 안은 짐작할 수 없었다.

오늘 안 집에서 자도 돼?”

너가 자고 가는 게 좋은 거야?”

안은 크게 웃었다. 엉뚱하다 싶었다. 어린아이니까 할 수 있는 발상일까. 코스모의 머리를 쓰다듬으려던 안은 코스모의 눈을 보고 그 손을 거두었다. 안은 코스모를 처음 만났을 때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코스모는 자신의 입술에 묻은 아이스크림을 혀로 핥았다.

그거 말고, 따로 있어.”

코스모의 목소리가 공기를 울렸다. 세상의 모든 소리가 그의 목소리에 공명하는 것만 같았다. 안은 짙은 꽃향기를 맡았지만 애써 자신의 착각이라고 여겼다. 그래, 그럼 집에 가자. 안은 입을 열기를 조금 주저했다. 세계의 균형이 자신 때문에 깨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코스모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안은 조금 어지럼증을 느껴 테이블을 짚었다. 소음기를 뗀 오토바이가 빠르게 지나갔다. 안은 너무 많은 소리가 갑자기 머릿속으로 들어온다고 생각했다.

 

안과 코스모는 나란히 누워있었다. 일인용 침대에서 두 사람은 서로 팔꿈치를 맞대고 있었다. 창밖에서 넘어온 가로등 불빛이 천장의 무늬를 따라 번져가고 있었다. 이 시간이면 가끔 들리던 술 취한 사람들의 노랫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밤이었다.

코스모는 잠을 자고 있을까. 안은 코스모가 준다던 좋은 것이 무엇인지 아직 알지 못했다. 두 사람은 그대로 안의 방으로 돌아왔다. 그들의 곁에 미미는 없었다. 그래서 방이 더 조용했다. 미미의 울음소리라도 있었다면 이 밤이 조금 더 가벼웠을까. 안은 어제가 된 낮을 떠올렸다. 바닥에 떨어진 아이스크림이 유난히 크게 느껴지는 기억이었다. 안은 그때의 감각을 아직도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 안에게 그것은 낯선 감각이었다. 누군가의 시선이 그렇게 무거울 수 있다는 것을, 안은 처음으로 알았다.

안의 옆에서 코스모가 뒤척였다. 안은 코스모가 자신 쪽으로 돌아눕는 것을 보고 있었다. 고개만 돌리고 있던 안의 눈과 몸을 완전히 돌려 누운 코스모의 눈이 잠시 마주쳤다. 잠이 안 와? 코스모의 말이었다. 안은 대답을 않았다. 안의 상태는 잠이 오지 않는다기보다는 당장 자고 싶지 않은 것에 가까웠다. 그러나 그렇게 잠이 오지 않는 것도 사실이니, 안은 고개를 끄덕여야 할지 저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가로등 빛에 물든 코스모가 살짝 웃었다.

좋은 거, 보여줘?”

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안은 코스모가 무엇을 할지 전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코스모는 안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안은 코스모의 손이 차다고 생각했다. 원래부터 손이 찼던가, 아니면 지금만 이런 건가. 그래도 안은 그 냉기가 싫지만은 않았다. 저도 모르게 머리에 몰려있던 열이 내려가는 것 같았다. , 감을래? 안은 코스모의 말에 순순히 따랐다. 나는 안이, 좋은 꿈을 꾸면 좋겠어. 안의 귓가에서 코스모의 말이 울렸다.

안의 옆에는 코스모가 앉아있었다. 바람 한 점 없는 날이었다. 두 사람이 앉아있는 벤치 아래에 익숙한 꽃들이 피어있었다. 안은 공중으로 차분히 번지는 그 향이 좋았다. 코스모는 안에게 기분이 어떠냐고 물었고 안은 괜찮다고 말했다. 하늘은 깜깜했고 땅은 두 사람이 앉은 벤치와 그 주변을 감싸고 있는 꽃들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바로 옆에 있는 서로의 얼굴도 뚜렷하게 보기 힘들 정도였다. 안은 꼭 영화가 시작하기 직전 같다는 생각을 했다. 비슷해, 하고 코스모가 말했다. 안은 코스모가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해 코스모를 한 번 바라보았다가, 다시 먼 하늘로 고개를 돌렸다. 어둠 때문에 하늘과 땅의 경계가 흐려져 있었다. 안의 뒤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수많은 꽃잎이 날렸고. 코스모는 안의 손을 잡았다.

코스모?”

이제부터, 안이 보고 싶은 걸 보는 거야.”

안은 문득 코스모의 얼굴이 너무 잘 보인다고 생각했다. 안은 무심결에 시선을 하늘로 두었다. 은하수가 있었다. 하늘을 거대한 무대로 삼아 별들이 춤을 추듯 천천히 회전하고 있었다. 별들의 운행이었다. 가끔 바람이 불어왔고, 그럴 때면 별들은 더욱 빠르게 몸을 움직였다. 바람에 강물이 흐르는 소리가 작게 섞여 들어왔다.

나는 안의 우주야.”

코스모의 목소리가 안의 귀에 또렷하게 닿았다. 나는 안을 위해 태어난 존재야.

안은 눈을 떴다. 여전히 어두운 천장이었다. 안은 자신의 이마에서 코스모의 손바닥이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안의 이마에 엷은 땀이 배어 나와 있었다. 천장이 어두워? 안은 문득 든 의문에 창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창밖의 가로등이 그새 고장이 난 모양이었다.

코스모?”

내가 꿈을 꾼 건가? 안은 자신의 시간 감각이 흐려지는 것을 느끼며 코스모를 불렀다. 아직 어둠에 익숙해지지 않은 눈이 허공을 헤매고 있었다. 안은 코스모 쪽으로 돌아누웠다. 방을 비추는 빛이 없을 게 분명했음에도 안은 코스모의 얼굴이 뚜렷하게 보였다. 그의 보랏빛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그 눈동자가 우주 같다고, 안은 생각했다.

어떻게 된 거야?”

안의 물음에 코스모는 소리 없이 웃기만 할 따름이었다. 코스모는 안에게 조금 더 가까이 붙어 숨이 많이 들어간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는, 코스모야, 하고.

 

안은 더는 담배를 사지 않게 되었다. 죽을 자리를 찾지 않게 되기도 했다. 그는 죽을 자리 대신 일자리를 찾았고, 그 일은 꽤 잘 이루어지고 있었다. 안은 그런 자신의 변화가 마음에 들었다.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자신이 좋았다. 하지만 코스모가 나오는 꿈을 다시 꾸는 일은 없었다. 코스모와 안이 그날 이후 함께 잠을 잔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안은 그 꿈을 좋아했다. 그래서 안은 그 날의 환상을 자주 되새겼다. 코스모가 했던 모든 말들이 또렷하게 안의 머릿속에 남아있었다.

코스모는 그 이후로도 꼭 일주일에 한 번씩 안을 찾았다. 미미가 안을 찾는 빈도는 약간 늘었다. 코스모와 함께 오지 않을 때 미미는 항상 그 작은 발로 창문을 열고 안의 방에 무단침입을 했다. 안은 기꺼이 창문을 잠그지 않고 다니게 되었다. 안은 외출 후 방문을 열었을 때 미미가 방 안에 있는 것이 좋았다. 안은 왜 사람들이 동물을 키우는지 조금 이해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코스모는 그 이후로도 여전했다. 여전히 안이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했으며 여전히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좋아했다. 하루는 안이 코스모에게 짧은 바지를 입으면 춥지 않으냐고 묻기도 했다. 코스모는 자신은 괜찮다고 말했다. 왜냐면, 자신은 코스모니까. 그것은 안이 코스모의 자기 인식에 관한 생각을 해보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괜히 쓸데없는 생각을 했다고, 안은 넘겼지만.

안은 모든 일이 잘 풀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코스모가 없어지기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안이 초겨울이 시작되었다는 뉴스를 보았을 즈음이었다.

미미야.”

안은 미미의 등을 쓰다듬으려 손을 뻗었지만 그는 허리를 쓱 빼는 것으로 안의 손길을 피했다. 안은 야속한 기분이 들었다. 그것은 코스모에게도 그랬다. 그리움의 반작용이었다. 안은 코스모가 없어지고서야 코스모가 어디에 살고 있었는지 자신이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안은 코스모와 처음 만났던 그 골목을 찾아보았지만 그곳엔 시든 꽃들만이 가득했다. 안은 겨울의 시작이 자신이 일자리를 구했을 때와 같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코스모는 그래서 나를 떠났나. 안이 생각했다. 코스모가 더는 자신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것은 아닐까. 안은 자신의 구직활동을 처음으로 후회했다.

안의 꿈에는 이제 코스모가 나오지 않았다. 별들이 회전하지도 않았다. 안의 꿈에서는 매일 별들이 쏟아졌다. 안은 자꾸 이렇게 별들이 떨어지면 언젠가 하늘에 별이 하나도 남지 않을까 봐 두려웠다. 별이 남지 않을 때면 이 꿈이 완전히 깨져버릴까 봐 두려웠다. 안은 자신이 갑자기 어른이 되어버린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세상에 내팽겨진 느낌과 비슷했다. 그 꿈을 꾸다 눈을 뜨면 안은 눈가에 맺혀 있던 눈물이 관자놀이를 타고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어쩌면 예정되어 있었던 이별일지도 몰랐다. 안은 그렇게 자신의 마음을 다스렸다. 그렇게 일상을 이어가려고 노력했다. 안은 코스모를 잊어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원래 자신에게 속해있던 사람은 아니었지 않으냐며 자신을 위로하면서. 안은 자신이 잊는 것만은 잘한다고 믿고 있었다. 그리고 하루하루 그 믿음은 깨져가고 있었다.

 

야옹. 미미의 울음소리에 안은 눈을 떴다. 어쩐지 가슴이 묵직하더라니. 너 때문에 어제 가위눌릴 뻔 했어. 안은 괜히 미미에게 말을 걸며 자신의 가슴 위에 있는 그를 팔로 밀어내었다. 안은 간밤에 꾸었던 꿈을 떠올렸다. 유성우가 끝났다. 대신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안은 벤치에 앉아 파랗게 떠오르는 새벽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안은 그것이 자신과 코스모의 관계가 완전히 끊어져 버렸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은 욕실 문이 열리기 전까지 유효했지만.

미안. 욕실 좀, 썼어.”

코스모가 머리를 수건으로 닦으며 나오고 있었다. 안은 그런 코스모를 바라보기만 했다. 안에게 그 재회는 너무 갑작스러운 것이었다. 코스모는 안의 침대에 걸터앉았다. 안은 생각보다 별 느낌이 들지 않는 자신에 놀랐다. 좀 더 반갑거나, 화가 나거나 할 줄 알았는데. 그런 그들 사이에 미미가 끼어들었다. 자꾸 팔에 머리를 비비는 미미 때문에 코스모는 그의 머리에 손을 얹고 있어야 했다.

어딜 갔다 왔어.”

안은 괜히 말이 퉁명스럽게 나왔다. 코스모는 멋쩍게 웃었다. 코스모들이 원래 좀 바빠. 안은 몸을 일으켰다. 안은 코스모가 그새 좀 큰 것 같다고 생각했다. 목소리도 좀 바뀐 것 같고. 슬슬 변성기가 오는 걸까. 코스모는 안의 손을 잡았다. 따뜻했다.

집 비밀번호는 어떻게 알았어.”

으응, 글쎄.”

코스모가 능청스레 시선을 돌렸다. 저것도 나는, 코스모야로 해설될 수 있는 것일까. 안은 코스모에게 들을 이야기가 많다고 생각했다. 코스모는 목에 걸치고 있던 수건을 잘 개어 무릎 위에 두었다. 코스모는 어떻게 말을 시작해야 할지 찾고 있었다.

일단, 미안해.”

나는 너가 영영 떠나간 줄 알았어.”

안은 아직 코스모의 바뀐 목소리가 익숙하지 않았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사람을 맞이하고 있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이 상황이 사실 꿈인 것은 아닐까? 안은 코스모 몰래 자신의 허벅지를 꼬집었다. 다행히도, 허벅지가 얼얼했다.

안을 떠날 리가 없잖아. 나는 안을 위해 태어났는걸.”

그래, 그게 무슨 말이야?”

나는, 코스모라는 거야.”

코스모가 웃었다. 익숙한 꽃향기가 코스모에게서 났다. 코스모의 머리카락이 빛을 받아 하얗게 반짝였다. 안은 그의 보랏빛 눈동자가 그리웠다. 안은 고개를 숙였다. 그래, 나는 저 말이 듣고 싶었던 걸지도 몰라. 코스모가 안의 어깨를 안았다. 코스모의 무릎 위에 있던 수건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안은 코스모가 자란 것이 확실하다고 생각했다.

-

 

16년 5월에 썼던 글.

코스모 시리즈의 첫 번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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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네토우

 

 

깊은 눈물의 세계

Y A G I

 

 

   어쩌면 나는 이미 알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아마 알고 있었을 것이었다. 내 주위를 지키던 사람들은 전부 언젠가 떠나갔으니까. 사실 자신의 친구니, 가족이니, 연인이니 하는 사람들은 모두 언젠가는 영원히 곁을 떠나고 말 것이란 것을 모두들 알면서도 모른척하고 있을테지. 그러니까 모두들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것 아닐까. , 키리시마 토우카는 그 끔찍한 사실을 깨달았던 어느 어린 시절부터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도무지 공부가 되지 않는 날이었다. 수험 공부도, 미래에 대한 걱정도 나를 현실에 잡아둘 수 없었다. 카네키 켄이 떠났다. 나는 그를 잡을 수 없었다. 내게는 그를 잡을 이유도, 권리도 없었다. 대신에 하늘에선 자꾸만 눈이 내렸다.

   차가웠다.

   그 때 나는 처음으로 생각했다. 그 때 카네키 켄, 너의 고백을 받았어야만 했나? 그랬더라면, 나는 너를 잡을 수 있었을까? 다시 너와 함께 안테이크로 돌아가 평소처럼 지낼 수 있었나? 우리의 삶이 바뀌지 않을 수 있었나? 나는 다시, 다른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자격이 생길 수 있었는가?

   내가 선택하지 않은 미래는 언제나 함부로 찬란했다. 책을 덮고 스탠드를 껐다. 방 안이 순식간에 어둠에 잠겼다.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기 전에 침대로 기어들어가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숨이 막혔지만 여전히 눈물을 나오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울어봤던 적은 아무리 기억을 헤집어봐도 떠오르지 않았다. 옛날 옛적의 기억들이 으레 그렇듯이 눈물의 기억마저 미화되어버렸는지 어쩐지 굉장히 그리운 느낌이 들었다.

   천장의 무늬를 열다섯 개 째 따라 그리고 있었다. 무늬 하나하나에 카네키 켄에게 했던 말들이 담겼다. 언제부터 나는 그를 좋아하게 되었던 건지 찾고 싶었다. 그 기억만 도려내면 지금의 나는 괜찮을 수 있을까. 생각해 보면 나는 모든 순간 그를 사랑하고 있었던 것만 같았다. 처음엔 분명히 싫었는데. 당장 죽어버리면 좋겠다고 생각할 만큼 싫었는데.

   카네키 켄을 바라보면 자꾸 어린 시절의 내가 떠올랐다. 어찌 할 줄 모르고 삶의 물결에 휩쓸리기만 했던 무력한 모습이었다. 그 때 나는 모든 것을 잃어버렸었다. 어쩌면 나는 나 자신조차 잃어버린 것이 아니었던가. 나는 분명히 눈물도 많고 사랑도 많았던 것 같은데.

   나는 인간이 싫었다. 인간은 내 삶의 부분들을 앗아가기만 했다. 그래서 인간이었던 그 녀석도 싫었다. 고소하기도 했다. 화풀이라는 걸 알면서도 인간인 그가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이 아주 조금은 즐거웠다. 인간은 그래도 싸. 인간이니까. 내가 선택할 수 없는 삶을 아무렇지도 않게 살 수 있었으니까. 카네키 켄이 인간과 구울의 어중간한 삶에 익숙해졌을 무렵, 나는 인정했다. 그가 더 괴로워하길 바랄 수 없다고. 그러기엔 그는 너무 좋은 녀석이라고.

   구울은 죄가 많은 생물이었다. 나는 카네키 켄이 구울이 된 것이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이 좋은 녀석의 삶에 어째서 이런 중죄가 끼어들었어야만 했는지. 카네키 켄 본인은 아마 내 생각을 극구 부인할 것 같지만. 짧은 웃음이 나왔다. 그 모습이 조금은 귀여울 것 같아서 다음에 보면 너는 좋은 녀석인 것 같다고 꼭 말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나에 대한 마음이 바뀌지는 않았을지 먼저 물어보기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다음에 만나면. 나는 눈을 감았다. 공기 중에 그의 냄새는 없었다.

   내일이 오면 나는 또 나의 삶을 살게 될 것이었다. 학교에 가고, 요리코의 음식을 먹고, 수험 공부를 하고, 그런 일상을. 카네키 켄의 일상은 어떻게 되어버렸을까. 자신의 삶을 잃어버린 그는. 어디로 가서 무엇을 할 것인가. 내가 알던 카네키 켄은 이미 이 세상에서 없어져버렸다. 그는 여전히 다정할 수 있을 것인가. 여전히 남을 배려하고, 남의 흠을 덮어주고,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보이며, 나를 사랑해줄 수 있을 것인가.

   주먹으로 가슴을 세게 쳤다. 얼얼한 통증이 왼쪽 가슴을 때렸다. 그래도 자꾸 나는 가슴을 쳤다. 그러고는 몸을 둥글게 말고 그 주먹을 꼭 껴안았다. 심장이 아팠다. 심장까지 내 주먹이 닿지도 않았을 텐데 자꾸 심장이 아팠다.

   솔직히 겁이 났다. 카네키 켄이 죽어버릴까봐. 내가 알던 카네키 켄이 이미 죽어버렸을까봐. 그는 너무 많은 것이 바뀌었다. 그의 눈에는 너무 많은 슬픔이 들어있었다. 나는 그가 나와 비슷한 사람이 되었을까봐 겁이 났다. 아마 나에게 두 번의 기회란 없을 것이었다. 항상 그랬듯이. 하지만 항상 그랬듯이, 포기하기는 너무 힘들었다.

   어물어물 잠이 떨어지고 있었다. 자고 싶지 않았는데 몸은 그게 아니었을지도. 최근에 무리한 것은 사실이었다. 특히 카네키를 떠나보낸 이후로는 더 그랬지. 일상에 생겨버린 공백을 메우기 위해서였다. 그 후폭풍이 몰려오는 것인지. 그래, 차라리 이대로 잠들어버리면또 내일이 오니까…… 괜찮을지도, 몰랐다.

 

   꿈을 꿨다. 카네키 켄이 나를 보고 있었다. 하얗게 세어버린 머리카락이 곧 내 얼굴 위로 떨어질 것 같았다. 순간 눈을 동그랗게 뜨던 그가 살짝 웃어보였다. , 예쁘네. 꿈속에서도 입술이 참 예쁘다고 생각했다. 어쩐지 되게 얇아보여서, 입술이 막 반짝반짝 하는 것 같고, 그런 것 같고.

   “깨울 생각은없었는데.”

   “아냐, 나 안 깼어…….”

   그의 목소리는 왠지 잠겨 있었다. 나는 팔을 뻗어 그의 뺨을 쓰다듬었다. 그의 등 뒤에서 새벽하늘이 뿌옇게 밝아오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를 껴안았다. 좋은 냄새가 났다. 카네키 켄의 냄새는 뭔가 무게감이 있으면서도,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해줬다. 나는 눈을 꼭 감았다. 아침 햇살이 눈을 찌르면 바로 이 꿈에서 깨어버릴까봐. 나는 영원히 이렇게 그와 함께하고 싶었다.

   “그 때, 너를 싫어한다고 했는데.”

   거짓말이었어.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파고 들어오는 머리카락의 온도는 딱 기분 좋을 정도로 선선했다. 카네키 켄은 낮게 웃었다.

   “알고 있었어.”

   “너의 그런 점은 좀싫을지도.”

   카네키의 눈은 여전히 따뜻하게 웃고 있었다. 우리는 아주 오랫동안, 내가 꿈에서 깰 때까지 입을 맞췄다.

 

   어쩌면 카네키 켄의 냄새는 착각하기 쉬운 것일지도 몰랐다. 그의 냄새는 어디에나 있었다. 책들이 가득 꽂힌 책장에 가까이 가면 그의 냄새가 났다. 햇볕에 포근하게 말린 이불에서도 그의 냄새가 났다. 가끔은 젖어있는 이슬에서도, 오랫동안 문을 열지 않은 지하실에서도 그의 냄새가 났다. 어쩌면 내가 좋아하는 모든 것에서 그의 냄새가 난다고 착각하게 되어버린 것일지도.

   늦잠을 자고 싶었는데 그런 일은 없었다. 도리어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버렸다. 해가 떠오르기도 전에 눈을 떠버렸다. 팔을 쭉 뻗어 기지개를 폈다. 뻐근하게 굳어있던 근육들이 바르르 떨리며 몸이 개운하게 풀렸다. 어제 제대로 끝내지 못한 공부를 해놓을 기회일지도 몰랐다.

   덮어놓은 문제집 위에 올라가 있는 편지가 아니었다면 아마 그 계획은 완벽하게 달성되었을 것이었다. 펜이 어제와는 다른 위치에 놓여 있었다. 고백은 다음에 한 번 더 제대로 할게. 사랑해. 편지봉투 위에 급하게 쓴 티가 나는 글씨가 놓여있었다.

   사람의 70%는 수분으로 이루어져있다고 책에서 읽었다. 내 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다만 남들과 내가 다른 점이 있다면, 내 몸의 70%를 차지하고 있는 수분은 눈물이라는 점이었다. 그것들을 모두 다 흘려보내면, 나에게 남는 것은 무엇인지 항상 불안했다. 그래서 나는 울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 나는.

   편지를 제대로 읽기 전에 눈물로 다 번져버릴까봐 편지를 멀리 치워두었다. 잠옷 소매로 눈을 가리고 큰 소리로 엉엉 울었다. 모두가 깊이 잠든 새벽이라 다행이었다. 나는 나를 놓아버릴 수 있었다. 그리고 그 70%를 다른 것으로 채울 수 있었다.

   카네키 켄. 내가 알던, 내가 사랑했던 카네키 켄은 그 빈자리를 온전히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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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타요모우타 #섹스 장면 나옵니다(오직 섹스 뿐..) #요모가 박는다 #가벼운 BDSM #카네츠키 언급 있음(짧게)

 

 

 

 

   요모의 애무는 사실 우타에게서 배운 것이 다였기에, 그의 방식은 우타의 그것과 매우 흡사했다. 요모는 혀끝을 세워 우타의 몸 곳곳을 핥았다. 요모가 우타의 귀 아래의 목을 핥을 때 우타는 저도 모르게 몸을 바르르 떨었다. 물론 요모가 그 신호를 놓칠 리가 없었다. 달아오른 요모의 숨이 우타의 귓속으로 자꾸 넘어갔다. 우타는 그 간질거리는 감각에 어쩔 줄 몰라했다. 안 그러고 싶은데 몸이 자꾸 움찔거리며 요모의 숨에 반응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우타는 자신을 아예 놓아버릴 수도 없었다. 요모의 명령 때문이었다.

   “괜찮아. 한 번 쯤은 봐줄게.”

   결국 우타는 요모의 손에 끈적한 정액을 쏟아냈다. 요모가 혀끝으로 우타의 유두를 자극했을 무렵이었다. 요모는 그곳이 우타의 약점이라는 사실을 알고 그러했을까. 우타는 고개를 푹 숙였다. 요모는 제 손 안의 것을 닦아내지 않고 능숙하게 혀로 핥아 삼켰다. 우타는 그 소리를 생생히 듣고 있었다. 웬만한 상황에서는 평정심을 잃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그였다. 언제나 자신만만하다고 해야할지, 아니면 능청스럽다고 해야할지. 지금까지 우타가 외부에 보여주었던 캐릭터는 그런 것이었다. 우타 본인도 자신이 그런 유형의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런 섹스를 한다면 당연히 주인님의 위치에 본인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설사 누군가를 주인님이라고 부르게 되더라도, 이 정도로 애가 타지는 않을 줄 알았었다.

   그 뒤로 요모는 우타의 몸에 손을 대지 않았다. 침대 위에서 우타도, 요모도 꿈쩍하지 않았다. 이것이 요모의 벌이라는 것을 우타는 요모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우타는 요모가 어떤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을지 확인할 수 없었다. 우타의 페니스는 요모가 그의 정액을 삼키는 소리를 들을 때부터 꼿꼿이 서 있었다. 우타는 그 모습을 곁눈질로 볼 수밖에 없었다. 단단한 팔뚝을 타고 흐르는 정액과 그것을 마치 고양이처럼 핥는 요모의 모습을. 요모는 정성스레 자신의 팔뚝을 핥으면서도 시선은 우타에게 줄곧 두고 있었다. 우타가 자신의 모습을 봐주길 바라는 얼굴이었다. 요모의 깊은 눈동자가 출렁거리고 있었다. 그런 요모가 먹고 있는 것이 자신의 정액이라는 것을 문득 깨달은 순간 우타는 더 이상 요모를 곁눈질로도 바라볼 수 없게 되었다.

   “우타.”

   “?”

   “말 편하게 해. 이제 주인님 아니니까. 가만 있어봐. 손 풀어줄게.”

   요모는 정말로 지금 이 상황을 끝내려 하는 것일까? 우타는 요모가 자신의 성기 상황을 눈치 챘는지, 그렇지 않은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요모는 이미 이런 플레이에 흥미를 잃어버린 걸지도 몰랐다. 어쩌면 요모는 원래 그들이 하던 섹스로 노선을 바꾸고자 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지금 우타는 요모를 박고 싶은가?

   우타의 어깨에 요모의 손이 닿았다. 일부러 자신이 사정을 했던 손을 가져댄 것일까? 우타는 짧은 애무 상황 동안 머릿속에서 수없이 그려봤던 요모와의 섹스를 떠올렸다. 요모의 아래에서 앙앙대는 자신의 모습……. 새삼 느꼈다. 요모는 존나 잘 박을 것 같았다.

   “주인님.”

   “말 편하게 하라니까.”

   “제발, 끝까지…….”

   우타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몸을 살짝 떨었다. 우타의 등 뒤에서 요모가 한숨을 내쉬는 건지 웃는 건지 알 수 없는 소리를 냈다. 요모의 손끝이 우타의 어깨와 팔뚝을 타고 흘러내려갔다. 요모의 입술이 목과 등을 연결하는 등의 어느 부분에 닿은 순간 우타는 몸을 움찔하며 엷은 신음소리를 뱉었다.

   “역시 발정났구나.”

   “주인님.”

   “괜찮겠어? 지금?”

   “당장!”

   어쩌면 요모에게 우타의 의견 따위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우타는 그래도 상관없었다. 아니, 우타는 정말로 그런 상황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잠시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생각에 우타의 물건은 벌써부터 멀건 액을 흘리고 있었다. 우타는 앞으로 고꾸라지는 그 순간에도 허리에 힘을 줘 엉덩이는 아래로 쳐지지 않도록 했다. 이제 요모의 손은 우타의 허리에 있었다. 요모는 적어도 침대에서 자비로운 타입은 아니었다.

   “하아, !”

   “…… 녹진거리네.”

   “흐읏, , 거기, 거기! , !”

   “여기가 좋아?”

   숨을 쉬기가 괴로웠다. 요모의 움직임에 따라 우타의 코와 입이 자꾸 침구에 눌렸다. 어깨에 무게가 쏠려 우타는 어깨가 자꾸 아픈 것 같았다. 그럼에도 우타는 내색하지 않았다. 딱 좋은 정도의 불편함이었다. 쾌감이 배가되기만 하는 불편함. 솔직히 말해서 우타는 요모가 삽입을 했을 때부터 갈 것 같았다. 가고 싶어서 미칠 것만 같았다. 물론 그것을 요모가 허락해줄리는 없었다.

   “주인님…….”

   “우타, 너를 처음 봤을 때부터, 나는 이래보고 싶었어. 지금까지 참느라, 고생했는데.”

   “, ! 이제는, 매일 범해, 주세요.”

   우타는 부정확한 발음으로, 떠오르는 모든 말을 지껄였다. 우타에게 이런 취향이 있었던가? 우타 본인은 그런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그저 지금 이 상황에 집중하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요모는 쉴 새 없이 허리를 움직이며 우타의 등에 몇 번이고 입을 맞추었다. 그럴 때마다 우타는 몸을 움찔, 떨며 더욱 강한 자극을 달라고 애원했다. 더 깊숙하게, 또는 더 빠르게. 그리고 요모는 우타의 그런 요구를 충실히 수행했다.

   우타의 물건은 이미 쿠퍼액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요모는 지치지도 않는지 쉬지도 않고 허리를 움직였다. 그는 집요하게 우타의 포인트만을 노려 자극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우타를 끝까지 보내지 않으려하는 것이 우타는 야속했다. 우타의 목소리는 이미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여기서 가버리면 침대 더러워지잖아.”

   “하지만하아, ! 못 참 겠흐읏…….”

   “이렇게 꼭꼭 물어대는 게 너무 좋아서, 더 이러고 싶은데.”

   요모는 우타의 위로 거의 엎어지듯 몸을 숙였다. 요모의 거친 숨소리가 우타의 몸 위로 쏟아졌다. 요모는 손을 뻗어 우타의 아랫배를 더듬었다. 우타의 페니스는 뜨거운 열기를 뿜으며 간헐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요모는 우타의 물건을 천천히 매만졌다. 일부러 귀두를 자극하지 않고 손바닥을 이용해 부드럽게 자극을 가했다. 우타는 순간 튕기듯 몸을 움직였고 그 탓에 무게중심을 잃어 잠시 잔기침을 캑캑거렸다. 물론 그 와중에도 요모의 손은 멈추지 않았다. 요모는 이제 깊고 느릿한 페이스로 우타를 괴롭히고 있었다.

   “하읏, , 제발, 이젠 못 참아요…….”

   “먼저 갈래?”

   “먼저, .”

   우타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그 와중에도 요모와 함께 가고 싶었다. 이 타이밍에, 같이 절정을 맞이하고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요모는 이미 우타를 보내기로 결정한 것 같았다. 우타는 머리가 아득해지는 것 같았다. 글자 그대로 머릿속 어딘가가 하얗게 날아가버리는 것 같았다. 아마 마지막 순간에 요모가 우타의 목덜미를 추켜올리듯 움켜쥐었던 것도 큰 이유 중 하나였을 것이었다. 우타는 그 순간 무의식중에 입술을 너무 세게 깨물었다.

   우타가 절정을 맞이한 이후에도 요모는 천천히 허리를 움직였다. 요모는 우타의 손목을 묶고 있던 줄을 풀었다. 우타는 입술 안쪽을 혀끝으로 핥으며 비릿한 맛을 느꼈다.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모든 숨이 거칠었다. 팔로 몸을 받치고 엎드린 우타의 몸이 한 번 크게 들썩였다. 요모는 이미 우타의 약점을 알아버렸고 그 포인트를 한 번 더 찾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잠시 쉴 시간도 주지 않은 채 요모는 다음 섹스를 이어갔다. 요모는 우타가 한 번 더 정액을 쏟아놓고 나서야 처음으로 절정을 느꼈다.

 

   “결국 이불 더러워졌네.”

   요모는 고개를 끄덕였다. 새삼섹스를 할 때는 말이 많아지는 타입이군. 우타는 그 말을 속으로만 삼켰다. 그런 요모가 싫지 않았기 때문이었고, 혹시라도 그 사실을 요모가 알았을 때 어떤 이유에서든 그 행동을 멈출지도 모른다고 걱정했기 때문이었다.

   우타는 요모가 자신을 봐줬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었다. 가능하다면 요모는 정말 밤새도록 섹스를 할 수 있지 않을까. 한 번 사정을 하고서도 꼿꼿하게 서 있는 요모의 물건을 보고 우타는 단 침을 삼켰다. 이것도 재능이라면 재능이지.

   “렌지는, 이런 거 어디서 배웠어?”

   “카네키한테.”

   “?”

   “그쪽도 가끔 한대.”

   우타는 순간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그 카네키 군이? 우타는 머릿속에서 목줄을 쥐는 쪽이 카네키일 것이지, 미식가일 것인지를 재보았다. 잘 떠올리기가 쉽진 않지만어쩐지 카네키 군 쪽일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 얘기까지 하는 사이야?”

   “어쩌다보니.”

   그 뒤로 그들 사이에 짧고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먼저 잠자리를 준비한 것은 우타 쪽이었고 자연스럽게 요모도 그 뒤를 따랐다. 여기부터는 평소 하던 섹스와 별다를 것이 없었다. 그들은 자리에 누워서 입을 맞췄고, 머리를 맞대고 눈을 감았다. 가끔씩은 섹스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가기도 했고. 어쨌든 우타가 섹스를 주도하던 때의 이야기였다. 단순히 행동만 보자면 다시 우타에게 섹스의 주도권이 넘어온 것처럼 보였지만우타는 무언가 다른 느낌을 받았다.

   그저 느낌이었기 때문에 우타도 그것을 확신할 수는 없었다. 다른 말로써 그 느낌을 표현하기도 어려웠다. 굳이 표현하자면 이런 느낌이었다. 그들은 언젠가 또 이런 섹스를 하게 될 것이고, 그것은 그리 먼 날이 아닐 것이다.

   “목줄은 버리지 말자.”

   우타는 스스로 그 느낌에 확신을 땅땅 박아 넣었다. 우타에게 이 섹스는 특별한 경험이었고, 사실은 특별함 이상이었다. 요모는 짧은 웃음을 흘렸다. 우타는 입을 몇 번 옴질거렸다. 주인님, 이라는 말을 한 번만 더 해보고 싶어서.

   “다음에는 렌의 얼굴을 보면서 하고 싶어.”

   “좋아. 기대하고 있어.”

   자신을 내려다보는 요모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그것은 분명히 굉장히 자극적인 표정일 것이 분명했다. 우타는 잠시 수그러들었던 자신의 물건이 단단해지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요모라면 지금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우타는 몸을 들어 요모의 이마에 가볍게 입술을 맞췄다. 그새 땀이 식었는지 이마가 꽤 보송했다. 졸려? 우타의 질문에 요모는 애매하게 고개를 저었다. 우타는 시선을 요모에게 둔 채 손만 뻗어 밀어둔 목줄을 손의 감각으로만 찾았다. 요모 역시 우타의 생각을 눈치 챈 모양이었다. 요모는 씩 웃어 보였다. 우타는 그 입술에 입을 맞출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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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타요모우타 #섹스 장면 나옵니다(오직 섹스뿐..) #요모가 박는다 #가벼운 BDSM

 

 

   “우타. , 해보고 싶은 게 있는데.”

   “그게 뭘까?”

   우타는 몸을 돌려 요모를 바라보았다. 무겁게 닫힌 요모의 입술을 바라보면서, 우타는 조금 전에 끝냈던 섹스를 다시 떠올리고 있었다. 여전히 좋았지. 렌지는 체력이 좋아서, 무언가를 해보는 맛이 있다니까. 우타는 요모의 입에서 나올 해보고 싶은 것이 무엇일지 기대되었다. 지금 이 타이밍이라면 역시, 다음 섹스에서 해보고 싶은 것이겠지.

   그들이 그렇게 다양한 섹스를 해본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해볼 만한 체위는 얼추 다 해봤을 것이었다. 욕실에서 처음 요모를 보내버렸을 때, 우타는 그의 곧은 목을 한 번 물어보고 싶은 충동에 머리가 어질어질할 정도였다. 섹스 전에 자신이 허락하기 전까지 사정하지 말라는 얘기를 하지말걸, 하는 생각도 들 정도였다. 물론 요모가 수도 없이 갈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가끔씩은 제법 축축한 목소리로 애원하는 것을 보는 것은 아주 기분 좋은 일이었지만.

   “주인님, 하고 말하는 거.”

   “렌지는 그런 것도 해보고 싶었어?”

   “. 우타가.”

   싱긋 웃으며 요모의 머리를 매만지려던 우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요모를 바라보았다. 요모는 우타의 시선을 살짝 피했다. 혀로 입술을 한 번 핥던 요모가 입을 열었다.

   “주인님, 하고 말하는 우타를 박아보고 싶어.”

   그 말을 하고 요모는 우타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몇 번 박히다보면 한 번쯤은 박아보고 싶기 마련이지. 우타가 아예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은 아니었다. 우타 쪽에서 요모를 주인님, 하고 부르게 될 줄은 물론 몰랐지만.

   우타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타는 요모의 표정이 풀린 것을 확인하고 다시 몸을 돌려 천장을 보고 누웠다. 생전 없었던 독특한 섹스가 될 것 같았고, 우타는 그것이 제법 기대되기도 하였다.

 

   “저기, ?”

   “주인님, 해야지. 안 그래?”

   요모는 손끝으로 우타의 목을 톡톡 두드렸다. 두터운 가죽으로 만들어진 검은 목줄이 퍽 어울렸다. 어디서 준비했는지, 얇은 사슬까지 달려있는 목걸이였다. 우타는 침을 한 번 삼켰다. 벌써 시작인가, 싶기도 했고 이전에 그가 봐왔던 요모와 무언가 다른가 싶기도 했다. 밧줄이 손목을 조금 파고 들었는지 벌써부터 손목이 욱신거렸다. 어차피 구울이니까 좀 다쳐도 괜찮다고 자신만만하게 말했던 것이 잘못했던 것이었나. 우타는 침대에 앉아있는 요모를 올려다보았다. 요모의 눈동자에선 잔잔한 불빛이 튀고 있었다.

   “한 번 해볼래?”

   “주인님.”

   “옳지. 착하다.”

   그 말을 하면서 요모는 오른손으로 쥐고 있던 자신의 물건을 우타의 입술에 꾹 밀었다. 우타는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알면서도 곧이곧대로 그의 의지에 따르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우타는 혀로 이미 딱딱하게 발기된 끝만을 낼름 핥았다. 요모는 그런 우타의 뒤통수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우타는 몸을 가볍게 움찔, 떨었다. 요모의 것이 강제로 입 안으로 들어올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요모는 이런 상황을 기다릴 줄 알았다. 그것은 전적으로 우타가 만들어낸 결과물이었다.

   “하기 싫어?”

   “그런 건 아니지만. 그게.”

   “말이 짧네?”

   우타는 심장이 뜨끔하는 기분이었다. 우타는 지금까지 요모의 이런 모습을 생각하지 못했다. 우타가 알고 있던 침대 위의 요모는 꽤나 순종적인 편이었다. 우타의 손길을 순순히 따라 반응하고, 때로는 매달리고, 기껏해야 자존심을 좀 세우는 것이 다인 그런 스타일이었는데.

   “, !”

   우타는 자신의 입안으로 밀려들어온 요모의 것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요모는 본격적이었다. 본격적으로 주인이 되고자 하고 있었다. 요모는 자신이 움직이지 않고 우타의 머리를 움직이는 것을 택했다. 우타의 손목이 쓸리고 있었다. 우타는 얼굴을 살짝 찌푸리고 있었지만 그것이 별로 아프지는 않았다. 오히려 자극적이었다. 내가 왜, 흥분하고 있지? 우타는 속으로 자신에게 되물었다.

   처음 요모의 제안을 받아들였을 땐 나쁘지 않은 경험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타는 버진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그쪽 경험이 많은 것은 또 아니었다. 우타는 박는 것을, 그러며 자신 아래에서 달뜬 숨을 뱉어내고 있는 표정을 바라보는 것을 더 선호하는 편이었다. 보통 우타는 그쪽을 더 자극적이라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은? 심지어 아직 삽입이 이뤄지지도 않은 상태인데?

   요모가 우타의 머리에서 손을 땐 이후에도 우타는 스스로 머리를 움직였다. 우타의 머리 위에서 요모가 길게 숨을 내뱉는 소리가 들렸다. 우타는 뒤로 묶인 손가락을 꿈지럭거렸다. 제대로 움직이고 싶었다. 조금 더 깊이 빨아들이고 싶었고, 손가락으로 요모의 허리나 허벅지를 쓰다듬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요모가 그것을 허락할 리는 없었다. 대신 요모는 손끝으로 우타의 머리를 가볍게 밀어내어 그의 입에서 자신의 물건을 빼냈다. 어둡게 빛나는 조명 아래서 요모의 물건이 번들거렸다. 우타는 요모를 올려다보았다. 요모는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괜찮겠어?”

   우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지 않을 리가 없었다. 요모는 그런 우타의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더니 턱을 들어 올려 자신을 보게 했다.

   “주인님이 물으면 대답해야지.”

   “……주인님.”

   요모는 상을 줄게, 따위의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런 말을 모르는 걸까 아니면 이 정도로는 상을 줄 수 없다는걸까. 우타는 입술을 축였다. 반쯤 장난이라고 생각하며 임했던 우타도 이제는 꽤나 진지해졌다. 요모는 몸을 조금 틀어 우타가 침대 위로 올라올 자리를 내어주었다. 우타는 순순히 침대로 올라가 엎드렸다. 목줄에 달린 사슬이 절그럭거렸다. 우타는 뒷목이 약간 뻐근한가 싶기도 했다. 손을 쓸 수 없어 무릎과 어깨로 체중을 견뎌야하는 것이 조금 곤란했다. 우타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자신의 뒤에 있을 요모의 모습을 확인했다.

   요모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그 자리에 앉아있었다.

   “누가 멋대로 이러라고 했지?”

   우타는 대답할 수 없었다. 내가 그렇게 여유가 없었나? 우타는 머리를 굴렸다. 여유의 문제라기보다는 습관에 가까웠다. 우타는 삽입을 즐겼다. 서로가 이 정도로 달아올랐으면 응당 해야 하는 것이었다. 우타는 그런 면에서 애를 태우는 편은 아니었다. 지금까지 우타와 관계를 가져왔던 사람들은 모두 그랬다. 우타는 솔직히 삽입으로 누군가를 만족시키는 것이 자신있었다.

   손이 뒤로 묶여있어 몸을 들어올리기가 쉽지 않았다. 작게 끙, 소리를 내며 우타가 몸을 일으키려하는 순간, 요모는 손바닥으로 우타의 어깨를 꾹 눌러 그를 다시 엎드리도록 했다. 우타는 요모의 뜨거운 체온이 자신의 등 위로 드리우는 것을 느꼈다.

   “발정났나봐?”

   웃음기 하나 없는 목소리였다. 요모는 손끝으로 우타의 척추를 천천히 쓸었다. 손 다음으로는 입술이었다. 척추뼈 하나하나에 입을 맞추려는 듯, 요모는 정성을 들여 입술을 움직였다. 우타는 요모의 입술이 자신의 등에 닿을 때마다 작게 몸을 떨었다. 요모는 개의치 않고 우타의 손목을 핥다가 가볍게 깨물었다. 육식 동물의 어금니였다.

   요모는 우타의 몸을 일으켰다. 우타의 페니스는 잔뜩 달아올라 끝이 벌게져 있었다. 요모는 우타의 앞에 마주앉아 한 손으로는 물건을 그러쥐고 다른 손은 우타의 뺨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우타는 요모를 마주보았다. 언제나 깊이 잠겨있는 눈동자였다. 옛날에 우타는 그 눈동자에 빠져들 것 같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요모는 뺨을 쓰다듬던 손의 엄지를 우타의 입에 밀어넣었다.

   “, , 하아.”

   “빨아봐. 너 이런 거 잘하잖아.”

  “하아, , 하응!”

   “내 허락 없이 가면 안 되는 건 물론 알고 있지?”

   요모는 손바닥으로 우타의 귀두부분만 지분거리고 있었다. 그곳이 우타의 감각이 가장 예민한 곳이라는 건 숱한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우타는 거의 미칠 지경이었다. 새로운 자극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니 평소보다 온 몸이 더 예민해지는 것만 같았다. 그러면서도 우타는 속으로 지금까지 우타와 가졌던 관계에서 우타에게 했던 행동들을 조금 후회했다.

   그리고 이것은 이 날 우타의 가장 마지막 이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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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고안했음ㅜㅜ   #언제든 삭제 및 수정되어 다시 업로드 될 수 있는 글   #범죄장면있음(연쇄살인)   #가벼운 유혈묘사 있음

 

 

MYSTERY SECTION

~ 그리고 아무도 없는 화 ~

 

 

지영은 거울을 보며 바싹 올려묶은 자신의 머리를 정돈했다. 조금 있으면 지영이 전담해야 할 신입이 상사의 손에 이끌려 이 방에 들어올 것이다. 지영은 이런 비인기 부서에 배정받은 신입을 안타까워했다. 꼭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만 같았다. 처음으로 이 부서에 배치되었던 날, 지영은 자신이 무언가 잘못한 것이 있는지 곱씹어 봐야만 했다. 인사 담당자는 지영에게 유감이라는 말 밖에는 하지 않았다. 윗선에서 따로 내려온 지시였고, 그도 어찌할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그런 그에게서 뒤돌아서며 지영은 그가 자신을 비웃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열심히 일했는데. 바득바득 이를 갈면서도 지영은 새로운 부서에서 꾸준히 실적을 쌓아나갔다.

자신의 아래에 신입이 들어온다는 것은 그런 노력의 결과였다. 지영은 꼭 성공하고 말겠다고 다시 한 번 더 다짐하며 딱딱한 소파에 반듯이 앉았다. 지영이 이번 신입에 대해 아는 것을 별로 없었다. 지영은 어떤 사람이 오든지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일부러 다루기 어려운 신입을 보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영은 자신이 그런 것쯤에 굴할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미안, 늦었지.”

괜찮습니다. 별로 안 기다렸어요.”

머리를 어깨까지 길러 뒤로 느슨하게 묶은 남자가 문을 밀고 들어왔다. 지영의 상사 되는 사람이었고, 소위 말하는 별종인 사람이었다. 이 부서에 아주 만족하는,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였다. 그는 습관적으로 알이 굵은 안경을 중지로 밀어 올렸다. 지영은 그 뒤의 키가 작은 여자에게 시선을 주었다. 아주 짧게 자른 머리와 살짝 치켜 올라간 눈꼬리가 인상적인 사람이었다. 지영과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까딱, 움직였다.

서로 인사 하고. 난 나간다.”

지영과 그녀는 좁고 낡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있었다. 지영은 여자의 차림을 살폈다. 빳빳하게 다려진 흰 셔츠와 짙은 회색의 정장 바지였다. 물론 가벼워 보이는 재킷도 잊지 않았다. 신입은 신입이군. 지영은 숨을 내쉬었다. 지영은 세탁할 타이밍을 놓친 자신의 운동화를 잠깐 내려다보았다.

미스테리부의 김지영입니다.”

안녕하세요. 이번에 새로 들어오게 된 하 연이라고 합니다.”

두 사람은 딱딱한 악수를 나누었다. 그러고 곧 이어지는 것은 조용함이었다. 두 사람 다 말주변이 좋은 편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지영은 선배로서 어떤 말이라도 꺼내보아야 하지 않을까 고민했다. 연은 그저 그런 지영을 빤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연은 두 손을 가지런히 무릎 위에서 모으고 있었다.

저기, 여기서는 그렇게 정장 같은 거 안 입어도 괜찮아요.”

지영이 입을 열었다. 옷에 관한 얘기는 미리 해두는 것이 좋았다. 미스테리부는 일반 부서와는 성격이 달랐다. 다른 부서처럼 공직이라고는 하지만 그들의 뒤에 숨어 여러 일들을 처리하는 곳이었고, 때문에 책상 업무보다는 직접 현장에서 몸으로 부딪히는 일이 더욱 많았다. 미스테리부는 이름을 그대로 미스테리한 업무를 처리하는 곳이었다. 국가적 차원에서 사회에 혼란을 일으킬만한 일들을 처리한다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 비밀리에 활동하는 것은, 국민 정서 때문이라던가. 같은 공무원이라도 미스테리부의 존재를 모르는 경우도 많았다. 지영은 속으로 한숨을 쉬며 언제까지 이 부서가 국민 정서 운운하며 물밑에 잠겨 있을지 생각했다. 그렇게 계속 숨기니까 미스테리부로 발령받으면 아예 내쳐진 거라는 소문까지 돌지.

미스테리부가 뭐 하는 부서인지는 들었죠?”

, 들었습니다.”

연의 목소리에는 깊은 울림이 있었다. 연은 그 말을 하며 눈을 살짝 내리깔았다. 지영은 그것이 실망의 표시일 것으로 생각했다.

   미스테리부에 들었다는 것은 지금까지의 일상을 버린다는 것과 같은 말이었다. 미스테리부는 괴담에서부터 시작해서 오컬트적인 부분까지, 상식에서 벗어난 모든 일을 처리하는 곳이었다. 당연하게도 적응을 제대로 하는 사람보다는 그렇지 않은 사람이 더 많은 곳이었다. 지영 역시 이런 일에 익숙지는 않은 편이었다. 지영은 태어나서 귀신이라는 단어에는 한여름에 잠깐 반짝하고 지나가는 괴담으로밖에 얽히지 않은, 귀신보다는 낯선 사람이 더욱 무서운 그런 삶을 살고 있었다.

   “저희는 굳이 정장 같은 거 안 입어도 돼요. 제일 편하신 옷 입으시면 됩니다.”

   “이게 제일 편한 옷이라 입고 왔습니다.”

   “정장이요?”

   “. 정장은 입으면 안 됩니까?”

   연이 지연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당돌한 편일지도 모르겠다고, 그래서 더욱 다루기 까다로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지영은 속으로 작게 한숨을 쉬었다. 지영은 아직 연이 이 부서에 쉽게 적응할 수 있는 인간인지 아닌지 판단할 수가 없었다. 차라리 조금 더 난감해한다면 훨씬 더 다루기 편했을 텐데.

   “남에게 방해는 안 되도록 하겠습니다.”

   연의 눈빛은 지영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도록 했다. 제발. 지영은 속으로 간절히 빌었다. 제발 자신의 발목을 잡는 일은 없게 해 달라고.

 

미스테리부에서 인원을 뽑는 것은 단 한 가지의 이유였다. 인원이 부족할 때. 물론 대부분의 직장이 그럴 테지만, 미스테리부의 인원 부족은 주로 기존 인원의 이탈로부터 비롯되었다. 그 이탈이란 것에 업무로 인한 사고나 부서 변경으로 인한 이탈이 아니라 직장을 그만두는 것이 가장 많은 이유를 차지한다는 것이 특이하다면 특이한 점이었다.

사실 지영은 신입이 들어온다는 말을 듣고 부서 인원을 머릿속으로 세어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남아 있는 것은 그래도 이제는 꽤 일에 익숙해진 인원이어서 추가 인원 없이도 웬만한 일은 거뜬히 처리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전국적으로 폐가 탐험이 성행하는 시즌도 지나서 일 년 중 가장 비수기일 터였다. 그런데 이 시기에 왜 신입이? 지영은 또 무언가 험한 일 하나를 시키겠구나, 하고 맘을 먹고 있었다. 지영은 그것을 연에게 굳이 말해주지 않았다. 한 번 고생해봐라는 심정보다는 어떤 식으로 말을 꺼내야할지 판단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연은 지영이 지금까지 다루어보지 못했던 유형의 사람 중 하나였다.

그 뒤로도 연은 계속 정장을 입고 다녔다. 자연스레 부서 내에서 굉장히 튀는 사람이 되었지만 연은 그것을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부서 사람들도 저러다 곧 복장을 바꾸겠거니, 하고 말아버리는 눈치였다. 애초에 남에게 큰 신경을 쓰지 않는 사람들이 다수인 집단이었지만.

오늘 저녁에 시간 괜찮습니까?”

얼마 안 되는 비수기를 맘껏 누리느라 잔업도 없는 날이었다. 퇴근 준비를 하고 있는 지영에게 연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그때는 마침 지영이 첫인상에 연연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우치고 있던 때였다. 지영은 마냥 쌀쌀맞을 줄 알았던 연이 뜻밖에 사람을 잘 대하고 웃음도 많다는 사실을 보고 혼자 감정적 친밀감을 쌓아가고 있었다.

괜찮으시면술 한 잔 어떠신가 싶어서요.”

그 말을 하며 연은 살짝 시선을 시야 구석으로 돌렸다. 지영은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영은 술을 잘하지도, 좋아하지도 않는 편이었으나 술자리에서 얻을 수 있는 친밀감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편은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를 악물면서 술자리에 참여하던 지영도 연의 제안에는 선뜻 응했다.

지영은 자신의 첫 후배가 여자라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지영에게 있어 남자란 아직까지도 어쩐지 낯설고 불편한 존재였다. 그것이 단순히 지영이 여중 여고에 여초인 학과를 나왔기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존재하는지 지영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아마 남자 후배가 퇴근 후 개인적으로 술을 한잔하자는 제의를 했다면 그 술자리 내내 지영은 엷은 불안감을 느끼고 있어야만 했을 것이다.

 

지영과 연의 술자리는 조명이 어둡게 내려앉은 술집 귀퉁이에서 이루어졌다. 지영은 난생처음 맛보는 맥주를 맛보며 연과 함께 웃었다. 누군가와 단둘이 술을 먹는 것은 이번이 처음인 것 같다고, 지영은 연에게 말했다. 연은 그 상대가 자신이라는 것이 좋다고 했다.

그나저나 선배는 일이 힘들진 않으세요?”

연이 선배는, 이라고 말할 때 목소리가 살짝 떨리는 것을 지영은 놓치지 않았다. 평소라면 이것이 어떤 감정의 반응인지 파악하려고 지영은 머리를 굴리고 있었겠지만 이번만큼은 지영도 아직 그 호칭이 낯설겠거니, 하며 편하게 넘어갔다.

안 힘들다고는 못하지하지만 해야지, 어쩌겠어.”

선배 되게 열심히 일하는 것 같아요.”

나는성공하고 싶어. 그냥 공무원 하고 있지만, 그래도 좀 높은 자리까지 올라가 보고 싶기도 하고. , 내가 명예욕이 좀 있거든. 초등학생 때는 전교 회장 선거에도 출마했는데.”

어떻게 되셨어요?”

떨어졌지. 어쩔 수 없었어. 당시 교장이 여자가 전교 회장 되는 거 상상도 못 하던 사람이라서.”

지영은 쓰게 웃었다. 그 당시 집에 있던 싸구려 복합기에서 인쇄되던 흐린 빨강 파랑의 그림들이. 글씨만은 직접 쓰겠다며 검은색 플러스 펜으로 이름과 공약을 써서 명함을 만들어 학교 여기저기에 뿌리고 다녔던 것이 기억났다. 교장이 그런 사람인 걸 알았으면 좀 누가 말려주지. 그렇게까지 기대하지도, 열심히 하지도 말라고.

저는 선배가 성공하면 좋겠어요.”

잔을 내려놓은 연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지영은 입에 남은 술의 쓴맛을 꿀꺽 삼켜버리곤 연을 보고 마주 웃었다.

 

연은 행동이 빠른 편이었다. 자신의 판단에 혼자 주저하는 편은 아니었다. ‘될 대로 되라지의 좋은 경우가 아닐까? 지영은 연의 그런 모습이 조금 부럽고, 대단해 보이기도 했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지영은 자신이 짊어지고 있는 것들에 대해 생각을 하게 되었다. 막연한 두려움이었다. 지영은 자신은 연과는 다른 사람이라는 생각을 종종 하곤 했다.

연의 정장이 이제는 미스테리부에서도 더는 튀어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굳이 이 시기에 연이 새로 들어오게 된 이유가 밝혀졌다. 지영과 연의 앞에는 각각 책이 한 권씩 놓여 있었다. 책의 표지를 확인하거나 팔랑팔랑 책장을 넘겨보는 연과 달리 지영은 그저 눈짓으로 책의 제목만 확인한 후 자신의 상사를 바라보았다. 상사에 대한 예의 때문은 아니었다. 단지 지영이 이전에 그 책을 읽었고, 얼마 정도의 내용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추리소설이네요? 미스테리부라고 이런 책도 읽어야 합니까?”

지금 읽는 건 별 의미 없을 거고, 일 끝나고 한 번 읽어봐. 깜짝 놀랄걸.”

재밌나요?”

나도 안 읽어봐서 몰라.”

목소리를 몇 번 가다듬던 남자가 말을 이어갔다. 남자는 근처에 있는 파일로 손을 뻗어 몇 장의 종이를 꺼냈다. 종이를 찬찬히 읽어가던 지영은 어떤 사실을 깨닫고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자신이 기억하는 것과 전혀 다른 내용이었다. 심지어 범인마저도. 지영이 그 정도도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인상에 남지 않은 작품은 아니었다. 제법 추리소설을 좋아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지영이라 더욱 고개가 갸웃, 기울어졌다.

두 사람이 종이의 내용을 얼추 다 읽었다고 생각한 남자는 다시 입을 열었다. 책벌레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책벌레요?”

책벌레라고, 책등 틈에서 사는 작은 벌레가 있어. 그리고 걔들의 주식은 책의 내용. 책벌레가 책을 먹으면 책의 내용이 좀 희한하게 바뀌어.”

책을 많이 읽는다는 뜻의 책벌레와는 관련이 있습니까?”

책이라면 종류 불문하고 탐한다는 게 관련이 있으려나……. , 그쪽은 이번엔 별로 생각 안 해도 될 것 같고. 아무튼, 요새 책벌레 현상이 빈번하게 나타나는 것 같더라고. 가을이라 그런가.”

연은 조금 놀란 눈치였다. 연은 책의 중간을 펼쳐 책을 읽기 시작했다. 다섯 개째의 인디언 인형 머리가 없어졌고 두려움에 떠는 사람들 뒤에서 큰 소리를 내며 천둥이 쳤다는 부분이었다. 연은 아랫입술을 살짝 내밀고 빠르게 글자를 훑어나갔다. 아랫입술이 나오는 것은 연이 집중할 때 보이는 버릇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해결하면 되나요?”

책 속으로 들어가야지.”

?”

기술적 준비는 내일이면 끝나니까, 내일 바로 작업에 들어가도록 하지. 더 질문 있나?”

책 속엔 어떻게 들어갑니까?”

책에 눈을 박고 있던 연이 고개를 살짝 들고 의문을 표했다. 남자는 어깨를 한 번 으쓱했다.

내일이 돼보면 알겠지.”

연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건성으로 책장을 몇 장 넘기더니 책을 덮었다. 지금 당장 그것을 읽어봤자 별 소용은 없다는 것을 깨달은 눈치였다. 지영은 남자의 설명에 이해한 것처럼 보이는 연을 보고 당황스러웠다. 어떻게 저 설명을 가지고 이해를 할 수 있지. 지영은 저것도 연의 될 대로 되라지의 속성인지 짧게 고민하고 있었다.

 

* *

 

연의 짧은 머리가 바닷바람에 날리고 있었다. 지영은 괜히 연의 원피스 차림이 낯설었다. 그런데도 지영은 파란색이 연에게 아주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파란 원피스를 입은 연은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졌다. 그녀에게서는 그냥 그런 분위기가 풍겼다. 지금의 연은 정장을 입었을 때보다 더 아담해 보였다. 귀엽다, 는 인상을 주기 좋은 분위기였다. 그렇다고 지영이 연의 정장 차림을 싫어하는 것은 또 아니었다. 비교하자면, 지영은 원피스보다는 정장 쪽이 훨씬 좋았다. 귀여운 연도 좋지만, ‘각을 잡고 있는연의 분위기가 훨씬 더 좋았던 것이다.

지영과 연은 유람선을 타고 있었다. 이번 소설의 무대는 외딴 섬의 저택이었다. 의문의 저택 주인이 사람들을 초대하면서 생기는 일이었다. 당연하겠지만 저택 주인의 정체는 끝까지 나오지 않았다. 그것은 아마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두 사람의 존재는 책벌레를 통해 미리 조작해 놓은 정보였다. 지영과 연이 해야 할 일은 아직까지도 책 속에 들어있을 책벌레를 찾아 죽이는 것이었다. 책벌레는 책의 어느 장면에 아마 몸을 숨기고 있을 것이고, 이미 내용의 변형이 꽤 진행된 것으로 보아 벌레의 무리는 꽤 몸을 불리고 있을 것이었다. 유감이라면 무리가 커졌음에도 불구하고 개개의 크기가 너무 작아 그 무리를 발견하는데 딱히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다. 어쩌면 다수의 무리가 존재할 수도 있다는 말을 떠올린 지영이 사방으로 눈을 돌렸다.

바닷바람이 찬데, 얇게 입으시고 춥지는 않으십니까?”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지영과 연은 몸을 돌려 목소리의 상대를 바라보았다. 키가 큰 남자였다. 짙은 남색 정장에 자주색 넥타이를 입은 사내였다. 지영의 머릿속에 번뜩하고 지나가는 무언가가 있었다.

책벌레가 내용을 바꾸어놓지 않았더라면, 아마 이 사람은 곧 이 배에 탄 모든 사람을 죽여버렸을 것이다. 지영은 몸을 살짝 떨었다. 지영은 눈앞의 남자가 자신의 떨림을 단순히 추위로만 생각해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저는 메리고, 이쪽은 크리스틴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필립입니다.”

지영과 연은 가명을 쓰고 있었다. 크리스틴 쪽이 지영이었다. 연은 악수를 위해 손을 내밀었고 남자도 능숙하게 악수를 받아냈다. 지영은 연에게 그 남자와 친하게 지내는 것은 별로라고 말해줘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다른 사람들하곤 인사해 보셨습니까?”

아뇨. 처음 만난 사람이 필립 씨에요.”

이 기회에 만나보시겠습니까? 23일간은 같이 지낼 사람들이니까요.”

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남자의 뒤를 따랐다. 그들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갑판 아래의 방에 모여있었다. 단출한 인원이었다. 안락해 보이는 조명이 방을 은은하게 비추고 있었다. 필립은 지영과 연에게 방 안의 사람들을 소개했다. 긴 흑발을 느슨하게 묶고 붉은 리본으로 포인트를 준 짙은 녹색의 원피스를 입고 있는 쪽이 데이지였다. 밝은 금발 머리를 양 갈래로 묶고 무릎 위로 올라오는 원피스를 입은 쪽은 안나였다. 필립이 안나를 소개할 때 안나는 지영과 연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붙임성이 썩 좋은 모양이었다.

구석 쪽 의자에 파묻히듯 앉아있는 여자는 에밀리라고 했다. 아무래도 그녀는 배멀미를 하는지 컨디션이 그렇게 좋아 보이진 않았다. 땋아 내린 머리카락에서 비죽 튀어나온 잔머리가 식은땀이 붙어있는 그녀의 뺨에 몇 가닥 달라붙어 있었다. 지영은 모든 사람의 이름과 얼굴을 매칭시키기 위해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연은 소설 속 인물을 직접 만난다는 부분 때문에 조금 들떠있는 상태였다. 이런 소설이 아니라 조금 더 유쾌한 소설이었다면 어땠을까. 연은 예전에 인상 깊게 읽었던 책들을 되짚고 있었다. 하지만 딱히 만나고 싶은 인물은 없다는 생각이 든 순간 연의 흥미는 순식간에 식어버렸다. 혼자 들떠올랐다 식어버린 것이 민망한 듯 연은 배 이리저리를 둘러보았다. 책벌레 무리를 찾기 위한 행동이었다.

저 섬인가 봐요.”

창가에 앉아있었던 데이지가 가장 먼저 섬을 발견한 사람이 되었다. 그녀의 말에 컨디션이 좋지 않던 에밀리마저 몸을 쭉 빼어 창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자그마한 섬이었다. 저택보다 더 눈에 쉽게 띄는 것은 저택 주변의 울창한 숲이었다. 낙엽이 지기 직전의 계절이었지만 나무들을 푸름을 기운차게 내뿜고 있었다. 그런 숲에 안겨있는 모양새로 고풍스러운 저택이 자리하고 있었다.

저택에서 보는 광경이 멋있겠는데요.”

, 두근거려요. 저택 내부도 멋있겠죠.”

지영과 연 역시 두근거리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이런 문화를 이렇게 생생하게 접할 기회는 딱히 없었다. 어렸을 때는 저택이란 게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기도 했었는데, 이제야 어린 지영의 의문이 풀리고 있었다. 아마 저택 내부는 근사할 것이다. 샹들리에 같은 것도 있을 테고, 고급스러운 천으로 덮인 소파 같은 것들도 있을 것이다. 발소리를 완벽하게 죽여주는 붉은 카펫도 있을까? 지영은 어쩐지 여행을 온 기분이 되었다.

 

건물 내부는 생각했던 것보다 크고 넓었다. 복층 구조 덕분에 천장이 굉장히 높아 보였고, 그 정점에 샹들리에가 눈부시게 반짝이고 있었다. 마치 쏟아지기 직전의 별들을 그대로 붙여둔 것만 같았다. 복도를 장식하는 조각상이나 그림들은 없었지만 멀지 않은 거리를 두고 키 큰 관상용 꽃들이 복도의 좌우를 장식하고 있었다.

지영이 놀란 것 중 하나는 벽난로에서 정말로 타닥거리는 소리가 난다는 점이었다. 이 소리가 과장이 아니었다니! 괜히 들뜬 지영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낮은 채도의 가구들 덕분에 중후한 분위기가 연출되고 있는 홀이었다. 하지만 가구들을 자세히 보면 복잡한 무늬가 금색 실로 놓여있었다. 빛이 비치는 각도에 따라 실들이 묘하게 빛나고 있었다. 벽난로의 양옆에는 지영의 키보다 큰 흰 대리석 조각이 놓여있었다. 여성의 신체를 가지고 있는 조각상은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두 조각상의 손에 아름다운 얼굴과는 이질적인 긴 칼을 들고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주인님은 조금 있다가 오신다고 합니다.”

나이가 제법 있어 보이는 메이드가 허리를 꾸벅 숙였다. 그녀의 손에는 열쇠가 걸려있는 상자가 들려있었다. 메이드는 상자의 걸쇠를 열어 투과율이 좋은 유리로 되어있는 뚜껑을 열었다. 열쇠 위에는 자그마한 태그가 달려 있었다. 방 열쇠인 듯했다.

저녁 식사가 준비될 때까지 방에서 편히 쉬고 계시면 됩니다.”

지영과 연은 2층의 각각 끝 방을 배정받게 되었다. 지영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런 경우 보통 방이 아주 가까이 붙어 있는 경우가 많을 텐데. 지영은 문고리에 열쇠를 돌려 끼우려다 말고 멀리 연의 방이 있을 곳을 바라보았다. 연은 이미 방에 들어간 이후인지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단지 지영의 시선을 눈치챈 안나가 고개를 까딱 움직여 보였을 뿐이었다. 지영은 그녀의 묵례에 답하곤 방으로 들어섰다. 자신의 상사가 그렇게 간단한 처치를 빼먹을 사람인지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가지고 있었다.

방은 생각보다 소소했다. 지금까지 봐왔던 저택의 분위기가 너무 화려했기 때문에 침실마저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장식적이고 화려한 홀에 비해 침실은 실용적인 디자인으로 꾸며져 있었다. 채도가 낮은 카펫엔 자수 하나 없었다. 침대도, 침구도, 나무로 된 탁자도 장식이라곤 그다지 붙어있지 않은 것들이었다. 그러나 짐을 대충 구석에 밀어 넣고 침대에 걸터앉은 지영은 솔직히 놀랄 수밖에 없었다. 돈이란 건 정말 얕볼 수가 없다고 생각하며, 지영은 그대로 뒤로 드러누워 침대의 느낌을 맘껏 느꼈다.

좀 쉬었어?”

지영이 연을 찾아간 것은 저녁 식사가 시작되기 삼십 분 전이었다. 지영은 조금 뻗친 연의 머리를 보고 속으로 웃었다. 연도 생전 저런 느낌의 침대에선 자 본 적이 없는 거겠지. 연의 방은 지영의 방과 비슷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다른 것이 있다면 가구의 위치 정도였다. 연의 방의 지영의 방과 좌우대칭의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지영은 계단을 중심으로 왼쪽은 연의 방처럼, 오른쪽은 자신의 방처럼 설계되었으리라 생각했다.

어쩐 일이십니까?”

아까 배에서 너랑 얘기했던 남자 말이야.”

, 선배는 소설 읽어봤다고 하셨죠. 어떤 역할입니까?”

별건 아니고. 그땐 그 사람이 범인이었는데그래도 책의 내용이 바뀌었으니까 또 모르지 뭐.”

눈을 동그랗게 뜬 연을 보며 지영은 서둘러 뒤의 말을 덧붙였다. 그러나 연은 한숨을 살짝 쉬었다. 아무래도 조금 혼란스러운 모양이었다.

좋은 사람인 것처럼 보였는데……. 세상에 믿을 남자 없다는 말을 들었는데 맞는 말인 것 같습니다. 아무튼, 이제 식사하러 갈 때 되지 않았습니까?”

연은 곧 씩 웃어 보였다. 연은 사실 어렸을 때 이렇게 커다란 저택에서 먹는 음식이란 어떤 음식일지 궁금했었다고 말했다. 연은 간단하게 달린 주석들을 봐도 이해하기 힘든 음식이 있다는 사실이 당시 연에게는 아주 새로운 느낌을 주었었다고 했다. 하지만 상상하지도 못할 것들이라 연의 관심에 그렇게까지 오래 남아있었던 것들은 또 아니라고도 했다.

그래서 이런 생각 하면 저는 항상 카레가 먹고 싶더라구요.”

카레?”

카레는 만들어 놓고 한참 먹을 수 있으니까요. 어렸을 땐 맨날 카레만 먹어서 카레를 싫어했는데, 이렇게 되니 또 당기네요. 여기서 카레를 먹을 수는 없겠죠?”

일 끝나면 같이 먹자. 어려운 일도 아니니까.”

지영이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며 말했다. 곧 그들은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섰다. 방을 나서며 연이 셔츠 소매의 단추를 매만지는 것을 알아챘다. 긴장하는 것일까, 아니면 일에 집중하기 위한 자신만의 방법일까.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이제부터 그들의 일은 시작이었고, 그 일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이란 것을 두 사람은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다. 이곳의 추리 소설의 안이다. 그것도 대량의 살인 사건이 일어나는 소설의 안이었다. 이제는 모든 감각을 예민하게 만든 채 주위를 둘러보아야 할 때였다.

 

연은 성애화 되지 않은 메이드라는 것을 태어나서 처음 본다고, 지영에게 속삭였다. 지영 역시 연의 말에 동감했다. 이 저택의 메이드들은 흔히 메이드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보다 더욱 전문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이 사람들도 일종의 서비스직 직원이구나. 지영은 속으로 이들을 조금 동정했다. 이런 저택의 메이드로 일한다는 것이 대한민국의 편의점 아르바이트와 어느 정도로 비슷할지는 모르지만.

지영은 고개를 돌려 자신의 옆에 앉은 남자를 바라보았다. 하필이면 자리가 이렇게 정해지다니. 지영의 옆에는 예의 살인범, 필립이 앉아있었다. 지영은 소설에서 읽었던 시체들의 모습을 떠올렸다. 지영은 그런 장면을 즐기는 편은 아니었다. 도리어 영화 같은 것을 보다가도 그런 장면들이 나오면 눈살을 찌푸리거나 고개를 돌려버리는 타입에 더욱 가까웠다. 때문에 그 소설을 읽었을 때도 시체의 모습은 일부러 떠올리지 않았었다. 그러나 그 일의 원인이 되는 남자가 바로 옆에 있다고 생각하니 지영의 속이 메슥거리기 시작했다. 억지로 나이프로 썰고 있는 고기에 시선을 두었지만 식욕은 오히려 더 떨어졌을 뿐이었다.

식욕이 없으십니까?”

사실 배멀미를 좀 해서요. 아직도 몸이 안 좋나 봐요.”

지영은 거짓말을 하며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이 정도로 필립이 자신의 거짓말을 눈치챌 일은 없을 것이라 생각하면서. 지영은 필립에게서 벌써부터 피 냄새가 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오늘 밤에 파티가 있다던데요.”

아무래도 몸이 안 좋아서 저는 앉아만 있어야겠어요.”

아쉬운 일입니다.”

싱긋 미소를 지어 보이는 그의 모습에 지영은 가장 먼저 살해를 당했던 것이 자신과 비슷한 또래의 여성이라는 것을 떠올렸다. 지영은 도무지 필립을 따라 웃을 수도, 그와 대화를 나눌 수도 없었다. 필립도 그런 그녀의 심정을 눈치챘는지 더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지영은 그가 제발, 뱃멀미 때문에 그러는 것으로 생각해주었으면 했다. 지영은 식후 문을 잘 잠그고 자라고 연에게 충고를 해야겠다고 다짐하며 옆자리에 앉은 연을 넘겨보았다.

연의 왼쪽엔 안나가 앉아 있었다. 배에선 양 갈래로 묶어 산뜻한 느낌을 주었던 머리를 지금은 솜씨 좋게 틀어 올려 그때와는 다른 이미지를 보여주려 하고 있었다. 지영은 그녀가 수완이 좋은 아가씨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영과 눈이 마주친 안나가 살짝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어떻게 보면 책벌레라는 건 좋은 것 같습니다. 책 속에서만 가능하다고 해도, 이런 옷은 언제 입어보겠어요.”

지영의 허리끈을 조이며 연이 말했다. , 장난스레 지영이 낸 소리에 두 사람은 짧게 웃었다. 여기까지는 지영이 기억하는 것과 비슷한 궤도로 내용이 흘러가고 있었다. 그렇다는 말은, 곧 살인 사건이 시작된다는 말과 같았다.

어라?”

아래층으로 내려간 지영은 가장 먼저 벽난로 위부터 확인했다. 벽난로 위에는 여섯 개의 도자기 인형이 있었다. 고개를 갸웃하는 지영을 보며 연은 슬쩍 이유를 물었다. 지영이 그렇게 당황해하는 이유는 당연했다. 도자기 인형이라니? 책벌레라는 것이 벌써 이 소설의 근간이 되는 부분까지 침식했다는 말인가? 지영은 혹시 벌레의 무리가 있는지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딱히 눈에 띄는 것은 없었다.

저 인형의 수만큼 사람이 죽을 거야.”

그럼 저희도 포함인 거네요? 책 속에서 죽으면 어떻게 되나요?”

글쎄…….”

지영과 연은 벽난로에 가까이 다가가 인형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파란 드레스를 입은 여자 인형이 다섯, 검은 턱시도를 입은 남자 인형이 하나 있었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그들은 모두 얼굴이 지워진 상태였다. 하지만 어떤 인형이 누구를 대표하는가는 그렇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두 사람은 인형엔 어떠한 처리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솔직히 말해 연은 기분이 조금 찝찝했다. 이 사람들이 아무리 소설 속 인물이라고는 하지만 지금 이렇게 자신 앞에 살아 움직이고 있는데. 이 사람들의 죽음을 알면서도 그것을 방관하고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 연의 입맛을 나쁘게 했다. 연은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자신들을 제외하곤 이 인형에 시선을 두는 이는 딱히 없어 보였다.

준비가 좀 늦네. 그쵸?”

투덜거리듯 말하며 에밀리는 바로 근처에 있는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그 말은 딱히 누군가를 특정하고 향한 말은 아니어서, 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 말을 이어나갔다.

그러게요. 뭔가 일이 있는 것은 아닐까요?”

더 기다리긴 지치는데. 갑자기 손님 접대가 엉망이네요. 집주인이 누군진 몰라도 이렇게 되면 민망하겠어요.”

에밀리는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꼬며 말했다. 그 모습도 교양이 있는 모습이라고는 말하기 힘들지도 모르지만, 연은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연은 시계를 바라보았다. 예정된 시간보다 이십 분 정도 일정이 늦어지고 있었다. 행여 음식 같은 것이 늦어지더라도 메이드 중 누군가는 양해를 구하러 와야 할 시간이었다. 연은 저녁 식사 때 보았던 메이드들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들이 이 정도로 손님을 내버려 둘 것 같지는 않았다.

첫 번째 사건은 필립에 의해 밝혀졌다.

일이 어떻게 되었는지 대표로 물어보고 오겠다던 필립이 사색이 되어 뛰쳐 들어왔을 때, 지영과 연은 본능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 수 있었다. 필립은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메이드들이. 지영은 눈을 꼭 감았다. 그 뒤는 더 이상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지영은 불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지영의 기억이 확실하다면, 메이드들은 적어도 다음 날 아침까지는 살아있어야 할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첫 번째 피해자를 발견하는 것이 그들이니까. 이것은 완전히 새로운 사건이었다.

가보죠.”

먼저 앞선 것은 연이었다. 연은 지영의 손을 잡았다. 지영은 연의 손 역시 차갑고 축축하다고 생각했다. 지영은 이 일이 연이 미스테리부에 들어온 후 첫 번째로 맡은 일이었다는 것을 문득 깨달았다. 지영은 연의 손을 한 번 꽉 맞잡았다. 자신은 연의 선배였고, 때문에 모범을 보여야 하는 것이 맞았다. 지영은 연보다 한 발 더 먼저 발을 내딛었다.

주방의 모습은 끔찍했다. 지영은 도무지 그 광경까지는 볼 수 없어 연의 이야기를 듣기만 했다. 연의 말에 따르면 주방은 거의 피바다였다고 했다. 뭔지 모를 국물들이 냄비에서 끓어 넘치고 있었다. 홀로 나갈 준비가 끝난 음식들이 접시 위에서 장식된 채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그것은 그곳에 있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연의 얼굴이 창백하게 굳어있었다.

선배가 읽었던 소설도, 이랬나요?”

연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지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찌 되었든 이제부터 이런 광경을 몇 번은 더 봐야 할 것이라고, 지영은 말했다. 이 일이 끝나고 나서도, 연은 계속 예전처럼 일할 수 있을까? 그것은 지영도 마찬가지였다. 나름대로 미스테리부의 일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한 지영이었지만 시체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미디어에서 보여지는 시체라는 것은 너무 얄팍한 것들이라고 지영은 생각했다.

사람들은 모두 홀에 모여 있었다. 안나는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린 채 훌쩍이고 있었다. 두려움 때문일까, 아니면 죽은 사람에 대한 애도일까? 데이지는 그런 안나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그녀를 위로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 역시 컨디션이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에밀리와 필립은 지영과 연의 근처에서 집주인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고 있었다. 필립의 입에서 집주인을 향한 욕이 튀어나왔다.

나는 내일 당장 이 집을 떠야겠어.”

배가 없을 텐데요.”

연의 말을 듣고 에밀리는 몸을 가볍게 떨었다. 이 섬 밖으로 연락할 수 있는 수단은 없었다. 삼 일 뒤에 배가 온다는 사실을 지금 같은 상황에서 그들은 믿을 수 있는가? 집주인이 누군지도 모르는 이 상황에서? 에밀리 역시 그것을 깨달은 것처럼 보였다.

아무튼!”

그녀는 몸을 휙 돌려 계단을 올랐다. 그것을 시작으로 홀에 있던 사람들도 한둘 이 층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홀에 지영과 연 두 사람밖에 남지 않게 되자 두 사람은 구석구석을 살펴보았다. 책벌레는 보이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필립을 조사해보는 건 의미 없겠죠?”

그 사람도 정말 당황한 것처럼 보였는데.”

그럼 역시, 다른 범인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겠지.”

짙은 붉은색 쿠션을 소파 위로 던지며 지영이 말했다. 지영은 추리를 하는 것엔 별로 자신이 없었다. 이 사건이 해결되기 전에 책벌레 무리를 찾을 수 있을까? 앞이 깜깜했다. 괜히 저택 여기저기를 들쑤시고 다니느라 다른 사람의 의심을 사는 일만 없으면 좋겠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지영과 연은 함께 밤을 보냈다. 그들이라고 편히 잠을 잔 것은 아니었다. 두 사람 다 밤새 잠을 뒤척이면서도 대화를 나누는 일은 없었다. 살인 사건이 일어날 것임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단순히 머릿속으로 알고 있는 것과 그 사건의 당사자가 되는 것은 분명히 달랐다. 멀리서 동이 트기 시작한 시간이 돼서야 지영은 짧은 잠에 들었다. 옅은 잠에 들었다가 깨어났을 때 눈에 보이는 것은 연이었다.

   “푹 주무셨습니까?”

   “연이는안 잤어?”

   “잠이 안 와요. 그리고 원래 밤은 잘 샙니다.”

   두 사람은 몸을 일으켰다. 아직도 근육이 딱딱하게 굳어있는 것 같다고 지영은 생각했다. 연은 고개를 좌우로 까딱꺼려 뭉친 어깨를 풀어보려 하고 있었지만 잘 되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지영은 연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가볍게 안마라도 해줄 목적이었다.

   “간지러워요!”

   연은 몸을 꿈틀, 움직이면서도 킥킥대며 웃었다. 그들은 잠시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지영과 연은 동시에 긴 숨을 내뱉었다. 그러고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제 일 해야지요.”

   “별로 안 하고 싶은데.”

   “어쩌겠어요. 월급 받으려면 해야죠. 선배 저 방 가서 준비하고 올게요. 좀 있다 계단 앞에서 만나요.”

지영은 문을 나서는 연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며 조심하라는 말을 덧붙였다. 문이 닫힌 후 지영은 길게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바다는 잔잔했다. 바닷바람에 간간이 파도가 쳤지만 배가 뜨지 못할 정도의 날씨는 분명 아니었다. 하늘도 맑았다. 외부로 연락만 할 수 있다면 탈출하는 것은 무리도 아닐 것 같았다.

외부로 연락만 할 수 있다면.

지영은 생각을 접고 몸을 씻기 시작했다. 연의 말대로 이젠 정말 일을 해야 할 때였다. 빨리 책벌레 무리를 발견해서 이 일을 끝내고 싶었다. 그러고 다시 현실로 돌아가서 좀 쉬고 싶었다. 아무리 좋은 침대라도 이런 상황에 그 감촉을 제대로 느낄 수 있을 리는 없었다. 자신의 방에 있는 싸구려 침대에 눕는 것이 피로 회복에 훨씬 더 도움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지영과 연은 계단 아래가 소란스럽다고 생각했다. 불길한 감각이었다. 연이 홀로 뛰어 내려갔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필립의 얼굴이었다.

두 분은 괜찮으십니까.”

그렇다는 건.”

에밀리가.”

필립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당장 시체는 보이지 않았다. 지영은 벽난로 위로 시선을 옮겼다. 당연하게도 여자 인형 하나가 손상되어 있었다. 도자기 인형의 머리는 분리되어 인형의 앞에 놓여 있었다. 절단면은 깔끔했다. 필립이 곧 지영의 시선에 따라붙었다. 그는 그 도자기 인형을 이번에 처음 보는 것 같았다.

우연은 아니겠지요?”

아마도.”

지영의 대답에 필립은 남자 인형을 손에 들었다. 마치 그 인형이 없으면 자신은 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필립은 그녀가 방에서 목이 졸린 채 발견되었다고 말했다. 첫 발견자는 이번에도 그였다. 지영은 그의 얼굴이 눈에 띄게 어두워진 것을 알아챘다. 그도 심정적으로 괴롭긴 할 것이었다.

연은 시체를 확인하고 오겠다고 이 층으로 다시 올라갔다. 지영은 혹시 누군가 더 빠진 사람이 없는지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신을 포함해서 세 명밖에 없었다. 한 명이 더 있어야 할 텐데?

안나가 없었다.

안나는요?”

아침 내내 못 봤습니다. 방엔 없었어요.”

두 사람은 저택 여기저기를 뛰어다녔다. 지영은 그렇게 경계하던 필립에게 감정적으로 친밀감을 느끼고 있는 자신이 조금 낯설었다. 지금 자신에게 있어 필립은 살아나가고자 하는 인물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책벌레로 바뀐 책 속의 세상에서, 이 사람이 단순히 살인을 위해 살인을 했던 사람이었는지 아니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미 그의 캐릭터는 바뀌어 있었다.

가을 햇살이 쨍했다. 아침보다는 바람이 조금 더 강하게 불고 있었다. 그들은 저택 주변을 한 바퀴 돌아보았지만 그다지 수확은 없었다. 저택 바깥에서 더 찾아볼 수 있는 곳이라고는 숲 정도밖에 없었다. 앞으로 이틀만 더 버티면 배가 온다고 했다. 버티려면 방에서 문을 잠그고 틀어박히는 것이 숲으로 가는 것보다 훨씬 더 나은 선택이었다. 그녀가 그 정도 판단을 못 할 사람은 아니었다. 결국 두 사람은 안나의 흔적을 찾지 못한 채 저택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죽을 때 저항은 없어 보였습니다. 아마 약 같은 걸로 푹 재우지 않았을까요.”

지영과 연은 홀에서 에밀리의 시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지영은 벽난로를 바라보았다. 아직 파손된 인형은 에밀리의 것 하나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버렸기에 홀에는 두 사람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남은 사람들 모두 오늘 아무것도 입에 대지 않았으나 아무도 식사를 찾지는 않았다. 입맛이 떨어진 것도 이유였지만, 음식을 찾으려면 메이드들의 시체 사이에서 음식물을 찾는 수밖에 없었다.

끈은?”

드레스의 끈을 이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고생했어. 너도 이런 일에 낯설 텐데.”

선배보다는 괜찮으니까요. 그나저나 안나는, 결국 못 찾았습니까?”

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그녀는 살아있다는 뜻이었다. 그녀는 과연 어디에서 뭘하고 있는걸까? 그녀의 행동은 사람들에게 불안감을 불러오고 있었다. 그녀가 범인이 아닐까, 하는 불안이었다. 지영은 안나의 모습을 떠올려보았다.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소공녀의 이미지에 아주 가까운 인물이었다. 그녀는 아마 여자치고는 키가 큰 편에 속했다. 잘 모르긴 모르지만, 이 정도 시대에서는 그녀의 키가 흠으로 작용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지만 이때가 아무리 여자에게 가혹한 기준이 가해지는 시대라고 할지라도 그녀는 그녀의 아주 작은 단점 정도는 쉽게 덮을 수 있을 정도로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지영은 그녀의 가는 손목과 목을 떠올렸다. 그런 그녀가 그런 끔찍한 범죄를 저지를 수 있을까? 범죄자라는 것이 외형으로 판단할 순 없다고 하지만……. 지영은 안나가 그 가는 손목으로 사람의 목을 조르는 것을 상상해보았다. 소름이 안 돋지는 않지만. 지영은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별로 자신은 없었다.

안나 씨요? 선배, 처음 여기 왔을 때 항구 모습 기억나십니까?”

아니, ? 배라도 있었어?”

연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무언가를 확신하고 있었다. 지영은 연의 눈빛을 읽고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지만 지영의 마음속에서는 그녀과 과연 배를 운전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이 일고 있었다.

연의 예상대로 항구는 텅 비어있었다. 배를 묶고 있던 밧줄이 잘린 흔적도 없었다 어쨌든 그녀는 배를 타고 떠난 것이었다. 지영은 그것이 자의이기만을 바랐다.

안나 아버지가 해상과 관련된 일을 하신대요.”

그렇다고 안나가 배를 운전할 수 있는진 모르잖아. 이 시대에서는,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더 높지 않을까?”

일단은 믿어봐요, 우리.”

연이 지영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정말로 안나가 떠난 것이라면, 그들은 예정된 일정보다 더 빨리 이 섬을 탈출할 수 있을 것이었다. 두 사람은 그 사실로 기운을 차린 후 책벌레를 찾기 위해 섬을 한 바퀴 돌아보았다. 웬만큼 큰 무리가 있지 않은 이상 이 정도로 이야기가 바뀌진 않을 텐데. 지영은 그 사실이 자꾸만 걸렸다. 결국 그날도 그들은 책벌레를 찾는 것에 실패했다.

 

배가 와야 할 날짜가 되었는데도 배는 도착하지 않았다. 범인도 그동안은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도리어 그것이 생존자들의 피를 더욱 말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서로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데이지가 연을 범인으로 의심하는 바람에 그 두 사람의 사이는 거의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거기다 배까지 제때 도착하지 않으니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그날 저녁은 홀에 모인 사람 중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변화를 가장 먼저 알아챈 것은 의외로 신경과민 증세를 보이고 있던 데이지였다.

여자 인형 하나의 목이 없어져있었다. 데이지의 짧은 비명을 뒤로하고 지영과 연은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눈빛에서 서로의 생각이 똑같음을 그들은 읽어낼 수 있었다. 그들은 급히 발을 옮겼다. 어디로 가느냐고 소리 높여 그들을 부르던 필립도 곧 그들의 뒤를 따랐다. 항구에는 배 한 척이 돌아와 있었다. 표면에 자잘한 상처가 많은 작은 보트였다. 지영은 무심코 보트의 안을 보았다가 급히 고개를 돌렸다. 속에서 신물이 올라왔다.

목이 없는 시체는 이미 부패가 제법 진행된 이후였다. 이것이 안나라는 것은 옷을 통해 알 수 있었다. 그녀가 마지막까지 입고 있었던 옷은 엉망이 된 상태였다. 그녀의 소매 끝이 검게 물들어 있었다. 손톱도 몇 개인가 빠진 것처럼 보였다. 머리의 행방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지영은 이 시체가 바다를 헤매다 우연히 다시 이 항구로 돌아왔으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것은 분명 의도된 것이었다. 엄청난 악취미였다. 이제 와서야 인형을 부순 것도 그랬다. 배는 돌아왔지만 셋 중 어느 누구도 그것을 타고 나갈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들에게 이것은 경고처럼 느껴졌다. 책의 안에서 죽으면 어떻게 되나? 그 생각만이 지영의 머릿속을 채웠다. 만약 현실로 돌아가지 못한다면. 지영은 곁눈 길로 연을 바라보았다. 연은 입을 앙다문 채 먼 바다를 보고 있었다.

그때, 길고 날카로운 비명이 무거운 공기를 발기발기 찢었다. 데이지! 세 사람은 몸을 돌려 저택을 향해 달렸다. 흙투성이 발이 홀에 도착했을 때 데이지는 자신의 배를 끌어안고 있었다. 안 돼. 가느다란 목소리가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비록 뒷모습이었지만 지영은 그녀가 무엇을 주워 담기 위해 애쓰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지영은 결국 몸을 돌리고 바닥에 위액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지영은 데이지가 쓰러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 순간 지영의 눈앞이 어두워졌다. 사람이 너무 충격을 받으면 잠깐 앞도 안 보이게 되나? 입안에 고여있는 신 침의 맛을 느끼면서도 지영은 그렇게 생각했다. 지영이 구부리고 있던 허리를 곧게 편 순간 지영의 시야가 크게 흔들렸다. 아직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지 않은 상태임에도 그것은 또렷하게 느낄 수 있었다. 뒤통수가 얼얼하다고 생각한 그 순간 누군가 지영의 뒤통수를 다시 가격했다. 지영은 연의 목소리가 아주 멀리서 들리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지영은 자신의 입술이 바짝 말라있는 것을 느꼈다. 아직은 눈이 좀 흐렸다. 눈이 좀 따끔거리는 것도 같았다. 연은 지영이 제정신을 차릴 때까지 손을 잡아주며 기다렸다. 연은 지영에게 말해야만 하는 것이 있었다.

사건은 끝났습니다.”

지영이 목을 축이고 난 이후에 연이 입을 열었다. 연의 말을 듣는 순간 지영은 다시 목이 타는 것 같았다. 물은 한 모금 더 마시면서 살핀 연의 표정은 어둡기만 했다. 아무래도 원하던대로 사건이 끝난 것 같지는 않았다. 지영은 마음의 준비를 했다.

선배가 일어나면당장 데리고 돌아가라고 했습니다. 배를 준비해두었다고. 그리고 현실로 돌아가서…….”

뭐라고?”

지영의 목소리가 뒤집어졌다. 연은 지영의 시선을 피했다.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고…….”

얼굴은?”

못 봤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냐. 네 잘못은 아니니까.”

잘못은 온전히 범인의 것이었다. 일단은 돌아가자. 지영은 연의 어깨를 감싸쥐었다. 그들은 가지고 온 짐을 그대로 두고 방을 나섰다. 지영은 층계참에서 남자 인형 하나가 박살 나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필립의 시체는 계단 바로 아래에 있었다. 수많은 상처보다도 눈도 제대로 감지 못한 얼굴이 지영의 눈에 먼저 들어왔다. 지영은 고개를 돌렸다.

그들이 섬에 들어올 때 타고 왔던 것과 같은 여객선이 항구에 있었다. 이 섬에 들어올 때 두 사람이 서 있었던 갑판에는 두 개의 도자기 인형이 나란히 누워있었다. 연은 인형을 바다로 던져버렸다.

 

* *

 

괜찮아. 상황 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한 우리 잘못인걸.”

남자의 눈썹은 아래로 축 쳐져 있었다 책은 리콜 처리가 되었다. 지영과 연이 현실로 돌아온 이후 책의 모든 내용이 소멸되어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영과 연은 사건 이후 일주일 동안의 휴가 동안 서로에게 거의 연락하지 않았다. 연이 지영에게 전화를 건 것은 두 사람의 휴가 마지막 날 새벽이었다. 그들은 전화를 하면서도 사건에 대한 말은 하지 않았다. 그저 서로의 안부 인사를 나누고 전화를 끊었을 뿐이었다.

아마 연쇄성이 있는 사건이겠지.”

남자는 특별반이 편성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특별반의 구성원은 거의 정해졌으며, 남은 것은 지영과 연의 선택뿐이라고 말했다.

두 사람이 원한다면 다른 부서로 보내줄 수 있는 것으로 결정되었어. 전적으로 우리 책임이니 그에 따른 불이익은 없을 거다.”

저는 계속할 겁니다.”

남자의 말이 끝나자마자 연이 대답했다. 남자는 의외라는 듯 눈을 뜨고 그 이유를 물었다.

사실안 무서운 건 아닙니다. 근데, 이렇게 끝내는 건 뒷맛이 너무 나빠서요. 저희가 속수무책을 당했던 것은 아무 정보도 없이 부딪혔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특별반까지 편성된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봐요.”

지영이는?”

저는.”

지영은 말끝을 흐리며 연을 바라보았다. 사실 지영은 휴가 기간 동안 위쪽에서 이 사건에 대한 대책을 세우리라는 것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다. 그것이 특별반 정도의 규모일줄은 생각지도 못했지만. 거기다 이 지긋지긋한 미스테리부를 빠져나갈 수 있는 기회라니. 지영에게 있어서 지금 이 기회는 미스테리부를 빠져나갈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임은 확실했다.

저도 할게요.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지영은 연을 바라보았다. 지영과 눈이 마주치자 연은 살짝 웃어 보였다.

이번 건만 해결하고 빠지겠습니다. 제 커리어에 오점 하나 남기고 싶지 않아서 하는 거니까요. 판은 벌인 사람이 치워야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말을 끝내고 지영이 긴 숨을 내쉬었다. 그래, 이렇게 되면 되는 것이다. 커리어 문제는 사실 핑계에 불과했다. 여기에 있는 모두 다 그것을 눈치 채고 있을 것이었다. 일주일 동안 지영은 사건에서 멀어지고 싶은 욕구와 조금 더 파헤치고 싶은 욕구를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지영은 범인이 지영과 연에 관심을 두고 있다고 느꼈다. 그렇다면 그것에 보답을 해줘야 하는 것이 지영의 성격이었다.

그럴 것 같아서 위에는 이미 한다고 말해뒀어.”

남자는 무심하게 말을 뱉곤 가방에서 서류 뭉치를 꺼내 두 사람에게 내밀었다. 특별반에 관련된 서류였다. 한동안 고생 좀 하겠네. 지영은 그것이 비꼼의 의미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지영이 씩 웃어 보였다.

이번 일 해결하고 다른 부서로 옮겨서 성공할 겁니다.”

네네, 그건 그때 가서 알아서 하시구요.”

   지영은 이 선택의 결과가 어떻든 후회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지영과 연은 서로를 마주보았다. 사실 지영은 아직 모든 것이 막막했다. 특별반이 있다 해도 아무 소용없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사건은 이미 벌어졌다. 그리고 그것은 지영과 연 두 사람을 애타게 부르고 있었다.

   “선배, 이따 술 마시러 갈래요? 그때 그 술집요.”

   “좋지. 이번엔 네가 사라.”

   “저는 선배가 다른 부서로 갈 줄 알았습니다.”

   “나도 그랬어.”

   “그래도 선배가 같이 있어서 든든해요.”

   지영은 연의 머리를 장난스럽게 쓰다듬었다. 연이 이 정도 접촉을 허용할까 조금 긴장하기도 했지만, 사람 좋게 웃어 보이는 연의 표정을 보고 지영 역시 마음이 좀 풀렸다. 지영은 여유가 좀 있을 때 연과 좋은 추억을 쌓아야겠다고 결심했다. 퇴근 이후에 함께 갈 술집은 그것의 시작이 될 것이었다.

 

*

 

   너무 좋은 말을 많이 들었지만 아직 퇴고 손대지 못한 글......ㅜㅜㅜㅜ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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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타요모

 

연기

 

   섹스를 하고나면 우타는 꼭 담배를 한 대씩 태웠다. 꼭 한 대였다. 그동안 요모는 천장을 보고 누워 새된 숨을 쉬었다. 가끔씩 우타는 렌지, 하고 공연히 요모를 불러보기도 했다. 부르는데 이유는 딱히 없었다. 그냥 부르고 싶었기 때문에 불렀다고, 항상 그렇게 우타는 답했다. 담배를 끄고 나면 그들을 한 차례 더 관계를 가졌다. 평균적으로 그들은 두세 번의 섹스를 했다. 주로 요모 쪽이 지쳐 떨어졌다. 마지막 섹스를 하고난 뒤엔 우타는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에프터는 딱히 없는 관계였고, 둘 다 그것에 별다른 불만을 갖지 않았다. 가끔 둘 중 하나가 껴안기를 요구하면 다른 쪽이 땀으로 미끈해진 그의 어깨를 힘을 주어 안기도 했다. 잠을 잘 때는 각자 편한 자세로 잤다. 우타는 왼쪽으로 돌아눕는 것을 선호했고 요모는 천장을 보고 자는 것을 선호했다. 결국엔 우타가 요모에게 등을 돌리는 모습이 되는데, 그럼에도 그 둘은 서로의 위치를 바꿀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그런 관계를 유지하며 함께하고 있었다. 퍽퍽한 동거 생활이었다.

   그 두 남자는 편리성 때문에 집을 합쳤다. 실제로 그들의 삶의 질은 그들이 각자 생활을 하며 가끔 만나 섹스를 할 때보다 훨씬 더 높아졌다. 그들은 서로의 삶에 그다지 간섭하지 않으며 지냈고 이전보다 더 많은 섹스를 했다. 굳이 달라진 것을 찾자면 이제는 그들이 함께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는 것뿐이었다.

   우타는 자신과 식사 패턴을 맞추기 위해 이 주간 식사를 미룬 요모를 바라보며, 구울에게 있어서 식사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했다. 구울에게 있어서 식사란 중요한 과정이었다. 그들에게 식욕이란 축복이면서 동시에 저주였다. 그러고 보니 요모는 더는 인간 사냥을 하지 않는다던가? 하지만 요모는 사냥을 하는 우타를 딱히 탓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식탁 식탁이라고 했지만, 그것은 인간들이 사용하는 식탁이라는 기물보다는 단순히 인간을 먹기 위한 공간에 더 가까웠다. 에 각자가 준비해온 인간을 두고는 자기의 식사 속도에 맞춰 인간을 먹었다. 식기가 부딪히는 소리는 그곳에 없었다.

   식사 속도는 우타 쪽이 더 빨랐다. 제 몫의 식사를 마치고도 우타는 요모를 기다렸다. 자리에 앉아 요모가 인간의 살을 뜯어 삼키는 것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요모에겐 말하지 않았지만, 우타는 요모의 식사 모습을 상상하며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그 결과물이 우타의 작업대 바로 위의 가면이었다.

   “잘 먹었습니다.”

   식후 감사 인사를 빼먹지 않는 구울은 드물지 않을까 하고, 우타는 항상 생각했다.

 

   요모는 집에 붙어 있기 보다는 외출하는 일이 더 많은 편이었다. 낮 시간에 우타는 주로 가게에 가 있었고 때문에 그들은 같이 살면서도 얼굴을 마주할 시간이 적었다. 어차피 섹스 프렌드니까. 요모는 가끔 잠이 오지 않을 때, 우타의 뒤통수를 바라보곤 했다. 자신은 우타를 사랑하는가? 확실히 우타와의 섹스는 좋았다. 우타와 자신은 합이 잘 맞는 관계였고 요모는 그런 쾌락이 이제는 즐거웠다. 그러나 그것 외에 그들의 관계에 무언가 다른 것이 존재하는가?

   그런 생각을 한 이후부터 요모는 커플들을 유심히 관찰하곤 했다. 그들은 왜 그렇게 즐거워 보이는지, 그들 사이의 관계는 도대체 무엇으로 유지되고 있는지, 요모는 알 수 없었다. 그것은 인간과 구울의 차이일 것이라고, 요모는 자신을 달랬다.

   동거 이후 요모의 첫 휴일에 요모는 처음으로 침대에 혼자 누워본 적이 있었다. 한낮의 햇볕이 불투명한 창문을 통해 조각나 떨어졌다. 요모는 이불에서 우타의 냄새를 찾았다. 몇 번이나 크게 숨을 들이쉬어 봤지만 요모는 우타 냄새랄 것을 찾지 못했다. 소설이란 것은 너무도 쉽게 거짓말을 한다고, 요모는 생각했다.

   요모의 이사 후 첫 번째 자위는 건조하게 이어졌다.

 

   요모는 언젠가 처음으로 우타를 바라보고 잠에 든 적이 있었다. 우타 쪽으로 몸을 틀어 누워선 가볍게 오르락내리락하는 우타의 어깨를 바라보았다. 입이라도 살짝 맞춰볼까 하다가 그만두었던 날이었다. 우리가 애인도 아닌데 무슨. 그렇지만 요모는 자세를 고치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자신을 바라보고 누워있는 우타를 보았을 때 요모는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바로 그 침대에서 혼자 처음 자위를 했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구울의 체취에는 철분 냄새가 미묘하게 섞여있기 마련이었다. 죽음과 가까이 하는 생물이기 때문이라고, 요모는 늘 생각했다. 그 냄새는 인간의 피 냄새와는 조금 달랐다. 인간 쪽이 달착지근한 느낌을 준다면, 구울의 몸에서 나는 냄새는 거무튀튀한 느낌에 더 가까웠다.

   요모는 자신을 바라보고 누워있는 우타의 어깨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우타의 냄새는 거무튀튀하다기 보다는 달착지근한 것에 더 가까웠다. 식사를 한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라고, 요모는 자신을 달랬다. 어쩌면 섹스라는 자극 때문에 잠시 코가 비뚤어져 버린 것일지도. 어느 쪽이던, 요모 자신과 우타가 섹스의 쾌감이라는 얄팍한 것으로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분명했다.

 

   우타는 담배를 한 대 더 태웠다. 자신은 아직 두 번 정도는 더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렌지는? 우타는 흘긋 요모를 바라보았다. 웬일로 몸을 일으켜 우타를 바라보고 있었다. 요모가 손을 내밀었다. 담배? 우타의 물음에 요모가 고개를 끄덕였다.

   웬일이람. 우타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선선히 담배를 건넸다. 담배 한 개비를 꺼내는 요모의 손이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우타는 요모에게 직접 불을 붙여주었다. 담배 연기가 요모에게 훅 끼쳤다. 두 사람은 조용히 담배만 태우고 있었다.

   “우타.”

   우타가 필터 부근까지 담배를 태우며 한 대 더 태울까 말까 고민을 하던 차였다. 우타는 대답 없이 요모를 바라보았다. 요모의 손에 들린 담배에 재가 아슬아슬하게 붙어있었다.

   “한 번 더 할까.”

   “오늘 무슨 날이야?”

   요모는 고개를 저었다. 우타가 내민 재떨이에 재를 털어버리고 고작 반 밖에 피우지 않은 담배를 꺼버렸다. 그냥. 그 말을 하고 요모는 길게 숨을 뱉어냈다.

   마침 담배나 섹스가 고프던 차였다고, 우타는 생각하며 요모를 안았다. 우타의 혀에선 아직 연기맛이 났다. 요모는 살짝 눈을 떠 우타를 바라보았다. 어쩐지 쿵, 심장이 뛰었지만 요모는 다시 눈을 감았다. 우타의 허리를 껴안으며 그에게 좀 더 달라붙었다. 두 명 분의 연기맛은 생각보다 금방 사라졌다. 요모는 이정도면 충분하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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